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플라워 - 삶의 가장자리에 서 있으면, 특별한 것들을 볼 수 있어
스티븐 크보스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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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장소설을 참 좋아하는 모양이다.

아직도 미숙한 부분이 많아서일까?

어떤 모퉁이를 돌고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그래서 쨍한 빛과 마주하고 미지의 어딘가로 향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잘 먹고 잘 살았답니다 하고 끝! 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직도 지나야할 많은 모퉁이들과 많은 터널과 많은 골짜기와 많은 습지가 남았지만 그래도 괜찮단다고 스스로 다독이는 힘을 가지는 그런 성장드라마.....

어쩌면 이런 이야기들을 만나고 내가 접해야할 그런 나이에 나는 너무 소극적으로 틀에 갇혀서  그게 옳다고 믿으며 내가 잘하고 있는 중이라고 착각하며 그 좋은 시간들을 다 보내버렸던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키는 크고 몸무게는 늘고 뼈마디는 점점 삭아가지만 나는 여전히 어리고 유치하고 서투른 그때 그자리에 있기 때문일것이다.

 

미숙한 주인공 찰리가 자기의 과거를 마주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세상에 나아가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찰리앞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있고 많은 불안과 미쳐 알지 못하는 세상에 놓여있다. 여전히 넘어지고 우울하고 도망갈 일도 남았겠지만 그래도 한 고비는 넘겼다.

산다는 건 멈추지 않은 이상 계속 고개를 넘어가고 물을 건너고 평지는 걷고 쉬기도 하는 일이다.

하나의 고개를 넘어서 이제 직진대로가 놓이게 되는 게 아니다 늘 만나는 그 고비마다 우리는 조금씩 성장할 수도 있고 점점 고립되고 딱딱하게 굳어갈 수도 있다.

어쩌면 굳었다가  너무 굳어 감각이 없어져버린 그 부분이 아픈 줄 모르고 베어져 나가기도 하고 다시 말랑말랑 새 살이 돋기도 하고 어느 순간은 팔이 자라고 어느 순간은 몸통만 자라시 기이하고 불균형한 순간을 겪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 책 이야기를 해야지...

갓 고등학교에 진학한 찰리는 모든 것이 새롭고 두렵다.

중학교때 친했던 친구가 자살한 경험이 있고 이야기에 제대로 드러나진 않지만 무언가 우울하고 충격적인 경험을 했었고 그래서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다,

그러나 찰리의 주위 사람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다정하고 화목한 부모님이 있고 현실적이지만 다정한 형과 누나가 있고 샘과 패트릭이라는 절친을 만나게 된다.

흡연 마약 섹스 따돌림 동성애 등등의 여러가지 코드가 등장하며 학교 생활 교우관계가 쉽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주지만 찰리는 잘 적응해 나간다.

무언가 어두운 그림자가 있을 거 같은 가정도 생각보다 밝고 건전하다.

보여지는게 전부는 아니다.

내가 보기엔 무탈해 보이고 화목하기만 한 가족이라도 무언가 어두운 그림자가 있고

문제가 많을거 같은 가정도 의외로 작고 단단한 안전둥지가 있다.

 

아들의 첫 데이트에 콘돔 사용법과 상대가 싫다는 것은 정말 싫은 것이므로 하지 말아야 하고 내가 내키지 않은 것도 하지 말아야한다고 조언하는 아버지도 멋지고

늘 다정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단호하게 말하고 늘 일관성을 유지하는 엄마도 멋지다.

툴툴거리는 현실남매지만 꼭 필요한 순간에는 곁을 지켜주는 형제들도 대단하다.

그리고 보기엔 날라리에 또라이같지만 늘 적절한 순간 적절한 거리에서 딱 맞는 조언을 해주는 패트릭과 샘도 멋지다

찰리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 둘의 입장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들도 참 흥미롭겠다는 생각을 했다.

학생의 문제를 문제로 다가가지 않고 책읽기를 통해서 관계를 맺고 성장을 도와주는 선생님도 멋지다. 내가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책을 읽고 꾸준히 기록하는 것도 꽤 멋질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에서도 꽤 좋은 장면이라고 기억하는데

크리스마스때 비밀산타놀이를 하면서  찰리가 주는 것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모른 척 하고 놀라고 좋아해주는 패트릭의 모습과 작가는 의당 멋져야 한다면서 받은 수트를 입은 어색하지만 괜찮았던 찰리의 모습 그리고 멋진 수동 타자기 선물 .. 장면은 소설로도 따듯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선물을 준비했을 그 마음이 글 속에서 장면속에서도 너무 착하고 따뜻했다.

 

월플라워처럼 벽에서서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하던 찰리는 점점 사람들 속에서 함께 행동하기 시작한다.

늘 생각하던 것이지만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만큼 가슴에서 발까지의 거리가 멀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은 의외로 쉽다.

관찰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이 어느 순간 느껴지고 이해되고 공감되는 순간이 오면 순간 내 속에 불이 하나 반짝하고 켜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순간까지 월플라워다.

그냥 서서 바라보고 생각하고 느껴지는 것 표현하지 못하거나 소극적으로 하는 순간

그리고 그 가슴에서 천천히 발로 이어지는 순간 발이 움직이고 한걸음 벽에서 떨어지는 순간 나는 더이상 벽에 선 한 송이 꽃이 아니다. 방관자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고 관찰자도 아니다.

그때 나는 행동하는 우리가 되고  주체자가 되고 비로소 내가 된다.

 

성장 소설은 그런 것이다. 내가 머뭇거리는 한걸음을 내딛는 것.

아기가 첫 걸음을 땟다고 바로  길을 떠날 수는 없다.

그냥 한걸음 내디뎠을 뿐이다 그게 처음이니까 의미가 있을 뿐

그 다음 한걸음 또 다른 날 의 한걸음의 반복된 훈련이 필요하다.

그렇게 찰리도 한걸음 한 걸음을 연습하기 시작했고 이제 길을 떠날 수도 있다는 마음을 품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알고 친구들과 지내는 시간도 경험하고 그리고 어두운 자기속의 기억과도 마주한다.. 걸음도 내것이고 넘어져서 생기는 생채기도 내것이므로..

