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지지만 않아도 오래 살 수 있다 - 도쿄도 건강장수의료센터 김헌경 박사가 알려주는 건강자립의 비밀
김헌경 지음 / 비타북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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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요즘 부모님 세대를 보며 자주 생각한다. 언제부터 그분들의 걸음이 저렇게 조심스러워졌을까. 마루턱을 넘을 때도, 계단을 오를 때도, 심지어 평지를 걸을 때도 발을 살금살금 디디는 모습을 보면 마음 한편이 무거워진다. 젊은 시절 그토록 씩씩하고 활동적이셨던 분들이 이제는 '넘어질까 봐'라는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신다. 그리고 실제로 주변에서 낙상 사고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것이 삶 전체의 궤도를 바꾸는 사건임을 깨닫게 된다. 김헌경 박사는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흔히 나이 들면 당연히 몸이 약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명확하게 선을 긋는다. 노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노쇠는 예방 가능한 질병이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다. 우리는 무기력하게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길 수도 있지만, 적극적으로 대비하고 준비함으로써 전혀 다른 노년을 맞이할 수도 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낙상이 가져오는 연쇄 반응에 대한 설명이다. 한 번의 넘어짐이 골절로 이어지고, 골절은 장기간의 침상 생활을 강요하며, 그 과정에서 근육은 더욱 빠르게 소실되고, 결국 자립적인 삶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악순환. 이것은 통계나 연구 결과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목격하는 현실이다. 한 번의 사고가 독립적이고 활기찬 노년을 의존적이고 제한된 삶으로 바꿔버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미리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게 된다.

'근육 연금'이라는 표현은 참으로 절묘하다. 우리는 노후를 대비해 금융자산을 모으고, 연금을 준비하고, 부동산을 마련한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자산, 즉 우리 몸의 기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일에는 소홀하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어도 스스로 걷지 못하고, 화장실을 혼자 갈 수 없고, 식사를 스스로 할 수 없다면 그것이 과연 행복한 노년일까? 저자가 제시하는 데이터들은 충격적이다. 하체 근력이 떨어지면 뇌 기능도 함께 감소한다는 연구,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의 수행 능력 이 수명을 예측하는 지표가 된다는 사실, 근육량 감소가 단백질 흡수 효율까지 떨어뜨려 영양 불균형을 초래한다는 점. 이 모든 것이 근육이 힘을 쓰는 기관이 아니라, 우리 몸 전체 시스템의 핵심 기둥임을 보여준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근육과 인지 기능의 상관관계다. 걷기, 균형 잡기, 자세 유지 등의 신체 활동은 뇌를 자극하고 활성화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규칙적인 하체 운동이 치매 예방에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는 이제 더 이상 놀랍지 않다. 근육을 움직이는 것은 곧 뇌를 움직이는 것이고, 신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곧 정신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이 근육 연금을 준비해야 할까? 저자는 명확하게 답한다. 지금 당장이라고. 40대부터 근육량은 해마다 감소하기 시작하고, 50대 이후에는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 60대, 70대가 되어서야 운동을 시작하면 이미 많은 것을 잃은 후다. 중년 부터 꾸준히 근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노후 준비인 셈이다.

