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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랭브릿지 옮김 / 리프레시 / 2025년 11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다시 집어 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학 시절, 필독서 목록에서 의무처럼 읽었던 그 소설. 당시 나는 베르테르를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저 줄거리를 따라갔을 뿐이었다. 젊은이의 과도한 열정, 성취되지 못한 사랑, 그리고 극단적 선택. 그것들은 내게 문학사의 한 페이지로만 존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표지부터 나를 붙잡았다. 무릎 꿇은 베르테르의 모습, 그리고 롯테의 손길. 흑백의 절제된 선들이 만들어낸 그 장면은 어떤 설명보다 강렬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런 것일까. 이제 나는 안다. 사랑이란 언제나 완전할 수 없고,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지를. 표지를 한참 들여다보다 문득 깨달았다. 이 책을 다시 읽는다는 건, 단지 옛 이야기를 복습하는 게 아니라, 내 안의 변화된 시간을 마주하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베르테르의 편지는 고백이자 기록이다. 그는 친구 빌헬름에게 쓴다. 자신이 만난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연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그리고 롯테라는 존재가 얼마나 빛나는지를. 그의 문장은 때로 과장되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세상을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순수함이 담겨 있다. "나는 지금 기쁘고 행복하다"라는 문장 뒤에 숨은 불안을 이제야 본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 너무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좋은 기록자가 되기는 힘들다"고 말한 것이다. 행복이 넘칠수록 그것을 언어로 담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베르테르는 그걸 알면서도 계속 썼다. 편지는 그의 유일한 출구였으니까? 내지의 일러스트는 이 지점을 정확히 포착한다. 세밀한 펜선으로 그려진 베르테르의 얼굴엔 기쁨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그림자가 깊게 드리운 눈가, 살짝 떨리는 듯한 입가의 선. 그것은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감정의 미세한 떨림들이다. 롯테를 처음 만난 장면의 삽화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그녀의 모습, 그 주변을 감싸는 부드러운 명암. 베르테르가 그녀를 "천사"라고 부른 건 단순한 과장이 아니었다. 그에게 롯테는 이 세계가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증거였다.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 베르테르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는 롯테의 눈빛에서, 대화에서, 침묵에서조차 자신을 향한 애정을 읽어낸다. 그리고 그 순간, 스스로를 "신처럼 경배"하게 된다. 대학생 때의 나는 이 대목에서 베르테르를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착각에 빠진 젊은이의 망상쯤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해석의 예술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상대의 작은 신호들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읽으려 한다. 베르테르가 특별히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된다. 롯테는 분명히 베르테르를 아꼈다. 그러나 그녀의 애정은 약혼자 알베르트를 향한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베르테르는 그 차이를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아니, 알 수 없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흐릿해지니까... 일러스트 속 롯테의 표정은 복잡하다. 베르테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엔 연민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다. 그녀 역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거절해야 하지만 상처 주고 싶지 않은, 멀어져야 하지만 완전히 놓을 수 없는 그 마음. 흑백의 선들은 그녀의 내면도 섬세하게 담아낸다.
알베르트와 롯테가 결혼했다는 소식. 베르테르는 예상했던 일이라며 담담하게 반응한다. 심지어 축복의 말까지 건넨다. 하지만 그의 편지는 곧 균열을 드러낸다. 롯테의 초상화를 치우려 했지만 치우지 못했다는 고백, 자신이 그녀 마음속 "두 번째 자리"에 있다는 위안이다. "두 번째 자리". 이 표현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이제야 느껴진다. 베르테르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롯테 곁에 머물 수 있다면, 비록 주변부라 해도 괜찮다고.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두 번째가 되는 건 결코 견딜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만약 그녀가 나를 잊을 수 있다면…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미쳐버릴 것이다." 이 문장 앞에서 나는 한참을 멈춰 섰다. 베르테르가 두려워한 건 롯테를 잃는 게 아니라, 롯테의 기억에서조차 지워지는 것이었다. 존재의 완전한 소멸. 그것이야말로 그가 견딜 수 없는 진짜 죽음이었다. 일러스트는 이 고독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홀로 창가에 서 있는 베르테르, 그의 뒷모습만이 그려져 있다. 창밖은 텅 빈 여백으로 남겨졌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그 공간이 오히려 더 많은 걸 말해준다. 그에게 세상은 이미 텅 비어버렸다는 것을...
"이것이 마지막 아침이다." 베르테르의 마지막 편지는 고요하다. 절규하지 않는다. 다만 담담하게 자신의 상태를 기록한다. "나는 '마지막'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나는 온전히 살아 있건만." 이 역설. 살아 있으되 끝을 맞이하는 것. 베르테르는 자신의 선택을 죽음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존재로 받아들이려 한 것은 아닐까. 그에게 롯테 없는 삶은 이미 삶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육체의 소멸은 단지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대학생 때 나는 이 결말을 비판적으로 읽었다. 낭만주의 시대의 과도한 감상주의, 개인의 나약함, 사회적 책임의 회피. 그런 단어들로 베르테르의 선택을 분석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판단하기보다는, 그저 그의 고통이 얼마나 깊었을지 헤아려본다. 마지막 장면의 일러스트는 말이 없다. 쓰러진 베르테르, 그 곁에 떨어진 권총, 그리고 펼쳐진 책. 모든 게 고요하다. 흑백의 농담은 생과 사의 경계를 지운다. 이 정적 속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책을 서가에 꽂으며 생각한다. 언젠가 또다시 이 책을 펼치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또 어떻게 변해 있을까. 베르테르는 그때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고통을 겪고 있겠지. 그리고 나는 또 다른 눈으로 그를 바라보겠지. 그것이 고전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일 것이다. 변하지 않는 텍스트와 변해가는 독자 사이의 끝없는 대화. 이번 대화는 흑백의 선들과 함께였다. 음번엔 어떤 형태로 베르테르를 만나게 될까. 지금은 다만, 이 만남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