여전히 벽에 서서 생각하고 느끼는 나에게 그래서 성장소설은 늘 매혹적인 모양이다

한걸음을 내딛는 일.... 이건 나이를 먹었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늘 첫걸음은 두렵고 불안하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성장소설이 좋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거라는  기대를 하게 되는 이야기에 끌린다.

 

별을 하나 뺀 이유는 너무 좋은 사람들만 나오기 때문이다.

 

<마천루>를 읽고 했던 이야기였던가

너를 위해 죽을 수는 있지만 너를 위해 살 수는 없다는 말... 가장 좋았다.

결국 살아가는 일은 내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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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썼던가?

이제 이게 한 이야기인지 안한 이야기인지, 했다면 누구에게 했는지...

행여 같은 이에게 두번 세번 반복해서 이야기하며 나만 박장대소하는건 아닌지 두려울 때가 있다.

들었다면 처음 듣는 것 처럼.... 처음이라면 다행이고....

 

지금 이 도시에 이사를 와서 처음 만든 것이 도서관 대출증이었다.

그리고 처음 사람들과의 관계속으로 들어간 것이 학교 도서관 책읽는 모임이었다.

내가 대단히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거나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아니 그때는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책읽는 것밖에 없던 거였다.

기술도 없고 경력도 없으며 사회성이 아니고 사교성마저도 떨어지는 인간이라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도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도 두려워서  그저 내 편한대로 펼치고 접어버리면 그만인 책만이 유일한 방편이었다.

낯선 도시는 정이 들지 않았고 사람들은 모두가 바쁘거나 씩씩해보였다.

좋은 일로 이사를 한것도 아니어서 굳이 정을 붙이려고 애쓰고 싶지 않았고 그냥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투명하게 존재하기를 원했다.

그래도 무언가 생활에 재미는 있어야한다는 생각과 아이들 교육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 가족을 몰아서 도서관을 갔고 어색한 표정으로 즉석사진을 찍고 대출증을 만들었다.

다행이 이 도시는 도서관이 잘 되어 있어 여기저기 걸어가거나 조금만 버스를 타면 쉽게 갈 수 있었다. 워낙에 길치라 한동안은 딱 한 도서관만 죽어라 팠지만 점차 길을 알게 되면서 다른 도서관도 기웃거리고 그러다 상호대차라는 편리한 제도가 생긴 덕이 쉽게 책을 빌릴 수 있었다.

 

그 전에 살던 곳에서도 아이학교 도서관 도우미는 내내 했었다.

가장 사교성이 없어도 할 수 있는 봉사였다. 그냥 나가서 말없는 사서 선생님의 무뚝뚝함에 감사하며 책 정리하고 서가 정리하고 떠드는 아이들에게 주의만 주면 그만이었으니까

옮겨 와서도 그 일은 계속했다. 어느 학교나 도서관 봉사는 늘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연하게 독서모임에 참가했다.

어느 정도 책읽기는 자신있었다.

읽는 근력이 제법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보아하니 그리 어려운 책을 읽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씩이라면 그냥 그냥 읽어갈만한 가벼운 독서가 될거라 짐작했다. 틀리지는 않았다.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고 토론을 한다는 것이 조금 주저되긴 했지만 꼭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을거라고 믿었고 실제 그랬다.

열명이 넘는 회원중에는 주로 이야기를 이끄는 사람도 있고 듣기만 하는 사람도 있고 간혹 삼천포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사람도 있고 다시 돌려 놓는 사람도 있었다.

제각각 다른 배경과 다른 학년의 아이를 가진 집단이라 의외로 편했다.

그렇게 그냥 우연하게 시작된 독서모임을 4년동안 했다.

고전들을 읽고 아이들 책을 읽고 소설을 읽고 인문학을 읽었다.

독서력이 제각각이라 다양한 수준의 책을 읽었고 매년 맴버들이 드나들면서 사람들도 바뀌었고

마음 맞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 껄끄러운 사람도 있고 한 번만에 정이 가는 사람도 있었고 매년 보지만 어색하고 힘든 사람도 있었다. 나는 상대에게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냥 잊어버렸다.

오랫동안 모임을 하지만 책을 통해 성장했다는 건 없었다. 단언컨대.....

그저 한때는 겨우 이수준을.... 하는 마음에 오만해지기도 했고

제대로 읽어오지 않은 멤버들때문에 짜증이 나기도 했고

내가 내켜지지 않은 책은 은근슬쩍 핑계를 대며 빠지기도 했으며

내가 느낀 감정과 의견이 반대에 부딪치면 빈정상했고 내가 거부당한 기분이었는데

타인의 의견은 쉽게 부정하고 반박했다.

그리고 이제 누군가와 함께 정하는 목록말고 내가 읽고 싶은  책들

조금 한편에 치우치거나 편협하더라도  그렇게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책을 모두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서 모든 책을 다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마음먹었다. 세상에 책은 많고 내가 읽은 책들은 바닷가 모래알 한줌정도나 될까

 

 

 

 

 

그 해 에이바가 북클럽에 들어간 것 역시 사람들이 절실했고 친교가 절실해서였다.

갑작스럽게 알게된 남편의 외도 그리고 이혼

어릴 적 동생이 사고로 죽고 엄마마저 자동차 사고로 동생을 따라간 이후 꾹꾹 눌러놓았던 기억과 감정들을 해결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또한번 거절당하고 버려졌다.

무언가 절실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참가한 북클럽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만 그래도 내가 경험한 북클럽과 다르지 않다

다만 도서관 사서인 케이트가 모든 일을 진행하고 매번 그 책에 맞게 다과를 준비하고 코스프레를 준비한다는 게 더해질 뿐이다(라고 우긴다)

간혹 다른 주제로 빠지기도 하고 활발하게 의견을 내는 사람과 조용히 듣는 사람이 뒤섞여 있다는 건 다르지 않다.

에이바가 가입한 해의 도서 주제가 < 내인생의 책>이었다.

