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koogi386님의 서재 (koogi386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hu, 16 Apr 2026 02:49:53 +0900</lastBuildDate><image><title>koogi386</title><url>http://image.alad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koogi386</description></image><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미일동맹이라는 거울 - [미일동맹이라는 거울 - 한미일 안보 체제의 한계와 가능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8878</link><pubDate>Wed, 15 Apr 2026 19:5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887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741&TPaperId=1721887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28/15/coveroff/k85213774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741&TPaperId=1721887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미일동맹이라는 거울 - 한미일 안보 체제의 한계와 가능성</a><br/>지지와 야스아키 지음, 길윤형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만약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고, 이에 미국이 군사개입을 결정한다면 일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재일미군이 대만으로 직접 출격하려 할 경우, 일본 정부는 미국과 사전협의를 거쳐 기지 사용을 승인해야 한다. 이때 적대 세력이 '일본이 미군에게 기지 사용을 허용한다면, 일본도 공격 대상으로 간주하겠다'고 위협해온다면, 일본은 과연 기지 사용을 거부함으로써 분쟁의 당사자가 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을까? 치지와 야스아키(千々和泰明)의 책은 바로 이 불편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흥미로운 주제다.​저자는 방위성 방위연구소의 수석연구관으로, 내각관방 부장관보(안전보장·위기관리 담당)실에서 실무를 경험한 안보 전문가다. 이 책은 그러한 현장 경험과 학문적 분석을 결합하여, 전후 일본이 굳혀온 일미동맹 인식의 '사각지대'를 다섯 가지 주제 즉, 기지 사용, 부대 운용, 사태 대처, 출구전략, 확대억지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검토한다. 핵심 문제의식은 하나다. 일본이 자국의 국내 논리와 희망적 사고에 기반한 '일본적 시점'에만 갇혀 있으면, 안보 현실과의 간극이 커져 오히려 일본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br>저자가 말하는 '일본적 시점'이란, 전후 일본이 안보 논의에서 지속적으로 견지해 온 관점이다. 미국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것, 군사적 협력은 최소한에 그치겠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헌법 해석의 테두리 안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이 시점은 국내 여론과 정치적 합의를 중시하는 일본 특유의 정치 환경에서 형성된 것으로, 그 자체로 비합리적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점이 상대방의 인식이나 지역 전체의 세력균형과는 무관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데 있다. 　예컨대 기지 사용 문제에서 일본은 사전협의 제도를 통해 재일미군의 직접 전투작전 행동에 제약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적대 세력의 눈에 일미동맹은 일체화된 안보 시스템으로 비친다. 일본이 '노(No)'라고 답할 가능성을 고려해 주거나, '어쩔 수 없이 묵인하는 것이니 적국이 아니다'라고 이해해 줄 상대방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중요한 것은 기지 사용 허부(許否) 자체가 아니라, 그 허용 여부가 미국 중심의 동맹 네트워크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하게 하여 지역 평화 질서를 유지하는가에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 바로 저자가 제안하는 '제3자적 시점'이다. 이는 단순히 해외의 시각을 수입하는 것도, 일본의 관점이 틀렸다고 훈계하는 것도 아니다. 국가 간 상호작용과 세력균형이라는 지정학적 현실을 직시하는 관점으로, 일본적 시점을 이 넓은 맥락 안에서 상대화하려는 시도다.​책의 역사적 분석 축을 이루는 개념이 '극동 1905년 체제'다. 러일전쟁 이후 성립된 이 지역 질서는, 전통적 패권국 중국이 약화되거나 자제하는 상황을 전제로, 일본 및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한반도(적어도 남부)와 대만이 세력의 뒷받침 아래 같은 진영에 묶이는 구조를 가리킨다. 1905년에 미국, 영국, 그리고 러시아까지 승인한 포츠머스조약 체제에서 유래한 이 질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영유권 상실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일미동맹, 미한동맹, 대만관계법 등을 통해 사실상 계승하였다. 이 시각에서 보면, 일미동맹은 결코 독립적인 양국 간 조약이 아니다. 미한동맹과 사실상 맞물려 있는 '미일·미한 양동맹'이라는 광역 안보 시스템의 일부로 기능한다. 저자는 이것이 바로 '극동 조항'이나 '조선 밀약' 같은 제도적 장치들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장치들은 미일동맹이 더 큰 지역 안보 체계의 일환으로 작동하기 위한 '경첩'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일본적 시점에서만 바라보면 이 구조는 좀처럼 보이지 않지만, 제3자적 시점으로 전환하는 순간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또한 저자는 한국과 대만에도 비전략핵이 배치되었던 냉전기의 사례를 들어, 미국이 핵 전력을 운용할 때에도 극동 전체를 하나의 전략 단위로 사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오키나와에 배치된 핵무기가 일본 유사사태보다 한반도 유사사태를 주로 상정했다는 사실은, 일미동맹이 지역적 연계 속에서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br>저자가 제시하는 다섯 개의 사각지대 중 특히 인상적인 것은 밀약과 출구전략, 그리고 확대억지에 관한 논의다. 전후 일미 간의 각종 밀약(핵 탑재 함선의 기항, 조선 유사사태에서의 기지 사용, 오키나와 반환 협정)은 일본 국내 정치의 논리에서 보면 민주주의적 투명성의 결여로 비판받는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지정학적 시각에서 재조명한다. 전략 문화가 상이한 두 나라가 동맹을 유지하려면, 국가 안보에 책임을 지는 외교 당국이 고도의 정치적 판단 아래 정책을 조정하는 것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밀약의 존재 자체가 억지력으로 작용하는 아이러니도 지적된다. 지휘권 문제에서도 일미동맹의 특수성이 드러난다.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동맹 간 지휘권 조정 방식을 세 가지, 지휘권 통합형(미한동맹·나토), 일국주도형(이라크전쟁 연합군), 지휘권 병립형 으로 분류한다. 일미동맹은 이 중 지휘권 병립형에 해당한다. 이는 일본이 역사적·정치적 이유로 지역 다자동맹 참여에 소극적이었고, 주변국들 역시 일본의 가입을 꺼렸던 데서 비롯된 구조다. 이 구조가 실제 유사사태 시 어떤 조정 과제를 낳는지에 대해 저자는 냉철하게 분석한다.<br>출구전략 논의에서 저자는 태평양전쟁기 일본의 전쟁 종결 구상을 반면교사로 삼는다. 일본은 독일의 승리와 영국의 굴복을 전제로 미국과의 무승부를 노렸으나, 독일의 패망 이후 '일격평화론'으로 선회했다가 결국 소련의 힘에 기댔다. 이 일련의 과정은 국제정치의 현실보다 국내 합의 형성을 우선시한 결과였다. 저자는 이러한 '결단하지 못하는 헌법 체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유사사태를 어떻게 종결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제1차 걸프전쟁에서 다국적군이 사담 후세인 정권을 온존시킨 것이 결국 2003년 이라크전쟁의 씨앗이 된 사례처럼, '타협적 평화'와 '분쟁 원인의 근본적 해결' 사이의 선택은 단순한 군사 문제가 아니라 심층적인 전략 판단의 문제다.​2015년 안보법제 제정과 집단적 자위권의 한정적 행사 용인, 그리고 일미 확대억지 협의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일본의 안보 논의가 여전히 헌법 준수 여부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고 있다고 진단한다. 물론 헌법의 규정과 해석에 따라 법률을 제정하는 것은 입헌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나 세력균형론의 관점에서 일본의 생존 조건을 논하는 풍토가 아직 시민권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우려다. 　비핵 3원칙과 미국의 확대억지 정책 간의 긴장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핵 탑재 함선의 일시 기항도 사전협의 대상이며, 미국이 이를 요청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핵 탑재 함선이 일본에 기항한 사실이 없다는 '픽션'을 유지해왔다. 이 설명에 납득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저자도 인정한다. 문제는 이 픽션이 국내 정치적 필요에서 나온 것이기에, 실제 억지력 강화라는 관점에서 논의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데 있다.​최근 아시아·태평양에서는 허브 앤 스포크형 동맹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조약상 동맹국이 아닌 국가들 사이의 안보 협력이 심화되고 있다. 한국과 대만, 쿼드(QUAD)를 구성하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인도, 영국, 필리핀 등과의 다국간 네트워크화가 현실적 과제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추세 속에서 우주·사이버·전자파 등 신영역을 포함한 정보 공유와 운용 조정이 중요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극동 1905년 체제'의 현대적 재편 방향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br>책은 어느 한쪽의 이념이나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지 않는다. 저자는 일본의 관점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안보 현실의 전체 그림을 가리는 '사각지대'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역사적 경위를 꼼꼼히 따라가면서도, 일반 독자가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직관에 반하는 논점들을 풀어내는 솜씨는 인상적이다.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엄혹한 안보 환경 속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미동맹을 제3자적 시점에서 바라보는 전략적 논의 자체가 억지력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지정학적 시점을 포함한 깊이 있는 안보 논의가 활성화되는 것, 그것이 이 책이 궁극적으로 촉구하는 바다. 중국의 부상과 대만 문제, 북한의 핵 위협이 현실이 된 오늘날, 이 책이 제기하는 문제는 일본만의 것이 아니다. 한반도 및 인도태평양 지역 전체의 안보 질서를 고민하는 모든 이에게 유효한 사유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28/15/cover150/k85213774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281562</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비트코인, 박수 칠 때 떠나라 - [비트코인, 박수 칠 때 떠나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8859</link><pubDate>Wed, 15 Apr 2026 19: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885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137318&TPaperId=1721885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56/27/coveroff/k61213731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137318&TPaperId=1721885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비트코인, 박수 칠 때 떠나라</a><br/>송인창 지음 / 미류책방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2010년 5월, 플로리다의 한 남자가 피자 두 판을 사면서 비트코인 1만 개를 건넸다.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거래였다. 디지털 토큰 몇 개와 따뜻한 피자를 맞바꾸는 일이 역사적 사건이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14년이 지나 비트코인 한 개의 가격이 1억 원을 넘어서면서, 그 피자 두 판의 가격은 소급적으로 1조 원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비트코인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전설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에서 전혀 다른 것을 읽는다. 피자의 가치가 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대가 오른 것이라는 사실.<br>비트코인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의 잿더미 위에서 태어났다. 타이밍은 절묘했다. 대형 금융 기관들이 탐욕으로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정부는 그 기관들을 공적 자금으로 구제했으며, 중앙은행은 돈을 찍어 시장에 뿌렸다. 평범한 사람들의 저축 가치는 조용히 녹아내렸다. 바로 그 순간,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익명의 존재가 아홉 쪽짜리 논문을 내놓았다. 핵심은 단순했다. 중앙은행도, 정부도, 은행도 필요 없는 화폐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수학적 규칙에 의해 총 발행량이 2,100만 개로 고정되고, 누구도 임의로 늘릴 수 없는 화폐. 불신의 시대에 던져진 신뢰의 코드였다. 이 출발점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만했다. 기술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탈중앙화된 신뢰라는 개념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었고, 블록체인이라는 분산 장부 기술은 실제로 작동했다. 문제는 이 기술적 가능성이 어느 순간부터 투기적 열망과 뒤섞이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뒤섞임을 가속한 것이 바로 '서사'였다.<br>비트코인을 둘러싼 서사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바뀌어 왔다. 처음에는 '미래의 화폐'였다. 기존 법정 화폐를 대체할 새로운 결제 수단이라는 이야기. 그런데 비트코인은 화폐가 되지 못했다. 초당 3건에서 7건의 거래만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비자카드의 초당 2만 4천 건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은 숫자의 문제이기 전에 설계의 한계였다. 그러자 서사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디지털 금'이다. 화폐는 아니지만 금처럼 희소하고 가치를 저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 이 전환이 이루어진 방식이 흥미롭다. 실패의 고백이 아니라 진화의 선언처럼 포장되었다. 처음부터 가치 저장 수단을 지향했다는 듯이 역사가 다시 쓰였다. 그리고 지금은 '사이버스페이스의 맨해튼'이라는 서사가 나돌고, 머지않아 'AI 시대의 기축 자산'이라는 서사가 등장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서사가 자주 바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산이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다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읽는다. 어떤 하나의 서사도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 다음 서사가 필요하다는 신호로. 진짜 가치가 있는 것들은 이야기를 자주 바꾸지 않는다. 전기는 발명된 이래 줄곧 전기였고, 인터넷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인터넷이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효용이 서사를 지탱하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의 서사가 계속 새로 써진다는 것은, 이전 서사가 현실 앞에서 무너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br>'디지털 금'이라는 비유가 있다. 먼저 금이 수천 년간 가치를 인정받아온 데는 이유가 있다. 내구성, 희소성, 분할 가능성이라는 물리적 특성에 더해, 보석으로서의 심미적 가치와 산업적 쓸모가 있다. 누군가 금반지를 끼고 있을 때, 그것은 결혼의 기억이고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다. 금의 가격이 하락해도 금반지를 팔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은, 가격 외의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트코인은? 비트코인 코드가 아름다워서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은 없다. 비트코인을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은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산다. 가격이 오르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면 살 이유도 없다. 이것이 금과 비트코인의 본질적 차이다. 금은 가격이 하락해도 금이지만, 비트코인은 가격이 오르지 않으면 보유할 이유를 잃는다. 그렇다면 비트코인을 살 때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사는가. 주식을 살 때 우리는 기업의 미래 이익에 대한 청구권을 산다. 채권을 살 때는 약속된 이자와 원금을 산다. 부동산을 살 때는 공간이라는 실물 자산과 임대 수익 가능성을 산다. 그렇다면 비트코인을 살 때 우리가 사는 것은, 솔직하게 말하면, '나보다 더 비싸게 사줄 다음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더 큰 바보 이론이라 부른다. 내가 지금 비싸게 사더라도 나보다 더 비싸게 살 더 큰 바보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믿음. 이 믿음이 유지되는 동안은 가격이 오른다. 그리고 이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 구조 전체가 흔들린다.<br>역사는 이 구조를 여러 번 보여주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에서 사람들은 구근이 어떤 색깔의 꽃을 피울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을 가능성으로 포장했다. 18세기 미시시피 회사와 사우스시 회사는 아직 개척되지 않은 신대륙의 황금을 미래 가치로 팔았다. 20세기 말 닷컴 버블은 인터넷이라는 실재하는 기술을 근거로, 실재하지 않는 수익 모델을 가진 기업들을 천문학적으로 평가했다. 공통점이 있다. 새로운 기술이나 제도가 등장하고, 그것을 검증할 역량이 없는 대중이 남들의 행동을 따라가며, 오른 가격이 또 다른 매수자를 불러들이고, 결국 누군가가 가장 비싼 가격에 사서 손실을 떠안는다. 비트코인이 이 구조에서 얼마나 다른지는 아직 역사가 쓰는 중이다. 그러나 구조의 유사성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한 가지 오해를 짚어야 한다. 비트코인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비트코인이 던진 질문들은 진지하다. 중앙은행의 통화 발행 권한을 누가 감시하는가. 금융 시스템의 투명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신뢰는 제도를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금융 위기 이후 더욱 절실해졌고, 비트코인은 그 질문들을 공론장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블록체인 기술 역시 실제로 금융, 물류, 의료 기록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의 가능성과 특정 코인에 대한 투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이 맞았다고 해서 1999년에 망한 닷컴 기업들에 투자한 것이 정당화되지 않듯이, 블록체인 기술의 미래를 믿는다는 것이 비트코인의 현재 가격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기술의 수혜는 그 기술을 상업화하는 기업에게 돌아가지, 기술 위에서 돌아가는 코인을 보유한 사람에게 자동으로 분배되지 않는다.​한국 사회는 이 문제 앞에서 특히 취약한 위치에 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연결되고, 빠르게 유행을 흡수하며, 빠르게 결과를 요구하는 문화. 24시간 열려 있는 거래소, 즉각적인 수익을 가능하게 하는 모바일 환경, 그리고 노력보다 운이 인생을 바꿔줄 수 있다는 피로한 믿음. 1천만 명 이상이 가상자산 계좌를 보유하고, 연간 거래 규모가 2,500조 원에 달한다는 숫자는 활력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충격이 왔을 때 그것이 얼마나 넓게 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이기도 하다. 투기의 피해는 언제나 정보와 자금을 먼저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장 늦게 도착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결국 나는 이 질문으로 돌아온다. 서사가 또 한 번 바뀔 때, 우리는 그것을 진화라 부를 것인가, 도피라 부를 것인가. 화폐가 되지 못했을 때 금이 되었고, 금이 설득력을 잃을 때 맨해튼이 되고 또 다른 무언가가 된다. 이 유연함이 비트코인의 강점처럼 보이지만, 뒤집어 보면 어떤 하나의 정체성도 확고하게 유지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체가 단단한 것은 이야기를 자주 바꿀 필요가 없다.<br>모든 버블의 역사가 일관되게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 버블은 터지기 직전까지 버블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가장 설득력 있는 서사들이 넘쳐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것. 그리고 터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자신이 자산을 산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샀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고 있는 것이 자산인지 서사인지를 묻는 일. 그것이 불편하고 분위기를 깨는 질문처럼 느껴질 때일수록, 더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다.태그<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56/27/cover150/k61213731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562700</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내향인의 말하기 수업 - [내향인의 말하기 수업 - 말수가 적어도 인정받는 사람들의 말하기 전략]</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8845</link><pubDate>Wed, 15 Apr 2026 19: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884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322242X&TPaperId=1721884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56/3/coveroff/896322242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322242X&TPaperId=1721884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내향인의 말하기 수업 - 말수가 적어도 인정받는 사람들의 말하기 전략</a><br/>김해리 지음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나는 꽤 오랫동안 내가 말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회의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머릿속에서 문장을 다듬다 보면 이미 대화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있었고,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그날 꺼내지 못한 말들이 뒤늦게 완성되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게 `적절한 타이밍`을 번번이 놓친 뒤, 나는 나 자신에게 같은 진단을 내리곤 했다. 말주변이 없는 사람. 소극적인 사람. 재미없는 사람이라고.<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그런 자기 낙인 속에서 &lt;내향인의 말하기 수업&gt;을 처음 펼쳤을 때, 책은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왜 말 앞에서 작아지는가?" 나는 그 질문이 나를 향해 있다는 걸 첫 장을 넘기는 순간 알아챘다. 단순히 성격이 내향적이어서가 아니라, 내향성과 불안, 그리고 예민함이 복잡하게 얽혀 말을 막아왔다는 저자의 분석은 지금까지 내가 스스로에게 붙여온 꼬리표를 조용히 다시 검토하게 만들었다. 내 말문을 막은 것은 결함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기질이었다. 책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잡은 것은 내향인의 에너지를 '용량이 다른 배터리'에 비유한 대목이었다. 성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충전 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이 비유는 단순하지만 강하게 꽂혔다. 나는 그동안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빨리 지치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왔는데, 사실 그것은 부족함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에너지를 쓰는 구조의 문제였다. 충전이 더 자주 필요할 뿐이지, 완충된 상태에서 꺼내는 말은 그 누구보다 밀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저자는 내향성, 불안, 예민함이라는 세 가지 기질을 '말하기의 결격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뒤집으면 강력한 무기가 된다고 말한다. 내향성은 말을 신중하게 만들고, 불안은 청중의 반응을 더 민감하게 포착하게 하며, 예민함은 분위기를 빠르게 읽는 능력이 된다는 것이다. 읽는 내내 '이건 나도 본 적 있다'는 감각이 들었다. 분명 나도 발표 전 유독 청중의 표정을 잘 읽었고, 자리의 온도를 누구보다 먼저 감지했다. 그 능력이 단점이 아니라 강점일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은, 오랫동안 내가 외면해온 나의 어떤 부분을 다시 바라보게 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혼자 있는 시간을 '생각의 양조장'으로 표현한 부분이었다. 내향인이 홀로 조용히 보내는 시간은 정보를 자기만의 언어로 숙성시키는 과정이라는 것. 즉흥적으로 내뱉는 말은 공중에 흩어지지만, 오래 고인 생각에서 나오는 말은 뿌리가 깊다. 나는 이 문장에서 멈췄다. 말이 느린 것을 늘 결점으로 여겼는데, 어쩌면 그 시간은 낭비가 아니라 말을 단단하게 빚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은 위로에만 머물지 않는다. 구체적인 전략도 함께 제시한다. 몸의 이완을 통해 말하기 긴장을 푸는 법, 침묵을 실패가 아닌 "생각을 고르는 시간"으로 재정의하는 법, 비언어적 신호를 통해 불안을 감추는 법까지. 이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나만의 복귀 문장'을 만들어두라는 조언이었다. 말이 끊기거나 실수를 했을 때 스스로를 다시 세울 수 있는 한 문장. 그것이 있으면 완전히 무너지는 일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저자는 15년 차 스피치 강사임에도 여전히 마이크 앞에서 떨린다고 고백한다. 다만 "들키지 않는 기술"이 생겼을 뿐이라고. 이 솔직한 문장이 오히려 가장 큰 위안이 되었다. 말하기의 불안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 불안을 부끄럽게 여기는 대신, 불안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사람이 되는 것. 책은 그 가능성을 조용히, 하지만 단단하게 전달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각 챕터 말미에 수록된 연습 노트도 이 책의 깊이를 더하는 부분이다. 단순히 읽고 끝내는 책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말하기 패턴을 들여다보고 기록하도록 유도한다. '말하려다 그만둔 장면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라는 질문 하나에, 나는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 책은 이렇게 독자를 서두르게 하지 않는다. 저자의 말하기처럼, 책도 느리고 신중하게 독자 곁에 앉는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말하기 기술이 아니다. 나를 이해하는 일이다. 말이 느리고 생각이 오래 머무는 것이 부족함이 아니라 하나의 리듬일 수 있다는 것. 그 리듬을 억지로 바꾸려 애쓰는 대신, 자신의 속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말하는 법을 찾아가는 것. 저자는 그 여정을 "나를 다그치는 대신 나만의 속도를 존중하기로 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담담히 표현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을 덮고 나서 나는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하나의 믿음을 수정해야 했다. 나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방식으로, 다른 속도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방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은 조용히 하지만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책의 한 장 제목처럼, 우리는 결국 말을 해야 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서툴러도, 느려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나의 세계는 비로소 타인과 이어지기 시작한다. 책은 그 첫 문장을 꺼내는 용기를 조용히, 하지만 오래 남는 방식으로 전해주는 책이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56/3/cover150/896322242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560354</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자본론을 읽는 시간 - [자본론을 읽는 시간 - 김수행 교수의 자본주의 강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8816</link><pubDate>Wed, 15 Apr 2026 19: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881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42137122&TPaperId=1721881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90/77/coveroff/k14213712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42137122&TPaperId=1721881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자본론을 읽는 시간 - 김수행 교수의 자본주의 강의</a><br/>김수행 지음, 카를 마르크스 원작, 박도영 정리 / 해냄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자본주의는 영원할까. 이 질문이 공허하게 들리던 시절이 있었다.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붕괴된 이후, 많은 사람들은 역사가 자본주의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는 그 확신에 균열을 냈다. 거대 투자은행들이 연달아 쓰러지고 수백만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는 현장에서, 바로 얼마 전까지 "시장은 항상 효율적이다"라고 가르치던 경제학자들이 공적 자금을 투입해 금융기관을 살려야 한다며 목청을 높였다. 이 뻔뻔한 돌변 앞에서 사람들은 다시 마르크스를 꺼내 들었다. &lt;자본론을 읽는 시간&gt;은 그 맥락에서 태어난 책이다. 마르크스의 생애와 방법론, 화폐론, 노동론, 그리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압축하여 독자에게 건네는 이 책은,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 누구에게나 유효한 안내서다.<br>이 책이 먼저 짚는 것은 주류경제학의 한계다. 주류경제학은 인간을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으로 전제하며, 이들이 자신의 재산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효용과 이윤을 극대화한다고 본다. 이 단순한 가정 위에 정교한 수학적 모델이 쌓인다. 그러나 이 모델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갈등을 처음부터 지워버린다. 갈등이 없으니 착취도 없고, 착취가 없으니 위기의 구조적 원인도 설명할 수 없다. 2008년의 사태가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마르크스는 이보다 훨씬 앞서 이 문제를 꿰뚫었다. 