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랭브릿지 옮김 / 리프레시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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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나 베르테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는 순간, 세상이 한 사람으로 좁혀지는 경험. 그것은 시대를 넘어 반복되는 인간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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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랭브릿지 옮김 / 리프레시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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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다시 집어 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학 시절, 필독서 목록에서 의무처럼 읽었던 그 소설. 당시 나는 베르테르를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저 줄거리를 따라갔을 뿐이었다. 젊은이의 과도한 열정, 성취되지 못한 사랑, 그리고 극단적 선택. 그것들은 내게 문학사의 한 페이지로만 존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표지부터 나를 붙잡았다. 무릎 꿇은 베르테르의 모습, 그리고 롯테의 손길. 흑백의 절제된 선들이 만들어낸 그 장면은 어떤 설명보다 강렬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런 것일까. 이제 나는 안다. 사랑이란 언제나 완전할 수 없고,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지를. 표지를 한참 들여다보다 문득 깨달았다. 이 책을 다시 읽는다는 건, 단지 옛 이야기를 복습하는 게 아니라, 내 안의 변화된 시간을 마주하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베르테르의 편지는 고백이자 기록이다. 그는 친구 빌헬름에게 쓴다. 자신이 만난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연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그리고 롯테라는 존재가 얼마나 빛나는지를. 그의 문장은 때로 과장되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세상을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순수함이 담겨 있다. "나는 지금 기쁘고 행복하다"라는 문장 뒤에 숨은 불안을 이제야 본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 너무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좋은 기록자가 되기는 힘들다"고 말한 것이다. 행복이 넘칠수록 그것을 언어로 담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베르테르는 그걸 알면서도 계속 썼다. 편지는 그의 유일한 출구였으니까? 내지의 일러스트는 이 지점을 정확히 포착한다. 세밀한 펜선으로 그려진 베르테르의 얼굴엔 기쁨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그림자가 깊게 드리운 눈가, 살짝 떨리는 듯한 입가의 선. 그것은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감정의 미세한 떨림들이다. 롯테를 처음 만난 장면의 삽화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그녀의 모습, 그 주변을 감싸는 부드러운 명암. 베르테르가 그녀를 "천사"라고 부른 건 단순한 과장이 아니었다. 그에게 롯테는 이 세계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증거였다.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 베르테르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는 롯테의 눈빛에서, 대화에서, 침묵에서조차 자신을 향한 애정을 읽어낸다. 그리고 그 순간, 스스로를 "신처럼 경배"하게 된다. 대학생 때의 나는 이 대목에서 베르테르를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착각에 빠진 젊은이의 망상쯤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해석의 예술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상대의 작은 신호들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읽으려 한다. 베르테르가 특별히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된다. 롯테는 분명히 베르테르를 아꼈다. 그러나 그녀의 애정은 약혼자 알베르트를 향한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베르테르는 그 차이를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아니, 알 수 없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흐릿해지니까... 일러스트 속 롯테의 표정은 복잡하다. 베르테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엔 연민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다. 그녀 역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거절해야 하지만 상처 주고 싶지 않은, 멀어져야 하지만 완전히 놓을 수 없는 그 마음. 흑백의 선들은 그녀의 내면도 섬세하게 담아낸다.

알베르트와 롯테가 결혼했다는 소식. 베르테르는 예상했던 일이라며 담담하게 반응한다. 심지어 축복의 말까지 건넨다. 하지만 그의 편지는 곧 균열을 드러낸다. 롯테의 초상화를 치우려 했지만 치우지 못했다는 고백, 자신이 그녀 마음속 "두 번째 자리"에 있다는 위안이다. "두 번째 자리". 이 표현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이제야 느껴진다. 베르테르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롯테 곁에 머물 수 있다면, 비록 주변부라 해도 괜찮다고.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두 번째가 되는 건 결코 견딜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만약 그녀가 나를 잊을 수 있다면…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미쳐버릴 것이다." 이 문장 앞에서 나는 한참을 멈춰 섰다. 베르테르가 두려워한 건 롯테를 잃는 게 아니라, 롯테의 기억에서조차 지워지는 것이었다. 존재의 완전한 소멸. 그것이야말로 그가 견딜 수 없는 진짜 죽음이었다. 일러스트는 이 고독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홀로 창가에 서 있는 베르테르, 그의 뒷모습만이 그려져 있다. 창밖은 텅 빈 여백으로 남겨졌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그 공간이 오히려 더 많은 걸 말해준다. 그에게 세상은 이미 텅 비어버렸다는 것을...