건강서적들이 범하는 가장 큰 오류는 이론적 설명에만 치중하거나, 반대로 너무 전문적이고 어려운 운동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천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헬스장에 가지 않아도, 특별한 장비가 없어도, 심지어 운동 경험이 전혀 없어도 따라할 수 있는 방법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GOG080 운동법, 인터벌 걷기, 좌식근육 강화 운동 등 각각의 운동은 복잡하지 않다. 오히려 너무 단순해서 '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바로 그 단순함이 이 운동법의 핵심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운동은 아무리 좋아도 지속하기 어렵다. 반면 간단하고 쉬운 동작을 매일 반복하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습관은 결국 우리 몸을 변화시킨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근력을 측정하고 점검할 수 있는 방법들이다. 종아리 둘레를 재보는 것만으로도 근감소증 위험을 가늠할 수 있고, 의자에서 일어서는 속도와 횟수로 하체 근력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자가 진단법은 병원에 가지 않아도, 전문가를 만나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관리할 수 있게 해준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운동만이 아니라 식습관, 수면, 생활 패턴까지 종합적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아무리 열심히 운동해도 단백질 섭취가 부족하면 근육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충분한 휴식 없이 과도하게 운동하면 오히려 몸을 상하게 한다. 이 책은 근력 강화를 하나의 고립된 활동이 아니라, 전체적인 생활 방식의 변화로 접근한다. 그래서 더욱 설득력 있고, 실제로 삶에 적용 가능하다.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어떤 노년을 원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 거창한 계획이나 완벽한 실천이 아니어도 좋다. 오늘 10분이라도 스쿼트를 해보고, 계단을 한 층이라도 더 걸어 올라가고, 저녁 식사에 단백질 반찬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 이런 작은 실천들이 모여 '근육 연금'이 되고, 그것이 결국 나를 지켜주는 가장 확실한 자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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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모든 글을 기억한다 - 계속 쓰는 사람 정지우의 연결과 확장
정지우 지음 / 해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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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들의 세계‘는 한 사람의 진심에서 시작되어 점점 확장되고 있다. 수억 광년씩 떨어진 밤하늘의 별들이 이어져 별자리를 만들듯, 밤을 건너 만난 사람들이 만들어낸 시간이 하나의 별자리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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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모든 글을 기억한다 - 계속 쓰는 사람 정지우의 연결과 확장
정지우 지음 / 해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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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세상에 이런 모임이 또 있을까. 정지우 작가는 매년 연말이면 '글쓰기 A/S 모임'을 연다고 한다. 글쓰기 모임을 마친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 여전히 글을 쓰고 있는지 묻고, 쓰고 싶은 마음을 북돋아주며, 글쓰기에 관한 고민을 들어준다. 제품도 아닌 사람의 글쓰기에 A/S를 제공한다니, 이보다 더 진심 어린 태도가 있을까? 대부분의 모임은 끝나면 자연스럽게 흩어진다.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서서히 멀어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작가는 10년 동안 글쓰기 모임을 이끌어오면서, 모임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을 찾아냈다. 뉴스레터를 발행하고, 공저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다시 만나 서로의 근황을 나눈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을 꺼내 보인 사람들 사이의 특별한 유대다. 한 사람의 우울했던 순간, 기뻤던 순간, 아팠던 순간이 농축된 글을 함께 읽은 사이는 결코 가벼운 관계일 수 없다. 특히 글쓰기를 통해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서른이나 마흔에 작가가 된 이들에게 글쓰기는 삶을 기록하는 동시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만드는 도구였을 것이다.

글쓰기 모임에서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면의 상처, 남들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고민, 숨겨두었던 아픔들을 꺼내놓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지우 작가는 글쓰기란 바로 그런 과정이라고 말한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사실은 해도 되는, 아니 반드시 해야 하는 이야기였음을 깨닫는 여정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 이야기를 함부로 던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치유하면서 동시에 위로하는 방식으로 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글쓰기의 핵심이다. 나의 상처를 드러내되, 그것이 폭력이 되지 않고 공감의 다리가 되도록 만드는 것. 내 안의 어둠을 마주하되, 그 안에서 빛을 찾아 다른 이들에게도 보여주는 것이다. 글쓰기 모임에서 사람들은 많이 운다고 한다. 그리고 밤을 지새운다. 누군가는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다며, 죽기 전에 이 모임을 떠올릴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글쓰기의 힘이다.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언어로 형상화하며,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과정에서 사람은 변화한다.

글쓰기의 원칙은 맥락, 대조, 정확한 솔직함이다. 첫째, 맥락을 쓰라는 것이다. 돌담에 핀 꽃이 아름답다는 문장은 누구나 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꽃이 그날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내 삶의 어떤 순간과 연결되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서산 앞바다의 저녁노을을 보며 누군가는 첫사랑을, 누군가는 이별을, 또 다른 이는 죽음을 떠올린다.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각자의 맥락 속에서 전혀 다른 의미가 만들어진다. 김훈 작가의 소설 첫 문장처럼 주어와 동사만으로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과 감정을 담아내는 것이 진정한 내 글이 된다.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던 꽃이 내려올 때 보이는 것처럼, 같은 길을 걷더라도 그때의 나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 차이를 포착하고 기록하는 것이 맥락을 쓰는 일이다.

둘째, 대조를 활용하라는 것이다. 좋은 글은 무언가와 싸운다. 정확히 말하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글은 반드시 대립하는 다른 메시지에 발을 딛고 서 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쓴다는 것은, 사랑이 아닌 것과의 경계를 명확히 한다는 뜻이다. 자기만의 행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세상의 통념과 다른 나만의 기준을 세운다는 의미다. 데이터는 그 자체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데이터를 비교하면 정보가 되고, 정보를 분석하고 깊이 사유하면 지식이 된다. 토마 피케티가 300년의 빅데이터를 분석하면서도 발자크와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인용한 것처럼, 진정한 통찰은 비교와 대조, 그리고 인문적 사유에서 나온다.

