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은 마르크스가 생산수단과 관계라고 정의한 것보다 훨씬 많은 뜻을 지니고 있다. 계급은 당신의 행동 그리고 당신이 인생에 관해 세우는 기본 가정에 영향을 미친다. (계급에 따라 정해진) 당신의 경험은 당신이 인생에 관해 세우는 기본 가정들 당신이 배운 행동양식, 당신이 자신과 타인에게 기대하는 점. 미래에 대한 당신의 생각,당신이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방식 당신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중산계급 여성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계급'을 기꺼이 그대로 인정하더라도 계끕에 따른 행동양식이 존재한다고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계끕에 따른 태도는 계급행동을 실제로 논하거나 스스로 계급행동을 바꾸지 않으려는 교묘한 속임수다. 그러나 이런 행동양식은 반드시 인식되고 이해되고 바뀌어야 한다.

 

                               

                벨 훅스 < 페미니즘>중 인용된  리타 매 브라운의 < 참을 수 없는 한계>에서

 

 

영화와 위 인용문이 상관있는지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고 책에서 읽었던 저 문구가 떠올랐다.

누구나 자기의 위치에서 세상을 보면서 그것이 전부라고 믿는다.

세상은 넓고 다양하고 촘촘한 층위의 계급이 존재하고  차이가 존재하고 그로인한 차별이 있고 입장이 있고 관점이 다르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정의라든가 상식이라든가 평균적이고 객관적인 판단 근거가 존재한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내가 믿는 근거가 내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고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 근거가 나를 보호하는 막이라는 걸 모른다. 그  근거가 나를 보호하기때문에 기준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내세우는 기준이 누군가에게는 기울어진 저울이라는 것도 관심이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공평과 불평등 그리고 차별은 그저 책에서 존재하고 관념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나는 어떤 차별도 어떤 편견도 없다고 믿는다.

내 기준에서 판단하고 내 기준에 맞지 않은 것을 거부할 뿐이다

나 역시 그럴 것이다.

 

살인으로 30년을 복역했던 미스미는 출옥해 자신을 고용했던 식품공장장을 살인해서 태워버리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의 변호를 맡은 냉정한 시게무라는 그를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으로 형을 낮추기로 한다. 법을 기준으로 미스미의 사건을 다시 검토하고 살인의 의도와 살인과 강도의 순서 그리고 그런 짓을 저질렀던 이유등을 파헤치면서 그저 냉정하게 법의 잣대로 조금이라도 그의 형을 낮추려고 한다. 물론 그게 시게무라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건을 조사할수록 미스미는 자꾸 말을 바꾸고 피해자의 딸사카에와 친하게 지냈다는 사실까지 드러난다. 게다가 판결을 앞두고 미스미는 그간의 모든 진술을 뒤집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시게모리를 극심한 혼란이 빠뜨린다.

 

냉철하게 법으로만 미스미를 대하는 시게무라.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죽였는지 그리고 그 죽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런건 관심이 없었다. 그저 법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형을 낮출 것인가를 기본값으로 두고 미스미의 범행을 기계적으로 파악한다. 연인을 끊은 딸을 통해 조금이라도 연민을 이끌어내볼까 하는 마음에 홋카이도까지 가고 여러번 면회를 하며 그의 이야기를 듣지만 그건 그저 변론을 유리하게 이끌기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런 시게무라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굳건하게 가지고 있던 관점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미스미 역시 자기와 다름없는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이혼절차를 밟고 있는 자기 역시 부모때문에 상처입은 딸이 있고 자기가 조금이라도 무심해지면 그 딸 역시 미스미와 딸이나 피해자의 딸 사카에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걸 예감한다. 모두가 다르다고 여기던 관점이 흔들리고 혼란스러워진다.

