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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메이 아줌마 (반양장) 사계절 1318 문고 13
신시아 라일런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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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을 때 누군가가 등짝이라도 두둘겨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뺨을 맞기엔 좀 심하다 싶고 등짝이라도 세게 누군가가 두들겨 준다면 그걸 핑계로 그냥 펑펑 울어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요즘 생각하는 주제중 하나인데

감정이라는 것에 사람들이 참 서툴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쩌면 나만의 문제일지 모르겠지만 내 감정을 직면하고 느끼고 알아가는 일이 참 힘들다

기쁘다, 너무너무 좋다 어쩔 줄 모르겠다,

이런 감정을 내보이는 건 너무 건방지고 오만한거 같아서 되도록이면 누르고 싶다,

슬프다, 그냥 펑펑 울고 싶다

이건 쪽팔리니까 힘들고 누군가 내 속에서 징징대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거 같아 쉽게 내색하기 힘들다

화가 난다, 뭐든 때려부수고 싶고 아무에게나 소리치고 싶다, 내가 폭발해버릴 거 같다

이런 건 사회악이 될까봐 내가 쫀쫀하고 못난 놈이 될까봐 함부로 듣러내기 위험하다

한없이 우울하다 땅을 파고 그 속으로 꺼지고 싶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 것도 먹기 싫고 하기 싫다,

이건 때때로 드러내지만 그렇다고 온전하고 푹 빠지는 건 늘 시간에 쫒기는 일상탓에 힘들다

그렇게 감정을 온전하게 드러내고 마주하는 건 쉽지 않다,

 

특히 슬픔이 닥쳤을 때 그 슬픔을 드러내는 방식은 제각각 다르지만 어쩌면 모두가 억제하고 누르며 그냥 살아가는 게 아닐까?

어떻게 보면 그 상황은 메이 아줌마의 장례식부다 더 장례식답고 푸근했다, 일단 장례식을 직업으로 삼은 장의사나 목사같은 외부인들이 오면 사람들의 슬픔마저 어떤 틀에 맞춰야 한다, 마치 극장에 들어갈 때 누구나 줄을 서는 것처럼 또는 병원에 가서 앉아 있는 것처럼.

메이 아줌마가 돌아가셨을 때 아저씨와 나는 그저 트레일러안에서 서로를 부둥켜 안고 몇날 며칠이고 엉엉 울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짬도 없었다, 사람들은 결혼을 하거나 교회에 다니거나 아이를 키울 때와 마찬가지로 친척이 죽어서 슬픔에 잠기는 시간도 정해진 틀에 따리기를 바란다, 메이 아줌마가 돌아가셨을 때 아저씨와 나는 장레식장을 찾아가 사무적인 일들을 처리하고 목사를 찾아가 종교 절차를 애기 했으며 그 전에는 얼굴도  보기 힘들었던 수십명의 친척과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그들이 준비한 음식을 먹어야 했고 그들의 포옹을 받아들여야 했다, 우리가 혹시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았나 하고 안색을 살피는 눈길도 그대로 받아낼 도리밖에 없었다.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보브 아저씨와 나는 난데없이 사교계 명사라도 된 듯했고 그렇게 우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목놓아 통곡할 기회조차 빼앗기고 말았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틀에 맞춰 슬퍼하기를 바랐다.  p 53-54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2년전 아버지 상을 떠올렸다,

나쁘다 좋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관혼상제라는 틀속에서 우리는 기뻐하고 슬퍼하게된다는 걸 그때 경험했다,

예전 어릴적 아직 어떤 사별도 한  경험이 없을 때 간혹 조문을 가면 웃거나 일상적인 말을 나누는 상주들이 그렇게 어색했고 언짢았다, 누군가는 죽었는데 그 사람이 가장 가까운 가족인데 저렇게 멀쩡할 수가 있을까? 그 생각과 동시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할지도 몹시 곤혹스러웠다,

장레다운 엄숙하고 슬픔이 충만한 것 그런건 영화나 드라마 속인 모양이었다,

우리 가족도 그때 슬픔과 함께 일상적으로 처리해야할 일들이 함께 했다,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고 종종 사무실에 가서 필요한 물품을 요구하고 중간 정산을 하고 일정을 다시 확인하고 누군가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위로를 듣고 그리고 화장실도 가고 세수도 하고 밥도 먹었다,

일상과 슬픔이 뒤섞였고 이때는 그저 정신차리고 지금 하는 일들을 잘 해나가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딱 한번 시신을 염하는 자리에 가서야 모두가 목놓아 통곡을 하긴 했지만 그리고 돌아와서는 어머니나 형제들 아버지의 형제들 모두가 일상적인 일을 이어갔다,

