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말의 숲을 거닐다 - 다채로운 말로 엮은, 어휘 산책집
권정희 지음 / 리프레시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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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하나하나에 이름이 있듯, 우리 삶의 순간들에도 각각의 이름이 있다. 그 이름들을 알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진정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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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말의 숲을 거닐다 - 다채로운 말로 엮은, 어휘 산책집
권정희 지음 / 리프레시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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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을 넘기다 '는개'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나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비도 아니고 안개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무는 날씨. 우산을 쓰기엔 애매하고 그냥 맞고 가기엔 불편한 그 순간들을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표현해왔던가. "날씨가 좀 그렇네" 같은 얼버무림으로만 말해왔던 것은 아닐까. '는개' 는 안개비보다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아주 잔잔한 비를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이라고 한다. 충경... 언어의 빈곤함은 삶의 빈곤함과 닿아 있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인식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섬세하게 느끼는가는 결국 우리가 얼마나 많은 언어를 가지고 있는가와 연결된다. 책이 소중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어휘를 나열하는 대신, 각각의 단어가 품고 있는 이야기와 감정의 결을 함께 전한다. '윤슬'이라는 단어를 알기 전, 나는 한강 다리 위에서 반짝이는 물결을 보며 "물이 예쁘네"라고만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햇빛이 수면에 부서져 반짝이는 그 찰나의 아름다움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줄 수 있다. 이름을 아는 순간, 그 풍경은 더 이상 무심히 지나치는 배경이 아니라 내 삶의 한 장면으로 각인된다.

책의 2부에서 다루는 관계의 언어들은 특히 인상적이다. '미쁘다'는 단어를 읽으며, 나는 문득 내가 누군가를 신뢰한다고 말할 때 쓰던 표현들을 떠올렸다. "믿을 만해", "괜찮은 사람이야" 같은 말들. 그런데 '미쁘다'는 단순한 신뢰를 넘어서,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든든하고 믿음직하다는 깊은 뉘앙스를 담고 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무게감이 실려 있다. 현대인들은 점점 더 빠르고 간결한 소통을 추구한다. 이모티콘 하나로, 줄임말 하나로 감정을 표현한다.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감정의 층위를 잃어버린다. '좋아'와 '사랑해'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단계가 존재하는가. '지궁스럽다'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자리한,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정성스러운 마음을 일컫는다. 이런 단어를 알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더 정확하게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다.

3부의 사랑과 이별에 관한 어휘들을 읽으며, 나는 과거의 관계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꽃잠'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 '모스 솔라'가 담고 있는 영원의 약속. 이런 표현들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에 품격을 더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너무 쉽게 이별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감정들을 정확하고 섬세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어떨까. 사랑을 고백할 때, 이별을 말할 때, 우리가 가진 언어의 깊이만큼 그 순간들도 깊어질 수 있지 않을까. 저자가 말하는 '햇귀'를 생각한다. 긴 밤을 지나 서서히 밝아오는 새벽의 빛. 인생에도 이런 순간들이 있다. 어둠이 끝나고 희망이 찾아오는 그 경계. 그 순간을 표현할 언어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더 견딜 수 있고 조금 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책의 가장 큰 위안은 언어를 경쟁의 도구가 아닌 기쁨의 원천으로 되돌려놓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묻는다. "말을 할 때 행복한가요?" 우리는 언제부터 말을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말하는 행위 자체의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잡박하다'는 단어를 배우면서, 나는 내 머릿속 상태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질서 없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그 느낌. 이렇게 내 상태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카타르시스를 준다. 표현되지 않던 것이 표현되는 순간,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 '집알이'라는 우리말이 있다는 것도 신선한 발견이었다. 임장이라는 딱딱한 한자어 대신 쓸 수 있는 정겨운 표현. 이런 단어들을 알아갈수록, 우리말이 얼마나 풍부하고 아름다운지 새삼 깨닫게 된다.

