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 - 힘껏 굴러가며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
최필조 지음 / 알파미디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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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제목이 제목이 내 속에 스며들어서..

사실 사진을 잘 모른다.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진을 찍으려고 애쓰는 그만큼 그냥 눈으로 오래오래 보고싶을 뿐이라고 변명을 한다.

사실 손재주가 신통찮아서 어떻게 찍어도 내가 본 게 아닌 이상하고 조금음 맥이 빠진 사진이 남아서였다. 내가 본 장면은 저렇게 뭉클하고 저렇게 저릿한데 막상 화면에 찍힌 건 흔하고 아무런 맥락도 없고 어딘가 본듯하고 없어도 그만인게 나타나니.. 차라리 눈으로 보는게 낫다 싶었다.

 

내 속을 내 마음을 다 보여줄 수 없어 말이 필요하고

내 말이 모든 걸 다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 넘치는 게 있어서 보여줄 게 필요하다.

사실 글 읽는게 더 익숙해서 사진보다는 글에 더 오래 머물고 더 마음이 스민다.

글을 읽고 사진을 보면 그 말이 그 글이 사진과 더해져거 다시 스며든다.

 

그냥 스쳐지나도 하나도 이상할 거 없는 풍경들 사람들을

내가 이렇게 오래 보고 있는 이유가 뭘까

그냥 거리에서 어딘가에서 마주했다면 의미없이 눈 길 한 번 스치고 말았거나

게으른 천성때문에 결코 마주치지 않았을 풍경들과 사람들을 본다.

누군가 이렇게 기록을 남겨서 내가 보는 구나

 

예전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상계동의 시간을 찍은 사진들을 본 적이 있었다.

사람보다는 골목들 집들 사진이었다.

살던 주민들은 다 떠나고 빈 집만 남아서 햇살을 받고 바람을 받고 그렇게 하나둘 낡아가고 사라져 가던 풍경을 보면서 저릿했었다.

내가 아는 상계동은 아파트가 많이 들어섰고 학원가가 유명하고 뭐 그런 곳인데 그 너머 어딘가 아직 재개발이 시작되지 않은 .. 하지만 곧 시작될 그 곳 풍경들이 낯설면서 따끔따끔하게 들어왔다.

그리고 최필조님의 밤골의 풍경과 사람들을 보면서 다시 그때의 감각을 떠올린다.

이제 이곳은 어떻게 변했을까

이 사람들은 어디 있을까

순간의 감상일 뿐이겠지만 아릿하다.

 

어쩌면 사진 자체는 그다지 새롭거나 대단하지 않다.

어쩌면 그 대단하지 않고 익숙하고 뻔한 사진들이 주는 느낌이 있다.

그 느낌이 차마 다 보여주지 못해 덧붙인 글에서 오는 감각일 수도 있다.

골목의 풍경들

풍경속의 사람들

사람속의 손들 몸짓들 미소 눈빛들이 훅 들어온다.

 

그림이 아닌 사진을 보는 건  나름 상징적인 이미지를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사실적이어서

헉~ 하는 마음이 앞선다.

알고 있었는데 한 번도 자세히 오래 바라본 적이 없는 모습에 조금 죄스럽고 안타깝고 그리고 마냥 남의 일도 아닌 것 같은...

무심한 손길이나 시선들이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있구나  나는 몰랐다.

 

책을 덮으며

안녕하세요 가 아니라  안녕하셨어요~ 라는 인사.. 이제 나도 그래야겠다.마음 먹는다.

일단 더 늦기 전에 엄마의 사진을 찍어야 겠다고  마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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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1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희망 2019-11-25 17:43   좋아요 0 | URL
그래볼려구요. 지나면 아쉬운 것들이 자꾸 늘어갑니다. 촛점이 안 맞거나 이상한 표정 도데체 왜 찍었나 싶은 사진도 일단 그 순간을 돌아보는데는 없는 것보다 좋더군요.
엄마랑 많이 찍고싶어졌어요
이책 유레카님 리뷰보고 읽게 됐거든요. 좋은 책 알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대식가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8
M. C. 비턴 지음, 문은실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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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하다못해 나른한 경관 해미시의 사건수첩이랄까

사실 사건을 풀어나가는 건 해미시지만  온 마을이 함께 문제를 풀어간다고도 할 수 있다.