"이것이 마지막 아침이다." 베르테르의 마지막 편지는 고요하다. 절규하지 않는다. 다만 담담하게 자신의 상태를 기록한다. "나는 '마지막'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나는 온전히 살아 있건만." 이 역설. 살아 있으되 끝을 맞이하는 것. 베르테르는 자신의 선택을 죽음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존재로 받아들이려 한 것은 아닐까. 그에게 롯테 없는 삶은 이미 삶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육체의 소멸은 단지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대학생 때 나는 이 결말을 비판적으로 읽었다. 낭만주의 시대의 과도한 감상주의, 개인의 나약함, 사회적 책임의 회피. 그런 단어들로 베르테르의 선택을 분석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판단하기보다는, 그저 그의 고통이 얼마나 깊었을지 헤아려본다. 마지막 장면의 일러스트는 말이 없다. 쓰러진 베르테르, 그 곁에 떨어진 권총, 그리고 펼쳐진 책. 모든 게 고요하다. 흑백의 농담은 생과 사의 경계를 지운다. 이 정적 속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책을 서가에 꽂으며 생각한다. 언젠가 또다시 이 책을 펼치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또 어떻게 변해 있을까. 베르테르는 그때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고통을 겪고 있겠지. 그리고 나는 또 다른 눈으로 그를 바라보겠지. 그것이 고전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일 것이다. 변하지 않는 텍스트와 변해가는 독자 사이의 끝없는 대화. 이번 대화는 흑백의 선들과 함께였다. 음번엔 어떤 형태로 베르테르를 만나게 될까. 지금은 다만, 이 만남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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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시스박의 부동산 세금 트렌드 2026 - 매년 변하는 부동산 절세 전략 총정리
박민수(제네시스박) 지음 / 경이로움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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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늘날 부동산 세금 트렌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26년을 앞둔 현재,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은 전례 없는 투명성 혁명을 맞이하고 있다. 정부의 97 부동산 대책을 통해 드러난 핵심 메시지는 명확하다. " 모든 부동산 거래는 투명해야 하며, 자금의 출처는 명확히 밝혀져야 한다 "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증여세 탈루 방지라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있다. 과거 가족 간 자금 지원이 묵시적으로 용인되던 관행은 이제 철저한 검증의 대상이 되었다. 정부는 부동산 매매 시 입금 증빙 자료의 의무 제출 범위를 대폭 확대하고, 전담 조사•수사 조직까지 신설하여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고가주택 신고가 거래와 법인자금 유용 의심 거래에 대한 세무조사 강화이다. 개인의 부동산 거래뿐만 아니라 법인을 통한 우회 거래까지 포괄하는 전방위적 접근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동산 투자자들은 자금 조달부터 거래 완료까지 모든 과정에서 완벽한 증빙을 준비해야 하는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부동산 관련 거래에서의 세금은 그 규모가 만만치 않은 만큼 세금 관련 이해가 필수적이다. <제네시스박의 부동산 세금 트렌드 2026>는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해 준다.

2026년 5월 9일은 다주택자들에게 있어 운명의 날이 될 전망이다. 현재 한시적으로 유예되고 있는 다주택자 중과세가 이 시점에서 부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현 정부의 기조를 고려할 때 이 유예 조치가 연장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판단하고 있다. 중과세 적용 여부에 따른 세금 부담의 차이는 극명하다. 양도차의 10억원을 기준으로 할 때, 일반 세율 적용 시 3억원이던 세금이 중과세 적용 시 6억원에서 7억원까지 증가한다. 세율 인상이 아닌 투자 수익성의 근본적 변 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주택자들의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매각을 통한 포트폴리오 정리이고, 둘째는 자녀 등에 대한 증여를 통한 소유권 이전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결정을 2026년 초가 아닌 2025년 가을까지 내 려야 한다는 점이다. 중과유예 연장 여부가 결정되는 2026년 1월 이후에는 대응할 시간이 현실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 단계적으로 도입되었던 부동산 규제와 달리, 현 정부는 종합적인 세금 정책을 동시에 발표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시장 참여자들에게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는 동시에, 단시간 내 대응을 어렵게 만드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공정 시장가액비율 상향과 종합부동산세 강화는 이미 검토 단계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보유세 부담의 실질적 증가를 의미하며, 특히 고가 부동산 소유자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정부가 6•27 대책에서 대출 규제를, 9•7 대책에서 불공정거래 단속을 강화한 것은 결국 세금 규제라는 최종 카드를 위한 포석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변화는 부동산 투자 전략의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한다. 과거 단순한 시세 차익을 노리는 투자에서 벗어나, 보유세 부담을 고려한 장기적 관점의 투자 전략이 필요해진 것이다.