사람을 죽였던 미스미는  죽은 카나리아를 묻어주고 남은 카나리아를 자유롭게 해주었던 면을 가지고 있고  사카에게 가지고 있는 아픔을 공감하고 그를 위해 무언가를 했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은 변하지 않은 존재야  와 사람은 변화 시킬 수 있어 라는 믿음 두가지중 어떤 것이 맞을까를 이야기하던 시게무라와 그의 아버지의 대화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든 그  의견자체가 오만하고 이기적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사람을 변화시킬수 있다는 믿음은 무언가를 무조건 밀어붙이게 만들고 변화시킬 수 없다는 믿음은 그대로 사람을 쉽게 판단해버리는   제각각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미스미를 바꿀 수 잆다고 믿음으로 사형대신 30년형을 선고했던 지난날 판사였던 시게무라의 아버지와 미스미가 강도로인한 살인이라는 것을 뒤집어 사형대신 무기징형으로 낮추려는 시게무라역시 미스미를 보는 관점은 다르지만 철저히 자기 입장(법)에서 대상을 판단할 뿐이다.

 

영화는 정말 미스미가 살인을 했는지 사카에대신 죄를 뒤집어 쓴 것인지  미스미의 진실은 무엇인지 하나도 알려주지 않고 끝을 맺는다. 어쩌면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되묻고 있는 듯했다.

사람의 삶과 죽음을 판단하는 것이 법이라는 이름뒤에 있는 사람에 의한 것이라고 교묘하게 비웃는 미스미의 말과 첫번째 살인 그리고 두번째 살인에 이어 세번째 살인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의지가 뒤섞인 표정과 행동은 우리는 어떤 위치에서 사람을 바라보는가? 사건을 판단하는가를 묻고 있는 듯했다.

 

시게무라는 법대로 하면 모든 일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미스미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미스미를 살리기 위해 사카에의 진실을  이용해야 할 때와 덮어야 할때를 판단하는 것조차 그에게 낯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유있게 뻔뻔하게 매번 말을 바꾸는 미스미앞에 모든 것이 진실일것도 같고 모든 것이 거짓일것도 같은 애매함 앞에 길을 잃는다. 그가 철석같이 믿었던 법조차 그에게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한 인간에게는 법으로 판단하는 것 이외의 다양한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과 과연 법이라는 것이 만병통치약인가 하는 모호함까지 더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거리에서 머뭇거리는 시게무라를 내려다 보며  화면은 어두워진다.

십자가 형채로 남은 시신을 태운 자국과 짧은 꿈속에 눈싸움을 하고 드러누었던 미스미 시게무라 사카에의 모습을 위에서 보면 세걔의 십자가 형상이고 마지막 사거리역시 십자가 모습이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심판하는 일에 과연 정의라는 것만 존재할까 내가 믿는 신념은 항상 옳은 게 맞을까? 시게무라의 혼란은 아마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삼성 이재용의 판결이 났다는 기사가 떴다.

1심과 다르게 집행유예로 판결이 났다는 기사와 해맑게 배시시 웃고 있는 50넘은 이재용의 사진을 보니 영화나 현실이나... 하는 생각을 한다.

 

법대로 하자구.. 법대로 해.. 라고 호기롭게 소리치며 법이 모든 만병통치약인듯 여기던 때도 있었다. 법이란 모든 것을 정의롭고 공평하게 판단해주리라는 믿음이 있었을 때는 행복했다.

결국 법이라는 것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고 사람의 일이란 완벽하고 순결한 공정함 걕관성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법을 판단하고 해석하고 집행하는 이가 부족하고 편견이 가득한 주제아 정의롭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 세상에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평론가 이동진의 평을 보면서 무릎을 치고 아하.. 이렇게 봐도 되는구나 하고 감탄했지만

내가 영화보고 나온 추운 날 어떤 판결은 또 다른 방향으로 영화를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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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기억 가운데 단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무얼 선택하시겠습니까까?

 

영화는  당혹스럽고 생뚱맞은 질문을 던지고 시작한다.

내가 죽었고 죽어 저 세상으로 가기전 단 하나의 기억을 선택하면 그 기억 하나만 남기고 모든 것은 사리진다. 나는 단 하나 내가 선택한 그 기억만을 지닌채 이 세상을 떠나 저 곳으로 간다.

사람들은 담담하게 자기 삶을 돌아보거나 당혹스러워하며 기억을 헤어린다.

오래 산 사람은 많은 기억속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곤혹스럽고

짧은 생을 산 사람은 많지 않은 기억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

가장 좋았던 기억을 하나씩 꺼집어 낸다.

