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 영상 제작 - 직장인을 위한 미드저니
고희청.박범희 지음 / 성안당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월요일 아침, 팀 회의에서 갑자기 날아온 요청이었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신제품 론칭 캠페인 시안 좀 만들어 올려주세요." 마케팅 담당이지만 디자인 전공자가 아닌 나로서는 늘 이런 순간이 부담스러웠다. 외주를 맡기자니 예산이 빠듯하고, 무료 템플릿을 쓰자니 경쟁사와 차별화가 어렵다. 파워포인트로 어설프게 만든 시안은 늘 상사의 "좀 더 감각적으로"라는 피드백과 함께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접한 것이 미드저니였다. 처음엔 그저 또 하나의 AI 툴이려니 했다. 챗GPT로 일러스트를 만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실무에 쓰기엔 퀄리티가 아쉬웠다. 하지만 미드저니는 달랐다. 몇 줄의 텍스트만으로 광고 촬영장에서 찍은 듯한 제품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브랜드 마스코트가 탄생했다. 디자이너의 손길 없이도 말이다. 사실 처음엔 두려움도 있었다. '이걸 배우는 게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디자이너만큼 잘하진 못할 텐데.' 하지만 몇 주간 미드저니를 활용하며 깨달은 건, 이건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기획자가 더 나은 기획자가 되기 위한 도구라는 것이었다. 내 머릿속 아이디어를 빠르게 시각화하고, 팀원들과 구체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확장된 언어 같은 것이었다.


미드저니를 처음 접했을 때 가장 당황스러웠던 건 디스코드라는 낯선 플랫폼이었다. 게임 커뮤니티에서나 쓸 법한 이 메신저에서 왜 이미지를 만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써보니, 이 구조가 오히려 장점이었다. 명령어 하나만 입력하면 되는 단순함. 복잡한 인터페이스 대신 대화하듯 작업할 수 있는 편안함. 진짜 마법은 프롬프트에 있었다. "A modern office workspace"라고 입력하면 평범한 사무실이 나오지만, "A bright, minimalist office workspace with natural sunlight, potted plants, and a MacBook on a wooden desk, editorial photography style"이라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면 잡지 화보 같은 이미지가 생성된다. 마치 사진작가에게 촬영 콘셉트를 설명하듯, 원하는 분위기와 디테일을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특히 유용했던 건 스타일 레퍼런스 기능이었다. 우리 브랜드 가이드에 맞는 이미지 하나를 레퍼런스로 넣으면, 그 톤앤매너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낸다. 회사 블로그에 올릴 섬네일 이미지를 만들 때, 일관된 브랜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매번 새로운 비주얼을 선보일 수 있게 됐다. 더 이상 "이번엔 어떤 스톡 이미지를 써야 하나"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한 결과가 나오진 않았다. 원하는 이미지가 나올 때까지 프롬프트를 수정하고, 파라미터를 조정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과정 자체가 내 기획 의도를 명확히 하는 훈련이 됐다. '내가 정확히 뭘 원하는가'를 언어화하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회의에서도 "뭔가 세련된 느낌으로요"가 아니라 "미니멀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의, 자연광이 들어오는 구도로요"라고 구체적으로 요청할 수 있게 됐다.


미드저니를 업무에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놀라웠던 건,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상황에서 쓸모가 있다는 점이었다. "예쁜 그림 하나 만들어주는 툴" 수준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효과를 본 건 회의 자료였다. 신규 사업 아이템을 제안하는 기획서를 만들 때, 텍스트로만 설명하면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예전 같았으면 인터넷에서 비슷한 레퍼런스 이미지를 찾아 붙이는 식이었는데, 이젠 내가 상상한 그대로의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 "펫 프렌들리 카페에서 강아지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밀레니얼 여성"이라는 구체적인 타겟 페르소나를 시각화해 보여주자, 팀원들의 반응이 완전히 달라졌다. 또 다른 활용처는 SNS 콘텐츠 제작이었다. 매주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 올라갈 콘텐츠를 준비하는 게 큰 부담이었는데, 미드저니 덕분에 훨씬 수월해졌다. 계절별 이벤트 배너, 제품 소개 포스트, 브랜드 스토리 일러스트까지 모두 자체적으로 제작할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좋은 건, 스톡 이미지처럼 다른 브랜드와 겹칠 일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만의 고유한 비주얼 아이덴티티를 구축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활용은 프로토타입 제작에서 나타났다. 신제품 패키지 디자인을 외주 맡기기 전, 여러 방향성을 빠르게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미드저니로 다양한 스타일의 패키지 목업을 만들어 사내 설문조사를 돌렸고, 가장 반응이 좋았던 방향으로 실제 디자인을 의뢰했다. 덕분에 시행착오를 줄이고 예산도 절약할 수 있었다. 심지어 채용 공고에도 활용했다. 우리 회사의 업무 분위기와 문화를 보여주는 이미지를 만들어 채용 페이지에 실었는데, 지원자들이 "회사 분위기가 잘 느껴져서 지원했다"는 피드백을 주기도 했다. 천편일률적인 스톡 사진 대신, 우리만의 스토리가 담긴 이미지를 사용한 효과였다.


미드저니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정적인 이미지도 좋지만, 요즘 트렌드는 단연 숏폼 영상이다. 릴스, 쇼츠, 틱톡... 15초에서 1분 사이의 짧은 영상이 가장 높은 참여율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영상 제작은 이미지보다 훨씬 높은 벽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미드저니가 이미지에서 영상까지 연결되는 워크플로를 제공한다는 걸 알게 됐다. 미드저니로 만든 이미지를 일레븐랩스에서 생성한 AI 보이스 내레이션과 결합하고, 캡컷으로 편집하면 완성도 있는 브랜드 영상이 탄생한다.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직접 해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신제품 티저 영상을 만들 때였다. 미드저니로 제품의 다양한 앵글 이미지를 생성하고, 각 이미지에 줌인/줌아웃 효과를 넣었다. 일레븐랩스에서는 브랜드 톤에 맞는 차분한 목소리로 제품 소개 멘트를 녹음했다. 배경음악은 유튜브 오디오 라이브러리에서 찾았고, 캡컷에서 모든 소스를 조합해 30초짜리 영상을 완성했다. 전체 작업 시간은 약 3시간. 외주를 맡겼다면 최소 일주일은 걸렸을 작업이었다. 더 재밌었던 건 스토리텔링이 담긴 브랜드 영상 제작이었다. 우리 회사의 친환경 캠페인을 알리기 위해, 지구를 지키는 작은 실천들을 시각화한 영상을 만들었다. 텀블러를 들고 출근하는 장면, 분리수거하는 모습, 나무를 심는 손길... 각 장면을 미드저니로 생성하고 이어 붙이니 감성적인 메시지 영상이 됐다. 물론 한계도 있었다. AI가 만든 영상은 아직 전문 영상 제작사의 퀄리티를 따라가긴 어렵다. 디테일한 움직임이나 복잡한 편집 효과는 구현하기 힘들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아이디어를 테스트하고, 소규모 캠페인을 돌리기엔 충분했다. 큰 프로젝트는 전문가에게 맡기되, 일상적인 콘텐츠 제작은 내부에서 해결하는 전략을 세울 수 있게 됐다.