내게 있어 내 인생의 책은 무엇일까?

그건 누군가의 말처럼 그때의 내 감정과 내 상황과 책이 함께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하나의 감동이거나 전율이다. 그때 그 느낌과 그 흥분이 다른 시간 다른 상황에서도 같게 느껴질까

다만 그때 그 책이 나의 삶의 방향을 조금 꺽어놓아서 내가 조금 다른 내가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면.... 그 달라짐을 그 순간 알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제각각 가지고 있던 내 인생의 책들이 모여서 북클럽은 진행된다.

책이 주는 감동은 찰라에 지나기도 한다.

그저 꾸역꾸역 읽어가다가

오홋 이거 흥미로운걸 하며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다가

조금씩 야금야금  남아있는 페이지를 세어가며 아쉬운 마음에 아껴가며 읽어가다가

어느 순간 그 책이 내 삶에 훅 들어올 때가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휘리릭 사라지기도 한다.

누구나 좋은 책이라고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추천하던 책이 그저 읽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다가

우연히 다시 읽는 순간 다른 모습으로 들어올 때도 있다

그럼에도 책일뿐이다.

책은 책일뿐이고 읽는다는 것이 사람을 드라마틱하게 바꾸진 않는다.

사람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니까....

에이바도 읽지 않고 읽은 척하다가 망신도 당하고  읽지 않고 얌전히 있거나 겨우겨우 읽는 과정을 거쳐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되고 어리고 힘들었던 시간을 견디게 한 <클레어에서 여기까지>를 기억한다. 내 인생의 책이라는 걸 알지만 그 책을 다시 읽는다는 걸 주저하기도 했다.

한때 책읽기를 좋아하던 에이바 그러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 즐거움을 잃어버렸고 잃었다는 걸 깨닫지도 못했다. 그리고 찾아온 고통앞에 다시 친교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책을 찾는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모두 책에서 길을 찾지는 않는다.

절실한 사람에게만 길이 보인다.

질실한 사람은 자기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고 책을 통해 나를 만나고 나를 이해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저 많이 읽는다는 것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 읽는것이다.

그걸 에이바는 해냈다. (소설이니까 흥흥흥)

 

 

4년간 독서모임을 하고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 역시 드라마틱하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4년전보다 조금 더 많이 읽은 인간이 되었고 조금 더 읽고 싶은 책이 늘어났을 뿐이고

조금은 책 욕심에서 놓여나기도 했고 관심분야가 일단은 넓어지기도 했다.

그림책이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된것도 독서모임덕분이었고

작가별로 책을 읽어보는 경험도 모임을 통해서였고

내가 제법 말을 잘 하고 진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것도 모임덕분이다.

그렇다면 나는 조금 더 괜찮은 인간이 되었을까?

여전히 싫은 사람은 너무너무 싫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싶고 거부당하면 화가 나고 쪼잔하게 복수하고 싶다.

다만 ... 도무지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예전보다 조금은 더 많이 한다.

당연히 .... 해야한다. 되어야 한다. 하는 것들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어짜피 너의 삶은 너의 것이고 나의 삶은 내것이라는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내가 생각보다는 괜찮은 구석이 좀 있다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여전히 실수하고 후회하고  아쉽다.

 

책은 책이고 삶은 삶이고 나는 나이다.

그래봐야 책이지만 그럼에도 책이다. 그게 내가 알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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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식이란 누군가가 차려줄 때는 그보다 정성가득한 존중은 없지만 내가 차려야 할때는 이 이상의 노동이 없다. 구입하고 다듬고 요리하고 뒷설거지까지 만들기는 손이 많이 가지만 먹는건 금방이다. 금방 식거나 금방 축 쳐져 물기가 흥건해지거나 말라버리기 일쑤다.

정확한 시점에 정확하게 내놔야 한다는 타이밍까지 신경써야 하는 음식이다.

한편 미리 만들어 놓은 밑반찬 어제 먹었던, 다시 데운 국이라면 쉽고 얼렁뚱땅 차려내고 크게 차이 나 보이지 않는 면도 있다

장장 열흘이라는 긴 연휴를 보내면서 상차리는 것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열흘에 하루 세끼 그러니까 서른끼가 지나간 셈이다

물론 모든 걸 다 집에서 차려낸 건 아니고 사먹기도 하고 나가서 외식을 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신경써야하는 차림에서 아무런 감정없이 무미건조하게 냉장고에서 식탁으로 이동만 하는 상차림까지 모든걸 하고 보니 온간 생각이 들었다.

먹는 일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참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 먹는 일이 의외로 노동이라는 생각을 한다.

자식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이쁘고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건 즐거움이라고 하는 건 그냥 앉아서 차려먹는 사람들의 상투적인 생각이 아닐까 싶다가도  나도 한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서 자치는 줄 모르고 만들어 먹이고 그렇게 만들었는데 안먹고 투정하면 혼자 속상하고 내가 거부당한것 마냥 서럽고 억울했는데 그게 다 무슨 짓인가 싶다.

이래도 한끼 저래도 한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지금이 기복이 심한 나의 감정곡선의 가장 밑바닥인 시간이라서 더 그런지 모르겠다.

 

# 우리집은 종가집이라 4대 봉제사를 지냈다.

그러니까 4대 여덟분 일년에 명절 차례까지 하면 열번의 제사가 있는 셈이고 일년에 두달 빼고 매달 제사가 있는 셈이었다

우리 뒷동에  살던 내 친구는 어느 날 밤 우리집 베란다를 봤는데 거실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 뒷모습이 웅성웅성한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애가 본 그날 밤은 아마 제사가 있던 밤이었을 것이다.

명절이면 그실 한면을 길게 주욱 있다가 모자라 한 면은 꺽어진채 놓은 상까지 네 개의 상을 놓고 남자들은 절을 했다.

당연히 손끝하나 놀리지 않은 남자들은 혀끝은 예민하게 놀려댔다,

뭐가 빠졌구나 뭐가 잘 못 놓였다 뭐가 이상하다....  뭐는 너무 일찍 만들어서 다 말랐다...