언어는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이자,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열쇠다. 우리가 아는 단어가 많아질수록,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도 넓어진다. '푼더분하다'는 단어를 알면, 둥글고 넉넉한 사람의 모습을 더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윤슬'을 알면, 물결의 아름다움을 더 깊이 감상할 수 있다. 저자가 강조하듯, 이것은 남들보다 뛰어나 보이기 위한 과시가 아니다. 나 자신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고, 세상을 더 섬세하게 느끼기 위한 여정이다. 맞춤법을 틀리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감정과 생각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표현을 찾는 것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다짐해 본다. 오늘 하루 만나는 순간들에 이름을 붙여주겠다고. 무심히 지나칠 뻔한 풍경들을,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정확한 언어로 포착해내겠다고. 그렇게 하루하루 내 언어의 숲이 무성해지면, 내 삶도 그만큼 풍요로워질 것이다. 말의 숲을 거니는 일은 결국 삶의 숲을 거니는 일과 같다. 나무 하나하나에 이름이 있듯, 우리 삶의 순간들에도 각각의 이름이 있다. 그 이름들을 알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진정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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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말로 사랑할 시간 - 분열의 시대에 도착한 새 교황, 레오 14세
크리스토퍼 화이트 지음, 방종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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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2025년 5월 8일,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는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고,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은 숨죽이며 발코니에 나타날 새 교황을 기다렸다. 그리고 곧 발표된 이름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미국 시카고 출신의 로버트 프란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이 교황 레오 14세로 선출된 것이다. 미국인 교황의 탄생은 가톨릭교회 2천 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책은 바로 이 역사적 순간을 기록한 책이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마지막 날들부터 콘클라베 과정, 그리고 새로운 교황의 선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담아낸 저널리즘의 결과물이다.

저자는 교황청과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내밀한 대화와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달한다. 프레보스트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주교성성 장관으로 재직할 당시, 화이트는 그와 직접 만나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이러한 개인적 접촉은 책 전반에 걸쳐 깊이와 신뢰성을 더해준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재임 기간과 그의 주요 업적들을 다룬다. 화이트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혁명적인 변화들,시노드 방식의 도입, 이민자 문제에 대한 강력한 목소리, 기후 변화를 사회 정의의 문제로 재정립한 것 등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평가한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장 큰 성과가 "권력에 집중하는 교회에서 사목적 봉사에 집중하는 교회로의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이었다고 평가한다. 동시에 교황청 개혁에서의 실패나 저항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써, 성급한 성인 시성을 피하고 객관성을 유지한다. 중반부는 콘클라베 과정의 신비를 벗겨낸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마지막 순간들, 사망 선언, 성 베드로 광장에서의 반응을 거쳐, 고대의 비밀 유지 관행과 소셜 미디어 차단이 뒤섞인 콘클라베 과정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화이트는 역사적 맥락을 제공하면서도, 부상하는 유력 후보들과 무대 뒤의 대화들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책의 백미는 후반부인 3부다. 여기서 화이트는 프레보스트의 선출 과정과 그의 생애를 상세히 다룬다. 시카고 사우스 사이드에서 자란 어린 시절, 성소를 키워준 교회, 페루의 시골 교구에서의 사목 경험, 그리고 로마에서 주교들을 심사하는 역할까지, 레오 14세가 되기까지의 여정이 펼쳐진다.

교황 레오 14세를 이해하는 핵심은 그의 페루 경험에 있다. 화이트가 강조하듯, 프레보스트의 사목 방식은 페루의 시골 지역에서 형성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평신도들 및 지역 지도자들과의 협력 없이는 성공할 수 없었다. 이러한 협력적이고 참여적인 리더십 스타일은 그의 정체성의 핵심이 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프레보스트가 단순히 미국인 사제가 아니라, 국제적 경험을 쌓은 글로벌 사목자라는 사실이다. 페루와 미국을 오가며 그는 라틴 아메리카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발전시켰고, 이는 그를 미국 주교회의의 다른 주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인물로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이 국제적 시야가 그를 글로벌 교회의 지도자로 만든 자산이 되었다. 프레보스트가 교황 레오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역사적으로 레오라는 이름을 가진 교황들은 강력한 리더십과 개혁 정신으로 알려져 있다. 화이트는 이 선택에 담긴 의미를 추측하면서, 새 교황의 비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예수회 출신 첫 교황이었다면, 레오 14세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출신 첫 교황이다. 그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어머니 성 모니카에 대한 헌신은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 첫 발코니 등장에서 그는 추기경 서품 시 받은 십자가를 착용했는데, 이 십자가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모니카의 유물이 담겨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유산(내면의 성찰, 은총에 대한 강조, 공동체의 중요성)은 레오 14세의 교황직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화이트는 레오 14세를 "내성적이지만 결단력 있고, 협의를 중시하지만 비전이 명확한" 인물로 묘사한다.