미드저니를 사용하며 깨달은 가장 큰 교훈은, 이게 '이미지 생성 툴'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건 일하는 방식의 변화, 더 나아가 직장인으로서의 역량을 확장하는 수단이었다. 예전엔 아이디어를 시각화하려면 디자이너의 도움이 필수였다. 기획서에 "이런 느낌으로"라고 설명하면, 디자이너가 해석해서 만들어주고, 수정 요청을 몇 차례 주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미묘한 의도가 왜곡되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직접 초안을 만들 수 있다. 정확히 내가 원하는 방향을 팀원들에게 보여주고, 그걸 기반으로 논의할 수 있게 됐다.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확 줄어든 것이다. 더 중요한 건, 시도할 수 있는 아이디어의 폭이 넓어졌다는 점이다. 예전엔 "이건 너무 황당한 아이디어라 제안하기 민망한데"라며 포기했던 콘셉트들을 이제는 일단 만들어볼 수 있다. 실패해도 큰 비용이 들지 않으니, 과감한 시도가 가능해졌다. 실제로 처음엔 "말도 안 돼"라는 반응을 받았던 캠페인 아이디어가, 시안을 보여주니 "이거 괜찮은데?"로 바뀌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물론 AI가 모든 걸 해결해주진 않는다. 미드저니는 내 머릿속 아이디어를 시각화해주는 도구일 뿐, 아이디어 자체를 만들어주진 않는다. 결국 중요한 건 '무엇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기획력과 창의성이다. AI는 그걸 빠르고 효과적으로 실행하도록 돕는 조력자다. 앞으로 생성형 AI는 더 정교해지고 접근성도 높아질 것이다. 어쩌면 몇 년 후엔 미드저니 같은 툴을 못 쓰는 직장인이 희귀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 지금부터 익혀두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도구를 배우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문법을 익히는 것이다. 미드저니를 시작하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확실히 다르다. 기획서를 쓸 때, 회의를 준비할 때, SNS 콘텐츠를 만들 때의 자신감이 달라졌다. "이건 내가 못 하는 일"이라고 선 긋던 영역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완벽한 디자이너가 될 순 없지만, 내 아이디어를 혼자 힘으로 실현할 수 있는 기획자가 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 - 경성에서 서울까지, 시간을 건너는 미술 여행
우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선을 긋는다면, 그 선은 어디쯤 그어져야 할까. 우진영의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를 읽으며 나는 끊임없이 이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김환기의 '푸른 점화'가 123억 원에 낙찰되었다는 뉴스가 신문 지면을 장식하던 날, 한국 미술이 세계 무대에서 빛나는 그 순간에도, 정작 우리는 그 빛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이 책은 바로 그 빛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1920년대 경성의 거리에서 시작된 예술가들의 고민이 2020년대 서울의 갤러리에서 어떻게 메아리치고 있는지, 저자는 47명의 예술가를 통해 섬세하게 직조해낸다.


책의 첫 장을 여는 것은 도시 풍경이다. 김주경의 1927년작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과 정영주의 2020년작 《도시-사라지는 풍경 531》. 거의 100년의 시차를 두고 그려진 두 그림은 놀랍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저자가 포착한 김주경의 그림 속 경성은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 1920년대 경성, 붉은 양산을 쓴 신여성이 경성부청을 향해 걷는 모습은 변화의 한복판에 선 도시의 초상이다. 일제강점기라는 무거운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 신여성의 발걸음은 경쾌하다. 모던함과 희망이 공존하던 순간, 김주경은 그 찰나를 캔버스에 담아냈다. 반면 정영주가 그린 2020년의 서울은 어떤가. 한지를 구겨 붙이는 파피에 콜레 기법으로 만들어낸 판잣집들은 빼곡하게 모여 있지만, 그 안에는 따스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저자는 이 불빛을 보며 "온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고층 빌딩이 아닌 판잣집을, 화려함이 아닌 소박함을 선택한 정영주의 시선은 도시 한구석에 숨어 있는 인간적인 온기를 향한다.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도시는 변했지만, 예술가들이 포착하고자 한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김주경이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했다면, 정영주는 초고속 발전의 그늘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함을 그려냈다. 두 작가 모두 자신이 발 딛고 선 '지금, 여기'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 성실함이 100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책의 두 번째 장에서 저자가 연결하는 것은 주경과 노은주, 정물화를 그린 두 예술가다. 그런데 같은 꽃을 그렸을 뿐인데, 그 온도는 정반대다. 주경의 1920년 작품 《온실의 꽃》에서는 뜨거움이 뿜어져 나온다. "나무판 위에 펼쳐진 활달함은 기대 이상이었다. 속도감 있는 붓놀림이다. 꽃잎들이 살아나 춤출 것 같다"는 저자의 묘사는 그림을 직접 보지 않고도 그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주경은 어린 나이에 이미 서양화의 매력을 알았고, 유학을 통해 당대 최신의 미술 사조를 흡수했다. 그의 정물화는 사실주의와 표현주의를 넘나들며, 때로는 정교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대상을 포착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뜨거움'이다. 캔버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그것은 단순히 색채의 선명함이 아니라 그리는 이의 기운이다. 안타깝게도 유학 중 가세가 기울면서 그의 예술적 전성기는 일찍 막을 내렸지만, 남겨진 작품들은 여전히 뜨겁게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반면 노은주의 《스틸 라이트 2》는 냉정하다. 가느다란 철사 같은 선들, 색을 잃은 꽃송이들, 무채색의 화면. 처음 이 그림을 본 저자는 "폐허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작품 앞에 오래 머무르며 저자는 깨닫는다. 이 차가움은 절망이 아니라 단단함이라는 것을. "낙화가 아니었다. 《스틸 라이트 2》 속 꽃들은 피어나고 있다." 노은주는 도시의 건축물과 버려진 것들에 관심을 두고 작업한다. 그가 그리는 정원은 예쁘지만은 않다. 개화와 낙화가 공존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물들의 정원. 하지만 그 차가운 정물화 속에는 "만개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가 담겨 있다. 저자는 이를 "스틸 라이트"라고 명명한다. 꺼지지 않는 빛. 두 작가의 대비는 명확하다. 주경의 열정과 노은주의 냉정. 그러나 저자가 포착한 것은 그 차이가 아니라 공통점이다. 두 작가 모두 꽃이라는 소재를 통해 삶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주경은 왕성하게 타오르는 생명력을, 노은주는 시들어가면서도 존재하는 생명의 존엄함을 그려낸다. 우리의 삶이 때로는 뜨겁고 때로는 차갑듯, 두 작가의 그림은 삶의 양면을 보여준다.