그는 주류경제학이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그들의 상식을 정교하게 합리화하는 속류 경제학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어떤 이론이 옳은가를 따지지 않고, 그 이론이 자본가에게 이익이 되는가만을 기준으로 삼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 비판은 150년이 넘은 지금도 날카롭게 살아있다.​마르크스를 읽는 일은 그의 삶을 이해하는 일과 떼어낼 수 없다. 그는 프러시아 왕정으로부터 교수직을 거부당하고,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추방되었으며, 결국 런던으로 망명하여 평생 가난 속에서 살았다.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들은 읽기 민망할 정도로 절박하다. 전당포에 옷을 맡겨두어 외출도 못 하고, 돈이 없어 아픈 가족에게 의사를 부르지 못했으며, 수입의 4분의 1을 전당포 이자로 냈다. 세금 독촉장을 받으며 재산 압류를 걱정하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그는 대영박물관 도서실에서 아담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를 비롯한 경제학자 199명의 저작을 섭렵하며 연구를 이어갔다. 『자본론』 제1권이 나온 것은 1867년, 그가 이미 49세였을 때다. 제2권과 제3권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엥겔스가 남겨진 원고를 정리하여 출간했다. 이 책이 한 개인의 헌신으로만 완성될 수 없었음을, 그리고 엥겔스라는 평생의 동지 없이는 마르크스도 없었음을 저자는 조용히 상기시킨다. 그의 성격에 관한 묘사도 흥미롭다. 딸들과 함께한 고백 게임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은 "싸우는 것"이고 불행은 "굴복하는 것"이라 답했다. 가장 좋아하는 좌우명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였다. 이 말들은 그가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려 한 혁명가였음을 보여준다.<br>마르크스의 핵심 기여 중 하나는 자본주의를 인류 역사의 영원한 종착점이 아니라 특수한 하나의 단계로 파악한 것이다. 원시공산 사회, 노예 사회, 봉건 사회를 거쳐 자본주의에 이른 인류는 앞으로도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이 관점은 주류경제학이 자본주의를 인간 본성에 가장 적합한 영구불멸의 체제라 보는 것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 마르크스가 만들어낸 개념이 생산양식이다. 생산양식은 경제적 토대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로 구성된다. 토대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이루어지며, 토대 위에 정치·법률·문화 등 상부구조가 세워진다.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기존의 생산관계와 모순을 일으킬 때 사회혁명이 발생한다는 것이 역사적 유물론의 핵심이다. 헤겔이 절대정신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본 것과 달리, 마르크스는 인간의 물질적 생산 조건이 역사를 규정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주연배우는 자본가 계급과 임금노동자 계급이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를 "자본이 사람으로 변신한 것"이라 불렀다. 자본가가 박애주의자여서 노동자에게 높은 임금을 준다면 경쟁에서 밀려 문을 닫게 된다. 이 구조 안에서 자본가는 이윤을 추구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주류경제학이 개인의 본성에서 출발한다면, 마르크스는 개인이 놓인 구조와 관계에서 출발한다.​책은 마르크스의 화폐론도 비교적 상세히 소개한다. 화폐는 처음부터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상품들이 서로의 가치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점차 하나의 상품이 모든 상품의 가치를 대표하는 일반적 등가물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화폐가 탄생했다. 금이 그 역할을 맡은 것은 썩지 않고, 분할할 수 있으며, 운반이 쉬운 특성 덕분이었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금이 처음부터 모든 상품을 구매할 힘을 가진 것처럼 착각하는 현상을 화폐에 대한 물신숭배라 불렀다. 신하들이 왕이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복종하기 때문에 그가 왕이 되는 것처럼, 금도 화폐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그 힘을 갖게 된 것이다. 현재의 불환지폐도 이 연장선에 있다. 오늘날의 지폐는 금과 아무 관련이 없지만 국가가 법화로 지정하고 모든 상거래에서 통용되기 때문에 화폐로 기능한다. 그 가치는 지폐 자체를 생산하는 비용이 아니라, 그 지폐가 실제로 구매하는 상품들의 가치를 반영함으로써 형성된다. 달이 스스로 빛을 내지 않고 태양빛을 반사하듯, 불환지폐는 노동생산물의 가치를 반영한다. 화폐경제가 물물교환경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판매와 구매가 시간적·공간적으로 분리된다는 것이다. 이 분리 자체가 과잉생산 공황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상품을 팔아 화폐를 손에 쥔 사람이 곧바로 다른 상품을 구매하지 않으면, 누군가의 상품은 팔리지 않은 채 창고에 쌓인다.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조한다"는 세의 법칙은 물물교환 경제에서나 통하는 이야기다.<br>책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전개되는 부분은 노동과 기계에 관한 논의다. 기계 그 자체는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힘든 일을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가가 이윤을 위해 기계를 도입하면 결과는 정반대가 된다. 노동시간은 오히려 늘어나고, 컨베이어벨트는 더 빠르게 돌며, 기존 노동자들은 해고된다. 기계 자체는 노동자를 해방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본주의적 이용은 노동자를 더 깊이 속박한다. 단순협업, 매뉴팩처, 기계제 대공업으로 이어지는 생산방식의 발전은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노동자를 점점 더 자본에 종속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매뉴팩처에서 숙련노동자는 아직 자본가에게 협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계가 들어오자 숙련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노동자는 기계의 리듬에 맞추는 부속물로 전락했다. 형식적 종속에서 실질적 종속으로의 전환이다. 이 구조 안에서 노동자가 창조하는 가치는 임금과 잉여가치로 나뉜다. 산업자본가는 이 잉여가치에서 금융자본가에게 이자를, 상업자본가에게 상업이윤을, 지주에게 지대를 지급하고 남는 것을 기업이윤으로 가진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이 기본 구도이지만, 잉여가치를 둘러싼 자본가들 사이의 갈등도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임금을 낮추고 잉여가치를 늘리는 문제에서는 자본가 계급 전체가 합심하여 노동자 계급과 싸운다.<br>마르크스가 새로운 사회에 대해 남긴 묘사는 자본론 전체의 0.5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는 청사진을 그리는 대신 자본주의가 왜 스스로 붕괴할 수밖에 없는지를 분석하는 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했다. 공황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발전한 생산력을 더 이상 담아내지 못하는 순간에 주기적으로 폭발한다. 새로운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다.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각자의 노동력을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사용한다. 낮은 단계에서는 노동한 만큼 분배하고, 높은 단계에서는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 상품이 사라지면 화폐도 사라진다. 비생산적 노동이 줄어들고 노동생산성이 높아지면서 각 개인의 노동시간은 대폭 단축된다. 과잉생산 공황은 생산의 목적이 자본 증식이 아니라 주민의 필요 충족으로 바뀌는 순간 사라진다. 이 전망이 유토피아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이 소수가 다수를 수탈했던 자본주의의 형성보다 훨씬 쉽다고 보았다. 전자는 소수가 인민대중을 수탈하는 과정이었지만, 후자는 다수인 인민대중이 소수 횡령자를 수탈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br>책은 방대한 마르크스 경제학을 압축하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 읽다 보면 오늘의 현실이 책 속 묘사와 겹쳐 보이는 순간이 여러 번 찾아온다. 비정규직의 확산, 플랫폼 자본주의에서의 노동 착취, 금융 투기의 반복적 붕괴, 양극화의 심화. 마르크스가 분석한 구조는 150년이 지난 지금도 작동 중이다. 물론 이 책이 모든 답을 주지는 않는다. 새로운 사회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오늘의 조건에서 어떤 전략이 가능한가는 여전히 열린 질문이다. 마르크스 자신도 이를 현장에서 씨름하는 사람들이 구체화해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 씨름을 시작하기 위한 지적 토대를 닦는 일, 그것이 이 책이 독자에게 건네는 초대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90/77/cover150/k14213712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907772</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 [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 국립국어원 상담실 연구원의 365일 노동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4628</link><pubDate>Mon, 13 Apr 2026 19: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462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02137215&TPaperId=1721462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54/42/coveroff/k6021372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02137215&TPaperId=1721462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 국립국어원 상담실 연구원의 365일 노동기</a><br/>이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맞춤법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 썸을 타던 사람이 "빨리 낳으세요"라고 문자를 보내는 순간 호감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이제 낯설지 않다. 글자가 얼굴을 대신하는 시대, 문장이 곧 그 사람의 첫인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맞춤법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아니, 그 전에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맞춤법이란 대체 무엇인가.<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국립국어원에서 국어 상담을 하는 연구원이 하루에 처리하는 질문이 평균 60건에서 100건이라고 한다. 전화로, 카카오톡으로, 온라인 게시판으로 쏟아지는 질문들은 한 해에 20만 건에 육박한다. 이 숫자 앞에서 나는 처음에 감탄했다. 한국인의 언어에 대한 관심이 이토록 크구나, 하고. 그런데 곧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그 20만 건의 질문들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순수한 호기심? 아니면 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가 언어를 대하는 방식이 보인다. 맞춤법을 잘 지키는 것이 교양의 증거가 되고, 한 글자의 실수가 그 사람 전체를 흐릿하게 만드는 세상. 이것이 언어 본연의 기능과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 나는 자꾸 의심하게 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언어는 원래 소통을 위한 도구다. 의미를 전달하고, 마음을 나누고, 관계를 잇는 것.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언어는 그 자체로 평가의 도구가 되었다. 문자 메시지 하나에 담긴 맞춤법이 그 사람의 지성을, 성실함을, 심지어 인품을 가늠하는 척도처럼 여겨진다. SNS 시대의 소통이 글로 먼저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글로 소통하는 방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 글을 읽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몇 십 년 전만 해도 동네 가게에 "마춤 양복", "어름 있슴" 같은 표기가 버젓이 붙어 있었고, 아무도 그것을 교양의 결함으로 여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간판이 가리키는 의미를 읽었지, 표기법을 심판하지 않았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사람들이 더 학식 있어진 것일까, 아니면 언어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 것일까.<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맞춤법이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 규칙을 만들고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 선명해진다. '늘이다'와 '늘리다' 사이에서 수년째 논쟁이 이어지고, '못하다'와 '못 해' 사이의 경계는 무려 두 차례 연찬회를 거쳐 결론이 뒤집혔다. '그쪽 분'과 '그쪽분' 중 어느 것이 맞는지를 두고 언어 전문가들이 열띤 토론을 벌인다. '다시 한번'의 띄어쓰기 문제는 5년 동안 세 차례나 회의 안건으로 올라온다. 이 사실이 내게는 묘한 안도감을 준다. 국어의 규범을 만들고 지키는 사람들조차 끊임없이 의심하고, 토론하고, 때로는 결론을 번복한다. 맞춤법은 완성된 체계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움직이는 유기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틀림'이란 무엇인가. 오늘의 정답이 내일은 달라질 수 있는 세계에서, 한 글자의 오기가 사람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이 될 수 있을까.<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아밀라아제'가 '아밀레이스'로 바뀐 이야기는 특히 인상적이다. 수십 년간 교과서에 실렸던 단어가 일제강점기의 흔적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날 조용히 교체되었다는 사실. 그것을 모르는 세대와 아는 세대 사이에 자연스럽게 세대 차이가 생겼다. 언어는 이처럼 시간과 역사를 품고 흐른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표현 하나에도 오랜 시간의 켜가 쌓여 있다. 언어를 규범으로만 보면 이 두께를 느끼기 어렵다. '짜장면'과 '자장면'이 함께 표준어가 된 이후에도, 국립국어원 사람들끼리 밥을 먹으러 가면 절반은 자장면을, 절반은 짜장면을 시킨다는 이야기도 그렇다. 표준어 결정이 사람들의 언어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꾸지는 못한다. 언어는 규범보다 먼저 삶 속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규정이 정해지기 전부터 이미 말하고 있었고, 규정이 바뀐 후에도 몸에 익은 말을 쉽게 놓지 못한다. 이것은 언어의 특성인 동시에, 언어와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맞춤법에 대한 강박이 오히려 언어의 자유로움을 해칠 수 있다는 생각을 나는 오랫동안 막연하게 품어왔다.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이 어떤 문장을 보는 순간 "이건 비문이다", "이건 어색하다"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고, 그 이유를 거꾸로 끌어맞추는 습관이 생긴다는 고백은 그 막연함을 언어로 풀어준다. 교정하는 능력이 정교해질수록 오히려 언어 현실을 받아들이는 눈이 좁아질 수 있다는 것. 규범을 지키는 일과 언어를 이해하는 일은 같은 방향을 향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개맛있다'는 표현을 생각해본다. 표준어도 아니고, 어법에도 맞지 않지만, 그 표현이 가진 전달력은 "매우 맛있다"나 "정말 맛있다"가 따라갈 수 없다. 그 잡채덮밥이 얼마나 사람을 화나게 만들 정도로 맛있는지, 그 찰진 감각을 "개맛있다"는 말은 순간적으로 전달한다. 언어의 힘은 때로 규범의 바깥에서 온다. 그리고 그 힘을 알아보는 것 역시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이다. 규범은 소통을 돕기 위한 도구다. 그 출발점을 잊으면 규범은 소통을 막는 장벽이 된다. 맞춤법을 이유로 마음이 멀어지고, 한 글자의 실수로 사람 전체가 평가받는 문화는, 언어가 가진 본래의 역할로부터 멀어진 모습이다. 틀린 표기 너머에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을, 그 말이 전하려 했던 의미를 먼저 읽으려는 태도가 필요하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국어 상담 연구원의 말처럼, 모든 규정을 외우고 있는 것이 전문가가 아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내는 기술, 그리고 정답을 모르기에 더 겸손해지는 자세. 그것이 오히려 언어를 진지하게 대하는 방식일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맞춤법을 완벽하게 구사해야 한다는 강박보다, 내가 전하려는 말이 상대에게 닿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 방향으로 조금 이동할 수 있다면, 언어는 우리를 가르는 선이 아니라 이어주는 다리가 될 것이다. 우리글은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연찬회 탁자 위에서, 상담 전화 수화기 너머에서, 카카오톡 메시지창 안에서. 그 움직임을 조금 더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맞춤법은 흥미로운 탐구의 대상이 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54/42/cover150/k6021372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544217</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살찌지 않는 몸 - [살찌지 않는 몸 - 평생 가볍게 살아가는 4주 대사 회복 프로젝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4610</link><pubDate>Mon, 13 Apr 2026 19: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461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299534&TPaperId=1721461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58/47/coveroff/8901299534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299534&TPaperId=1721461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살찌지 않는 몸 - 평생 가볍게 살아가는 4주 대사 회복 프로젝트</a><br/>우창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03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잠깐 망설인다. 아주 잠깐, 0.5초쯤. 그리고 손은 이미 원하던 것을 집고 있다. 그게 내 오랜 패턴이었다. 다이어트를 처음 결심한 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 고등학교 시절쯤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수십 번의 다이어트를 시작했고, 수십 번을 포기했으며, 매번 더 자책하는 마음만 키워왔다. 의지가 약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충동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단정 지었다. 먹으면서 자책하고, 자책하면서 또 먹는 이상한 루프를 나는 그냥 '내 성격 문제'로 여기고 살았다. 그런데 살찌지 않는 몸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이 물음이 생겼다. 정말 내 의지가 문제였을까?<br>책은 첫 장부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살찐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라고.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위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억울하기도 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듣고 싶어서 오래 기다려온 것 같았으니까. 사실 나는 먹는 것에 의미를 붙이는 사람이다. 힘든 하루를 보냈을 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허전할 때, 음식은 언제나 가장 손쉬운 답이었다. 특히 스트레스가 쌓이는 날이면 작업실 한켠에 놓인 달달한 커피 한 캔은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이것 하나로 오늘의 고단함을 닫을 수 있다는 착각. 그게 반복되면서 나는 음식을 통해 감정을 조절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책은 이 현상을 대사의 언어로 설명한다. 혈당이 자주 오르내리면 뇌는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고, 식사는 배고픔에 대한 반응이 아닌 보상의 수단으로 바뀐다고. 그렇다면 내가 끊지 못한 건 의지력 부족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작동하도록 재설정된 몸의 문제였다는 이야기다. 이 사실이 나를 편하게 해주는 동시에, 무섭게 만들었다.<br>나의 작업실은 먹기 좋은 환경으로 최적화되어 있다. 서랍 속 간식, 책상 위 커피, 밤늦게 작업하다 켜는 배달 앱. 의식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뭔가를 입에 달고 살 수 있는 구조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 환경을 굳이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조심하면 되지'라는 안일함으로. 그런데 헨리 딤블비가 말한 것처럼, 개인의 의지는 애초에 이 환경과 싸워 이기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정크푸드 산업은 수십 년의 연구와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 사람들이 멈추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영국 성인 셋 중 하나가 비만이라는 통계, 한국도 다르지 않다. 개인이 매일 그 시스템을 상대로 의지력 싸움을 벌이는 건 처음부터 공정하지 않은 게임이다.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왜냐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내 실패가 나의 잘못이 아니게 되어버리니까. 역설적으로, 실패를 온전히 내 탓으로 돌리는 게 더 편할 때가 있다. 그쪽이 통제감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못난 것이라면, 내가 잘 하면 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사실은 그게 더 위험한 착각이다. 스스로를 벌하는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다이어트에 실패할 때마다 '이번엔 진짜'를 외치고 더 혹독하게 굶으며 더 빨리 포기하는 악순환. 나는 그걸 너무 많이 반복했다. 의지는 소모되는 자원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유혹에 저항하면서 쓰고 나면, 밤이 되면 남아있지 않다. 문제는 그 의지를 계속 써야만 유지되는 구조 속에 나를 밀어 넣고 있었다는 것이다. 구조가 잘못된 거였다. 나의 의지력이 아니라.<br>위고비, 마운자로. 이름이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주사 한 방이면 식욕이 줄고, 저절로 살이 빠진다는 이야기들. 솔직히 말하면,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평생 이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쉬운 방법이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책은 이 부분에서 냉정하게 말한다. 약이 만들어주는 식욕 감소를 제대로 된 생활 변화 없이 그냥 굶기로 소진하면, 결국 근육을 잃고 요요만 남는다고. GLP-1 계열 약물이 열어준 가능성은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마법은 아니다. 약은 도구이고, 도구를 어떻게 쓰느냐가 결과를 결정한다. 책에서 제시하는 3M 즉 식사, 활동, 마음 관리라는 세 축은 사실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잘 먹고, 잘 움직이고, 마음을 잘 돌봐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안다. 문제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의지로, 처음부터 완벽하게 해내려 한다는 것이다. 책이 말하는 핵심은 다르다. 지금 가장 무너진 축이 어디인지 진단하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나에게는 마음 관리가 가장 먼저였다.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먹는 것으로 감정을 처리하는 습관이 문제였으니까. 식후에 10분 산책하는 것, 천천히 먹는 것, 수면 전 스마트폰을 줄이는 것. 거창한 변화가 아니다. 이미 있는 생활의 리듬에 아주 작은 것을 연결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한 번 빠져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붙잡고 싶었던 문장이다. 습관은 완벽하게 지켜야 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돌아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br>비만은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라 질병이다. 세계보건기구도 그렇게 분류하고 있고, 대사와 호르몬의 언어로 설명하면 내 몸이 왜 이렇게 작동해왔는지 이해가 된다. 이해가 된다는 것은 용서의 시작이기도 하다. 나를 향한 오래된 비난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살찌지 않는 몸을 만들겠다는 목표보다, 살찌기 어려운 방향으로 일상을 설계하겠다는 것. 의지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구조가 나를 돕도록 바꾸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책을 덮고 나서 생각한 것이다. 아직도 작업실에 달달한 커피가 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더 천천히 마셨다. 그게 지금 나의 시작이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58/47/cover150/8901299534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584786</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세계사를 바꾼 명화 이야기 - [세계사를 바꾼 명화 이야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4599</link><pubDate>Mon, 13 Apr 2026 19: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459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32137706&TPaperId=1721459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0/5/coveroff/k13213770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32137706&TPaperId=1721459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세계사를 바꾼 명화 이야기</a><br/>니시오카 후미히코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6년 03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미술관 앞에 줄을 서는 사람들은 무엇을 보러 가는 것일까. 거장의 붓 터치를? 역사의 숨결을? 아니면 SNS에 올릴 인증샷을? 어느 것이든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 줄의 기원을, 그 명화가 오늘날 '명화'로 불리게 된 경위를 추적해 들어가다 보면 뜻밖의 풍경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는 붓과 물감보다 더 치열하게 움직인 다른 종류의 손들이 있었다. 화상의 손, 권력자의 손, 마케터의 손이다. 예술과 비즈니스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느껴진다. 예술은 숭고한 것이고, 비즈니스는 세속적인 것이라는 이분법이 우리 머릿속에 오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술의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구분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금방 드러난다. 위대한 작품 뒤에는 언제나 그것을 팔기 위한 전략이 있었고, 그 전략이 때로는 작품 자체만큼이나 역사를 바꾸었다.<br>16세기 유럽을 뒤흔든 종교개혁은 예술계에 청천벽력이었다.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혁의 물결은 교회 내 성상과 종교화를 우상숭배로 규정했고, 그 결과 수백 년간 화가들의 가장 큰 고객이었던 교회가 시장에서 사라져버렸다. 화가와 화상들에게는 그야말로 생존의 위기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종교화 파괴가 가장 격렬했던 네덜란드에서, 역설적으로 역사상 유례없는 '회화 열풍'이 일어난 것이다. 잃어버린 고객을 대신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했던 화가와 화상들은 시선을 돌렸다. 교회도 왕실도 아닌, 도시에서 부를 축적해가던 일반 시민들을 향해서. 이 전환은 단순히 고객층의 변화가 아니라 미술품 생산 시스템 전체의 혁명이었다. 기존의 방식은 의뢰가 들어온 후에야 붓을 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화가들은 누가 살지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를 위해 작품을 미리 만들어 선반에 올려두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갤러리 전시 판매' 모델이 바로 이 위기의 산물이다. 17세기 네덜란드 한 나라에서 제작된 그림이 수백만 점에 달했다는 사실은 이 전략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웅변한다. 소재도 바뀌었다.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사라진 자리에 정물화와 풍경화, 그리고 일상의 인물들이 들어섰다. 예술의 주인공이 신에서 인간으로, 성당에서 부엌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취향의 변화가 아니라 새로운 고객의 욕구에 철저하게 부응한 상품 개발의 결과였다.<br>오늘날 수천만 명의 관람객을 불러 모으는 페르메이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은 처음부터 미술관에 걸려 있던 게 아니었다. 한 프랑스 미술 애호가의 기록에 따르면, 그 그림은 페르메이르 집 근처의 평범한 빵집 벽에 걸려 있었다. 화가가 3년치 빵값 대신 납품한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단지 가난한 화가의 궁여지책이었을까. 그림 속을 들여다보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화면 안의 하녀는 빵 푸딩을 만들기 위해 우유를 따르고 있다. 탁자에는 빵 바구니와 맥주잔이 놓여 있다. 딱딱하게 굳은 빵도 우유와 함께 조리하면 훌륭한 음식이 된다는 메시지를, 이 그림보다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시각 자료가 또 있을까.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탁월한 제품 광고였다. 이 에피소드가 알려주는 것은 예술이 처음부터 숭고한 영역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은 빵집의 벽에 걸렸고, 거래의 수단이었으며, 생활의 도구였다. 그것이 수백 년의 시간을 거쳐 '명화'라는 지위를 얻게 된 것은, 작품 자체의 질 외에도 그것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와 해석과 제도적 장치들이 쌓인 결과다.<br>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에서 황제는 백마 위에서 폭풍처럼 펄럭이는 망토를 두르고 용맹하게 산을 오른다. 그러나 사실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을 때 탄 것은 추위에 강한 노새였다. 실제 체형도 그림 속 훤칠한 미남 청년과는 거리가 있었다. 나폴레옹은 회화가 가진 커뮤니케이션의 힘을 본능적으로 꿰뚫고 있었다. 그는 예술가를 고용해 자신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설계했다. 그림 속 바위에는 한니발과 샤를마뉴 대제의 이름 옆에 '보나파르트'를 새겨 넣었다. 전설적 영웅들의 반열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이 의도적 구성은 오늘날의 브랜딩 전략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 그림은 여러 점 복제되어 각지에 배포되었다. 제국의 이미지를 전파하는 홍보물로 기능한 것이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교과서에 실려 나폴레옹의 영웅적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있으니, 이것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이미지 마케팅 사례 중 하나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인상파 작품들은, 처음 등장했을 때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혹독한 외면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 그것은 미완성처럼 보이는 낯선 그림들이었다. 