손끝은 무딘데 혀끝은 예민하기 짝이 없었다.

사흘전부터 동동거린 엄마는 그 말에 죄인이 되고  입맛이 없다면서도 다들 한그릇 뚝딱 비우고 후식까지 찾는 통에 정작 내가 먹은 밥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거나 아에 그게 싫어서 가뿐하게 건너뛰기 일쑤다

명절의 그 의식이 지나면 잘 차려지고 잘 치른 건 당연한거고 부족하거나 모자란 것들은 언제나 말끝에 묻어났다.

꼴보기 싫었다

나이를 먹고 보니 어쩌면 그때 명절때 마다 찾아오는 어른들 말고 그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와 함께 온 아들이나 손자들은 오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명절때만 보는 친척집에 가서 차례상이 준비되는 동안 남의 방 한구석에서 기다려야 하고 낯선 어른들과 함께 밥상을 받아서 조금 주눅들어 먹어야 하고 어색하게 인사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듣는중 마는둥하다가 어른들이 이만 가자 하는 순간 화색이 도는 그 남자들도 마냥 좋지만은 않았으리라 생각이 든다. 이제사 말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렇게 매번 꾸역꾸역와서 밥 먹고 과일먹고 떡먹고 먹기만 하다가 말없이 돌아가는 남자들이 싫었다. 나이가 많건 적든 나보다 어리든 그냥 미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제사를 꼬박꼬박 형식을 갖춰 지낼 수 있다는 것이 나름 자부심이기도 했었다. 그때 나는 일을 꼭 해야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도와주면 칭찬받을 수 있는 입장이었고 이런 전통을 즐기면 되는 입장이었으니까

결혼하고  남편집은 돌아가신 시아버지 제사 달랑 한 상이었다.

그걸 보면서 쥐뿔도 잘하는게 없으면서 우스웠다.

겨우 차례상 하나쯤이야......

집집마다 다른 상차림이라는 걸 알면서도 은근히 내가 20년 넘게 보아온 것이 정석이라고 믿어서 조금만 달라도 이상하고 틀렸다고 생각했다.

상차림은 쉽고 별거아니라고 여기면서도 우리 집이 아닌 곳에 오래 있는 건 불편했다.

그렇게 일이 많지도 않고 누군가 눈치를 주는 것도 아니고 은근히 내맘대로 해도 별 말 없는 분위기지만 시집이라는 게 그런 거였다. 나혼자 맞지 않은 퍼즐판에 끼어있는것 마냥 어색하고 불편하고 엎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맞춰야 할 부분조차 내게 맞추길 바랬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음식을 차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대학시절부터 자취를 했고 요리에 관심도 많았고 잘하지는 않아도 겁내는 경우가 없어서 망치든 잘하든 일단 하고 보는 스타일이라 음식을 한다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다

맛없으면 안먹으면 그만이고 하다보면 대충 꼴은 갖추었으니까 그냥 자만했다.

할 수 있지만 하기 싫은 거야 그래서 안하는 거지 못하는 건 아니야...

이게 30년동안 나를 지배한 요리에 대한 자만심이었다.

그런데 올해 긴 연휴를 겪으면서  이제 겨우 50도 되지 않아서 이제 안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 처음으로 우리 서행자 여사에게 존경심이 들었다.

40년 넘게 종가집 종부로 제사상과 차례상을 차려낸 엄마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 본가가 중요하고 남에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고 장남으로 장손으로 책임감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아버지였기에 명절이나 제사가 대충 허투로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암으로 수술하던 딱 한 해를 제외하고 (제주가 아프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했다) 결혼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실때 까지 제사는 엄마의 가슴에 얹힌 돌이었을 것이다.

동서들이 와서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그건 전날 와서 이미 그 주 내내 계획하고 장보고 몇번을 날라다 놓았던 재료를 다듬고 손질해서 차곡차곡 마련해놓은 걸 와서 지지거나 무치거나 하는게 전부였다. 그래도 어른들(이라 쓰고 남자들) 눈에는 내 눈앞에서 쭈그려 앉아서 하루 종일 전을 뒤집고  손 마를 새 없이 나물을 무치고 탕국을 끓이는 사람이 더 일하는 것 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들이 돌아갈때  모두에게 공평하게 음식을 나누고 뒷 마무리를 하고 쓰레기를 정리하고 버리는 사람은 볼 수 없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

나 역시 결혼해서 일이 쉬워보이고 우스워보였던 건 미리 준비하고 다듬어 놓은 시어머니를 보지 않아서이고 내가 일을 했다고 하나 그때 역시 모든게 갖추어진 상황에서 자리잡고 앉아서 전을 뒤집은게 전부였기때문이었다.

해보지 않고 보기만 하는 건 대개는 쉽다.

누군가의 노래도 들을 때는 쉽고 단순한 노래였고 남이 하는 게임도 가만히 보기만 하면 나는 저것보다 적어도 배는 더 잘할 거 같고 올챙이 적 생각 못하고 자고 빈둥거리는 아이들도 그 시간에 왜 공부하지 않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법이다.  내가 딱 그랬다.

어느 순간 나이 먹고 모든 준비가 내 차지가 된 순간  밥상을 차리는 일은 (제상이든 차레상이든) 요리하고 차려내는 일은 그냥 껌이라는 거다.

선택하고 다듬고 준비하는 일이 태반이고 그 뒷처리가 남은 태반이다.

그 모든 보이지 않은 일을 40년간 한 서여사님께 세상 모든 존경을 다 바쳐도 모자란다는 걸 한참 나이 먹어 알았다.

그렇게 지긋지긋한 제사를 절대 내 아들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것이 서여사의 생각이셨다

4대 봉제사를 지내는 집안 장손은 절대 결혼할 수 없다, 그런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여자는 세상에 한명도 없다는 반 협박과 반 애원으로 아버지는 자기 손으로 제사를 줄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우리 올케는 주문식단으로 제사상을 차린다.

맞벌이고 일이 바쁜 입장에서 제사때마다 명절때마다 일찍 와서 상을 차릴 수 없는 입장이다.

