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걷기 - 몸과 마음을 살리는 걷기는 따로 있다
애너벨 스트리츠 지음, 김주희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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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최근 걷기와 달리기의 효과에 대한 긍정적인 정보가 많아짐에 따라 많은 분들이 건강을 위해 걷기와 달기리를 실천하고 있다. 이번에 읽을 기회가 있었던 애너벨 스트리츠(Annabel Streets)의 <치유의 걷기>는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걷기'라는 행위를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책이다. 20곳에 대한 장소별 건기의 효과와 긍적적인 효과, 치유의 기능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해안, 언덕, 숲, 시골길, 호수, 도시산책 등 우리가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곳, 마음먹고 갈 수 있는 곳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준다. 자신이 원하는 곳을 골라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일을 수 있어 좋았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호숫가 산책에 관한 장은 자연 환경이 우리의 심신에 미치는 과학적 메커니즘을 섬세하게 풀어낸다. 저자는 스트레스 해소, 불안 완화, 창의력 증진이 필요한 이들에게 호숫가 산책이야말로 최적의 '걷기 처방전'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책의 가장 큰 매력은 과학적 근거와 시적 감수성의 절묘한 조화에 있다. 저자는 호숫가가 다른 어느 곳보다 빛으로 가득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태양 반짝임(sun glitter)'이라는 현상을 소개한다. 맑은 물 표면에 햇빛이 닿을 때 생기는 수천 개의 작은 빛 조각들은 각각이 정확한 각도로 반사되어 우리 눈에 도달한다. 미풍이나 잔잔한 물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반짝임 패턴은 시각적 자극과 함께 끝없는 빛의 향연을 제공한다. 이러한 묘사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것을 넘어, 왜 우리가 물가에서 평온함을 느끼는지에 대한 과학적 설명으로 이어진다.

저자가 강조하는 또 다른 중요한 지점은 '시간'이다. 아침의 빛은 푸른 파장이 풍부하여 우리를 졸리고 정신이 흐릿하게 만드는 멜라토닌의 분비를 억제한다. 최근 연구들은 빛이 편도체, 즉 위협을 감지하고 투쟁-도피 반응을 활성화시키는 뇌 영역의 활동을 둔화시킨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만성 스트레스나 불안에 시달릴 때, 빛은 우리의 편도체를 진정시킨다. 밝은 빛은 집중력과 기억력도 향상시키는데, 신경과학자들은 우리 뇌가 낮 시간 동안 학습하도록 진화했다고 본다. 따라서 에너지와 기분을 북돋우는 푸른 파장의 빛을 원한다면 아침에 호숫가를 걸으라는 것이 저자의 조언이다. 그러나 스트리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루의 끝자락, 석양의 태양 반짝임도 그 나름의 장엄함이 있다. 진홍색, 분홍색, 호박색, 금색 빛줄기가 만들어내는 저녁의 반짝임은 우리 몸에게 이제 긴장을 풀고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임을 알려준다. 고요한 물 위의 달빛은 또 다른 '달 반짝임(moon glitter)'을 만들어내는데, 그 신비로운 우아함은 찾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처럼 저자는 같은 호숫가라도 시간대에 따라 우리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는 점을 섬세하게 짚어낸다.