셋째, 정확하게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에는 자신의 허물까지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픈 사람이 아프다고 말해야 치료의 방법이 생기듯, 글쓰기에서도 정직함이 치유의 시작점이 된다. 정지우 작가가 이끄는 모임의 참여자들은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기 시작하면서 얼굴이 밝아진다고 한다.

현대 사회는 팽창하는 우주처럼 사람들이 점점 멀어지는 곳이다. 개개인은 고립되어 있고, 인간과 인간이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SNS로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섬에서 혼자 살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글쓰기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에 닿을 때, 그 글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도 닿는다. 고립된 수험 생활을 하던 시절 정지우 작가가 쓴 글이 오히려 가장 많은 사람에게 다가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자신이 세상과 유리된 먼 섬에 있다고 느끼던 그 순간에 쓴 글이, 비슷한 고립감을 느끼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내 안의 우물을 깊이 파 내려가다 보면, 거기에는 타인과 이어지는 지하수가 있다. 내가 가장 나다울 때, 가장 솔직할 때, 가장 깊이 들어갈 때, 역설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것과 만난다. 이것이 글쓰기의 신비다. 언어에는 소통의 꿈이 있고, 그 꿈은 글쓰기를 통해 실현된다. 글쓰기는 무한한 홀로 있음이면서 동시에 무한한 이어짐이다.


정지우 작가는 작가들의 연대에 대해 느슨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너무 큰 기대나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유롭게 와해되거나 팽팽해지며 하나의 유기체처럼 흘러가도록 둔다. 생명이 다하면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가듯, 이 연대가 사라지는 날이 와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연대가 존재하는 한, 자신이 먼저 이 끈을 놓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이 태도가 아름답다.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책임감을 갖는 것. 영원을 약속하지 않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것. 글을 쓰고자 했던 사람들이 실제로 글을 쓰고, 자기를 표현하며, 글로써 세상과 소통하고, 삶에서 글쓰기의 자리를 만들어가도록 돕는 일. 그를 통해 사람들이 깊이 연결되고, 누군가의 삶을 펼치는 데 서로 도움이 되는 일. 이것이 넷플릭스의 재미있는 드라마보다도 더 즐겁다고 말하는 작가의 모습에서, 진정한 보람이 무엇인지 배운다. 10년간 글쓰기 모임을 이끌어오며 수많은 사람을 만난 정지우 작가. 그중 여럿이 데뷔해서 동료 작가가 되었고, 다른 모임원들도 각자의 모임을 만들어 교류하고 있다. 이 '쓰는 사람들의 세계'는 한 사람의 진심에서 시작되어 점점 확장되고 있다. 수억 광년씩 떨어진 밤하늘의 별들이 이어져 별자리를 만들듯, 밤을 건너 만난 사람들이 만들어낸 시간이 하나의 별자리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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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반 혁명 - 10살, 젊음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비밀 시간을 되돌리는 몸의 혁명!
안현우 지음 / 나비의활주로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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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펼치기 전, 나는 '태반'이라는 단어에서 어떤 선입견을 지울 수 없었다. 현대인에게 태반은 출산 후 폐기되는 부산물이거나, 기껏해야 고가의 미용 제품에 들어가는 성분 정도로 인식된다. 하지만 안현우 원장의 <태반혁명>은 그 선입견을 첫 장부터 뒤흔들었다. 조선시대 왕실의 비밀 처방, 허준이 동의보감에서 "광물성약과 식물성약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라고 극찬했던 약재, 그것이 바로 자하거였다. '어머니의 고귀한 생명력이 수레를 타고 흐르는 강물처럼 태아에게 전달되는 것을 상징하는 이름. 그 이름 하나에 이미 동양 의학의 철학이 응축되어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지혜를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내던져 버렸을까?

책은 전통 의학과 현대 과학을 대립시키지 않는다. 저자는 고전 의서의 문헌적 근거를 나열하면서도, 동시에 IGF-1, EGF, PDCF 같은 성장인자의 약리학적 메커니즘을 빠짐없이 설명한다. 한의학의 보기, 양, 의정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현대 의학의 '세포 재생', '항염 작용', '면역 조절'이라는 구체적 언어와 만나는 순간, 둘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보완한다. 마치 오래된 악보를 현대 악기로 연주할 때, 원곡의 정수는 살리되 음색은 더 풍부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태반 주사제의 효능을 설명하는 대목이었다. 소염제의 60-80%에 해당하는 항염 작용, 모르핀의 50%에 해당하는 진통 효과를 지니면서도, 위장 장애나 중독성 같은 부작용이 거의 없다는 점. 이것은 '대체 의학'이 아니라, 기존 치료법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선택지임을 보여준다.

