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는 개인 토니였다.

말이 지나치게 많고 멀리 보지도 못하고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고 욱하는 성미를 가진 토니

다정한 남편이고 가장이며 대가족을 이루고 사는 토니

그 시대를 사는백인 남성이면 가질 법한 편견과 차별을 악의 없이 지니고 있는 남자

설리는  그냥 흑인이다,

성공한 음악가이고 교육 수준이 높아 교양있고 우아하지만 혼자 미국 남부 투어를 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그냥 흑인이다,

물론 영화흐름에 따라  설리도 자기가 가진 껍데기를 벗어가지만 주로 성장하고 변하는 건 토니다

그러니까 심하게 가자미 눈으로 본다면 토니라는 인물이 긴 여행을 통해 자기가 가진 편견과 차별을 반성하고  극복하며 성장하는 이야기

토니는 그런 주인공으로 적당하다.

한계를 많이 가졌지만 적당히 정의롭고 귀엽고 호감있는 인물이라 관객은 쉽게 그에게 이입되고 그의 성장을 응원하게 된다.

당연히 둘 중 더 주인공이라면 토니였을까

 

그러나 눈길을 잡는 건 설리다

우아하고 세련된 동작과 말투를 가졌고 자기 능력을 인정한 부유한 백인들의 초대로 남부로 연주 투어를 떠나지만 늘 긴장하고 무표정하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인물이다

그의 말과 표정 행동은 편견과 차별이 일상이고 당연한 사회에서 살아남기위한 방어벽일 수 있고

그렇게 적응해서 평범하게 사는 것, 도드라지지 않는 것의 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그의 삶은 어땠을까?

그의 이야기는 영화내내 단편적인 그의 대사로만 전해진다

어릴 적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던 것

러시아 음악학교  최초의 흑인 학생이었다는 것

남동생이 있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없다는 것

결혼을 했지만 현재는 혼자라는 것

간혹 그의 말속에 그의 삶이 드러나지만 그저 단편적인 문장으로 보여질 뿐이다.

그는 철저하게 타자였고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다만 천재적인 음악 재능을 가지고 누구나 그의 연주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

사실 그의 연주를 듣고 칭송하고  열광하는 것은 어쩌면 그 당시 상류층의 속물적인 취향일지 모르겠다.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설리에게는 그렇게 환호하면서도 막상 무대에서 나려온 평범한 흑인 설리에게는 단호하게 차별과 멸시를 보낸다

함께 화장실을 쓸 수 없고 함께 식당에 들어갈 수 없으며 아무 호텔에서나 묶을 수도 없다.

설리는 그 모든 현실을 견디고 받아들인다.

욱하는 우리의 주인공 토니는 자기도 차별을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로 설리를 대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싸움을 일으키기도 하고 거짓말과 위협으로 상황을 모면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설리는 고마워하기 보다  그냥 받아들이라고 가만 있으라고 한다.

늘 말은 연주 일정을 다 마쳐야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영화에서 설리는 흑인이지만 캔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먹은 적이 없고 흑인 재즈나 음악에 대해 알지 못한다. 여행도중 마주친 흑인 일꾼들은 같은 흑인이면서 백인에게 시중을 받는 잘 차려입은 설리를 낯설게 바라본다

흑인이면서 흑인 일 수도 없고 더우기 백인 일수도 없어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설리

백인에게 칭송받지만 그건 조명이 켜진 무대 위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뿐이고

흑인들의 생활은 여전히 그에게 낯설다

그가 늘 받아들이고 참아내며 끝내 우아한 표정과 말투를 유지하는 모습에서 견뎌낸다는 것을 본다.그저 그렇게 견뎌낼 뿐이다.

