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통제가 어떤 때는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

 

위와 같은 인용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러고 보면 주인공  폴의 아빠는 아틸라 마르셀이고 폴을 치유해주는 부인이 프루스트이다.

두 사람의 이름을 합치면 마르셀 프루스트가 되고  폴이 과거의 기억을  꺼집어 내는 낚시 도구로 쓰이는 것이 차와 마들렌이다.

들은 풍월로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도 주인공이 홍차와 마들렌을 먹고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들었다.

멋진 오마주라 생각된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폴은 쌍둥이같이 닮은 두명의 이모와 함께 산다.  이모들은 폴을 피아니스트라고 하고 젊은 연주가상  대회에 늘 내보내지만 이제 서른 두살 그 대회 자격이 되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이다.

폴은 어린 시절의 충격으로 말을 잃었고 (간혹 말을 하기는 했다) 그저 이모들의 댄스교습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공원에서 빵을 먹는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

우연히 알게된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에 가게 되고 거기서 마담을 만나 독한 차와 마들렌으로 순간 정신을 잃으며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

무의식적으로 기억의 수면아래에 꼭꼭 넣어두었던 기억을 하나 둘 기억해낸다.

폴이 프루스트 부인을 만나기전 두 이모와 노신사들의 대사에서 얼핏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확실하진 않지만 부모의 죽음을 그렇게 묻어두고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하지만 지금 현재 어떤 문제도 없으니 굳이 꺼집어 내어 상처가 될 지 모를 문제는 묻어두자고 두 이모는 말한다.

그래서 조금의 문제는 있지만 나름 평화롭게 살던 폴이었지만 마담 프루스트를 만나면서 자신의 기억을 마주하고 혼란스러워진다.

자기의 기억속에 무섭기만 했던 아빠의 모습 그리고 어렴풋한 엄마에 대한 아빠의 폭행 기억앞에서 폴은 흐느껴 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내가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은 나의 모습이다. 그걸 마주하는 것은 몹시 힘들기때문에 누구나 가능하면 외면하고 회피하려고 한다. 지금 이순간 직면하지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상처는 어쩌면 마주하기 두려워서 속에 꾸역꾸역 눌러담아두기때문에 쉽게 딱지가 앉지 않고 늘 짓무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눌러진 상처나 외면하는 과거는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것이다, 내가 외면하고 모르기때문에 지금이 편안하고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건 나의 온전한 삶이 아닌지도 모른다. 폴처럼 자기의 과거를 모르고 기억을 알지 못해서 늘 무기력하고 어딘가 비어버린 모습이다.

영화에서 폴의 과거는 뮤지컬처럼 경쾌하고 예쁜 색감으로 표현된다.

갓 태어난 폴에게 각자의 이루지 못한 꿈을 담아 미래를 예언하고 소원하는 이모들이나 아빠와는 달리 엄마는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게 할거라고 한다.

좀 더 자라 해변에서 엄마는 부모에게 강요받은 피아노 대신 다른 삶을 살거라고 하며 행복한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불안한 개구리들의 연주와 합창은 아빠와 엄마를 오해하게도 하지만 그것도 폴의 기억이고 과거의 한 부분이므로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폴의 과거는 꼭 인도영화처럼 노래와 춤이 곁들여지며 행복하고 아름답다. 음악도 좋지만 나는 그 색감이 끝내준다고 생각했다.

모든 기억을 찾고 콩쿨에서 멋지게 연주도 해낸 폴은 마지막 프루스트 부인이 떠나기전 남겨준 차를 먹고  이모가 그토록 숨기고 싶은 모든 것을 알아낸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지는 않지만 폴은 행복하다.

새롭게 알게된 아빠의 모습 그리고 엄마와 아빠가 얼마나 행복했으며 자기를 사랑했는지를 알고 꽤 괜찮은 아빠가 된다.

 

꾸역꾸역 눌러담아놓은 기억은 치유가 될 수 없다.

심리분석에서도 나의 내면을 직면하라고 한다. 심리치유가 별것 아니다 내가 나를 용기있게 마주 볼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이면 된다,.

