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삶 -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났음에도 여전히 사과하고 싶은 일이 있고,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났음에도 여전히 죽여버리고 싶은 얼굴도 있다.


 두 가지 모두 나의 십대에 걸쳐 무수히 많이 여전한 소름끼림으로 우둘두툴 남아있다. 누군가는 고작 그까짓것, 누군가는 고작 어릴 적 잠깐이라고 말할테고 나 역시 어깨를 으쓱하며 그럴테지만 어느 악몽은 지난하고, 그 긴긴 시간 동안 조금도 가라앉지 않아서 결국 십대라는 한정적 시간을 넘어 개인을 집어삼키고 생을 뒤흔든다. 누군가는 그걸 두고 방황이나 낙오, 실패로 표현하길 주저하지 않고 누군가는 그저 운이 나빴네라고 한숨같은 아니 하품같은 위로를 건넬지 모르나, 적어도 여기, 임솔아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방식의 정의일 것이다. 임솔아가 누구냐고 묻는 당신에게 나는 지금 이 사람을 소개하려고 한다. 임솔아는 장편소설 <최선의 삶>을 쓴 사람이다. 그녀는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을 수상하였고 여기 수상소감을 이렇게 썼다.



이 소설은 열여섯 살 때부터 십 년 이상 꾼 악몽을 받아쓴 것이다. 소설이 뭔지 아무것도 모를 때부터 이제 겨우 좋은 소설을 알아볼 수 있게 된 지금까지 이 소설 속에서 살았다.


(...)


소설을 완성하고 한 가지를 알게 됐다. 그토록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녔던 악몽은 ‘왜’냐고 묻길 바라지 않았다는 사실. 내가 악몽에 시달려온 것이 아니라 악몽이 나의 질문에 시달려왔다는 사실. 오랜 내 다그침으로부터 내 악몽을 풀어줄 때가 되었다. 나는 나의 악몽에 최선을 다했으니까. 이 세상에 최선을 다한 헤어짐은 없는 줄 알았는데, 나와 나의 악몽은 이제 최선을 다한 헤어짐을 겪게 되었다. 다행이다. 그래서 행복하다.

_'수상 소감' 중에서, <최선의 삶>



 나는 임솔아를 잘 모르지만, 소설을 읽기 전 이 수상 소감을 읽었을 때 나는 이 사람과 맞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나는 짐작하길 좋아하고 그 짐작이 대체로 잘 맞는다는 근거없는 확신을 갖고 있는 편인데, 말하자면 나는 '나를 따라다녔던 악몽'이라는 표현을 스스럼없이 쓰는 사람에 대해서 일종의 편견을 갖고 있던 셈이다. 졸업하지 못한 십대 같은 것은 결국 그 자의식 과잉의 시간에서 스스로를 분리해내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하니까. 그것들은 통과의례이나 결과물로서의 지금에서는 그다지 드러내고 싶은 기억들이 아니니까. 나는 나를 지금의 결과물로서 보여지길 원하지 '악몽'이라 일컬어지는 기억들로 말하고 싶진 않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설명할 수 없는 시간들을 통해서 보여지는 건 사실 두려우니까. 


그러고 보니 임솔아는 힘든 주제를 첫소설로 택했다. 십대부터 내내 따라다니던 악몽, 우리가 졸업해야하고 그렇지 못하면 망각이나 기만을 통해서 떼어내야하는 환부에 대해서 이 사람은 참 오래도록 매달렸구나라고 생각하니,


미련해. 미련하구나 이 사람.


그렇게 임솔아의 미련함을 미뤄 짐작하고나니 그녀가 궁금해졌고 그녀의 소설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임솔아는 비겁하진 않을테니까, 짐작을 아주 잘하는 어디의 누군가보다는.