책의 또 다른 핵심 주제는 '리듬'이다. 연구들은 불안과 우울 완화에 있어 리드미컬한 움직임의 중요성을 입증해왔다. 특히 노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들에서 리드미컬한 걷기가 근력, 균형감각, 유연성 같은 신체 건강뿐 아니라 삶의 질 전반을 향상시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더 나아가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것은 암, 심장병, 치매, 골다공증의 위험을 줄인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뇌과학적 설명을 덧붙인다. 활발하게 움직일 때 우리 뇌는 BDNF(뇌유래신경영양인자)라는 분자를 생성한다. 이 단백질은 새로운 뉴런의 성장을 촉진하며, 우울증과 스트레스로부터의 회복을 돕는 것으로 보인다. 더 빠르게 움직일수록 더 많은 BDNF가 생성되고, 속도를 높이는 것은 더 나은 수면에도 도움이 되며 걷기를 뼈를 강화하는 활동으로 만든다. 이러한 과학적 설명들은 막연히 '운동하면 좋다'는 상식을 구체적인 생리학적 메커니즘으로 변환시켜, 독자들이 걷기의 효과를 보다 실감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책이 주는 가장 큰 깨달음은 풍경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호숫가는 그저 아름다운 장소가 아니라, 우리의 생리학적, 신경학적, 심리적 상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치유의 공간이다. 빛의 파장, 물의 움직임, 걷기의 리듬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우리 몸의 호르몬 분비를 조절하고, 뇌의 신경전달물질을 변화시키며, 근골격계를 강화한다. 스트리츠는 이 모든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호숫가 산책의 시적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현대인의 많은 질병이 실내 생활, 인공 조명, 좌식 생활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책의 메시지는 더욱 시의적절하다. 스트레스, 불안, 우울, 집중력 저하, 수면 장애 등 우리 시대의 만성적 증상들에 대한 해답이 값비싼 치료나 약물이 아니라, 호숫가를 걷는 단순한 행위에 있을 수 있다는 제안은 희망적이다. 더욱이 저자는 '걸으라'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 왜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를 제공한다. 물론 모든 이에게 호숫가가 접근 가능한 것은 아니며, 개인의 상황에 따라 걷기의 효과도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은 특정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스트리츠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 환경과 우리 몸의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이며, 풍경이 가진 치유력을 의식적으로 활용하는 법이다. 호숫가는 그 중 하나의 예시일 뿐,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주변 환경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각자에게 필요한 '걷기 처방전'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걷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책이다. 걷기는 더 이상 이동 수단이나 부담스러운 운동이 아니라, 우리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활력을 주며 영감을 불어넣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특히 호숫가 산책에 관한 장은 과학과 시, 데이터와 감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예다. 저자가 제시하는 빛과 물과 움직임의 상호작용은 우리에게 자연이 적극적인 치유의 파트너임을 일깨운다. 아침의 푸른 빛이 우리를 깨우고, 저녁의 금빛이 우리를 쉬게 하며, 리드미컬한 걸음이 새로운 뉴런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놀랍다. 새로운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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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빌어먹을 세상엔 로큰롤 스타가 필요하다
맹비오 지음 / 인디펍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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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을 덮고 나니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진다. 누군가의 청춘 고백을 엿본 기분이랄까. 아니, 어쩌면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어떤 감각을 깨운 것 같기도 하다. 책은 로큰롤에 관한 이야기지만, 동시에 '살아남기'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가 무대 앞에서, 흙먼지 날리는 페스티벌에서, 작은 클럽의 땀 냄새 속에서 발견한 건 단순히 좋은 음악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어떤 힘이었다. 세상이 나를 규격화하려 할 때, 정답을 강요할 때, 그 압박에서 벗어나 숨 쉴 수 있게 해주는 공간 같은 것이다.

저자가 서태지부터 실리카겔까지 15팀의 밴드를 소개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이건 음악 평론이 아니다. 콘서트에서 받은 충격을 일기장에 급히 적어 내려간 것 같은, 생생한 감정의 기록이다. 카세트테이프의 A면과 B면으로 나뉜 구성도 묘하게 마음을 건드린다. 아날로그 감성이 주는 따스함이랄까. 나는 저자와 세대가 조금 다르다. 내 청춘의 사운드트랙은 해외 록이 더 많았고, 국내에선 발라드와 댄스가 주류였던 시절을 지나왔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저자의 글에 공감이 된다. 왜일까 생각해봤다. 이 책이 말하는 건 결국 "로큰롤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답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어디쯤 서 있는가. 책임은 무거워지고,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새로운 것들은 끊임없이 나를 시험한다.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가려 애쓰지만, 가끔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해진다. 그럴 때면 내가 누구였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조차 흐릿해진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오랜만에 음악을 틀었다. 크라잉넛, 노브레인, 자우림, 국카스텐. 내 청춘 어딘가에 있었던 밴드들. 그리고 책에서 새롭게 알게 된 밴드들까지. 음악이 흐르는 순간, 묘한 일이 일어났다. 젊을 때 느꼈던 그 감각이 돌아왔다. 열정이라고 하기엔 과하고, 자유로움이라고 하기엔 막연한, 그런 어떤 것이랄까..