과거의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처받은 나를 돌아보고 마주하면 더이상 그 아이에게 끌려다니지 않아도 된다. 가만히 바라봐 주고 모듬어주고 나면 현재를 살아갈 힘도 생긴다.

상담에 관한 책이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처받은 내면의 아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상처받은 아이를 바라보고 그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자기를 표현하면서 눌렸던 억압을 해소하라고 하지만 그게 전부여서는 안된다.

나는 과거를 사는게 아니고 현재를 살고 있으니까 그 아이를 보듬어주고 나서는 현실에 발을 디디며 건강하게 살아내야하는게 더 중요한 거라 믿는다.

폴도 상처받은 아이를 마주하고 이제 피아노를 치지 않아도 행복하고  이모들이 혐오하는 중국인 아내와도 행복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POSTER

 

 

폭력에는 물리적 신체적인 접촉도 있고 눈빛 무언의 몸짓 사람들의 고정된 사고방식 타인에대한 오해등도 있다. 어떤 관습이나 오래 묵은 상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봉도 폭력이 될 수 있고 나 아니면 상관없다는 방임과 무관심도 폭력이다.

세상 어떤 것도 폭력이 될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다양한 폭력이 나온다.

 

외딴 바닷가 마을 엄마가 도망가고 의붓아버지와 할머니와 함께 사는 도희는 모든 폭력에 노출되어있다. 술만 마시면 두들겨 패는 아버지와 할머니만이 아니라 그런 사정을 눈감아주는 마을 사람들 그러다보니 무시해도 그만이라고 믿어버리고 함부로 대하는 학교 친구들 모두가 폭력이다.

그 마을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좌천된 파출소장 영남이 내려온다.

이곳에서는 타인인 영남의 눈에는 도희에게 가하는 다른 모든 사람의 행동이 비정상적이고 그런 오랜 관습과 행동에 익숙해져버린 도희조차  정상이 아니다.

영남의 도희의 상처를 처음으로 들여봐 준 사람이다.

하지만 영남역시 자신의 상처와 아픔이 너무 커서 밤마다 소주를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만큼 피폐한 상태이다.

그러나 직업윤리인지 개인적인 상식과 가치관에서인지는 몰라도 영남은 도희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맞서고 마을에 관습처럼 무심해진 폭력에 맞서면서 점점 외로워진다.

영화에는 다양한 폭력이 나온다

도희가 당하는 물리적인 폭력

나와 다르고 약한 존재라고 해서 함부로 대해도 그만이라는 암묵적인 폭력(이주 노동자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태도)

다르고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배타적이고 편견 가득한 태도들( 영남의 취향에 대한 마을 사람들 경찰동기들의 태도들)

그리고 편하고 익숙하다는 이유로 도덕적 법률적인 사소한 위반이나 타인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마을 사람들의 오래된 구습까지 영화  구석구석 너무 폭력적이어서 충격적인 장면이 없음에도 보는 내내 너무너무 아프다.

영화는 내내 보여지는 것만으로 전체를 판단하고 타인을  평가하는 모든 종류의 폭력을 보여준다.

그렇게 폭력이 오래 노출되고 익숙해지고 그 익숙함은 점차 별거 아닌것이 되고 별거 아닌것은 무시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 되면서 남이 당하는 건 나만 아니면 그만이고 내가 당하는 건 무언가 내게 잘못이 있을거라는 죄책감과 무기력으로 되풀이된다.

도희는 폭력이 익숙해져서 너무나 무감하고 당연하다.

도희가 말한다. 아무리 맞아도 춤한번 추고 나면 다 잊을 수 있다고...

그건 극복이 아니고 그냥 덮어두는 것일뿐이고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것일뿐이다.

그렇게 피해에 익숙해진 도희는 자기도 모르게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자기는 나쁜 아이니까 맞아야 한다는 자학적인 행동이나 마지막의 반전은 그런 도희를 잘 보여준다. 살기위해서 괴물로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도움을 받고 지지를 받을 경험이 없었던 도희는 스스로 괴물이 되면서 자기를 방어하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려한다.

폭력이 얼마나 나쁘고 잔인한지 도희는 온몸으로 모든 행동에서 보여준다.

 

영남은 자신도 혼자 서기 힘들만큼 피폐해졌다.