2026년을 기점으로 예상되는 부동산 시장의 구조적 변화는 다층적이다. 우선 다주택자들의 매각 물량 증가로 인한 일시적 공급 증가가 예상된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가격 안정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전세 시장의 불안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전세 공급 감소는 필연적으로 일부 전세 수요를 매매 수요로 전환시킬 것이다. 특히 서울을 비롯한 중심지의 신축 공급 부족과 중심지 선호 현상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주요 거주 선호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격 상승이 먼저 시 작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움직임은 2026년 상반기에 본격화되겠지만, 빠르면 2025년 연말부터 조짐이 나타날 수도 있다. 투자자들에게는 이러한 변화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 요구된다. 무주택자의 경우 내 집 마련 계획을 앞당기고, 좋은 입지 의 물건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유리하다. 공동명의를 통한 세제 혜택 활용도 중요한 전략이 될 것이다. 1주택자는 상급지로의 갈아타기를 서둘러야 한다. 분양권, 입주권, 재개발 등을 활용한 갈아타기 전략이 더욱 중요해질 전망이다. 2주택 이상 다주택자는 각자의 상황에 맞는 맞춤형 전략이 필요하다.

2026년 부동산 세금 트렌드는 세율 변화를 넘어선 게임 규칙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투명성, 공정성, 그리고 실질적 세부담 증가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요약되는 이 변화는 모든 시장 참여자들에게 새로운 전략 수립을 요구하고 있다. 성공적 인 부동산 투자를 위해서는 세법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함께,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 대한 예측력이 필수가 되었다. 정부의 정책 방향성을 정확히 읽고, 이에 맞는 투자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2026년, 부동산 시 장은 새로운 질서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저자는 여러가지 사례를 통해서 알기 쉽게 설명해 주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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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의 전설 100년 주식투자 비법 - 데이비스 투자 가문에게 배우는 주식 불변의 법칙
존 로스차일드 지음, 김명철 외 옮김, 이상건 감수 / 유노북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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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The Davis Dynasty"는 Shelby Cullom Davis라는 한 투자자가 수십년간의 투자 경력을 통해 어떻게 막대한 부를 축적했는지, 그리고 그의 투자 철학이 어떻게 아들과 손자에게 전해져 3대에 걸친 투자 왕조를 이루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데이비스 가문의 이야기를 당시의 시장 역사와 함께 엮어내며, 투자의 본질적 원칙들이 시대를 초월해 작동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피터 린치는 이 책의 서문에서 핵심을 관통하는 통찰을 제시한다. "복리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주식은 무기한 보유할 수 있지만, 채권은 간헐적으로만 우수한 성과를 낸다." 또한 "위대한 투자는 독립적인 정신과 군중이 경멸하는 자산을 매수할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원칙들은 데이비스 가문 3대에 걸쳐 일관되게 실천되었으며, 그들의 성공은 이 원칙들의 유효성을 입증한다.

Shelby Cullom Davis는 1909년에 태어나 비교적 늦은 나이인 30대 후반에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이는 오늘날 많은 투자자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성공적인 투자는 일찍 시작하는 것만이 아니라, 올바른 원칙과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실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941년, Davis는 $33,000에 뉴욕증권거래소 회원권을 구입했다. 이는 놀라운 거래였다. 불과 12년 전인 1929년에는 같은 회원권이 $629,000에 거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구입한 지 1년 후, 회원권 가격은 그가 지불한 금액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Davis는 동요하지 않았고, 결국 1994년에는 그 가치가 $830,000까지 상승했다. 이 일화는 그의 투자 철학을 잘 보여준다. 단기적 변동에 흔들리지 않고 장기적 가치에 집중하는 것이다.