로큰롤은 "나는 이렇게 산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음악이었다. 남들처럼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정답을 고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음악. 굳이 멋을 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던지는 날것의 용기. 그게 로큰롤이었다. 저자가 무대 앞에서 울고 웃었던 이유를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그건 단순히 좋은 공연을 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음악이 울려 퍼지는 그 공간에서, 가슴이 쿵쾅대는 그 순간에, '나는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꼈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생각한다. 로큰롤 스타가 필요한 이유는, 그들이 우리에게 '달라도 괜찮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정해진 길을 벗어나도,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도 괜찮다는 걸. 그들의 음악은 거창한 위로가 아니라, 함께 견디자는 연대의 메시지다. 나이가 들수록 안전한 선택을 하게 된다. 모험은 줄어들고, 타협은 늘어난다. 그게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하지만 가끔은, 정말 가끔은, 내 안의 어떤 것이 소리친다. 이게 내가 원했던 삶이냐고. 이렇게 살고 싶었냐고 말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게 로큰롤이다. 무너진 마음을 다시 세워주는 음악. 단단한 벽을 통과할 힘을 주는 소리다. 저자는 말한다. 세상이 버겁고 무기력해질 때, 자신을 붙잡아 준 건 거창한 위로가 아니었다고. 가슴이 쿵쾅대는 로큰롤 음악을 들으면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로큰롤은 도피가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다. 이 빌어먹을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는 로큰롤이 필요하다. 음악을 다시 틀어본다. 볼륨을 조금 더 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를 다시 나답게. 아직 늦지 않았다고. 아직 로큰롤을 들을 수 있다면, 아직 가슴이 뛸 수 있다면, 나는 살아있는 거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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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생존 - 지구상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피어난 생명의 경이로움
알렉스 라일리 지음, 엄성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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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명을 연약한 것으로 생각한다. 적절한 온도, 충분한 물과 산소, 안전한 환경, 이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져야만 생명이 유지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알렉스 라일리의 작업이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통념이 얼마나 인간중심적 착각인지에 대한 증거다. 생명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인하고, 창의적이며, 끈질기다. 라일리가 소개하는 극한 환경의 생물들은 '살아남는' 수준을 넘어선다. 그들은 번성하고, 진화하며, 자신만의 생태계를 구축한다. 루마니아의 모빌레 동굴은 이러한 생명력의 극적인 사례다. 500만 년 이상 외부와 단절된 채, 산소가 희박하고 황 성분이 가득한 이 지하 세계에서 수 십 종의 생물이 독자적인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왔다. 인류가 불을 발견하고 문명을 건설하는 동안, 이 보이지 않는 생물들 은 미생물 군락을 먹으며 조용히 자신들의 시간을 이어왔다.

