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당신들 베어타운 3부작 2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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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호르몬이 가득한 작은 공간 베어타운에서 하키를 향한 사람들의 정확히는 남자들의 의리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전편이었다면 이번 편은 그 저 남성 호르몬이 가득한 상남자들의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페로몬이 가득한 공간에서 성폭행사건이 일어나고 그 가해자가 그 공동체의 영웅이었고 희망이었다면 그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수 밖에 없는지 그 마을의 성향과 결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분투하고 애를 쓰며 살아가려고 하는지를 보여줬다면 이제 사건이 마무리가 되었다고 여겨지는 무렵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을의 자부심이던 하키는 팀은 거의 해체되다시피하고  그나마 하키에 재능이 있던 청소년들과 코치는 라이벌팀인 헤드로 넘어가고 이제 베어타운은 그냥 잊혀질 쇠락한 소읍이 되고 말 지경이다.

그러나 베어타운에서 나고 자라서 이곳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 그들의 자부심이 어떻게 뻗어가는지를 그려낸다

사실 크게 일어나는 중심사건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은 어떤 단체에 속하기도 하고 어느 곳에서 소속감을 느끼며 안정을 느끼기도 하지만 결국은 개인의 맥락이 더 중요하다. 한 개인을 정의하는 건 그의 소속이나 환경보다 스스로가 가진 어떤 관계들과 감정들로 인한 맥락이다. 맥락이 중요하다.

 

 

"어쩌면 우리는 좋은 사람인 동시에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좋은사람과나쁜사람을둘러싼문제가복잡해지는 이유도 우리가 대부분 좋은 사람인 동시에 나쁜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중심 이야기가 따로 없다. 분량의 차이는 있을 망정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고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우리편 너희편이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베어타운이냐 헤느냐의 강한 라이벌 구도가 존재하지만 개개인은 자기 이익에 따라 감정에 따라 혹은 그동안의 정에 따라 누구랑도 편을 먹기도 하고 누구와도 등을 진다. 좋은 아버지고 좋은 남편이더라도 좋은 이웃이 될 수 없기도 하고 무심하고 문제가 많은 가장이지만 어디선가는 꼭 필요한 사람이거나 모두가 피하는 폭력배라고 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내 목숨과 바꿀 수 있는 소중한 존재다. 그래서 모두가 좋은 사람인 동시에 나쁜 사람이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아는 사실들 가운데 가장 치악을 꼽으라면  우리의 삶이 그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 나머지 바보들의 경우에도 말이다 내 앞에 줄을 서 있는 사람. 운전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좋아하고 식당에서 너무 시끄럽게 떠들며 유치원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노로바이러스를 옮기는 아이를 키우는 사람 주차를 엉망으로 하고 우리 일자리를 가로채며 엉뚱한 정당에 투표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도 매 순간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

 

아아 우리는 얼마나 그들을 미워하는가

 

페쇄된 마을에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 뻔하게 알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렇고 타인들이 모래처럼 모인 삭막한 도시에서도 우리는 타인에게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가 나를 딱 지목하고 저 사람을 망치겠어. 저 사람을 변화시키겠어. 좋은 영향을 주겠어라고 선언할리 없지만 우연한 작은 행동들이 한사람 한사람을 거치면서 혹은 곧장 나에게로 날아와 혹 나의 삶을 바꾸기도 한다. 그건 나의 몸짓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환한 데서만 달리기를 하고 말은 하지 않지만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나자들은 평생 어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 그건 그들의 인생에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남자들이 어둠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귀신과 괴물때문이겠지만 여자들이 어둠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남자들 때문이다"

 

" 폭력의 시작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싸움을 벌인 사람에게는 항상 그럴 듯한 변명이 있다. '도발한 네 잘못이야' ' 내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알면서' '네 탓이야. 너는 당해도 싸. 네가 자초한 거야'

 

전작에 이어 성폭력은 이미 일어났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이 소설에서는 많이 보여준다.

마을의 영웅이 성폭행을 했고 그가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우리 마을의 마을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 내리막에서 누군가를 원망해야한다면 그건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 케빈이 아니다. 케빈으로 하여금 문제를 일으키게 꼬리를 친(?) 마야다. 마야는 헤프고 불안하고 경박한 걸레가 된다. 그래야만 문제는 케빈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야에게 있는 것이고 마야를 원망하고 공격하는 자기들이 안전하고 당연하게 된다.

모든 것이 드러나고도 마야는 여전히 마을 사람들이 두렵다. 그리고 사람들은 여전히 마야에게 쪽지 폭탄을 던지고  폭력적인 눈길을 보내며 아는 척 하지 않는다.

단 한명의 단짝과 가족이 있지만 그들도 자기의 삶이 있다.

자기의 문제가 있고 자기가 해야할 일이 있고 고민이 있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운다면 가장 만만한 상대가 좋고 내가 그래도 상관없는 사람이면 더 좋다.

마야는 그런 존재였다. 이제 전부는 아니지만 아직 누군가에게는

자기 가족에게 자기 편에게 자기 자녀에게는 좋은 사람들이 마야에게는 가혹하다.