객석에서 나는 지금 이순간 내게 던져진 그 질문에서 나는 어떤 기억을 선택할까 생각한다.

이 사람과의 추억을 선택하자니 저 사람이 걸린다.

모두가 함께 했던 기억은 사실 내가 꼭 하나로 선택하기엔 망설여진다.

결심했다.

그냥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기로 한다.

누군가 내가 사랑했던 사람 사랑해줬던 사람  소중하고 의미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그냥 나 자신에게 집중한다.

내가 가장 좋았던 순간 언제나 꺼내 볼 때마다 빙그레 웃음지을 수 있는 기억은 무얼까

 

영화속의 등장인물들은 쉽게 그 순간을 떠올리기도 하고 자기의 삶 전체를 되돌아본 뒤에 겨우 찾아내기도 하고 선택을 바꾸기도 한다. 그리고 끝내 그 한 순간을 꺼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소중했던 시간은 남들에겐 별 의미 없는 순간일 수도 있고

내가 선택한 그 행복한 순간을 함께 한 사람은 나와의 순간을 선택하지 않기도 한다.

그렇게 흘러가는것이 삶이다.

 

그리고 선택된 장면을 만들기 위해 저승 (즉었으니 저승이 맞겠지?) 사람들은  무대를 꾸미고 그날의 색감이나 상황 분위기를 세세하게 살핀다. 아니 죽었으면 무슨 초능력이 있는거 아니었나?

아날로그적으로 몸으로 무대를 만들고 꾸미고 촬영한다.

그 과정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기억은 사실과는 다르다.

사실 그대로 재현한다면 그 사람의 일생이 담긴 비디오를 보며 그대로 만들거나 차라리 비디오의 한 장면을 짤라 써도 무방하다.

그러나 기억은 그 순간의 내 감정과 생각 상황 그리고 시간의 더께로 조금 기울어지고 덧칠해지고 한모퉁이는 떨어져 나간 오롯이 내 머리 속에 있는 나만 아는 순간이다.

그래서  이곳도 저곳도 아닌 중간의 그 사람들은 자꾸 기억을 물어보고 고민하며 세심하게 각각이 가지고 있던 그 순간을 재현해준다.

그리고 그 기억을 가지고 사람들은 기쁘게 떠난다.

 

영화 가운데 달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달은 늘 그 모습 그대로 있는데 보는 사람의 위치와 상황에 따라 달라보이는 걸 달이 변했다고 한다고. 뭐 그런 대사.....

요즘 하는 생각인데 세상에 순수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절대적으로 순수함이란 인간의 머리속에 추상적으로 존재할 뿐 어떤 불 순물도 없는 순수가 있을까

중립이 불가능하고 순수도 없다.

모든 순간에 모든 상황에 각각의 입장이 있고 생각이 있다.

나는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지 않고 중립이야 .. 이건 ㅇ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야 하는 그 수말을 뱉는 순간에도 많은 생각과 감정과 정의가 그리고 이런 저런 것들이 섞여버린다.

그래서 제각각의 입장이 있고 사정이 있고 논리가 있다.

다만 비슷하게 묶을 수 있을 뿐이지 같지 않다.

모두가 다른 기억을 가지고 떠난다.

설령 내가 선택한 기억속의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기억을 선택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건 받아들여야 한다.

 

감독은 영화에 일반인을 등장시켰다고 했는데 보는 내내 누가 배우이고 누가 일반인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자기의 기억을 떠올릴 때의 몸짓이나 표정 그 모든 것은 대본이 없어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보였을까?

마지막 부분에 가짜 벛꽃잎을 비닐 봉지에 담아 건내던  할머니의 무심하고 따뜻한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그건 어떤 연기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감독이 무얼 말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삶에서 꼭 가지고 싶은 기억은 무엇인지

그리고 달은 변하지 않는데 변한다고 믿어버리는 내마음은 무엇인지

그리고 삶의 기억을 닮은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다.

 

사실 춤고 너무 잔잔해서 조금 졸았지만

극장에서 나와서 자꾸 생각나도 되씹을 거리가 많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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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니엘 블레이크

 

시스템은 점점 정교해진다,

자본주의는 굳이 인간의 노동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

어쩌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노동위에서 성장하고 몸집을 불려왔지만

그 자본주의가 완성된 곳에서 인간은 없다.

