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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말의 숲을 거닐다 - 다채로운 말로 엮은, 어휘 산책집
권정희 지음 / 리프레시 / 2025년 12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을 넘기다 '는개'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나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비도 아니고 안개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머무는 날씨. 우산을 쓰기엔 애매하고 그냥 맞고 가기엔 불편한 그 순간들을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표현해왔던가. "날씨가 좀 그렇네" 같은 얼버무림으로만 말해왔던 것은 아닐까. '는개' 는 안개비보다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아주 잔잔한 비를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이라고 한다. 충경... 언어의 빈곤함은 삶의 빈곤함과 닿아 있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인식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섬세하게 느끼는가는 결국 우리가 얼마나 많은 언어를 가지고 있는가와 연결된다. 책이 소중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어휘를 나열하는 대신, 각각의 단어가 품고 있는 이야기와 감정의 결을 함께 전한다. '윤슬'이라는 단어를 알기 전, 나는 한강 다리 위에서 반짝이는 물결을 보며 "물이 예쁘네"라고만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햇빛이 수면에 부서져 반짝이는 그 찰나의 아름다움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줄 수 있다. 이름을 아는 순간, 그 풍경은 더 이상 무심히 지나치는 배경이 아니라 내 삶의 한 장면으로 각인된다.
책의 2부에서 다루는 관계의 언어들은 특히 인상적이다. '미쁘다'는 단어를 읽으며, 나는 문득 내가 누군가를 신뢰한다고 말할 때 쓰던 표현들을 떠올렸다. "믿을 만해", "괜찮은 사람이야" 같은 말들. 그런데 '미쁘다'는 단순한 신뢰를 넘어서,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든든하고 믿음직하다는 깊은 뉘앙스를 담고 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무게감이 실려 있다. 현대인들은 점점 더 빠르고 간결한 소통을 추구한다. 이모티콘 하나로, 줄임말 하나로 감정을 표현한다.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감정의 층위를 잃어버린다. '좋아'와 '사랑해'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단계가 존재하는가. '지궁스럽다'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자리한,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정성스러운 마음을 일컫는다. 이런 단어를 알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더 정확하게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다.
3부의 사랑과 이별에 관한 어휘들을 읽으며, 나는 과거의 관계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꽃잠'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 '모스 솔라'가 담고 있는 영원의 약속. 이런 표현들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에 품격을 더한다.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너무 쉽게 이별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감정들을 정확하고 섬세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어떨까. 사랑을 고백할 때, 이별을 말할 때, 우리가 가진 언어의 깊이만큼 그 순간들도 깊어질 수 있지 않을까. 저자가 말하는 '햇귀'를 생각한다. 긴 밤을 지나 서서히 밝아오는 새벽의 빛. 인생에도 이런 순간들이 있다. 어둠이 끝나고 희망이 찾아오는 그 경계. 그 순간을 표현할 언어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더 견딜 수 있고 조금 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책의 가장 큰 위안은 언어를 경쟁의 도구가 아닌 기쁨의 원천으로 되돌려놓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묻는다. "말을 할 때 행복한가요?" 우리는 언제부터 말을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말하는 행위 자체의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잡박하다'는 단어를 배우면서, 나는 내 머릿속 상태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질서 없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그 느낌. 이렇게 내 상태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카타르시스를 준다. 표현되지 않던 것이 표현되는 순간,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 '집알이'라는 우리말이 있다는 것도 신선한 발견이었다. 임장이라는 딱딱한 한자어 대신 쓸 수 있는 정겨운 표현. 이런 단어들을 알아갈수록, 우리말이 얼마나 풍부하고 아름다운지 새삼 깨닫게 된다.
언어는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이자,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열쇠다. 우리가 아는 단어가 많아질수록,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도 넓어진다. '푼더분하다'는 단어를 알면, 둥글고 넉넉한 사람의 모습을 더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윤슬'을 알면, 물결의 아름다움을 더 깊이 감상할 수 있다. 저자가 강조하듯, 이것은 남들보다 뛰어나 보이기 위한 과시가 아니다. 나 자신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고, 세상을 더 섬세하게 느끼기 위한 여정이다. 맞춤법을 틀리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감정과 생각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표현을 찾는 것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다짐해 본다. 오늘 하루 만나는 순간들에 이름을 붙여주겠다고. 무심히 지나칠 뻔한 풍경들을,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정확한 언어로 포착해내겠다고. 그렇게 하루하루 내 언어의 숲이 무성해지면, 내 삶도 그만큼 풍요로워질 것이다. 말의 숲을 거니는 일은 결국 삶의 숲을 거니는 일과 같다. 나무 하나하나에 이름이 있듯, 우리 삶의 순간들에도 각각의 이름이 있다. 그 이름들을 알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진정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