이 '잡동사니' 같은 그림들의 가치를 세상에 알린 인물이 화상 폴 뒤랑뤼엘이었다. 그의 전략은 단순하지만 강력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연출된 매장에 금테 액자와 화려한 소품들을 배치하고, 찾아오는 고객을 귀빈처럼 대접했다. 높은 가격표는 오히려 고객의 욕망을 자극했다. 작품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 호화로운 연출 속에서 고객은 자신이 세련된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는 기분에 취했고, 체면 때문에라도 지갑을 열었다. 이것은 오늘날 명품 브랜드들이 구사하는 마케팅의 원형이다. 상품의 기능적 가치만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유하는 경험 자체를 판매하는 방식. 인상파 그림을 팔기 위해 고안된 이 전략은 이후 갤러리, 보석 매장, 고급 호텔에 이르기까지 프리미엄 시장 전반의 공통 문법이 되었다.<br>명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예술이 왠지 속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명화들이 사실은 광고였고, 프로파간다였고, 마케팅의 산물이었다니. 그러나 이것은 예술의 가치를 폄하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예술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권력자들이 그림을 이용해 자신을 홍보하고, 화상들이 시장을 만들어낸 것은, 결국 시각 이미지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직접적인 언어이기 때문이었다. 그 언어의 힘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비즈니스의 렌즈로 미술사를 들여다보는 것은 예술을 세속화하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술이 언제나 사람 사는 세상 한가운데 있었음을, 시대의 욕망과 갈등하고 타협하며 존재해왔음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복잡한 맥락을 알고 난 뒤에도 작품이 여전히 아름답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예술의 진짜 힘을 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팔리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나 살아남은 것들 중에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미술의 역사는 이 두 명제가 서로를 파괴하지 않는다는 증거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0/5/cover150/k13213770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00590</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수학자의 몰입 - [수학자의 몰입 - 평범한 소년은 어떻게 수학사의 난제를 해결한 위대한 수학자가 되었을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4588</link><pubDate>Mon, 13 Apr 2026 19:3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458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02137703&TPaperId=1721458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49/63/coveroff/k70213770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02137703&TPaperId=1721458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수학자의 몰입 - 평범한 소년은 어떻게 수학사의 난제를 해결한 위대한 수학자가 되었을까?</a><br/>오카 기요시 지음, 정회성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6년 03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시험지를 내고 교실 문을 나서는 순간, 갑자기 알아버리는 것들이 있다. 긴장이 풀리는 바로 그 찰나, "아, 거기서 틀렸구나"라는 깨달음이 불쑥 찾아온다.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이 경험을 두고 일본의 수학자 오카 기요시는 범상치 않은 이름을 붙였다. 그는 그것을 대자연의 순수 직관이라고 불렀다. 틀린 것을 알아챈 것이니 실패의 순간처럼 보이지만, 오카에게 그것은 오히려 지성이 제대로 작동하는 증거였다. 긴장과 강박이 걷히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맑아지고, 그 맑아진 순간에 지성의 빛이 스며든다는 것이다. 뜨겁게 달구고 차갑게 식히기를 반복하는 도검 장인의 방식처럼, 인간의 지성도 그렇게 단련된다고 그는 믿었다. 끊임없이 가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식히고 쉬고 내려놓는 과정이 있어야 비로소 날카로워진다는 것이다. 오카는 몰입을 단순한 집중력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오랫동안 우리는 몰입을 의지의 언어로 설명해왔다. 더 오래, 더 강하게, 더 끈질기게 버티는 것. 하지만 오카가 말하는 몰입은 그보다 훨씬 섬세한 무엇이다. 그것은 정서(情緒)를 통해 이루어지는 행위다.<br>오카 기요시는 다변수 함수론의 난제를 풀어낸 수학자로, 20세기 수학사에 굵직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글들을 읽다 보면, 이 사람이 수학을 대하는 태도가 보통의 과학자와 무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수학과 예술이 본질에서 같다고 보았다. 수학이 추구하는 것은 진리 안에서의 조화이고,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아름다움 안에서의 조화이며, 그 두 가지 모두에서 작동하는 것이 바로 정서라는 것이다. 정서를 지식의 반대편에 있는 것, 혹은 논리적 사고를 흐리는 감정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이 주장은 낯설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오카에게 정서는 인간의 중심이었다. 논리나 계산이 아니라 정서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 기관이었고, 수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정서 없이는 수학조차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것이 몰입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오카는 진정한 수학이란 칠판에 적힌 기호를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한동안 멈추어 있었다.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수학 문제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본다고? 그것도 마음으로? 아마도 이것은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경험에 가까운 것일 터이다. 퍼즐을 기계적으로 맞추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것과 교감하고, 어느 순간 그것의 구조가 내면에서 환하게 드러나는 경험. 그 경험은 강제력이나 의지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서적으로 열려 있을 때, 마음이 고요하고 맑을 때 찾아온다.<br>오카는 들에 피는 제비꽃을 이야기했다. 제비꽃은 그저 제비꽃답게 피어 있을 뿐이다. 자신이 피어 있음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지 여부는 제비꽃이 알 바가 아니다. 그는 수학을 배우는 기쁨이 그런 것이라고 했다. 유용성이나 결과와 무관하게, 그저 발견의 기쁨 자체를 먹고 산다고. 이 비유는 단순히 낭만적인 수사가 아니다. 몰입의 조건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담겨 있다. 우리가 어떤 일에 깊이 몰입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일을 하는 내내 그것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 결과는 어떻게 될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계산하기 때문이다. 앞뒤로 분산된 시선은 지금 이 순간의 깊이를 빼앗는다. 그러나 제비꽃처럼 지금 피어 있는 것 자체가 전부일 때, 의식은 오롯이 지금 여기에 머문다. 수학의 역사를 돌아보면 가장 위대한 발견들이 종종 아무런 실용적 목적 없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정수론, 위상수학,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처음에는 그저 아름다운 추상의 놀이였다. 그것들이 나중에 암호학과 물리학과 컴퓨터 과학의 언어가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목적 없는 몰입이 오히려 가장 멀리 나아갔다.<br>오카가 이 글들을 쓸때, 기계가 계산과 논리를 대신하게 되리라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러니 앞으로의 수학, 더 나아가 인간의 역할은 기계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데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조화의 정신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그는 썼다.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가 말한 세계 한가운데 서 있다. 생성형 AI는 방대한 텍스트를 학습하여 인간의 언어를 통계적으로 모방한다. 논문을 요약하고, 코드를 짜고, 그림을 그린다. 그 능력은 날이 갈수록 인상적이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 기계가 할 수 있는 것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오카의 말은 기묘한 울림을 갖는다. 기계는 계산하고, 기계는 패턴을 인식하고, 기계는 최적의 답을 찾는다. 하지만 기계는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 기계는 제비꽃처럼 피어 있음의 기쁨을 알지 못한다. 기계는 교실 문을 나서며 "아차" 하고 깨닫는 그 찰나의 정서적 경험을 할 수 없다. 오카가 말하는 몰입은 효율이나 성과의 언어가 아니라 정서의 언어로 이루어진다. 마음이 맑은 순간 찾아오는 깨달음, 강요 없이 솟구치는 발견의 기쁨, 대상과 조용히 교감하는 경험. 이것들은 기계가 모방하기 가장 어려운 것들이며, 동시에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것들이다.<br>우리는 종종 몰입을 생산성의 도구로 생각한다. 더 많이 집중하면 더 빨리 끝낼 수 있고,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하지만 오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진정한 몰입은 성과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처럼 보인다. 목적을 내려놓고, 긴장을 풀고, 대자연처럼 조용히 흐르는 것. 뜨겁게 달구는 것만큼 차갑게 식히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먼저라는 그의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억지로 밀어 넣는 지식보다, 저절로 당겨지는 호기심이 더 깊이 새겨진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논리가 아니라 정서에서 태어난다. 무언가가 아름답다고 느낄 때, 무언가가 신기하다고 느낄 때, 무언가를 반드시 알고 싶다는 마음이 일 때, 비로소 진짜 몰입이 시작된다. 수학자의 몰입은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 답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와 오래 함께 앉아 있는 것. 마음의 눈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정서가 지성의 불빛을 불러들이는 것. 교실 문을 나서는 그 한 걸음이 때로는 가장 중요한 수학적 순간이 된다는 것을, 오카는 알고 있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49/63/cover150/k70213770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496308</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이토록 시적인 과학, 당신을 위한 최소한의 우주 - [이토록 시적인 과학, 당신을 위한 최소한의 우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2090</link><pubDate>Sun, 12 Apr 2026 16: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209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62137100&TPaperId=1721209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3/48/coveroff/k86213710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62137100&TPaperId=1721209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토록 시적인 과학, 당신을 위한 최소한의 우주</a><br/>우주플리즈 지음 / 모티브 / 2026년 03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어릴 적, 시골 할머니 댁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창밖의 어둠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도시를 완전히 벗어났을 때쯤이면 하늘이 달라졌다. 가로등 하나 없는 논길 위로, 수백 개의 별이 쏟아질 듯 매달려 있었다. 그 광경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할 말을 잃었다. 그 감각은 어른이 되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어졌다. 일에 치이고 관계에 지쳐 땅만 보고 걷다가, 어쩌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과 마주치는 순간이면, 마음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느슨하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그것은 '규모 감각'이었다. 나를 짓누르던 것들이 갑자기, 그리고 당연하게, 작아지는 느낌. 우주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교과서의 첫 장이나 전문가의 강의가 아니라, 예고 없이 올려다본 밤하늘 한 조각으로. 지식보다 먼저 감각이 찾아오고, 이해보다 먼저 경이로움이 앞선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태양을 축구공만 한 크기로 줄였을 때, 지구는 그로부터 약 23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직경 2밀리미터짜리 참깨 한 알이 된다. 이 비유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지구가 우주의 먼지보다 작다는 것, 태양계가 은하 변방의 평범한 별 하나를 도는 작은 가족이라는 것. 그러나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참깨 한 알. 그 위에서 인류는 수천 년 동안 문명을 세우고 허물었다. 전쟁을 벌이고 평화를 갈망했다. 사랑에 빠지고 이별에 울었으며, 마침내 자신들이 딛고 선 이 알갱이 너머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 상상력이 결국 우주로 향하는 탐사선을 만들어냈고, 빛이 수십억 년을 달려온 이야기를 해독하는 망원경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광대한 세계를 품으려 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참으로 이상한 동물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138억 년 전, 우주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모든 것이 되었다. 빅뱅이라고 부르는 그 순간 이후, 물질이 생겨나고 별이 태어났으며, 별이 죽으면서 우리를 이루는 원소들이 우주 공간으로 흩어졌다. 우리 몸속의 철과 칼슘, 산소는 오래전 어느 별이 생을 마감하며 내보낸 유산이다. 우리는 그 의미를 떠올릴 때마다 묘한 연대감을 느낀다. 우리가 우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우주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생각. 어쩌면 우리는 우주가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낸 눈이다. 그 눈으로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화성의 붉은 먼지 위에 두 번째 터전을 만들겠다는 꿈을, 달의 극지방 얼음에서 수소를 뽑아 더 깊은 우주로 나아가겠다는 계획을, 달 뒷면에 망원경을 세워 빅뱅의 첫 울음소리를 듣겠다는 열망을. 우리는 참깨 한 알 위에서 태어났지만, 그 알갱이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충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어리석은 욕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우주는 낭만을 허용하지 않는다. 치명적인 방사선, 극단적인 온도 변화, 숨 쉴 대기조차 없는 공간. 하지만 그 가혹한 현실 앞에서도 인간은 다시 계산을 하고, 설계도를 그리고, 발사 날짜를 정한다. 불가능을 당연하게 여기는 그 태도가, 어쩌면 인간이 우주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오래된 성질인지도 모른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우리의 지구는 운이 좋은 행성이다. 태양으로부터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자리에 위치하여 물이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좁은 구간 안에 놓여 있다. 대기가 있어 온도를 완충해주고, 달이 있어 자전축을 안정시켜준다. 목성이라는 거대한 행성이 저 바깥에서 우주의 파편들을 대신 흡수해주고 있다. 이 모든 조건이 동시에 충족된 행성이 이 우주에 또 있을까. 천문학자들은 지구와 비슷한 조건의 행성을 찾기 위해 밤을 지새운다. 그 탐구의 목적은 단순히 외계 생명체를 발견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이 광활하고 냉담한 우주 속에서 지구가 얼마나 기적에 가까운 존재인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비교할 대상이 없으면 그 소중함을 온전히 알 수 없다. 우리는 지구를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 다른 행성을 찾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주 탐사는 먼 세계로의 도피가 아니다. 오히려 이 세계로의 귀환이다. 138억 년의 역사가 빚어낸 이 기적 같은 자리로, 조금 더 눈을 크게 뜨고 돌아오는 일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우주를 배운다는 것이 반드시 어려운 공식이나 낯선 단위를 익히는 일을 뜻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저 빛이 수백 광년을 여행해 지금 이 순간 내 눈에 닿았다는 사실을 가만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빛이 출발했던 당시, 지구 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어느 문명이 흥하고 있었고, 어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있었을까. 우주는 현재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밤하늘은 동시에 여러 과거를 담은 타임캡슐이다. 우리는 그 앞에 서서, 시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상하고 깊은 개념인지를 비로소 실감한다. 그리고 그 광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희박한 확률의 사건인지를. 우리는 우주라는 극장의 뒷자리에서 팝콘을 먹는 관객이 아니다. 138억 년의 이야기가 응축된 배우이며, 동시에 그 이야기를 이해하려 애쓰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두 발은 참깨 한 알 위에 단단히 묶여 있으면서, 수백억 광년 너머를 상상하는 일. 그 무모한 호기심이야말로 인간이 품고 있는 가장 거대한 크기다. 그냥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우주는 나에게 무언가를 전해줄 것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러나 결코 낯설지 않은, 그 투명하고 본질적인 질문을 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3/48/cover150/k86213710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734883</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버텨낸 밥값의 기록들 - [버텨낸 밥값의 기록들 - 흔하지만 쉽지 않은, 뻔한 말들의 무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1462</link><pubDate>Sun, 12 Apr 2026 09: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146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750257X&TPaperId=172114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00/61/coveroff/894750257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750257X&TPaperId=1721146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버텨낸 밥값의 기록들 - 흔하지만 쉽지 않은, 뻔한 말들의 무게</a><br/>오원택 지음 / 한경CAREER / 2026년 03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생성형 인공지능이 일상 속으로 성큼 들어온 지금, 우리는 묘한 역설 앞에 서 있다. 기술은 전례 없이 빠르게 진보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불안은 오히려 더 짙어졌다. 무엇이든 물어보면 답을 내어주는 기계 앞에서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 사람다운 일을 잘 해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가. 어느 선배가 30여 년의 직장생활을 돌아보며 남긴 책을 읽었다. 거창한 성공담도, 빛나는 커리어의 자랑도 아니었다. 그것은 흔하디 흔한 말들, 배려하라, 성찰하라, 성실하라, 몸으로 증명하려 애쓰며 하루하루를 버텨온 사람의 고백이었다. 읽으면서 생각했다. 이 오래된 조언들이 AI 시대에도 유효할까. 아니,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이 말들이 더욱 절실해지는 시대가 아닐까.<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선배는 묻는다. 세상에 과연 흔한 것이 있는가. 그리고 스스로 답한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순간, 흔한 것도 흔하지 않은 것이 된다고. 이 단순한 명제가 AI 시대에는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인공지능은 흔한 것들을 극도로 효율적으로 처리한다. 반복적인 분석, 표준화된 문서, 예측 가능한 패턴. 그것들은 점점 기계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흔하지 않음'이다. 같은 상황에서도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는 눈, 데이터가 포착하지 못하는 맥락을 읽는 감각, 효율보다 관계를 택할 수 있는 용기. 선배가 말하는 '흔하지 않은 사람이 되자'는 다짐은 단순한 자기계발의 격려가 아니다. 기계가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가라는 촉구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배려(配慮)라는 한자가 본래 '남의 술잔이 비어 있는지 살핀다'는 뜻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다. 선배는 배려를 양보와 구별한다. 양보는 내 것을 내어주는 일이지만, 배려는 상대에게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를 먼저 헤아리는 일이라고. 그래서 배려는 양보보다 훨씬 더 어렵다. AI는 놀라운 속도로 개인화 서비스를 제공한다. 당신의 취향을 학습하고, 다음에 원할 것을 예측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데이터 기반의 추론이다. 진짜 배려는 데이터로 포착되지 않는 순간에 발휘된다. 침묵 속에서 상대방의 무거움을 알아채는 것, 말하지 않아도 지금 뭔가 힘들다는 것을 감지하는 것. 이 섬세한 인간적 능력은 알고리즘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다. 선배의 말처럼, 배려는 흔한 말이지만 참 어려운 일이다. 바로 그 어려움 속에 인간의 값어치가 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선배는 성찰에 대해 말할 때 흥미로운 비유를 든다. 매미는 허물을 벗지 않으면 날 수 없고, 뱀은 껍질을 벗지 않으면 죽는다. 자연의 허물 벗기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가. 우리는 남의 허물을 보는 데는 탁월하지만, 정작 자신의 낡은 생각과 굳어진 편견을 들여다보는 일에는 눈을 감는다. AI 시대에 이 통찰은 더욱 날카롭게 적용된다. 인공지능은 편향 없이 데이터를 처리한다. 반면 인간은 경험이 쌓일수록 오히려 특정 틀 안에서만 세상을 보게 될 위험이 있다. 빠르게 변하는 기술 환경에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성찰의 능력은 생존의 기술이 되었다. 선배가 말하듯, 허물은 억지로 벗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바라보고 나면 저절로 떨어진다. 그 '바라봄'이 곧 지혜의 시작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도 하루 연습을 쉬면 자신이 알고, 사흘을 쉬면 청중이 안다. 이 이야기를 선배는 단순한 겸손의 수사가 아닌 냉정한 자기 고백으로 읽는다. 정상으로 오르는 지름길은 없다. 공부는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아서, 잠깐 손을 놓아도 밀려 내려간다는 교수의 말이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정확한 비유였음을 깨닫는다. AI가 순식간에 리포트를 작성하고 코드를 생성하는 시대에, 성실함의 의미는 바뀌었는가. 도구는 바뀌었지만 그 도구를 제대로 다루는 사람을 만드는 것은 여전히 반복된 훈련과 꾸준한 노력이다. 더 나아가, 인공지능이 생산해 낸 결과물의 품질을 판단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능력, 그것은 오랜 시간 쌓아온 내공 없이는 길러지지 않는다. 성실함은 과거의 미덕이 아니라, AI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인간의 자산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선배는 눈치를 비굴함이 아닌 통찰력으로 재정의한다. 상대방의 현재 상황과 필요, 감정 상태를 종합적으로 읽고 적절하게 대응하는 능력. 이것은 관찰력, 판단력, 실행력의 총합이다. 신입사원 간담회에서 연수원장이 되겠다고 답했던 동료가 훗날 임원까지 올라간 이야기는 단순한 처세술의 교훈이 아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가장 적절한 말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읽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실행했다. 인공지능은 대량의 데이터를 처리하며 패턴을 찾아낸다. 그러나 살아있는 조직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흐름을 읽는 것은 전혀 다른 능력이다. 회의실의 공기가 어떻게 흐르는지, 상사의 말 뒤에 어떤 맥락이 숨어 있는지, 팀원이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 살아있는 감각은 인간이 조직에서 발휘할 수 있는 고유한 역량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선배의 글을 관통하는 하나의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버텨냄'이다. 억울한 감사를 견디고, 남 탓 대신 스스로를 돌아보며, 넘어졌을 때 그 실패를 공부 삼아 다시 일어서는 것. 이 버텨냄은 체념이나 수동적 인내가 아니다.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서 모진 풍파를 통과해 나가는 능동적 의지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삶의 무게를 대신 짊어지는 기계는 없다. 관계의 어려움을, 실패의 아픔을, 선택의 무거움을 몸으로 통과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그리고 그 통과의 경험들이 쌓여 비로소 사람다운 깊이가 생긴다. 선배의 30년 고백이 흔해 보여도 뻔하지 않은 이유는, 그 말들이 관념이 아닌 살아낸 시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알고리즘이 아니라, 더 단단한 사람이다. 배려하고, 성찰하고, 성실하게, 눈치 있게, 긍정의 언어로, 신중하게. 이 낡아 보이는 덕목들이 실은 AI 시대를 인간답게 살아내기 위한 가장 정직한 지침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00/61/cover150/894750257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006138</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국부론을 읽는 시간 - [국부론을 읽는 시간 - 김수행 교수의 경제학 강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1412</link><pubDate>Sun, 12 Apr 2026 08: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141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12137122&TPaperId=1721141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90/73/coveroff/k01213712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12137122&TPaperId=1721141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국부론을 읽는 시간 - 김수행 교수의 경제학 강의</a><br/>김수행 지음, 애덤 스미스 원작, 박도영 정리 / 해냄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애덤 스미스라는 이름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두 가지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신비로운 메타포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시장의 수호성인이라는 후광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스미스를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가 얼마나 복잡하고 입체적인 사상가였는지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그는 단순히 자본주의의 옹호자가 아니었으며, 자신이 세운 이론의 한계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었던 지식인이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스미스가 살았던 18세기 영국은 거대한 전환의 시대였다. 지주 계급, 자본가 계급, 임금노동자 계급이라는 세 축이 사회를 재편하는 가운데, 도시에서는 공장제 수공업이 확산되고 있었다. 기술적으로는 여전히 손 도구에 의존하는 수공업에 가까웠지만, 생산 조직의 측면에서는 자본주의적 대공업의 맹아가 이미 움텄다. 스미스는 바로 이 경계선 위에 서 있었다. 산업혁명의 본격적인 기계화가 도래하기 직전, 그는 분업의 효용을 설파했지만 기계가 사회에 미칠 영향은 충분히 살펴볼 수 없었다. 이 시대적 한계는 그의 이론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스미스의 지적 여정은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허치슨 교수 밑에 도덕철학을 배우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교수들의 직무 유기에 실망하고 흄의 철학에 깊이 빠져들면서, 그는 신학에서 자연신학으로, 신의 계시에서 인간의 이성으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 자연과 인간 사회는 신의 직접적 명령이 아니라 이성으로 파악 가능한 자연적 질서에 따라 작동한다는 믿음, 이것이 훗날 그의 경제학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자연적 질서에 대한 신뢰가 과학적 증명이라기보다 하나의 신념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스미스 스스로도 이를 완전히 해명하지 못했기에, 결국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적이지만 모호한 표현에 기댔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lt;국부론&gt;의 핵심 논지 중 하나는 분업이 노동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다는 것이다. 핀 공장의 예는 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열 명의 노동자가 분업을 통해 혼자 일할 때보다 수백 배 많은 핀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협업과 전문화의 힘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스미스는 숙련도의 향상, 시간 절약, 기계 발명의 촉진이라는 세 가지 메커니즘으로 분업의 이익을 설명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는 것이 이 책의 진정한 가치다. 스미스는 국부론 후반부에서 자신이 앞서 찬양했던 분업의 어두운 이면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평생 하나의 단순한 작업만 반복하는 노동자는 사고력이 마비되고, 사회적 판단력을 잃으며,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조차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게 된다고 그는 경고했다. 이 고백은 놀랍도록 용기 있는 자기 비판이다. 찬양에서 시작해 비판으로 끝나는 이 구조는 스미스가 단순한 이념의 전도사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려 했던 사상가였음을 증명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공장 안의 분업과 사회 안의 분업의 구분도 중요한 지점이다. 