Davis의 투자 성공은 그가 가장 잘 아는 분야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뉴욕주 보험국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보험 회사들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1947년, 다우존스 지수가 9.6배의 주가수익비율로 거래되고 평균 배당수익률이 5%였던 시기에, Davis는 역발상적 입장을 취하며 주식을 전면적으로 수용했다. 그의 타이밍은 거의 완벽했다. 그는 전후 호황이 시작되기 몇 년 전에 투자를 시작했다. 보험주는 당시 심각하게 저평가되어 있었다. 낮은 채권 수익률로 인해 수익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장부가치 이하로 거래되고 있었다. 하지만 Davis는 이를 하방 위험이 제한된 기회로 보았다. 그가 보험 회사에 주목한 이유는 명확했다. 보험 회사는 복리 기계였다. 운영 비용이 낮고, 매년 업그레이드해야 할 공장이나 높은 자본 지출이 필요하지 않았다. 단지 고객 기반이 성장함에 따라 증가하는 한계 비용만 있을 뿐이었다. Davis는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했지만, 투자에서는 레버리지를 적극 활용했다. 그는 부동산 소유에서 모기지(레버리지)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순자산을 어떻게 증폭시키는지 관찰했고, 주식에 적용된 레버리지가 모기지보다 더 많은 수익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의 아들 Shelby Davis는 아버지의 레버리지 사용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아버지는 세금을 싫어했기 때문에 마진이 국세청에 대한 가장 좋아하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대출에 대한 이자는 세금 공제가 가능했고, 그의 공제액은 배당금에 부과되었을 세금을 없앴습니다. 또한 투자의 판돈을 높임으로써 마진은 그를 집중하게 만들었습니다." NYSE 회원권과 자신의 증권사를 소유한 덕분에 Davis는 일반 투자자들보다 두 가지 이점이 있었다. 그의 회사는 개인 투자자보다 더 많은 돈을 빌릴 수 있었고, 마진 대출에 대해 더 낮은 이자율을 지불할 수 있었다.


Davis는 정기적으로 보험 회사를 방문하여 경영진을 만났다. 그의 가장 좋아하는 질문은 이것이었다. "경쟁사를 쏠 수 있는 은색 총알이 하나 있다면, 어떤 경쟁사를 쏘겠습니까?" 그런 다음 그는 그 경쟁사를 조사했다. 이 질문은 천재적이다. 경영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경쟁사가 바로 가장 강력한 회사이기 때문이다. 그는 업계에서 저비용 운영자를 찾았고 성과가 낮은 회사는 피했다. 그의 초기 포트폴리오는 대부분 장외에서 거래되는 소형 보험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또한 경영진의 우수한 리더십을 찾았다. 투자에서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깊이 이해했던 것이다. Davis의 위기 대응 능력은 1987년 주식시장 대폭락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포트폴리오 가치가 $1억 2,500만 달러나 하락하는 것을 목격했지만, 이를 매수 기회로 보았다. 그는 매수에 나섰고, 다음 해에 "최소한의" 추정 순자산 $3억 7,000만 달러로 포브스 400 명단에 올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위기에서 기회가 온다. 하락장은 좋은 회사의 주식을 유리한 가격에 더 많이 살 수 있게 해준다.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면, 이런 시기에 돈의 대부분을 벌 것이다. 단지 훨씬 나중에야 그것을 깨달을 것이다."