자기 잘못은 아닌데 대다수와는 다른 정체성으로 불이익을 받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렇다고 자신의 다름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없는 폐쇄적이고 고지식한 사회에서  본능과 이성사이에서 힘들다. 밤마다 소주를 벌컥거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고 점점 그녀가 둘러싼 껍질을 두껴워지기만 한다.

하지만 내 고통에 흔들리는 영남은 내가 힘들고 아직 미성숙한 상태에서도 도희에게 손을 내민다. 처음에는 아는척 단단한 척 손을 내밀었지만 도희와 함께 할수록 그리고 그녀가 찾아와 흔들릴때도 도희에게 내민 손을 잡아준다.

성숙하고 바르게 서있을 힘이 없는 상태에서도 누군가에게 의지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부족한 내 도움을 바라는 상대를 보면서 나도 강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남이 참 아픔답다.

 

살기위해 괴물이 되는 건 도희만이 아니다.

불법체류자가 되어  아픈 어머니에게 가고 싶어하는 외국인 노동자도 스스로를 위해 순간 괴물이 된다. 살기위해서 내 속에 있던 눌러놓았던 괴물을 꺼내야 하는 순간은 얼마나 또 비참할까... 괴물을 꺼집어 내어 순간을 넘기지만 그 괴물이 다시 사라지고 원래의 나로 돌아오는 순간은 비참하고 부끄럽다.

그래서 철창에 갇힌 노동자의 눈빛이 슬프다.

스스로 괴물처럼 영악하게 굴어  영남을 구해낸  도희도 너무 슬프고 부끄러울 것이다.

내가 괴물이 되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한게 없다는 것

자꾸 아니라고 하고싶지만 살기위해서 괴물이  또 될 수도 잆다는 생각과 그러다 영영 괴물이 되어 나로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하는 갈등으로 괴물은 무서우면서 슬픈 존재가 된다.

영남도 괴물이 되었었던 도희를 떠나려고 한다.

하지만 순간 깨닫는다.

내가 지금 그 아이와 눈을 맞추고 그 괴믈을 바라봐 주지 않는다면 아이는 그리고 나는 괴물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 완전하지 못하고 서툴고 불안하지만 둘은 함께한다.

영화에서는 보여준다

누군가는 살기위해 괴물이 된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그 괴물을 두려워하고 마주 보지 않는다는 것

내가 피하고 방임하면서 괴물들은 지금도 어디선가 슬프게 발톱을 세우고 있을 거라는 것...

그러다 내가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POSTER

 

김려령의 작품은 영화화 되기 참 쉽다는 생각을 했다,

발랄하고 톡톡 튀는 대사들 하지만 그 속에 꽉꽉 들어찬 의미들

휙휙 바뀌는 장면들이 영화로 만들고 싶은 유혹을 뿌리칠 수 없게하는 매력이 있다.

완득이도 그랬고 이번 우아한 거짓말도 그렇다.

원작을 충분히 살리면서 영화가 보여 줄 수 있는 섬세함도 잘 살렸다.

세 아이의 연기도 좋았고 마지막의 다섯번째 털실 뭉치도 좋았다.

그 뭉치가 누구를 향한것인지 누구를 위로하는 것인지 의견이 분분한 것까지 좋았다.

그러고 보니 온통 좋은 것 투성이구나....

 

아줌마들끼리 한번 그리고 아이와 한번 두번을 보았는데 솔직히 울지 못했다.

함께 간 아줌마들이 휴지 한통을 다 쓰면서 울어대는 동안 그저 먹먹하구나 하는 감정을 느끼면서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악착같이 참고 있었던 거같기도 하고 이렇게 허물어질 수 없다는  참 필요없는 자존심인것도 같다.

 

괜찮다는 천지의 거짓말에 모두는 괜찮은 줄 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순 개뻥이다.