 

 

중간은 없다. 완전히 들통나든지 전혀 아무도 모르든지 둘 중 하나다. 세상 밖으로 흘러나가는 순간 비밀은 지진이 되고 산사태가 되고 쓰나미가 된다. 생각없이 던진 말 한마디 언뜻 지나간 생각 상처를 입은 사람이 인터넷에 올린 사진만으로도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모르는 새 돌이 굴러 떨어지고 눈이 쏟아지고 넘을 수 없는 파도의 벽이 밀려들 수있고 그때부터는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다 칠월의 향기를 오므린 두 손에 담으려는 것처럼 부질 없는 짓이 된다.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아무도 알 면 안되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

 

"벤이는 그들의 주장을 숱하게 들었다. 관중석에서 시합을 치르러 가는 버스안에서 그의 옆에 앉은 어른들이 '아이스하키의 세계에 동성애자는 없다'고들 했다. 통상적으로 주고 받는 농담들이 벤이에게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친 적은 없었다. 가장 심한 상처는 너도나도 욕을 하고 싶을 때 '호모'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이다. (중략)

물론 그 단어를 절대 쓰지 않는 어른들도 있었다. 그중 일부는 그대신 다른 표현을 썼다. 그들은 아무 생각이 없었겠지만  벤이는 그들이 나눈 대화의 조그만 파편들을 몇 년동안 간직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하키 안 해도 돼.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로커룸이랑기타 등등 어쩌라고 만일의경우를 대비해서 로커룸을 세개 만들어야 하나?'  평범한 학부모, 아이들의 하키단을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은 친절하고 마음씨 넓은 학부모들이 이런 소리를 했다. 그들은 극단적인 정당에 투표하지 않았고 누가 죽길 바라지 않았고 폭력 행사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들은 누가 들어도 빤한 소리를 했다. '그런 사람들은 하키가 불편하게 느껴질 거야. 다른 걸 좋아할 거야. 하키는 거친 운동이잖아.' 어떨 때는 단도직입적으로 외쳤다."하키는 남자들을 위한 스포츠잖아!" 그들은 '남자들'이라고 했지만 벤이는 어렸을 때부터 그 말의 속뜻은 '진짜 남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잠자코 그 옆에 서 있곤 했다.

 

'벤이는 더 이상 그들과 같은 편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오늘 팀 훈련에 참석하지 않는다. 그는 그들과 같은 편이 아니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다른 무엇이 되길 바라는지도 알지 못한다.

 

이번 편에서는 벤이의 비밀이 드러난다. 순간의 질투심과 민망함이  누군가의 비밀을 순간적으로 발설하고 퍼진다. 퍼지는 소문은 발이 없다.. 날개가 없다. 가만 어디든 내려앉고  누구에게든 스며든다. 벤이의 성적취향이 문제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우리편이었던 벤이가 우리를 속였다는 것이 더 큰 배신이다. 나랑 다르지 않다고 믿었는데 나랑 달랐다. 이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그것이 혼란스럽다.

어쩌면 타인 내가 모르는 사람이 두렵고 미운 것은  그를 모른다는 것뿐이다.

모르니까 어떻게 내가 대처해야할지 모르니까 그냥 괴물로 만들거나 쓰레기로 만든다.

 

"인생은 우라지게 희한한 것이다 우리는 모든 시간을 쏟아부어가며 인생의 여려가지 측면을 관리하려고 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인생의 대부분을 규정한다. 우리는 이해를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가장 좋았던 기억도 가장 나빴던 기억도 이해는 언제까지고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것이다.

 

 

어쩌면 전편 "베어타운"에서 문제를 드러냈던 인물들이 여기서 조금씩 마무리가 되고 자기 자리를 잡아간다. 뭐 극적인 해피앤딩도 있고 뭔가 희망적인 마무리지만 그 마무리에 닿기까지 많은 실패가 있고 좌절이 있고 부재의 자리들이 생겼다.

삶이란 그렇다.

이렇게 하나의 고비가 마무리 되나 싶으면 또 다른 모퉁에에서 다 끝났다 싶은 마무리가 다시 헤집어지면서 다른 문제와 연결되고 꼬여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

그러나 그냥 지금 이 순간 문제에 집중해서 하나씩 해결하는 수 밖에

삶은 어쩌면 크게 목적을 정하고 멀리 바라보고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내앞에 놓은 숙제를 해치워나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두꺼운 책을 다 읽어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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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사람과 눈사람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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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의도의 폭력"이라는 단어가 꽂힌다.

<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에 나오는 독서모임에서 누군가가 <선원 빌리 버드>를 읽고 난 후의 소감을 말하면서 뱉은 단어를 주인공은 이렇게 반문한다.

"선한 의도라는 건 누가 판단해요?"

그걸 누가 판단할까?

촌스럽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그건 권력이 정하는 일이다.

권력이란 누군가 대단한 무언가를 가진 소수의 상류층? 뭐 그런게 아니라 비교적인 의미다.

어떤 관계에서든 인간은 권력이 있다.