책의 중후반부에서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김기창과 현덕식의 이야기였다. 저자는 이 둘을 "장애와 상처 너머"라는 키워드로 묶는다. 김기창은 여덟 살에 장티푸스로 청각을 잃었다. "거리를 활보하던 남자아이는 교실 한쪽 구석으로 숨어버렸다." 하지만 들리지 않던 공백을 채운 것은 그림이었다. 저자가 주목하는 김기창의 작품은 《군마》다. 가로 5미터가 넘는 대작 앞에서 저자는 "말발굽 소리"를 듣는다. 여섯 마리의 말들이 각자 제멋대로 뛰고, 날뛰고, 포효한다. "그 무질서함이 싫지 않다. 숨지 않는 감정들이 통쾌하다." 이 그림은 김기창의 외침이다. 들을 수 없었던 세계를 딛고 나아가겠다는, 소리를 향한 평생의 갈망을 거침없이 드러낸 선언이다. 김기창의 삶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그가 평생 "소리"를 그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정청》 속 축음기에 귀 기울이는 여성들, 《싸움》 속 언쟁하는 사람들, 《군작 싸움》 속 지저귀는 참새들. 들을 수 없는 세계를 살면서도 그는 소리로 가득 찬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아내 박래현과 함께 구화술을 배워 마침내 소리를 내었다. 저자는 이를 "기적"이라고 표현한다. 현덕식의 《유시도》는 또 다른 의미의 외침이다. 검은 화면을 가득 채운 얼음 덩어리들. 저자는 처음에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작품 앞에 오래 서 있으며 깨달았다. "녹진하게 흐르는 물질들은 얼음이었다. 인간 내면의 욕망들을 그리고 싶었단다." 투명하게 빛나면서도 검은 얼음. 그 안에는 "짓이겨진 속내"가 응축되어 있다. 우리는 자주 누군가를 미워하고, 상처받고, 그것을 숨긴다. 현덕식의 얼음은 바로 그 숨겨진 욕망과 상처의 형상이다. 저자는 이 작품 앞에서 "목덜미부터 젖는 듯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학생들이 들어와 얼음을 따라 하며 놀자, 저자는 마음이 풀린다. "못난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겠다고." 김기창과 현덕식, 두 작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내면의 소리를 터트렸다. 한 사람은 청각 장애를 넘어 소리로 가득 찬 세계를 그렸고, 다른 한 사람은 투명한 얼음 속에 검은 욕망을 담아냈다. 둘 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저자는 이들의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나와 너의 욕망들에게 말을 건네본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어. 당신도 부디 자책하지 말기를."


이 책에서 특별히 주목할 부분은 여성 작가들에 대한 서술이다. 저자는 이인성과 정수정을 "시대 속 여성들의 목소리"라는 주제로 연결한다. 이인성은 남성 작가이지만, 그가 그린 여성들의 모습을 통해 저자는 시대를 읽어낸다. 이인성의 1934년작 《노란 옷을 입은 여인상》에서 저자가 발견한 것은 "모던걸"의 자신감이다. "비스듬히 쓴 흰색 모자와 벗겨지듯 신고 있는 슬리퍼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모델은 이인성의 아내 김옥순, 당시 신여성이었다. 그러나 이후 이인성이 그린 여성들의 표정은 점점 무거워진다. 《가을 어느 날》 속 반라의 여성은 "표정이 없다." 《해당화》 속 소녀들의 눈망울은 "비감함"을 더한다. 저자는 이를 이인성 개인의 비극과 연결한다. 아내 김옥순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그림 속 여성들의 눈은 더 자주 감겼다. 하지만 저자가 더 주목하는 것은 "재현되거나 관찰되어 표현될 수밖에 없던 여성들의 모습"이다. 여성은 그려지는 대상이었지, 그리는 주체가 아니었던 시대. 그 한계를 저자는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반면 정수정은 스스로 붓을 든 여성 작가다. 그의 2023년작 《뿔》 앞에서 저자는 혼란을 느낀다. "채도 높은 색들이 엉켜 기묘한 에너지를 뿜는다." 측면으로 돌아선 여성이 피리를 불고 있고, 주변에는 고래 같은 생명체와 애벌레가 있다. 환상인가, 현실인가? 정수정은 대답한다. "나의 욕망과 야망을 인정하고 싶다." 정수정이 그리는 여성들은 더 이상 관찰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칼을 휘두르고, 나체로 사막에서 춤추고, 피리를 분다. "씩씩하고 전투적인 여성"이다. 저자는 이를 "진정한 리얼리즘"이라고 평가한다.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는" 정직함. 정수정의 그림은 100년 전 이인성이 그린 여성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이제 여성은 스스로의 이야기를 한다.