시대도 바뀌었고 그게 당연하다고 서여사도 받아들였다.

한편으로 이해는 가지만 한편으로 서운한 것이 그녀 마음이었다.

- 니 아버지가 어떤 정성으로 조상을 모시고 어른들을 대접했는데 니 아버지는 그 반도 받을 수가 없는거냐며  한탄하시지만 어쩌시겠는가?

내가 한만큼 나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고 계속 그렇게 자격이 이어지면 이놈의 제사는 끝이 없는 법이다. 누군가는 내가  획득한 내 자격을 그냥 자격으로 남겨두겠다고 선언하지 않으면 네버엔딩스토리가 된다.  물론 본인이 스스로 내 제사는 간소하게 하라고 하신건 아니지만 시대가 바뀌고 삶이 바뀌면서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된다.

한편으로 그렇게 자격있게 아버지의 권위를 세운건 결국 서여사다.

우리 아버지지만 명절이나 제사때 한 건 새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거나 그 전 주에 세탁소에서 잘 손질해온 한복을 입고  잘 차려놓은 제사상 앞에서 술을 따르고 축문을 읽고 절을 한 것 뿐이다. 만약 내가 한 정성을 내가 대접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면 그건 죄송하지만 우리 아버지나 할아버지들이 아니고 할머니나 우리 엄마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서여사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종부니까 당연히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시어머니라 부엌에 들어가는 사위는 그르려니 하지만 부엌에 들어가는 아들은 안타깝고 애틋하다.

우리 올케는 사실 내 남동생보다 바쁘다.

자라면서 공부밖에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공부를 썩 잘했고 좋은 학교를 갔고 또 공부를 잘하고 공부밖에 잘 하는게 없어서 좋은 직장엘 갔고 좋은 직장이란 돈을 많이 주는 직장이고 돈을 많이 주는 직장이란 일을 많이 시키는 직장이다. 그 모든 조건에 맞게 올캐는 늘 바쁘다 뭐 물론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려면 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낸 시간을 시가 제사에 쓰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서여사 입장에서는 며느리 입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서운한 거고 같은 여자로서 내가 보기엔 그래도 날짜 잊지 않고  챙기고 주문한 음식이라도 자기집에서 공간을 내고 손님을 맞는(물론 그 옛날 양복입는 남자들이 웅성거리는 걸 보고 조폭?을 떠올린 내 친구의 착각을 가능케한 그런 규모는 아니지만)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크게 하든 적게 하든 주문을 하든 뒷처리는 남는 법이니까.

엄마 입장에서 그리고 시누 입장에서 그래도 며느리인데 조금이라도 정성을 보이면 좋지 않나 싶어 얄밉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지만 또 여자입장에서 보면 내가 주관하는 입장에서 이렇게 하겠다고 결정했는데 거기 제 3자가 토를 달 수도 없는 것이라고 수긍한다.

40년을 한결같이 종부로 살아온 우리 서여사님을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그녀의 은근한 질투와 아쉬움도 이해할 수 밖에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른 척 할 수 밖에 없다.

 

# 정말 이번 연휴는 드럽게 길었다.

쉬어도 쉬어도 끝이 없었고 아침에 눈뜨면 다들 나가서 보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하루 내내 집안을 뒹굴거리고 있었고 이 인간들은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프다는 아귀들이나 다름 없었고(미안하다. 내가 인격이 덜 되서...)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은 결국 이루지 못했다.

하루 세끼 차리는 일은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울 수 있다.

따끈한 밥과 두어가지 찬이어도 정성껏 차리는 것이 가능하고

십첩 반상을 아무런  영혼없이 사온 찬이나 미리 해둔 밑반찬으로도 차려낼 수 있다.

게다가 우리에겐 햇반도 있지 않은가!!!!!

 

 

 

 

 

 

 

 

 

 

 

 

 

 

 

 

 

연휴가 시작될 무렵 다시 읽었다.

한편 한편 여기저기 헤집어가면서도 다 읽었다.

늘 그렇듯 술이 당겼고 늘 그렇듯 집에 먹을만한 알콜은 없었다.

왜 모든 일들은 지나간 후에야 그 상황이 더 선명해지는 걸까?

시간이 지날 수로 선명하고 단순해지는 기억이고 상황이다.

그때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까 어쩌면 그 순간 몰랐고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을까?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던 화려한 시간이었다는 것

내가 내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는 것

그리고 어설프고 한순간의 헤프닝같은 일이지만 그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꼭 한템포 뒤에 알아지는 것이다.

내가 밥상을 차리는 일이 이러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좀 더 달라졌을까?

 

 

연휴 마지막날 오후 봄에 담근 매실을 걸렸다.

얼마가 나올지 몰라 2리터 생수병을 네개를 깨끗하게 씻고 말려뒀는데 겨우 두병 나왔다.

남은 매실로 담은 매실주는 ..... 예전 약초주를 담그고 남은 담금주로 해서인지 내겐 독했다.

그래도 그 매실주를 찔끔 찔끔 마시면서 연경을 생각하고 이모를 생각한다.

내 삶도 이렇게 취하거 깨거나  그렇게 반복하는동안 아하. 하고 무릎을 칠 일들이 계속될 것이다.

그래도 늦게라도 알게 되는게 다행 아닐까  스스로 위안한다.

스스로 위안하고 만족하는 건 내 특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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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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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그 전 달에 나는 그와 여섯 번쯤 대화를 나눴는데 실망스럽게도 그와는 별로 할 얘가기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덕분에 어떤 신비로운 거움일거라는 첫 인상은 점점 사라지고 이제는 그저 한동네의 호화로운 여관집 주인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누구나처럼 개츠비와 데이지를 중심에 놓고 읽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과연 진실한 사랑일까?

통속적이고  들 떠 있는 분위기 그리고 그 속에서 불안한 사람들 과연 사람은 뭘까?

왜 개츠비가 위대하지?

왜 이것이 고전이 되었지? 그냥 통속적인 이야기인데? 하이틴 로맨스랑 다른게 뭐지?