 아이들은 아이들을 구분할 줄 알았지만 구분짓지는 않았다. 전민동 외부인과, 외부인처럼 보이는 내부인과, 내부인. 내부인은 실은 내부인 행세를 할 뿐 가장 먼 곳에서 온 외부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람과 아람의 친구들은 학교 안에서 또다른 외부인 취급을 받았다. 혼자 외부인이었던 나는 이 아이들을 만나면서부터 함께 외부인이 될 수 있었다. 전민동과 어울리지 않는 낡은 술집 같은 곳만이 우리를 기분좋게 받아주었다.
_24쪽, <최선의 삶>

아람과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보지 않은 크래커를 먹게 되는 것. 소주를 마시고 혀의 마비를 느껴보는 것. 네온사인이 색을 바꾸는 패턴을 이해하는 것. 네온사인이 꺼지고 도로에 차오르는 새벽 물안개의 냄새를 맡아보는 것. 내가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그런 것들 때문이었다. 알지 못했던 다른 세상이 이 세상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 하찮고 안 하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꾸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했다.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어했다. 

“나 집 나갈 거다. 같이 나갈 사람?”

오렌지맛이 나는 크래커를 입에 넣으며, 소영이 말했다.

_29쪽, <최선의 삶>


이야기는 주인공인 '나' 강이와 소영, 아름, 열여섯 세 소녀의 가출과 복귀 그리고 다시 한 번의 가출로 이뤄진다. 강이는 대전에서 비교적 가난한 동네인 읍내동에 살다가 전민동의 중학교로 위장전입하면서부터 내부인과 외부인의 차이를 느끼며 겉도는 소녀다. 그런 나와 어울려주는 것은 전민동 토박이이지만 어려운 가정환경에 흔히 말하는 '비행소녀'가 되어 가출을 일삼는 아람과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 살고 있지만 장래에 대해서 부모의 반대에 부딪친 소영, 이 둘뿐이다. 어느날 소영의 난데없는 가출제안에 이 세 소녀는 서울로 떠나고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나는 성장소설의 문법이 십대 시절을 그리는 방식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고 있는데, 그건 이미 성장을 끝냈다는 가정하에 과정에 해당하는 시절을 말 그대로 추억하거나 혹은 교조적으로 기능하게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 담아내야 했을 생생함이 소설을 쓰는 행위자에 의해서 소설로 극화되면서 그럴듯함이나 허용가능함으로 탈바꿈한다. 나는 신화와 같은 탈피를 겪어 마침내 당도하는 성장에 대해서 환멸을 느낀다. 성장은 끊임없이 상처받고 또 상처받으며 자신을 축소하고 확장시키며 규격에 맞춰나가는 잔인한 시기가 아니었던가. 당면한 폭력을 내재화시키고 계급을 체화시키며 이제 나를 상처 입히는 것은 타인뿐 아니라 나 자신이기도 함을 깨닫는 과정. 


 임솔아는 그 점에서 그녀의 소설이 하드보일드 문법이 아님에도 하드보일드하다고 느껴질만큼 냉정하고 잔혹하게 자신만의 성장소설 문법을 만들어간다. 



아람은 며칠 동안 매일같이 그 오빠를 만났다. 어느 날부터 오빠는 약속시각에 나오지 않았다. 아람은 공중전화에 매달려 음성 메시지를 남기며 눈물을 흘렸지만, 다음날에 새로운 오빠를 만났다. 아람은 오빠면 누구든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아무 오빠와 사라져버렸다. 아무 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공공화장실 바닥에서, 노래방 의자에서, 상가 계단에서, 공원의 나무 옆에서. 아람을 성폭행한 모든 오빠는 아람을 사랑한다고 말했고, 그 말을 들으면 아람도 오빠를 사랑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아저씨들과도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아저씨들 역시 아람을 성폭행했고, 아람은 그 아저씨들도 사랑하게 되었다. 

“아저씨가 좋아?”

아람은 멍든 뺨을 감추려 화장을 덧칠하고 있었다. 

