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마음 공부 - 소란과 번뇌를 다스려줄 2500년 도덕경의 문장들
장석주 지음 / 윌마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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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전화를 확인한다. 밤사이 쌓인 알림을 지우고, 뉴스피드를 스크롤하며, 놓친 메시지가 없는지 살핀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점심시간에도, 잠들기 직전까지 우리는 무언가를 소비한다. 정보를, 이미지를, 타인의 삶을. 손에서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순간조차 불안하다.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남들은 앞서가고 있는데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닐까? 이것은 기술 중독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불안의 구조다. 더 많이 배워야 하고, 더 많이 경험해야 하며, 더 많은 관계를 맺고,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 그 강박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자신 안에 쑤셔 넣는다. 마치 빈 공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문제는 이 채움의 욕구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아무리 많이 이뤄도 만족이 오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결핍감만 커진다. SNS에서 타인의 화려한 일상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새로운 자기계발서를 사들이며 변화를 다짐하지만, 결국 또다시 소진되고 만다. 이 끝없는 순환 속에서 우리는 정작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노자가 2500년 전에 했던 말이 지금처럼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채우려 하지 말고 비우라고 했다. 더 많이 소유하려 들지 말고, 덜어내라고 했다. 그것이 역설적으로 진정한 충만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이다.

비움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물건을 버리고 미니멀한 공간을 만드는 것일까. 물론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노자가 말하는 비움은 더 근본적인 차원의 것이다. 그것은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는 일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원한다. 더 나은 직장, 더 높은 연봉, 더 넓은 집, 더 많은 인정. 그 욕망들이 겹겹이 쌓여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하나를 이루면 또 다른 목표가 생기고, 그것을 위해 또다시 자신을 채찍질한다. 이 과정에서 현재의 순간은 사라진다. 늘 미래의 어떤 성취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고, 지금 이 자리의 작은 행복들을 놓친다. 비움은 바로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출구다. 욕망의 고삐를 잠시 늦추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 사회가 성공이라고 규정하는 것들을 맹목적으로 쫓기보다, 내 안의 진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소음을 줄여야 한다. 비움은 소극적인 포기가 아니라 적극적인 선택이다.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곧 무엇을 지킬 것인가를 명확히 하는 일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다. 의미 없는 약속들을 줄일 때 진짜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이 생긴다. 쓸데없는 걱정을 내려놓을 때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 여백이 생긴다는 것은 숨을 쉴 공간이 생긴다는 뜻이다. 빽빽하게 채워진 일정표는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질식시킨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을 때 대응할 여유가 없고, 무언가 새로운 것이 들어올 틈도 없다. 반면 여백이 있는 삶은 유연하다. 변화에 적응할 수 있고, 우연한 만남이나 영감이 찾아올 공간이 있다.

노자 철학의 핵심에는 무위자연이라는 개념이 있다. 억지로 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긴다는 뜻이다. 이것을 게으름이나 무책임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하게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애쓰지 않는다는 것은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현대인의 삶은 너무 많은 '함'으로 가득하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우리는 쉬지 못한다. 일하지 않는 시간조차 운동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자기계발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있으면 뒤처진다는 두려움이 우리를 몰아댄다. 하지만 자연을 보라. 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계절이 오면 자연스럽게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강물은 바다로 가기 위해 발버둥 치지 않는다. 자신의 흐름을 따라 낮은 곳으로 흘러가다 보면 어느새 바다에 이른다. 이것이 무위의 본질이다.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일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것이 수동적인 자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일은 하지만, 씨앗이 싹트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씨앗 자체의 생명력과 자연의 섭리에 맡겨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통제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집착을 내려놓는 것. 그것이 무위의 태도다. 이 지혜는 특히 관계에서 빛을 발한다. 우리는 종종 상대를 바꾸려 하고,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관계는 꼬이고 갈등이 생긴다. 반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변화를 강요하지 않을 때 오히려 자연스러운 변화가 일어난다. 내가 물러설 때 상대가 다가오고, 내가 요구를 멈출 때 상대가 스스로 움직인다.