스미스는 이 둘을 하나의 개념으로 뭉뚱그렸는데, 이는 이후 적잖은 혼란을 낳았다.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부품이 오가는 것은 교환이 아니다. 그러나 농민과 대장장이가 쌀과 도구를 맞바꾸는 것은 분명한 교환이다. 전자는 자본가의 계획 아래 움직이는 통제된 세계이고, 후자는 무수한 개별 결정들이 충돌하고 조율되는 시장의 세계다. 이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으면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엥겔스가 훗날 공장의 계획성과 사회의 무정부성이라는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짚어낸 것은 바로 스미스가 흐릿하게 남겨놓은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보이지 않는 손'을 둘러싼 분석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다. 이 표현이 국부론 전체에서 단 한 번만 등장한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흥미롭다. 우리가 스미스 경제학의 핵심으로 알고 있는 이 개념은, 사실 스미스가 증명하지 못한 자연적 질서를 얼버무리기 위해 빌려온 은유에 가깝다. 개인의 이익 추구가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명제는 검증된 법칙이 아니라, 절대왕정의 경제적 간섭을 비판하기 위한 혁명적 슬로건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했다. 스미스 자신도 이기적인 경제인이 정의의 원칙을 쉽게 위반할 수 있음을 알았기에, 정부의 법 집행과 교육의 역할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중상주의 비판은 국부론이 당대 정치경제학에 던진 가장 날카로운 도전이었다. 국부는 금과 은이 아니라 국민이 소비할 수 있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이라는 선언, 수입 제한과 수출 장려책이 결국 일부 상인과 제조업자의 사익을 위해 국민 전체의 이익을 희생시킨다는 비판은 당시로서는 혁명적 통찰이었다. 식민지 경영에 대한 분석도 예리하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 전체로 보면 유지비가 이득을 훨씬 초과하는 짐이었으며, 독립을 허용하는 것이 오히려 자유로운 통상 관계를 통해 더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은 당대의 제국주의적 관성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국부론과 자본론의 대비는 스미스를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스미스는 인간의 본성, 즉 교환 성향이나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을 경제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반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라는 사회 구조 자체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자본가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그의 본성이 아니라,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구조적 강제의 결과다. 이 시각 차이는 단순한 방법론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근본적으로 다른 렌즈다. 스미스의 접근이 자본주의를 인간 본성에 가장 자연스러운 체제로 영구화하는 경향을 낳는다면, 마르크스의 접근은 자본주의를 역사적으로 등장했다가 변화할 수 있는 특정한 사회 구조로 이해하게 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을 덮으면서 드는 생각은, 스미스를 특정 이념의 깃발로 동원하는 일이 얼마나 그를 왜곡하는가 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을 내세워 모든 규제 철폐를 정당화하지만, 스미스는 분업의 폐해를 경고하고 노동자 교육을 강조했으며, 독점과 상인 집단의 로비가 정책을 왜곡한다고 비판했다. 그가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라고 주장했다는 것은 절반의 진실, 혹은 편의를 위한 오독이다.&nbsp;잠옷 바람으로 사색에 빠진 채 25킬로미터를 걷고, 찻잔에 빵과 버터를 넣어 끓이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이 괴짜 학자는, 어쩌면 자기 시대의 가장 큰 질문들과 씨름하느라 늘 딴 곳에 정신이 가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씨름의 결과물이 불완전하고 모순을 품고 있더라도, 그것은 살아있는 사유의 흔적이다. 완성된 체계가 아니라 진행 중인 질문으로서 스미스를 읽을 때, 비로소 그는 우리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90/73/cover150/k01213712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907325</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35세, 평생 연금을 설계할 마지막 타이밍 - [35세, 평생 연금을 설계할 마지막 타이밍]</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935</link><pubDate>Sat, 11 Apr 2026 22:2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93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82137220&TPaperId=1721093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01/18/coveroff/k08213722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82137220&TPaperId=1721093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35세, 평생 연금을 설계할 마지막 타이밍</a><br/>최윤영(황금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서른다섯이라는 나이는 이상한 지점에 있다. 아직 젊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마지막 언저리이면서, 동시에 노후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피부에 닿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나이에 두 가지 감각을 동시에 품고 살아간다. "아직 20년은 더 일할 수 있다"는 안도와, "벌써 35년이 지났는데 모아놓은 게 이게 전부인가"라는 불안이다. 그 두 감각이 공존하는 이 지점에서, 노후 준비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거나 혹은 무기한으로 미뤄진다. 준비를 미루는 이유는 항상 합리적으로 들린다. 아이가 어리고, 전세 만기가 돌아오고, 부모님 건강이 걱정되고, 직장은 아직 불안정하다. 이 이유들은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이 이유들은 35세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45세에도, 55세에도 비슷한 이유는 새로운 이름을 달고 다시 나타난다. 아이의 대학 등록금, 부모님 요양비, 이직 공백, 집값 상승분. 준비하기 좋은 완벽한 타이밍은 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35세를 향해 "마지막 기회"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이 말은 협박이 아니라 수학의 언어다.<br>복리에 대해 사람들이 자주 듣지만 잘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복리의 효과가 초반에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0년간 연 7%로 운용된 자산이 두 배가 된다는 계산을 들을 때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그 두 배가 마지막 몇 년에 집중해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35세에 시작한 사람과 45세에 시작한 사람이 똑같이 65세에 은퇴한다면, 전자는 30년을 가지고 후자는 20년을 가진다. 단순히 10년 차이가 아니다. 복리 구조에서 그 10년은 전체 자산 증가분의 절반 이상을 설명할 수 있다. 마지막 타이밍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는 여기에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늦어질수록 복리가 아닌 산술로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그렇다면 35세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종목, 상품, 포트폴리오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준비의 출발점은 그 이전에 있다. 먼저 은퇴 이후의 삶에 필요한 현금흐름의 규모를 숫자로 적어야 한다. "넉넉하게" 혹은 "적당히"라는 말은 설계도가 될 수 없다. 월 250만 원인지, 400만 원인지, 600만 원인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 그 숫자가 정해지는 순간, 역산이 시작된다. 지금 어디에 있고, 어느 속도로 움직여야 하며, 어떤 구조를 쌓아야 하는지가 비로소 구체적인 형태를 갖는다. 국민연금은 이 구조의 일부가 될 수 있지만 전부일 수는 없다. 수령 시점은 점점 늦어지고 있고, 수령액은 가입 기간과 납입 금액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퇴직금은 목돈처럼 느껴지지만, 부채 상환이나 창업 자금으로 소진되는 경우가 현실에서 적지 않다. 개인연금은 납입 여력 자체가 생활비에 눌려 제한된다. 이 구조를 맹목적으로 신뢰했다가 65세에 현실을 마주하는 것과, 35세에 이 구조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신만의 현금흐름 시스템을 병렬로 구축하기 시작하는 것 사이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는다.<br>현금흐름 시스템이라는 말은 거창하게 들리지만, 본질은 단순하다. 내가 일하지 않는 날에도 정기적으로 돈이 들어오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 구조를 만드는 방법은 시대마다 달라졌지만, 핵심 원리는 변하지 않았다. 자산이 나 대신 일하게 하는 것이다. 배당을 지급하는 자산을 꾸준히 축적하는 방식은 이 원리를 가장 단순하게 구현하는 방법 중 하나다. 매달 혹은 분기마다 계좌로 들어오는 분배금은, 그것이 처음에는 5만 원이든 10만 원이든, 시스템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재투자의 재료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 금액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이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반복되는 현금이 다시 같은 자산을 사고, 그 자산이 다시 현금을 만들어내는 구조가 시간과 맞물릴 때 복리는 숫자가 아닌 감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가장 흔하게 일어나는 실수는 성급함이다. 배당률이 높을수록 빠를 것이라는 기대로 검증되지 않은 고수익 상품에 집중하거나, 초기에 들어오는 분배금을 생활비로 전용하면서 재투자의 사이클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평생 현금흐름을 만드는 시스템은, 초반에 현금을 꺼내 쓰는 순간 그 성장 속도가 크게 꺾인다. 배당 투자에서 축적기의 원칙은 명료하다. 받은 배당은 다시 같은 곳에 넣는다. 이 단순한 규칙이 실제로 지켜지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br>35세라는 나이가 유리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시간이고, 둘째는 실수를 만회할 여유다. 45세에 시작하면 잘못된 선택 하나가 회복할 시간 없이 은퇴 자금의 일부를 영구적으로 훼손할 수 있다. 35세에 시작하면 1~2년의 시행착오는 전체 여정에서 수업료에 가깝다. 작게 경험하고, 구조를 이해하고, 자신의 성향에 맞는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이 비교적 여유롭게 허용된다. 이 나이에 이미 시장을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차이는 5년 뒤에 뚜렷해진다. 시장이 흔들릴 때 매도 버튼에 손이 가는 사람과, 오히려 평온하게 재투자 일정을 확인하는 사람의 차이는 지식이나 배짱의 차이가 아니다. 경험의 차이다. 한 번이라도 -20%를 버텨본 사람은 다음 하락을 다르게 읽는다. 그 경험은 돈으로 살 수 없고, 시간을 통해서만 얻어진다.<br>평생 연금을 설계한다는 것은 상품을 고르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의 형태를 먼저 그리고, 그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현금흐름의 규모를 계산하고, 그 현금흐름을 만드는 구조를 지금부터 천천히 쌓아가는 과정이다. 구조가 복잡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단순할수록 오래 유지된다. 지키기 어려운 원칙은 원칙이 아니라 계획일 뿐이고, 계획은 위기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 35세에 매달 30만 원씩 배당 ETF를 매수하고, 들어오는 분배금을 전액 재투자하며, 분기마다 포트폴리오를 점검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과, 같은 나이에 "나중에 목돈이 생기면 시작하겠다"고 미루는 사람이 65세에 가진 자산의 차이를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숫자로 보여주어도 실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고, 30년이 지난 후에는 되돌릴 수 없다. 마지막 타이밍이라는 말은 두려움을 심으려는 말이 아니다. 지금 시작하면 아직 충분히 유리하다는 말이다. 그 유리함은 내년이 되면 조금 줄어들고, 5년 후에는 눈에 띄게 줄어든다. 35세의 시간은 35세일 때만 존재한다. 그 시간이 복리와 만나는 방식으로 쓰여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 책이 말하고 싶은 전부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01/18/cover150/k08213722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011877</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나는 화가다 그럼에도, 그렸다 - [나는 화가다 그럼에도, 그렸다 - 일제강점기에서 전쟁까지, 한국 근대미술 대표 화가 40인 40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812</link><pubDate>Sat, 11 Apr 2026 21: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81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52137807&TPaperId=1721081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3/6/coveroff/k75213780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52137807&TPaperId=1721081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는 화가다 그럼에도, 그렸다 - 일제강점기에서 전쟁까지, 한국 근대미술 대표 화가 40인 40선</a><br/>박영택 지음 / 심통 / 2026년 03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미술은 언제나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숨결을 담는다. 붓 한 자루, 먹 한 방울 속에도 시대의 무게가 스며든다. 한국 근대미술이 걸어온 길은 단순한 양식의 변천사가 아니다. 그것은 나라를 잃고, 전쟁을 겪으며, 그럼에도 살아남으려 했던 사람들의 내밀한 기록이다. 1900년대 초 개화의 물결과 함께 서양 미술의 개념이 밀려들어오고, 식민지의 질곡 속에서도 화가들은 붓을 놓지 않았다. 책은 일제 강점기 시대를 살다간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한국 근대미술이 어떠한 맥락 속에서 피어났는지를 상세히 이야기 한다.<br>1910년 8월, 조선은 일본에 병합되었다. 나라가 사라지는 그 직전의 봄, 신문 한 면에 작은 그림 하나가 실렸다. 이도영이 그린 판소리 장면이었다. 갓 쓰고 두루마기 입은 소리꾼이 부채를 들고 고수의 장단에 맞춰 소리를 내지르는 그 그림은, 한국 최초의 시사만화로 기록되었다. 이도영의 그림이 특별했던 것은 삽화만의 의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뻐꾸기 소리를 '복국(復國)'으로 바꿔 부르는 소리꾼의 절절한 외침이 담겨 있었다. 나라를 되찾으라는 간절한 염원을 판소리 형식에 빌려 표현한 것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민중도 그림과 소리꾼의 몸짓만으로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당시 신문에 연재된 시사만화는 계몽의 도구이자 저항의 언어였다. 이도영은 전환국에서 인쇄술을 익히고,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전통 화법을 사사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서양의 사실적 묘사 방식을 받아들이면서도 모필의 전통적인 선 감각을 살려, 인물의 동작과 표정을 생생하게 포착해냈다. 오세창이 글을 쓰고 이도영이 그림을 그린 대한민보의 시사만화는, 그림이 단순한 장식이나 기록을 넘어 정치적 발언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후 그는 '미술계의 국보'라 불리며 서화계의 어른으로 자리 잡았으나, 1933년 쉰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너무 이른 작별이었다.<br>조선의 산수화는 오랫동안 유교적 이상 세계를 그리는 관념의 그림이었다. 사대부 문인들이 추구한 군자의 세계를 자연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왕조가 무너지고 성리학적 세계관이 해체되면서, 그 이념을 담던 그릇도 함께 비어갔다. 그 공백 속에서 이상범은 다른 방향을 찾아나섰다. 이상범이 추구한 것은 관념이 아닌 실경(實景), 즉 눈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우리 산하의 모습이었다.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한 그의 작품 '잔추(殘秋)'는 그 탐구의 결정이었다. 늦가을 어느 농촌의 황량한 풍경, 민둥산과 작은 초가집, 드문드문 서 있는 앙상한 나무들. 먹색 하나만으로 그려낸 그 장면은 쓸쓸하지만 거짓이 없었다. 그것은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농촌 현실을 그대로 담아낸 풍경이었다. 이상범은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이후 실경산수의 맥을 근대적 시각으로 이어받은 작가였다. 그는 전통 화법의 근간을 유지하면서도 서구 풍경화의 시선을 결합하여, 한국 산야가 지닌 고유한 정서를 가시화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갈필로 문질러나간 건조한 붓질, 농담을 달리하며 쌓아 올린 먹의 층위, 그 속에서 배어나오는 서늘하고 적막한 정서야말로 이상범이 아니면 그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우리 산야에서 찾아낸 감정은 화사함이 아니라 쓸쓸함이었고, 그 쓸쓸함이 오히려 보는 이의 마음 깊이 닿았다.<br>정물화는 미술 아카데미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놓인 장르였다. 역사화나 초상화에 비해 이야기도 없고, 인물에 대한 통찰도 없이 그저 사물을 그리는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상봉의 정물화를 마주하면 그 편견이 흔들린다. 1930년에 그려진 그의 작품 '파와 정물'은 식탁 위에 파 한 묶음과 귤 두 개, 토마토 하나가 놓인 단출한 장면이다. 화려하거나 풍성하지 않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 묵직한 존재감이 있다. 파 뿌리의 흰 빛이 눈부시고, 좌측에서 흘러드는 빛이 과일들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물감은 얇고 건조하게 발려 있어 마치 오래된 벽에 스며든 것처럼 화면에 착 달라붙어 있다. 도상봉은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한 아버지의 영향 아래 반일의식을 품고 살았으며, 조선총독부 주관의 조선미술전람회에는 단 한 번도 출품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서화협회전과 동문들과의 그룹전을 통해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정물화가 지닌 고요하고 격조 있는 분위기는 단순한 기법의 성취가 아니라, 시대와 불화하면서도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한 인간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물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눈길, 꾸밈없는 담백함, 그것이 도상봉 정물화의 진정한 힘이었다.<br>최재덕은 '화가들이 인정한 화가'였다.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그의 색채 감각과 조형적 순수성은 누구도 따라오기 어려운 것으로 통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오랫동안 미술사에서 지워져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월북했고, 이후 행적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남아 있는 작품이 채 열 점도 되지 않는 그의 그림들은, 그러나 한결같이 놀라운 감각으로 빛난다. '하얀 집의 테라스'는 정원 너머 흰 벽의 2층 집이 햇빛을 받고 있는 장면을 담았다. 밝고 섬세한 붓 터치, 오돌토돌한 물감의 질감, 난간 위 작은 화분들의 앙증맞은 존재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빛의 방향을 알려주는 동시에 화면에 풍성한 이미지를 더한다. 단순한 흰 벽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색이 공존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화려하지 않다. 거창한 이념도 없고, 역사적 사건도 담겨 있지 않다. 다만 일상의 한 순간, 빛이 잠깐 머무는 자리를 예민하게 포착했을 뿐이다. 시인 김광균은 그를 '천사가 이 세상을 잠깐 다녀간 것'이라고 말했다. 이중섭과 나란히 놓인 그 말은, 최재덕의 예술이 지닌 순수성과 단명(短命)에 대한 아쉬움을 동시에 담고 있다.​전쟁 중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1951년, 광주에서 천경자는 매일 아침 일곱 시에 화실에 들어가 저녁 일곱 시까지 뱀을 그렸다. 여동생의 죽음, 가난, 불화했던 사랑, 그 모든 슬픔을 뱀의 형상 속에 밀어 넣었다. 25일 만에 완성한 그 작품의 이름은 '생태(生態)'였다. 뱀은 보통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다. 그러나 천경자에게 뱀은 삶에 대한 저항이자 구원의 상징이었다. 화면 가득 뒤엉킨 뱀들의 덩어리, 무리에서 빠져나와 기어 나오는 몇 마리의 형상. 초록과 붉은색이 겹치며 만들어내는 색의 생동감. 그것은 단순한 생물의 묘사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꿈틀거리고 살아남으려는 생명의 의지였다. 천경자의 채색화는 전통 동양화의 채색 방식을 계승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표현의 차원을 열었다. 물감을 여러 겹 올리고, 호분을 덮고, 다시 색을 얹어 만들어낸 투명하고 깊은 색층은 보는 이의 시각뿐 아니라 촉각까지 건드린다. 그녀의 그림은 아름다운 것만이 미술이 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거슬렀다. 해방 이후 화단이 채색화를 왜색(倭色)이라 몰아붙이던 시절에도 그녀는 자신의 언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과 그림을 일치시키는 것, 그것이 천경자의 예술이었다.<br>일제강점기에서 전쟁에 이르는 시간 동안 한국의 화가들은 극히 다른 방식으로 시대와 마주했다. 이도영은 붓으로 저항의 소리를 냈고, 이상범은 황량한 우리 산야를 진실하게 응시했다. 도상봉은 사물 속에 고요한 품격을 담았고, 최재덕은 일상의 빛을 감각적으로 건져 올렸으며, 천경자는 고통을 생명의 꿈틀거림으로 바꾸어냈다. 이들이 남긴 그림들은 어떤 거창한 선언이나 이념보다 더 깊이 시대를 증언한다. 그림은 설명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이다. 붓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선 하나, 먹이 스민 여백 하나가 그 시절의 공기를 지금 여기까지 전달한다.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가혹한 조건 속에서도 화가들이 붓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술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새삼 묻게 한다. 그것은 아마도 살아남기 위한, 혹은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가장 절실한 방식이었을 것이다태그<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3/6/cover150/k75213780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30616</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미국을 안다는 착각 - [미국을 안다는 착각 - 전 세계를 지배하는 진짜 힘의 실체는 무엇인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768</link><pubDate>Sat, 11 Apr 2026 21: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76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62933228&TPaperId=1721076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795/55/coveroff/k76293322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62933228&TPaperId=1721076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미국을 안다는 착각 - 전 세계를 지배하는 진짜 힘의 실체는 무엇인가</a><br/>김봉중 지음 / 빅피시 / 2024년 10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곤경에 빠지는 건 무지 때문이 아니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라고. 처음 이 문장을 접했을 때, 나는 그것이 단순한 경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나라를 조금씩 들여다보면서, 그 말이 얼마나 정확한 경고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미국을 안다고 생각한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CNN 뉴스를 접하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며, 애플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살아간다. 영어를 배우면서 미국식 억양을 흉내 내고, 유학을 꿈꾸거나 실제로 다녀온 사람도 주변에 꽤 있다. 그러니 미국이 낯설 리 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과연 그 익숙함이 진짜 앎일까? 미국의 역사와 제도, 사회와 문화를 폭넓게 다룬 한 책으로, 그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미국 대통령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처럼 보이지만, 그 구조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때로는 직관에 반한다. 우리는 흔히 '더 많은 표를 얻은 후보가 이긴다'고 생각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 각 주에서 1위를 차지한 후보가 그 주에 배정된 선거인단 전체를 가져가는 '승자 독식' 방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전국 득표수에서 트럼프를 앞섰지만, 선거인단 수에서 뒤져 패배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미국 민주주의를 얼마나 단순하게 이해해왔는지 알 수 있다. 선거인단 구성도 인구에 단순히 비례하지 않는다. 인구가 더 적은 네 개 주를 합해도 캘리포니아보다 많은 선거인단을 가질 수 있다. 결국 어느 경합 주에서 승리하느냐, 이른바 '스윙 스테이트'를 어떻게 공략하느냐가 대통령 선거의 실질적인 승부를 결정짓는다. 미국 정치를 이해하려면 이 구조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미국 대선을 접하는 방식은 선거 당일 결과 속보를 보는 것이 전부다. 그 배경에 깔린 지형과 논리는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사회적 갈등의 깊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흑백 갈등이나 총기 문제를 뉴스로 접하며 '아직도 저런 일이'라고 혀를 차지만, 그것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는 잘 모른다. 미국에서 총기 소유는 단순한 취미나 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헌법 수정 제2조로 보장된 권리이며, 건국 이래 개인의 자유와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철학적 뿌리를 갖고 있다. 총기 규제 논쟁이 진보와 보수 진영 사이에서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하는 것은 그 논쟁이 단순히 '총이 위험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가치 충돌이기 때문이다. 흑인과 백인의 갈등도 마찬가지다. 노예제 폐지로 모든 것이 해결됐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법적 평등이 사회적 평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수백 년에 걸쳐 누적된 구조적 불평등은 제도 하나로 사라지지 않는다. 최근 설문조사에서 흑백 갈등이 '영원히 해결되지 못할 문제' 중 하나로 꼽혔다는 사실은, 그 상처가 얼마나 깊고 복잡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마약 문제 역시 그렇다. 펜타닐 과다복용으로 인한 사망이 18세에서 45세 사이 미국인의 주요 사망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상상하는 '강하고 부유한 미국'의 이면에 얼마나 심각한 균열이 있는지를 드러낸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지역주의의 문제도 예상보다 훨씬 뿌리가 깊다. 미국 남부 지역을 가리키는 '바이블 벨트'라는 표현은 단순히 종교적 색채를 넘어, 정치·문화적 보수성과 맞닿아 있다. 남부와 북부, 태평양 연안과 내륙 사이의 성향 차이는 지리적 경계보다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북전쟁의 기억, 산업화의 속도 차이, 이민자 구성의 차이가 켜켜이 쌓여 오늘날의 지역 정서를 형성했다. 어떤 의미에서 미국의 지역주의는 한국의 그것보다 훨씬 완고하다. 외교와 패권의 문제에 이르면 미국에 대한 우리의 착각은 더욱 선명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세계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유와 인권의 보루로 이해한다. 그 이미지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부도 아니다. 미국의 외교는 역사적으로 실리주의와 이상주의 사이를 오가며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결합해왔다. 19세기 '문호 개방 정책'에도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이권 확보라는 현실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오늘날 미국 우선주의의 부상도 갑작스러운 돌연변이가 아니라, 고립주의라는 오랜 흐름의 재발현이다. 그리고 한국에 관해서도 우리는 착각한다. 한국이 미국에게 특별한 나라라고 믿고 싶어 한다. 동맹이니, 혈맹이니 하는 표현들이 그 믿음을 강화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한국은 스스로의 역량으로 미국에게 무시하기 어려운 존재가 된 것이지, 처음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이 아니다. 이 냉정한 시각 없이는 국제 관계에서 진짜 자국의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문화적으로도 미국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다층적이다. 미식축구와 야구에 열광하는 것은 단순한 스포츠 취향이 아니다.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는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고, 나아가 미국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문화적 코드이기도 하다. 역동적이고 충돌하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경향, 개인이 집단보다 우선시되는 자유의 문화, 이 모든 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근본 철학과 연결되어 있다. 결국, 미국을 안다는 착각은 단순한 무지보다 더 위험하다. 무지한 사람은 적어도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착각하는 사람은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미국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미국의 정치가 우리의 경제와 안보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더 깊은 이해다. 표면 너머를 들여다보려는 의지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미국은 세계 최강의 나라이면서 동시에 깊은 내상을 안고 있는 나라다. 지역 간 갈등, 인종 간 불신, 마약과 총기라는 만성적 위기, 그리고 패권 유지에 대한 내부의 회의감. 이것들은 미국의 실패가 아니라 미국의 실체다. 그 실체를 직시할 때, 비로소 우리는 미국을 아는 것이 아니라, 미국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트웨인의 말처럼, 곤경은 무지에서보다 착각에서 더 자주 온다.