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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월든 - 정여울이 직접 걷고, 느끼고, 만난 소로의 지혜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해냄 / 2025년 10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새벽 다섯시 반, 알람이 울린다. 눈을 뜨자마자 손은 스마트폰을 찾고, 화면 속에서 쏟아지는 알림들이 아직 채 깨지 않은 의식을 재촉한다. 출근 준비를 하며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나열하고, 지하철 안에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고, 듣고, 확인한다. 하루가 지나고 나면 무엇을 했는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피곤하다는 것, 뭔가에 쫓기듯 살았다는 것만 남는다. 이것이 내가 원했던 삶이었을까? 문득 그런 질문이 가슴 한쪽을 무겁게 짓누르는 순간들이 있다. 정여울 작가의 <다시 만난 월든>을 펼친 것은 그런 날이었다. 책장을 넘기며 소로의 문장을 따라가는 동안,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삶이 아닌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소로의 이 한 문장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 것 같은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출근해서 퇴근하고, 주말이 되면 밀린 잠을 자고, 월요일이 되면 다시 같은 루틴이 반복된다. 그 사이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 작가는 소로가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지은 이유를 '뒤집지 않은 카드'를 끝내 뒤집어보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바쁘다는 이유로, 생존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로 외면했던 진짜 나 자신의 모습. 그 카드는 내 삶 어딘가에도 뒤집히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 '해야 한다'는 말에 익숙해졌을까.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 하고, 적당한 나이에 결혼을 해야 하고, 내 집을 마련해야 하고. 그 수많은 '해야 함'의 무게 아래에서 정작 '하고 싶은 것'은 점점 작아져갔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소로는 숲속에서 단 하나의 진실을 향해 나아갔다. 그것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었다. 그저 삶의 본질에 가까운 곳에서, 가장 간결하게, 가장 깨어 있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었다. 작가가 말하는 '뼈에 가까운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리라.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나면 남는 것, 그것이 진짜 내 삶의 뼈대다.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와닿았던 것은 고독에 대한 해석이었다.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주말에 혼자 집에 있으면 왠지 외롭고 쓸쓸한 사람 같고, 혼자 밥을 먹으면 뭔가 결핍된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끊임없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으려 한다. 메신저 알림이 오지 않으면 불안하고, SNS에 올린 게시물에 반응이 없으면 무시당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정여울 작가는 고독을 '소외'가 아닌 '창조의 원천'으로 해석한다. 진정한 거리는 배제가 아니라 연결을 위한 여백이라고. 이 문장을 읽을 때, 혼자 있는 시간에 느끼던 죄책감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혼자 있는 것이 나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간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나 자신이 있었다. 소로에게는 세 개의 의자가 있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 하나는 우정을 위한 것, 또 하나는 교제를 위한 것. 나는 나를 위한 의자를 가지고 있었던가. 늘 누군가를 위한 자리만 마련하느라, 정작 나 자신이 온전히 앉을 자리는 없었던 것은 아닐까. 저자는 '월든 존'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사회적 시선과 감정노동에서 잠시 벗어나,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내면의 공간. 그것은 거창한 어딘가가 아니어도 좋다. 카페 한켠, 새벽의 산책길, 텅 빈 지하철 좌석에서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곳이 나만의 월든이 될 수 있다. 나는 나만의 월든 존을 찾기 시작했다. 출근길에 일부러 한 정거장 일찍 내려서 천천히 걷는 시간,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작은 공원을 산책하는 시간. 그 짧은 순간들이 하루의 색깔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걸으며 머릿속을 맴돌던 잡념들이 조금씩 가라앉고, 바람의 감촉과 나뭇잎의 움직임이 내 감각을 일깨웠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비로소 숨을 쉬고 있었다. 업무를 처리하고 메시지에 답하고 미팅에 참석하는 동안 나는 숨을 참고 있었던 것 같다. 월든 존은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책을 덮으며 깨달았다. 월든은 어딘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월든은 바로 내 안에 있었다. 소로가 호숫가에 오두막을 지었듯, 나도 내 마음속에 작은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그곳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영역이다.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나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타인의 기대와 사회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곳이다. 정여울 작가는 소로를 통해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지혜를 전한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내려놓는 것,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속도를 찾는 것, 더 많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연결을 경험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무엇을 더 가져야 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놓아야 평온해지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성공의 기준도 달라졌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만족하는 삶이 진짜 성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여전히 조급해질 때가 있고, 남과 비교하며 초라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때마다 나만의 월든으로 돌아갈 수 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시 나만의 속도로 걸어갈 수 있다.
삶이 버거운 시대다. 팬데믹 이후 세상은 더 빠르게 변하고, 불확실성은 커졌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월든이 필요하다. 변하지 않는 것들, 본질적인 것들로 돌아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소로는 150년 전에 살았지만, 그의 지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소로의 메시지가 더욱 절실한 시대인지 모른다. 간결하게 살 것, 깨어 있을 것,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 이 단순하지만 깊은 진리가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침반이 되어준다. 아침에 커피를 내리며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 점심시간에 공원을 걷는 순간, 저녁에 책을 읽으며 고요 속에 머무는 순간. 그 모든 순간이 나의 월든이다. 그리고 그 월든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