Davis의 투자 전략의 핵심은 "Davis Double Play"로 알려진 개념이다. 이것은 평균 이상의 수익 성장 잠재력을 가진 저가 주식을 찾는 것이다. 투자자들은 낮은 배수로 매수하고, 탁월한 수익 성장을 얻으며, 그런 다음 배수가 확대되는 것을 본다. 즉, 두 가지 방향에서 이익을 얻는 것이다. 수익이 증가하고 동시에 시장이 그 회사에 더 높은 밸류에이션을 부여하는 것이다. 1992년, 100개의 보험 회사가 그의 포트폴리오의 75%를 차지했고, 나머지는 1,500개 회사(수백 개의 손실 종목 포함)에 분산되어 있었다. Davis는 매력적인 회사가 나타날 때마다 1,000주를 사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거의 팔지 않았다. "프린트아웃은 무엇이 Davis를 포브스 명단에 올렸는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전화번호부 목록의 주식이 아니었다. 전화번호부의 몇 가지 이름이었다. 이것들은 1960년대부터의 오래된 것들로 그가 충실하게 보유했다... Davis는 충성을 유지했다. 1950년에 그가 소유한 이름들이 1990년에도 여전히 그의 포트폴리오에 있었다." "Davis Dozen"으로 알려진 12개 주식이 그의 총 자산의 4분의 1인 $2억 6,100만 달러를 차지했다. 11개는 보험사였고 하나는 Fannie Mae였다. 모두 1970년대 중반 이전에 매수했다. "그는 원래 현금 지출 $150,000에 이 상을 받았다. 이 상은 축적하는 데 50년의 대기 기간이 필요했다... 일단 그가 승리하는 회사들을 매수하면 그의 최선의 결정은 결코 팔지 않는 것이었다. 리더십의 강점과 회사의 지속적인 복리 능력을 믿는 한, 그는 보유했다." 이것이 Davis 투자 철학의 핵심이다. "이 포트폴리오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평생의 투자에서 중요한 것은 몇 개의 큰 승자이며, 이러한 승자들은 가치를 높이는 데 수년이 필요하다."


Davis의 재정적 삶은 세 단계로 나뉘었다. 배우기, 벌기, 돌려주기. 배우기 단계는 40대 초반까지 지속되었고, 벌기 단계는 40대부터 70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그 시점에서 그는 돌려주기 단계, 즉 자선 활동을 시작했다. Davis는 1994년에 사망하면서 $9억 달러를 개인적인 대의에 남겼다. 그는 자녀들에게 막대한 부를 그냥 물려주는 것을 반대했다. "자녀와 손자들이 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장하는 신탁 기금으로 시작한다면 어디에 동기가 있겠는가? 나는 비상시를 위한 '안전망'을 제공하는 것을 믿지만, 주로 나는 탁월함을 위한 동기... 그리고 공동선에 기여하는 것을 믿는다." 그의 투자 철학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과 신학은 투자를 위한 완벽한 배경을 제공한다. 투자에서 성공하려면 철학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 미친 듯이 기도해야 한다."

Shelby Davis(2세)는 1938년에 태어나 아버지 밑에서 배웠다. 9살 무렵부터 아버지가 격주로 발행하는 보험 뉴스레터의 사본을 만드는 것을 도우며 투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 시간의 "주식 토론"은 그의 투자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초기 교훈에는 채권 보유자보다 주주가 되는 것의 이점과 복리의 힘이 포함되었다. "성공적인 회사의 주식을 소유하는 것이 그 회사의 채권을 소유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람 있다." 또한 "투자 수익률을 알면 72의 법칙이 돈을 두 배로 늘리는 데 걸리는 시간을 알려준다. 수익률이 클수록 복리가 빨라진다." 1960년, 그는 Reynolds Aluminum을 수익의 40배에 거래되고 있을 때 "매수" 추천했다가 경영진에게 설득당한 후 고가 성장주를 매수하는 실수를 배웠다. 이 경험은 평생의 교훈이 되었다. 그는 수익 성장 및/또는 배수 확대(낮은 배수는 필수 요건이 아님) 가능성이 있는 회사를 찾았다. 그는 특성이 변화하는 산업을 찾았다. 펀드의 초기 포지션은 기술주였다. 펀드는 첫해에 25% 상승했다. 1970년 1분기까지 $5,500만 달러의 유입을 보았다. 그런 다음 시장이 붕괴되었다. 그들의 보유 종목은 실적 부진 보고서 이후 가격이 하락했다. Memorex의 포지션은 $168에서 $20로 떨어졌다(하락하는 동안 더 매수한 후 팔렸다!). 1970년 성과를 기준으로 하위 10% 펀드였다. 이것은 저평가된 기회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 힘든 교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97년까지 New York Venture 펀드를 운영했다. 20년 중 16년 동안 S&P 500을 이겼고, 그 기간 동안 연평균 4.7% 초과 수익을 냈다. 이는 놀라운 성과였다.