입관을 하고 모든 절차가 끝나고 뿔쭐히 집으로 와서는 지친 몸뚱이 속에 어떤 사고도 감정도 없었다, 그땐 부끄럽지만 그냥 자고 싶었다,

그리고 여러가지 절차가 끝나고 금전관계 행정절차를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이사하고 전입신고하듯이 아이 학교에 가게 취학통지서를 받듯이 담담하게 일처리가 지났다,

그리고 첫 명절이 지나고 제사가 지나고 그제야 슬픔이 나타났다,

느닷없는 일이었다,

이제 정리되고 감정도 추스려졌다고 여기는 순간 모든 것이 들이닥쳤다,

이제 아버지가 없다는 것 남편이 없다는 것이 가족을 덮치고 슬픔이 밀려오고 두려움이 밀려오고 멀쩡하게 살아가는 내가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감정을 도무지 내 보일 수가 없었다,

이미 정리되었다고 믿는 타인들에게 그 감정을 드러내는 건 쉽지 않았다,

눌러야 하는가? 터뜨려야 하는가?

나이를 먹도록 알지 못하는 건 여전히 많았다,

책속에서 어떤 상황속에서 아버지가 떠오르고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과 함꼐 두 발을 뻣대고 울고 싶은 마음이 뒤석이면서 힘들었다,

가장 힘든건 역시 절대 힘들다는 걸 내보이지 못한다는 거였다,

그때  도움이 된 책이  줄리언 반스였다,

 

 

 

앞의 기구 이야기를 꾸역꾸역 읽어내려간 후 만난 줄리언 반스의 애도 이야기가 나를 위로했다,

애도의 시간은 끝이 없다. 지나치게 긴 것도 없다는 말이 가슴을 쳤다,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느냐?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느냐? 잊어라...

하는 위안이 진심임을 안다. 위로하기 위해 나름 생각하고 생각해서 한 말인 걸 알지만

그건 절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충분한 애도와 슬픔에 잠기지 않는다면 끝날 수 없는 것이 애도이다,

그걸 줄리언 반스가 이야기해주었고 나는 위안을 얻었다,

 

오브 아저씨와 서머도 충분히 메이 아줌마를 애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죽음과 부재는  남은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는 의지와 더 이상 무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자조가 하루에도 수십번을 교차하는 시간을 지나야 하고 충분히 슬픔에 젖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항상 누군가가 해야하는 숙제와 같았던 섬머는 처음 알게된 천국같은 메이아줌마 오브 아저씨와 함께한 트레일러 생활에 금이 갈까 전전긍긍이다. 메이아줌마의 빈 자리는 너무나 크고 조만간 오브 아저씨마저 떠날까 마음을 놓을 틈이 없다. 늘 긴장하고 화가 나있고 무언가를 준비하고 살피는 나날이었을 것이다,

오브아저씨조차 그 나이에도 처음 겪는 상실로 주위를 볼 수도 챙길 수도 없다,

서로를 잊고 자기 슬픔에 빠졌으되 그 속에 깊이 잠기지도 못하는 두 사람은 너무 불안할 뿐이다,

그때 클리스터가 나타났다,

엉뚱하고 더럽고 아무거나 모으는 클리스터는 뜻밖에 두 사람에게 중요한 역활을 한다,

그 아이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그 아이는 두 사람을 깊은 애도와 슬픔으로 빠져들게 한다,

충분히 기억하고 충분히 슬퍼할 시간 .....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분수처럼 슬픔이 터지고 나면 비로소 후련하고 그 사람을 진짜 보낼 수 있다,

메이 아줌마의 마지막 독백은 참 슬프면서 따뜻하다,

이제 오브 아저씨도 서머도 살아갈 힘이 생길 것이다,

 

 

 

 

 

그림책속의 아이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나서 이제 괜찮아진 것처럼 두 사람도 함께 살아갈 힘을 얻었을 것이다,

나의 애도는 이제 끝에 닿았을까?

아직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냄새를 위해 환기를 하지 않는 아이나 모두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슈퍼앞에서 보초를 서는 여자의 표정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틈틈히 아버지를 기억하고 그의 이야기를 글로 써보면서 조금씩 내 감정을 들여다 본다,

한때 미워하고 무심했고 부담스러웠지만 언제나 내갠 든든한 산이었음을 이제 안다,

많이 닮아서 미웠던 것도 알았고 그래서 모른 척하기 더 힘들다는 것  알고 보면 큰 산이 아니라 아주 인간적이고 약하다는 것도 알아가면서 그를 애도하려 한다,

얼마나 더 걸릴지는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또 한가지....