극한 환경 생물들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들의 적응 전략이 보여주는 창의성이다. 사막 개미는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시간대에 활동함으로써 경쟁자와 포식자를 피한다. 그들은 장소가 아닌 '시간'이라는 생태적 지위를 점유한다. 이는 공간적 개념에 익숙한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생존 전략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알래스카의 송장개구리는 더욱 극단적이다. 겨울 동안 완전히 얼어붙는데, 이때 그들의 신체는 더 이상 하나의 유기체가 아니다. 각 장기는 서로 단절되고, 기능이 정지하며, 마치 분해된 부품처럼 흩어진다. 그러나 봄이 오면 이 '부품들'은 다시 조립되고 생명이 돌아온다. 생명의 정의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현상이다. 새들의 호흡 시스템은 또 다른 경이다. 포유류처럼 들이쉬고 내쉬는 방식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만 공기를 순환시키는 그들의 폐는 고산 지대의 희박한 공기 속에서도 효율적으로 산소를 추출한다. 정말 생명의 기적을 보는 듯 하다.

체르노빌은 인류가 만든 재앙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곳에서조차 생명은 길을 찾았다. 검은 곰팡이는 파괴된 원자로 벽에서 자라고, 프셰발스키말은 출입 금지 구역에서 번식한다. 더 놀라운 것은 일부 균류가 방사선을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광합성도 화학합성도 아닌, '방사선 합성'이라는 제3의 에너지 획득 방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설이다. 이것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우주 탐사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NASA 엔지니어들이 곰팡이 포자를 우주선 외벽에 배치하여 방사선 차폐막으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를 논의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생명은 단지 환경에 적응할 뿐 아니라, 가장 적대적인 요소조차 자원으로 전환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19세기 과학자들은 깊은 바다에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빛도 없고, 먹이도 없으며, 압력이 너무 강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현대의 탐사는 이것이 완전한 오해였음을 보여주었다. 8,000미터 이상의 심해에서도 달팽이고기는 유유히 헤엄치고, 쥐만 한 크기의 초대형 단각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기물을 먹으며 살아간다. 안타깝게도 인간의 흔적은 이곳에도 닿아 있다. 마리아나 해구에서 채집한 단각류의 위장에서 발견된 푸른 플라스틱 섬유는, 지구상 가장 깊고 먼 곳도 더 이상 인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상기시킨다. 과학자들은 이 새로운 종에 'Eurythenesplasticus'라는 이름을 붙였다. 플라스틱의 시대를 살아가는 생물이라는 의미다.

라일리는 이 책을 코로나19 봉쇄 기간 중 가장 어두운 시기에 구상했다고 밝힌다. 우울증과 씨름했던 과학 작가에게 극한 생물들의 이야기는 호기심만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역경 속에서도 생명이 계속된다는 증거이자, 회복력에 대한 믿음의 근거였다. 물론 이것이 현재 진행 중인 대멸종을 가볍게 여기자는 말은 아니다. 생물다양성의 손실은 실재하는 위기이며, 우리 세대가 책임져야 할 과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생명 자체의 놀라운 회복력도 인정해야 한다. 지구 역사상 다 섯 번의 대멸종이 있었고, 그때마다 96%의 종이 사라지는 참혹한 결과가 있었다. 그러나 매번 생명은 돌아왔고, 새로운 형태로 진화했으며, 더욱 다양해졌다. 완보동물은 거의 절대영도에 가까운 온도에서도, 끓는 물에서도, 우주 공간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다. 바다가 증발하지 않는 한, 이 작은 이끼돼지들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해 준다. 인간이 사라진 후에도 생명은 계속될 것이라는 겸손함과, 생명의 끈질김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위안이다. 극한 환경 생물 연구는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동물들이 환경 스트레스에 적응하는 메커니즘은 인간 질병 치료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벌거숭이 두더지 쥐의 암 내성은 피부 단백질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지하 생활을 위한 적응이 예기치 않게 장수와 질병 저항성으로 이어진 사례다. 누가 이런 연결고리를 예상했겠는가? 천체생물학자들은 극한 환경 생물을 연구하며 외계 생명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지구에서 가장 적대적인 환경이 목성의 위성 유로파나 토성의 위성 엔셀라두스와 유사하다면, 그곳에도 생명이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생명의 정의를 넓히는 것은 우주에서 우리 위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로렌 아이슬리는 생명체의 극한 환경 진출을 '현실에 대한 영원한 불만'이라고 표현했다. 시적이면서도 정확한 관찰이다. 