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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코드 가치 전쟁 - ESG를 둘러싼 새로운 자본주의의 얼굴
홍상범 지음 / 알토북스 / 2025년 12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21세기 초반, 글로벌 자본주의는 새로운 옷을 입기 시작했다. 환경을 생각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투명한 지배구조를 갖춘 기업이 곧 좋은 기업이라는 합의가 형성되었다. ESG라는 이름 아래 세계는 '착한 투자'의 시대로 접어드는 듯했다. 그러나 2024년 미국 대선은 이러한 흐름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했다. 트럼프의 재집권은 서로 다른 자본주의 철학의 충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번에 읽은 <트럼프 코드 가치 전쟁>은 바로 이 충돌의 본질을 파헤친다. 14년간 글로벌 기업 법무팀에서 일한 저자는 ESG를 둘러싼 논쟁이 결코 추상적 이념 대립이 아니라, 실제 기업 경영과 시장 구조를 흔드는 구체적 갈등임을 보여준다. 이 책이 제기하는 핵심 질문은 명료하다. 왜 미국 보수는 ESG를 반대하는가? 그리고 그 반대 이면에는 어떤 세계관과 경제 논리가 자리하고 있는가?
트럼프의 "지구온난화는 거대한 사기"라는 선언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이었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데이터는 이러한 입장이 단순한 무지나 반과학이 아님을 시사한다. 미국 보수층의 약 80%가 기후 변화를 심각한 위협으로 보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는, 이것이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집단적 세계관의 문제임을 드러낸다. 흥미로운 점은 기후 회의론자들이 내세우는 논리의 구조다. 그들은 지구 역사상 현재보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훨씬 높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점, 1930년대 미국의 폭염이 최근보다 더 극심했다는 환경보호청 데이터, 그리고 이산화탄소의 '포화 효과' 이론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이러한 주장들이 과학적으로 완벽히 검증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이 '비과학적 신념'이 아니라 '다른 해석의 과학'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기후 과학이 순수한 학문적 탐구의 영역을 넘어섰다는 사실이다. 기후 정책은 막대한 경제적 이해관계와 얽혀 있으며, 어떤 과학적 합의를 채택하느냐에 따라 산업의 흥망이 결정된다. 트럼프가 유럽연합의 경제 쇠퇴를 재생에너지 정책 탓으로 돌리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기후 논쟁의 핵심은 "무엇이 진실인가"를 넘어 "누가 규칙을 정하는가"의 문제로 확장된다.
트럼프의 에너지 철학은 명확하다. 싸고 안정적인 전력을 확보하는 국가가 21세기 경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인공지능 시대에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2030년이면 AI가 전 세계 전력 수요의 10~16%를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전력 인프라는 단순한 유틸리티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의 핵심 자산이 되었다. 미국 보수 진영의 관점에서 보면, 재생에너지로의 급진적 전환은 경제적 자살 행위다. 풍력과 태양광은 아직 화석연료만큼 안정적이지도, 저렴하지도 않다. 빅테크 기업들이 탄소중립을 선언하면서도 AI 데이터센터를 위해 막대한 전력을 요구하는 모순적 상황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트럼프의 '에너지 해방' 정책은 바로 이 지점을 공략한다. 파리기후협정 탈퇴, 화석연료 규제 완화, 국내 에너지 생산 확대는 모두 미국 산업의 전력 경쟁력을 높이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이는 환경보다 경제를 우선시하는 냉소적 태도가 아니라, 에너지를 국가 안보와 산업 패권의 문제로 보는 다른 우선순위 체계의 표현이다.
ESG 투자는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이 글로벌 투자자들과 손잡고 시작한, 아름다운 프로젝트였다. 환경을 보호하고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면서도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약속은 많은 이들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미국 보수 진영은 이 '착한 투자'에서 전혀 다른 것을 읽어낸다. 첫째, 그들은 ESG가 주주 이익이라는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든다고 본다. 기업의 일차적 책임은 주주에게 수익을 돌려주는 것인데, ESG는 사회적 책임을 앞세워 이 원칙을 희석시킨다는 것이다. 실제로 ESG 투자의 수익률 신화가 무너지면서 이러한 비판은 더욱 힘을 얻었다. 착한 투자가 곧 좋은 수익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투자자의 돈으로 특정 정치적 의제를 추진하는 것 아닌가? 둘째, 더 음모론적인 해석도 존재한다. ESG가 오히려 정부 규제를 약화시키는 도구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민간 영역에서 자발적으로 탄소중립을 추진한다는 낙관적 분위기가 형성되면, 정부는 강력한 환경 규제를 도입할 정치적 동력을 잃는다. 결국 '착한 이미지의 ESG 운동'이 실질적 규제 강화를 가로막는 방패가 된다는 역설이다. 이에 대한 보수 진영의 대응이 바로 '반 ESG 투자법'이다. 이 법들은 ESG 기준에 따른 투자를 제한하거나, 심지어 불법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대형 은행들이 탄소중립 협의체에서 연이어 탈퇴하는 현상은, 자본 시장 내부의 균열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준다. 착한 자본과 수익 추구 자본 사이의 전쟁은 이제 법정과 규제 기관으로까지 확산되었다.
ESG 논쟁이 돈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라면, PC(정치적 올바름)와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는 말과 가치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다. 표면적으로 PC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언어 사용을 권장하는 운동이다. 하지만 미국 보수 진영의 눈에 PC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그들이 보기에 PC는 언어 통제를 통해 사고까지 통제하려는 시도다. "생각은 말을 낳고, 말은 행동을 낳는다"는 격언처럼, 어떤 말을 쓸 수 있고 없는지를 규정하면 결국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지도 제한된다. '크리스마스'를 금지하고 '홀리데이 시즌'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은, 보수 진영에게 새로운 형태의 사상 통제로 느껴진다. 더 나아가 PC는 도덕적 우월감을 가진 집단이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을 쉽게 낙인찍는 도구가 되었다. 조금만 다른 의견을 제시해도 성차별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혐오자로 몰리는 상황에서, 보수 진영은 이를 '새로운 매카시즘'으로 규정한다. 죄 없는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던 과거의 마녀사냥이, 이번에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이름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코드 가치 전쟁>이 보여주는 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비전의 충돌이다. 한쪽은 자본이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며, 시장이 공정성과 포용성을 실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다른 쪽은 자본의 본질은 효율성과 수익 추구이며, 도덕적 의제를 자본 시장에 강요하는 것은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이 충돌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ESG 기준, 기후 규제, 다양성 정책은 모두 국경을 넘어 글로벌 기업과 시장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 기업들도 미국 시장에서 사업하려면 이 가치 전쟁의 지형을 이해해야 한다. 어제까지 칭찬받던 ESG 정책이 오늘은 반발을 사고, 어제까지 당연했던 다양성 프로그램이 오늘은 리스크가 되는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 균형 잡힌 시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AI, 바이오기술, 우주개발 같은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누가 규칙을 정하고, 무엇을 정상으로 규정하며, 어떤 가치를 우선시할 것인가? 이 싸움의 결과가 21세기 자본주의의 모습을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