내가 낳은 아이라도, 한 배를 타고 난 자매끼리도 그리고 천하에 없는 베프도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사람은 신이 아니기때문에 독심술을 할 줄 모른다. 그저 미루어 짐작하고 말 뿐이다, 그 짐작조차 나조차 모르는 사이에 나한테 유리하게 작용할 뿐이다. 괜찮다니까 괜찮을거야.. 괜히 아닌게 아닐까 고민할 필요없지.. 괜히 성가시게 일 만들 필요없어. 정말 힘들면 말하겠지.. 그때 가서 봐줘도 괜찮아. 독립심을 키워야지. 내 삶도 허덕거리는데 누굴 위로하겠어...

잘못된건 아니다. 누구나 내 손톱밑에 상처를 가장 아파한대도 이기적이라 말할 수 없다.

삶이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렇게 팍팍하고 건조하고 하루하루 견디는 힘만 남겨줄 뿐이다.

천지 엄마도 천지의 순진한 표정을 믿었고 만지도 천지나 자기나 별 다르게 없을거라 생각했을 것이고 화영이 조차 자신을 견뎌내는 천지가 더 강해보여서 더 미웠을 수도 있다.

미라는 제 무게에 허덕이고 있으니 조금 더 무게가 가벼워보이는 천지가 어쩌면 가장 밉고 싫었다는게 이해가 간다.

사실 소설을 보면서 난 미라가 참 싫었다.

다 알고 있다는 듯, 자기가 가장 정의롭다는 듯 난 너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니가 거절한거야.. 하는 값싼 자존심을 내세우는 캐릭터였다. 흔히 왕따가 있는 교실에서 내가 아니니까 난 나쁘게 한건 아니까. 난 뭐라고 충고라도 했으니까.. 하고 자기위안 자기 변명에 만족하는 젤 저질스런 계집애처럼 보였다. 화연이조차 그럴만한 이유가 보였고 상처가 보였는데.. 사실 미라의 상처를 나는 보지 못했다. 자기 못난 아비때문에 친구에게 그럴 수 있을까는 생각 못했고 (책에서 그 아비가 어떤 인물인지 보여주지 못했기때문이라고 변명하면서...) 절대 자기는 나쁘지 않다고 믿는 젤 재수없는 기집애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영화에서 죽은 천지못지않게 그리고 화연이 못지 않게 상처가 깊은 아이가 미라였다.

그 어린아이는 자기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고 그래서 누군가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고 내가 받은 아픔이 너무 커서 타인의 아픔을 공감할 수 없었다. 천지가 얼마나 아픈지 몰랐으니까

그저 아직도 철없고  화연이를 견뎌내는 천지가 더 무섭고 재수없다고 느끼는 평범하지만 상처가 더 깊은 아이였다.

미라의 아픈 속을 들여다 봐주는 건 그래도 언니 미란이여서 참 다행이란 생각도 했다.

만지와는 다르게 엄마처럼 동생을 보듬는 미란이가 있어 미라도 조금은 위안이 되겠구나 싶어 다행이라 싶었다.

 

영화에서는 책에서보다 만지가 입체적으로 나왔다.

책에서는 동생의 죽음을 알고 싶어하는 언니.

동생과는 다르게 교우관계나 성격도 괜찮고 만사 쿨한 멋진 하지만 조금 냉정한 언니고 딸이란 생각을 했었다. 꽤 괜찮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는 만지도 참 많이 아팠다.

겨우 열여섯 정도 된 아이가 보여주는 쿨한 모습이 아팠다.

쿨하다는 건 좋은 거 아니다.

난 상처받고 싶지 않다. 난 거부당하고 싶지않다. 내가 따를 당하는 거 아니구 내가 너희 모두를 따 시키는 거라고 그렇게 단단한 갑옷으로 무장한 채 세상에 맨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가장 소심하고 처절한 몸부림일 뿐이다.

저 어린게 얼마나 상처가 깊으면 쿨하게 사는 법을 배웠을까

이상한 친구는 안사귀면 되고 그래서 친구가없으면 혼자 다니면 되고 먹기 싫으면 안먹으면 그만이고 싫은건 안하면 그만이고...

상처가 없는 만큼 관심도 없는 거고 ...

만지도 천지만큼 아프고 힘든 아이인데 그 요령까지도 이미 알아버린 너무 빨리 철이 들어버린 아이같았다. 엄마도 이해해야하고 동생도 보살펴야하고 그래서 내 감정같은 건 이미 박제시켜 버려야 하고... 친구도 상처받지 않을만큼 거리를 두고 있고..