동등하다는 건 그냥 이론속에 있을 뿐이고 누군가 앞서서 잘났다고 믿는 사람 인정받는 사람 그렇게 되어버리는 사람이 꼭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절대 혼자 독고다이로는 만들어 지지 않는다. 단 한명이라도 누군가 함께 있을 때 그래서 그 사이에 관계가 형성될 때 그 관계속에는 권력이 언제나 존재한다. 조금 덜 여문 권력이 있고 단단해서 중앙에 콱 박혀서 이도저도 못하는 권력이 있을 뿐이다.

하물며 사랑하는 사이에서 권력이 존재하는 법이니 인간 둘 이상이 모은 곳에는 무엇보다 어김없이 권력이 있다

그리고 그 권력을 가진 사람이 선한 의도를 결정한다

결과가 좋지 않아도 누군가 마음 아픈 일이 생겨도 누군가 다치게 될지라도 그 권력자의 원래 의도가 그게 아니면 선한 일이 된다. 그 누군가 아프고 다치고 손해를 보거나 뭔가 찜찜한 인간은 그냥 재수가 없거나 사회의 흐름에 거스르는 사람이거나 다수의 뜻에 반하는 사람 혹은 그냥 이기적인 사람일 뿐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선생이 학생에게

농장주가 소작농들에게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노인이 젊은이에게 혹은 젊은이가 노인에게

백인이 유색인종에게

남성이 여성에게

많이 배운 사람이 덜 배운 사람에게

혹은 그 반대로 권력은 어디에서든 단 하나의 기준값을 가질 뿐이다

사람은 생긴것이 다 다른 것처럼 제각각의 라듬을 가지고 저마다가 자기의 기준이 되지만 천만에 세상에는 이미 기준이라는게 정해져 있고 세상의 흐름이라는 리듬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든 거기에 맞추어야 하고 맞지 않으면  내 개인의 잘못이므로 내가 틀렸고 내가 고쳐야 하고 내가 반성해야 하는 곳이다.

 

<줄 게 있어> 에서 나의 친구 기열이는 나를 만나러 오다가 죽었다.단편 속에서는 기열이 어떻게 왜 죽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사고인지 사건인지도 모른다. 다만 죽었다는 것만 확실하다. 그리고 마지막 만나려고 한 사람이 나였고 나와 기열이가 꽤 친했고 그러므로 나는 많은 충격을 받아야 하고 트라우마를 겪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세상은 정해버린다

아직 어떤 애도도 시작되지 않았거나 시작되었으되 알아차리지 못한 상황일 수도 있고 생각보다 덤덤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도 있는 나에게 세상은 더구나 아버지는 내가 많이 아프고 슬프고 죄스러울거라고 단정해버린다. 그 시간을 이겨내야 한다고 믿고 내가 하는 어떤 행동이든 그 고난을 견디는 행동이라고 판단하고 지래 나를 죄스러워야 한다거나 견뎌야 한다고 요구한다

결국 그 기대가 무겁고 버거운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상한 사람을 만들어 버리고는 대안학교로 보내지지만 상처받은 어린 청소년의 모습으로만 나를 바라보는 어른들에게 어떻게 맞춰줘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기열의 죽음보다 그 이후 타인들이 특히 어른들이 바라보는 그 시선에 어떻게 맞추어야 하는지가 더 혼란스러울 뿐이다.

나의 아버지는 절대 상담가가 아니고 다른 어른들처럼 그저 폭력적일 뿐이다.

그 의도가 어찌되었든 간에..

 

<병원>에서 유림는은 자살할 요량으로 약을 백이십알을 먹고 들어온 환자다. 사실 자살할 의도였는지 아니면 먹어도 먹어도 감기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먹다먹다보니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다만 자살시도 환자였고 그럴 경우 의료보험이 적용이 되지 않아 비싼 병원비를 내야 하는데 그걸 알려주러 온 공단 사람들은 은근 슬쩍 정신병처방을 받으면 보험료를 적용받을 수ㅇ있다는 정보를 흘린다 당연히 선한 의도일 것이다.유림은 는 다니던 아카데미에 더 이상 빠질 수도 없고 돈도 없는 딱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정신과를 예약하고 진단서를 요구하지만 거기에도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고내가 정신이 이상한지 아닌지를 스스로 증명해보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다. 의사는 진단서를 쉽게 끊어주고 싶지만 정말 내가 환자인지 아닌지 그걸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답답한 소리나 하고 아카데미 원장은 내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결국 유리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으로 진단서를 받고 보험을 적용받아 병원을 빠져나온다. 내가 자살을 했는지 아닌지 왜 하려고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정신병이 있는지 없는지 자세한 검사와 치료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 아카데미에거 짤렸지만 어찌어찌 사정하면 다시 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병든것은 의사조차 모르면서 내가 멀쩡하다고 믿는 부분은 또 아무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을 그냥 내 위치에서 내가 아는 상식과 질서로 판단할 뿐이다.

자살이냐 아니냐

정신병이냐 아니냐

그냥 판단할 뿐이다. 자살시도를 하거나 정신병에 걸린 대상이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늘 깜빡한다. 그냥 명확한 인과관계만 필요하다.