&nbsp;미국에 대한 착각을 걷어내는 일,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솔직한 공부일지도 모른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795/55/cover150/k76293322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7955545</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최소한의 1억 습관 - [최소한의 1억 습관 - 저축부터 주식·ETF·ISA·금테크까지 쌈짓돈도 1억으로 불리는 부자 루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658</link><pubDate>Sat, 11 Apr 2026 19: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65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72137641&TPaperId=172106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39/58/coveroff/k87213764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72137641&TPaperId=1721065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최소한의 1억 습관 - 저축부터 주식·ETF·ISA·금테크까지 쌈짓돈도 1억으로 불리는 부자 루틴</a><br/>김나연(요니나)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어느 월급날 아침이었다. 분명 월급은 들어왔는데, 통장을 열어보니 지난달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잔액이 나를 맞이했다. 돈이 어디로 갔는지 추적해보려 했지만, 딱히 낭비했다는 기억도 없었다. 밥을 먹었고, 커피를 마셨고, 가끔 옷을 샀고, 친구와 저녁을 먹었다. 특별한 지출 없이도 돈은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문제는 내가 얼마를 버느냐가 아니라, 돈이 내 손을 거쳐 어디로 흘러가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이때 책을 접했다. 1억이라는 숫자는 솔직히 처음에는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책의 제목에는 '최소한'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다. 화려한 투자 기법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출발선을 제안하는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인상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공감한 것은 소비를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였다. 나는 그동안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고, 스스로도 다짐해왔다. 그러나 결심은 번번이 흐지부지됐다. 왜였을까. 돌이켜보면, 나는 소비를 억제해야 할 적으로만 바라봤지, 소비의 구조 자체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어디에 쓰는 돈이 나에게 실질적인 만족을 주고, 어디에 쓰는 돈이 그저 습관적으로 빠져나가는지를 구분하지 않은 채, 그냥 막연하게 덜 써야 한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소비를 기록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체감했다. 기록은 절약을 강제하는 도구가 아니라, 내 소비의 민낯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거울을 봐야 무엇을 고쳐야 할지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와닿은 것은 통장 쪼개기라는 개념이었다. 월급통장 하나에 모든 돈을 몰아넣고 쓰다 보면, 남은 돈이 곧 쓸 수 있는 돈처럼 느껴진다. 목적에 따라 통장을 나누는 것은 단순해 보이지만, 돈의 흐름을 의식적으로 설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 생활비, 저축, 투자, 비상금을 각기 다른 공간에 배치해두면, 돈이 막연하게 사라지지 않고 내가 설계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번거롭게 느껴질 수 있지만, 한 번 구조를 만들어두면 이후에는 거의 자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핵심이다. 돈 관리를 매번 의지력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지속 가능한 재테크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투자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ETF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왜 ETF가 좋은 출발점인지를 설명하는 방식이 현실적이었다. 주식 투자를 해야 한다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막상 종목을 고르려 하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SNS에서 누군가 추천하는 종목을 따라 샀다가 손해를 봤다는 이야기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ETF는 그 두려움을 낮춰주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특정 기업 하나에 모든 것을 거는 대신, 시장 전체의 흐름에 올라타는 방식은 초보자가 시장에 적응하면서 감각을 키우기에 적합하다. 물론 ETF도 손실이 날 수 있다. 하지만 공부 없이 단타를 반복하다 계좌가 녹아버리는 것과, 꾸준히 적립식으로 시장에 참여하며 경험을 쌓는 것은 전혀 다른 출발이다. 연금 관련 내용도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真 真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됐다. IRP와 연금저축펀드는 세액공제라는 혜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노후는 아직 먼 이야기라며 미루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책에서 지적하듯, 연금은 일찍 시작할수록 복리의 효과를 더 오래 누릴 수 있다. 지금 당장 큰 금액을 넣지 않더라도, 계좌를 개설하고 소액이라도 꾸준히 납입하는 습관 자체가 중요하다. 노후 준비를 미래의 나에게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부터 책임지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결국 하나다. 재테크는 특별한 기술이나 남다른 정보력의 문제가 아니라, 반복 가능한 작은 행동들을 얼마나 오래, 흔들리지 않고 이어가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거창한 결심보다 작고 단단한 루틴이 결국 자산의 차이를 만든다. 1억이라는 숫자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매달 자동이체로 빠져나가는 저축금이 쌓이고, 시장이 흔들려도 팔지 않는 인내가 쌓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에도 구조가 대신 작동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나만의 최소한의 1억 습관을 정의하자면, 나는 세 가지를 중심에 두고 싶다. 첫째, 매달 첫 번째 월급날 자동이체를 통해 저축과 투자를 먼저 분리하는 것이다. 남은 돈으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저축과 투자를 먼저 하고 남은 돈으로 생활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 이것이 가장 기본이면서도 가장 지키기 어려운 습관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자동화라는 장치를 활용하면, 의지력 없이도 구조가 작동한다. 둘째, 소비를 기록하되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기록의 목적은 자책이 아니라 파악이다. 어디에 돈을 쓰는지 알아야 어디를 조정할 수 있는지 보인다. 처음에는 모든 지출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것이 부담스럽겠지만, 한 달만 해봐도 스스로의 소비 패턴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 패턴이 보이는 순간,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셋째, 시장이 흔들릴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투자를 시작한 초보자가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하락장에서 겁에 질려 팔아버리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우상향하는 시장에 꾸준히 올라타는 전략은 화려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장 강력한 전략임이 증명된다. 이를 위해서는 단기 등락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심리적 훈련이 필요하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1억이라는 숫자에 집착하기보다, 그 숫자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습관에 더 집중하고 싶다. 돈이 모이는 구조를 갖춘 사람은 1억 이후에도 계속 자산을 키워나갈 수 있지만, 구조 없이 운 좋게 1억을 손에 쥔 사람은 그것을 지키기 어렵다. 결국 재테크의 진짜 목표는 어떤 숫자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돈에 끌려다니지 않는 삶의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 구조의 시작이 바로 최소한의 1억 습관이라고, 나는 지금 믿고 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39/58/cover150/k87213764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395828</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50부터 시작하는 월 300 연금 만들기 - [50부터 시작하는 월 300 연금 만들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599</link><pubDate>Sat, 11 Apr 2026 19: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59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12137105&TPaperId=1721059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5/35/coveroff/k81213710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12137105&TPaperId=1721059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50부터 시작하는 월 300 연금 만들기</a><br/>황호봉 지음 / 원앤원북스 / 2026년 03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간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직장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늘 '다음 달 월급'을 기다리며 산다. 월급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일상의 리듬이고, 생활의 버팀목이며, 미래를 향한 막연한 안도감의 근거다. 그런데 그 월급이 어느 날 갑자기 끊긴다면 어떨까? 퇴직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사건이지만, 준비된 퇴직과 그렇지 않은 퇴직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100세 시대를 넘어 150세까지 내다보는 요즘, 직장인이 현업에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30년이다. 반면 은퇴 이후 살아가야 할 시간은 그보다 훨씬 길 수 있다. 이 불균형한 방정식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막연한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주거 문제와 함께 노후 자금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던 시기에 이 책을 만났다.<br>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이게 된 대목은 연금 투자의 출발점에 관한 이야기였다. 많은 사람이 투자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어떤 자산을 사야 하나?'다. S&amp;P500인지, 배당주인지, 채권인지를 따지며 자산의 종류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저자는 같은 자산을 사더라도 어떤 계좌에서 사느냐가 은퇴 후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강조한다. 연금저축, IRP, ISA — 이 세 가지 절세 계좌는 각각의 역할과 세제 혜택이 다르다. 연금저축은 세액공제 혜택이 크고 부분 인출이 가능한 유연한 그릇이다. IRP는 퇴직금을 안전하게 보관하면서도 운용 전략을 직접 설계할 수 있는 도구다. ISA는 연금에 바로 넣기엔 부담스러운 자금을 잠시 담아두다가, 만기 후 연금계좌로 이전하면 추가 세액공제까지 받을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책이 제시하는 납입 순서는 명쾌하다. 세제 혜택이 가장 큰 연금저축부터 채우고, IRP를 보완하고, ISA로 여유 자금을 운용하는 방식이다. 이 순서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같은 돈을 넣고 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제도를 이해하는 것이 곧 수익률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을 이 책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일깨워준다.투자 철학에 있어서 저자는 일관된 입장을 유지한다. 연금은 단기 수익률 게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정 테마 ETF나 급등주를 쫓는 방식은 연금의 본질과 맞지 않는다. 연금 운용의 목표는 낮은 변동성으로 꾸준하고 안정적인 수익을 쌓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포트폴리오 구성도 자산군별, 지역별, 섹터별로 분산하는 방식을 권한다. 책이 제시하는 자산의 네 가지 역할 (성장, 현금흐름의 복원, 변동성 완화, 기회의 포착)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와닿은 것은 '현금흐름의 복원'이다. 은퇴 이후 매달 일정한 돈이 들어오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 안정을 넘어 심리적 안정감으로 이어진다. 월급이 없어도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삶,  그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메시지다. 자산 운용에 있어 저자는 미국 시장을 중심에 두는 전략을 권유한다. 장기적으로 우상향의 흐름이 명확하고, 자산 가치 상승의 방향성이 검증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국내 코스피 시장에 대해서는 단순한 장기 보유보다는 이벤트성 대응이 적합하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개인적으로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이 부분에서는 글쓴이의 관점에 공감하며 읽었다.책에서 소개하는 자금 구분 체계도 인상적이다. 12개월에서 24개월 치 생활비를 현금과 단기채로 관리하는 '필수생활자금', 채권과 우선주 중심의 '유지생활자금', 그리고 7년 이상 길게 보유할 '미래생활자금'으로 나누는 방식이다. 이 구조는 단순히 돈을 쪼개는 것이 아니라, 각 자금에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완충지대를 만드는 논리다. 급전이 필요하거나 시장이 폭락했을 때, 미래생활자금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는 구조를 먼저 갖춰야 한다. 그래야만 장기 투자의 원칙을 지킬 수 있다. 시장이 흔들릴 때마다 손이 근질거리는 마음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구조화된 자금 체계는 그 충동을 막아주는 방어막이 된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각자의 상황에 맞는 연금 포트폴리오를 제시한다. 퇴직금 없이 집만 있는 경우, 집도 퇴직금도 있지만 운용 방법을 모르는 경우, 자영업자처럼 제도 바깥에 있던 경우까지 현실적인 상황에 맞춘 설계를 보여준다. 특히 목돈을 일반 계좌에서 고배당 상품에 투자했다가 금융소득종합과세와 건강보험료 폭탄을 맞는 시나리오는 절세 전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br>책의 제목이 '50부터 시작하는'인 데는 이유가 있다. 완벽한 준비를 기다리다 보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다. 30대에 시작하면 더 좋겠지만, 50이라도 늦지 않았다. 아니, 50이 되어서야 비로소 노후의 무게를 실감하고 진지하게 움직이게 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 책은 그들을 위한 현실적인 안내서다. 책의 총평으로 별 3.5개를 부여했지만, 실제로 이 책이 전달하는 가치는 숫자보다 크다. 연금저축, IRP, ISA라는 세 가지 계좌의 구조와 활용법, 분산 포트폴리오의 원칙, 자금의 역할별 구분 — 이 모든 내용이 기초부터 차근차근 설명되어 있어 처음 연금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실질적인 출발점이 된다. 결국 노후 준비는 거창한 투자 철학이나 탁월한 종목 선택 능력보다, 올바른 구조를 먼저 갖추는 데서 시작한다. 어느 그릇에 담느냐, 어떤 순서로 채우느냐, 얼마만큼의 완충지대를 확보해두느냐,  이 기본기를 단단히 다지는 것이 월급이 끊긴 이후의 삶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 책은 그 기본기를 알려주는 조용하고 성실한 길잡이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5/35/cover150/k81213710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753524</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AI 프로메테우스 - [AI 프로메테우스 - 미래가 현실이 된 지금 우리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573</link><pubDate>Sat, 11 Apr 2026 18: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57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72137710&TPaperId=1721057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03/27/coveroff/k47213771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72137710&TPaperId=1721057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AI 프로메테우스 - 미래가 현실이 된 지금 우리는?</a><br/>장우경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신화 속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세계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건넸다. 그 행위는 단순한 절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신의 영역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었고, 문명이라는 긴 여정의 첫 걸음이었다. 제우스는 분노했고, 프로메테우스 는 영원한 고통을 대가로 치렀다. 그러나 인간은 그 불로 따뜻해졌고, 요리를 했고, 도시를 세웠으며, 결국 우주를 향해 로 켓을 쏘아 올렸다. 지금 우리는 또 한 번의 '불'을 손에 쥐었다. 이번에는 신에게서 훔친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 냈다. 그 이름이 바로 인공지능, AI다. 문제는 이 불이 이전의 어떤 불보다 뜨겁고, 빠르며, 예측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증기기관이 근육의 한계를 넘어섰다면, AI는 지성의 한계마저 흔들고 있다. 우리가 오롯이 인간만의 것이라 믿었던 언어, 창조, 판단, 감정의 영역에 기계가 조용히, 그러나 거침없이 진입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변화 앞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인류 역사에서 인간은 자신을 정의할 때 늘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임을 강조했다. 호모 파베르, 만드는 인간. 그런데 지금 그 도구가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을 파악하고, 감정을 흉내 내며, 심지어 창작까지 한다. 의사보다 정확하게 병을 진단하고, 변호사보다 빠르게 판례를 검토하며, 화가보다 섬세하게 이미지를 생성한다. 이 현실 앞에서 많은 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의 흔들림이다. 내가 수십 년 간 갈고닦은 전문성이, 내가 자랑스러워하던 능력이 어느 날 갑자기 알고리즘 하나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는 공포. 그 공포는 단순히 직업적 위기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내린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시선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흔히 AI를 인간의 '대체재'로 바라보는 시각에 갇혀 있다. 마치 전기가 촛불을 밀어냈고, 자동차가 말을 대신했듯이, AI가 인간을 구석으로 몰아낼 것이라는 직선적 공포.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전기가 등장했을 때 일부 직업은 사라졌지만, 이전엔 상상조차 못했던 수천 개의 새로운 직업이 탄생했다. 기술은 인간을 지워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해왔다. AI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핵심은 이 새로운 불을 누가,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다루느냐에 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프로메테우스의 불을 처음 본 원시인의 반응은 두 가지였을 것이다. 도망치거나, 다가가거나. 도망친 자는 그 밤을 춥고 어둡게 보냈고, 다가간 자는 그 불로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오늘날 Al 앞에 선 우리의 선택도 크게 다르지 않다. AI를 외면 하거나 두려워하기만 하는 사람들은 변화의 물결에 수동적으로 휩쓸릴 것이다. 반면, Al를 능동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사람들은 이전 시대에는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확장할 수 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핵심 역량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 즉 AI가 '어떻게' 답을 내놓는지보다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를 아는 힘이다. AI는 데이터를 학습하고 패턴을 읽어내는 데 탁월하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설계하며, 맥락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다. 19세기 쥘 베른은 아직 잠수함도, 달 로켓도 없던 시대에 그것들을 글로 써냈다. 그 상상력이 현실의 과학자들에게 방향을 제시했다. AI는 과거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최적의 답을 계산하지만, 인간은 과거에 없던 전혀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낼 수 있다. 또한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역설적 으로 더욱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공감, 윤리적 판단, 창의적 직관과 같은 인간적 특질들이다. AI가 의사보다 정확하게 진단을 내려도, 환자가 원하는 것은 데이터 분석 결과만이 아니다. 자신의 두려움을 이해받고,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함께 고민해줄 누군가의 존재다. 기계가 효율을 독점할수록, 인간적인 따뜻함과 진정성은 희소 자원이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반드시 경계해야 할 함정이 있다. 기술의 수용이 맹목적인 종속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AI가 내린 결정 이라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공정하거나 옳은 것은 아니다. 알고리즘은 학습 데이터에 내재된 편향을 그대로 반영할 수 있 고, 감시와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될 수도 있다. AI 시대의 진정한 역량은 기술을 활용하는 능력만큼이나, 기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 한계를 인식하는 능력에서 나온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는 신이 쓴 신화였다. 그러나 AI의 이야기는 우리 인간이 직접 써가야 할 신화다. 우리가 AI를 만들었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며, 그 결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도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 불이 축복이 될지 재앙이 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불 앞에서 얼어붙어 있는 자에게는 선택의 기회조차 주 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려움을 호기심으로 바꾸고, 불안을 질문으로 전환하는 것, 그것이 AI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갖춰야 할 가장 근본적인 태도다. 우리는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처럼 벌을 받으며 불을 전달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그 불을 손에 쥐고, 스스로 어디를 밝힐지 결정하는 존재다. 이 시대의 질문은 AI가 인간을 대체할 것인가"가 아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이 불로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 그 답을 써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 시대 인간의 몫이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03/27/cover150/k47213771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032727</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이번 생에 영끌은 무섭고 전세금 올려주긴 지쳐서, 실거주 한 채 샀습니다만 - [이번 생에 영끌은 무섭고 전세금 올려주긴 지쳐서, 실거주 한 채 샀습니다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571</link><pubDate>Sat, 11 Apr 2026 18:3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57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7607&TPaperId=1721057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01/93/coveroff/k71213760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7607&TPaperId=1721057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번 생에 영끌은 무섭고 전세금 올려주긴 지쳐서, 실거주 한 채 샀습니다만</a><br/>소나우우유(김진석) 지음 / 모티브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우리는 모두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지금 집을 사도 되는 걸까?" 아니면 조금 더 솔직하게는, "나 같은 사람 이 집을 살 수 있을까?" 집값은 이미 저 높은 곳에 올라 있고, 월급은 좀처럼 오르지 않으며, 대출이라는 단어는 왠지 모르게 두렵고, 전세금은 계약이 끝날 때마다 조금씩 더 올라간다. 그 사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결정을 미루고, 미루다가 또 미루며,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낸다. 책은 묻는다. "정말 늦은 걸까요?" 집 앞에서 멈춰 선 수많은 사람들 의 내면을 정확하게 포착한 언어다.​우리는 정보가 부족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유튜브에는 부동산 전문가들의 강의가 넘쳐나고, 포털에는 실거래가 정보가 공개되어 있으며, 정책 대출 제도 역시 인터넷으로 쉽게 검색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 이 집을 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책은 그 핵심 원인을 정보 부족이 아니라 결정 구조의 부재에서 찾는다. 정보는 있 지만 그것을 자신의 상황에 적용하는 프레임이 없다. 시장에 대한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정작 "나는 얼마를 감당할 수 있 는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도출해낸 사람은 드물다. 막연함은 공포를 낳고, 공포는 행동 회피로 이어진다. 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빠져 있는 악순환의 구조다. 날카롭고 정확하다. 우리가 집을 사지 못하는 것은 시장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만의 판단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기준이 없으면 어떤 정보도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다.<br>집값이 오른다는 뉴스도, 금리가 내린다는 소식도, 정책 대출이 새로 생겼다는 정보도, 결정 구조 없이는 모두 그냥 흘러가는 소음에 불과하다. 이 책은 그 소음을 신호로 바꾸는 프레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부동산 책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부동산 시장에는 언제나 '타이밍'을 말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지금이 바닥이니 사라, 고점이니 팔아라, 이 지역이 오른다, 저 지역은 죽었다. 이러한 담론들은 집을 주식처럼 다루며, 부동산을 수익률의 게임으로 환원시킨다. 그 게임에서 이기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고, 타이밍을 놓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그러나 책은 그 게임판 자체를 거부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핵심 명제는 간명하다. 내 집 마련은 투자 타이밍 게임이 아니라, 재정•대출•입지를 설계하는 현실 전략이다. 이것은 단순한 관점의 차이가 아니라, 집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철학의 전환이다. 투자 관점에서 집의 기준은 수익률이다. 시장 타이밍이 판단의 근거가 되고, 목표는 차익이다. 반면 실거주 관점에서 집의 기준은 안정성이다. 개인의 재정 상황이 판단의 근거가 되고, 목표는 삶의 안정이다. 이 두 관점의 차이는 단지 투자냐거주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집을 외부 시장의 변수에 종속된 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삶과 재무 구조 안에서 능동적으로 설계하는 요소로 볼 것인가의 문제다. "완벽한 타이밍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은 예측 불가능하며, 지금이 고점인지 저점인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렇다면 타이밍을 기다리는 행위는 합리적 전략이 아니라, 결정을 미루기 위한 합리화에 가깝다. 행동의 시점은 시장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정 조건이 충족되는 순간이어야 한다. "지금 가능한 선택이 가장 빠른 선택"이라는 말은 그래서 울림이 있다.<br>책의 실용적 핵심은 '내 집 마련 5단계 시스템'이다. 자금 현실화, 대출 전략 설계, 예산 기반 주택 설정, 입지 분석과 임장, 계약과 실행으로 이어지는 이 구조는 막연한 꿈을 구체적인 좌표로 바꾸는 과정이다. 각 단계는 독립적이지 않고, 서로 연 결된 하나의 흐름으로 작동한다. 첫 번째 단계인 자금 현실화는 가장 회피하기 쉬운 동시에 가장 중요한 단계다. 저자는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못 산다가 아니라 "계산 안 해봤다"는 상태에 있다고. 이것은 뼈아픈 지적이다. 우리는 두려 운 것을 계산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숫자를 마주하지 않으면 가능성도 볼 수 없다. 총 자산과 대출 가능액, 실제 가용 자금을 한 자리에 놓고 보는 것, 그 단순한 행위가 막연함을 현실로 전환시키는 첫 번째 열쇠다. 대출에 대한 관점의 전환도 인상적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대출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빛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감각이 이성적 판단을 흐린다. 그러나 저자는 대출을 '도구'로 재정의한다. ​LTV와 DSR의 구조를 이해하고, 정책 대출과 은행 대출을 조합하며, 상환 방식을 전략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면 대출은 리스크가 아니라 레버리지가 된다. "대출을 모르면 집을 못 사고, 알면 레버리지가 된다는 문장은 금융 문해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선언이다. 입지 분석 단계에서 강조되는 것은 '감이 아니라 구조'다. 동네의 느낌이나 막연한 선호가 아니라, 실거래가 데이터와 낮과 밤의 현장 방문, 그리고 중 개사와의 인터뷰를 통한 구조적 판단이 필요하다. 네이버 검색이 아니라 현장 데이터가 답이라는 말은 정보화 시대에 역설적으로 더 중요해진 '발품'의 가치를 환기시킨다. 데이터는 화면 속에 있지 않고 현장에 있다. 마지막 단계, 계약과 실행에서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심리다. 계약 프로세스를 이해하고 부대비용을 계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자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결국 집을 사는 사람은 결정한 사람이다."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 집 을 사는 것이 아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실행하는 결단력을 가진 사람이 집을 산다. 이 단순한 진실이 수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핵심이다.