엄마의 역활을 생각해본다,

부모란 엄마 이외에 아빠도 있고 조부모도있고 친척이나 형제도 있겠지만 늘 엄마의 역활이 모든 걸 떠안는다,

심리학을 공부하다보면 막말로 모든 정신적 문제는 엄마의 양육탓이다,

어릴 적 트라우마나 대상관게 애착관계 등등 엄마에게 너무 무겁게 짐을 지운다,

그 부담감에 저항하면서도 엄마란 어떤 역활을 해야하나 생각하게 한다,

메이 아줌마는 엄마로서 꽤 괜찮다,

가난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해 줄 수 있는 것에 많은 제약이 있지만 늘 긍정적인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것 어떤 말이든 귀기울여 들어주는 것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아끼지 않고 마음껏 드러내는 것...

그건 가장 쉬운데 가장 어렵다,

어쩌면 건강해서 늘 따라다니며 챙기고 돈이 여유있어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가장 쉬운지 모르겠다,

솔직하고 건강해서 언제나 아이를 품어줄 수 있는... 아이가 무엇이든 말하고 털어놓을 수 있는 안전기지.. 그것이 엄마라는 사실이 참 어렵고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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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연쇄 살인범이 알츠하이머에 걸렸다

그는 이제 점점 기억을 잃어간다,

기억을 잃고 시간이 뒤섞이고 내가 누구인지를 잃어간다

사람은 살과 뼈와 피와 같은 유기물로도 이루어져 있지만 내가 살아온 시간들 기억들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나는 내가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살며 미래를 계획할 수 있어서 비로소 내가 된다.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어떤 계급이나 부 역할들이 아니더라도 내가 기억하고 살아온 시간이 나를 스스로 증명해주기도 한다

그런데 기억을 잃어버렸다,

그건 나를 잃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존엄함을 잃게 하는 것이고 나를 더 이상 인정할 수도 없고 존재를 증명하라 수 없다.

주인공의 이웃에  살았던 치매 노인들의 이야기가 있다,

노부부 둘이 장성한 자식을 떠나보내고 살다가 남편이 그리고 아내가 치매에 걸렸다

둘은 점점 시간을 잊어가면서 기억을 잃고 점점 두 사람의 시간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 모든것이 통제 당했고 감시 당했고 언제 어디로 끌러갈지 모르던 불안의 시절로 돌아간 노부부는 마주하는 사람마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고  굽신거리고 쩔쩔맸다

결국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그 존엄마저 내려놓고 요양소로 떠난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주인공은 그 모습이 충격이었다,

인간이 그렇게 스스로를 떨어뜨리는 일 그건 무서운 일이다

그 모든 것이 기억을 잃고 시간을 거스를 수 없음에서 나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모에도 시간을 훔쳐가는 회색신사들이 있다,

그들은 인간의 시간을 훔쳐야 살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인간은 그들에게 시간을 빼앗기면서도 그것이 시간을 저축하는 일이고 좀 더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바쁜 일상에서 사람들은 많은 것을 놓친다,

친구를 만나고 대화하고 놀고 빈둥거리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법을 잃어벌인다,

그건 다름아니라 스스로의 존엄을 잃어버리는 일과도 같다,

내 삶을 내가 만들어 가지 못하고 동동거리게 하는 것 시간에 끌려다니게 되는 것은 스스로가 주인이지 못한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에 의한 것이든 전체주의에 의한 것이든 사람은 스스로를 놓아버리고 무언가에 속박되어버리는 것이다,

바빠진 사람들을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추억할 것들이 없고 추억할 시간이 없다, 추억은 기억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고달프고 스스로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회색신사들은 시간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삶의 품격을 앗아간 것이다

 

다시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돌아와서

주인공 김병수도 그렇게 서서히 망가져 간다,

이렇게 누군가가 기억을 잃고 망가짐을 보며 서글프고 안타까워야하는데 문제는 김병수가 연쇄 살인범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 잡히지 않고 70이 넘어까지 잘 살고 있었다,

나름의 부를 이루고 안정을 이루면서 살아간다, 그러다가 덜컥 알츠하이머에 걸린다,

쉽게 동정하고 연민을 느끼기엔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다,

알츠하이머는 현재의 기억부터 서서히 사라진다,

과거만 기억하고 그 시간을 살게 되며 현재는 망각되는 병이다,

김병수는 현재 잘 살고 있던 삶은 잊어버리고 과거의 살인범의 시간을 살아간다,

내가 누구인지 누군가를 죽였는지 나를 쫒는 사람이 누구인지 저 사람이 형사인지 또다른 살인자인지 모든것이 뒤죽박죽이다,

시간이 그에게 형벌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점점 당황하고 정신이 없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그것마저 진실인지 아닌지 헷갈린다,

내게 딸이 있었는지 내가 죽인 사람이 있는지도 헷갈리면서 그는 어쩌면 그동안의 업을 짊어진 형벌로 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스틸 엘리스" 그녀도 알츠하이머에 걸렸다

세 아이의 엄마로 언어학 교수로 한참을 더 삶에 힘을 쏟아야 할 시기에 덜컥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그리고 서서히 잊어가는 중이다,