Chris Davis는 3세대로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투자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통찰을 더했다. 그는 말한다. "우리의 최고의 약세장 보호는 강력한 대차대조표, 낮은 부채, 실제 수익, 강력한 프랜차이즈를 가진 회사를 매수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사들은 어려운 시기를 견딜 수 있고 약한 경쟁자들이 축소하거나 폐쇄해야 할 때 결국 더 지배적이 된다." 그의 투자 철학은 명확하다. "오늘 현금을 투입하여 미래에 더 많은 현금을 돌려받기를 바란다. 그것이 투자의 전부다. 우리에게는 전체 과정이 두 가지 질문에 달려 있다. 어떤 종류의 비즈니스를 살 것인가, 그리고 그것에 대해 얼마를 지불할 것인가? 첫 번째 질문에 답하자면, 살 가치가 있는 회사는 쓰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번다. 그 이익은 최대 주주 이익을 위해 재활용된다. 두 번째 질문인 가격표는 종종 무시된다." Chris Davis는 Warren Buffett의 개념인 "소유자 수익"을 강조한다. 이것은 회사가 현상 유지를 위해 현금을 재투자한 후 매년 주머니에 넣는 보상의 금액이지만, 성장을 위한 재투자 전이고 스톡옵션, 감가상각, 상각 및 이연 세금을 조정한 것이다. 소유자 수익은 거의 항상 보고된 수익보다 낮다. 회사에 대해 얼마를 지불할지는 소유자 수익 수익률을 국채 금리와 비교하여 결정한다. 소유자 수익을 주가로 나누면 수익률을 얻는다. $2의 소유자 수익을 가진 $20 주식은 10%($2/$20)를 산출한다. $2의 소유자 수익을 가진 $70 주식은 2.9%($2/$70)를 산출한다. 현명한 투자는 소유자 수익 수익률이나 국채 금리 중 더 높은 것으로 간다. 그는 말한다. "비즈니스가 미래에 수익 수익률을 증가시킬 수 있지 않는 한, 6% 채권 대신 3.3%를 산출하는 비즈니스를 소유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즉,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과제는 성장을 8년 또는 10년 앞으로 예측하는 것이다. 어떤 예측이 정확하려면 비즈니스가 상대적으로 예측 가능해야 한다. 일반적인 기술 회사에는 10년 예측을 고정할 수 없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기술을 구매하더라도 주식 수익률이 채권 수익률과 일치하기까지 수년이 걸릴 수 있다."

현재 전 세계 주식시장은 풍부한 유동성과 함께 IT 기업, AI 기업의 열풍으로 전대미문의 최고가를 나타내고 있다. 누구나 이 주식시장에서 수익을 얻고 살아남기를 바라고 있다. 현재의 주식 시장은 활황이지만 이 시장이 어떤 변화를 나타낼지는 아무도 모른다. 책을 통해서 월가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전설들의 투자 원칙들을 읽고 나의 투자의 레퍼런스로 삼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덮었다. 오늘도 주식은 오르지만 불안하다.. 나만의 투자 원칙을 세우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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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담은 기계 - 인공지능 시대를 마주하는 인지심리학자의 11가지 질문
정수근 지음 / 심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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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일은 언제나 조금 설렌다. 무심코 지나치던 책등 하나가 시선을 붙잡고, 표지를 펼치는 순간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는 기분이 든다. <마음을 담은 기계>를 처음 마주했을 때도 그랬다. 제목부터 묘했다. 마음을 담은 기계라니. 차갑고 정밀한 금속 덩어리에 따뜻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마음이 담길 수 있다는 건가. 아니면 우리가 만든 기계에 우리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투영하고 있다는 뜻일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나는 결국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요즘 세상은 인공지능 이야기로 가득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스마트폰이 날씨를 알려주고, 출근길에는 음악 앱이 내 기분을 읽은 듯 딱 맞는 플레이리스트를 틀어준다. 일하다 막히면 챗GPT에게 조언을 구하고, 퇴근 후엔 넷플릭스가 추천한 영화를 본다. 어느새 인공지능은 공기처럼 우리 곁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이 기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막연한 기대와 두려움 사이에서 우왕좌왕할 뿐,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부족했던 것 같다.