차라리 화연이처럼 극악스럽게 굴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더라도 자기의 약한면을 화려하게 포장해서  해소해버리는게 정신건강엔 낫지 않을까 싶을 만큼..

화연인 크게 너무 사악하고 그래서 자기가 다시 공격받고 욕을 먹은 만큼 자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만지는 이미  욕을 먹거나 실수를 하거나  하지 않은채 자라버려서 그게 마음이 아프다.

 

함께 영화를 본 작은 아이가 그랬다.

천지 언니가 꼭 우리언니같애.

그닥 친구한테 잘하는 것도 아닌데 친구도 많고 쿨하고 뭐든 나보다 나은거 같고 잘아는 거 같은게 우리 언니같애.

그래 나도 만지를 보면서 그 생각 했어.

썩 만족할만큼은 아니지만 알아서 잘하는, 그래서 손이 덜 가서 편하다고만 생각했고 가끔 기집애가 냉정하고 깍쟁이같다고 여긴 내딸이 어쩌면 내가 신경 더 쓰는 막둥이보다 더 아픈건 아닐까. 내가 못보고 안보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친구문제로 징징거리고 소리치고 아파하는 딸은 뭐라고 조언도 하고 함께 욕도 하면서 견디게 했는데 어떤 문제도 입밖에 내지 않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큰 딸을 내가 너무 믿고 둔건 아닐까  싶어졌다.

아직 채 15년도 못산 아이들은 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 찌질해도 상관없고  대책없이 굴어도 상관없고  미친듯이 빠지고 상처도 입고 또 돌아서면 좋아라 웃어제끼기도 했으면 좋겠다.  저게 정말 호르몬의 문제가 많구나. 미친 중딩 맞구나 싶게 그렇게 드러내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걸 견디는 힘도 내게 있으면 좋겠다. 다 지나가리라... 하고 도를 닦을 힘도..

 

결론은 영화가 꽤 괜찮다는 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POSTER

 

딸 사라 폴리는 돌아가신 어머니 다이앤에 대한 여러사람의 기억을 모은다. 이 영화는 어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 가족 친구 그리고 동료들이 모여 자신이 아는 그녀에 대한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며 진행된다. 배우였고 자유분방했고 언제나 자유로웠다는 다이앤 그러나 간혹 사람들은 ㄱ  ㅡ녀가 뭔가를 감추고 드러내지 않은 면도 있다고도 한다. 다이앤은 여러사람들의 기억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흩어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농담처럼 사라는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말을 듣곤 했다. 그 농담에 대한 진실을 찾아가는 도중 뜻하지 않게 사라 폴리는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자유분방한 다이앤은 외도로 첫번째 결혼을 실패하고 아이들의 양육권도 빼앗기고 그 당시 신문에 날 만큼 부도덕한 여자로 비춰졌다. 두번째 결혼한 사람이 같은 배우였던 현재 폴리의 아버지였다. 두번째 남편은 조금 재미없을지라도 가족을 위해 배우를 포기하고 보험 세일즈를 할만큼 책임감이 강한 남자였다. 그리고 다이앤은 연극공연을 하기위해 집을 떠나 있던 동안 또다른 남자를 만나고 폴리를 임신한다.

이 모든 사실을 다이앤이 죽은 후 가족들에게 밝혀진다 하지만 이 비밀이 이 영화의 중심은 아니다.

가족들은 어머니 아내 친구였던 다이앤을 기억하면서 저마다의 기억이  각자의 호불호에 의해 왜곡되고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을 기억하고 과장한다.하지만 각각의 기억속 다이앤 역시 다이앤의 본모습이다. 자유롭고 덜렁거리는 다이앤 그러나 헤어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헤어질 때면 언제나 눈물을 보이던 다이앤 남편과 맞지 않다고 느끼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다이앤

어쪄면 각자는 다이앤을 기억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 속에 쌓였던 뭔가를 털어버리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비밀이 드러난다.

순간 카메라 앞의 가족들은 모두 놀라 아무말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이 길지 않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아하.. 그런 일이 있었구나.  역시 그랬었구나.