기억이 시간이 한 사람의 존엄성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진짜 인간의 존엄은 그 모든 것을 잃어도 잃어버버릴 수 없음을 그녀는 보여준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고 모든 기억이 뒤죽박죽되고 주위 사람을 혼란하게 만들지만 그녀는 그녀로서의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텅 빈 그녀의 얼굴을 보면 그래도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 존엄하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사회적인 이름이 아무것도 없고 기억을 잃고 시간을 뒤섞어버린 뒤에도 나는 여전히 나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누군가 타인을 여전히 나는 귀하게 여길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지는 책. 그리고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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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제목의 번역에 대해 말이 많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토니가,,, 계속 찌질하지 않을까했던 나의 첫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나이 먹어서도 찌질했고 구질구질 했으며 도통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했다, 여전히

허나 그의 자리에 나를 넣어보아도 모든 걸 알아차리지는 못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운명이 그렇게 꼬이리라고는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모두가 60대에 이른 토니긔 기억을 토대로 씌여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사실들은 모두 토니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 토니가 말하고 싶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토니를 통해 베로니카를 보고 에이드리언을 보고 포드 부인을 보고 그 당시 상황들을 알아낸다,

모든 건 철저하게 토니의 시각이다.

 

지나간 사실에 대해서는 현재의 정신상태와 나의 상황에서 판단하고 그 행위를 규정한다,

역사도 신문기사도 결국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진실을 보여준다,

사실= 진실은 아니다, 이건 이제 초등학생도 안다,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 않은 법이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벌어지는 확신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에 일어난 일을 내 입장에서 해석한 것을 기억에 떠올리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의 회고에 가깝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하게 가지를 쳐 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 다르며 다만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는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이야기 했다고 해도 결국 주로 우리 자신에게 이야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읽으니 곳곳에 토니의 생각을 빌어 이 이야기는 모두 토니가 자신의 왕년 스토리를 들려주고 자기가 기억하고 윤색한 이야기라고 암시를 주고 있었다, 우리는 다만 어떤  나이든 사내의 회고담을 듣고 있는 것이다,

내가 왕년에....... 그래서 아주 멋지게 편지를 보냈는데........ 블라불라,........ 그런데 알고 보니................ 이러쿵 저러쿵이라고 여겼는데,....... 잘 들어 여기가 중요해,,, 세상에 세상에,,,

나만 몰랐네,,, 사실은 말이지,,,,,,,

 

그나마 토니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착오를 고칠 수 있고  인생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행이다, 나의 기억은 왜곡되고  잘못 주입되었다는 걸 깨닫는 행운아다,

끝까지 나는 모른 체 내가 아는 게 전부임을 굳게 믿고 삶은 마치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깨달음이 전부는 아니다. 이미 알았을 때는 돌이킬 수 없을 때이기도 하다,

토니의 잘못흥 그 지랄같은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 아니라, 그 편지를 보내놓고 잘못 기억하고 있고 혹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고 그냥 스쳐보낸 것들이 있었고 혼자 짝각하고 껄떡거리고 혼자만 아는 만큼 반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무지와 무관심이 그의 죄이다,

 

사람들은 모르는 건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요즘 모르는게 정말 죄가 되는 경우가 있긴 있더라

모르고 던진 말이 누군가에게는 칼이 된다,

내가 몰랐잖아, 모르고 한 일이잖아,,.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정말 몰랐니? 진짜 몰랐어?

모른다고 믿고 싶었던 건 아닐까?

외면하고 싶었던 건....

 

누군가에게 들은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사람이 누군지 알아? 

  바로 자기 촉이 좋다고 자랑하는 인간이야

 그런 인간은 아주 강한 자기 틀을 가지고 있거든 절대 깨지지 않지

 세상 모두를 그 틀로만 보는 사람이야. 그리고 그게 전부라고 믿고.."

 

내가 보는 것 들은 것 기억하는 것 그건 단지 내게 전부 일 분이다

그리고 나는 우주에서 내려다본다면 눈에 띄이지도 않을 작은 미물이다,

가끔 살면서 그걸 잊을 때가 있다,

그때는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위험하다,

 

늦게라도 토니의 틀이 깨어져서 그리고 많이 돌아봐서 다행이다.

토니의 삶은 절대 찌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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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영화를 보거나 슬픈 장면을 봐도 가슴에서 욱하고 치어 오르는게 있지만 어느 순간 내가 나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낮고 단호한 목소리

"그만한 일로 우는 거 아닌거 같은데"

그러면 희안하게도 눈물은 쑥 들어가고 가슴을 막고 있던 것이 풀린다, 다만 치밀어 오른 무언가가 남긴 묵직한 통증과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감정이 남겨놓은 목매임만 남았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면서  내내 한 생각은 그거였다

"울음이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다행히 적재적소에서 울음이 나왔고 무사히 상을 치르고 돌아왔다,

나는 누군가의 앞에서 우는 일이 싫었다,

물론 한 번도 남앞에서 울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울지 않는다

울음이 터져고 참아내는 힘이 더 강해서 언제나 누르는 쪽이 이긴다

함께 영화를 보고 옆사람은 눈물콧물을 쏟으며 휴지를 뽑아낼 때도 나는 그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게 다다,  슬프다, 마음 아프다, 그 인물이 공감되고 구구절절 이해된다, 그런데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무슨 병일까?