 

<다시 하자고 > 도데체 진짜 이름은 모르겠지만 가짜로 살아가는 두 여자가 있다 전혀 방음이 되지 않는 방에서 조금이라도 소리를 줄여보려고 침대를 세우려는 시도를 하는데 웃기게도 그 침대 하나 세우겠다고 볼트 리무버에 드라이버까지 구입하고 그것이 택배되어 올때까지 침대 세우기를 연기하는 사람들이다. 뭔가 중요한 해야할 것이 있는 거 같은데 아무 가치 없는 일에 연연해 하는 것 결국 내가 중요하게 여기느냐 아니냐는 내가 기준이 아니다. 그냥 세상이 기준이라고 하면 그게 기준이 된다.살아갈 때는 몰랐는데 돌아보면 내가 남의 말을 듣고 남의 기준에 연연하며 내가 아닌 타인으로 살려고 많이 전전긍긍했구나 싶은 순간이 있다.

후회스럽지만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아마 똑같이 살지 싶어서 후회할 수도 없다

 

<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 어쩌면 병원의 유림이 퇴원을 한 후 어찌어찌 아카데미를 마치고 난 후의 이야기처럼 읽힌다.

내 인생에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끼어들어온 언니가  내 인생을 결정하고 방향을 정하고 나를 멋대로 가엾게 여기고 돌봐준다. 내가 있으니까 좋지? 이런 폭력적인 말이 어디 있을까?

 

가끔 사람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상대에게 해주고 상대가 만족하지 않는다고 화를 낸다.

이렇게 잘 해주는데 이렇게 내가 희생하고 도와주는데 어쩌면 고마워할 줄을 모를까

염치없고 뻔뻔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말한다

음식을 나눠주고 안부를 물어주고 함께 뭔가를 하자고 권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하는 것에

나는 그저 감사하고 고마워해야만 한다.

그냥 내버려두고 굶어도 죽지 않고  모른 척 해도 되는 일일텐데 그건 인정머리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뭔가를  막 퍼주는 일.. 그리고 감사를 강요하는일.. 이것도 폭력이다.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말들

결국 그건 내 만족때문이더라

내 체면을 위해서 내 자존심을 위해서 너가 잘 되어야 하고  휠씬 더 내세우기 좋은 상품이 되어야 한다고 그게 결국은 다 너를 위하는게 아니겠냐고 믿는 마음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너는 내 사랑을 그렇게 몰라주냐면 따라다니고 애원하고 물량공셀르 퍼붓고 그리고 화가 나서 손이 올라가는 것도

결국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이 더 중요한 일이고

배려라는 말이 참 아름다운 말인데 그 속을 보면 결국 너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가 모자라고 부족한 너를 위해 이렇게 애쓰고 노력하고 무언가를 베푸는 일이라는 말이었다.

내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며 뭔가를 주는 것

물론 그게 필요한 경우가 훨씬 많겠지만  그러지 않는 것이 더나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

 

<추앙>은 이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문단에서의 미투운동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작가가 겪은 일이었던 걸까? 이야기가 더 생생하고 날것처럼 느껴진다.

"문학적 자질을 지년다"는 말이 "시적 허용"이라는 말이 이렇게 뻔뻔하고 치욕적으로 들리기는 처음이다.내가 시적 허용을 말한 것이고 문학적 표현을 한 것인데 그걸 무지하게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 매너는 그 감각은 도데체 무엇이냐며 피해자엑 탓을 한다.

폭력이 폭력이라고 보이지 않는것은 폭력을 행하는 그 본인의 뻔뻔함이거나 권력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폭력을 바라보는 방관자들의 말없는 동조에 있다. 그게 뭐가 문제라고 너만 예민한 거가지고 다들 좋다고 하는데 그 정도는 관심이고 애정인데 라고 덧붙이는 말들은 호기심으로 상철르 한번씩 건드리면서 덧나게 만들고 더 심하게 감염되게 하는 그 말없는 혹은 선한 의도의 폭력들이다.

 

<신체 적출물>에서 주인공은 분명히 내 고통을 내가 생생하게 느끼는데 그건 내 고통이 아니라 상상이라고 말한다. 내 신체 적출물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니 몸의 일부가 여기 이렇게 떨어져 있는데 이 곳에서 통증을 느낀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고통은 여전하고 뜨겁다. 다시 되돌아가 구백만원의 돈을 써서라도 가져오고 싶었던 내 신체의 일부분은 누군가에게는 소독이 되지 않은 살덩어리 그래서 쓰레기가 된다.

나의 고통조차 온전히 내것이지 못하는 세상이 폭력이다

 

표제작 < 눈과 사람과 눈사람>은 참 복잡하다.

분명 아파하는 누군가와 연대하기 위해 내 일상을 접어놓고 뛰어든 일인데 그 나의 선한 연대가 누군가에게 고통이 되었다. 그리고 나의 선한 의도가 폭력이라고 누군가가 말한다.