책의 후반부을 장식하는 것은 김환기와 손승범이다. 저자는 이 둘을 "영원을 꿈꾸고 사라짐을 맞이하는"이라는 주제로 묶는다. 김환기의 《영원한 노래》를 보며 저자는 "피아노 선율"을 떠올린다. "지속되는 반음들이 맑고 맑아서 더욱 귀 기울이게 된다." 김환기는 파리에서도, 뉴욕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을 그렸다. 달, 학, 매화, 항아리. 한국적인 것들. 저자는 묻는다. "왜 그토록 바라던 파리에 이르러서도 같은 모티프들을 그렸을까?" 그리고 답한다.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흠모와 바람." 김환기는 영원을 추구했다. 서양의 기법으로 동양의 정서를 담아내며, 추상 속에 구상을, 점 속에 우주를 담았다. 반면 손승범은 "사라지는 것"에 주목한다. 《투명하게 사라지는 믿음 I》에서 저자가 본 것은 "서서히 무너져가는 관계"다. 고대 조각상 위로 나무와 식물이 뒤덮인다. "한때는 영광을 자랑했던 조각상들은 여러 부분 지워져 있다." 버려진 형상들. 하지만 저자는 깨닫는다. "폐기하기에는 망설여지는 자투리 조각들이 느리게 나아가는 예술가의 삶과 닮아 보였다." 손승범의 최근 작품들은 "사라져가는 것"뿐 아니라 "자라나는 것"도 그린다. "예전에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집중했는데, 지금은 주위에 피어 있거나 자라나는 생성하는 것들에도 관심이 간다." 저자는 이를 통해 말한다. "뒷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던 관계에 자책하지 말라고." 김환기와 손승범. 한 사람은 영원을 향했고, 다른 한 사람은 소멸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둘 다 삶의 유한함을 알면서도 캔버스 앞에 섰다. 김환기는 "꿈은 무한하다"고 말했고, 손승범은 "투명하게 사라지는 믿음"을 그렸다. 저자는 이 둘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접근성'이다. 저자는 미술사학자이면서도 전문 용어로 독자를 압도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한국화에 대한 솔직한 속내였다. (…) 유려하지만 난해하게만 느껴졌다." 이상범의 《귀로》를 보고 나서야 한국화를 알고 싶어졌다는 고백은, 미술을 어려워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저자는 작품을 설명할 때도 어렵지 않다. 대신 생생하다. "또각또각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햇볕이 뜨거워서일까, 차가운 색을 따뜻하게 풀어냈기 때문일까." "목덜미부터 젖는 듯하다." 이런 문장들은 독자로 하여금 그림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만든다. 또한 저자는 작품을 삶과 연결한다. 정영주의 그림을 보며 "직장에서의 일들이 벅차게 느껴질 때"를 떠올리고, 노은주의 작품 앞에서 "친구 부모님의 장례식장을 다녀온 날"을 회상한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들이 작품 해석과 자연스럽게 맞물리면서, 독자는 미술이 미술관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잇기'다. 근대와 현대를, 과거와 현재를, 예술과 삶을 잇는 것. 저자는 47명의 예술가를 통해 보여준다. 1920년대 경성에서 고민하던 것과 2020년대 서울에서 고민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김주경과 정영주는 모두 도시를 그렸다. 주경과 노은주는 모두 정물화를 그렸다. 이상범과 권세진은 모두 수묵화를 그렸다. 이인성과 정수정은 모두 여성을 그렸다. 김기창과 현덕식은 모두 내면의 소리를 그렸다. 김환기와 손승범은 모두 시간을 그렸다. 장르도, 기법도, 시대도 다르지만, 그들이 던진 질문은 같다. "어떻게 살 것인가?" 저자는 이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작품들을 통해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독자의 삶으로 이어진다. 정영주의 불빛을 보며 "도시의 밤, 그 안에 가만히 안겨 있고 싶다는 바람"을 느끼고, 노은주의 꽃을 보며 "만개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고, 현덕식의 얼음을 보며 "못난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미술의 힘이다. 100년 전 그림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말을 건다. 캔버스 위의 점과 선과 색이 우리의 삶과 연결된다. 저자는 이 연결고리를 섬세하게 직조해내며, 독자들을 경성에서 서울로, 과거에서 현재로, 미술관에서 삶 속으로 이끈다.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를 읽고 나면, 미술관에 가고 싶어진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다시' 가고 싶어진다. 한 번 스쳐 지나갔던 그림들 앞에 더 오래 서 있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림을 통해 나 자신에게, 내 삶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이 책은 미술사만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미술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근대와 현대를 잇는 것은 결국 시간이 아니라 삶이고, 그 삶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소한의 삼국지 - 최태성의 삼국지 고전 특강
최태성 지음, 이성원 감수 / 프런트페이지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삼국지를 읽는다는 것은 영웅들의 화려한 전투만을 구경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선택이 역사를 어떻게 빚어내는지,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에 무엇이 승패를 가르는지를 목격하는 일이다. 최태성의 <최소한의 삼국지>는 방대한 서사의 숲에서 길을 잃기 쉬운 독자들에게 명확한 이정표를 세운다. 핵심만 추려낸 이 책은 오히려 삼국지가 전하고자 하는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책이 강조하는 첫 번째 메시지는 '함께'의 힘이다. 도원결의로 시작되는 유비, 관우, 장비의 이야기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던지는 역설적 질문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이 생사를 함께 하겠다고 맹세한 순간, 그들은 개인을 넘어 하나의 세력이 되었다. 명분을 가진 유비, 무력의 관우, 경제력의 장비. 각자의 강점이 모여 약점을 보완할 때 비로소 난세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혼자일 때보다 함께일 때 멀리 갈 수 있다는 진리는 지금도 유효하다. 현대 기업들이 전략적 제휴를 맺으며 '도원결의'라는 표현을 빌려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두 번째 메시지는 '절제'다. 삼국지의 주요 전투들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패턴이 발견된다. 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대전 모두에서 승리한 쪽은 절제하는 자였고, 패배한 쪽은 절제를 잃은 자였다. 조조는 관도에서 원소의 교만을 이겼지만, 적벽에서는 자신의 오만으로 패했다. 유비는 제갈량과 함께할 때는 신중했지만, 관우의 복수에 눈이 멀었을 때 모든 것을 잃었다. 절제란 단순히 욕망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상황을 정확히 읽고 균형을 유지하는 지혜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는 이 절제의 전략적 응용이다. 조조와 손권을 당장 타도하려 하지 않고, 세 개의 균형추로 천하를 나누자는 발상. 이것은 현실을 직시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하는 냉철함에서 나온다. 형주를 '빌린다'는 외교적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포기할 수도, 전쟁을 벌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찾아낸 제3의 길. 이는 강약을 조절할 줄 아는 절제된 언어의 힘을 보여준다.