우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걸까

 

그런 내가 책을 읽고 펑펑 정말 소리내어 펑펑 운 적이 있다,

딱  두권의 책

 

 

 

 

 

 

 

 

 

 

 

 

 

 

 

나도 어쩌지 못할만큼 눈물이 나더니 꺼이꺼이 울어버렸다,

어쩌면 처음 읽었으니까 그럴거라고 시간이 한 참 지난 후 다시 읽었더니 여전히 나는 꺽꺽 울었다,

누군가 들을까 조바심내며 울음을 삼켜도  꺽꺽거렸다,

이후 두 권은 내게 금서가 되었다,

그리고 어제 저녁세번째 책이 찾아왔다

 

<기억의 빈자리>

진짜 별 이야기  아니고 심지어 해피엔딩임에도 꺽꺽대며 무언가가 올라왔다,

당황스러웠다, 이러려는게 아니었는데

다행히 12시가 훨씬 넘었고 대부분 잠들고 큰아이는 방에서 수학숙제를 하고 있을거고 혼자 거실에 있어서 얼른 입을 막고 참아냈다,

나이를 먹으면 눈물이 많아진다더니 정말 늙었나싶어서 그냥 억지로 잠을 청해버렸다

 

다시 곰곰히 생각 해본다,

이 세권의 책이 왜 나를 울렸을까?  그건 모르겠다,

나랑 비슷한 무언가가 있나?

나를 스치는 무언가가 있나?

모르겠다,

그렇다면 세권의 공통점은 있나?

금서가 된 세권을 나란히 놓고 본다,

생각해본다,

세권은 모두 그랬다,

주인공이 너무 너무 아프고 힘든데 한 번도 아프다고 하지 않았다, 그냥 꾸역꾸역 견뎌냈고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하고 있었다

동구는 가족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어린아이인 척 아무것도 모른적 괜찮은 적 모두가 나에게 화풀이를 하고 스트레스를 풀어대는 걸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했다,

나의 나종지닌 것의 화자는 아들의 죽음을 속으로 삼키고 한번이라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 민가협 활동으로 사회운동으로 더욱 씩씩해져야 할 이유들을 생각해내면서 내 개인적 아픔을 묻었다,

제이미 역시 괜찮은 척 살고 있다, 말을 건네고 위로 받을 대상도 없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혼자 그 기억을 지우고 싶어할 뿐이었다,

셋다 혼자 짊어지고 끙끙대면서도 자기가  왜 아픈지 왜 힘든지 모르는 그저 얼굴은 웃고 있는 삐에로 같은 인물이었다,

아... 난 그저 견디는 인물들이 아팠구나

 

나는 울지 않는 아이였다,

어린 시절 잠시 스케이트를 배운 적이 있는데 그 때 코치가 무슨 이유인지 (어쩌면 맹장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입원을 했고 엄마와 언니와 친구와 친구 엄마와 병문안을 간 전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때였던 거 같고 병원까지는 갔는데 나 혼자 병실을 들어가지 못했다,

무어라 무어라 고집을 피우며 나는 안 들어가겠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왜 그랬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나 혼자도 아니었고 함께 우우 들어갔다가 잠시 얼굴 보고 나오면 그만인 자리였고 다들  아는 사람들이엇는데 나는 병실이니 문병이니 하는 것이 두려웠던 거 같다.

결국 나머지만 들어갔다 나왔고 나는 밖에서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진 않았다. 뭐 취미로 배우는 스케이트 강사랑 무슨 말이 많이 있겠는가

굳이 갈 필요도 없던거 같지만 그땐 정이 더 있던 때가 그랬나 싶기도 하고

그때 나오면서 엄마고 나더라 독하다고 독하게 여기까지 와서 안들어 가냐고 했었고

나는 이유없이 억울하고 아니라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말대답도 없으니 더 지독하다고 했던 것도 같고

뭐 그런 오래된 기억이 있었다,

 

이후 아버지가 입원을 오래하셨음에도 나는 자주 가지 않았다,

가야한다는 부담은 안고 있으면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걱정되는 마음 불안한 마음이 뒤엉키면서 나 자신도 어쩌지 못해 누군가를 찾아가고 위로하고 살핀다는 것이 자신없었다. 어쩌면 이기적인 것일 수도 있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나중에 그 일로 섭섭했다고 엄마가 뭐라고 하셔도 할 말이 없었고 면목도 없었지만 그땐 정말 힘들었다,  막상 병실에 들어가면 곰살맞게 말도 잘 하고 눈치껏 움직이며 도와드리지만 들어서기 전까지 내 마음이 지옥이고 전쟁이었음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였을까?