무심하게 뱉는 말이나 생각들이 어떤 단서를 보여주기도 하고 실마리를 찾게 한다.

한창 빠져 있는 드라마속 옹벤져스처럼 늘 그 고장에 붙박이처럼 배경처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풍경을 만들고 이야기를 엮어간다.

문제는 항상 그게 그거같은 평화롭고 따분한 풍경같은 마을에 늘 이방인들이 찾아와서 갈등을 만들고 저희들끼리 지지고 볶다가 누군가 죽어간다는 거.

 

이번 작품도 다르지 않다.

속물적이면서 적당히 순박하고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괴로운 사람들이 나쁜 마음을 먹고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매번 누군가 이방인이 올 때 마다 살인이 일어난다는 건

평화롭다는 것과 많이 멀어서 원....

 

결혼정보회사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단체로 짝을 찾으러 온 사람들 사이에서 사건이 발생한다.

각각의 회원들은 프로필에 적힌 모습 (그러니까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과 정작 자기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 은연중에 속셈이 드러나는 모습이 많이 다르다.

마리아가  열심히 각자의 프로필을 읽고 고민해서 매칭했을 테지만 그들의 속내까지 알 수는 없으니까  계속 갈등하고 충돌하는데 설상가상 나타나지 말았으면 하는 인물까지 나타나고

급기야 살인 충동을 일으키더니 정말 죽어버렸다.

 

누군가의 행동이 예의없고 무례하고 역겨워서 미워할 수 있다. 피할 수도 있고 뒷담화 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죽어마땅한 건 아닌데 ...

그것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이상한 사람에게 그렇게 되다니..

좀 씁쓸하다.

 

우리의 경관 해미시는 프리실라에게 너무 튕기는 거 아닌가 몰라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오는 여자 막을 생각도 없고 프리실라에게도 막대하는게 자꾸 미워질려고 하네...

긴장과 스트레스  해야할 많은 일거리를 앞에두고 에라 모르겠다하고 도망치는 방법

그건 이런 추리소설을 읽는 일이다. 범죄가 있고 살인이 있고 인물들마다 다른 면모가 드러나는 이야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 잠깐의 일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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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가 우는 섬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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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기하고 슬픈 민담  '바늘상자에 넣어 둔 눈알'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계모와 살고 있는 소년의 이야기

그리고  대나무가 유명한 섬 호죽도에 여덟명의 사람이 모여든다.

새로 지은 연수원은 이용해보고 모니터링을 한다는게 표면적인 이유다.

대학생, 웹툰작가, 역사소설가, 가수, 회사원, 택시기사 영화기획자, 그리고 기자

제각각 다른 직업을 가진 이전에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 간도 크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초대에 응해 섬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얄궃게도 딱 그때 태풍이 몰아쳐서 모두가 섬에 갇히게 되고 그리고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누가 죽였는가

어떻게 죽였는가

왜 죽였는가

그리고 이 제각각의 인물들이 어떻게 선택되어 이 섬으로 모여들게 되었나?

 

내가 기다리던 작가중 한명인 송시우의 새로운 소설이다.

사회파 미스테리를 내용으로 하면서 아주 고전적인 클로스드 서클을 가져왔다.

고립된 섬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사건을 해결해나가야 하는 상황

그러나 인물들은 참 송시우 스럽다.

어딘가 허당같고 동시에 기괴하고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사건을 풀어간다.

고전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느라 더 기운이 빠지고 에너지를 쏟게 되지만 송시우는 그렇지 않다. 그냥 다들 머리를 맞대고 함께  문제를 푼다. 물론 전작과 다르지 않게 그 과정에서 좌충우돌도 있고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다른 성향의 인물들이 부딪치기도 하고 슬립스틱 코메디도 이어지지만 그래서 우직하게 해결을 향해 나아간다.

 

내가 송시우의 작품을 좋아하는 건 사건도 매력적이지만 등장인물들이 참 독특하고 재미있다.

이전 조사관들의 캐릭터도 좋았고 장편의 인물들도 좋았다.

젠체하지 않고 속물적이고 조금 음침하기도 한 복합적인 면이 좋았다

이번에도 날카롭지만 어딘가 불쾌하기도 하고 허당스러운 임하랑과  다른 인물들이 등장한다.

모두가 유쾌하고 아슬아슬하다.