적벽대전의 승리는 개별 천재들의 업적이 아니라 협력의 산물이다. 주유의 화공 작전, 황개의 거짓 항복, 방통의 연환계, 제갈량이 예측한 동남풍. 모든 조각이 제자리를 찾았을 때 80만 대군도 무너졌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각자가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는 점이다. 누구 하나 주인공이 되려 하지 않고, 전체의 승리를 위해 절제된 협력을 이뤄냈다. 군웅할거의 시대는 중앙정부가 무너지고 각자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혼란기였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다. 확실한 정답이 없고, 각자가 자기 길을 찾아야 하는 시대. 그러나 삼국지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혼자서는 멀리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아간 삼고초려는 단순한 겸손의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채워줄 사람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태도다. 제갈량의 출사표는 절제와 충성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보여준다. 현실적으로 불리한 전쟁임을 알면서도 북벌에 나선 것은 맹목적 충성이 아니라, 유비와의 약속과 한나라 부흥이라는 대의를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알았지만,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은 했다. 절제는 때로 포기가 아니라 끝까지 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


복숭아밭의 맹세가 내게 남긴 것, 그것은 오히려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어떤 믿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일상의 언어가 되어버린 지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세 사람이 생사를 함께 하겠다고 맹세하는 장면은 낭만을 넘어 거의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유비에게는 명분이 있었고, 관우에게는 무력이 있었으며, 장비에게는 경제력이 있었다. 각자가 가진 것을 내어놓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겠다는 약속. 그 약속이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들이 혼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을 함께 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묻게 되었다.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인가? 서로의 결핍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가기로 결심하는 관계 말이다. 이것은 비단 삼국지의 영웅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살면서 마주하는 실존적 질문이다.

한나라가 무너지고 군웅할거의 시대가 열렸다는 서술을 읽으며, 나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떠올렸다. 중앙의 권위가 무너지고 각자가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는 모습. 그것은 후한 말기만의 풍경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은유처럼 느껴졌다. 동탁의 폭정 이후 본격화된 혼란의 시기. 조조, 원술, 원소 같은 영웅들이 저마다의 야망을 품고 땅을 나눠 차지했다. 중심이 사라진 자리에 수많은 중심이 생겨났고, 모두가 자신만이 진짜 중심이라고 외쳤다. 그 소란 속에서 백성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영웅들의 서사시 이면에는 늘 이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중심이 무너진 시대였기에 수많은 가능성이 열렸다. 황실의 후손이라는 미약한 명분만으로 시작한 유비가 천하를 셋으로 나누는 구상까지 품을 수 있었던 것도, 손권이 강동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기존 질서가 해체되었기 때문이었다. 혼란은 고통이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 천하삼분지계를 제시하는 제갈량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당시 유비에게는 제대로 된 근거지조차 없었다. 조조와 손권이라는 거대한 세력 사이에서 이리저리 떠도는 신세였다. 그런 유비에게 제갈량은 단순히 전략이 아니라 비전을 선물했다. 북쪽은 조조에게, 동쪽은 손권에게 양보하라는 말. 그것은 패배주의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지혜였다. 당장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무리하게 벌이는 대신,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고 손권과 연합해 조조를 견제하는 전략. 제갈량은 유비에게 로드맵을 그려주었고, 실제로 훗날 그 그림대로 삼국이 정립되었다. 나는 여기서 진정한 지혜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되 가능성의 영역을 포기하지 않는 균형감각일 것이다. 모든 것을 당장 쟁취하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잃지 않는 것.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는 그런 지혜의 결정체였다.

적벽의 불길을 상상하며 나는 전율했다. 8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한 조조의 자신감이 얼마나 대단했을까. 천하를 손에 넣을 것만 같았을 그 순간, 쇠사슬로 연결된 배들이 오히려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안정을 위한 장치가 재앙의 통로가 된 것이다. 주유와 제갈량의 화공 작전, 황개의 거짓 항복, 방통의 계책, 그리고 제갈량이 예측한 동남풍. 모든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지면서 불가능해 보이던 승리가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이 승리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전략의 승리가 아니라 절제의 승리였다. 조조는 자신의 힘을 과신했고, 상대를 과소평가했다. 그는 자신이 이길 수밖에 없다고 믿었기에 경계를 늦췄다. 반면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은 자신들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더 철저히 준비할 수 있었다. 강함이 아니라 절제가 승리를 가져왔다.

형주를 둘러싼 유비와 손권의 대립 상황에서 제갈량이 선택한 '빌리겠다'는 표현은 언어의 힘을 보여주는 명장면이었다.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전쟁도 포기도 아닌 제3의 길을 여는 것. 그것이 바로 외교의 기술이다. '빌린다'는 말은 묘한 여백을 만들어냈다. 일단 유비가 형주를 쓸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영원한 소유가 아니라 임시적 사용이었다. 손권 역시 땅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잠시 빌려준 것이었다. 양쪽 모두에게 명분을 주는 언어. 그 언어 덕분에 동맹은 유지되었고, 유비는 세력을 재건할 시간을 벌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자주 이런 순간을 마주하는가.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창의적인 제3의 길을 찾아야 하는 순간. 제갈량의 외교술은 정치적 수완이 아니라, 갈등을 관리하는 지혜의 표본이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깊이 새겨진 메시지는 절제에 관한 것이었다. 관도대전에서 원소가,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이릉대전에서 유비가 패배한 이유는 모두 절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원술, 관우, 장비 같은 영웅들 역시 절제하지 못할 때 목숨을 잃었다. 특히 유비의 변화는 가슴 아팠다. 관우의 복수를 위해 이성을 잃고 손권과의 전쟁을 감행한 유비. 평생 절제하며 신중하게 판단해온 그였기에, 절제의 끈을 놓은 순간의 파국이 더욱 극적이었다.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게 된 순간, 그는 단 한 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을 잃었다. 절제하는 삶이 쉬운 것은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일생을 수련하듯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며 산다는 것은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내 삶이 지나치지 않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지 수시로 돌아봐야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제는 더욱 어려운 덕목이 되었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높이를 외치는 사회에서 스스로를 제한하고 조정한다는 것은 나약함으로 오해받기 쉽다. 하지만 삼국지는 분명히 말한다. 절제하지 못하는 순간 몰락이 시작된다고.