과잉의 시대에 비움은 저항이다. 더 많이 가지라고, 더 많이 하라고, 더 빨리 달리라고 부추기는 세상에 대한 조용한 거부.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긍정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의 충만함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에 대한, 천천히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긍정이다. 노자의 가르침은 2500년 전 것이지만, 오늘 우리에게 더 절실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비움의 용기, 무위의 지혜, 약함 속의 강함. 이것들은 단순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태도다. 오늘 저녁, 잠들기 전에 한 가지만 비워보면 어떨까. 내일 해야 할 일에 대한 걱정, 남과의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욕망. 그중 하나만이라도. 그렇게 작은 비움에서 시작해, 조금씩 우리 삶에 여백을 만들어간다면. 그 여백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숨을 쉬고, 나 자신을 만나고, 진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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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함정
낸시 스텔라 지음, 정시윤 옮김 / 정민미디어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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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두려움을 안고 산다. 어두운 골목을 지날 때,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갈등 상황에서 두려움은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위험 앞에서 우리 뇌의 편도체가 활성화되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온몸이 긴장 상태로 전환된다. 이 모든 것은 생존을 위한 시스템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생존 메커니즘이 실제 위험이 없는 상황에서도 작동할 때 발생한다. 과거의 상처,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는 현재의 사소한 자극에도 동일한 반응을 촉발한다. 상사의 짧은 말투, 연인의 무심한 표정, 프로젝트의 작은 실수가 마치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때 우리는 두려움의 함정에 빠진다. 과거의 감정을 현재로 끌고 와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본래 가능했던 삶보다 훨씬 작은 그림자 속에서 움츠러든 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낸시 스텔라의 <두려움의 함정>은 바로 이 악순환을 직시하고 끊어내는 법을 다룬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두려움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뇌 과학에 기반한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명상과 신경과학을 결합하여, 우리가 두려움에 반응하는 방식 자체를 재훈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희망적인 동시에 혁명적인 제안이다.

우리 삶에는 무수히 많은 트리거가 존재한다. 어떤 이에게는 특정 향수 냄새가, 누군가에게는 목소리의 톤이, 또 다른 이에게는 실패라는 단어 자체가 강력한 트리거로 작용한다. 스텔라는 자신의 이혼 과정에서 전 남편의 향수 냄새를 맡았을 때, 변호사 옆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치 어린 소녀로 돌아간 듯한 무력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이는 트리거가 얼마나 강력하게 우리를 과거로 끌고 가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트리거가 작동하면 뇌는 순식간에 비상 모드로 전환된다. 전두엽과 편도체 사이의 연결이 차단되고, 이성적 사고는 뒤로 밀려난다. 우리는 싸우거나, 도망가거나, 얼어붙는다. 이 순간 우리가 보는 세상은 극도로 단순화된다. "항상 이래", "절대 안 돼", "좋거나 나쁘거나" 같은 흑백논리 속에 갇히게 된다. 다양한 관점을 볼 수 있는 능력,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여유는 사라진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반응이 관계를 파괴한다는 점이다. 거절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상대방의 작은 침묵도 버림받음의 신호로 받아들인다. 대립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진짜 감정을 숨기고 과잉순응하거나, 반대로 수동공격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새로운 시도 자체를 포기하고, 안전지대에 머물며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한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 우리는 점점 더 작아진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관계는 단절되며, 삶의 목표는 흐릿해진다. 두려움이 운전대를 잡은 인생은 방어와 회피로 점철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트리거를 가지고 있지만, 그 트리거의 지배를 받으며 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스텔라가 제안하는 '용기 있는 사고 프로세스(Courageous Brain Process)'는 여섯 단계로 구성된 체계적인 접근법이다. 이것은 단순한 긍정적 사고나 마음가짐의 변화가 아니다. 뇌의 신경 경로 자체를 재구성하는 과학적 방법론이다.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경험이 현재의 반응을 만들었는지 명확히 인식하는 작업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구체적인 트리거를 찾아낸다. 어떤 상황, 말투, 표정, 냄새가 나를 과거로 끌고 가는가? 세 번째는 자기 파괴적 패턴을 묘사하는 단계다. 트리거가 작동할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도망가는가, 공격하는가, 얼어붙는가? 네 번째 단계가 특히 흥미롭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일을 회피하려 하지만, 스텔라는 오히려 그것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상대방이 나를 떠나면 어떻게 되는가?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최악의 상황조차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설령 최악이 현실이 되더라도, 우리는 살아남는다. 다섯 번째 단계는 용기 있게 사고하는 것이다. 이는 트리거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대신, 의식적으로 다른 관점을 선택하는 연습이다. "이 상황이 과거의 상처를 건드렸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나는 어른이고, 이 상황을 다룰 능력이 있다"와 같은 새로운 사고방식을 훈련한다. 마지막 단계는 실제로 두려움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행동하고, 관계를 회복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다시 펼치는 과정이다. 이 프로세스의 핵심은 반복이다. 뇌는 반복에 반응한다. 한두 번의 시도로 오랫동안 굳어진 신경 경로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지속적인 연습을 통해 새로운 경로가 강화되고, 오래된 패턴은 점차 약해진다. 스텔라는 명상과 결합된 이 방법이 자신과 수많은 내담자들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켰다고 증언한다.