 

이번에 다시 읽게 되면서 나는 다른 인물보다 화자인 닉 게러웨이에 주목했다.

그는 이 소설의 화자이다.

우리는 그가 보고 그가 느끼고 그가 판단하는 걸 볼 수 밖에 없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처럼 누군가 일인칭 화자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다른 판단을 할 수 없다.  독자는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 책을 닉의 시선을 통해 그에게 의지하며 알아간다.

 

닉은 상류층 인물이다. 개츠비보다는 데이지와 톰에 가까운 인물이다. 다만 책의 첫머리에 나오는 인묭문처럼 내가 가진 시선이 어떤 특수성에 있는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걸 늘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나 인식과 행동이 일치하진 않는다. 의식적으로 자기의 위치를 생각하고 타인을 바라보지만 알게 모르게 닉의 계급과 그가 가진 익숙한 문화가 튀어나와 그의 시선을 조절한다.

 

닉의 시선에는 늘 우월함이 있었다.

그는 시종일관 주인공들의 움직임에서 한 발 떨어져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입장을 취하고 어느 편에도 쉽게 서려고 하지 않았다. 일인칭이지만 자기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게 화자가 끼어들 만한 여지가 없을 수도 있지만  닉을 얄미울만치 두 세계 사이를 걸치고 있으며 빠져들지 않는다.그는 늘 세계의 바깥에 서 있고 셰게 안으로 발 하나를 걸쳐 놓을 뿐이다. 언제든 뺄 수 있고 언제든 선을 그을 수 있게

그는 이야기 밖에서 인물들을 바라보지만 모두에게 공정하지 않고 가끔 이야기 안으로 들어오기도 하지만 그때는 철저하게 자기의 입장이고 스스로를 변호할 뿐이다.

톰과 데이지와의 관계 그리고 개츠비와의 관계에서 나는 모든 걸 가진 사람이라는 위치에서 둘 을 내려다 본다.

속물적이고 즉흥적이 인물의 일탈들에도 냉소적이고  개츠비의 막무가내의 자아도취같은 로맨스에도 쉽게 공감하지는 않는다.

어떤 인물도 이해하지만 그 입장을 진심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사실 누군가 나와 다른 타인을 공감한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아비지의 조언이 어떤 의미였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누구나 제각각의 입장이 있다는 건 맞는 말이다. 나의 입장에서 타인을 판단하는 건 어쩌면 편견이고 오만일 수 있다.

 동시에 그 말은 많은 걸 가진 입장에서 너보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대할 때 항상 주위해야한다는 우월감을 드러내기도 하는  문구가 될 수도 있다.

닉의 태도는 각자의 입장을  이해해보려는 태도와 함께 그럼에도 나는 그 지저분한 관계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몸사람도 느껴졌다.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통속적인 치정극을 닉과 함께 보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닉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결핍을 가지고 있다. 그 결핍을 알지만 그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 그 결핍을 채우고 싶어 했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통해 상류층에 대한 갈증을 채우고 싶고 데이지는  로맨틱한 사랑도 꿈꾸지만 동시에 톰과의 생활이 주는 상류층의 달콤함을 더 갈망하고 톰은 머틀과의 불룬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머틀 역시 톰을 통해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닉 역시 이들의 일상을 우연히도 함께하고 엿보면서 아무일도 없고 지루한 일상에 재미를 더하고 자기가 좀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얻는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타인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내게 없는 걸 굳이 나를 쥐어 짜내며 구하려 하기보다 그것을 풍요하게 가지고 있는 누군가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다만 전적으로 타인이 그것을 충족시켜 줠거라고 믿거니 해서는 안된다.

인물들은 누구나 타인이 나를 채워주길 바란다.

내가  결핍된 것을 말하지 않아도 타인이 채워주기를.. 너무 바라기만 한다.

그러나 결핍된 사람이 또다른 결핍된 사람을 채워주긴 힘들다.

상처를 가진 사람은 오히려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 끌린다.

사람은 누구나 익숙하고 편한 것에 끌리는 편이라 상처를 가진 사람은 또다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상처를 있는 대상을 택한다. 동병상련이라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위안이 되리라 믿지만 냉정하게도 내 상처조차 어쩌자 못한 사람은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 안아 줄 수 없다. 오히려 내 상터가 거 벌어지지 않은 것에 더 신경을 쓰느라 타인의 상처는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내가 가진 상처는 그 상대로 인해 더 커지고 오히려 또다른 상처를 얻게 된다.

사실 없는 사람들끼리 보듬고 살거나

상처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를 치유해주고 살아가면 좋겠지만

사람은 내가 가가진 것과 비슷한 사람에게 익숙하게 끌리면서 동시에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채워주기를 바란다. 같은 대상에게 너무나 다른 걸 바라는 것이다.

 

자기부정에서 출발한 개츠비는  허영심이 많고 나약한 데이지를 안아 줄 수 없다.

데이지 역시 개츠비에게 색다른 매력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에게 어떤 안전기지가 되어줄 마음은 없어 보인다.

톰은 데이지가 상징하는 상류층의 세상을 버릴 생각은 없지만 머틀이 가진 육감적인 매혹을 떨쳐버릴 생각도 없다.

닉 역시 모두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그저 자신에게만 관심있는 인물이다. 그들을 통해 그들을 이해햐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보며 나는 그렇지 않아 다행이야.. 하며 안도하는 인물이다.

모두 이기적으로 타인을 통해 자기를 위안하고 적당히 무시하면서도 겉으로는  교양있는 척  행동한다.

모두가 위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들이다.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하다는 것이 그가 고결하고 정의로운 인물이라는 것보다.

그런 위선적이고 욕심스러움 속에서도 대책없이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무언가를 믿고 달려가는 무모하면서도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때문 아닐까

대책없이 무모하며 순수한 개츠비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데이지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지만 결국 스스로  파멸한다. 결핍을 채우기위해 가졌던 것이 순수함에 대한 갈망이었지만 그가 소망했던 그 순수함은 거짓이고 찰라적인 것이고 허상이었을 뿐이다.