 

완벽한 시스템속에서 인간의 목소리를 듣기 힘들다,

무언가 문제가 있거나 의문이 있어서 물어보고 싶어도 우리는 먼저 기계음을 들어야 한다,

전화 버튼을 누르고 나면 녹음된 기계음을 듣고 또 한참을 유료로 기다린다,

그리고 몇번의 질문에 목소리없이 대답하는 순간을 지나야 사람을 만난다,

때로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일을 처리해야할 경우도 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가장 편리한 인테넷 그리고 넷망을 통해 정보처리가 되고 물물교환이나 매매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하루종일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 모든 일을 처리할 수도 있다, 먹고 자고 소비하는 일을 사람을 만나지 않고도 가능한 세상이다,

 

주인공 다니엘 브레이크는 40년을 목수로 일한, 지금은 심장병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아마 60대 백인 남성이다, 그는 한번도 컴퓨터를 사용해본적이 없고 연필이 익숙하고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것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마우스를 몇번 클릭하고 드래그를 해야 실업수당을  신청할 수 있고 의료수당의 문제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세상에서 다니엘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첨단의 기술로 편리하고 세련된 세상에는 사람이 없다,

I  나 라는 존재는 없다,

영화 첫 장면에서 화면없이 대사가 나온다,

의료수당을 위햔 면접에서 면접관의 질문과 다니엘의 답변이 나오는데 대부분의 질문은 예와 아니오로 이루어진다, 뭐든  다른 말이 첨언되면 에러가 된다, 보충설명이나 다른 구체적인 상황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저 묻는대로 예 아니오 두가지뿐이다,

컴퓨터가   0 아니면 1 두가지만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세상은 그것을 발달이라고 하고 기술혁신이라고 하고 편리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날로그 인간이다,

자기처지도 어려운데 더 어려운 싱글맘 케이티 가족을 돕는다,

집안 곳곳을 손봐주고 전기료를 내라고 돈을 주기도 하고 아이들을 인간대 인간으로  말을 걸고 귀를 기울인다,

케이티는 다이엘보다 더 처지가 딱하다,

돈이 없어 아이들에게만 식사를 주고 자기는 과일로 연명하고 식료품 배급소에서  허기를 견디지 못하고 통조림을 따서 손으로 허겁지겁 먹어버린다, 배가 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배급소에서 정작 케이티가 필요했던 것은  생리대였다,

그녀가 어렴게 뱉은 질문은   '혹시 생리대는 없나요?" 였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의식주만 필요한게 아니다,

의식주는 기본일 뿐이다,

사람답게 숨쉬고 살기위해서는 필요한게 또 더 있다, 풍족하게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인간답게 생존하기 위해서  또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것이다,

언저리로 밀려난 싱글맘 케이티에게 생리대는 음식 이상의   절박한 무엇이다,

결국 그녀는 슈퍼에서 물건을 훔친 것을 들키고 급기야 매춘으로 나서게 된다,

젊고 아직은 아름다운 여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선택은 결국 자신을 놓아버리고 자신의 자존감을 무시하는 것이다,

 

시스템은 잘못이 없을 것이다,

입력되고 세팅되어진대로 일을 행할 뿐이다,

네 아니오의 대답만을 세팅했으니 그 이상의 말들은 과부하가 걸릴 수 밖에 없고

인간을  알지못하고 의뢰인 고객 사용자 만 알 수 밖에 없고

제각각의 개성이나  심성을  넣지 않아서 보험번호나 사회보장번호따위로  분류할 뿐이다,

결국 그 시스템은 편리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배제한다,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엄마는 매춘을 결심하고 권리 하나 얻기위해 여기저기 시혜를 구걸하던 다니엘은 결국 자긴을 구직수당 대상자에서 이름을 빼라고 한다,

  :자존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한바탕 저항의 뭄부림을 치지만 결국 순응할 수 밖에 없다,

승소가 확실한 항고를 앞두고 다니엘은 어이없이 숨을 거둔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항고할때 말하려고 준비했던 것이 그의 유언이 되어버렸다,

 