가족들의 표정은 우리 정서로는 너무나 쿨하고 단순하다.

특히 가장 배신감을 느낄 아버지의 반응은 감동적이었다.

덤덤하게 듣고 있던 아버지 하지만 아무것도 변할 건 없다며 안아주는 딸에게 애정과 감사를 느끼는 아버지. 그 아버지가 말했다.

너의 친부가 누구이든 너가 너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않니.

너는 여전히 우리의 막내 딸이고 가족이라고 아버지는 말없이 말한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이 영화의 나레이션을 쓰고 읽어준다.

아버지의 목소리로 이어지는 영화는 그래서 더 따뜻하고 뭉클하다.

 

 

지금 정작 당사자인 다이앤은 없다. 단지 그 주변 사람들의 의견이 있고 기억이 남았을 뿐이다.

그래서 정작 본인은 한 사람이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다이앤은 제각각이었다.

기억은 불완전하고 주관적이다. 하지만 그 모든 기억이 거짓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제각각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 간직하고 싶은 것들을 선택해서 기억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억은 각색되고 포장되고 퇴색하기도 한다. 하지만 각자가 다이앤을 기억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그 감정들 역시 거짓이 아닐것이다. 기억은 변하고 사실에서는 멀어지겠지만 진실은 여전할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왜 감독이 이런 내밀하고 사적인 문제를 영화화 했는지 의아했다.

우리 정서로는 전혀 맞지 않은 이야기였고 결국 내 엄마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 아닐까 했지만 딸은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고 진실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 용기앞에 가족은 사랑을 드러내고 함께 감싸안고 모두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한다.

그래서 영화는 아름다웠고 감동적이었다.

마지막 이젠 늙고 쪼글거리는 아버지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할때는 눈물이 났다.

그 아버지에게는 긴 시간동안 쌓인 미움 그리움 회한 등등이 뒤섞였을 감정이 있을 것이고 이제 그것 모두가 사랑이라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담담하고 차분한 그 아버지의 나레이션이 더 없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예전에 읽었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에 대한 팟캐스트를 들었다.

불완전한 기억 그리고 잃어버린 사실들이 오해를 만들고 진실을 왜곡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가 가진 것을 믿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삶이라는 것이고 그럼에도 지치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것 그리고 후회하고 반성하며 그래도 사랑이었고 추억이었다고 믿는 것들이 있을 거란 생각도 잠시 했다.

 

나는 지금 이순간 무엇을 오해하고 잊고 살아가고 있을까. 나의 오해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질 안았으면 좋겠고 나중에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속에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것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영화 말미 정말 긴장이 팍 해소되는 짧은 장면이 나온다. 절대 놓치지 말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겨울왕국이 불편한 이유는 내가 딸을 둘 키운다는 사실때문만은 아닐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왕에게는 딸이 둘 있었다.

척 보기에도 큰딸은 단정하고 지혜롭고 자상하다.

작은 딸은 세상의 모든 막내가 그러하듯이 활발하고 호기심이 강하고 충동적인 면도 있다.

아이를 키워보면 안다.

내 속에서 나온 아이들이고 각각을 보면 둘다 나를 혹은 나의 배우자를 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정말 다르다.

큰 딸 앨사는 능력을 타고 났다. 만지는 것들을 얼음으로 만드는 능력

그건 동생에게 즐거운 눈놀이를 하게 만들 수도 있고 언제나 신나게 스케이트를 즐기게 할 수도 있지만 한편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들기도한다.심지어 사랑하는 동생까지도

그 능력이 어떠한가는 일단 제쳐두고

왕에게는 능력을 가진 첫째와 평범한 둘째가 있었다.

왕과 왕비는 그 능력의 비범함과 무서움을 알고는 그 능력에 집중한다.

엘사를 누구와도 접촉시키지 않고 그 능력으로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 하면서 아이를 키운다. 하지마나 동생 안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이미 지워진 기억으로 언니의 능력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언니랑 놀지못하는 쓸쓸함과 외로움만 가지고 있다.

공부 잘하는 큰 아이가 있다. 언제나 일등이고 백점이다. 부모는 당연히 욕심을 낸다.