책의 중심 질문 중 하나는 레오 14세가 프란치스코의 개혁 의제를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수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화이트는 역사적 유추를 활용한다. 레오 14세는 요한 바오로 2세의 뒤를 이은 베네딕토 16세처럼 전임자의 업적을 조용히,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게 이어가는 교황이 될 것인가? 아니면 요한 23세의 뒤를 이은 바오로 6세처럼 전임자의 원대한 비전을 실행하는 교황이 될 것인가? 저자는 신중하게도 단정적인 예측을 피한다. 대신 레오 14세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기만의 유형의 교황"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현명한 접근이다. 프레보스트 본인도 아직 자신이 어떤 교황이 될지 완전히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가지 단서는 있다. 여성들과 함께 대학원 공부를 했고, 평신도 권한 강화를 중시했던 사제. 어린 시절부터 성소가 분명했고, 협력적 리더십을 실천해온 목자. 화이트가 희망하듯, 레오 14세는 "정치적 혼란의 시대에 도덕적 목소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화이트의 책은 역사적 순간의 첫 기록이다. 이는 최종적인 평가가 아니라, 여정의 시작점에 대한 스냅샷이다. 교황 레오 14세가 어떤 교황이 될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여정을 이해하고 따라가는 데 필요한 맥락과 통찰을 제공한다. 가톨릭 신자이든 아니든, 미국인이든 아니든, 이 책은 21세기 가톨릭교회가 직면한 도전과 기회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출발점이다. 화이트의 균형 잡힌 저널리즘과 내부자적 시각은 복잡한 주제를 접근 가능하게 만든다. 책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명확하다. 어린 시절부터 성소가 분명했고, 여성들과 함께 배웠으며, 평신도 권한 강화로 특징지어진 사목을 펼친 교황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화이트가 희망하듯, 정치적 혼란의 시대에 레오 14세가 진정한 도덕적 목소리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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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갑니다 - 김주하 앵커가 단단한 목소리로 전하는 위로
김주하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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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김주하. 그 이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뉴스 화면 속 단정한 모습과 또렷한 발음이었다. 그런 그가 에세이를 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궁금했다. 카메라 앞에서 세상의 소식을 전하던 그 목소리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는 어떤 온도를 가질까. 그리고 무엇보다, 저 독특한 제목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서점에서 책을 처음 마주했을 때, 표지를 한참 들여다봤다. 하얀 빙판과 작은 생명체의 실루엣. 제목을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갑니다." 이상하게도 이 문장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위태로움과 고독함, 그리면서도 어딘가 아름다운 이미지. 결국 나는 그 이미지에 이끌려 책을 집어 들었다.

첫 장을 펼치는 순간부터 느꼈다. 이건 화려한 성공담이 아니구나. 김주하는 자신의 상처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목소리 때문에 낙방했던 이야기, 사랑과 결혼에 대한 환상이 산산조각 나던 순간, 아이와 나눈 절절한 대화들. 그 모든 것이 과장이나 미화 없이, 있는 그대로 적혀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그가 자신의 실패와 좌절을 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많은 유명인의 에세이가 결국 자기계발서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고통의 과정을 지나치게 축약하고 결과만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김주하는 무너지는 순간을 세밀하게 묘사했고, 그 과정에서 느낀 수치심과 절망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읽으면서 나는 여러 번 책을 덮고 창밖을 바라봤다. 어떤 문장들은 너무 아파서, 어떤 문장들은 너무 따뜻해서 잠시 숨을 고를 필요가 있었다. 그의 글은 위로하려는 의도로 쓰인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은 것뿐인데, 그 진정성이 역설적으로 깊은 위안이 되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이미지는 역시 제목에 담긴 그 장면이다. 겨울 한강, 단단하게 얼어붙은 강 위를 홀로 걸어가는 고양이. 김주하는 이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삶을,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의 삶을 은유한다. 얼음 위를 걷는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언제 금이 갈지, 언제 발이 빠질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고양이는 걷는다. 조심스럽지만 멈추지 않고, 외롭지만 앞으로 나아간다. 이 이미지가 주는 힘은 대단했다. 화려하거나 극적이지 않지만, 묵묵히 견디는 생명력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문득 내 주변 사람들을 떠올렸다. 직장에서 버티고 있는 동료, 육아로 지쳐 보이는 친구, SNS에는 웃는 얼굴만 올리지만 힘들어하는 지인들. 우리 모두 각자의 빙판 위를 걷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사실을 서로 모른 채, 혼자라고 생각하며 견디고 있는 건 아닐까.