변화를 위한 위대한 용기라고... 동료 연주가는 남부 음악 투어에 대해 정의를 내리지만 설리의 용기있는 한걸음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그도 장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냥 이렇게 재즈가 아닌 클래식을 연주하는 흑인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

가장 위험한 저 아래 남부 지방을 돌며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투어를 성공적으로 해내는 것

그것이 설리에게는 견뎌내고 지탱해주는 삶의 어떤 정수였을까

우아한 말투 행동 표정이 세상을 향해 곤두세운 가시들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자기를 무장해야만 편견과 차별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그저 생존이상의 존재 의미를 줄 수 있다고 믿지 않았을까

왕좌같은 우스꽝스럽던 그의 집 그의 의자들처럼 기이하지만

 그의 재능과 예의와 고상한 행동들이 그가 가진 갑옷이고 무기였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필요이상을 요구하지 않으며 거절을 받아들이는 행위

그건 자기 위치를 지키기 위해 잊지 말아야할 필요 사항이었다.

아무리 명성과 재능을 가졌어도  설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는 흑인이라는 위치였고 그 분명한 한계를 알고 있어서 더 이상 실수나 판단 착오없이 튀지 않게 살아야 하는 거였다. 모험이나 튀는 행위는 금물이다.

 

 

오스카가 사랑한 영화답게 이야기는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토니와 설리는 점점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지며 설리의 도움으로  토니는 사랑스럽고 멋진 편지를 아내에게 보낼 수 있게 되고 위기에 처한 설리는 당연히 토니의 기지로 이겨낸다.

토니는 편견을 깨고 설리는 자기를 둘러싼 껍질을 조금씩 깬다.

그리고 마지막 따뜻하고 근사한 토니의 크리스마스 모임에 설리가 찾아온다.

영화는 끝났지만.. 그리고 그 다음 설리는?

자기를 알아주고 이해하는 친구를 만났다고  자기가 너무 긴장하고 애쓰며 살고 있다는 걸 알았다고 상황이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건 없다.

크리스마스 만찬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는 법이다

설리는 여전히 흑인이고 음악가이며  연주 여행을 다닐 것이다.

그 시대의 차별과 편견은 여전할 것이며 어쩌면 조금은 그 관습에 소극적인 저항을 하겠지만 크게 문제를 만들거나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미세하게 노력하겠지만 견디고 참는 시간이 더 길것이다

 

견디는 것에 익숙하고 자기 감정을 눌러가며 주변 분위기를 맞춰주는 사람은 적어도 무시당하지 않을만큼의 성공이 필요하다

쉽게 쓰러지거나 지쳐서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긴 시간을 벼텨내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를 미워하느라 에너지를 너무 소비하지 않기 위해

작은 성공 명성 지적인 능력 자존감이 정말 필요하다.

설리를 보며 나는 속물스럽지만 그런 생각을 내내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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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 기키 기린은 늘 좋은 모습만 보이는 인간형이 아니다.

 온화하고 따뜻한 미소뒤에 장난기가 숨어있고 그 장난기에 악의가 가득할 때도 있다.

위악을 떨거나 의뭉스럽게 아닌 척 착한 척 하는 얼굴로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맨얼굴을 버림으로 더 뜨악하고 섬뜻한 무언가를 드러낼 때가 있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무심하게 레이스를 뜨면서  장남의 기일마다 찾아오는 구출된 아이를 계속 찾아오게 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 그 아이도 충분히 죄책감을 맛봐야 한다는 말과 겨우 일년에 한번 여기 오는게 뭐가 힘들다고 그러냐는 말을 태연하게 하는 엄마의 모습은 앞에서 계속 가족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시중들며 챙기던 엄마와는 다른 모습이다.

아니 똑같이 온화한 표정을 짓고 정성스럽게 레이스를 뜨는 그 모습 그대로 본심을 드러내는 말을 감추지 않고 뱉어내버리는 모습이 더 대비된다.

물론 앞 장면에서 남편 흉보거나 아닌 척 재혼한 며느리에게 직언을 해버리거나 아들에게 은근히 걱정하는 모습등등은 그저 푸근하고 모든 걸 받아주는 엄마가 아니라 속물적이고 내 자식이 우선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아프게 해서라도 내가 위안을 받아야 겠다는 그 말이 가장 냉정하다.

그러나 그 말을 하고도 태연히 다정하게 손자에게 인사를 하고 잠자리를 챙기고 떠나는 아들 내외를 배웅하고 아쉬워한다.

 

<태풍이 지나가고>에서의 엄마도 그렇다.