진화는 본질적으로 모험적이며, 생명은 끊임없이 경계를 시험하고 확장한다. 사막 개미가 뜨거운 정오의 시간대를 점유하고, 송장개구리가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며, 심해 생물이 어둠과 압력 속에서 번성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본성의 발현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경이감은 크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연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반대로 너무 연약한 것으로 과소평가하기 쉽다. 그러나 극한 생물들의 이야기는 생명이 우리 상상보다 훨씬 강인하고, 창의적이며, 끈질기다는 것을 일깨운다. 한 행성에서 생명이 시작되면 완전히 제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이 절망적 낙관주의인지, 아니면 현실적 희망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달렸다. 분명한 것은 생명이 우리보다 훨씬 오래 존재해 왔고,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실 속에서 우리는 겸손함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위로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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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읽는 그림 - 수천 년 세계사를 담은 기록의 그림들
김선지 지음 / 블랙피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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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부터 인류는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렸다. 라스코 동굴의 들소, 알타미라 동굴의 사냥 장면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증언하는 기록이었다. 카메라가 없던 시절, 그림은 역사를 기록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였다. 왕의 초상화는 권력의 정당성을 증명했고, 전쟁화는 승리의 순간을 영원히 보존했으며, 풍속화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후세에 전했다. <시간을 읽는 그림>은 이러한 시각 자료가 지닌 역사적 가치에 주목한다. 책이 특별한 이유는 미술관에 걸린 명화만을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책 속 삽화, 신문의 풍자만화, 선전 포스터, 심지어 상품 광고까지, 당대 사람들의 눈과 손을 거쳐 만들어진 모든 시각 자료를 역사의 증거로 받아들인다. 루브르 박물관의 걸작이 왕과 귀족의 시선을 담았다면, 거리의 포스터와 팸플릿은 민중의 목소리를 담았다. 둘 다 역사를 구성하는 소중한 조각이다. 역사 교과서는 연도와 사건을 나열하지만, 그림은 그 사건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얼굴을 보여준다. 프랑스 혁명을 다룬 여덟 점의 그림을 보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는 군중의 흥분, 단두대 앞에 선 마리 앙투아네트의 표정, 혁명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열기가 생생하게 전해진 다. 텍스트로는 결코 전달할 수 없는 감정과 분위기가 그림 속에 응축되어 있다.


저자는 역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을 제시한다. 하늘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새의 관점'과 땅 가까이에서 세밀하게 관찰하는 '곤충의 관점'이다. 새의 시선으로 보면 왕조의 흥망성쇠, 전쟁의 승패, 혁명의 과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강물의 흐름처럼 역사의 방향성이 명확해진다. 그러나 그 강물은 무수한 물방울로 이루어져 있다. 곤충의 시선으로 한 방울 한 방 울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중세 장원을 다룬 장에서 이 두 시선의 조화가 빛을 발한다. 봉건제도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설명하면서도, 농노 보도의 하루 일과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새벽에 일어나 영주의 땅을 갈고, 해질녘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저녁을 먹고, 일요일이면 교회 마당에서 춤추고 노래했던 보통 사람들의 삶이 생생하다. 랭부르 형제의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기도서> 속 3월 달력 그림은 쟁기를 끄는 소, 씨앗을 뿌리는 농부, 포도나무를 가지치기하는 사람들을 세밀하게 담았다. 이 한 장의 그림에서 우리는 봉건 사회의 구조뿐 아니라 그 속에서 땀 흘리며 살았던 개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정기시를 묘사한 16세기 그림들도 마찬가지다. 중세 상업의 발전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천막을 치고 향신료를 파는 상인, 애완용 원숭이를 구경하는 아이들, 류트를 연주하는 음유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거시사와 미시사가 한 화폭 안에서 만난다. 역사란 거대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의 선택과 경험이 모여 만들어진 것임을 그림은 웅변한다.