사람이 편하려고 개발된 시스템에서 정작 사람은 없었다,

함리적이고 신속한 과정이라는 것이 사람을 소외했다,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었고 자기 처지를 사실적으로 알리고 싶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 구걸하지 않았고 누군가의 것을 빼앗지도 훔치지도 않았고  어떤 일확천금을 꿈꾸지도 않았지만 다니엘 블레이크는 그렇게 가버렸다,

사람이니까 여기 사람이 있으니 사람의 말을 들어달라고 했을 뿐인데 아무도 듣지 않고 절차를 거치고 인터넷을 거치고 기다리고 맞추라고만 했다,

사람이 너무 흔해서일까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사람으로 대우받는 일이 정말 어렵다,

 

 

아직 삼성동 집 (사저라는 말도 쓰고 싶지 않다, 사저는 무슨..) 난방이 되지 않아서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한다, 아직 추운계절이라 난방이 필요하고 도배가 필요하고 인터넷망이 필요하단다,

그래서 일개 개인이 되어버린 인간이 일개 개인은 쉽게 들어갈 수도 가까이 갈 수 도 없는 청와대에서 빼대고 살았다 ( 경상도 울 할머니 말투인데 이렇게 딱 맞을 수가 없다)

인간적인 호의로 그정도는 봐주자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인간적인 호의 인간적인 도리, 정... 그래 좋다

그런데 누구는 인간적인 호의를 받아 마땅하고 누구는 인간적인 흐의따위는 불공정한 예외조항이 되니까 하면 안되는 일이 되나?

누구는 춘삼월 보일러가 안되서 집에 못들어가고

누구는  같은 봄날 차가운 바다에서 나오지도 못하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누군가는 길거리에서 내 목소리를 우리의 말을 들어달라고 그렇게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도  법에 어긋나고 원칙에 어긋나고 시스템에 맞지 않아서  들은 척도 하지 않나?

전세집을 옮길때도 칼같이 만기날을 맞춰야 하고 혹시나 하루 이틀 더 있어야하면 돈을 더 내야 하는 법이다,

돈내고 들어가는 호텔이나 여관방도 체크아웃 시간을 넘기면 추가요금이 붙는다,

인간적인 도리도 있겠지만 그래도 원칙이니까 지켜야 한다고 다들 동동거리는데

누구는 저 삐졌다고 온동네 티 다내면서 입 딱 다물고 엥돌아서 버티고 버티다  나간다,

누구는 사람이고 누구는 짐승인가

 

 

 

 

 

 

 

 

 

 

 

 

 

 

책을 읽고 어떻게 리뷰를 써야햐나  굳이 쓸 필요가 있나 생각했다,

나같이 마르크스는 이름만 알고 들은 풍월이 전부인 사람에게 마르크스의 여러가지 사상과 삶을 보면서 하나 내게 닿은 것은 사람이 우선이다,,, 라는 것이다,

산업혁명으로 노동과 자본으로 부가 축적되는 시기를 보면서 자본이 축적되면 될 수록 사람은 희미해진다, 자본이 자본을 낳는다, 그것은 선명한데 그 자본을 움직이고 생산을 하는 노동은 점점 희미해지고 가치가 보이지 않는다, 그 사회에서 사람이 만드는 노동 자본때문에 소외되는 노동을 먼저 보자고 하는게 마르크스라고 읽었다,

그게 맞는지 아닌지 아리송한 가운데 영화를 보았다,

 

다니엘은 아이의 방에 뽁뽁이를 발라주며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모여 따뜻해질거라고 말해준다,

손으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모빌을 주면서 세상에서 가장 환한 바다속이라고 말해준다,

아이는 노인을 찾아가 이젠 우리가 돕게 해달라고 말한다,

아이가 노인을 안아준다,

그렇게 사람을 위로하는 건 사람일 뿐이다 사람의 체온이고 사람의 마음이다,

 

영화는 다니엘에 항고판정을 받지도 못하고 사망한다,

항고가 잘 되더라도 다니엘이 승리하는 건 아니다, 그저 의료수당을 받을 뿐이다,

그러나 그나마도 보지 못하고 다니엘은 사망한다,

어떤 작은 승리도 없이 그냥 그렇게 허망하게 영화는 끝이 난다,

결국 어떤 것도 작은 마무리도 없이 여전히 진행중이라고 감독은 말하고 싶었을까

 