좀 서글픈 위대함이다.

 

누구나 자기의 입장에서 세상을 본다.

자기가 얼마를 가졌든 보잘것없는 위치든 제각각 자기 위치에서 보이는 시선을 가졌을 뿐이다.

개츠비의 집에서 건너 보이는 반짝이는 초록불빛은 그립고 갈망의 대상이었고

부캐넌의 집에서 건너보이는 집들은 그저 졸부들의 천박한 모습이다.

내가 보는 것이 사실 그 대상의 본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왜 그런 모양인지까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닉이 들려주는 개츠비의 살아온 모습과 개츠비의 아버지가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아들 개츠의 모습은 다르다. 각자의 시선에 각자의 정서를 필터로 보는 것이지만 두 가지 모습이 다 개츠비였을 것이다.

다만 닉은 닉의 입장에서 보고 판단하고 타인의 판단들은 유보하거나 무시한다.

아예노골적으로 무시하며  타인을 보려고 하지 않은 톰이나 데이지, 조던보다 모든 걸 다 보려고 한다는 중립적인 자세를 지니려하지만 정작 자기의 시각도 그리 넓지 않다는 걸 모르는 닉의 시선은 더 큰 편견이다.

 

닉도 신비한 이웃 개츠비에게 관심을 가진다. 어떤 인물인지 호기심을 갖고 경외감을 느낀 적도 있지만 금방 개츠비가 진실되지 않다는 것과 자신과 다른 부류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데이지에게 아직도 미련을 가졌고 그가 데이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름다운 셔츠로 상징되는 부의 과시이상 아무것도 없으며 결국 데이지는 자기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을거라는 것도 짐작한다. 개츠비는 그냥 그들 옆을 서성이다 쫒겨날 거란 걸 안다.

개츠비의 파티에 왔던 사람도 호기심으로 다가 왔다가 그냥 이용하고 즐기기만 했을 뿐이듯

닉 역시 마지막까지 개츠비를 지켰지만 나는 아직 그의 진심을 믿을 수 없다. 게츠비는 어쩌면 닉의 삶에 하나의 색다르고 의미있을 추억의 하나로 남을 뿐이다.

재즈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곧 다시 전쟁이 시작될 것이고 밀주를 마시며 떠뜰썩하게 파티를 즐기던 사람들은 또다른 삶이 시작될 것이다. 개츠비는 잊힐 것이고 톰과 데이지는 그냥 같은 패턴으로 살아갈 것이다.

삶의 한 시대가 지난다는 건 참 서글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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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책을 읽은 건 아닙니다..

책 읽어주는 팟캐스트에서 들었지요.

서간문인줄 몰랐습니다.. 김영하가 서간문 소설이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네 하는 것이 첫 생각이었습니다. 어딘가 신경숙의 <풍금이 있는 자리>를 닮았고 김애란의 <서른>이 떠올랐습니다.

여성분이 낭독해서인지 아니면 주인공 화자가 여성이어서인지 여성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세상에 흥미로운 부녀지간이구나 하며 듣고 있는데 자꾸 이상하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물론 정상이라고 볼 수 없는 관계이긴 하지만 그냥 정상이 아닌 독특한 경우라고 하기엔 뭔가 불편하고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관계가 답답하고 소극적이어서인가 했는데 그것때문만은 아닌거 같더군요.

뭐랄까 화자는 딸이고 딸이 자신의 입장에서 아버지와의 관계 가족의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는데, 분명히 딸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도데체 그 딸의 모습이 잡히지 않는 겁니다

아버지는 차라리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자신만만하고 이기적이고 여성편력도 있고 그러면서 어린아이같은 면도 있는  한마디로 대책없는 유형이구나 하는 게 딱 왔어요. 젊어서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고 나이 먹어서도 철들지 않은 영원한 피터팬처럼 살면서 보여지고 보여줄 수 있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정작 말하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걸까?

남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대도 말입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은 건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드러내는 법을 몰라서

아니 어쩌면 자기가 어쩐 사람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몰라서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딸은 그냥 아버지의 딸 그 이외의  존재감은 없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그렇게 아버지에게 벗어나질 못했지?

다른 가족이 하나 둘 아버지 곁을 떠나고 아버지가 다른 평범한 아버지와 다르고 자기와의 관계조차 평범한 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복종하고 따랐을까 의문이었습니다

배울만큼 배웠고 알만한 건 다 알고 있을  성인인데 말입니다.

 내 입장에선  한없이 어리석고  미련하고 어떤 면에서는 무책임해보였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완벽하게 아버지에게 길들여질 수 있을까?

딸은 아버지와 둘이 떠난 유럽 여행에서도 아버지의 기이함을 느낍니다.

혼자서 거리를 걸어보고 싶다는 말에 화를 내던 아버지 . 이국의 역에서 만난 한국 대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걸로 냉담해지는 아버지는 분명 정상은 아닙니다.아직은 어린 딸을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지요. 그렇다고 그 아버지가 딸을 이성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내 딸이라는 인식이 '내 것'이라는 소유와 일치외면서 모든 것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따라주길 바라고 있는 것이라 보였습니다.

그 지점도 편하질 않은데 어떤 저항도 없이 그대로 따르는 딸이 더 불편했습니다.

자유로운 대학생활을 동경하지도 않았나?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없었나?

물론 아버지와의 테이트 외식등이 더 고급지고 더 편리하다는 걸 알지만

그 또래 딸이라면 아버지가 주는 물질적 풍요로움도 이용하면서 한편으로는 나의 자유도 갈망하고 달콤한 사랑도 꿈꾸지 않을까요?

딸의 모든 기준은 아버지이고 아버지와의 생활이 삶의 중심입니다.

물른 짐작하다시파 사회관계는 점점 좁아지고 사람들이 멀어지고 가족마저 모두 떠나고 혼자 아버지와 남게되죠. 그 아버지 역시 딸에게만 집중하진 않습니다.