정수근 교수의 글을 읽으며 가장 먼저 느낀 건 안도감이었다. 이 책은 인공지능을 찬양하지도, 무조건 경계하지도 않는다. 대신 차분하게, 그러나 깊이 있게 질문을 던진다. 인공지능은 정말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창의성이란 무엇이며, 기계도 창의적일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은 이 기술과 함께 자라며 어떤 사람이 될까. 이런 질문들은 단순히 기술적 호기심을 넘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비유는 인공지능을 '거울'로 보는 시선이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분명 나인데, 동시에 나는 아니다. 좌우가 바뀌어 있고, 깊이감이 없으며, 만질 수도 없다. 하지만 그 거울을 통해 나는 내 얼굴을 볼 수 있고,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때로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깨닫는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진짜 인간은 아니지만, 우리가 만든 데이터의 패턴을 반영하며 우리 자신을 비춰준다. 연말이 되면 챗GPT도 게을러진다는 이야기를 읽을 때 나는 웃음이 나면서도 묘하게 찡했다. 기계가 실제로 피곤함을 느낄 리 없다. 그저 학습한 데이터 속에 담긴 인간의 패턴—연말에 사람들이 여유를 부리고, 업무 강도가 낮아지는 경향—을 그대로 재현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왜 슬프게 느껴졌을까. 아마도 우리의 습관과 결점, 심지어 나태함까지도 기계에 고스란히 복사된다는 사실이 어쩐지 부끄럽고 애잔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가 만든 것에 갇혀 있다. 인공지능은 우리가 남긴 데이터를 먹고 자란다. 우리의 편견, 욕망, 불완전함이 모두 그 안에 녹아든다. 그래서 인공지능의 문제는 사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다. 거울이 비뚤어졌다고 투덜대기 전에, 거울 앞에 선 우리 자신을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우리는 어떤 데이터를 남기고 있는가. 우리의 선택과 행동은 다음 세대에 어떤 유산으로 전해질 것인가.


책을 읽으며 자꾸 떠오른 장면이 있다. 몇 년 전, 처음 스마트 스피커를 샀을 때였다. "오늘 날씨 어때?"라고 물으면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그 기계가 신기하면서도 어색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나도 모르게 "고마워"라고 말하는 나를 발견했다. 심지어 어느 날은 스피커가 말을 못 알아듣자 짜증을 냈다. "왜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해!"라고.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기계에게 감정을 투사하고, 그것이 나를 이해해주길 기대했다니 말이다. 정수근 교수는 이런 현상을 의인화 본능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오래된 차에 이름을 붙이고, 인형을 소중히 다루며, 심지어 바위에도 마음이 있다고 느낀다. 하물며 말을 하는 기계에게 감정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 감정이 일방적이라는 점이다. 스마트 스피커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음성 패턴을 인식하고, 데이터베이스에서 적절한 답을 찾아 출력할 뿐이다. 그런데 나는, 우리는 그것이 나를 알아준다고 착각한다. 이 착각은 위험할 수도, 아름다울 수도 있다. 외로운 노인이 AI 챗봇과 대화하며 위로받는다면 그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진짜 관계와 가짜 관계를 구분하지 못하면, 피상적인 상호작용에 만족하며 깊이 있는 인간관계를 소홀히 할 위험이 있다. 마음이 없는 것에 마음을 투영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지만, 그 본능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는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쓰고, 음악을 작곡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복잡한 감정이 든다. 놀랍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며, 어딘가 섭섭하기도 하다. 예술은 인간만의 영역이라고 믿었는데, 이제 그 경계마저 흐릿해지고 있다. 하지만 정수근 교수의 설명을 읽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창의성은 단순히 결과물의 참신함만으로 평가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무작위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다가 우연히 아름다운 멜로디가 나왔다고 해서 그게 음악이 될까. 원숭이가 키보드를 두드려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나온다면 그건 예술일까. 아니다. 예술에는 의도가 있고, 과정이 있으며, 무엇보다 인간의 경험과 감정이 녹아 있다. 창작자는 수많은 고민과 시행착오 끝에 작품을 완성한다. 그 과정 자체가 창의성의 본질이다.