“오빠가 자라면 아저씨가 되는 거야. 말해보면 다 똑같다고.”

“때렸잖아.”

 

나는 아람이 보고 있던 거울을 빼앗았다.

_54쪽, <최선의 삶>


이제 갓 세계로 나라는 개인을 대입해가는 십대는 부서질 수 밖에 없다. 세계는 불친절하고 난폭하다. 그것을 체화시켜가는 과정은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아름이 성폭행을 당하며, '다 똑같다고'라고 말할 때 불행히도 아람은 성장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비정하지 않다. 읽기 괴로울 정도로 친구들간의 린치 과정을 세세하게 그릴 때마저도 나는 이 소설이 비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이 소설이 부러 냉정을 가장하거나 위악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부서짐'으로밖에 할 수 없는 자기 증명의 시기, 고개를 돌리고 싶은 성장기를 어떻게든 품에 끌어안으려 한다고 생각한다. 

 임솔아는 열여섯 강이가 당면했던 세계의 잔혹함을 어떻게든 소설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끌어안으려고 한다. 직조한 허구의 성장기가 아니라 자신의 자전적 경험이 투영된 성장기를 써내려가는 것은 관록이 붙은 작가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연민과 왜곡의 유혹이 격렬히 요동치는 일이다. 그러니 그녀가 이 한 편의 소설을 두고 오랫동안 방황했다는 말이 십분 이해가된다. 그 까닭일까. 왜 그렇게 힘든 시작을 택했을까 묻는다면, 아마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대답할 것인 사람 임솔아에겐 어떤 힘이 느껴진다.


 과감 없이 써내려가고자 하는 힘.

 어떻게든 끝까지 놓치지 않고 바라보려는 힘


 그것이 임솔아의 소설 <최선의 삶>을 감정이나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거나 제거하지 않았음에도 하드보일드하게 느껴지게 한다. 그건, 그렇지 못한 나 자신에 비해 그녀가 터프할정도로 미련하기 때문이다. 미련하게도 붙들고 있었다. 그냥 떼어내버려도 좋을 것을, 악몽이라 칭한 채 몇년이고 이고 다니며 글을 썼다는 사람 임솔아는, 그 미련함으로 인해 나는 끝내 다시 들여다보지도 못한 십대의 성장기를 소설로 마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토록 미련한 사람 임솔아는 작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_174쪽, <최선의 삶>



심사를 한 소설가 정한아는 "개인적으로는 작품의 결말이 상투적이라는 데서 조금 아쉬웠다. 결국 해프닝으로 그치고 마는 그와 같은 폭력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모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쉬움을 덮고 남을 만큼 이 작품이 지닌 매혹이 크고 강하다는 데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며 결말부에 대해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나 역시도 그러한 아쉬움을 느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최선의 삶>이 작가 임솔아가 아닌 계속해서 상처와 대면하고 있는 인간 임솔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결말부가 앞선 서사의 뛰어난 흡입력과 높은 완성도에 비해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한 작가가 안고 있는 트라우마는 결국 그 작가의 세계관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소설을 쓰게 만드는 원형으로써 상처는 계속해서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상처입으며 그 예민함을 통해 소설 쓰는 힘을 획득한다. 폭력을 처절하게 경험했던 기억에 대해서 오랫동안 최선의 이별을 하고자 애썼던 이 작가에게 어쩌면 이 소설의 결말은 계속해서 다음 소설을 통해 쓰여져야 할 사명같은게 아닐까. 사람 임솔아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작가 임솔아는 아마도 내내 폭력이 남기는 상처에 대해서 오랫동안 머물 것이다. 그녀 특유의 미련하게 써내려가는 힘으로 계속해서 최선의 이별을 해나가며. 


신인작가의 출현에서 소설 말고 사람을 본 것이 얼마나 되었나 생각해본다.

임솔아가 앞으로 써나갈 최선의 소설들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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