그리고 나의 의도를 의심받는 일 그래서 내가 나를 증명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도 폭력당하는 일이기도 하다. 순수한 피해자의 프레이에서 우리도 허우적거리며 그 것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지워나가는 일

연대해야 한다는 말을 참 든든하고 따뜻한 말인데 어쩌면 그 연대가 제각각 생각하는 바가 다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A라는 이유로 연대하지만 누군가는 A`를 이유로 연대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전혀 다르게 B라는 이유로 연대할 수 있다.

피해자가 원하는 일이  정의를 위해 싸우는 일과 다른 일이 될 수도 있고

우리가 밀어붙여서 바꾸고 싶은 세상이 어쩌면 누군가는 주저하고 그냥 그대로 묻히기를 바라는 일일 수도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소소한 일상에서도 ....

머리카락이 나온 음식을 받으면 당당하게 따지고 환불받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고

조용하게 알리고 앞으로 주의하겠다는 사과로 만족하고 싶은 사람도 있고

그냥 말없이 덜어내고 모른 척 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텐데.

누군가는 정의롭고 누군가는 비겁하고 누군가는 욕심장이가 되고 누군가는 속깊은 사람이 되기도 하는 일

 

좋은 뜻으로 그랬어

누구나 그렇게 말하고 행동한다.

그 순간 내 앞에 있는 상대를 위해 혹은 내가 알고있는 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은 순수하다.

다만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인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내 위치에서 나의 순수한 의도라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면  혹은 원치 않은 것이라면 그건 폭력이니까

 

단편들을 읽으며 열여덟에서 서른언저리까지 어리면 어리고 젊은 화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어른이 참 잘못해서 다음 세대가 아프고 힘들구나

어른이 어른답지 못해서

내행동이 옳다고만 머리로 생각만 해써 때로는 그 때문에 누군가 아플 수도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지나가는 구나

왜 말하지 않았니? 왜 나서지 않았니라고 쉽게 나무라고 충고하는 일

그것조차 조심해야 할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 기성세대가 되었고 꼰대가 되었다.

아직도 나는 젊고 피가 뜨거워서 쉽게 화를 내고 불만스럽고 예민하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라 그저 까탈스런 꼰대가 되어있더라.

성숙한 어른의 시간은 기억나지 않은데 철없고 어리석은 젊은이에서 두꺼워서 무엇으로도 뚫리지 않은 꼰대가 되어버렸다. 슬프게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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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하는 마음 일하는 마음 2
김필균 지음 / 제철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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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하는 마음. 쓰는 사람들.그 마음이 어딘가 누구에게 닿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이야기.그 마음은 독자가 읽으며 품는 마음으로 완성된다. 완성될것이다. 그들도 확신할 수없어 서성이고 망설이고 마뜩찮아한다. 읽으머 좋기도하지만 갸우뚱했을 순간도 굳이 미안해하지않아도... 곱씹을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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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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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한 균열'

 

작품들으르 읽으며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이미지는 작은 실금들이 이어진 균열이었다.

 

<길들여 지지  않은 딷>의 루마와 아버지

<지옥-천국>의 엄마의 Ekef ghr은 엄마와 흐라납 삼촌 그리고 데보라

<머물지 않은 땅>의 매건과 아밋 부부

<그저 좋은 사람>의 수드하와 라훌 남매

<아무도 모르는 일>에서의 폴과 생과 파룩 그리고 그들의 내면에서

<헤마와 코쉭>에서의 두 사람 그리고 두 사람과 그들의 가족에서

그들은 조금씩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그동안 믿어왔던  익숙한 내 면에서 균열을 느낀다.

알이 깨어져야 그 속에서 나올 수 있다

알 속이 마냥 따뜻하고 안락해서 그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균열은 무언가를 깨는 것인 동시에 다시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신호이다.

분열된 세포들이 성장을 이룬다.

부모의 손을 놓는 순간의 불안고 공포를 이겨내야만 내 세상을 만들수 있고

내 아이는 성장할 수 있다

균열은 그런 것이다.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는 동시에 모든 것이 시작할 수 밖에 없는 토양이 된다.

 

 

아버지는 나이를 먹고 은퇴를 했고 이제 더이상 돌봐야 할 가족이 없다. 동시에 자신을 돌봐야 할 가족도 없다. 그건 자유롭고 동시에 고독하다.

그리고 이전 가족에 둘러 쌓여 있을 일도 없지만 내가 무엇을 하든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잔소리를 들을 이유도 없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그렇게 분리되어 이제 어쩌면 행복하다.

루마는 여느 자녀처럼 부모에게 반항하고 거부하는 성장기를 지났고 이제 그 부모의 나이가 되어 부모의 입장에서 그리고 부모 부양이 의무인 민족적인 정서에서 많이 갈등한다.

아버지를 모셔야 하는게 아닐까. 저렇게 홀로 두어도 될까?

아버지  생각이 맞다.

이제 루마가 아버지가 필요하다. 어른에게도 어느 순간 나를 끌어주고 기댈 수 있는 다른 어른이 필요할 때가 있다. 지금 루마가 그렇다. 너의 선택이 옳다고 말해주고 옆에서 거들어주고 조금 대신 해줄 수도 있는 사람이 어쩌면 아이들보다 어른이 더 필요하다.