<br>저자가 강조하는 통찰 중 하나는 첫 집의 의미다. 저자는 첫 집을 경제적 OS의 전환으로 규정한다. 집을 갖기 전과 후의 재무 구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임대료를 내는 구조에서는 매달의 지출이 자산 형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소비다. 반면 집을 소유하는 구조에서는 대출 상환이 결국 자산 축적으로 연결된다. 소비에서 축적으로의 전환, 이것이 첫 집이 가져오는 재무 구조의 변화다. 거기에 더해 주거의 안정이 가져오는 심리적 안정은 단순히 계량하기 어렵지만 삶의 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집을 사는 것은 시장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설계하는 행위다. 좋은 타이밍에 집을 사서 큰 차익을 남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자신이 감당 가능한 조건 안에서 삶의 안정이라는 자산을 획득하는 것이 목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집은 투자 게임의 말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판 위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립하는 것이다.<br>책의 본질적 가치는 정보 제공에 있지 않다. 그것은 결정을 미루는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에 있다. "언젠가 사야지"라 는 막연한 의지를 "지금 내 재정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구체적인 질문으로 전환시키고, 지금은 비싸"라는 두려움을 "내가 감당 가능한 범위는 얼마인가"라는 계산으로 대체하며, "대출은 위험해"라는 편견을 "이 조건이라면 실행한다"는 결단으로 바꾸는 것, 이것이 책이 우리에게 하는 일이다. 집을 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삶을 직접 설계하는 행위다. 시장의 타이밍을 기다리는 사람은 영원히 외부의 신호에 종속되어 산다. 그러나 자신의 재정 구조를 이해하고, 감당 가능한 선택의 기준을 세우며,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실행하는 사람은 시장이 아니라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된다.태그<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01/93/cover150/k71213760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019372</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품격 있는 태도는 듣기에서 시작됩니다 - [품격 있는 태도는 듣기에서 시작됩니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535</link><pubDate>Sat, 11 Apr 2026 18: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53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42137109&TPaperId=1721053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3/20/coveroff/k44213710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42137109&TPaperId=1721053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품격 있는 태도는 듣기에서 시작됩니다</a><br/>패트릭 킹 지음, 조용빈 옮김 / 퍼스트펭귄 / 2026년 03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우리는 지금 역사상 가장 많은 말이 쏟아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소셜 미디어, 유튜브, 팟캐스트, 뉴스레터, 그리고 수없이 울리는 알림 음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내보낼 수 있는 플랫폼을 손안에 쥐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토록 많은 말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정작 제대로 '들려지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말하는 기술은 날로 발전하지만, 듣는 기술은 퇴화하고 있는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Patrick King은 이 역설적인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진정한 경청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단순히 대화 기술의 문 제를 넘어, 한 사람의 품격과 인격의 문제로 나아간다. 진정으로 품격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화려한 언변을 가진 사람인가, 아니 면 상대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인가?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품격은 말하는 데 있지 않고, 듣는데 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이것은 생물학적, 심리학적으로도 입증된 사실이다. 우리의 뇌는 자기 자신에 대 해 이야기할 때 쾌감을 느끼는 도파민 회로를 활성화한다. 따라서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단순한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본능을 억제하는 의지적 행위다. King이 두 귀와 하나의 입"이라는 오래된 격언을 소환하며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는 말하는 것보다 두 배 더 들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다. 그런데 이 단순한 진리가 왜 그토록 실천하기 어려운가? 그것은 듣는 행위가 근 본적으로 자아를 내려놓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집중한다는 것은, 잠시나마 '나'라는 존재를 배경으로 물리고 '너'라 는 존재를 전면에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겸손함이며, 진정한 품격은 바로 이 겸손함에서 출발한다. King이 제시하는 '지지 반응(support response)'과 '전환 반응(shift response)'의 구분은 이를 더 명료하게 보여준다. 대화 중에 "그래서 어떻게 됐어?"라고 묻는 것과 "아 그래? 근데 나는 말이야..."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단순한 언어적 차이를 넘어, 상대를 향한 태도의 차이가 존재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전환 반응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대화의 중심을 끊임없이 자신에게로 돌리는 습관은 결국 상대에게 '당신의 이야기는 내게 중 요하지 않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반면 지지 반응은 "나는 지금 당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존중의 표현이다. 흥미로운 것은, 상대가 지루하다고 느껴질 때도 그것이 사실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는 King의 통찰이다. 세상에 진정으로 흥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다만 우리가 충분히 깊이 파고들지 않았을 뿐이다. 훌륭한 토크쇼 진행자처럼, 상대의 이야기 속에서 보석을 발굴하려는 태도를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사람이 고유한 우주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경청이 가르쳐 주는 인간에 대한 예의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경청은 귀를 열어두는 것만이 아니다. King이 제시하는 다섯 가지 경청의 수준(무시하기, 가장 듣기, 선택적 듣기, 주의 깊은 듣기, 그 리고 공감적 듣기 등)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 번째와 네 번째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상대의 말을 '처 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반응할 부분만 골라 듣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섯 번째 수준인 공감적 경청은 내용을 이 해하는 것을 넘어, 상대가 느끼는 감정의 결을 함께 읽는 것이다. King이 경청을 '결코 수동적인 활동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진정한 경청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능동적 행위다. 만약 대화 후에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충분히 경청하지 않았다는 신호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검증(validation)'의 개념이다. King은 상대방의 감정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경청 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괜찮아질 거야"나 "그렇게 느끼면 안 돼"와 같은 말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상대의 감정을 부정하는 말이다. 감정은 항상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항상 실재한다. 그 실재를 인정해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공감이며, 품격 있는 대화 의 핵심이다. 또한 King은 대화의 대부분이 표면적인 말이 아닌 그 이면의 맥락, 즉 '서브텍스트'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상대가 무 슨 말을 하는지보다 왜 그 말을 하는지, 그 뒤에 어떤 감정이 숨어 있는지를 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대화는 단순한 정보 교환을 넘어 진정한 연결의 경험이 된다. "저 사람은 왜 저 말을 했을까?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습관은, 상대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감성적 성숙도를 높여준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King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선행 조건으로 '자기 이해'를 든다. 자기 인식, 자기 관리, 자기 동기부여, 사회적 인식으로 구성되는 감성 지능은 결국 자신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편견, 반응 패턴, 감정적 트리거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듣지 못하고, 자신의 필터를 통해 왜곡해서 듣게 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우리가 경청을 어려워하는 이 유 중 하나는, 상대의 말이 우리 안에서 즉각적인 방어 반응이나 판단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틀렸어", "나라면 그렇게 안 했 을 텐데"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듣지 않고 반박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반응은 자신의 내면을 충분히 들여 다보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자신을 알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상대의 말에 즉각 반응하지 않고 잠시 멈출 수 있 는 여유를 갖는다. King이 아홉 가지 적극적 경청 반응 중 하나로 '침묵(silence)'을 포함시킨 것은 이 때문이다. 말하지 않는 것도 경 청의 한 형태다. 침묵은 약함이 아니라, 상대에게 충분한 공간을 내어주는 품격 있는 행위다.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을 경청한다 는 것은, 자기 자신과 충분히 마주할 줄 아는 사람이 도달하는 경지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3/20/cover150/k44213710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732014</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한나 아렌트 - [한나 아렌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520</link><pubDate>Sat, 11 Apr 2026 18: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52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4891&TPaperId=1721052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32/58/coveroff/893232489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4891&TPaperId=1721052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한나 아렌트</a><br/>토마스 마이어 지음, 홍원표 옮김 / 현암사 / 2026년 03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성 중 한 명인 한나 아렌트는 학자나 철학자만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1906년 하노버에서 태어나 1975년 뉴욕에서 생을 마감한 그녀의 삶은 유럽의 비극과 미국의 자유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펼쳐졌다. 아렌트의 인생은 크게 세 부 분으로 나뉜다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의 유년시절, 1933년부터 1941년까지 프랑스에서의 망명생활, 그리고 미국에서의 34년간의 정착이 그것이다. 각 단계는 그녀의 사상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특히 주목할 점은 아렌트가 여러 언어 권을 오가며 살아갔다는 사실이다. 독일어로 시작한 그녀의 글쓰기는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확장되었고, 1941년 미국에 도착한 지 불과 1년 만에 영어로 저술하기 시작했다. 언어 습득만이 아니라 각 언어권의 사고방식을 체득하는 과정이었다. 그녀가 지적했듯 독 일어는 철학적 개념 표현에 적합하고, 영어는 정치적 사고에 더 유리하다. 이러한 다중 언어적 경험은 그녀의 사상에 깊이와 유연성을 부여했다. 쾨니히스베르크는 그녀의 정신적 고향이었다. 칸트가 살던 이 도시에서 성장한 아렌트는 칸트의 철학을 온몸으로 흡수했 다. 칸트로부터 그녀는 "확대된 사고방식"이라는 개념을 배웠는데, 이는 자신의 관점을 넘어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의미 한다. 이 능력은 그녀 후년의 정치적 사고를 기초하는 핵심 개념이 되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아렌트의 삶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부분이 난민으로서의 경험이다. 나치로부터의 도망, 프랑스에서의 억류, 그리고 미국으로의 망명. 이 모든 경험이 그녀의 사상 속에 각인되었다. 특히 이미지에 남았던 것은 아렌트가 이러한 절박한 현실 속에서도 "자유로운 정신"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아렌트가 자신을 철학자라고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철학에 작별을 고했다"고 그녀는 1964 년 인터뷰에서 명확히 밝혔다. 이는 거만함이 아니라 철학의 추상성이 현실의 비극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 가 추구한 것은 정치적 사고"였다. 이는 현실의 구체적인 위기 앞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아렌트가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통찰은 "생각하기"의 근본적 중요성이다. 그녀의 저작 &lt;인간의 조건&gt;의 서문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 이 썼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것만큼 어려운 것도 드물다. 아렌트가 강조하는 사유는 소크 라테스식의 "당혹감"으로 특징지어진다.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의 가르침이 아니라, 함께 문제에 당혹해하면서 그 당혹감을 공유하는 것이 진정한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방식은 편안하지 않다. 오히려 고통스럽고 불안정하다. 하지만 바로 이 불안정성 속에서만 우리는 습관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긴급 상황 속의 사고"는 우리 시대에 더욱 절실하다. 세계가 "계획된 재앙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을 때, 과거의 관성적 사고로는 부족하다. 아렌트는 자신의 시대의 위기 속에서, 그리고 그 위기로부터 생각하기를 시작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아렌트의 삶과 사상을 증거하는 한 가지 극적인 사례가 "리틀락 반성"이다. 1957년 흑인 학생들의 학교 통합을 다룬 에세이에서 아렌 트는 아이들이 그러한 갈등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명백히 그녀 스스로가 강조하던 "확대된 사 고방식"을 외면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렌트는 자신의 오류를 인정했다. 이 사실은 그녀의 진정성을 보여준다. 많은 지식인이 자신의 실수를 감싸고 돌거나 합리화할 때, 아렌트는 자신이 타자의 경험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음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이는 지식인의 역 할에 대한 그녀의 관점인 "주장하기"보다 "이해하기"를 추구한다는 명제를 다시 확인시켜 준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일반적으로 아렌트는 &lt;전체주의의 기원&gt;이나 &lt;예루살렘의 아이히만&gt; 같은 무거운 저작들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녀의 삶에서 사랑과 우정은 매우 중요했다. 이 측면은 아렌트라는 인물의 전체상을 복원하는 데 필수적이다. 아렌트는 죽은 지 100년이 넘은 라헬판하겐 을"가장 친한 친구"라 불렀다. 그녀는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월터 벤야민, 프란츠 카프카)과의 정신적 대화 속에서 자신의 사유를 발 전시켰다. 이는 사고가 결코 고립된 개인적 작업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아렌트는 1975년에 사망했지만, 그녀의 사상은 오히려 지금 더욱 절실하다. 우리의 세계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아렌트는 무엇을 하 라고 하는가? 단순하지만 동시에 가장 어려운 명령을 내린다: 생각하라. 그녀가 제시하는 것은 답변이 아니다. 오히려 올바른 질문하기, 습관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타자의 관점에 귀 기울이기 등 정치적 실천의 방법들이다. 아렌트는 과거의 위대한 사상가가 아니라 현재의 위기 속에서 우리를 깨우는 목소리다. 아렌트의 삶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이것이다: 우리는 불가능해 보이 는 상황 속에서도 자유로이 생각하고, 함께 행동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패배한 것이다. 지금, 우리 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생각해 본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32/58/cover150/893232489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325883</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천사들의 문법 - [천사들의 문법 - 르네상스의 천재 피코 델라 미란돌라, 그리고 언어의 숭고한 힘에 대하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505</link><pubDate>Sat, 11 Apr 2026 17: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50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892X&TPaperId=1721050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63/44/coveroff/897291892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1892X&TPaperId=1721050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천사들의 문법 - 르네상스의 천재 피코 델라 미란돌라, 그리고 언어의 숭고한 힘에 대하여</a><br/>에드워드 윌슨-리 지음, 김수진 옮김 / 까치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르네상스를 논할 때 우리는 흔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보편적 천재성이나 미켈란젤로의 불굴의 예술혼을 떠올린다. 그러나 조반니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라는 이름은 오늘날 우리에게 낯설다. 1463년 이탈리아 북부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불과 31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이 철학자는, 짧은 생애 동안 교황의 분노를 사고, 감옥에 갇히고, 그의 저서가 인쇄된 책 중 최초로 교회에 의해 금서가 되는 파란만장한 운명을 겪었다. 에드워드 윌슨-리(Edward Wilson-Lee)의 전기 The Grammar of Angels은 피코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선사하는지 이야기한다. 피코의 삶과 사상을 추적하는 이 여정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이며, 언어는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가라는 오래되고도 근본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br>피코는 어린 시절부터 비범함의 표시를 달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단테의 신곡 전편을 한 번만 들어도 앞뒤로 완벽하게 암송했다는 일화는 과장이 아니라, 그가 언어와 텍스트를 대하는 방식이 보통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음을 시사 한다. 그에게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어떤 초월적인 질서와 연결되어 있는 구조였다. 열 살에 교회의 사무직에 임명되고, 볼로나와 페라라, 파도바와 파리의 대학들을 순례하며 법학과 의학, 고전어를 차례로 정복해간 피코의 학문 편력은,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더 큰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끝없는 질주였다. 그러나 정통적인 학문의 경계를 모두 섭렵한 후, 피코가 도달한 것은 만족이 아니라 더욱 깊은 갈증이었다. 그는 유대 학자들을 찾아가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배우고, 조로아스터의 언어라고 믿었던 칼데아어(실제로는 에티오피아의 전례 언어인 게에즈어였지만)를 익히면서, 동방의 고대 텍스트들 속에 감추어진 신성한 지식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윌슨-리 책의 핵심 주제이자 피코 철학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언어 자체에 대한 그의 사유이다. 피코가 던진 하나의 관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 의미 있는 말보다 더 강한 마법적 힘을 가진다. 명상가들이 반복하는 만트라, 마법사의 주문 "아브라카다브라", 혹은 경기장에서 군중이 함께 외치는 구호 등은 그 언어적 의미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의식을 움직인다. 피코는 언어가 의미를 초과하여 작동하는 영역에 천사가 있다고 보았다. 윌슨-리는 이를 황홀하게 하는 말(enrapturing speech)"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합창단에서 함께 노래할 때, 또는 군중 속에서 하나의 구호를 외칠 때, 우리는 잠시 개별적 자아의 경계가 녹아내리는 경험을 한다. 피코에게 이것은 감정적 경험만이 아니라 신비적 합일의 전조였으며, 인간이 천사적 존재, 즉 개별성을 초월한 순수한 이성의 존재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의 증거였다.<br>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 즉 공동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틀 안에서 천사를 인간보다 상위에 위치한 존재, 즉 불완전한 육체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 이성으로 정의했다. 피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철학적 이해를 통해 천사의 경지에, 나아가 신성한 합일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급진적인 가능성을 탐구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만든 그 하나가 될 것이다." 이단이기 이전에 인간의 가장 오래된 열망 중 하나를 담고 있다. 피코의 900개 명제는 바로 이 야심찬 통합의 기획 위에 세워졌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유대 카발라 전통, 아랍 철학자 아베로에스에 이르기까지, 피코는 모든 지적 전통을 하나의 거대한 통일 이론으로 종합하고자 했다. 그것은 지식의 과시가 아니라, 세계의 모든 지혜가 실은 하나의 진리를 다른 언어와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심층적인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피코의 장대한 지적 기획은 당대의 권력으로부터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1486년 로마에 도착한 스물세 살의 피코는 자신의 900개 명제를 공개 토론에 부치겠다고 선언하고, 도전자들의 여행 경비까지 부담하겠다고 했다. 이 대담한 선언은 지적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의 사유가 얼마나 공개적이고 보편적인 대화를 원했는지를 보여준다.​그러나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는 토론 자체를 금지했고, 명제들을 이단으로 판정한 교황청 위원회의 결정에 피코는 격렬한 반박문을 발표했다. 그 결과 그의 저서는 교회에 의해 최초로 금서가 된 인쇄본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얻었고, 피코 자신은 도피 신세가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피코가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가 박해를 받는 방식이다. 그는 권위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대신 오히려 자신의 비판자들을 경멸하는 글을 발표했다. 겸손이나 유화의 기술을 익히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윌슨-리의 서술은 피코를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이단아로 그려낸다. 그는 고집스럽지 않았다기보다는, 자신이 추구하는 진리 앞에서 정치적 타협이 의미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br>피코를 구한 것은 로렌초 데 메디치의 우정이었다. 로렌초는 피코를 위해 도서관을 지을 수 있다면 파산해도 좋겠다고 말했을 만큼 그를 아꼈고, 실제로 동지중해 전역에 사람을 보내 희귀 필사본을 수집했다. 피코의 말년은 플로렌체에서 조용하게 연구에 몰두하는 시간이었지만, 로렌초의 죽음과 함께 사보나롤라의 광풍이 도시를 휩쓸면서 그는 또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피코는 자신이 플로렌체로 불러들인 바로 그 사보나롤라의 수도원 산마르코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보나롤라는 군중을 열광적인 집단적 황홀경으로 이끄는 웅변의 힘을 구현한 인물이었다. 보티첼리가 그의 설교에 설득되어 자신의 그림을 불태웠다는 일화는, 피코가 그토록 탐구했던 황홀하게 하는 말"의 힘이 실제로 얼마나 강렬하고 동시에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피코는 그 힘의 신성한 가능성을 보았지만, 그것이 어떻게 파괴적인 집단 광기로 전환 될 수 있는지를 목격하면서 생을 마쳤다.​윌슨-리가 피코를 통해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현대적 질문은 개인주의에 관한 것이다. 바사리에서 부르크하르트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는 오랫동안 개인 천재의 시대로 해석되어 왔다. 피코 역시 그 신화의 일부로 위치 지어졌다. 그러나 윌슨-리는 피코의 철학이 실은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피코에게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는 개인이란 과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을 파도의 물마루에 비유했다. 각각의 물마루는 개별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거대한 대양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 관점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낯설고 불편하다. 현대 서구 사회는 개인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자명한 가치로 여기도록 훈련받았다. 그러나 윌슨-리는,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이 집단적 정체성을 개인적 정체성보다 우선시한 경우가 훨씬 더 많았음을 지적한다. 문제는 집단성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발현되는가이다.​20세기 파시즘은 개인이 집단 속으로 해소되는 황홀경의 어두운 역사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피코가 탐구했던 집단적 합일의 경험은 파시즘적 강제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자발적인 신비적 참여이자,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연결성에 대한 인식이었다.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 위기가 증명했듯이,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가장 절박한 도전들은 개인적 해법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다. 피코의 질문은 이 맥락에서 새롭게 울린다: 우리는 개별적 자아의 경계를 초월하여 공동의 운명 을 인식할 수 있는 철학적, 정신적 자원을 갖추고 있는가? 윌슨-리는 피코를 직접적인 해답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피코의 사유가 우리에게 익숙한 개인주의적 패러다임의 외부에 다른 가능성이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고 제안한다. 새들의 언어에 대한 믹스텍 문명의 관심, 아이슬란드 서사시의 신화, 인도 브라만의 신성한 언어관 이 피코의 천사 언어에 대한 탐구와 연결되는 방식은, 인간이 의미와 의미를 초월하는 것 사이의 경계에서 언제나 같은 질 문을 던져왔음을 암시한다.<br>피코는 로마의 시인 프로페르티우스의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위대한 일에서는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체념처럼 들리기도 하고, 숭고한 다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아마도 피코 자신도 그 양가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천사의 언어를 해독하고, 모든 지혜를 하나의 통일 이론으로 종합하고, 언어가 의미를 초월하는 영역에서 신성과 접촉하겠다는 그의 야망은 달성되지 못했다. 그가 죽기 직전 산마르코에서 미친듯이 써내려간 마지막 원고들은 이후 아무도 읽을 수 없는 "난해한 혼돈"이었고, 결국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The Grammar of Angels가 설득력 있게 보여주듯, 피코의 실패한 탐구는 실패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인간적이고 더 오래 기억된다. 계몽주의 이후의 지성사는 피코 식의 탐구를 "학자들의 허영"이라고 조소했다. 새로운 패러다임과 데이터의 지속적 확장이 지식의 이상이 되었고, 이해보다 정보가, 지혜 보다 혁신이 우선시되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오늘날 행성 규모의 위기 속에서 목격하고 있다. 결국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짧고 눈부신 생애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완성된 체계가 아니라 질문 그 자체다. 언어는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가? 인간은 자신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가? 집단 속으로 녹아드는 경험은 위험인가 아니면 구원인가? 피코는 이 질문들에 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 질문들을 가능한 한 멀리, 가능한 한 깊이 밀어붙였다. 위대한 일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충분했다. "In great things, it is enough to have tried" Propertius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좌우명)<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63/44/cover150/897291892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634430</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시간이 없다는 착각 - [시간이 없다는 착각 - 시간 압박을 버리고 여유를 되찾는 9가지 심리 법칙]</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487</link><pubDate>Sat, 11 Apr 2026 17: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1048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5569558&TPaperId=1721048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8/81/coveroff/892556955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5569558&TPaperId=1721048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시간이 없다는 착각 - 시간 압박을 버리고 여유를 되찾는 9가지 심리 법칙</a><br/>이언 테일러 지음, 최기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오늘도 나는 바쁘다. 