저자가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결국 '선택'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두려움에 지배당할지 말지는 선택할 수 있다. 트리거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트리거가 우리 삶을 조종하도록 내버려둘지는 우리가 결정한다. 변화는 쉽지 않다. 수십 년 동안 강화된 신경 경로를 바꾸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명상과 용기 있는 사고 프로세스를 반복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하지만 스텔라는 말한다. 더 나은 기분을 느낄 의지가 있다면,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변화할 힘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책은 실천서다. 독자가 자신의 무의식적 반응을 이해하고, 트라우마와 현재를 분리하며, 관계의 건강함을 회복하고, 자기수용의 힘을 키울 수 있도록 구체적인 도구를 제공한다. 15분의 명상, 여섯 단계의 프로세스,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모두 실제 삶에서 적용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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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든 도쿄 여행지도 2026-2027 - 도쿄·요코하마·가와고에·사와라·가마쿠라·에노시마·하코네·가와구치코 에이든 가이드북 & 여행지도
타블라라사 편집부 외 지음 / 타블라라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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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유난히 오래 기다린 계절이다. 계절의 끝자락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한숨 돌릴 시간을 찾다 보니 문득 떠오른 도시가 있었다. 수없이 스쳐 지나갔던 영상들, 친구들의 이야기, 그리고 지난 여행에서 잠시 머물렀던 풍경들이 한꺼번에 떠오른 곳. 도쿄였다. 하지만 도쿄는 한 번만 다녀오기엔 너무 넓었고, 한 번 다녀왔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디부터 어떻게 다시 걸어야 할지,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망설일 뿐이었다. 이번에 받은 책상 위에 놓인 한 장의 낯선 지도가 눈길을 끌었다. 종이를 펼치는 순간, 낯익은 이름들과 동시에 처음 보는 공간들이 나를 향해 손짓하는 듯했다. 종이 위의 도시가 갑자기 살아 숨 쉬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에이든 도쿄 여행지도 개정판이었다. 그 지도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단지 종이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 도시 전체를 손으로 정성스럽게 정리해 놓은 듯한 밀도 때문이었다. 디지털 화면 안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온도였다. 나는 그날, 크리스마스의 도쿄가 어떻게 나의 휴일을 채울지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도쿄는 도시의 크기를 숫자로 설명할 수는 있어도, 한눈에 그 크기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전철 노선만 해도 촘촘하게 얽혀 있고, 지역마다 너무나 다른 개성을 품고 있다. 예전에는 스마트폰 지도로 이곳저곳을 확대했다 축소했다 반복하며 전체 지형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방식은 늘 어딘가 부족했다. 도시의 전체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동선을 계획하는 데도 시간이 끝없이 길어졌다. 하지만 에이든의 지도는 다르게 다가왔다. 한 장을 펼쳐 들자마자 신주쿠와 시부야가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아사쿠사에서 요코하마까지의 감각적 거리감이 어느 정도인지, 기계적인 정보가 아니라 눈으로 처음 도시를 ‘감각’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한눈에 도시를 이해한다는 건 편리함 이상의 경험이었다. 도쿄라는 혼잡한 대도시가 갑자기 조용한 풍경처럼 나를 맞이했다. “여기부터 걸어가도 괜찮아.” 도시는 지도 속에서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관광이 아니라 도시에 머무는 경험을 원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의 불빛이 켜진 시부야의 밤거리, 하라주쿠의 골목을 따라 걸으며 들리는 웃음소리, 로폰기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겨울 하늘까지. 이 모든 풍경을 어떻게 채울지, 막연하기만 하던 그림이 지도 위에서 하나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특히 지도 곳곳에 적혀 있는 여행지의 특징, 소소한 설명, 먹거리 정보는 마치 오래된 여행 동반자가 내게 귀띔하듯 다가왔다. “이곳이 유명하다”라고 알려주는 정보가 아니라, “여기를 지나면 이런 매력이 있다”고 속삭여 주는 듯한 문장들이다. 이 작은 문장들이 여행의 감정을 조금씩 덧칠해주었다. 계획을 세우는 시간이 이렇게 감성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스마트폰은 분명 편리하다. 하지만 여행지에 도착하면 늘 배터리를 걱정해야 하고, 화면을 확대하는 동안 길을 놓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마트폰 속 지도는 ‘순간’에만 집중할 뿐, 전체 여정을 연결하는 감각을 주지 못한다. 반면 에이든 지도는 종이 한 장만 가지고 있어도 도시를 잃어버릴 걱정이 없게 만들었다. 찢어지지 않는 재질, 물방울이 떨어져도 스며들지 않는 표면, 그리고 접었다 펼쳤다 해도 모양이 크게 변하지 않는 안정감. 마치 함께 길을 걸어주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행에서 가끔은 낯선 곳에서 길을 잃어보는 것도 추억이 되지만, 그 길을 잃는 순간조차 나를 불안에 빠뜨리지 않게 해주는 ‘동반자’ 같은 지도는 드물다. 이번 크리스마스 여행에서는 이 지도가 그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지도 안에는 작은 ‘트래블 노트’도 들어 있었다. 가볼 곳을 체크하고, 마음에 드는 장소 옆에 스티커를 붙여두는 일은 생각보다 따뜻한 작업이었다. 마치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손으로 직접 편지를 쓰던 느낌처럼. 나는 스티커 한 장을 붙일 때마다 마음속에 작은 설렘이 쌓여갔다.