균열을 가지고 분리되었으나 아직 분리되지 못한 루마가 오히려 더 불안하다.

아버지는 이제 충분히 혼자서 하나로 완성되었다.

 

낯선 땅에서 아무도 없는 상황

그 곳에서 자기와 같은 고향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는 것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나의 습관을 잘 알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것도 일종의 연애감정이 아닐까.나에게 의지하는 프라납이 어쩌면 엄마에게는 존재의 의미를 되찾아주는 사람이고 희망이고 사랑이다.

책임은 있지만 애정이 없는 아버지보다 옆에서 칭얼거리며 말을 들어주고 눈을 맞추어주고 함께 시간을 시시껄렁하게 보내는 사람이 더 소중하다.

엄마의 마음이 그렇게 프라납에게 기울어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할 수 밖에 없다는 걸 어린 딸이 이해하긴 힘들다. 촌스럽고 부끄럽고 남에게 내어보이고 싶지 않은 엄마의 투박하고 낯선 x통제는 벗어나고 싶은 게 당연하다. 삼촌의 연인 데보라에게 더 끌리는 게 당연하다.

엄마와의 인연은 그렇게 끊어버리고 싶고 데보라와는 무엇이든 연결되고 싶은 마음

엄마에 대햔 배신은 아닌데 엄마는 늘 그 자리에 있을테니 하는 마음도 있을테고

나는 엄마와 다른 사람이고 싶다는 딸에게 데보라는 참 매력적일 것이다.

그리고 엄마는 데보라의 등장으로 프라납도 잃고 딸도 잃게 생겼다.

균열은 그렇게 내 모든 것을 가져가버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

어느 가을 석양앞에 바바리 코트를 걸치고 오래오래 서 있던 엄마의 마음은 그 지속되는 삶이 지긋지긋하면서 동시에 다행이지 않았을까

그런 모순된 마음이 드는 때도 있는 법이니까

 

장녀들은 다 그럴까

부모에게 순종하고 동시에 동생들에게 책임을 느끼는 존재일까

나는 장녀가 아니어서 첫째가 아니어서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제나 옳은 행동만 선택하는 언니가 가끔은 답답하기도 했다. 저러지 않아도 되는데... 저러지 않아도 엄마나 아빠가 기절하진 않는데...

동시에 미움도 가지고 있었다. 늘 자기가 옳은 역할을 해버려서 나는 자연스럽게 나쁜 동생이 되어버리게 만드는 일이 왕왕 있었다. 그렇게 착한 언니인데 그렇게 책임감있는 누나인데 왜 그 누나를 언니를 속상하게 만드냐고 누군가에게 야단을 맞을 때 난 늘 억울했었다.

누가 그렇게 착하게 굴라고 한 적도 없고 우리 때문에 걱정하고 전전긍긍하라고 한 적도 없고

엄마대신이라고 한 적도 없는데 왜 혼자 안달하고 혼자 애태우면서 나만 나쁜 사람을 만들까?

다 자기 만족일 뿐인데 나는 하나도 고맙지 않은데 왜 저러고 살까?

그 마음을 나이 먹어 이해가 되지만 반갑지 않은 건 여전하다.

착하기만 한 사람. 뭔가 책임을 느끼고 하려는 사람들이 고맙지만 동시에 참 버겁다.

수르하의 마음도 알지만 어쩐면 라훌의 마음을 더 알거 같다.

물론 수드라 때문에 라훌이 알콜 중독이 된 것도 아니고 대학을 그만 둔것도 아니다.

그건 라훌의 선택이고 그의 책임이다.

조금 이기적으로 말하자면 수드라보다는 차라리 부모의 어정쩡한 자존심과 자식에 대한 두려움이 더컸을 것이다. 자꾸 수드하가 자기랑 몰래 술을 마셨던 그 순간을 후회할때 그때를 되돌리고 싶어할때 그건 아니라고 그런 마음이 라훌을 더 외롭게 하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잘 하고 싶어 애쓰는 순간 관게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국적이 조금안 방만한 생의 연애를 지켜보는 폴은 어떤 마음일까?

폴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금이 가는게 아니라 그읜  내부에서 균열을 느낀다.

생을 알게 되고 룸메이트로 지내면서 그의 연애에 조금씩 개입하고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속에서 조금씩 균열이 일어난다. 이전의 폴이라면 전혀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고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낀다.

 

헤마와 코왹의 이야기는 어쩌면 참 상투적이고 어딘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거 같지만 그래서 통속적으로 마음을 흔든다.

어릴 적 첫사랑. 두근 거리는 감정 숭상하는 마음

멋진 타인에게 끌리면서 내 가족이 구질구질하고 촌스럽게 느껴지는 마음

붏편하고 속상하면서 동시에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

사춘기 소녀의 복잡한 심경을 이야기하고  이어

어머니를 잃고 제대로 애도의 기간을 보내지 못하고 그대로 눌러 놓은 채 나이 먹은 소년의 이야기. 아버지와는 멀어지고 그 아버지의 재혼이 낯설고 싫지만 그걸 싫어한다고 표현하기엔 이제 성장했고 아버지가 이해되어버리는 묘한 감정들

소년의 애도는 그리고 죽음에 대한 집착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아니라 이젠 스스로 풀어내야 할 숙제가 된다.