아들이 기왕이면 출세해서 엄마에게 척척 용돈을 주고 위신을 세워주고 어디에서든 자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을 온몸으로 드러낸다.

전혀 아니라고 말을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나 행동에는 아쉬움 속상함 그래서 은연중에 표현해버리는 태도들이 담겨있다.

여기에서 자식들 역시 그런 엄마가 익숙해서 아무렇지 않게 받아 넘긴다.

속으로 쌓이는 상처나 앙금이야 없지 않겠지만 우리 엄마는 늘 저래왔던 사람... 이라는 태도가 아들에서도 딸에서도 보인다. 어쩌면 그래서 더 편하게 엄마를 대하고 이것저것 부탁하고 심지어 몰래 집안을 뒤져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을지도 모른다.

엄마도 사람이고 단점을 드러내고 욕심과 속물근성을 드러내는 인물이라 자식들도 그냥 그런게 당연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이런 가족사이에 늘 예의를 차리고 긴장하고 있는 건 이혼한 며느리다. 어쩔 수 없이 태풍때문에 전 시어머니 집에서 하루를 묶어야 하는 상황이 불편하지만 그동안 익숙했던 관계의 사람들이고 이제 알만큼 아는 터라 보아넘기고 적당히 무시하고 맞장구쳐주며 하루를 넘기려고 한다.

그런 며느리의 속내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어쨌든 이번 기회에 아들 며느리가 합쳐지면 좋겠고 덜 떨어지고 어딘가 아픈 손가락인 아들을 며느리가 책임져 주면 좋겠고 그 핑계김에 손자를 자주 보면 좋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남들 보기에도 이혼하고 말도 안되는 사립탐정노릇이나 하는 것보다 번듯한 가족이 있고 뭐리도 하고 있는게 더 보이기도 덜 창피스럽다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극속의 기키 기린 역시 그런 마음을 손톰 만큼도 숨길 생각이 없다.

노골적으로 더 큰집으로 이사가고 싶다고 하고 누구나 아들은 용돈을 얼마를 주고 하는 말을 아들앞에서 하니까

 

<앙>에서는 그래도 수더분하고 겸손하다.

여기서는 누구의 엄마도 누구의 시어머니도 아닌 그저 슬픈 과거를 가진 한 개인으로 나온다.

그럼에도 그 역할을 기키 키린이 함으로써 인물은 더 풍성해진다.

아픔은 있고 사람들에게 소외받았던 인물이지만 유머도 있고 직설적인 화법도 여전히 구사하며 더 다양한 인물이 된다.

그저 참고 인내하는 전형적인 인물이 아니라 눙치는 유머도 할 줄 알고 사람 속을 모르는 척 고집을 피우기도 하고 팥들을 아기처럼 보살피고 말도 거는 귀여운 할머니가 되기도 한다.

 

<어느 가족>에서 기키 기린은 너무 늙어버려 마음이 아팠다.

어쩌면 틀니를 빼고 연기해서 더 나이 들어 보였고 말년에 암으로 고생했다고 하니 그 여파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을 가족으로 삼고 낡고 오래된 집에서 다 함께 생활하는 할머니

돌아가시 할아버지가 남긴 연금을 타고 다른 가족이 다양한 방법으로 벌어오는 돈을 같이 쓰고 보살핌을 받고 집에 들어온 누구든 내치지 않는다.

영화 중반에 보면 아마 바람을 피워 재혼한 할아버지의 둘째 부인 자식에게까지 찾아가 그야 말로 말 그대로 삥을 뜯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죽은 영감의 기일이라는 이유로 남의 집에 가서 염치 없이 향을 올리고 대접하는 케잌을 야무지게 모두 먹어치우는 모습 그리고 배웅하며 내미는 돈봉투까지 사양없이 받아 챙기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다.

그냥 그렇게 늘 해왔던 사람처럼 모든 것이 물흐르듯 하다.

 

이 배우를 처음 어느 영화에서 봤는지 모르겠다.

아 <도쿄 타워>에서도 생활력 강하고 자식을 친구처럼 대하는 그래서 오히려 자식이 더 어려워하는 어머니로 나온다.