아니, 정확히는 바쁘다고 느낀다. 달력은 빽빽하고, 할 일 목록은 줄어들지 않으며, 하루가 끝날 때마다 무언가를 다 하지 못했다는 묵직한 감각이 남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돌아보면 그 하루 안에서 정말 중요한 일을 했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시간은 분명히 흘렀는데, 나는 어디에 있었던 걸까. "시간이 없어서요." 우리가 얼마나 자주 이 말을 꺼내는지 생각해보면 놀랍다. 운동을 못하는 이유도, 친구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도, 오래 묵혀둔 꿈을 꺼내지 못하는 이 유도 모두 시간 탓이다. 그런데 정말 시간이 문제일까. 아니면 우리가 시간과 맺어온 관계 자체가 뒤틀려 있는 건 아닐까.<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고 느낄 때, 우리는 흔히 의지력 부족이나 나쁜 습관을 탓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훨씬 더 정교한 심리적 함정들이 숨어 있다. 첫 번째는 낙관적 자기기만이다. 우리는 자신이 할 일에 대해 습관적으로 낙관적으로 생각한다. 이 일은 한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다고 판단하지만, 실제로는 두 시간이 걸린다. 이런 오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구조적인 편향이다. 우리는 자신의 일을 생각할 때 이상적인 조건을 전제하지만, 현실에는 예상치 못한 변수, 집중력의 저하, 사소한 방해들이 끼어든다. 흥미롭게도 타인의 일을 예측할 때는 이런 실수와 지체를 자연스럽게 고려한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장 너그럽고, 그래서 가장 쉽게 속는 사람이 된다. 두 번째는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시간이다. 어떤 일이든 주어진 시간만큼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한 시간짜리 일이 두 시간이 주어지면 두 시간을 꽉 채운다. 여유 있다고 생각할수록 시작은 늦어지고, 과정은 느슨해지며, 마감 직전에야 비로소 집중이 시작된다. 시간이 많다는 느낌이 오히려 우리를 나태하게 만들고, 정작 그 시간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상태로 하루가 끝난다. 이것이 역설이다. 시간이 더 많을수록 더 잘 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더 많이 흘려보낸다. 세 번째는 의지력에 대한 과신이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믿는다. 마음만 먹으면 된다고, 결심만 하면 바뀔 수 있다고. 그러나 의지력은 근육과 같아서, 쓸수록 닳는다. 하루의 초반에는 단단하게 서 있던 결심이 오후가 되면 흐물거리고, 저녁이 되면 무너진다. 그래서 미룬다. 내일 하자, 다음 주에 하자, 언젠가 하자. 그러나 그 '언젠가'는 달력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의지력이 가장 충만한 시간에 가장 중요한 일을 배치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매번 잊는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바쁘다는 느낌이 반드시 많이 일하고 있다는 증거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 정말로 중요한 일에 깊이 몰입하는 사람은 흔히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말한다. 시간이 없다는 감각은, 어쩌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와 맞지 않거나, 나의 진짜 가치와 어긋나고 있다는 경고 신호일지 모른다. 몰입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에게 시간은 적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흘러간다. 하지만 억지로, 불안하게, 마지못해 앉아 있는 사람에게 시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형벌처럼 느껴진다. 결국 시간의 질감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보다 왜 하느냐에 달려 있다. 주변 환경도 중요하다. 늘 바쁘게 돌아가는 분위기 속에 있으면, 그 흐름에 자신도 모르게 휩쓸리게 된다. 실제로 할 일이 많지 않아도 초조해지고, 쉬고 있으면 뭔가를 놓치 는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이 불안감이 바로 시간 부족의 진짜 원인인 경우가 많다. 우리를 압박하는 것은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분위기와 시선과 기대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우리는 오랫동안 빈 시간을 낭비로 여겨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목적 없이 걷는 시간. 이런 것들은 생산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죄책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빈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를 되찾는 시간이다. 뇌는 쉬는 동안에도 일한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에, 뇌는 흩어진 정보들을 연결하고, 감정을 정리하고,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창의적인 사람들이 종종 샤워 중에, 산책 중에, 잠들기 직전에 가장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빈 시간이 생각을 발효시킨다. 빈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자꾸 무언가로 채우려는 충동, 스마트폰을 꺼내고, 영상을 틀고, SNS를 스크롤하는 행동들은 결국 그 발효의 시간을 빼앗는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소비하지만 더 적은 것을 생각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더 적은 것을 느끼게 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시간을 잘 쓰고 싶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묻는 것이다. 러닝머신 위에서 30분을 채 우겠다는 계획보다 건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겠다는 지향이 더 강한 동력을 만든다. 책을 한 달에 몇 권 읽겠다는 목표보다 배우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정체성이 더 오래 지속된다. 정체성은 의지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책을 사 랑하는 사람은 굳이 읽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책을 집어 든다. 달리기를 자신의 일부로 여기는 사람은 오늘 뛸 지 말지를 매번 고민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과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 사이에는 엄청 난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 걸맞게 살아갈 때, 시간은 더 이상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흐름의 매체가 된다. 억지로 쪼개고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타고 가는 강물처럼.<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시간은 늘릴 수 없다. 하루를 25시간으로 만들거나, 일주일에 하루를 더 끼워 넣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을 느끼 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 더 많은 일을 밀어 넣어서가 아니라, 지금 하는 일에 더 깊이 있음으로써. 계획표를 촘촘하게 채워 서가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을 먼저 함으로써. 의지를 불태워서가 아니라, 나다운 정체성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결국 시 간이 없다는 느낌은, 내가 원하는 삶과 내가 실제로 보내는 시간 사이의 간격에서 온다. 그 간격을 줄이는 것, 그것이 시간 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8/81/cover150/892556955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788123</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스스로 깨어라 - [스스로 깨어라 - 헤르만 헤세 청춘소설 3부작,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싯다르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198130</link><pubDate>Sun, 05 Apr 2026 16: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19813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22137262&TPaperId=1719813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93/7/coveroff/k72213726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22137262&TPaperId=1719813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스스로 깨어라 - 헤르만 헤세 청춘소설 3부작,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싯다르타』</a><br/>헤르만 헤세 지음, 송동윤 옮김 / 스타북스 / 2026년 03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장 어딘가에 꽂혀 있던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을 다시 꺼내 든 건, 누군가의 권유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 날 문득, 오랫동안 무언가가 내 안에서 잠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느낌은 막연했지만 분명했다. 책은 &lt;수레바퀴 아래서&gt;,&lt;데미안&gt; 마지막으로 &lt;싯다르타&gt;를 같이 엮은 책이었다. 헤르만헤세의 대포작 세 권을 차례로 읽는 동안, 나는 한 인간이 깨어나는 과정을 함께 겪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lt;스스로 깨어라&gt;는 이 세 편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은 책이다. 제목에 담긴 두 겹의 뜻, 잠에서 깨어나듯 자신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껍질을 깨고 세계로 나오는 것은 편집자의 언어가 아니라, 헤세가 세 소설을 통해 일생 동안 탐구한 질문의 핵심일 것이다. 나는 세 권을 다시 읽으면서 그 질문이 얼마나 지금 이 시대에도, 그리고 내 삶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지를 새삼 느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수레바퀴 아래서에서, 한스 기벤라트는 모든 걸 갖춘 소년처럼 보였다. 뛰어난 머리, 성실한 태도, 마을 전체의 기대. 그러나 그를 에워싼 것들은 그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를 갈아먹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공부, 낚시와 산책마저 허락되지 않는 시간들, 그리고 쉬지도 못한 채 이어지는 시험들. 어른들은 그것을 '훈련'이라 불렀고, '사랑'이라 믿었다. 한스의 이야기에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문 장면은, 그가 결국 강가에서 발견되는 마지막 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전에, 헤세가 차례차례 던지는 물음들이었다. 왜 토끼를 빼앗았는가, 왜 낚시를 금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쉬지 못하게 했는가. 이 질문들은 한스를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향해 있다. '스스로 깨어라'는 말이 한스에게는 얼마나 잔인하게 들렸을까. 그는 깨어날 기회 자체를 빼앗긴 소년이었다. 깨어남 이전에 짓눌려 버린 삶, 그것이 &lt;수레바퀴 아래서&gt;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첫 번째 진실이다. 깨어나는 것은 때로 먼저 부서지는 일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부서짐이 외부의 폭력에 의한 것일 때, 그것은 성장이 아니라 파괴가 된다. 한스의 비극은 그 차이를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준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lt;데미안&gt;의 에밀 싱클레어는 한스와 달리 살아남는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생존이 아니었다. 싱클레어는 두 세계 사이에서 오랫동안 갈라지는 고통을 겪는다. 아버지의 세계(빛과 질서, 예배와 도덕)와 그 너머의 세계, 냄새도 말투도 다른, 혼돈과 욕망과 스캔들로 가득한 세계. 그는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흔들렸다. 그때 데미안이 등장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답을 주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싱클레어가 스스로 묻게 만드는 존재다. 카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그의 언어는 기존의 해석을 뒤집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들을 낯설게 만든다. 진실은 단순하지 않으며, 강한 자는 두려움을 받는다는 것, 이 뒤집기는 싱클레어의 세계에 처음으로 균열을 만든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버둥거린다. 그 알은 새의 세계다.' 데미안이 보낸 쪽지의 이 문장은, 성장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은유 중 하나다. 알 안은 안전하다. 그러나 새는 그 안에서 죽는다. 껍질을 깨는 일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싱클레어는 그 과정을 에바 부인과의 만남, 아브락사스라는 신의 이름, 전쟁의 혼란 속에서 차례차례 겪으며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 가까워진다. 다시 읽으면서 나는 싱클레어의 방황이 얼마나 정직한가를 새삼 느꼈다. 그는 선하려 하면서도 타락하고, 이상을 좇으면서도 현실에 무너진다. 그 흔들림이 있었기에 그의 깨어남은 설득력을 갖는다. 완전한 인간이 깨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 그 불완전함을 껴안으며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이야기, 그것이 데미안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싯다르타는 처음부터 구도자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그 앎으로 길을 떠난다. 그러나 헤세는 그 앎이 얼마나 얕은 것인지를, 싯다르타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사문이 되어 고행을 겪고, 고타마 부처를 만나 그의 지혜를 인정하면서도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고, 세속으로 내려가 카말라 곁에서 쾌락과 욕망을 직접 살아낸다. 싯다르타가 세속에서 겪는 타락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선택해서 그 안으로 들어갔고, 스스로 깨달아 그 안에서 빠져나온다. 그가 강가에서 오랜 시간 바시테바와 함께 보내며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장면은, 깨달음이 얼마나 조용한 형태로 찾아오는지를 보여준다. 강은 모든 것을 동시에 흐르게 한다, 시작도 끝도, 삶도 죽음도, 기쁨도 슬픔도. 그 강물 속에서 모든 얼굴이 하나로 이어지는 환상을 싯다르타는 마침내 이해한다. 고빈다에게 싯다르타가 전하는 마지막 말은 가르침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배운 것을 언어로 전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고빈다에게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게 한다. 그리고 고빈다는 그 순간, 수천 개의 얼굴이 흘러가는 것을 본다. 지식이 아니라 체험, 교리가 아니라 존재 자체, 그것이 싯다르타가 말하는 깨어남은 그런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을 덮으면서, 나는 내가 지금 어느 자리에 있는지를 생각했다. 아직 알 안에 있는가, 아니면 껍질을 깨는 중인가. 그것도 아니면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어느 지점에 있는가. 명확한 답은 없었지만, 적어도 이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깨어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세의 소설은 100년이 지나도 늙지 않는다. 왜냐하면 알 안에 갇혀 있는 인간의 불안과, 그 알을 깨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시대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욕망을 따라 스스로 한 걸음씩 걸어가는 일, 그것이 헤세가 세 편의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건네는 유일한 초대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93/7/cover150/k72213726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930763</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고전 격차 - [고전 격차 - 미래를 보는 인문 고전 99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198107</link><pubDate>Sun, 05 Apr 2026 16: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19810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22137403&TPaperId=1719810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7/16/coveroff/k42213740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22137403&TPaperId=1719810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고전 격차 - 미래를 보는 인문 고전 99선</a><br/>장은조 지음 / 아이콤마(주) / 2026년 03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고전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두꺼운 책 표지와 빽빽한 활자를 떠올린다. 그리고 곧이어 "언젠가는 읽어야지"라는 다짐과 함께 책장 한편에 고이 모셔두곤 한다. 나 역시 그랬다. &lt;우파니샤드&gt;, &lt;주역&gt;, 키케로의 &lt;의무론&gt; 같은 이름들은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알아야 할 것 같은 막연한 압박감으로만 존재했지, 실제로 내 삶과 어떤 접점이 있는지는 잘 몰랐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고전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혹시 내가 질문을 잘못 들고 있어서가 아닐까?"<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고전을 대할 때 우리는 흔히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태도로 접근한다. 저자의 논리를 파악하고, 시대적 배경을 암기하고, 핵심 개념을 정리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 책이 각 고전에 붙여놓은 제목들을 보면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이 눈에 띈다. "나는 누구인가, 세계는 무엇인가", "인생의 고통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중심을 잡는 법". 이 질문들은 학문적이지 않다. 오히려 지극히 개인적이고, 지극히 지금 이 순간의 것들이다. 고전은 원래 이런 질문들에서 태어났다. 수천 년 전 인도의 현인들이 스승 곁에 가까이 앉아 나눈 대화가 &lt;우파니샤드&gt;가 되었고, 석가모니가 인간의 고통 앞에서 내놓은 솔직한 대답이 &lt;아함경&gt;이 되었다. 그들이 살던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사이에는 수천 년의 간극이 있지만, 질문 자체는 놀랍도록 동일하다. 우리는 여전히 고통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변화 앞에서 두려워하며, 권력 앞에서 헷갈린다. 그 질문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고전도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그렇다면 왜 우리는 고전을 그렇게 멀게 느끼는 걸까. 나는 그 이유가 '고전을 읽는다'는 행위에 너무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고전을 읽으면 인생이 바뀌어야 한다는 강박, 혹은 고전을 읽지 않으면 뭔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불안이 고전과 나 사이에 높은 벽을 쌓아놓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주역이 말하는 음양의 균형은 오늘 아침 회의에서 상사와 부딪혔을 때 '어느 한쪽의 입장만 옳은 건 아니구나'라고 잠깐 숨을 고르는 순간에 살아난다. 키케로가 의무론에서 아들에게 건넨 이야기는, 단기 이익과 도덕적 판단 사이에서 고민하는 직장인의 갈등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던지는 불편한 통찰, 즉 권력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기초한다는 사실은 조직 생활을 하는 누구라도 어느 순간 뼈저리게 실감하는 진실이다. 고전이 위대한 이유는 그것이 완성된 진리를 담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여전히 열려 있는 질문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아함경은 고통에서 벗어나라고 말하지만,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는 결국 읽는 사람이 스스로 찾아야 한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사유의 종착점을 제시한 게 아니라 사유의 출발점을 제시한 것이다. 고전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더 좋은 질문을 품게 해주는 책이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 이카로스가 날개가 녹아 추락한 것은 단순히 방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지 않은 오만, 즉 히브리스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회자되는 이유는, 지금 이 시대에도 이카로스적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성공에 도취해 리스크를 과소평가하고,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결국 무너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뉴스에서도 매일 등장한다. 신화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신화는 인간의 반복되는 패턴을 압축한 언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것은 고전이 가진 '낯선 위로'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신의 방탕했던 청년 시절과 지적 오만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1,600년 전의 인물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이렇게 솔직하게 고백했다는 사실이 묘하게 위안이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방황해도 된다는 것, 그 방황 속에서도 무언가를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삶이라는 것. 지눌의 보조법어가 전하는 "마음 밖에 딴 부처가 없다"는 말도 그렇다. 우리는 너무 자주 바깥을 향해 달린다. 더 나은 조건, 더 좋은 환경, 더 많은 인정. 그런데 그 달음질을 멈추고 잠깐 안을 들여다보라는 말은, 현대적 자기계발의 언어로 치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강력하다. 아니, 그런 치장 없이 날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더욱 강력하다. 고전이 주는 위로는 동정이 아니다. 고전은 "괜찮아, 다 잘 될 거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 고통은 너만의 것이 아니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온 것이야"라고 말해준다. 그 말이 주는 안도감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수천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질문을 품고 살아왔다는 사실, 그 질문에 정해진 답은 없지만 함께 생각해온 긴 여정이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덜 외롭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결국 고전 읽기는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대화의 연장이다. 수천 년 전의 현인들과, 그리고 나 자신과 나누는 대화. '고전 격차'라는 말이 존재한다면, 그 격차는 단순히 어떤 책을 읽었느냐 읽지 않았느냐의 차이가 아니다. 삶의 무게 앞에서 질문을 품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 불확실성 앞에서 고전이 전해준 지혜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다. 호메로스가 그린 오디세우스는 20년의 고난 끝에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 여정에서 그를 지탱한 것은 근육이나 무기가 아니었다. 자신이 돌아갈 곳을 기억하는 마음, 그리고 어떤 유혹 앞에서도 그 방향을 잃지 않는 지혜였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 오디세우스처럼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잊지 않기 위한 나침반을 손에 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고전은 어렵지 않다. 다만 우리가 너무 오래 질문을 멈추고 살았을 뿐이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7/16/cover150/k42213740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871686</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쓰면서 이기는 전략 필사 : 손자병법 100 - [쓰면서 이기는 전략 필사 : 손자병법 100 -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주는 승리의 문장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197447</link><pubDate>Sun, 05 Apr 2026 08:3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19744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52137383&TPaperId=1719744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35/31/coveroff/k15213738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52137383&TPaperId=1719744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쓰면서 이기는 전략 필사 : 손자병법 100 -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주는 승리의 문장들</a><br/>손무 지음, 진성수 감수 / 서울문화사 / 2026년 03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처음에는 그냥 글씨나 예쁘게 써볼 요량이었다. 우연히 집어 든 그 책이 내 일상의 어느 이른 아침, 조용히 전장을 열게 될 줄은 몰랐다. 표지를 넘기는 순간, 묘한 긴장감이 손가락 끝으로 스며들었다. 단순한 필사 노트가 아니었다. 고전 문장들이 활자로 촘촘히 박혀 있었고, 여백은 내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2천5백 년 전 한 전략가의 사유가 오늘의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상한 감각. 그것이 시작이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솔직히 처음에는 낯설었다. 한자 원문과 그 아래 달린 뜻풀이를 보며, '이게 나한테 맞는 책인가' 하는 의심이 먼저 들었다. 고전이라고 하면 어쩐지 딱딱하고 먼 세계의 이야기 같고, 병법이라고 하면 칼과 창이 맞부딪히는 전쟁터가 먼저 떠오르지 않던가. 그런데 첫 번째 문장을 천천히 받아 쓰면서 무언가가 달라졌다. 한 획 한 획 옮기는 사이 머릿속이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스마트폰 알림도, 오늘 마감해야 할 업무도, 어제 어색하게 끝난 대화도 잠시 물러나 있었다. 손이 움직이는 동안 오직 그 문장과 나만 남는 느낌. 그 고요함이 낯설고도 반가웠다. 필사는 속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평소 텍스트를 읽는 방식으로 쓱 훑어 넘길 수가 없다. 손이 느리기 때문에 눈과 머리가 억지로 그 속도에 맞춰진다. 덕분에 평소라면 그냥 흘렸을 문장 하나가, 천천히 씌어지는 동안 오래 마음에 머물렀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필사를 이어가면서 손무가 단순히 전쟁을 논한 인물이 아님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이기는 것보다 지지 않는 것을 먼저 말했고, 싸움보다 싸움을 피하는 지혜를 더 높이 쳤다. 그 태도가 어쩐지 요즘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닮아 있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상대를 알고 나를 아는 것. 단순해 보이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자주 그 반대로 살아왔는지를 생각하게 됐다. 상대는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흥분하거나, 나 자신의 한계를 모른 채 무리하게 몰아붙인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필사를 하면서 나는 그 문장의 주인이 된다. 손무의 언어가 내 손을 빌려 다시 태어나는 동안, 나는 어느새 그 의미를 내 삶의 맥락 위에 겹쳐 놓고 있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어느 순간부터 하루를 시작할 때 이 책을 먼저 펼치게 되었다.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아직 아무도 말 걸지 않는 이른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 천천히 한 문장을 써 내려간다. 그것이 내 하루의 준비 운동이 됐다. 흥미로운 건, 그렇게 써 놓은 문장들이 하루 안 어딘가에서 불쑥 떠오른다는 점이다. 회의 중 누군가와 의견이 엇갈릴 때, 무리한 요구를 어떻게 거절할지 고민할 때, 혹은 오랫동안 피해 왔던 결정을 앞두고 망설일 때. 그 문장들은 조용히 나타나 하나의 시각을 제안해 준다. 강요하지 않고, 그저 한 방향을 가리키는 방식. 전술을 쓰면서 서서히 알게 됐다. 준비하고, 실행하고, 변화를 읽고, 정보를 장악하는 그 흐름은 어떤 프로젝트를 이끌거나, 어떤 관계를 돌보거나,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오래된 병서가 지금 내 삶의 지도가 되는 순간이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필사를 하다가 문득 내 글씨를 바라본 적이 있다. 처음 며칠의 글씨와 몇 주가 지난 글씨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더 반듯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편안해졌달까. 힘을 빼고 쓰는 법을 몸이 조금씩 익히는 것처럼. 그게 필사의 이상한 점이다. 결과보다 과정이 남는다. 예쁜 글씨체를 연습하는 게 목적이 아닌데 어느 순간 손이 문장을 기억하고, 뇌가 그 문장의 리듬을 따라 생각하기 시작한다. 읽었을 때와 달리, 손으로 옮긴 문장은 기억의 결 속 깊은 곳에 자리를 튼다. 나는 이 책이 어떤 고전 해설서보다 솔직하다고 느꼈다. 거창하게 손무의 철학을 논하거나 수십 개의 주석을 달지 않는다. 그냥 쓰게 한다. 그 단순함이 오히려 문장의 진의에 더 가까이 닿게 해준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물론 이 책을 필사한다고 해서 삶이 당장 달라지지는 않는다. 여전히 나는 조급해지고, 여전히 감정이 앞서는 날이 있다. 하지만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건, 그런 순간에 '아, 잠깐' 하는 짧은 브레이크가 생겼다는 점이다. 손으로 써서 머릿속 어딘가에 각인된 그 문장들이 위급한 순간 조용히 손을 잡아당긴다. 책의 여백이 채워질수록 그것은 점점 '내 것'이 되어간다. 손무의 언어와 내 필체가 한 페이지 위에 섞여 있는 그 공간은, 어떤 고급 다이어리나 독서 노트로도 대체되지 않는 고유한 기록이다. 오래된 지혜들이 나의 이른 아침마다 한 문장씩 쌓여간다. 