그리고 다시 만난 두 사람 , 짧은 시간 불같은 연애 그리고 각자 제자리로

그러나 이전과는 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

 

딴 이야기지만 어릴적 전학을 5번을 했다.

익숙할만하면 떠나야 했던 경험들이 어쩌면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는 쪽이 내가 보호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일찍 알게 해줬다. 그냥 친절하고 상냥할 수 있는 무심함 그게 나와 타인의 관계였다.

시시콜콜 집안 일을 나누고 비밀을 나누며 단짝을 만드는 일은 영 서툴렀다.

내가 누군가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도 어색하고 누군가가 내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도 불편했다.쿨하다고 스스로 믿었지만 그건 쿨 한것이 아니라 상처받지 않겠다는 비겁함이고 나를 지키려는 방어였다. 늘 좋은 사람이었고 언제나 감정의 기복없이 이성적이고 잔잔한 사람이지만 참 알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누구랑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그냥 배경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계속 내가 어디론가 이동하고 어디서든 타인이어야 한다는 게 외롭고 슬펐지만 그걸 누구에게 말 할 수 없었다. 남들이 보기엔 늘 잘 적응하고 아무일도 없는 그래서 조금은 무심해져도 괜찮은 아이였으니까

 

아이를 키우며 왠만해선 전학이나 이사는 하지 말아야지 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새로운 곳에서 이미 형성된 관계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걸 지켜보면서 어쩌면 아이가 힘들었을 것보다 내가 더 힘들어서 혼자 끙끙댔던 거 같다.

길게 이어진 아이의 친구문제와 왕따문제를 겪으며 그게 아닐 지 모르는데 나는 나의 이사결정을 원망했고 모든게 거기서 비롯되었다고 혼자 전전긍긍했다.

다행히 요즘 아이들은 굳이 뿌리를 이식한 경험이 없이도 조금씩 혼자가 익숙하고 개인적인 경향이 강해서인지 우리 아이들도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걸 배워가는 중이다.

이게 좋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줌파 라히리의 작품은 문화와 터전을 바꾼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그 낯선 곳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노력하는 사람들 그렇게 미세하게 균열되는 관계를 그린다. 가족끼리 형제끼리 부부끼리 그리고 내 속의 나에게 미세하게 실금들이 생기고 그 실금들이 서로 만나 더 길어지고 깊어지며 흔들리고 갈라지지만 결국을 그렇게 계속 삶을 이어가는 이야기들이다.

내 감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이 오고

남이 나같지 않다는 외로움을 느끼며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나도 그 균열을 받아들이고 기다리기도 하지만 상처를 입는다.

관계란 유기적이어서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지속적으로 영원히 이어지는 관계는 매말라서 박제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건 관계가 아니다.

만남이 있고 헤어짐이 있고 언젠가 누구든 잊혀지고 잊고 그렇게 산다.

관계의 균열이 불행만은 아니다.

균열과 절망 그리고 세상의 끝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균열을 통해 성장하고 더 단단해진다.

 

 

예전 영화 <말아톤>을 보고 누군가가 말했다.

이 영화는 내가 내 아이의 손을 언제 놓아야 하는가 에 대한 영화라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비단 내 아이만이 아니다.내가 누군가의 손을 잡았던 순간이 있고 그 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동시에 그 잡았던 손을 놓아야 하는 순간도 있다.

계속 손을 잡고 있다면 든든하고 불안하지 않겠지만 한 손이 잡힌 상태 혹은 누군가를 잡은 상태로는 무엇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살아가는데는 자유로운 두 손이 필요하다.

그리고 땀에 끈적이는 손이 불쾌할 수도 있고 서로 잡은 손을 언제 놓아야 할지 서로 타이밍을 만주지 못해 눈치만 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잡은 손은 언젠가 놓아야 한다.

초원이가 걱정하는 엄마의 손을 놓고 혼자 달리는 순간

엄마가 결승점에서 혼자 달려올 초원이를 믿고 기다리는 순간

이런 균열이 관계를 더 단단히 만들고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

 

그리고 이 소설집은 꽤 좋은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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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9-07-22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초등학교 때 전학을 한 다섯 번은 한 것 같습니다..ㅎㅎ

푸른희망 2019-07-23 07:02   좋아요 0 | URL
님도 옮겨심기가 많았었군요~~
 
[eBook] 레몬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판매중지


 

월드컵이 한창이던 그 해 소녀가 살해되었다.

흉기로 인한 두부 손상

소녀와 같은 학교를 다녔던 두 소년이 용의자로 좁혀졌다.

한 소년은 차에 소녀를 태우고 갔다는 것이 목격되었지만 알리바이가 충분했고

다른 소년은 배달 스쿠터를 타고 가다가 차에 탄 소녀를 보았다고 했는데 그 증언이 어딘가 삐걱거리서 계속 용의자로 의심받고 또 의심받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유야무야되었다.