탄핵이 되고 청와대가 비었다고 모든게 마무리가 된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처웃으면서 자기 잘못은 손톱만큼도 모른다는 얼굴이고

변화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어떻게 될지 나도 너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긴장해야하고 생각해야하고 말해야하고 행동해야할 읾이 계속될 뿐이다,

이젠 좀 쉬자는 마음을 지난 일요일밤 야간도주하듯 돌아와 쳐웃던 그 얼굴을 보고 화들짝 다잡게 되고 오늘 이 영화를 보면서 아직도 계속이구나,,,  생각한다,

아직은 화를 풀어야 할 시간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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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다리   흔들리는 바람 흔들리는 빨래 흔들리는 암실의 액체

흔들리는 마음..마음.. 마음

 

영화는 음악이 없었던거 같다,

너무 고요해서 깜빡 졸거 같았다,

나오는 사람도 단출하다

 

타케루와 미노루형제  그 윗대인 이사무와 오사무형제

누군가는 고향에 남아 고향을 지키고 누군가는 타지로 떠난다,

남은 이는 자유롭게 훌훌 떠난 이가 부러웠고 혼자 고향에 남아 모든 걸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떠난 이는 자기가 고향으로부터 팽개쳐졌다고 믿는다,

 

너는 떠난 이였다,

고향에 남아 아버지의 주유소를 함께 경영하는 형은 남아 있는 이였다,

도회지에서 패션사진작가로 성공했지만 어쩌면 너의 마음속에는 큰아버지  오사무처럼 내팽개치고 혼자 잡초처럼 살아남았다는 억울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음 좋은 형은  속없는 형은 그저 아버지 그늘아래서 다만 아버지의 그 불같은 성정만을 받아주기만 하면 안전하고 평화롭다고 적당히 무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너는 고향에서도 늘 겉돌았다,

어머니 기일에 맞춰 모두가 상복을 입을 때도 너는 혼자 튀는 옷을 입었다,

어머니의 유물은 필요없었고 옛 여자친구도 처음엔 모른 척했다,

고향은 그립지만 지겨운 곳이고 나를 버린 곳이고 이젠 필요없는 곳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너에게 고향이란 적당히 때맞춰가야하는 곳 이상도 아닐것이다, 이젠 어머니마저 없으니 더 그렇다,

형이 마음에 두는 낌새에 어쩌면 순간 욕심을 부렸을 것이다,

여자친구였던 치에코에게 관심을 보이는 형

내가 갖긴 싫지만 남에게 주기는 더구나 형에게 주기는 싫었던 욕심에 너는 치에코와 하룻밤을 보내지만 어쩌면 그 일이 발목을 잡을까봐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치에코의 방에 있는 너의 사진집이 어떤 집요함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다,

함께 놀러갔던 계곡에서 너는 무엇을 보았을까

흔들리는 다리위의 형과 치에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재판진행중 변호사인 큰아버지에게 노상 말했던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는 너의 말은 과연 진실이었을까

너는 형제간의 우애로  형을 도와주는 것이고 순수하고 착한 형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다고 믿었고 형은 결백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순간까지는 형도 너에 대해 그 착하고 순박한  표정과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형이 치에코를 밀었는지 떨어지는 치에코를 잡지 못했는지는 정확히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니 형 미노루도 모를지 모른다,

그 찰라의 순간 나는 치에코를 잡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대로 떨어지기를 바랬을까

내가 손을 내밀어도 내 의지가 없는 거였으면 내가 민것이나 다름잆을테고

내가 차마 손을 뻗지 못해도 마음이 다했다면 그건 노력한 것일테니까

어쩌면 미노루도 모르는 마음을 너는 진심으로 믿었을까

 

구치소 면회시간에 형을 만나면서 형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너도 변했다,

치에코가 술을 마지시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형

내가 그 날 밤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던 형

형이 모든 것을 차지하고 너가 내팽개쳐진 것이 아니라

너는 모든 것을 형에게 얹어주고 자유롭게 탈출했다고 형이 믿고 있다는 걸 알았을때

형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이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말할 수 없었던 그래서 여태 말하지 않았던 말들이 오가고 드러났을 때