끊임없이 다른 여성을 만나고 추문을 만들고 딸은 자기의 성공한 하나의 장식정도로만 여기는 걸 뻔히 알지만 딸은 오히려 아버지의 기대에 못미친다는 것에 죄책감마저 느끼고 미안해합니다.

중간에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야겠다고 동생과 엄마가 있는 미국으로 달아나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 아버지의 임종을 홀로 맞이합니다. 결국 죽음으로 아버지와 분리되는 거죠

누군가는 스무살에 누군가는 더 늦더라도 살아서 해내는 일을 그 딸은 죽음이 와서야 비로소 독립아닌 독립이 되고 성장 아닌 성장을  시.작. 하.려.합.니.다.

 

어린 왕자의 <길들여진다>는 건 참 매혹적이고 따뜻한 의미였습니다.

서로가 관계를 맻고 의미가 되며 그래서 세상이 더 넓어지고 풍요로워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직 두 사람>에서의 길들여짐은 조금 끔찍합니다. 서로가 겹치며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거 포함되어져서 그러니까 먹혀서 비로소 하나가 되어버리는 의존적이고 식민지의 형태로 길들여집니다.

아버지가 정한 전공과 아버지가 정해주는 진로를 따라가지만 자기의 것이 아니니 늘 남의 옷처럼 어색하고 엉뚱한 별에 떨어진듯 적응할 수 없습니다. 누

딸은 아버지를 통해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자기의 꿈과 가치관을 결정합니다.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인지 하지 않은것인지 자꾸 혼돈스럽지만 어쩌면 하지 않은게 더 편해서 하지 않음을 선택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서서히 온도가 올라가는 냄비속이 편하다면 개구리는 굳이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지요. 그 냄비속의  개구리처럼 딸은 조금씩 조금씩 아버지에게 젖어가고 익숙해지고 그 바깥의 세상은 알지 못하게 됩니다.

인질이 자기를 잡고 있는 자에게 동화되는 스톡홀롬 신드롬처럼 보일 뿐입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여행 이전에도 그 딸은 아버지에게 이미 길들여졌던 걸까요? 아니면 여행을 통해 어떤 전환점이 되고 아버지에게 종속도어버린걸까요?

아버지는 아내나 다른 가족은 (또 하나의 딸이 더 있는데)  관심이 없었을까요?

다른 가족은 아버지가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 왜 그 딸을 그냥 두었을까요?

다 듣고 나니 (읽은 책이 아니니) 여행전 엄마의 말이 참 섬뜩합니다.

지금 여행을 가지 말고 나중에 동생 수험생활이 끝나면 그때 함께 가는게 어떠냐고 딸에게 말을 하던 엄마에게 딸이 지금 여행을 가겠다고 말했을때 엄마가 그러죠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 이건 니가 선택한거야" 라고..

아직 미성년자이고 미숙한 딸에게 선택을 묻고 책임을 지워버리는 말 참 무서웠습니다.

그 말 이후 딸은 선택을 하지 않음을 선택해버린걸까요 그리고  다른 가족은 두 사람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선택을 해버린거구요

 

소설의 첫머리에 아무도 모르고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더 이상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없고 그 언어를 배운 사람이 없이  그 언어를 오직 두 사람만 알고 서로만 사용합니다. 오직 두 사람만이 관계를 맺고 서로가 서로의 모든 세상이며 의지처입니다. 무심하게 듣기 시작했던 그 부분이 마지막에 다시 반복되면서 이것역시 끔찍해졌습니다.

왜 그들은 세상 다른 타인의 언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을까?

두 사람의 언어로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도 하면서 동시에 조금 더 세상을 넓혀보려고 하지 않으까? 왜 한 사람이 사라진다면  남은 한사람은 영원히 고립되어버리는 삶을 선택할까?

아니면 다른 이에게 자신의 언어를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두 사람만의 관계 그것으로 만족해버려서일까요?

아니면 타인들의 무관심때문일까요?

내가 어쩌면 그 딸의 입장이 아니니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불편했던건 아버지의 독재보다 그렇게 길들여지고  복종하게 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것 생각은 하더라고 행동하지 않는 딸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무런 의심도 없고 질문도 없고 다른 호기심도 없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건 꼭 그 화자만은 아닐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익숙하고 편안한 무언가로부터 안정감을 느낀다면 다른 건 굳이 알려고 하지 않은 경험이 많지 않을까요? 나의 선택들이 어떤 면에서는 익숙하고 안전한 무언가를 기준으로 했던 것일 수도 있고 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죠.

그렇게 안전한 무언가가 있다면 다르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누군가에게 다가가ㅗ 이해하고 이해받는 과정을 다시 되폴이 하고 싶지 않거나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거나...

나랑 언어가 통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굳이 다른 사람을 또다른 행동이나 노력으로 사귀거나 알고 싶지 않은 그 런 마음도 있다고요..

위험하고 불길한 건 좁은 울타리에 갇히는 일이고 동시에 자기가 갇혀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알지만 굳이 나가고 싶지 않아하는 무기력함입니다.

 

이 단편이 불편하고 불안했던 건 알고  익숙한 것들에 안주하게 되면 언젠가 이렇게 서서히 길들여져서 어떤 의문도 없이 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편안하고 익숙하게 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고 따져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조바심과 언젠가 내가  익숙하게 퍼질러 있다가 수렁에 빠져 있게 되는 나를 발견할지 모른다는 강박이죠.

세상을 의심하고 아는 사람을 다시 보게 되는  어디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상황이 이 세상이라는 경고가 빨간 점등과 함께 깜빡이면서 내가 쑥 들어와버렸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죽고 딸은 혼자가 됩니다.

그 딸은 이제 스스로 살아가야 할테고 어떤 시도도 할겁니다.

많이 불안하고 상처받을테고 돌이킬 수 없는 실패로 주저앉을지도 모르겠네요

그 딸이 무엇보다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를 먼저 들여다 보고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와 친해지면 좋겠습니다. 다시 성장기가 되어 자아를 찾는 과정을 경험하기를 말입니다.

 

소소하고 별 이야기 아닌 짧은 이야기가 섬찟할 수도 있다는 묘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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