 

이야기의 힘을 믿고 사건을 시작되었고 그 마무리도 이야기가 해줄 것이다.

사실은 쉽게 잊혀지지만 이야기는 오래오래 전달되고 덧입혀지고 조금씩 바뀌어도 그 이야기가 전달하고 싶은 단순한 주제는 오래오래 머문다. 그리고 오래 멀리 퍼진다.

이야기의 힘이다.

 

다음 작품이 또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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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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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들이 꼭꼭 눌러쓴 듯이 마음에 남았다.

초등학생의 제야. 중학생이 된 제야 열일곱살이 된 제야가 어른들을 보면서 대하면서 혹은 혼자 생각하고 느끼는 감정들 그건 그 나이때의 나의 감정과 겹쳐진다.

뭔가 어색하고 이상하지만 뭐라고 할 수 없는 막연함

재야는 그 감정들을 적확하게 포착해낸다.

 

"이상하게 꼭 사과를 할 사람은 사과를 하지 않고 사과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사과하고 그런다."

 

"아저씨가 이렇게 비싼 선물을 사줬으니 나는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좀 불편하다. 앞으로 아저씨를 보면 핸드폰이 생각날 거고 아저씨의 말을 잘 들어야 하ㅏㄹ 거 같고 억지로 빚을 진 것 같다."

 

"어른스럽다고 말하면 더 어른스러워야 할 거 같았다."

 

"글 잘 쓰는 제니도 부러웠지만 '싫어요'라고 말하는 제니가 더 부러웠다."

 

"어른한테 싫다고 말하는 건 왠지 무례한 것같아서 괜찮다고 말하는 건데 아지씨 아닌 다른 사람들도 자주 그런다. 거절인 줄 모르고 같은 말을 계속하고 괜찮다고 대답하다보면 나는 점점 안 괜찮아지고 마음이 이상하게 상해버렸다'

 

아이라서 모르니까

아이라서 어른 말을 잘 들어야 하니까

아니라서 질문을 하면 안되고 몰라도 되는 일이 많지만 정작 아무것도 모른다면 왜 모르냐고 질문받고 추궁항할 수 밖에 없는 나이

어른에게 어떻게 대하라고 말들은 하지만 그 관계가 모호하고 일방적이어서 뭐라고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안될거 같은 상황들의 반복들

아예 버르장머리 없는 용감한 아이가 되거나 말 듣고 어른스러운 견디는 아이가 되거나

 

제야의 문장들이 슬며시 스며들었다.

한문장 두문장 하나씩 문장들이 늘어날 때마다 그 글들이 내 속에 차곡차곡 쌓여서 어떤 부피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스윽 스며들어 어떤 부피도 느껴지지 않는데 자꾸 가슴이 답답하고 따끔거렸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괜찮은데.. 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제야는 자꾸 나보다 먼저 참고 견디고 어른스럽게 행하고 있었다.

참아내는 제야.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제야 어색한 제야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제야

생각이 복잡한 제야가   아프다.

사실 지금 나라고 다를까

제냐의 부모와 다를까 동네 사람이나 친척들과 다를까

제니나 승호와 다를까

아니 내가 제냐였더라도 역시 원인을 나에게서 찾았을 것이다.

샅샅이 뒤지고 마음 이구석 저구석을 뒤져서 탈탈 털어내고 내 한 귀퉁이 어딘가 있던 불온한 생각들 순간적인 행동들을 비판하고 따져들며 내탓을 했을 것이다.

제냐의 부모였다면 부끄럽게도 남의 이목을 먼저 떠올리며 내 아이의 허물을 감추는데 급급햇을 테고 제니나 승호라면 분하고 억울해서 팔짝 뛰다가도 끝없이 베풀어야 하는 위로와 수용에 내가 먼저 지쳐 화를 냈을 것이다.

내가 제냐의 이웃이라면 ... 나는   내가 알고 있던 기존의 이미지에 맞춰 잘잘못을 따졌을 것이다. 그들과 다르지 않게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

제냐의 문장이 내 속에 스며들어 아프고 아파서 계속 같은 문장을 읽을 수밖에 없음에도

그 일이 현실이라면 나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성폭력이라는 것은 참 힘들다.