“여기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어.”

“여기에서 해 질 녘까지 머물러 보고 싶어.”

이런 잔잔한 욕구들이 노트 위에서 형태가 되어갔다. 여행을 계획한다는 건 사실,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내가 원하는 시간, 보고 싶은 풍경, 느끼고 싶은 감정을 찾아가는 과정. 그 과정에 지도는 단지 도구가 아니라, 내 욕구와 감정을 정리하는 작은 캔버스가 되어주었다.

도쿄는 점들이 아니라 흐름으로 기억되는 도시다. 점만 찍어두면 늘 시간이 모자라고, 한두 곳만 보고 나면 너무 피곤해져 다음 일정을 취소하고 만다. 하지만 지도를 보며 흐름을 그리니, 여행의 형태가 부드럽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지도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이 도시의 리듬은 네 리듬과 같아질 수 있으니까.” 그 문장이 내 마음에 새겨진 순간, 이번 크리스마스의 도쿄 여행은 단순한 일정이 아닌 작은 여유의 선언이 되었다. 여행이란 결국 어디에 가느냐보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도쿄로 떠나는 나는, 그저 ‘관광객’이 아니라 도시의 결을 천천히 느끼고 싶은 사람이다. 지도는 그런 나에게 가장 정확한 출발점이 되어주었다. 수많은 여행 프로그램과 리뷰, 영상들이 알려주지 못한 ‘도시 전체의 숨결’을 한눈에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지도를 단순한 정보의 집합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이 지도는 나에게 도시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감각을 건네준 선물이다. 마치 크리스마스 아침, 포장지를 벗기며 설렘을 품는 순간처럼 말이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의 도쿄를 걸을 것이다. 눈이 내릴지, 바람이 차가울지, 도시의 불빛이 얼마나 반짝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히 아는 건 단 하나. 내 손안에는 언제든 펼칠 수 있는 도시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종이를 ‘지도’라고 부르는 대신 아마 여행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기억을 품은 기록물처럼 보관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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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 프로젝트 - 15주 운동 프로그램으로 몸과 마음을 단단하게 만드는
김민철 외 지음 / 성안당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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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으레 다이어리 첫 페이지에 '운동하기'라는 목표를 적어 넣는다. 헬스장 등록증을 끊고, 운동화 끈을 조이며, 이번에 야말로 달라질 것이라 다짐한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다시 소파에 앉아 과자 봉지를 뜯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일까, 아니면 방법의 문제일까? 건강한 몸을 갖기 위한 수많은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다. 유튜브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운동 영상이 있고, 인스타그램에는 완벽한 몸매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정보가 많을수록 우리는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떤 운동이 나에게 맞는지, 이 자세가 정확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압도당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