김주하가 이 책에서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개인의 아픔이 어떻게 사회적 연대로 이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립준비청년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는 흔히 상처를 극복의 대상으로만 본다. 빨리 치유하고, 잊고, 다시 일어서야 할 무언가로. 하지만 김주하는 다른 제안을 한다. 상처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것을 연대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물론 이것이 상처를 미화하자는 말은 아니다. 아픔은 여전히 아프고, 힘든 시간은 여전히 힘들다. 다만 그 경험이 나만의 것으로 끝나지 않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 이 통찰이 책 전체를 관통하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책을 덮고 며칠이 지났지만, 한 질문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다. "당신은 오늘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했나요?" 김주하가 던진 이 물음은 단순하지만 강력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거창한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일상 속에서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고, 작은 친절을 실천할 기회를 찾으라고 말한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 힘들어 보이는 동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 혹은 그저 누군가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것. 책을 읽은 후 나는 조금 달라졌다. 길을 걸으며 사람들을 보는 눈이 달라졌고, 대화할 때 더 주의 깊게 듣게 되었다. 완전히 변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의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공명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혼자라는 느낌에 지친 사람들에게 책은 동행이 되어줄 것이다. 반짝이는 성공담이 아니라 진짜 삶의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울림을 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상처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것이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친구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사회에 발을 딛고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그러면서도 때때로 무너지는 우리들. 책은 우리에게 말한다. 괜찮다고, 당신만 그런 게 아니라고, 그리고 함께 걸어갈 수 있다고.

얼어붙은 한강 위를 걷는 고양이의 이미지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위태롭지만 아름답고, 외롭지만 당당한 그 모습.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초상이 아닐까. 책은 거창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상처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작은 용기들이 모여 누군가의 길이 된다는 것을 조용히 일깨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책장을 덮으며 나는 생각했다. 오늘 나는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 발밑의 얼음은 지금 얼마나 단단할까. 질문은 계속될 것이고, 나는 오늘도 한 걸음씩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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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마주하면 길이 보인다 - 내 삶을 가로막는 핵심 감정에서 벗어나 온전한 나로 사는 법
문요한 지음 / 서스테인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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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느 날 문득, 별일도 아닌데 가슴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의 무심한 말 한마디가 하루 종일 마음을 짓누르거나, 혼자 있는 밤이면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오는 순간들이다. 우리는 흔히 이런 감정들을 '그냥 그런 날'이라고 치부하며 지나친다. 하지만 이번에 읽은 문요한님의 저서 <감정을 마주하면 길이 보인다>는 이러한 반복되는 감정의 무너짐 뒤에 더 깊은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특별한 종류의 감정이 자리하고 있다. 저자는 이것을 '핵심 감정'이라 부른다. 이는 기분이 나쁜 상태를 넘어서, 우리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 자체를 결정짓는 힘을 가진 감정이다. 마치 화산 아래 잠든 마그마처럼, 평소에는 조용히 있다가 특정한 순간이 오면 격렬하게 분출하여 우리 삶을 흔들어놓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 핵심 감정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건강한 감정 상태에서는 서운한 일이 있으면 서운함을 느끼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그 감정이 흘러간다. 하지만 핵심 감정에 지배받는 사람들은 다르다.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거나, 작은 실수 하나에 자신을 형편없는 인간이라 단정 짓는다. 현재의 사건이 문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굳어진 감정 패턴이 자동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핵심 감정의 주요 유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째는 근본적 불안이다. "언제든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둘째는 울분으로, 겉으로는 차분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억눌린 분노가 끓고 있는 상태다. 셋째는 만성적 공허감이다.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쇼핑을 하고, SNS를 끊임없이 확인하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구멍이 있다. 넷째는 무력감으로,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다. 마지막으로 원초적 수치심은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가장 깊은 고통이다. 이러한 감정들은 과거의 특정 순간에서 시작되었지만, 현재까지도 우리 삶의 중심을 차지하며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우리가 맺는 관계의 패턴, 선택하는 길, 심지어 우리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모두 이 핵심 감정의 영향 아래 있다.