책의 후반부는 갱년기, 야간뇨, 척추관 협착증, 무릎 관절염 등 중장년층이 겪는 구체적인 질환들을 다룬다. 이 구성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질병의 나열이 아니라 노화하는 몸의 '서사'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갱년기로 시작해 배뇨 장애로 이어지고, 허리와 무릎의 통증으로 확산되는 이 흐름은, 한 사람이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며 겪게 될 신체적 변화의 연대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각 질환을 독립된 문제로 보지 않고, 기혈의 순환, 신허, 음허 같은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한다. 이것은 현대 의학이 종종 놓치는 관점이다. 우리는 무릎이 아프면 정형외과에 가고, 요실금이 있으면 비뇨기과에 간다. 각 진료과는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그 증상들이 사실은 하나의 뿌리인 노화하는 몸 전체의 생명력 저하에서 나온다는 통찰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책 곳곳에 등장하는 임상 사례들은 이론을 살아 있는 경험으로 만들어준다. 10년간 밤마다 화장실을 다섯 번씩 가던 환자가 태반 요법 후 한 번으로 줄어든 이야기, 수술을 권유받았던 척추관 협착증 환자가 보행 능력을 회복한 사례. 이런 이야기들은 인간의 몸이 지닌 회복력에 대한 증언이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저자가 "태반 요법만을 일 방적으로 찬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봉약침과자하거약침을 비교하며 각각의 장단점과 적응증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는 진정한 의료인의 태도를 보았다. 자신이 연구한 치료법에 대한 애정과 확신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만능 해법으로 포장하 지 않는 정직함이다.

"저희 어머니를 떠올리며, 그리고 세상의 모든 어머님들을 떠올리며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을 담았다." 나는 이 책이 왜 '혁명'이라는 제목을 달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혁명은 거창한 제도의 전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로는 잊혀진 가치를 되살리는 것, 버려진 것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것, 익숙한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 또한 혁명이다. 갱년기 증상으로 고생하는 어머니, 밤마다 화장실을 오가며 수면을 방해받는 아버지, 무릎 통증 때문에 손주와 산책도 못하는 할머니. 이들의 고통은 '나이 들면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저자는 묻는다. 정말 그래야만 하는가? 우리 몸 안에, 그리고 자연 안에 이미 답이 있는 것은 아닌가?
태반은 역설적인 존재다. 그것은 새 생명을 키우기 위해 만들어졌다가, 생명이 태어나면 곧 분리되어 사라진다. 일회성의 기관, 잠시 존재했다가 역할을 마치면 버려지는 것이다. 하지만 동양 의학은 거기서 다른 것을 보았다. 생명을 키우는 힘이 그토록 강력했던 조직이라면, 그 안에는 분명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다시 생명을 회복하는 데 쓸 수 있지 않을까? 생명의 순환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한 생명을 키우기 위해 쓰였던 에너지가, 다른 생명을 치유하는 데 다시 쓰인다. 어머니와 아이를 잇던 다리가, 이제는 고통받는 이와 건강 사이의 다리가 된다. 책은 명확한 독자층을 상정하고 있다. 만성 통증으로 고생하는 중장년층, 기존 치료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 환자들, 자하거 치료를 고려 중인 이들이다. 물론 이 책은 더 넓은 독자에게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한의학을 '비과학적'이라고 단정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전통 의학이 어떻게 현대 과학과 대화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현대 의학만을 신봉하는 이들에게는, 서양 의학이 놓치고 있는 '전체로서의 몸'에 대한 관점을 제시한다. 의료인에게는 임상적 참고 자료가 되고, 일반인에게는 자신의 몸을 이해하는 새로운 렌즈가 된다. 무엇보다, 노화와 질병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이 책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 몸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고, 적절한 도움만 주어진다면 스스로 회복할 수 있다.