책을 덮으며 나는 고전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그것은 옛 이야기를 아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초월하는 인간 본성의 패턴을 발견하는 일이다. 욕망, 야망, 우정, 배신, 충성, 복수. 삼국지에 등장하는 모든 감정과 선택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유비, 조조, 손권, 제갈량. 그들은 영웅이지만 동시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들도 두려워했고, 망설였고,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의 선택이 역사를 움직였다는 것. 하지만 우리의 선택 역시 우리 삶의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이라는 전장에서 싸우는 영웅들이다. 책이 내게 남긴 것은 질문이었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절제하지 못하면 몰락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망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복숭아밭의 맹세로 시작해 오장원의 별똥별로 끝나는 이 장대한 서사는, 결국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혼자서는 이룰 수 없기에 함께 하고, 함께 하기 위해 절제하며, 절제하면서도 꿈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가 지금도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우리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최소한의 분량으로 만난 삼국지는 오히려 최대한의 여운을 남겼다. 책을 덮었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 이 이야기를 들고 다시 내 삶으로 돌아갈 차례다. 나는 누구와 함께 가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절제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가. 1800년 전 영웅들이 남긴 질문이 지금, 나에게 향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늙지 않는 뇌 - 최신 신경과학이 밝힌 평생 또렷한 정신으로 사는 방법
데일 브레드슨 지음, 제효영 옮김 / 심심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감퇴하고 인지 기능이 저하되는 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신경학자 Dale E. Bredesen 박사는 그의 저서 <늙지 않는 뇌>에서 이러한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는 인지 기능 저하가 불가피한 운명이 아니라, 과학적 이해와 생활습관 개선, 그리고 조기 개입을 통해 충분히 예방하고 지연시킬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되돌릴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Bredesen 박사는 알츠하이머병을 비롯한 신경퇴행성 질환 연구의 선구자로, 학계와 임상 현장을 넘나들며 뇌 건강에 대한 통합적 접근법을 개척해 왔다. 이 책은 그의 수십 년간의 연구와 임상 경험을 집대성한 결과물로, 질병을 진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예방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Bredesen 박사가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증상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뇌 건강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35세부터 정기적인 검사를 시작할 것을 권장하는데, 이는 숨겨진 위험 요소와 불균형이 이미 그 시기부터 감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은 증상이 나타나기 수십 년 전부터 뇌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따라서 혈액 지표 확인, 식단 조정, 환경적 노출 개선 등의 예방 조치를 수십 년 앞서 취함으로써 인지 활력을 위한 견고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이는 마치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진 집이 폭풍우를 잘 견뎌내는 것과 같다. 조기에 보호받은 뇌는 훗날 신경퇴행성 도전에 저항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러한 접근법은 반응적 치료에서 예방적 관리로의 의료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한다. 우리는 더 이상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미래의 뇌 건강을 설계할 수 있다.

The Ageless Brain의 또 다른 핵심 통찰은 뇌를 보호하는 보편적인 공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 개인은 유전적, 환경적, 생활습관적 요인에 있어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인지 궤적에 영향을 미친다. Bredesen은 식단, 보충제, 수면 루틴, 운동 계획을 개인의 생물학적 필요에 맞춰 조정하는 정밀의학적 접근을 촉구한다. 이러한 "만능 처방은 없다"는 인식은 개인이 자신의 건강 여정에 주도권을 갖도록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는 케토제닉 식단이 효과적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지중해식 식단이 더 적합할 수 있다. 염증 지표, 대사 기능, 독소 수치 등의 바이오마커를 모니터링하고 결과에 따라 조정하며, 한 가지 방법만이 아닌 여러 레버를 함께 활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일반적인 조언보다 훨씬 효과적인 맞춤형 전략을 가능하게 한다.

Bredesen 박사는 식단이 쇠퇴를 촉진하거나 회복력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설탕, 가공식품, 독소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식물 중심의 섬유질이 풍부하고 완만한 케토제닉 식사를 통해 혈당을 안정화하고 뇌 기능을 향상시킬 것을 권장한다. 특히 전략적 단식, 즉 수면 전 일정 시간 동안 공복을 유지하는 것은 휴식을 개선하고 인지 보호에 중요한 세포 복구 과정을 지원한다. 음식을 연료가 아닌 약으로 취급함으로써, 사람들은 영양을 활용하여 뇌의 활력을 노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혈당 스파이크를 최소화하고, 오메가-3 지방산을 충분히 섭취하며, 항산화 물질이 풍부한 채소와 과일을 섭취하는 것을 포함한다. 또한 알코올 섭취를 제한하고, 가공육보다는 생선과 견과류를 선택하는 등의 실천이 뇌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현대 세계는 곰팡이 독소부터 만성 스트레스, 산업 오염 물질에 이르기까지 인지력을 침식하는 수많은 은밀한 위협에 우리를 노출시킨다. Bredesen은 깨끗한 환경을 조성하고, 유해 물질에 대한 노출을 줄이며, 심지어 작은 일상적 독소도 시간이 지나면서 축적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과 적극적인 해독 및 생활습관 조정은 뇌가 지속적인 공격 없이 기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명료함과 집중력이 번성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실내 공기 질 개선, 플라스틱 용기 사용 줄이기, 유기농 식품 선택, 정기적인 환기, 중금속 노출 최소화 등의 구체적인 실천을 포함한다. 또한 만성 스트레스 관리를 위한 명상, 요가, 자연 속 걷기 등도 환경적 건강의 일부로 다뤄진다.