이번에 읽은 <단단 프로젝트>가 특별한 이유는 운동 동작을 알려주기 전에 마음을 다스리는 법부터 가르친다는 점이다. 이것은 매우 현명한 접근이다. 아무리 완벽한 운동 프로그램이 있어도 그것을 지속할 내면의 힘이 없다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시작조차 하지 못한다. '어차피 또 포기할 텐데'라는 자기 예언이 실제 행동을 막아버린다. 하지만 작심삼일도 열 번 반복하면 한 달이다. 중요한 것은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 후에도 다시 시작하는 용기다. 완벽함이라는 환상을 내려놓고, 불완전하지만 지속 가능한 노력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변화의 시작이다. To Do List를 작성하는 것도 강력한 도구다. 막연한 '운동 해야지'라는 생각을 '오늘 저녁 7시에 플랭크1분 하기'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바꾸는 순간, 실천 가능성은 급격히 높아진다. 이러한 작은 성공 경험들이 쌓여 자신감이 되고, 자신감은 또 다른 도전의 발판이 된다.

운동을 할 때 '왜'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다. 누군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것과, 이 동작이 내 몸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이해하면서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근육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체중 관리의 원리는 무엇인지, 올바른 자세가 왜 중요한지를 아는 것은 운동에 대한 동기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이다. 프랭크 자세를 유지하며 온몸이 떨릴 때, 이것이 코어 근육을 강화하여 허리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조금 더 버틸 수 있다. 땀을 흘리며 힘들어할 때, 이 순간 내 몸속에서 근섬유가 재생되고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고통도 의미 있게 느껴진다. OX 퀴즈 형식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딱딱한 이론서가 아니라 흥미롭게 배울 수 있고, 잘못 알고 있던 상식을 바로잡을 수도 있다. 건강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정확한 지식을 갖추는 것은 스스로를 지키는 힘이 된다. 이론을 아무리 많이 안다 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많은 사람이 좌절한다.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60가지의 운동 프로그램을 15주에 걸쳐 체계적으로 배치한 것은 이러한 고민을 해결해준다. 초보자도 무리없이 시작할 수 있는 쉬운 동작부터 점진적으로 난이도를 높여가는 구성은 몸이 적응할 시간을 준다. 갑자기 고강도 운동을 하다가 다치거나 지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내 몸의 한계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QR 코드를 통한 영상 제공은 특히 유용하다. 사진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동작의 흐름, 호흡법, 시선 처리 같은 디테일을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마치 개인 트레이너가 옆에서 시범을 보여주는 것 같은 효과다. 잘못된 자세로 운동하면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부상 위험도 있기에, 정확한 자세를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준비운동의 중요성도 빼놓을 수 없다. 많은 사람이 귀찮다는 이유로 준비운동을 생략하지만, 이는 매우 위험한 선택이다. 차가운 근육을 갑자기 사용하면 부상 위험 이 높아진다. 몇 분의 준비운동이 한 달의 회복 기간을 막아준다고 생각하면, 이를 생략할 이유가 없다.

운동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자신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체크리스트는 강력한 동기부여 도구 다. 매일 체크 표시를 하나씩 채워가는 것만으로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일주일, 한 달, 석 달이 지나 체크 표시로 가득 찬 페이지를 보면, 내가 정말 해냈구나'라는 자부심이 생긴다. 복잡한 운동 일지를 작성하라고 하면 그것 자체가 부담이 되어 지속하기 어렵다. 하지만 간단한 체크 표시만으로 기록을 남길 수 있다면, 심리적 장벽이 훨씬 낮아진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기록이 아니라, 꾸준한 실천과 그 흔적을 남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때로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천천히 일어난다. 매일 거울을 보는 우리는 자신의 변화를 잘 인지 하지 못한다. 하지만 기록을 돌아보면 분명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는 30초도 버티기 힘들었던 플랭크를 이제 1분 넘게 할 수 있다는 것, 처음에는 5개도 힘들었던 스쿼트를 이제 20개씩 한다는 것. 이런 작은 진보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든다.