늘 보면 인자해서 뭐든 양보하고 희생할 것 처럼 생긴 할머니가 은근히 장난기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누군가를 골리고 나서 짐짓 시치미를 뗀다. 누군가에게 들키면 아닌 척 하거나 쉿 하며 함께 공범으로 만들어 버리는 모습

그런데 그 모습이 밉지가 않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 같은 일들, 차마 남의 눈 때문에 체면때문에 못한 일들을 태연하게 해치우며 어깨를 으쓱해버리는 모습이 의외로 후련하고 시원하다.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연기를 볼 수가 없다.

 

느긋한 하루 <어느 가족>을 보면서  영화의 내용에도 빠져 들었지만

이제 그렇게 익숙하면서도 새롭고 은근 유쾌하고 따뜻한 그 인물을 만나지 못한다는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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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와이프

 

 

 

글렌클로즈를 위한 글렌 클로즈의 영화

단순한 플롯과 구성을 꽉 채운건 그녀의 연기와 표정이었다.

 

남편이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는 새벽 다정한 노부부의 모습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누구나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고 느낄 만큼 서로에게 다정하고 여전히 서로가 필요하고 심지어 섹시하기깍지한 관계 . 완벽하게 나이든 부부의 모습이 그려진다.

남편의 노벨상 수상 소식으로 뛸듯이 기뻐하지만 한편 씁쓸한 표정이 언뜻 언뜻 들어난다.

그동안 도와준 아내를 언급하며 감사하는 자리에서도 조안의 표정은 썩 밝지 않다.

무조건 좋지 않은 무언가가 있을까

비행기를 타고 스웨덴으로 가는 길 틈틈히 과거가 플래시백 되는데

결국 남편의 그 모든 작품은 조안의 것이었다.

재능이 없는 교수였던 남편 대신 재능있는 조안이 글을 고치고 손대면서 발표한 모든 작품이 연달아 인기를 얻고 명성을 얻으며 어쩌면 두 부부의 공동작품으로 그러나 세상은 철저하게 남편의 작품으로 그 모든 것을 평가한다.

시대의 이유로 여자가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의 목록을 더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 그래서 조안도 글쓰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그렇게 재능 없는 남편이 한 무리의 영리해 보이는 여학생들앞에서 당당하게 하는 말이 그것이다   "글을 쓰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다"

조안을 글을 썼지만 작가가 아니었다.

시대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기도 했겠지만 어느 부분은 그녀의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남편을 순수하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을 것이고

누가 쓰던 작품이 완성되고 성공한다면 그만이라는 소박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 소박한 마음이 커다란 명성과 부와 명예로 돌아왔다.

철저하게 조안은 뒤로 숨고 남편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일을 조금씩 알아가며 뒤를 캐는 전기작가에게 조안은 마음이 흔들린다.

여태 나이 먹어가며 여전히 자기가 손이 가지 않으면 물가에 내어놓은 아이처럼 불안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남편을 챙겨야 하는 것

아이들도 돌보지 못하고 서재에 박혀 썼던 글들은 남편의 이름으로 출판되고 인기를 얻었다.

심지어 남편은 작품과 주인공마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한 것은 무엇이고 내가 남긴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모든 주부가 아내가 한 번은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묻는 말이다.

내 인생은 어디로 갔나?

무엇으로 채워졌을까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아왔을까?

스웨덴 왕에게 자신의 역할이 '킹 메이커'라고 말을 하지만 

남편이 수상소감으로 다시 자기를 언급하며 영혼의 단짝이니 영감의 원천이니 하는 말에 그만 모든 감정이 올라온다.

이전에 조안은 남편에게 절대 수상 소감에서 자기를 언급하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를 했었다.

누군가의 내조자로 빛 뒤에 숨은 어둠이기는 싫었을까?

아니면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에서 나는 제외되고 잊히는 것이 영 꺼림칙했을까

그저 조력자로 내조자로 사는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순간일 수도 있다.

그리고 두 부부는 평생 처음으로 충돌하고 돌이키지 못할 지점까지 갈라서지만

그 순간 남편은 사망한다.