책은 운동과 휴식이 인지 건강의 쌍둥이 기둥임을 분명히 한다. 사이클링이나 조깅과 같은 유산소 활동은 뇌로의 혈류와 산소 공급을 증가시켜 기억력과 집중력을 지원한다. 근력 운동 또한 신경영양인자를 증가시켜 뇌세포의 성장과 연결을 촉진한다. 주당 최소 150분의 중강도 유산소 운동과 주 2-3회의 근력 운동이 권장된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 회복적 수면이다. 수면 중 뇌는 학습을 공고히 하고, 독소를 제거하며, 스스로를 복구한다. 7-9시간의 양질의 수면은 인지 기능 유지에 필수적이다. 이러한 실천들은 재설정 버튼처럼 작동하여, 뇌가 수년 동안 높은 기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갱신을 제공한다. 둘 중 하나라도 소홀히 하는 것은 신체에서 공기나 물을 빼앗는 것과 같아서, 결국 시스템이 고장 난다.

신경가소성, 즉 뇌가 성장하고 새로운 연결을 형성하는 능력은 정신적 장수의 핵심이다. Bredesen은 독자들이 일상, 월간, 연간 도전을 통해 지속적으로 마음을 일상을 넘어서 밀어붙일 것을 권장한다. 이는 새로운 요리법 시도와 같은 간단한 변화부터 언어 학습과 같은 더 큰 노력까지 다양할 수 있다. 근육이 다양한 운동을 통해 강해지듯이, 뇌는 새로움, 창의성, 문제 해결을 통해 번성하며, 평생 동안 날카롭고 유연하며 쇠퇴에 저항력 있게 유지된다. 이는 새로운 취미 배우기, 악기 연주, 외국어 학습, 복잡한 퍼즐이나 전략 게임, 독서와 토론, 예술 활동 등을 포함한다. 중요한 것은 안전지대를 벗어나 뇌에 지속적으로 자극을 주는 것이다.


<늙지 않는 뇌 The Ageless Brain>이 전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희망과 행동이 두려움을 가능성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인지 기능 저하에 대한 두려움은 특히 알츠하이머나 치매의 가족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압도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Bredesen은 쇠퇴가 불가피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실행 가능한 경로를 제공함으로써 이러한 두려움을 재구성한다. 날카로운 정신을 가진 백세인의 이야기와 엄격한 프로토콜로 개선된 환자들의 사례를 통해, 그는 뇌가 많은 사람들이 가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회복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식단, 운동, 학습, 해독을 통해 행동하기로 선택함으로써 사람들은 절망을 권한으로 대체하고, 운명처럼 느껴지던 것을 가능성으로 바꿔준다. 현대 의학은 질병을 치료하는 데 놀라운 진전을 이루었지만, 예방의 힘은 여전히 과소평가되고 있다. 당신은 무력하지 않다. 뇌 노화의 많은 측면은 수정 가능하며, 불가피하지 않다. 더 일찍 시작할수록 더 많은 여유가 생기지만, 변화를 적용하고 정신적 예리함을 보호하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 이 책은 우리에게 지식과 동기를 동시에 제공하며, 뇌 건강을 평생의 프로젝트로 만들 것을 제안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병원에 간 과학자 - 삶과 죽음 사이에서 만난 과학의 발견들
김병민 지음 / 현암사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몸이 불투명하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피부라는 경계 안에 담긴 내밀한 세계는 오직 나만의 것이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나는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경계가 투명해진다면, 뼈와 혈관과 세포의 반란이 타인의 눈앞에 펼쳐진다면, 우리는 어떤 기분을 느낄까. 한 세기 전 뢴트겐의 아내가 자신의 손뼈를 보며 "죽음을 보았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놀라움이상 이었을 것이다. 살아 있으면서 자신의 해골을 마주한다는 것. 그것은 미래와 현재가 중첩되는 기묘한 순간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 뼈만 남을 것을 알지만, 그 지식은 추상적이고 멀리 있다. 하지만 X선 사진 속에서 그것은 지금, 여기, 이미 존재한다. 병을 진단받는다는 것도 비슷한 경험이 아닐까. 어제까지 멀쩡하다고 믿었던 몸 안에 이미 오래전부터 자라고 있던 무언가를 발견하는 순간. 그것은 미래의 죽음이 이미 현재 속에 도착해 있었다는 깨달음이다. 우리는 투명해지고, 취약해지고, 유한해진다. 그리고 그 투명함 속에서 역설적으로 더 많은 것을 보기 시작한다.

원자 하나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작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에너지는 도시를 파괴할 수도,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이 모순 같은 사실이 나는 늘 신비롭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강력하다니. 가장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본질적이라니... 병원 침대에 누워 방사선 치료를 받는 사람은 무엇을 느낄까.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빛이 몸을 관통한다. 그 빛은 우주의 먼 곳에서 폭발한 별의 잔해에서 왔고, 지구에 떨어진 운석 속에 잠들어 있다가, 인간의 손을 거쳐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암세포를 겨냥하고 있다. 138억 년의 시간이 이 한 순간 속에 응축되어 있다. 우리는 별의 자손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그것을 머리로만 이해할 때와, 자신의 몸을 치료하는 물질이 실제로 초신성 폭발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될 때는 전혀 다른 느낌일 것이다. 죽어가는 별이 뿌린 씨앗이 지금 죽어가는 나를 살리고 있다. 우주는 이렇게 순환한다. 죽음은 다른 생명의 재료가 되고, 파괴는 창조의 원천이 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물질 은 이 우주적 순환의 산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산다. 병원이라는 장소는, 그리고 질병이라는 경험은 어쩌면 우리를 다시 그 근원적인 연결로 돌려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우주와 분리된 개인이 아니라, 우주가 잠시 이 형태를 빌려 자신을 경험하는 방식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들이마시는 산소가 우리를 살리는 동시에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호흡이라는 행위는 전혀 다른 의미를 띤다. 산소는 우리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활성산소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세포를 공격하고, DNA를 손상시키고, 노화를 촉진한다. 우리는 살기 위해 우리를 파괴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보다 더 완벽한 역설이 있을까. 이것은 단지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본질에 대한 은유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동시에 우리를 죽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도, 열정을 쏟는 일도, 심지어 행복조차도 우리를 소진시킨다.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태우는 일이고, 그 연소의 끝에는 재만 남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숨쉬기를 멈출 수는 없다. 산소의 독성을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 호흡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완벽함이 아니라 역설 속에 존재한다. 안전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고,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해롭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다. 어쩌면 병이란 것도 이런 역설의 일부가 아닐까. 우리 몸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모순. 세포가 분열하고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은 생명의 증거인데, 그 과정이 때로 통제를 벗어나 암이 된다. 그것은 잘못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복잡한 생명이 되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다.