그림은 때때로 거짓말을 한다. 왕의 초상화는 실제보다 더 위엄 있게, 전쟁화는 패배를 승리처럼 그린다. 바빌론에 대한 서양의 인식이 그러했다. 성경의 영향으로 바빌론은 오랫동안 '악의 도시'로 기억되었다. 요한계시록의 삽화들은 바빌론을 일곱 머리 괴물 위에 탄 창녀로 묘사했다. 그러나 실제 바빌론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문명의 중심지였다. 네부카드네자르2세 시대의 공중정원은 고대 건축술의 정점이었고, 지구라트는 천문학의 산실이었다. 피터르브뤼겔의<바벨 탑>은 흥미로운 경우다. 성경의 바벨탑 이야기는 인간의 오만을 경고하는 교훈이지만, 브뤼겔의 그림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를 연구한 흔적이 역력하다. 신화와 역사, 상상과 고증이 한 작품 안에 공존한다. 그림을 읽는다는 것은 표면의 이미지뿐 아니라 그 이면의 의도, 시대적 편견, 문화적 맥락까지 읽어내는 작업이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해적 이야기도 그렇다. 영국에서는 '바다의 개들'이라 불리며 영웅으로 칭송받았지만, 스페인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약탈자였다. 같은 사건 을 그린 영국과 스페인의 그림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역사에 하나의 객관적 진실이 없듯, 그림도 화가의 시선, 후원자의 의도, 시대의 이념을 반영한다. 그림을 비판적으로 읽는 능력이 필요한 이유다.

역사는 아름답지만은 않다. 책이 담은 그림들 중 상당수는 인간의 고통을 증언한다. 흑사병 시대의 ' 채찍질 고행단 '을 묘사한 그림에서는 집단적 공포와 광기가 느껴진다. 전염병이 신의 징벌이라 믿었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참회했다. 피로 얼룩진 등, 절규하는 표정, 황홀경에 빠진 군중의 모습이 섬뜩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행렬은 오히려 전염병을 더 확산시켰다. 선의와 무지가 결합하여 비극이었다. 아일랜드 대기근을 다룬 그림들은 더욱 처참하다. 감자 역병으로 백만 명이 굶어 죽고 백만 명이 이민을 떠났다. 앙상하게 마른 아이들, 텅 빈 마을, '관 배'라 불린 이민선의 비좁은 선실이 그림에 담겼다. 자연재해였지만 영국 정부의 무관심과 경제적 착취가 재난을 증폭시켰다. 그림은 숫자로는 담을 수 없는 인간적 고통의 실체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림은 희망도 기록한다. 코르셋을 벗고 자전거를 타는 '뉴 우먼'의 모습은 여성 해방의 시작을 알린다.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을 숨 막히게 조였던 코르셋은 의복만이 아니라 여성의 몸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상징이었다. 자전거는 여성에게 물리적 이동의 자유뿐 아니라 사회적 해방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자전거를 타는 여성을 조롱하는 풍자만화도 있었지만, 당당하게 페달을 밟는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광고 포스터도 있었다. 같은 시대, 상반된 시선이 공존했고, 결국 변화의 흐름이 승리했다.