어느 순간 우는 게 힘들었고 위로받는게 힘들었고 견디는게 편해졌다,

지금도 누군가가 칭찬하고 좋은 말을 하는 건 부끄럽고 어렵다,

오히려 충고나 비난은 쉽게 흘려 넘긴다, 그러든가 말든가... 뭐

그러나 칭찬이나 공감의 말은 왠지 간지럽다. 얼굴에 개미가 열을 지어 지나가는 느낌. 얼른 이자리를 빨리 뜨고 싶다는 안달감. 내 것이 아닌걸 받아든 난처함이 나를  채운다.

왜 난 칭찬에 약할까 왜 난 위로나  지지에 약할까

내가 가장 편한 상황은 아무도 아무말도 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저 알겠다고 고개만 한두번 끄덕이고 말없이 옆에 앉아주는 사람이 가장 편하고 위안되는 사람이다. 그러다보니 나 역시 누군가 아파하고 힘들어할 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냥 얖에서 등만 쓸어주는 것이 전부다

내가 보여주는 행동은 단순해서 때떄로 무심하다고 오해받기도 하지만 내 속은 정신없이 휘몰아친다는 건 아무도 모른다.

어떤 말을 해야할까? 그냥 침묵하고 있어도 괜찮을까?

옆에 있는게 거추장스럽진 않을까? 그렇다고 혼자 두면 또 무심하다고 하지 않을까?

나는 내내 불편하고 불안하면서도 곁을 떠날 수도 없다

 

 

 

 

 

 

 

 

 

 

 

 

 

 

나와 닮은 아이를 찾았다. 모모

로자 아줌마를  내버려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옆에 있다고 해도 뭔가 해줄 수도 없는 모모는 거리를 서성인다. 누군가를 만나고  이야기하고 관심을 돌리고 싶지만 마음 한구석에 늘 자리하고 있는 로자 아줌마를 떼어 낼 수 없다.

자기 앞에 놓인 생을 살아내야하는 이유가 로자 아줌마이기도 했을 것이다.

울지 않는 모모

누군가에게 아프다고 말해 본 적이 없는 모모,

그래서 감정을 나누는 것이 서툰 모모 그래서 늘 외로웠지만 외롭다는 감정조차 알지 못했던 모모가 마음에 들어왔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는 일은 달걀을 훔치고 따귀를 맞는 일이고 권총으로 은행을 털어서 주목을 받는것 이외를 생각할 수 없는 아이

그냥 아무도 몰라도 상관없다고 여기지만 그 속에서는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손을 잡아주고 괜찮다고 그동안 애썼다고 등을 쓸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아이였다,

누구앞에서도 울지 않고 누구에게 위로받는 것이 어색한 내가 거기 있었다.

나는 모모처럼 창녀의 버려진 자식도 아니었고 배고픔과 무관심에 익숙한 아이도 아니었는데

나는 늘 외롭고 쓸쓸하고 아득했다.

아이에게도 그런 감정이 스며들 수 있는 걸까?

지금 돌아보면 조숙했던 건지 영악했던건지 아니면 그저 어른 흉내를 내고 싶은 허당이었는지모르겠지만 늘 쓸쓸하고 아득한 감정이 있었다는 기억은 있다,

뭐가 힘드냐고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무어라고 꼭 집어 말 할 수는 없는데  딱히 힘든 건 아닌데 아득하고 막막한 기분이었다,

그냥 앞이 뿌연거 같기도 하고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다는 기분도 있고 또 누구에게도 기대서는 안된다는  강박도 있었던 거같다.

울어서도 안되고 힘들다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 늘 가득했다.

누가 시킨것도 아니고 그래야 한다고 말해준것도 아니지만 그랬다,

모모도 누가 시킨건 아니다. 상황이 그랬다고 할 수 있을거고 제이미도 누군가에게 들어서 설득을 당했던 것도 아니다. 소설속의 어떤 인물도 그냥 알게 된 것이다,

이제 징징거려서도 안되고 누군가에게 내 연한 속살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

그건 타인에게 나온 소리가 아니라 내 안속에서 나온 목소리였고  우리는 그 소리에 길들여졌고익숙해졌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이 어색했고 마음과는 다르게 냉정하기도 하고 매몰차기도 했을 모습에 스스로 익숙해지면서 많이 외로웠다.