책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우리 몸은 본래 스스로 회복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태반 요법은 그 능력을 깨우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하거에는 수천 년의 지혜가 있으며, 무엇보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우리 몸의 생명력이 있다. 책이 전하는, 가장 따뜻하고도 과학적인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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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경영하라 - 인문학에서 배우는 성공 경영의 길
산티아고 이녜스 지음, 박선령 옮김 / 프롬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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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 경영 환경은 속도를 요구한다. 실시간 데이터 분석, 즉각적인 의사결정, 빠른 시장 대응이 경쟁력의 핵심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산티아고 이녜스가 제시하는 '철학으로 경영하라'는 명제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역설적인 제안을 던진다. 빠르게 결정하기 전에 깊이 사유하라는 것이다. 철학과 경영의 결합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는 추상적 사유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 실행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녜스는 이 둘이 실제로는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모든 경영 결정의 이면에는 가치관과 원칙이 자리하며, 이는 곧 철학적 입장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결정을 내린다는 점이다. 무의식적 철학이 아닌 의식적 성찰을 통해, 우리는 더 일관되고 의미 있는 경영을 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은 조직 윤리에 대한 중요한 경고를 제공한다.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 평범한 관료였다. 현대 조직에서도 반복될 수 있는 위험이다. 개인이 조직의 톱니바퀴로 전락하고,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 뒤에 숨을 때, 끔찍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경영자는 효율 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구성원이 도덕적 주체로서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데이비드 흄 의 '흠의 포크'는 경영에서 마주치는 지식의 두 차원을 구분하게 한다. 아이디어에 기반한 사실과 경험에 기반한 사실을 혼동할 때, 우리는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 예를 들어, 특정 전략이 과거에 성공했다고 해서(경험적 사실) 항상 성공할 것이라 는(논리적 필연성)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인과관계에 대한 엄밀한 사유는 경영자가 데이터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능력이다.

니체의 사상이 20세기 경영 이론에 미친 영향은 양가적이다. '초인' 개념은 탁월함을 추구하는 리더십의 이상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동시에 권력의지에 대한 무비판적 숭배로 왜곡될 위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니체가 강조한 자기극복과 가치창조의 정신이다. 진정한 리더는 기존 관습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과 조직을 재창조한다. 짐 콜린스의'5단계 리더십' 연구는 겸손과 의지의 결합을 강조한다. 가장 성공적인 리더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영웅이 아니라, 조용히 조직의 성공에 헌신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는 니체적 초인 이미지와는 다른, 더 성숙한 리더십 개념이다. 리더는 스스로를 드러내기보다 다른 이들이 빛나도록 하는 '조연의 역할'을 수행할 줄 알아야 한다. 진정한 힘은 겸손에서 나온다. 현대 경영학이 강조하는 '감성 지능'이나 '서번트 리더십' 역시 철학적 전통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강조한 자기통제와 타인에 대한 공감,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는 모두 오늘날 요구되는 리더의 자질과 맞닿아 있다. 철학은 이러한 덕목 들이 왜 중요한지, 어떻게 계발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대니얼 카너먼의 행동경제학 연구는 인간의 인지적 편향을 과학적으로 밝혀냈지만, 이러한 통찰은 이미 고대 철학자들의 관심사였다. 플라톤이 경고한 동굴의 비유,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모두 우리의 지각과 판단이 얼마나 오류에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차이는 현대 심리학이 이를 실험적으로 검증했다는 점이다. 나심 탈레브의 '블랙 스완' 개념은 예측 불가능성과 극단적 사건의 영향을 강조한다. 이는 경영자가 가진 통제의 환상을 깨뜨린다. 우리는 과거 데이터를 아무리 분석해도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포착할 수 없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겸손과 준비성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한 '운명애(amor fati)'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되,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라는 지혜를 담고 있다. 경영자의 통찰력은 데이터를 읽는 능력만이 아니라, 맥락을 이해하고 본질을 꿰뚫는 능력이다. 나무와 숲을 동시에 보는 이 능력은 기술적 훈련만으로는 얻어지지 않는다. 폭넓은 독서, 다양한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 성찰적 사유가 필요하다. 철학은 이러한 사유의 틀을 제공한다. 현상 너머의 원리를 탐구하고, 겉으로 드러난 것 뒤의 구조를 파악하는 훈련이 바로 철학적 사유이기 때문이다.