운동을 하다 보면 몸뿐 아니라 마음도 변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힘든 운동을 해내는 과정에서 인내심을 배우고, 어제의 나보다 나 아진 오늘의 나를 발견하며 자존감이 높아진다. 규칙적인 운동은 생활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일찍 일어나게 되고, 식습관이 개선되고, 시간 관리 능력이 향상된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은 진리다. 몸이 건강해지면 마음도 건강해진다. 반대로 마음이 건강해지면 몸을 돌볼 여유와 의지가 생긴다.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선순환 고리를 이룬다. 15주는 약 100일이다. 습관이 형성되는 데 필요한 시간으로 흔히 21일을 이야기하지만, 진정으로 몸에 배어 자동화되려면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하다. 15주는 운동이 특별한 노력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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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심서 - 21세기 시선으로 읽는 동양고전
박찬근 지음 / 청년정신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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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을 덮으며 문득 생각했다. 2천년 전 난세를 살았던 한 전략가의 통찰이 왜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가. 인공지능이 일상을 바꾸고, 조직의 형태가 급변하며,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이 시대에, 삼국시대 촉한의 승상이 남긴 글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리더가 맞닥뜨리는 본질적 고민인 신뢰를 어떻게 쌓을 것인가, 위기 앞에서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화두다. 제갈량은 이 질문들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던 사람이었고, 그가 남긴 기록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나침반이 된다.


"제갈량 심서"를 관통하는 첫 번째 화두는 '위엄'이다. 그러나 이 위엄은 권위적 카리스마나 무력적 통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제갈량이 말하는 위엄은 덕에서 비롯된다. 도덕적 품성 없이 세운 권위는 공허하고, 내면의 단단함 없이 휘두르는 권력은 곧 무너진다는 것이다. 현대 조직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작동한다. 직급과 직책으로만 사람을 움직이려는 리더는 결국 형식적 복종만 얻을 뿐이다. 반면 자신의 원칙을 일관되게 지키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며, 팀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리더는 자연스럽게 존경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덕에서 우러나오는 위엄이다. 흥미로운 점은 제갈량이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를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부드럽기만 하면 조직의 기강이 무너지고, 강하기만 하면 사람의 마음이 떠난다. 이 둘 사이의 줄타기가 리더십의 핵심이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태도를 바꾸되, 중심은 잃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힘이다.

리더십을 '그릇'에 비유한 대목은 특히 인상적이다. 소규모 조직을 이끄는 리더에게 필요한 역량과 대규모 조직의 수장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다르다. 문제는 많은 리더들이 자신의 그릇 크기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면 무모한 결정을 내리고, 과소평가하면 기회를 놓친다. 제갈량이 제시한 해법은 철저한 자기 성찰이다.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어디까지 할 수 있으며, 어떤 한계를 가졌는지 정직하게 직시하는 것. 이 자기 인식이 모든 전략의 출발점이다. 현대 경영학에서 말하는 '메타인지'와 정확히 일치하는 개념이다. 자신의 사고 과정을 관찰하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있어야 성정도 가능하다. 제갈량은 이미 2천 년 전에 이 원리를 꿰뚫고 있었다.