더구나 친족 성폭력이라는 것은 어떤 객관적인 판단 전데 개인적이고 사적인 일로 먼저 인식된다.가족사이에서 일어난 사적인 영역 어떤 사회적인 기준이나 판단 대신에 감정과 관계와 대의가 먼저 따르는 사건이다.

그렇게 점잖고 능력있고 권력을 가진 꽤 괜챃은 평판의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일을 저지르겠는가.. 그들의 생각 역시 그랬다.

그가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하는데. 얼마나 믿음이 깊은 사람인데. 우리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더구나 그 집에 얼마나 잘해주고 그 아이들을 얼마나 이뻐했는데

내가 더 잘 알고 내가 더 믿고 내게 더 이익이 되는 사람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

증거가 없고 목격자가 없다.

그 비오는 밤에 여자아이가 겁도 없이 외딴 곳 컨테이너에 갔다는 것 자율학습을 빼먹었다는 것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는 것

평소에도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웃으며 응했다는 것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도 카톡에 답을 하고 이모티콘을 써가며 대화를 했다는 것

그런 험한 일을 당했는데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병원에 가서 증거를 찾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는 것.

모든 것이 제야에게는 불리한 일이다.

아무런 힘도 없고 아무런 증거도 손에 쥐지 않은 열일곱은 그냥 그렇게 당하는 수 밖에 없었다.

 

사건은 늘 그렇듯 비슷비슷하게 흘러간다.

부모는 제야를 보호하는 일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잊는 거라고 믿었고

사회는 제야를 먼저 의심하고 탓했고

그 남자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소설 후반부 길고 긴 묘사로 드러나는 그의 품성은 아무런 의심을 할 수 없다.

사람좋고 점잖고 매너있고 이전에 단 둘이 있을 경우가 많았음에도 늘 깔끔하게 거리를 두고 대했던 경험들 말들 행동들  그는 무서운 괴물은 아니었다.

친절한 당숙이고 능력있는 친적이고 누구에게나 매너와 호의를 베풀줄 아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 비오는 날이 그에게는 순간적인 실수일 것이다.

아니 평소 제냐에게 느낀 호감이 그날 더 크게 일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폭력은 폭력이고 그 일을 해서는 안되는 거라는 걸 그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떤 변명을 하든 그가 받은 피해보다 제냐가 받은 피해와 고통이 더 크다는 걸 알아야 하는데

그도 주위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고 하지 않았다.

남자라면 한 번 쯤 그럴 수 있는 일

먼저 꼬리친 여학생이 잘못한 거고  지금 와서 잘잘못을 가려서 누가 더 손해를 볼거냐는 가벼운 그러나 날카로운 말들

괴물을 늘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걸  드러내도 괜찮은 상황에 아무렇지 않게 그 얼굴을 드러낼 뿐이다.

그건 남자의 본성이 될 수도 있고 순간 나만 느끼는 애정일 수도 있고 흔히 일어나는 남자들의 실수같은 거라고 말해지기도 하지만 괴물의 얼굴은 피해자에게 두려움과 수치심을 줄 뿐이다.

결국 피해자가 떠나는 것 도망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제냐는 자기가 망가졌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하게 망가졌다고 하지만

늘 더 아래는 있다. 더 망가질 수 있었고 더 처참해질 수 있었다.

그건 아직 그에게 희망이 있고 괜찮아 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참아오고 견뎌오는 시간을 버티면서 제야는 조금씩 일어선다.

지금도 일어서고 있을 것이다.

 

다른 상황도 마찬가지지만 친밀한 관계의 성폭력이 힘든 건

내가 그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괴물도 짐승도 아니었고 친절하고 상냥한 어른 남자였다.

그래서 나는 괴롭고 모든 잘못은 내게 있다고 믿는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조금 더 빠르게 대응했더라면 내가 들뜨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일이 있고서 아무렇지 않은 상대를 보게 된다면 더 혼란스럽다.

이게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일인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만 가만 있으면 괜찮을까

제야도 그렇게 고민하고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생각을 한다.

가만있으면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면 이 일은 또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구도 당할 수 있다. 고통은 또 다시 되풀이 될 수 있다.

그때 나는 아팠고 두려웠고 부끄러웠고 그가 잘못한게 맞다.

그렇다면 말해야 하고 알려야 한다고 제야는 생각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영원히 모를 것이다.

다시 그 짓을 하면서도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 어쩌면 제니가 아프고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생각이 제냐를 움직이게 했고 더 힘들게 했고 견디게 했다.