그렇다면 이 핵심 감정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감정적 방치'를 주요 원인으로 지목한다. 신체적 학대나 폭력보다 훨씬 미묘하고 흔하지만, 그만큼 오래 지속되는 상처다. "울지 마", "그 정도로 힘들다고 하면 안 돼", "예민하게 굴지 마"와 같은 말들이 반복될 때,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법을 배운다. 부모가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려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부모 자신도 감정을 억압하는 문화에서 자랐기에, 아이의 감정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뿐이다. 문제는 감정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알 수 없는 공허함과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느낌, 마치 내 삶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 속에서 말이다.

변화의 첫걸음은 자신을 오랫동안 괴롭혀온 감정의 정체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심리학자 다이애나 포샤는 이 순간을 '찰칵 경험'이라 명명했다. 오랫동안 잠긴 방문에 딱 맞는 열쇠가 맞물리는 느낌이다. 상담 현장에서 사람들은 종종 이런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한다. "아, 이게 불안이었구나", "내가 느낀 건 공허감이었어", "나는 무기력한 게 아니라 수치심 때문에 그랬던 거야". 그 순간 뭔가 달라진다. 막막하기만 하던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것의 정체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핵심 감정을 자신의 본질로 착각한다. "나는 원래 무기력한 사람이야", "나는 쓸모없어"라고 자신을 규정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착각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형편없다고 생각하며 나온 사람은 없다. 이러한 부정적 정체성은 본질이 아니라 상처가 굳어진 것이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이런 감정을 품고 자란 사람들은 그 상처가 마치 자신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자기답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핵심 감정이 정체성을 이루고 성격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기력하지 않았던 시간도, 의욕을 가지고 무언가를 시도했던 순간도 분명 있었다. 그 순간의 당신도 당신이다.

핵심 감정을 해소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회복의 자원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다. 자기연민과 자기돌봄 없이 상처를 마주하면 오히려 다시 상처받을 수 있다. 안전한 심리적 공간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 두 번째는 몸의 감각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감정은 생각보다 먼저 몸으로 온다. 가슴의 답답함, 어깨의 긴장, 목의 뜨거움 등 몸은 언제나 감정의 첫 번째 증언자다. 세 번째는 억눌렀던 핵심 감정을 다시 경험하고 처리하는 것이다. 그 감정이 하고 싶었던 말을 들어준다. "감정은 감정으로 치유된다"는 저자의 말처럼, 회피하지 않고 온전히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반응 패턴을 구축한다. 핵심 감정이 올라올 때 예전과 다르게 반응하는 법을 연습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핵심 감정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에너지로 전환된다.

나는 늘 생각으로 삶을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우리 삶을 진짜로 결정짓는 것은 생각보다 더 빠르고 선명한 감정이다. 잘 느끼지 못하면 잘 살아갈 수 없다. 감정을 회피하면 미래를 잃는다. 감정을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때로는 숨이 멎을 것처럼 아프다. 하지만 그 고비를 넘어선 자리에 우리가 오래도록 찾던 삶의 방향이 기다린다. 빛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 빛은 감정의 어둠을 통과하며 우리 안에서 켜진다. 이것이 문요한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마음속 가시를 뽑아낼 용기를 가질 때, 삶은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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