길버트 하트먼의 '통 속의 뇌' 사고실험은 메타버스 시대에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흐려질 때,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가? 기업들이 가상공간에서 제품을 판매하고, 직원들이 아바타로 회의하는 시대에, 경영자는 '현실'의 본질에 대해 다시 사유해야 한다. 인공지능과 머신러닝의 발전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의식 없이 학습하고 판단하는 시스템이 가능하다면, 인간 지능의 본질은 무엇인가? 알고리즘이 인간보다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면, 경영자의 역할은 무엇으로 남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철학 없이는 적절히 다룰 수 없다. 기술은 도구일 뿐이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여전히 인간의 가치판단에 달려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명제는 변화의 본질을 포착한다. 디지털 전환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과 조직 문화, 나아가 존재 방식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경영자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무엇이 변해야 하고 무엇이 변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이는 전략적 사고를 넘어 철학적 비전을 요구한다.


경영 윤리는 규정 준수나 법적 책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어떤 조직을 만들고 싶은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칸트의 정언명령, 즉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원칙은 경영 결정에 강 력한 시금석을 제공한다. 내가 내리는 결정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가? 그것이 바람직한 세상을 만드는가? 공리주의적 접근,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경영에서 중요한 윤리적 틀이다. 하지만 이는 소수자의 권리를 침해 할 위험이 있다. 롤스의 정의론이 제시하는 '무지의 베일' 개념은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 만약 내가 조직의 어떤 위치에 있을지 모른다면, 어떤 정책을 선택하겠는가? 이러한 사고실험은 경영자가 더 공정한 결정을 내리도록 돕는다. 덕 윤리의 관점에서, 좋은 경영자가 되는 것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것처럼, 덕은 일회적 행동이 아니라 습관을 통해 형성되는 성품이다. 정직, 용기, 절제, 지혜 같은 덕목은 의식적인 실천을 통해 내면화되어야 한다. 조직 문화는 이러한 덕목을 장려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방해하는가? 경영자는 자신뿐 아니라 조직 전 체의 도덕적 품성을 가꾸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 즉 인간 번영의 개념은 현대적 행복 개념과는 다르다. 그것은 쾌락의 극대화가 아니라, 인간 잠재력의 실현이다. 경영의 맥락에서 이는 단순히 수익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직원들이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성장할 수 있을 때, 조직도 진정으로 번영한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을 추구하되,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쾌락을 강조했다. 순간적 만족이 아니라 평온한 마음 상태(아타락시아)를 목표로 삼았다. 이는 단기 성과에 집착하는 현대 경영에 대한 경고이다. 분기별 실적에 급급하다 보면 장기적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 진정한 성공은 지속 가능한 번영이며, 이는 조급함이 아닌 인내를 요구한다. 스토아주의는 외부 환경이 아닌 내면의 평정을 강조한다. 우리는 시장 상황이나 경쟁자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지만, 그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통제할 수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도 겸손과 자기성찰을 잃지 않은 리더의 모범을 보여준다. 경영자는 성공과 실패, 칭찬과 비난 앞에서 동요하지 않는 내면의 중심을 가져야 한다. 견유학파의 디오게네스가 보여준 극단적 간소함은 현대 경영에 직접 적용하기 어렵지만,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불필요하게 욕망하는가? 미니멀리즘과 본질에 집중하는 경영 철학은 복잡성이 증가하는 현대 비즈니스 환경에서 오히려 경쟁력이 될 수 있다. 덜어내는 용기가 때로는 더하는 능력보다 중요하다.


"경영은 행동하는 철학"이라는 명제는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경영 결정이 암묵적으로든명시적으로든 특정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검토하지 않은 가정 위에서 결정을 내린다는 점이다. 철학은 이러한 가정들을 표면으로 끌어올려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게 한다. 성찰 없는 행동은 맹목이고, 행동 없는 성찰은 공허하다. 철학과 경영의 결합은 이 둘 사이의 비옥한 긴장을 만들어낸다. 경영자는 실행해야 하지만, 그 실행이 올바른 방향을 향하도록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철학은 이러한 질문을 위한 도구상자를 제공한다. 윤리학, 인식 론, 존재론, 미학까지, 다양한 철학적 도구들은 경영의 복잡한 문제들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21세기 경영자는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기후 위기, 불평등 심화, 기술의 급속한 발전, 팬데믹과 같은 전지구적 위험 등은 기술적이거나 전략적인 해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 어떤 세상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은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조직을 성찰하는 공동체로 만드는 것, 이것이 철학적 경영의 궁극적 목표일 것이다. 구성원 모두가 주어진 업무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 일을 하는지, 그것이 어떤 가치를 창출하는지, 더 나은 방법은 없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문화. 실패를 처벌이 아닌 학습의 기회로 보고, 다양한 관점을 경쟁이 아닌 풍요로움으로 받아들이는 문화. 이러한 문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으며, 리더의 지속적인 모범과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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