나는 스스로 내 속에 깊은 우물을 지니고 있었다,

그 깊은 우물속에 돌을 던지면 절대 풍덩이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다

그 속에 나는 모든 걸 넣어두었던 모양이다,

울고 싶은 마음 누군가에게 매달리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 화가나고 터져버리고 싶은 마음

날뛰며 기쁨을 마구 뿌리고 싶은 마음 사랑한다고 설레임을 전하고 싶은 마음마저 나는 모두 우물속에 넣어두였다,

나의 모든 마음은 우물속에 있고 나는 서늘하고 건조하게 서 있다.

내 감정은 깊은 우물속에 있어 그 구체적인 모습은 보이질 않으니 나는 늘 외롭고 서늘하고 먹먹했던 것일까

 

그렇게 우물속에 봉인되었던 감정이 책과 함께 올라온다,

그 감정의 이름을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솔직하게 마주해야할 것이다.

자꾸 따지고 분석해서 지치지 말고 그냥 가만히 들여다 봐야 할거같다

 

책을 읽는 좋은 이유중 또 하나가 나를 알아간다는 것도 있다는 걸 세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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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었다, 무슨 일을 하든 글을 쓰는 것과 관련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했었다

그러나 나는 전형적인 머리속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글이란 진중한 엉덩이와 펜 끝에서 나온다는 걸 몰랐다,

그저 머리속으로 집을 수십채를 지었다 허물면서 글을 그려내고 있었다,

늘 생각은 많았다,

아이가 어려서 생각하고 고생하고 자라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늘 이야기는 머리속에서만 맴돌았고 펜끝에서는 늘  손끝이 떨려서 점점점만 나왔다,

나중에 그런 이야기가 성장소설이라는 걸 알았다,

글을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고 들어서 줄곧 읽어댔다, 어떤 원칙도 없이 흥미위주로 읽고 어려워 보이는 책들은 그냥 꾸역꾸역 읽었다,. 그리고 차라리 읽은 책에 대해 글을 쓰면 어떨까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여자가 낸 책을 누가 볼까 싶어 어쩌면 어떤 네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궁리만 하다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한 참 후에 독서에 관한 책들이 쏟아졌다, 유명한 사람도 있었지만 의외로 누구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드라마를 쓰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 누구나 그렇듯이

운명적인 사랑이 아니라고 그냥 오래 공기처럼 물처럼 있던 친구가 연인이 되는 이야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밋밋한가 싶었다, 연애경험도 없고 오래된 이성친구 따위는 더구나 없던 내게 이야기는 그저 구름위의 개미집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질투"라는 드라마가 나왔다,

나는  나혼자 늘 몇발 앞서 있었다, 내 생각속에서

글은 여전히 머리속에서 뭉개뭉개 그렸고 노트들은 앞의 몇장만 빽빽하게 채워진 채로 쌓여만 갔다,  한 번은 자원절약 차원에서 앞장을 모주 북북 찢고 새로 이용하기로 했다,

찢어낸 종이뭉치를 그냥 버리려다 한 번 읽었더니 어.. 제법이었다,

버리기 아까웠다, 그리도 혹시나 싶어 파일에 챙겨두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서랍아래서 잊혀지고 있는 중이다,

일단 일기를 쓰기로 했다,'나날이 무료했다. 화끈한 사건도 없었다, 당연히 쓸 이야기도 없다,

나는 나이를 먹도록 초등학교 2학년이상의 일기를 쓸 수 없었다, 하루에 기막힌 일이 없다면 쓸거리가 없어 지루해 하는 단순한 아이 그 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여전히 방황하고 꿈만 꾸고 있었다,

글쓰기 책들은 책장에서 새책과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잊혀져 가고  나는 여전히 웹서핑에서 그런 책들만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남이 쓴 책 읽은 이야기도 열심히 읽었다,

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단지 그는 그 생각이 문장으로 나올 수 있었고 나는 여전히 내 머리 속에서만 맴돈다는 것이 다른 뿐이었다,

읽고 쓰는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어떤 생산성도 없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내 삶의 일부였다, 누가 그랬더라 시간많은 백수가 문화적으로 더 고상하고 수준높은 면이 있다고

딱 내가 그랬다, 일이 없고 시간이 많으니.. 아니 솔직이 내 일을 내팽개치고 났더니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끄적일 수 있는 시간은 늘어났다,

책에 씌여진 이야기처럼 나도 시간을 정해서 무조건 쓰자고 결심한 적도 있었다,

반짝 삼일을 했다, 역시 작심삼일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것이 오래된 진리라는 것만 깨우치고 끝났다,

나는 계속 읽고 있었고 그 이외의 즐거움이 없었다,

삶이 지루하고 무료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sns가 생겨나면서 세상의 모둔 은둔 고수들이 드러났다,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무지하게 많다,