인간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이름을 붙인다.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질병, 나와 남. 그 경계선은 명확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흐릿하다. 암세포는 외부의 침입자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세포가 변형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인가, 아닌가? 나의 몸이지만 나를 위협하는 존재. 자기이면서 동시에 타자. 이 모호함 앞에서 우리의 언어는 무력해진다. 병원에서 받는 진단명들 (1기, 2기, 양성, 악성)은 의학이 세상을 분류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치료를 위해 필요하고 유용하다. 하지만 그 분류가 자연의 실체를 완벽하게 담아낼 수는 없다. 자연은 우리의 범주보다 훨씬 복잡하고 유동적이다. 암을 '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쟁의 언어다. 그것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질병을 규정한다. 하지만 만약 암을 생태계의 일부로, 우리 몸이라는 복잡한 시스템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본다면 어떨까. 그것은 여전히 다루어야 할 문제지만, 적어도 내 몸이 나를 배신했다는 느낌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이런 관점의 전환이 실제 치료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병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는 달라질 것 같다. 나는 전쟁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흐름 속에 있다. 그 흐름은 때로 격렬하고 고통스럽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섭리에 속해 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한다. 하지만 때로 아는 것은 두려움이다. 자신의 몸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 위안이 될까, 아니면 더 큰 불안을 가져올까. 한 과학자는 자신의 병을 마주하며 과학이라는 언어로 그것을 해석하기로 했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직면이다. 막연한 공포를 구체적인 지식으로 바꾸는 작업. 보이지 않는 적을 보이게 만드는 과정이다. X선 사진을 보는 것은 미래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은 증상이 없어도, 그 이미지는 이미 진행 중인 무언가를 보여준다. 그것을 보고 나면 우리는 더 이상 이전의 무지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 지식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준다.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과학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설명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관적인 인간이다. 같은 진단을 받아도 어떤 이는 절망하고 어떤 이는 싸우기로 결심한다. 지식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그것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각자가 부여하는 의미에 달려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나는 과학자처럼 냉정하게 내 병을 분석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두려움에 휩싸일까.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복잡하다. 우리는 동시에 관찰자이면서 당사자이고, 이성적이면서 감정적이다.

병원의 기계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X선, CT, MRI)은 모두 다른 종류의 빛으로 우리 몸을 들여다본 결과다. 가시광선 너머의 스펙트럼에서 인간은 투명해진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기계가 보고, 그것을 다시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로 번역한다. 인간이 직접 볼 수 있는 빛은 전체 전자기파 스펙트럼의 0.0035%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머지 99% 이상의 세계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존재한다. 자외선도, 적외선도, X선도, 전파도 모두 실재하는 빛이다. 우리가 보지 못할 뿐. 이 사실을 깨달으면 겸손해진다. 우리가 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 우리의 감각이 포착하는 현실은 전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 건강, 질병, 삶, 죽음 - 도 실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좁은 범위 안에서의 해석일 뿐인지도 모른다. 현대 의학은 그 보이지 않는 영역을 조금씩 밝혀왔다. 뢴트겐이 처음 X선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일상이 되었다. 우리는 놀라운 것에 너무 빨리 익숙해진다. 병원에 가서 CT를 찍고 MRI를 찍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잊고 산다. 하지만 그 기계 안에 누워 자신의 몸이 스캔되는 순간을 상상해보면, 그것은 여전히 경이롭다. 보이지 않는 빛이 나를 통과하고, 그 반응을 측정하고, 데이터를 조합해 나의 내부를 재구성한다. 나는 그 과정에서 정보가 되고, 이미지가 되고, 해석의 대상이 된다.


우주의 원소들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별에서 만들어진 탄소가 지구로 왔고, 식물이 되고, 동물이 되고, 인간이 되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들은 수십억 년의 여정을 거쳐 지금 여기 모였다가, 곧 흩어져 다른 곳으로 갈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끝이 아니라 변화다. 나라는 형태가 해체되어 다른 형태가 되는 것. 슬프지만 동시에 위안이 되는 생각이다. 나는 사라지지만 나를 이루던 것들은 계속된다. 어쩌면 수백 년 후 어떤 나무의 일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수천 년 후 어떤 생명의 일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은 이런 순환을 정확하게 추적한다. 탄소 순환, 질소 순환, 물의 순환. 하지만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당신을 이루는 원자는 영원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이 광대한 우주적 순환의 일부고, 우리 앞에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같은 길을 걸어갔고, 우리 뒤에도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걸어갈 것이다. 그 연결감 속에서 우리는 조금은 더 편안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명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그것은 필연적인 소멸을 알면서도 잠시 동안 빛나는 용기라고 한 과학자는 썼다. 이 문장이 오래 머물렀다. 우리는 처음부터 결말을 안다. 태어나는 순간 죽음도 함께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산다. 계획을 세우고, 사랑하고, 창조하고, 의미를 찾는다. 그것이 결국 무로 돌아갈 것을 알면서도. 이것은 비극일 수도 있고 영웅담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느냐는 관점의 문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는 이 용기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병원 침대에 누운 과학자가 자신의 병을 과학의 언어로 번역하려 한 것도 이런 용기의 한 형태가 아닐까.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알고자 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마주하려는 시도. 우리는 결국 모두 같은 운명을 향해 간다. 하지만 그 길을 가는 방식은 각자 다르다. 어떤 이는 눈을 감고 가고, 어떤 이는 눈을 뜨고 간다. 어떤 이는 저항하고, 어떤 이는 받아들인다. 어떤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옳고 그른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그 경계에 설 때,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두려움 속에서도 호기심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고통 속에서도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 끝을 앞두고도 계속 질문할 수 있을까. 답은 모르겠다. 아마도 그 순간이 와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과학이라는 렌즈로 세상을 보는 것이, 질병이라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견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