너는 다른 것을 기억한다,

 

그 날 그 다리위에서 나는 떨어지는 치에코를 보았다,

그리고 손을 내밀지 않은 형을 보았다,

누구나가 알듯  너가 있던 그 곳에서는 형과 치에코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너는 너가 본 그것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가 본 것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 장면의 의미는 달라져버렸다,

형이 차마 구할 틈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일부러 구하지 않았다, 밀지는 않았을지라도 구하려고 들지도 않았다고 그 사실이 다른 진실을 가진다,

그게 형을 위하는 길이라고 너는 법정에서 말한다,

사실을 말하고 진실을 알려서 형이 다시 좋은 형으로 돌아오라고....

 

그리고 7년이 흘렀다,

이제 바람부는 고향에서 늙은 아버지는 빨래를 널고 빨래를 걷고 애를 쓴다,

너는 아마 그동안 고향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떠났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찾아온 주유소 직원에게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형의 출소일에 가지 않겠다고

여전히 형이 다시 주유소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그 직원을 보면서

아직도 형이 모든 것을 가진거라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빼앗긴건 형이 아니라 너라고...

그러나 우연히 보게된 어머니의 유품

그건 어린 시절 그 계곡으로 놀러갔던 가족의 모습이었다,

환등기속의 어린 너와 어린 형은 너무 다정했다,

 

나는 너무 겁이 많아서 흔들다리는 건너지도 못했지

그런데 타케루는 어려도 용감하게 건넜는데 나는 건너질 못했다고

형이 그 날 치에코에게 말했었다,

그런데 환등기속의 어린 너와 형은 둘이 손을 꼭 잡고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형은 한손은 너를 잡고 한손은 흔들다리의 난간을 꼭 잡고 한발 한발 너랑 건너고 있었다,

내게 꽇을 주고 손을 잡아주고 웃어주던 먀냥 좋아 보이던 형이 그때도 그랬었다,

 

너는 그 장면을 보고 왜 울었는지 나는 모른다,

짐작은 가지만 그게 틀렸을 수도 있다,

 

너는 너가 보고싶으 대로 보이는대로 보았고 그렇게 말했다,

세상사는 인간관계는 사진처럼 사물이 객관적을 적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어서 어떤 사실을 인지해도 결국 내가 가진 감정과 그 상황에서의 감각들 빛과 바람  냄새와 공기에 따라 다르게 저장한다,

사실은 내게로 와서 내가 걸러내고 첨가한 상태로 저장된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억이라고 부른다,

내가 보았으니 사실이다,

그러나 아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속의 상황은 아무것도 사실이 아니다,

진실은 있을 수 있겠지만 저마다의 진실일 뿐이다,

 

너는 어쩌면 그걸 알았을 것이다, 똑똑했으니까

사진을 찍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모른 척했다, 아니 그땐 그렇다고 믿었을 것이다,

진실은 형이 손을 내밀지 않은 것 그래서 치에코가 사망한 것이라고....

그것이 사실일 지도 모른다,

어쩌면 형이 그 순간 치에코를 미워하고 너에게 질투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사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도 가끔 착각을 한다,

내가 보았고 내가 들었고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기억한다고...

그러나 가끔 나도 나를 믿지 않아야 할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내 모든 기억을 뒤엎고 누군가를 그대로 믿어주어야 하는 순간이 분명이 있을 것이다,

사실이 중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내마음이 그의 마음이 더 중요한 순간이 있다고

너는 내게 말해주고 있다,

 

 

덧붙여

 

이 영화는 오다기리 조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보여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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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평이 많았던건 어쩌면 남성입장에서 많이 불편한 영화였기때문일 것이다,

스릴러이고 정치판이 나오고 홈홈 스위트 홈이 나오고 소녀들이 나오고 실종이 나오고 야심이 큰 남자가 나오고 에쁘고  환상적인 여성이 나온다,

그렇다면 남자들이 기대하는 건 가족간에 생긴 갈등을 야심이 큰 남자가 자기 야심을 죽이고 해결해나가고 그 과정에서 딸이 가진 또다른 소녀소녀한 모습을 발견하고 예쁘고 환상적인 여자는 옆에서 울부짓으며 부들 부들 떨면서 남자에게 기대야 하고 그리고 남자는 모든 악을 물리치고 피가 흥건한 붕대를 감은 채 복근을 드러내며 마무리를 지어야 하건만,.....