조직이 무너지는 이유는 대부분 외부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부패 때문이다. 파벌 형성, 유언비어 유포, 사적 이익 추구, 아첨과 배신, 이런 해악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직의 뿌리를 갉아먹는다. 제갈량이 제시한 '아홉 가지 해충' 목록을 읽으며 소름이 돋았다. 정보 왜곡, 독단적 행동, 권력 남용, 규율 무시... 이것들은 현대 조직에서도 여전히 가장 큰 문제다. 특히 성과주의와 경쟁 문화가 팽배한 환경에서 이런 병리 현상은 더욱 쉽게 발생한다. 진정한 리더는 외부 경쟁자를 경계하기 전에 내부의 병을 먼저 진단해야 한다. 조직 문화가 건강한지, 신뢰가 살아있는지, 공정한 시스템이 작동하는지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내부가 단단할 때 외부의 어떤 위기도 이겨낼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불진지' 사상이다. 최고의 전략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는 명제다. 회피나 도피가 아니다. 갈등이 발생하기 전에 예방하고, 충돌이 불가피할 때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해결하며, 궁극적으로는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현대 비즈니스에서도 이 원리는 유효하다. 가격 전쟁으로 출혈 경쟁을 하기보다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는 것, 소송보다는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 직원을 통제하기보다 자율과 신뢰를 주는 것. 모두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략의 현대적 응용이다. 이를 위해서는 고도의 통찰력이 필요하다. 상황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상대의 심리를 읽으며, 흐름을 미리 예측하는 능력. 표면만 보지 말고 이면을 보라. 현상에 속지 말고 본질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제갈량은 위기 대응 능력에 따라 리더를 세 등급으로 나눈다. 최고의 리더는 위기가 오기 전에 예방하고, 중간 수준의 리더는 위기가 발생했을 때 탁월하게 대처하며, 최하의 리더는 위기 한가운데서 허우적거린다. 이것은 준비의 문제다. 위기는 예고 없이 오지만 대비는 언제든 할 수 있다. 시나리오를 그려보고, 대응 매뉴얼을 만들며, 평소 훈련을 통해 근육을 만들어두는 것. 이것이 진정한 리더의 자세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우리는 이 원리를 절감했다. 같은 위기 앞에서 어떤 조직은 빠르게 적응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았지만, 어떤 조직은 무너졌다. 차이는 평소의 준비와 리더의 결단력에 있었다.

조직의 성패는 결국 사람이 결정한다. 제갈량이 인재 활용에 할애한 분량이 많은 이유다. 그는 사람의 본성을 파악하는 구체적 방법부터 적재적소 배치, 핵심 참모 활용까지 세밀하게 다룬다. 특히 '복심‘개념이 흥미롭다. 리더의 배와 심장처럼 가까이에서 함께 호흡하는 참모. 지혜로운 조언자, 신중한 분석가, 용감한 실행자가 모두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명령만을 따르는 부하가 아니라, 리더의 뜻을 깊이 이해하고 함께 고민하는 동반자라는 점이다. 현대 조직에서는 이것을 '코어 팀' 또는 '싱크 탱크'라고 부른다. 리더 혼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없다. 다양한 관점과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들의 조언을 경청하고, 그들의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며, 그들과 신뢰를 쌓는 것. 이것이 리더의 핵심 역량이다.


제갈량의 사상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미덕은 원칙과 유연함의 조화다. 그는 일관된 원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상황에 따라 전략을 바꾸는 유연함을 역설한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변증법이다. 중심은 흔들리지 않되, 방법은 유연하게. 목표는 명확하되, 경로는 상황에 맞게. 이것이 진정한 지혜다. 고집과 원칙을 혼동해서도 안 되고, 유연함과 무원칙을 동일시해서도 안 된다. 현대의 애자일 경영이나 적응적 리더십도 같은 맥락이다.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서 경직된 계획을 고집하면 실패한다. 그렇다고 방향 없이 표류해서도 안 된다. 비전은 선명하게 유지하되, 실행 방식은 끊임없이 조정하는 것. 이것이 21세기 리더가 갖춰야 할 자세다.

책을 덮으며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왜 2천 년 전의 글이 지금도 유효한가. 답은 명확하다. 제갈량이 다룬 것은 기술이 아니라 본질이기 때문이다. 도구와 환경은 바뀌어도 사람의 마음을 읽는 법, 신뢰를 쌓는 법, 위기를 헤쳐나가는 법,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법, 이런 본질적 역량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복잡해진 세상일수록 더욱 중요해진다. 제갈량 심서는 리더를 위한 매뉴얼이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모든 이에게 유효한 지침서다. 누구나 자기 삶의 리더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흔들림을 다스리고, 중심을 잡으며, 현명하게 판단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쌓는 것, 이것은 직급과 무관하게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역량이다. 제갈량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특정한 전략이나 기술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가지되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고, 자신을 냉정하게 성찰하되 타인에게는 따뜻하며, 원칙을 지키되 고집스럽지 않은 태도다. 이것이 난세를 헤쳐나간 전략가가 우리에게 건네는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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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1-14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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