가장 명예로운 순간, 가장 절정에서 가장 뒤통수를 치며 이제 조안은 죽은 노벨문학상 작가의 남은 가족이 된다. 죽어버린 작가의 아내로 남는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조안은 전기작가에게 남편의 일을 더 이상 떠벌리지 말라고 경고한다.

모든 것은 거짓이며 있지도 않은 일이라고..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노트를 집어드는데.

 

그녀는 그 노트에 이제 자기의 글을 써가기 시작할까

아니면 그냥 빈 노트로 두고 작가의 아내로 살아갈까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어떤 답을 찾을 수도 없다.

영화내내  지루하고 예측 가능한 플롯에서도 다양하게 빛나며 의미를 응축하던 그녀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겨우 눈빛으로 모든 감정이 오가고 영화를 풍성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녀가 아니면 누가 표현할까

마지막 비행기안에서 그녀의 표정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집에 돌아가면 아들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까

모르겠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번 선택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 되기를 빈다.

더 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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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것은 맹목적일 수 밖에 없다.

믿는다는데 이유가 들어가는 순간 그건 믿음이 아니게 된다.

 

그냥 변명이 된다.

 

고백하자면 책을 먼저 읽었을 때 앞부분을 대충 넘겨버렸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신에 대한 이야기랑 동물원을 정리하는 이야기를 그냥 넘겼던 거다.

주인공이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다 믿게 되었다는 팩트만  인지하고

인도의 사정으로 캐나다로 이주하기로 결정한 아버지가 동물원의 동물들을 팔았고 그 동물들과 가족이 함게 배를 타고 간다는 사실만 또 주입했다.

눈으로 보며 이해하는게 역시 쉬웠다.

주인공이 세가지 종교에 들어가게 된 이야기와 믿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가 긴긴 항해와 연결이 되고 두가지 버전의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걸 영화를 보며 이해했다..

 

채을 띄엄띄엄 읽으며 이야기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극한에 몰린 사람이 기대하는 건 막연한 희망도 바닥을 치는 절망도 아닐것이다.

그냥 이야기 지금 이순간을 견디게 해주는 이야기가 힘이 될 때가 더 많다고 믿는다.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마주했을 때. 스스로가 바닥을 치고 있다고 생각될때

내가 점점 내가 아닌 괴물이 되어가는게 아닐까 싶을때

어딘가 절실하게 매달리고 싶어진다.

그게 신이든 무엇이든

 

여담이지만 지난 몇달동안 종교에 매달린 경험을 가졌다

살면서 한번도 종교에 이렇게 오래 몸을 담근 적이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입시라는 게 역시 대단한 힘을 가졌다는걸 다시 깨달은 시간이기도 했다.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고 생각하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결국 모든 건 내 욕심이고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것만 알게 되었다

신 혹은 절대자  아니면 조상에게라도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순간에도 순수한 기도(가 뭔라고 정의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의 시간보다 무언가를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내가 나이롱 신자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기도하는 방법을 몰라서일 수도 있다.

그냥 신에게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고 내가 바라는 상상을 들려주고 나중에는 급기야 협박에 거의 맞짱 뜨자는 시비까지 술술 나오더라

결국 무언가 구원을 바라는 순간 (나라는)인간은 신과 이야기에 매달리게 된다.

내가 상상하는 이야기. 바라는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그냥 술술 나온다

그게 기도랑 통하는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파이도 상상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일이 견디는 일이고 그게 신에 대한 기도였을 것이고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을 것이다.

조리사와 선원과 엄마라는 아픈 상황대신 얼룩말과 오랑우탄과 하이에나와 뱅골 호랑이가 더 견디게 해주고 스스로를 용서하고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떤 버전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무조건 믿어버리는 순간이 맹목이고 광신도같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무조건 믿고 매달리는 순간이 어쩌면 가장 순수한 순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면서 내내 한다.

고난을 주었고 견디는 힘도 주는것이 신이라면

견디는 힘을 어떻게 행동으로 실행할지는 결국 사람의 선택이다.

이야기를 상상하며 스스로가 괴물이 아니라고 자꾸 말해주는 일이 신의 축복일수도 있겠다

 

결국 이야기 초반의 신에 대한 이야기 종교와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끝에서 다시 마무리 된다.