책은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을 던진다. 르네상스는 정말 ' 빛의 시대 ' 였을까? 화려한 예술의 뒤편에는 메디치 가문의 부패와 보르자 가문의 음모가 있었다. 교황 알렉산데르6세는 성직을 매매하고 자식들에게 권력을 세습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들은 이러한 어둠의 후원으로 탄생했다. 빛과 어둠, 예술과 타락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었다. 산업혁명은 진보였을까, 재앙이었을까? 터너의<전함 테메레르>는 증기선에 예인되어 가는 범선의 쓸쓸한 모습을 담았다.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그림이지만, 동시에 거대한 변화의 순간을 포착한다. 산업화는 부와 편리함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노동자의 극심한 빈곤, 아동 노동, 환경 파괴를 낳았다. 19세기 런던 빈민가를 그린 귀스타브 도의 판화는 '진보'의 이면을 폭로한다. 저자는 자신만의 눈으로 역사를 해석하기를 권한다. 같은 그림을 보고도 사람마다 다른 것을 발견한다. 렘브란트의 <니콜라스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과학의 승리로 볼 수도 있고, 사형수의 신체를 도구화한 폭력으로 볼 수도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지적 열정을 읽을 수도 있고, 계급 간 권력 관계를 읽을 수도 있다. 정답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림 앞에서 멈춰 서서 질문하는 행위 자체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상상하기 위함이다. 책이 소개하는 수많은 그림들은 지나간 시대의 유물만의 의미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환경을 극복한 인간의 창의성을, 흑사병 시대의 광기는 집단 공포의 위험성을, 채찍질 고행단은 맹목적 신앙의 어리석음을 경고한다. 이 모든 것이 현재의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맥도날드로 상징되는 대중 사회의 획일화, 자동화, 소외는 21세기에도 여전하다. 아니, 더 심화되었다. SNS 시대에 우리는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하루에도 수천 장의 사진을 찍고 공유한다. 그러나 과연 이것들이 훗날 우리 시대를 증언하는 '기록화'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무의미한 정보의 홍수로 사라질까? 저자가 늦가을 창가에서 책을 마무리하며 바란 것처럼, 수백 년, 수천 년 전 역사 속 인물들과 생각을 나누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삶의 자취를 따라가는 경험을 하여 좋았다. 중세 농노 보도의 하루, 공중정원을 거닐던 아미티스의 향수, 코르셋을 벗어던진 뉴 우먼의 해방감, 흑사병 앞에 선 사람들의 공포. 이 모든 감정이 그림을 통해 시공간을 넘어 전달되었다. 그림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다. 우리는 그 다리를 건너 역사 속으로 들어가고, 역사는 그 다리를 건너 현재로 걸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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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의 밤
조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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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함께 살아갈 미래를 잃는 일이고, 과거의 순간들을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기억할 수 없게 되는 일이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일부가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경험이다. 특히 사랑하는 이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때, 남겨진 사람은 죽음 그 자체보다 더 무거운 질문들을 떠안게 된다. 내가 무엇을 놓쳤을까. 어느 순간 더 세심하게 바라봤어야 했을까. 그때 다른 말을 했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미련이 남는다. 조수경님의 <말라가의 밤>은 바로 이 질문들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도 절벽 끝에 선 한 남자의 이야기다. 형우라는 인물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자살 사별자들의 초상이다. 그는 살아 있지만 살아가지 못하고, 숨을 쉬지만 제대로 호흡하지 못하며, 시간을 견디지만 시간 속에서 나아가지 못한다. 화물 트럭을 몰며 도로 위를 달리는 그의 모습은 목적지는 있지만 목적은 없는 삶의 은유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형우의 고통을 감상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그 슬픔의 결을 정확하게 더듬으며, 상실 이후의 삶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무너지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엄마의 머리카락을 발견하는 순간, 동생이 즐겨 듣던 노래가 흘러나올 때, 가족이 함께했던 공간을 지나칠 때마다 형우의 일상은 멈춰버린다. 사별의 경험이 지닌 가장 잔인한 진실이다. 죽음은 단 한 번 일어나지만, 그로 인한 상실은 매일, 매 순간 반복된다는 것이다.