조금만 더 뒷바라지 하면 우리가 조금 더 노력을 하면 충분히 잘 될 수 있고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아이... 그 아이에게는 그 아이만의 특별한 교육과 훈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길로 매진한다. 아이도 성실하고 순종적이다.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부모말에 따른다. 훌륭한 커리큘럼 좋은 선생님 우수한 코스를 따라 아무런 저항없이 순순히 따른다.

아이의 빛나는 미래는 멀지 않았다.

그리고 또다른 아이가 있다. 평범하고 명랑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그나이때 아이들처럼

아이는 늘 제 형제와 놀고 싶다. 눈싸람을 만들고 물장난을 하고 소꼽놀이를 하고 수다를 떨고 싶다. 하지만 엘리트코스에 들어선 언니는 시간이 없다. 늘 문  저 너머에서 무언가에 몰두한다.

언니가 그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으면 누구도 떠들거나 뛰어다닐 수 없다. 언니를 방해하면 안된다. 언니가 무얼하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나와서 나와 놀아주기를 한없이 목을 빼고 기다린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한 아이는 점점 자기에게 얹혀진 기대감이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도망치고 싶지만 이미 늦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하기엔 이제 두렵다. 나보다 나은 경쟁자가 보이기 시작했고 내 한계를 알것도 같고 무엇보다 그 모든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그들이 나에게 실망하는 것이 가장 두렵다.

그래서 이젠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갈 수가 없다. 이방에 숨어서 계속 나를 다그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한 아이는 외롭다. 혼자 뛰고 노래하고 놀지만 외롭다. 자유로운데 뭔가가 부족하다. 그냥 자유롭지 못한 잔소리를 듣는 누군가가 부럽다 어쩌면 그 잔소리는 사랑의 다른이름이고 관심의 또다른 얼굴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쩌면 자유로운것이 아니라 버려진게 아닐까.. 아닐거라고 스스로 되내이지만 뭔가 나만의 것을 가지고 싶다.

그리고 왕과 왕비가 죽고 성문이 열린다.

이제 두 아이는 성인이 되었고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언제나 성문을 꼭꼭 닫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한 아이는 자신의 본모습이 들킬까 두렵다.

누구에게도 본래 얼굴을 보일 수 없어서 외롭고 무섭다.

한 아이는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게 누구이든 무엇이든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있다면 나를 던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다.

세상이 두려운 한 아이는 누구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첫눈에 사랑에 빠진 제 형제를 경계하고 힐난하고 반대한다.

오로지 관심만을 원하던 한 아이는 제 형제의 거부가 너무나 충격이다. 나는 왜 사랑을 할수가 없는가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거부하는가

그래서 사건이 터지고 자매는 헤어진다

 

큰 아이가 태어나고 나도 다른 부모처럼 기대가 컸다.

아이가 자라 무엇이 될까 나와 어떤 관계를 맺게 될까..

아이를 보면서 나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아이는 영리하고 순종적이었다. 나름 고집이 강했었는데 그래도 꺽을만큼이었고 내가 잘 콘트롤 할만큼의 호기심도 있었다.

자라면서 아기나라를 하고 한글을 배우고 수를 배우고 영어를 배우고

순간순간 삐끗거리는 순간이 있었지만 아이는 잘 따라오고 있었다.

다행히 책도 좋아하고 혼자서도 잘 읽었고 호기심도 많았고 또래에 비해 조숙한 편이었다.

이렇게만 가면 꽤 괜찮을거라고 나는 스스로 만족했다.

그리고 둘째가 있었다. 한창 큰애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무렵에 태어난 둘째였다.

세살터울... 어쩌면 가장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는 터울이었다.

막 세상에 호기심을 보이고 공부를 시작하는 아이에게 집중하려면 동생은 조금 성가셨다.

다행히 둘째는 잘 잤다. 혼자서도 잘 자고 깨서도 울지 않은 아이였다.

낮잠을 3시간씩 자는 둘때덕에 큰아이에게 집중하는 게 가능했다.

어느정도 나이가 되어 둘째도 큰아이처럼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자꾸 뒤로 쳐졌다.