파이가 견뎌낸 동물들의 이야기들이 결국은 믿음의 한 방법이었다.

 

믿는다는 것

견디는 것  그리고 관게를 맺는다는 것

다양하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었다.

마지막 성인이 된 파이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던 건 믿음에 대한 확신이 아니었을까

좋은 작품은 이렇게 볼 때 마다 다양한 얼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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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작가인 당신 사츠오는 아내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 머리를 자르게 했다.

어쩌면 아내가 원한 일일 수도 있다.

어중간하게 길어 보기 좋지 않은 남편의 머리가 걸려 잘라줘야 겠다고 마음먹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가 해준다는데 뭐 괜찮으니까 먼제 나서지 않았나 그렇게 스스로 위안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과정조차 없이 단순하게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머리를 자르는 동안 늘 그랬듯 아내에게 무뚝둑하게 서운한 소리를 한다.

그리고 아내가 급하게 집을 나섰다.

그리고 순간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순간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같은 그 찰라동안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뒷정리를 부탁해"라는 아내의 말이 그저 이발 이후의 뒷정리 정도였을까?

어쩌면 그땐 아차 싶었던 마음이 후에 두고두고 생각나며 당신을 괴롭힐지도 모른다.

그때 아내는 어떤 마음이었고 무엇을 보았을까?

 

친구와 여행을 갔고 아내를 존중한다는 마음에 당연히 전화연락 따위는 하지 않았고

습관처럼 (아마 그랬을거다) 애인을 불렀고 부부 침실에서 섹스를 한다.

어떤 죄책감도 끼어들지 않는다.

그리고 부재중으로 돌려놓은 전화에서 경찰의 전화통화를 듣는다.

아내가 죽었다.

시신을 확인하고 유류품을 받아오고 아내를 화장하고 장례를 치르면서 당신은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담담하게 어디에나 있는 카메라를 의식하면서 어떻게 보여야 할지를 잘 아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갑작스런 사고에 화를 내는 조문객들에게도 덤덤했고 함꼐 여행을 갔던 아내의 친구의 남편 요이치를 만났을 때도 덤덤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냈다. 죄책감에 찾아오는 애인에게 다시 욕구를 느낄만큼 정말 아무일도 없다는 듯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그랬다면 뜬금없이 걸려온 요치오의 전화에 대응하지 않았을텐데.

그리고 불쑥 요치오의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제안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당신의 매니저가 물어봤지만 당신도 왜 느닷없이 요치오의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했는지 알지 못했다.

 엄마가 없는 빈자리가 큰 아이들

엄마가 없어도 화물차를 몰아야 하는 아빠는 여전히 바쁠 수 밖에 없고

그로 인해 아이들의 일상이 희생되고 뒤엉키고 포기되어야 하는 것을 보고 느낀 배려였을까

한번도 접하지 못한 아이들과의 생활이 어긋나고 삐거덕거리면서도 잘 적응되어갔다.

아이들은  당신 사츠오에게 적응하고 당신은 아이들에게 적응하고 그렇게 바쁘고 웃고 힘든 일상을 지내면서 당신은 당신 감정을 그렇게 눌렀다.

슬픔 상실 죄책감따위는 원래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저 아래로 눌러버리고 바쁘고 즐겁고 하루하루가 다르지 않은 일상을 지냈다.

 

"내가 잊으면 누가 기억하나요?" 라고 되묻는 요치오의 울음앞에서 순간 멈칫 하지만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기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지나간 일  돌이킬 수 없는 일은 그렇게 흘려버리는 것이 순리라고 생가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보살핌이 필요하고 나는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당신을 지탱하게 했지만 오히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었다는 것을 당신은 몰랐을 때였으니까

매일매일을 울면서 저장된 아내의 메세지를 듣던 요치오는 의외로 건강하게 일상으로 돌아온다.

순간 울컥 눈물이 나지만 애써 감추지도 않는다.

그렇게 과학관 여선생님을 만나고 세상과 연결되어 가는데

당신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방송국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아내를 애도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다.

당신은 속이는 것이 아니라 몰랐던 것이다.