인공지능은 패턴을 학습하고 조합할 수 있다. 놀라울 정도로 그럴듯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고통도, 기쁨도, 망설임도 없다. 인공지능은 왜 그림을 그리는지 모른다.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도, 누구에게 전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저 주어진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결과물이라도 인간이 만든 것과 기계가 만든 것을 다르게 평가한다. 창의성에 가치를 부여하는 건 결국 인간이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인공지능을 배척해야 할까, 아니면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까. 나는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은 도구다. 붓이든 카메라든 컴퓨터든, 도구는 창작자의 손에 들렸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중요한 건 도구가 아니라 그것을 쥔 손이고, 그 손을 움직이는 마음이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경험, 감정, 의지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영역이다.


책 속에서 기억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 가슴이 먹먹해졌다. 인간의 기억은 불완전하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때로는 왜곡하며, 심지어 없던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불완전함이 인간을 약하게 만들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망각이 있기에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고, 창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컴퓨터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한 번 저장된 데이터는 삭제하지 않는 한 영원히 남아 있다. 정확하고 완벽하다. 하지만 그 완벽함이 때로는 한계가 된다. 지나치게 특정 데이터에 의존하면 유연성을 잃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오히려 인간의 망각을 모방하려 한다. 의도적으로 일부 정보를 삭제하거나 무작위로 연결을 끊어 기계가 더 창의적이고 적응적으로 학습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결함이 기계를 발전시키는 열쇠가 된 셈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생각했다. 우리는 왜 그토록 완벽해지려 애쓸까.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실수하지 않으며, 최적의 선택만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완벽함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우리는 실수하고, 잊고, 후회하며, 그 과정 속에서 성장한다. 상처는 아물며 흉터가 되고, 그 흉터는 우리가 살아온 증거가 된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똑똑해져도 이런 경험은 가질 수 없다. 그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마음이 무거웠던 부분은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요즘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과 태블릿에 둘러싸여 자란다. 말을 배우기 전에 터치스크린 조작법을 익힌다. 질문이 생기면 부모보다 유튜브에 먼저 묻는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과연 어떤 사람이 될까? 정수근 교수는 단정적인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균형 잡힌 시각을 제시한다. 인공지능은 교육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개인 맞춤형 학습을 가능하게 하고, 창의적 활동을 돕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탐구하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위험도 있다. 지나친 의존은 깊이 사고하는 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고, 인간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기술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다. 나는 조카가 AI 스피커와 대화하는 걸 본 적이 있다. "헤이, 공룡은 왜 멸종했어?" 스피커는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조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편리하긴 했지만 왠지 서운했다. 예전에는 그런 질문을 나에게 했을 텐데. 나는 완벽한 답을 주지 못했겠지만, 함께 백과사전을 뒤적이고, 이야기를 나누며, 호기심을 키워줬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조카는 정보를 얻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배웠을 것이다. 기다림, 탐구, 관계 맺음 같은 것들. 그래서 우리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 아이들에게 기술을 무조건 멀리하라고 할 수는 없다. 그건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신 기술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인공지능이 주는 답을 맹신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하며, 무엇보다 인간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책을 덮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수근 교수가 던진 질문들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인공지능은 정말 우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인공지능에 마음을 투영할까.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 인간다워질까, 아니면 덜 인간다워질까. 답은 아직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명확한 답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질문은 우리를 멈추게 하고, 돌아보게 하며, 다시 나아가게 한다.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간다는 건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인공지능은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패턴, 습관, 편견, 아름다움, 결함을 본다. 때로는 불편하고, 때로는 신기하며, 때로는 두렵다. 하지만 거울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거울 속 모습이 아니라 거울 앞에 선 진짜 우리니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지가 결국 우리를 정의한다. 기술은 도구일 뿐이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똑똑해져도 우리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사랑하고, 상처받고, 꿈꾸고, 후회하는 건 여전히 우리 몫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 불완전하지만 아름답고, 연약하지만 강인하며, 유한하지만 의미 있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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