조금 늦어도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학교에 들어간 큰 아이는 모범생이었다. 수줍고 소극적이긴 하지만 영리하고 따라가는데는 문제가 없었고 기대에 어긋나지도 않았다.

둘째는 조금 문제였다. 어느 순간 낯을 가리기 시작했고 낯선 환경에서 마구 소리를 지르고 제멋대로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가족이외에 누구와 도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하고싶지 않다는게 강하게 느껴졌다.

수건없이는 스트레스가 심했고 외출시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기도 하고 고집스럽고 누가 뭐라고 하든 어디서든 고집을 피웠다. 어느순간 순한 큰 아이가 둘째를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그 전부터 나도 그랬던거 같다. 힘든 아이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다.

큰아이때 하지 않던 아기학교를 다니고 문화센타를 다니고 아이 친구엄마와 어울리고  아이는 조금씩 나아졌다. 고집은 여전하지만 점차 사회성은 길러졌고 나름 매력이 있어 미움은 받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작은 아이가 편해지면서 나는 큰 아이와 함께하는 긴장감과 경쟁을 작은 아이앞에서 풀었다. 그냥 그 아이랑 있으면 늘어졌고 편해졌고 내버려뒀다. 나도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큰 아이가 전투라면 작은 아이는 휴식이었다. 남들보다 많이 늦었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손끝조차 꼼짝 하기 싫었다. 어쩄든 되겠지 싶은 마음만 들었다.

 

큰 아이는 어느순간부터 평범해졌다. 나도 잘하고 싶지만 엄마의 기대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소리쳤다.

작은 아이는 엄마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했다. 언니랑은 싸우든 언쟁을 하든 항상 말을 하고 상대를 하는데 나랑있으면 늘 피곤하고 가만있기만 한다고 했다.

틀린말이 아니라는 사실에 화가 났다. 하지만 그렇게 화를 내는 내게 더 화가 났다.

갑자기 내가 실패했다는 생각만 들때도 있었다.

다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아이는 초등때 반짝하는 전형적인 중학생이 되었고

작은 아이는 학습이 느리고 욕심과 하고싶은 건 가득한데 현실은 소심하고 부끄러운 고민을 가졌다. 나는 두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다.

어느 순간  이렇게 아이들이 내 손을 떠나는 순간이 온다는 게 아니라 원래 내가 가진 능력이 아이에게 몰두하는 에너지나 능력이 없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아이는 엄마의 관심이나 능력으로도 자란다.

하지만 가장 쉬우면서 중요한건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걸 나는 몰랐다.

어정쩡하니 아이에게 몰입하는 부모 흉내나 낼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의 삶을 살았어야 헸다.

그랬더라면 큰아이에 대한 기대감은 조금 가벼웠을 것이고 작은 아이에 대해서는 관심과 훈육이 들어갔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몰두하고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방임해버린것

그것이 지난 10녀년간의 나의 불찰이다.

하지만... 정말 다행이도..

내 아이들은 아직 문제는 없다.

사회적 기대나 어떤 목표치에는 한없이 못미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착하고 바르고 평범한 아이다.

내가 조금 덜 기대하고 비범하기 바라는 욕심만 내려놓는다면

뭐 단점이야 있겠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아이들이다.

 

영화에서 왕과 왕비가 조금더 현명했다면  아니 여전히 나처럼 어리석었더라도 조금 더 살았다면 두 딸들이 그렇게 모진 고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 형제를 오해하고 내 능력을 믿지 못하고 세상을 온통 얼려버리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내 아이들에게 바람이 있다면 (어쩌면 이것도 욕심이지만)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고

세상에 감사하지만 아닌것은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으며

둘이 사이 좋게 의지하며 세상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요즘 세상엔 부모가 둘려쳐줄 수 있는 울타리가 많다. 내가 조금 더 돈이 많다면 능력이 있다면 지위가 있다면 내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이 많아진 이상한 세상이다.

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어떤 눈에 보이는 건 하나도 없다.

내 노년조차 불확실한 부모에게 태어난 내 아이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그건 어쩌면 행복했던 기억과 그래도 자랑스러운 부모의 모습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영화관을 나오면서 결심했다.

내 삶을 좀 더 치열하게 살아야겠다....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말고 또 있을까?

부끄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