소설의 핵심적인 공간인 '말라가'는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장소다. 그곳에서 형우는 자신의 여러 시간대를 만난다. 아홉 살, 열아홉 살, 스물아홉 살의 자신과 마주하는 설정. 그것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다시 읽는 과정이며, 현재의 고통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여정이다. 아홉 살의 형우가 살던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특히 마음을 흔든다. 가난했지만 사랑이 충만했던 시절, 아빠는 없었지만 엄마와 동생과 함께였던 그 시간. 우리는 종종 행복했던 과거를 아름답게만 기억하려 하지만, 형우가 발견하는 것은 그 시절에도 이미 존재했던 균열들이다. 엄마의 피로, 동생의 불안, 그리고 자신의 무지. 행복은 완전했던 적이 없었고, 불행의 씨앗은 오래전부터 뿌려져 있었다. 열아홉 살의 기억 속에서 형우는 동생 은우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했던 순간을 목격한다. 그때 형우는 그 질문을 무시했다. 어쩌면 그 순간이 분기점이었을지 모른다. 대화가 이어졌다면, 의심이 공유되었다면, 형제 사이의 신뢰가 유지되었다면. 하지만 삶은 되돌릴 수 없고, 과거는 변경할 수 없다. 형우가 말라가에서 경험하는 것은 과거를 바꾸는 기회가 아니라, 과거를 제대로 이해하는 기회다. 스물아홉 살의 형우는 가장 고통스러운 자아다. 대기업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으며 바쁘게 살던 그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했다. 엄마의 우울, 동생의 번민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그는 신규 사업 준비에 몰두하고 있 었다. 이것은 무관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가까워서 보지 못했거나, 보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거나, 혹은 자신의 성공으로 가족을 구원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프리다이빙이라는 소재가 등장하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것 같다. 물속으로 깊이 잠수하는 행위는 자살과 유사해 보이지만, 그 본질은 정반대다. 프리다이빙은 한계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수면으로 올라오는 과정이다. 숨을 참는 것은 영원히 숨을 멈추기 위함이 아니라, 더 깊이 자신을 경험하고 다시 숨을 들이마시기 위함이다. 형우가 만나는 다른 자살 사별자들과의 교 류는 이 소설에서 가장 희망적인 부분이다. 각자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그들은 서로의 고통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이미 안다. 그 무게를, 그 어둠을, 그 끝없는 자책을. 그들이 함께 물속으로 들어가 서로를 지켜보며 다시 수면으로 올라오는 장면은, 치유가 혼자만의 여정이 아니라 연대의 과정이다. 치유는 망각이 아니다. 슬픔을 지우는 것도, 과거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슬픔 속으로 깊이 잠수하여 그것을 온전히 경험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수면으로 올라와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다. 회복 호흡이다. 몸이 우리를 살게끔 설계되어 있다는 프리다이빙 강사의 말처럼, 우리의 마음도 결국 치유되도록 만들어져 있는지 모른다. 다만 그 과정이 혼자서는 너무 어렵고, 때로는 함께 숨 을 참아줄 누군가가 필요할 뿐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얼마나 책임이 있는가? 형우의 죄책감은 정당한가? 그가 더 잘했어야 했는가? 소설은 이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은근히 드러낸다. 우울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고, 관계는 사회적 맥락 속에 존재한다. 한국이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통계는 개인의 나약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형우의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 아버지의 부재, 사 회적 지원의 부족 속에서 버텨왔다. 엄마는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지쳐갔고, 동생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나눌 곳이 없었으며, 형우는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았다. 이들 각자가 더 노력했어야 할까? 아니면 이 들을 둘러싼 사회가 더 많은 안전망을 제공했어야 할까? 형우가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과정이다. 그는 완벽한 아들도, 완벽한 형도 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히지만, 결국 그것이 인간의 조건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책은 슬픔을 다루지만 슬픔에 잠식되지 않는 소설이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고통 너머의 가능성을 본다. 자살 사별자라는 특수한 경험을 다루지만, 그 안에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상실의 보편성을 발견한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우연과 선택, 타이밍과 관계의 산물인지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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