늘 그렇듯 이차 가해는 첫 가해 못지 않게  아프고 무섭다.

세상이 모두 나에게 등을 돌리는 순간이다.

 

제야는 애쓰는 사람이 될거라고 했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너무 쉽게 괴물이라고 짐승이라고 말하지 않기로 했다.

쉽게 이해하려고 하지 않기로 했다. 그게 더 편하고 쉬운 일이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한다

노력하는 사람 애쓰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 일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성장인데 슬픈 성장이다.

 

 

"부끄럽더라 어른이면서 어른 아닌 척 살아온 나한테 실망했고 어른인 척 어른 답지 못한 인간들 한테도 많이 실망했어 부끄러웠어. 정말 부끄럽더라.

 어른으로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겐 눈과 귀가 하나씩 더 생겼구나. 남들에게는 없는 조직이 뇌에 하나 더 생겼나보다. 눈과 기와 뇌조직이 하나씩 더 생겨서이제 다른 사람처럼 세상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소설은 가해자의 언어와 피해자의 언어를 함께 들려준다.

늘 뻔하게 들어왔던 그들의 목소리를 이렇게 다시 들으며 섬뜩하고 두렵다.

쉽게  생각하고 뱉어내는 말들이 얼마나 무서운 무기가 되는지  내가 본다.

힘겹게 내뱉는 그들의 말들 그들이 견디는 시간들을 들어다 보면 쉽게 이해한다고 할 수도 없고 힘내라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모르면서 뿌려대는 격려가 오히려 비수가 된다.

그냥 옆에서 함께 견디며 있어주는 것  그것말고 뭘 더 할 수 있을까

 

꾹꾹 눌러쓴 문장들이 서서히 스며든다. 조금씩 물들어간다.

책장을 덮어도 자꾸 제야가 생각난다.

잘 하고 있다고. 괜찮다고.. 그런 상투적인 말밖에 생각나지 않아서

그 말이라도 해주고 싶다. 마음은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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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남자가 돌아왔다
황세연 지음 / 마카롱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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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의 좌충우돌 소동극

누가 죽었다.

죽음과 살인에 대한 두려움보다 지역사회의 '범죄없는 마을'이라는 타이틀이 더 중요한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한다. 물론 그 선택안에는  저마다의 이유로 자기방어도 포함되어있지만 크게 자리 잡은 건 마을의 명예를 내가 끊어버릴 수도 없다는 부담감이 더 컸다.

누군가의 잘못된 조금은 이기적인 선택은 다음 사람으로 이어지고 또 다음사람은 앞사람과의 연관성은 전혀 알지 못하면서 다시 자기앞의 문제 해결에 급급하다. 그렇게 전해지고  전해진  우리 이웃의 시체는 결국 소각으로 완전범죄가 되는 가 싶었는데... 정말 엉뚱한 곳에서 다시 등장한다.

 

거짓말도 해 본 사람이 잘하고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타인을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다.

'나'보다 '우리'가 더 중요한 사람들은 자꾸 어긋나고 서툰 거짓말로 덮고 또 덮다가 결국 지쳐버린다.

 

책을 중반쯤 읽다보면 어쩌면 범인이 이 중에는 없겠구나 싶은 생각이 탁 들며 긴장감이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투박스럽고 사랑스러운 인물들이 어떻게 문제를 수습할지가 궁금해서 자꾸 보게 된다. 모두가 알던 사람 내가 본 사람  어디선가 들어본 사람처럼 익숙하고 유쾌하고 만만하다.

그리고 이 소극이 모두 마무리될 때 나쁜 놈이 벌을 받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

 

 

소설줄거라가 아닌 곁가지 이야기지만

사람은 살아가면서 좋았던 기억하나 죽어도 잊지 못할 사랑받았고 존중받았던 경험하나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다시 배운다.

잘 살지는 못하더라도 여전히 더럽고 욕나는 삶이더라도 적어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사랑받았던 시간이 있었다는 기억과 사랑해준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다면 살아가는 힘이 된다.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죽음으로 지켜진 아이였고 마을의 천덕꾸러기라 결국은 고아원으로 가버린 아이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 그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모두가 마음을 모아 보내졌던 것이라면  그건 살아갈만 한 기억이다.

 

소소하고 가볍지만 괜찮은 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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