이야기를 잘 쓰는 사람, 유머있게 쓸 줄 아는 사람, 이성적으로 쓸 줄 아는 사람 멋진 말들을 나열하길 잘하는 사람  라디오 방송의 오프닝처럼 쓰는 사람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며 쓰는 사람 세상에 잘 쓰는 사람은 너무 널렸고 책은 너무 많아졌고 작가는  내 이웃에도 있었다,

갑자기 세상의 나무들이 안쓰러워졌다, 서점에는 이렇게 책이 많은데  그리고 이렇게 쉽게 잊혀지고 있는데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요즘 케이블이며 종편이며 텔레비젼 보는 맛을 들이다 보면 세상에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많은지 몰랐다, 모든 오디션 프로에 가수를 흉내내는 프로에 계속 사람들이 흘러넘쳤고 그들은 어느 가수 못지 않았다,

이곳 알라딘만해도 작가들은 흘러넘친다,  세상에 숨든 고수들은 어디든 무리지어 있었다, 이젠 고수라고 할 수 없을만큼 글을 쓴다는 것은 그저 흔한 재능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에전에 책을 많이 읽었고 한때 좀 쓴다고 여겨졌었던 어떤 중년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책들을 부지런히 모으고 읽고 또 읽고 있다,

문구코너에 갈 때마다 노트는 하나 둘씩 필기구도 하나둘 씩 사 모으지만 그것들은 서랍에서 책장 한 구석에서 먼지만 뒤집어 쓰고 계속 텅 빈 채 잊혀지고 있지만 책들은 밑줄이 그어지고 귀퉁이가 접혀가며 쌓이고 있다,

난 여전히 쓰지않고 쓰기를 배우는 중이었다,

글로 배운 글쓰기 글로 배운 책읽기

나는 전형적인 모든 걸 책으로 배우고 실전경혐은 꽝인 인간형으로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 목록에 두 권의 책을 더 추가하고 있다,

 

 

 

 

 

 

 

 

 

 

 

 

 

 

 

 

이게 머리로 쓰는 글쓰기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내가 무엇을 쓸지 알 수 없으니 픽션과 논픽션 두가지를 모두 읽기로 한다

문제는 이 두 저자가 글을 잘 쓴다는 거다

굳이 글을 써야한다는 강박없이 그냥 읽어도 재미있다,

이게 글쓰기 비법을 풀어놓은 책인지 그걸 미끼로 던지는 개인적인 에세이인지 그 정체가 모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열심히 줄을 그어가면서 읽고 있다.

글을 쓴다는 건 나를 드러내는 일이라는 걸 이제 비로소 깨닫는다,

나를 꽁꽁 감추고  무언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 다른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며 쓰는 글은 사기도 아니고 뭣도 아니었다. 나는 그동안 나를 드러내는 방법을 몰랐다는 걸 알았다,

나를 드러내는 방식이 지어낸 이야기든 논리적이고 사실적인 글이라 하더라도 두가지에 다 해당된다. 내가 쓴 글에는 내가 들어갈 수 밖에 없다,

허접하고 짧은 식견과 완고하고 오만한 고집도 있고 귀가 얇아 모든 말에 솔직하는 가벼움도 들어갈 것이다.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그 빈곤함을 드러내는 글이 어쩌면 화려하게 치장하고 감추어 둔 나 자신보다 더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 그걸 두 책의 저자 그리고 그동안 읽은 모든 글쓰기 책의 저자는 이야기 해준다,

 

결국은 쓰라는 거다

나를 드러내든 논리를 세우고 검증을 하며 칼을 갈든 일단은 쓰고 볼 일이다,

글은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쓰고 손으로 쓴다

뭐라도 끄적여야 글이 되는 거지

 

하루가 지났다 즐거운게 없다. 어제와 같다 끝

하고 공책을 덮어버리는 어린시절 일기처럼 뭐라도 쓴 건 글이 되겠지만 머리속으로 쌓은 웅장한 만리장성은 그냥 허상이다,

 

모든 책을 읽은 결론..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 아니 이전 이 모든 책을 읽을 필요가 없었다,

김연수의 글에서 딱 하나가 기억난다,

용기는 동사라고 했던가. 행동하는 것 움직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했던가 가물가물

그렇다, 일단 쓰고 볼 일이다,

이것이 좋은 글인지 나쁜 글인지는 다 쓰기 전엔 알 수 없는 일이다,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걸 듣고 밑줄 좍좍 그어봐야 아무 소용없다,

너는 너고 나는 나만의 글쓰기 방법으로 쓸 수 밖에,,

많이 비문이 나오고 잡스럽고 문장이 어수선해서 내가 진심을 담아 쓰면 그게 좋은거라고 그렇게 끝을 맺어보자고 그게 모든 글쓰기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이다,

고로 .. 앞으로 쓸데없는 데는 절대 돈을 쓰지 말아야겠다,

안그래도 사고싶은 책은 넘처나는데 굳이 이런 책들은 그냥 가볍게 넘겨야겠다,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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