이 영화는 당취 그런 기대감을 부숴버린다,

 

중학생 엄마를 하기에 손예진은 여전히 예쁘고 젊지만  어릴 적 좀 놀았고 공부머리 없고 가수가 되겠다고 대책없이 굴다가 한때는 영부인이 되는 속물적인 꿈을 꾸었던 전라도 광주출신의 여자 연홍은 경북 대산시 (아마도 대구?)에서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슈퍼히어로가 되어간다,

그러나 따뜻하고 정의로운 슈퍼히어로는 아니다,

딸이 실종됨에도 선거에만 몰두하는 남편과 맞장뜨고 난 후 한번도 화를 풀지 않는다,

무표정하고 화난 얼굴로 미친년처럼 머리를 풀어해치고 여기저기 해집고 다닌다,

학교로 경찰로 종횡무진 다니고 심지어 굿판에서 엎드려 빌거나 무당과 함께 쌍욕을 해댄다,

누구에게도 애둘러 말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하고 싶은 것 해야할 일은 그대로 밀고 나간다,

그리고 마지막... 범인을 죽임으로서 끝나는게 아니라 두고두고 수치감을 느끼고 살아가도록 배려(?)한다.

 

어딘가 친절하지만 살벌한 금자씨 같기도 하지만 금자씨만의  으스스한 나긋나긋함은 없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 나오는 김혜자 엄마도 생각난다, 그러나 그 엄마는 아들을 위해 나긋나긋하게 떄로는 비굴하게 웃어가며 결국은 원하는 걸 성취하지만 결국 스스로 그리고 아들이게도 지옥을 선사할 그런 끔찍한 엄마라면

손예진의 엄마는 두눈 부릎뜨고 딸을 위해 미친년이 되는 걸 마다하지 않고 오직 직진만을 고수하며 여기저기 부딪치고 그리고 통쾌하게 해결해버린다,

김혜자의 엄마는 의외로 나긋나긋 여성성을 드러내며 문제를 해결하지만

손예진의 엄마는 보라색 원피스를 입어도 가슴이 깊이 패인 원피스를 입어도 그냥 무대뽀 로 진실만을 향하는 엄마다, 대책이 좀 없다,

 

결국 영화가 끝나고도 계속되는 두 엄마의 삶은 어떠할까

김혜자 엄마는 잘생긴 아들 원빈과 그냥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을까

문득문득 순진한 아들의 얼굴에서 섬찟한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자신에게서 지울 수 없는 괴물을 발견하고 힘들어 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그 엄마는 그래도 엄마는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내 아들을 더 지키려고 도끼눈을 뜨고 있지 않을까 싶다,

반면 손예진 엄마는 .. 이미 가정은 깨졌고 딸은 죽었고 추문은 남았고 자신도 망가졌다,

무엇하나 남지 않은 대산에서 그는 어떻게 살까

어쩌면 바다건너 케빈의 엄마처럼 그렇게  단순하게 조용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살아갈까

 

군데군데 거칠고 화면도 내내 어두워서 이제 노안이 온 나로서는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봐야했던 영화였다, 그럼에도 오기지니가 부르던 와일드 로즈 힐 노래는 처량하면서도  섬뜻하고 애잔하면서 아름답다,.

이렇게 여자가.. 그것도 강한 여자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영화는 얼마만알까

주위에 저마다 속셈을 가지고 눙치면서 계산하는 남자들과 달리

이 영화는 여자가 사건을 일으키고 문제를 만들고 자기만의 방식을 고수하며 사건을 풀어간다,

연홍도 민진도 여교사도 모두자 스스로 움직인다,

솔직히 여기서 남자들은 모두 찐따다,

 

불편하고 불쾌할지도 모르겠지만

영화는 통쾌하고  아름답다.

세상엔 너희가 원하는 아름다움만 있는 건 아니니까

무식하고 단순한 화가 난 직진이 이 영화에서 가장 좋은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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