그리고 사건은 해결되지 않고 미궁에 빠졌고

두 소년의 인생은 조금 뒤틀렸고 죽은 소녀의 가족은 멀리 신도시로 이사했다.

소녀의 동생은 상상하지 못한 다른 삶을 살아야 했고

그저 옆에서 사건을 지켜보기만 했던 소녀의 동창은 또 다른 이유로 예상밖의 삶을 산다

 

누구나 그렇다.

삶은 예상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어린 시절 철없이 꿈꾸었거나 단언했던 일들이 내 삶에서 일어나기도 하지만

전혀 상사할 수 없던 일들이 자꾸 생기고 예외들이 자꾸 쌓이면서 그것이 마치 내가 계획했던 일처럼 내 운명처럼 내 삶을 직조하며 나를 앞으로 밀어낸다.

죽음이란 삶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에도 늘 죽음은 삶에서 의외의 사건이다

누구나 죽는다는 명제를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군가의 죽음은 늘 낯설고 의외다.

그 죽음을 납득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다 되었을때 우리는 비로소 그 죽음을 인정하고 애도하며 그를 보낼 수 있다.

어느 한 순간 이해되지 않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앙금이 남게 되면 좀처럼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타인이 나에게 이해시키거나 내가 타인을 이해시킬 수 없는 유일한 대목이 죽음이 아닐까  어떤 방식이 되었건 어떤 경로를 통했건 설령 그것이 오롯이 나만의 아집이거나 망상이라 할지라도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절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삶도 다르지 않았다.

거리에서 꽃망울을 보면서 우리는 겨울이 다 갔음을 안다.

그 나무들이 연두연두하게 변하는 걸 보며 우리는 봄이 이미 갔음을 알게 되고

비가 내리고 낮과 밤의 온도차를 느끼며 이미 여름이 다 갔구나 하고 쓸쓸해진다.

그렇게 살아있는 시간 역시 지나고 난 뒤 그것이었구나 하고 알아간다.

어쩌면 사람은 지금 이순간을 살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지금이 봄인지 여름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기도 하고 지금 이 순간 내가 사랑을 하는 것인지 증오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습관처럼 정에 끌려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알 지 못한다.

화를 내고 미련을 털어내고 한바탕 퍼부은 후에 우리는 사랑이 끝났음을 알게 되면서 동시에

내가 그동안 그를 많이 사랑했음을 혹은 사랑을 재고 있었음을 안다.

단칼에 무를 베어내고서야 우리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다언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상희는 어떻게 그리고 한만우를 잃은 선우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태람은 이제 좀 덜 혼란스러울까?

이미 죽어버린 소녀는 그 죽음에서 이제 평안해졌을까?

 

가끔 생각했다.

사람이 가진 끔찍한 능력중 하나가 어쩌면 공감과 이해가 아닐까

사람은 누구든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사람은 단한가지 면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악함에서 선함에 이러는 수백수만수천 수억개의 스펙트럼을 가진 것이 사람이기에 우리는 어떤 상황의 어떤 행동의 사람도 그 전후맥락과 환경과 그때의 마음을 알게 되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만인이 만인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세상 어느 귀퉁이 누군가는 나를 이해하고 공감해줄  사람이 분명이 있고 감정없고 건조한 인간도 어디 누군가를 이해하고 함꼐 눈물을 흘려줄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고통스럽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그 사람이 어느 순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마음에서 스르르 녹아버리면 어쩌지 못한다. 이러면 안되는데 그 사람의 그 맥락을 알아버리는 건 두렵다.

다언이 누군가를 이해하고 누군가에게 복수하며 평생 죄책감으로 살아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프다.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었고  가장 큰 복수는 잊고 내가 행복한 것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것조차 개소리가 되어버린 상황이 애처롭다.

 

소설이 미스테리 스릴러 장르가 되어 누가 범인이며 그의 트릭이 무엇이었는지 화끈하게 밝혔다면 차라라 아무것도 남지 않을지언정 시원하고 통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죽음이 남기는 것은 그렇게 개운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아무것도 해결된 것도 없고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죽음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진행형이다

아프고 화가 나고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개운할 수 없다.

시간이 해결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시간이 해결한다는 경험을 했다면 그건 그 아픔의 당사자가 아닌 타인이었음을 증명하는 것뿐이다,

소설 표지의 레몬이 선명하고 상큼하지 않다.

뿌옇고 흐릿해져서 입에 침이 고이지도 않는다.

세상엔 이런 레몬도 있다.

보고 있어도 신맛이 느껴지지 않고 입안이 자꾸 말라가는 레몬들

그게 죽음이든 지나간 사랑이든 상처이든 선명하지 못한 것들은 늘 남아서 발목을 잡는다.

그럼에도 산 것들은 살아야 한다.

 

 

사족1  한만우의 이야기를 선우의 입장에서 한 번 듣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쩌면 많은 이야기가 없을 것이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와 함께 그를 기억하는 선우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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