남들을 속이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기만이 아니었고 그저 어떻게 애도하고 어떻게 슬퍼해야하는지 몰라서 당신앞에 놓은 시간을 무엇으로든 채워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뭐든 채워놓지 않으면 그대로 바람이 빠지고 쪼그라들어버릴 것만 같았을테니까

요시오 가족에게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고 아이들이 호감을 표시하면서 당신은 당신의 자리를 잃은 것같았다. 질투를 하고 결국 자신의 죄책감을 고백한다.

"사고가 나던 날 애인을 불러 침실에서 섹스를 했었다고."

 

"잠든 아이의 숨소리가 낯설었던"당신은 아무렇게나 그러나 바쁘고 의미있다고 믿으며 채워졌던 일상이 비워지면서 "삶은 타인이다"라는 발견에 도달한다. 그리고 처음 울기 시작했다.

목놓아 울지 않고 꾸역꾸역 눈물만 흘리는 모습이 당신 다웠다.

 

삶이 갑작스럽게 당신앞에서 문을 닫아버렸을 때

늘 함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상대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없어져버렸을때

갑작스러운 충격은 사람의 감정을 굳게 만들어버린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고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울어야 하는 것인지  견뎌야 하는 것인지  그저 모든 것을 놓아야 하는 것인지 그래도 살아온 리듬을 유지해야하는 것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요치오처럼 모든 것을 놓는 순간을 경험하기도 하고 당신처럼 모든 것을 다름없이 끌고 갈 수도 있다. 누가 더 낫다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들은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맞았다면 애도를 겪어야 한다

오래오래 울거나  미치도록 원망하거나그리워하거나 미안해하거나 화를 내거나 애도를 겪지 않으면 앞으로 다음으로 나갈 수 없다. 그저 눌러놓은 감정으로 외면해버리면  늘 제자리에서 돌고 있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지만 웃을 수도 있다. 배가 고플 수도 있고 무언가가 아름답다고 느끼고 내가 잘  살고 있다고 대견해할 수도 있고 누군가를 도와주는 뿌듯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순간순간 불쑥 튀어나오는 먹먹함도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이 그 감정을 받아들이기로 한 순간 외롭다고 느꼈나 보다.

결국 삶은 타인이었다는 당신의 문장이 슬프고 아름다웠다.

 

왜 당신의 책 제목이 (영화의 제목이) 아주 긴 변명이었을까

단순히 길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을 변명이라는 말

결국 살아간다는 건 계속되는 변명이 아닐까...유치하게 생각해본다.

내가 그땐 그래서 그랬고 어쩔 수 없었고 늘 생기는 결과에 입장을 변명하고  상실 이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일들이 자꾸 변명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상실을 경험해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요치오의 남매는 엄마가 없어도 훌쩍 자랐고

당신도 아내가 없어도 이제 머리를 자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책을 쓸 수도 있었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사실은 그런게 아니라고 변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니 변명해도 괜찮다

당신의 변명을 납득하고 받아줄 테니까...누구나 변명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

 

뜬금없이 마지막 당신이 아내의 이발 도구를 만져보고 정리하는 장면이 슬프고 좋았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는 아마 당신은 도구따위엔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아내는 헤어디자이너라는 사실만 인지할 뿐 어떤 도구를 쓰고 어떤 마음으로 머리를 만지며 그 도구들이 아내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생각하지 않았고 생가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여행 떠나기 직전에도 당신의 머리를 잘라주던 아내의 모습처럼 그저 아내는 당신이 생각하고 의미하는 존재로만 여겼을 것이다.

당신이 도구들을 만지고 정리하며 아내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른 아내의 모습을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많이 늦었지만 안하는 것보다 괜찮다.

 

당신의 애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한 번 울고 이후의 일들을 기록해서 엮어내고 그리고 아내의 물건을을 정리하고

당신의 애도가 시작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왜 그랬냐면.... 하며 긴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그걸 다 받아들일 수 있을것이다.

 

영화 초반 내내 당신이 너무너무 미웠는데  당신의 행동들이 가식이고 찌질하다고 욕했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그럴 수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나 자신을 본다.

그래 그럴 수 있겠다.

그리고 나도 나의 긴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놔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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