그리고 그 문장들은, 조용히 오늘의 나를 지탱해 준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35/31/cover150/k15213738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353185</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후회하기 전에 읽는 심리학 - [후회하기 전에 읽는 심리학 - 이대로 살긴 싫은데 바꾸자니 두려운 어른들에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197440</link><pubDate>Sun, 05 Apr 2026 08: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19744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62137693&TPaperId=171974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43/97/coveroff/k86213769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62137693&TPaperId=1719744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후회하기 전에 읽는 심리학 - 이대로 살긴 싫은데 바꾸자니 두려운 어른들에게</a><br/>김혜령 지음 / 메이븐 / 2026년 03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우리는 모두 불안을 안고 산다. 직업의 안정성도, 인간관계도, 미래도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는 세상에서 불안은 공기처럼 우리 곁에 머문다. 그런데 심리상담가로 17년을 일해 온 저자는 묻는다.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불안이, 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것일까? 저자 자신도 한때 불안에 짓눌려 살았다. 대학원 시절 부모님의 경제적 어려움을 알게 된 이후, 그는 오직 '안정'만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전공과 무관한 직장에 취업해서 잘리지 않을 만큼만 일하고,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삶. 그렇게 3년이 지나자 안정이 아니라 정체가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작은 자극에도 쉽게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br>그때 그는 '역동적 평형'이라는 개념을 만났다. 변화와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유연하게 대처하고, 내적 자원을 활용해 균형을 되찾아 가는 과정. 진정한 안정이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나아가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흔들리는 존재다. 흔들리지 않으려 바위처럼 굳어 있겠다는 건, 어쩌면 죽은 듯이 살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 탈 벤 샤하르는 안전지대와 위험지대 사이의 '건강한 중간 지대'를 발견하기 위해 모험을 시도하라고 했다. 저자는 그 말을 몸으로 증명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심리상담가의 길을 걸으며 수입이 전혀 없는 시기도 견뎌 냈다. 서른이 넘어 통장 잔고가 바닥을 칠 때의 불안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시간을 위기가 아니라 성장의 과정으로 받아들였을 때, 전에 없던 새로운 경험들이 쌓였다. 마흔이 넘은 지금, 저자가 20년 전과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불안을 더 이상 제거해야 할 결함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안해도 결국 해냈던 경험, 흔들리면서 무너지지 않았던 시간들이 쌓이면서, 불안은 그를 끌고 다니는 주인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흔들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기보다 기꺼이 흔들리는 자신을 허용해 보자. 불균형과 균형 사이의 시소 타기는 위기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가장 자기다운 성장의 과정이다.​요즘 사람들은 '나답게 살고 싶다'는 말을 참 자주 한다. 직업의 안정성도, 성공의 공식도 믿을 수 없는 시대에서 사람들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닻으로 자기 자신을 선택한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추구하는 '나다움'이 진짜 나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이 시대가 원하는 '자기다움'을 흉내 낸 것인지. 영국의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캇은 타인의 기대에 맞춰 방어적으로 만들어진 자기를 '거짓 자기'라고 불렀다. SNS에서 나다운 스타일, 말투, 행동을 전시하며 그것을 진짜 자신이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이미 또 다른 거짓 자기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모순되고 변해 가는 다양한 나를 통합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남에게 보여 주기 싫고 나조차 외면하고 싶은 초라한 모습까지 포함해서. 그러나 더 본질적인 문제는, 나에 대한 생각이 지나칠수록 오히려 삶에 몰입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청소년기 내내 삶을 증오하고 자살 충동을 안고 살았다. 그가 삶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줄이고, 세상의 일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나만 존재하는 좁은 세계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br>저자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일이든, 사람이든, 예술이든 무언가를 온 마음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몰두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사라지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크게 확장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몰입을 두려워한다. 최선을 다했다가 기대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할까 봐, 깊이 사랑했다가 상처만 남을까 봐. 그래서 차라리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을 지키는 쪽을 선택한다. 그러나 무언가에 몰두해 본 경험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삶의 자산이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감각이다. 어디까지 해봤는지,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지, 어느 지점에서 포기하고 싶어지는지, 그럼에도 다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이런 감각들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두려움에 '나'만 붙들고 살지 말기를. 삶에, 사람에, 일에, 사랑에 한 번쯤은 온 힘을 다해 미쳐 보기를 생각해 본다.​사회심리학자 앤드루 힐과 토머스 커런이 27년간 4만 명 이상의 대학생을 분석한 결과, 완벽주의의 세 가지 유형 중 '사회 부과적 완벽주의' (타인이나 사회가 자신에게 높은 기준을 기대한다고 느끼는 경향)의 증가 속도가 가장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요즘 젊은 세대는 점점 더 자기 자신을 타인의 기대 속에서 정의한다는 것이다. 외모, 성격, 직업, 재테크, 육아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육각형 인간'을 좇으려 하니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한다. 하지만 완벽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부지런함이나 성실함이 아니라, 게으름과 회피, 끝없는 자기 비난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강박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키워 사람을 더 주저하게 만든다.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이 나의 존재를 객체화한다고 말했다. 그의 유명한 말 '타인은 지옥이다'의 본래 의미는, 타인의 시선 속에 갇힌 나의 모습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에 있다. 그 시선에 나를 모두 내맡기느냐, 아니면 중심을 잘 잡고 그 시선을 하나의 의견으로 여기느냐는 엄연히 다른 문제다. 저자는 대안으로 '완주'를 제안한다. 누구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대단해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정한 방향이기에 할 수 있다면 계속하는 것. 학창 시절 공부를 후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보면, 대부분 1등을 못 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에 충실하지 않아서 후회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련과 후회는 결과 그 자체보다 그 순간에 충실하지 못했을 때 남는 것이다. 완벽함이 아니라 꾸준함. 그것이 결국 재밌었던 삶을 만드는 힘이다.<br>두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나라는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좋은 통로가 된다. 저자는 한때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이 함정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두려움은 삶의 장애물이 아니라 위험으로부터 인간을 지켜 주는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이기 때문이다. 통제되지 않는 두려움은 대개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저자가 상담한 20대 여성 승주 씨는 타인의 어두운 표정만 마주쳐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니, 감정 기복이 심했던 아버지와의 어린 시절 경험이 있었다. 뇌가 그 패턴을 위협으로 기억해, 어른이 된 지금도 비슷한 상황에서 과거의 공포를 재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몸에 새겨진 두려움은 생각을 바꾼다고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자신의 두려움이 어디서 왔는지 살펴보고, 최초의 두려움을 겪었던 과거의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이해의 단계를 통해 '나는 더 이상 무력한 아이가 아니라 나를 지켜 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긴다. 그것이 진짜 용기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용감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함께 한 발짝 내딛는 것이 진정한 용기다. 저자의 바람은 이렇게 바뀌었다.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에서 '두려움과 함께 더 자유롭게'로. 두려움을 이해할수록 더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진다. 우리 모두의 두려움이, 결국 그럭저럭 살 만한 날들로 이어지기를 바란다.<br>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고민은 겉으로는 제각각이다. 이직을 해야 할지, 이 사람과 결혼해도 될지, 이 친구와 관계를 끊어야 할지. 저자는 오랜 시간 이런 사연들을 마주하며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그 답을 타인에게 요청할 수밖에 없는 마음 이면에 있는 두려움이었다. 틀린 길을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잘못된 선택으로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저자도 오래 그랬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종교에 기대고, 별자리 운세까지 찾으며 삶의 해결사를 구해 헤맸다. 그러나 돌고 돌아 얻은 깨달음은 단순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나를 구원해 줄 수 없다는 것. 살아가는 한 나라는 존재의 운전대는 다른 누구에게도 넘길 수 없다. 심리학적 지식이나 심리치료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그저 나와 타인을 이해하고, 자아를 건강하게 키워 가도록 돕는 안내자일 뿐이다. 변화와 성장을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은 결국 그 자신이기에.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내가 나를 믿어 주는 것,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힘. 이 세 가지가 어려움을 풀어 가는 유일한 비법이다. 약함을 인정할 때 가장 강한 모습이 드러난다. 힘들다고 말을 꺼내는 것, 도움을 요청하는 것, 막막하다고 토로하는 것, 그 모든 행동이 바로 당신이 가진 힘이다. 삶이 멈춘 듯 느껴질 때, 나 자신에게 말을 걸어 보자. 나에게는 내 삶을 잘 꾸려 갈 힘이 있다. 내가 나를 이해하고 믿어 주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강해진다. 아니, 강해지지 않고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43/97/cover150/k86213769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439761</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성 물질 이야기 -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성 물질 이야기 - 한 끗 차이로 독과 약을 오가는 기묘한 독성 물질의 세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196765</link><pubDate>Sat, 04 Apr 2026 21: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19676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42137302&TPaperId=1719676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1/77/coveroff/k94213730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42137302&TPaperId=1719676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성 물질 이야기 - 한 끗 차이로 독과 약을 오가는 기묘한 독성 물질의 세계</a><br/>목정민 지음 / 주니어태학 / 2026년 03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1817년, 독일의 한 병원에서 상한 소시지를 먹고 쓰러진 환자들을 바라보던 의사 유스티누스 케르너는 그 알 수 없는 독소가 신경을 끊어버린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훗날 '보툴리눔'이라 불리게 될 이 독소는, 무려 밥 한 숟가락만으로도 수백만 명의 생명을 앗아갈 만큼 강력한 물질이었다. 그러나 150여 년이 흐른 뒤, 바로 그 독소는 주름을 펴는 미용 시술 '보톡스'로 변신해 수많은 사람의 얼굴에 닿게 되었다. 독이 약이 되고, 약이 독이 되는 이 역설적인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본질을 압축하고 있다. 독(毒)은 '위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가 만들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몸에 들어오는지에 따라 이름표를 바꾸는 복잡한 존재다. 독사나 전갈이 침이나 이빨로 주입하는 '베놈', 복어나 독버섯처럼 먹거나 닿아야 작용하는 '포이즌', 그리고 세균과 곰팡이가 만들어내는 '톡신'. 이 세 가지는 서로 경계를 넘나들며, 단 하나의 공통점으로 연결된다. 충분한 양이 몸에 들어오면 생명을 위협한다는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19세기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인류가 두려워하던 독은 자연에서 왔다. 그런데 공장 굴뚝이 하늘을 가리고 화학 산업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서, 독의 출처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오늘날 미국 화학협회 산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화학물질은 2억 9000만 종이 넘는다. 하루에 하나씩 살펴봐도 80만 년이 걸리는 양이다. 인류의 역사보다 훨씬 긴 시간이다. 이 수많은 화학물질 중에는 삶을 풍요롭게 한 것들도 있지만, 우리 몸과 생태계를 조용히 잠식하는 것들도 있다. 특히 물에 녹지 않고 기름에 녹는 '지용성 화학물질'은 혈액을 타고 돌아다니다 지방층, 신경, 골수에 쌓인다. 한번 쌓이면 수년에서 수십 년이 지나도 빠져나가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잔류성 유기오염물질(POPs)과 환경 호르몬이다. 이들은 호르몬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생식 기능을 떨어뜨리며, 면역계를 서서히 망가뜨린다. 세면대에 물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부으면 넘쳐흐르듯, 우리 몸의 해독 능력이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독은 조용히 쌓이기 시작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인류가 스스로 만들어낸 독 중에서도 플라스틱은 가장 극적인 사례다. 1860년대 당구공 재료를 구하다 탄생한 셀룰로이드를 시작으로, 20세기 중반에는 플라스틱이 '기적의 소재'로 칭송받았다. 가볍고, 저렴하며, 어떤 형태로도 변신이 가능했다. 사람들은 유리와 금속 대신 플라스틱을 선택했고, 그것은 소비 문화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플라스틱은 분자 사슬이 워낙 촘촘하고 안정적이어서 자연에서도, 바다에서도 수백 년을 버텼다. 오늘날 전 세계 바다에는 하루에 트럭 2000대 분량의 플라스틱이 흘러들어 가고, 북태평양에는 남한 면적의 7배에 달하는 '플라스틱 쓰레기 섬'이 떠 있다. 더욱 소름 돋는 것은, 파도와 햇빛에 잘게 부서진 미세 플라스틱이 이미 우리 몸속 깊이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다. 네덜란드 연구진에 따르면 18세 청소년의 몸속에 약 8300개, 70세 노인에게는 5만 개가 넘는 미세 플라스틱이 쌓일 수 있다. 미세 플라스틱은 세포 조직에 박혀 염증을 일으키고, 호르몬 체계를 교란하며, 심지어 혈액뇌장벽을 뚫고 뇌까지 침투한다. 코스타리카 앞바다에서 발견된 바다거북의 콧속에 박힌 10센티미터짜리 빨대처럼, 우리가 무심코 버린 쓰레기는 결국 먹이사슬을 타고 우리 식탁으로 돌아온다. 편리함과 맞바꾼 대가치고는 너무 크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독은 멀리 있지 않다. 2011년 한국 사회를 뒤흔든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일상 속 화학물질이 결코 당연히 안전하지 않다'는 교훈을 너무도 참혹한 방식으로 남겼다. 공업용 세정제 성분이 첨가제로 허가를 받아 가습기 속에 들어갔고, 그 성분을 매일 밤 들이마신 아이들의 폐는 서서히 굳어갔다. 총 5925명의 피해자와 1370명의 사망자.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계절마다 아이 얼굴에 가습기를 가져다 댔던 부모들의 죄책감은, 그들이 저지른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평생을 짓눌렀다. 폐에 독성 물질이 들어오면 폐는 염증으로 맞서 싸운다. 그러나 싸움이 길어지면 폐는 지쳐 포기하고 상처를 섬유질로 덮어버린다. 숨이 드나들어야 할 공간이 굳은살처럼 딱딱해지는 '폐섬유증'.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기면 다시는 부드러워지지 않듯, 한번 굳어버린 폐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이 참사는 이후 생활화학제품 규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소비자들이 성분표를 들여다보는 습관을 갖게 만들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그러나 모든 화학물질이 적이는 아니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 인구 3분의 1을 쓸어갔을 때,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된 치료제가 없었다. 버드나무 껍질의 성분을 정제해 아스피린을 만들고,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뽑아내고, 화학합성법으로 인슐린을 대량 생산하게 되면서 인류의 수명은 극적으로 늘어났다. 화학물질은 인류를 죽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살리기도 했다. 보툴리눔 독소가 보톡스로 변신한 것처럼, 독과 약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중요한 것은 그 물질의 성질을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느냐다. 케르너가 1820년대에 소시지 독이 언젠가 치료제가 될 것이라 썼을 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150년 뒤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과학은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실수를 인정하고 나아간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독은 우리 곁에 있다. 그것은 자연 속에도, 우리 손으로 만든 편리함 속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우리 몸속에도 조금씩 쌓이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전혀 다른 미래를 만든다. 알기 때문에 조심할 수 있고, 조심하기 때문에 덜 다칠 수 있다. 케르너가 촛불 아래에서 환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메모지를 꺼내 든 것처럼, 우리도 지금 이 순간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1/77/cover150/k94213730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817743</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너의 나쁜 무리 - [너의 나쁜 무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196738</link><pubDate>Sat, 04 Apr 2026 21: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19673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509&TPaperId=1719673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3/21/coveroff/k852137509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509&TPaperId=1719673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너의 나쁜 무리</a><br/>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예소연의 소설을 읽고 나면 한동안 손을 들여다보게 된다. 누군가의 차가운 뺨에 갖다 댄 뒤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것 같은, 그런 손.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에게 특별히 헌신하지 않는다. 대단한 사랑을 고백하지도 않는다. 그저 곁에 있다가, 어느 순간 뺨과 뺨을 맞대고, 차가운 것이 조금 덜 차가워지는 경험을 함께 한다. 예소연이 건네는 온기는 바로 그 정도의 것이다. 크지 않고, 오래 지속되지도 않으며, 심지어 다음 날이면 기억조차 흐릿해질 수 있는.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실재했던 것 같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우리는 종종 위로를 너무 거창하게 상상한다. 누군가 나의 사정을 깊이 이해해주고, 적절한 말을 건네며, 내가 옳다고 말해주는 장면. 하지만 예소연의 소설 안에서 위로는 그런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선이는 기문에게, 기문의 엄마가 나의 엄마를 정말 좋아했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얘기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하고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엄마가 얽혀 있는 복잡한 채무 관계를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도, 결국 낯선 저택의 거실에서 바닥을 함께 닦는다. 기문이 마임으로 보여주는 것, 그러니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잔에서 흘러내리는 무언가를 닦는 행위에 선이도 무릎을 꿇고 동참한다. 그게 전부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금두꺼비는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엄마는 여전히 엄마다. 그런데도 무언가가 달라진다. 그 장면이 오래 마음에 남는 이유는, 그것이 위로의 가장 솔직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 고통이 진짜인지 아닌지조차 확인할 수 없을 때가 많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지금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닦아내려 한다는 것을 믿어주는 일. 무릎을 꿇고 함께 바닥을 닦는 일. 예소연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희지는 두부 할머니에게 매일 혈압을 재주고, 설거지를 하고, 두부를 먹는다. 그 관계를 수영 씨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라고 잘라 말한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돈을 받고 일하는 관계다. 계약이 끝나면 남이 된다. 하지만 희지가 두부 할머니의 연락처 목록에서 자신의 이름이 그냥 '희지'로 저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확인된다. 유희지도 아니고, 아줌마도 아닌, 그냥 희지. 백지처럼 담백한 이름. 그 이름 안에는 어떤 역할도, 어떤 기능도 덧씌워져 있지 않다. 그냥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부르는 가장 단순한 방식이다. 예소연은 이 소설집 전체를 통해 관계의 명칭이나 형식이 아니라, 그 관계 안에서 오가는 실제적인 것들에 집중한다.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서로를 이용하고 배신할 수 있다. 반면 어린 시절 잠깐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사람도 25년 만에 나타나 차가운 뺨에 손을 갖다 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어디에 있느냐다. 나와 같은 바닥을 닦고 있느냐. 같은 언덕을 오르고 있느냐.<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유선과 여사의 관계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복잡하고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관계다. 여사는 어린 유선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너무 많이 했고, 보여서는 안 될 것을 너무 많이 보여주었다. 유선은 결국 성인이 되자마자 그 집을 떠났다. 하지만 5년이 지난 뒤 청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 여사를 기다린다. 여사가 자신의 뺨을 후려칠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실제로 뺨을 맞는다. 그런데 그 장면이 이상하게 따뜻하다. 왜일까. 뺨을 맞는 것이 따뜻할 리 없다. 하지만 그 행위 안에는 여사가 유선에게 5년간 하지 못한 모든 말이 담겨 있다. 네가 떠나서 나는 이렇게나 아팠다는 것. 네가 돌아와서 나는 이렇게나 기쁘다는 것. 여사는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법을 모른다. 오직 몸으로만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유선은 그것을 안다. 그래서 맞는다. 그 맞음 안에서 두 사람은 다시 한패가 된다. 예소연의 소설에서 온기는 늘 이런 식으로 전달된다. 부드럽지 않고, 때로는 아프고,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몸이 먼저 안다. 선이가 기문의 뺨에 자기 뺨을 갖다 댈 때, 희지가 두부 할머니의 손을 꾹꾹 누르며 마사지를 할 때, 유선이 여사의 등을 따라 그 낡은 모닝에 올라탈 때. 몸과 몸이 닿는 그 순간들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뜨겁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우리는 지금 관계의 효율을 따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관계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이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가. 피로하고 소진되는 관계라면 과감히 정리하라고 조언하는 목소리들이 넘쳐난다. 그 조언들이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을 지킬 권리가 있다. 하지만 예소연은 그 조언이 닿지 않는 자리를 비춘다. 정리해야 마땅한 관계인데 정리가 안 되는 사람들. 아무 사이가 아닌데 아무 사이가 아닐 수 없는 사람들. 선이에게 기문이 그렇고, 희지에게 두부 할머니가 그렇고, 유선에게 여사가 그렇다. 이 인물들이 비합리적이거나 미숙해서가 아니다. 삶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느 순간 불가피하게 타인에게 엮인다. 그리고 그 엮임 안에서, 아주 작고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서로를 살아남게 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마임에 대한 기문의 설명이 계속 떠오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함께 볼 수 있는 것, 내가 그것을 보고 있다는 믿음을 통해서. 그것이 예소연이 소설에서 하고 싶었던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혼자 보고 있는 것들,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 누가 봐도 허공에 손을 휘젓는 것처럼 보이는 그 고통과 간절함과 외로움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독자 앞에 내밀고, 당신도 이것을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 것. 그리고 독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두 사람은 함께 바닥을 닦는 사이가 된다. 그것이 예소연이 건네는 온기의 정체다. 거창하지 않고, 완전하지 않고, 때로는 뺨을 때리는 방식으로 전달되기도 하는. 하지만 차가운 것이 조금 덜 차가워지는, 그 정도의 온도. 그리고 생각해보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그 정도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그런 것 같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3/21/cover150/k852137509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832113</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식물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 [식물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 이일하 교수의 아주 특별한 식물학 에세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196718</link><pubDate>Sat, 04 Apr 2026 20: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19671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82137201&TPaperId=1719671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8/27/coveroff/k98213720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82137201&TPaperId=1719671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식물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 이일하 교수의 아주 특별한 식물학 에세이</a><br/>이일하 지음 / 초봄책방 / 2026년 03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봄날 오후, 창가에 놓인 화분을 들여다본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잎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있고, 줄기는 어제와 같은 각도로 서 있다. 그런데 일주일 전 사진을 꺼내 비교해 보면 무언가 달라져 있다. 잎이 하나 더 생겼고, 줄기가 창 쪽으로 조금 더 기울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사이, 식물은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의 시간이 아닌, 식물의 시간 속에서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시간을 기준으로 세계를 이해해 왔다. 빠른 것은 살아 있고, 느린 것은 멈춰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식물을 배경으로 대한다. 무대의 막처럼, 도시의 조경처럼, 식탁 위의 재료처럼. 식물은 늘 거기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주인공으로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지구 생태계 전체 생물량의 80퍼센트 이상이 식물이다. 우리가 배경이라 부르는 것이, 사실은 이 행성 생명계의 압도적 본문이다. 이 역설은 하나의 질문을 불러온다. 우리는 왜 식물의 시간을 읽지 못하는가?<br>식물의 시간이 느리다는 것은, 단순히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방식이 다르다는 뜻이다. 동물은 자극에 즉각 반응한다. 포식자가 나타나면 도망치고, 배가 고프면 움직인다. 그 반응의 단위는 초 혹은 분이다. 반면 식물은 환경의 변화에 생장으로 응답한다. 빛이 오른쪽에서 들어오면, 그 방향으로 자란다. 가뭄이 오면 뿌리를 더 깊이 내린다. 곤충에 뜯기면 방어 물질을 합성한다. 이 반응의 단위는 시간, 날, 때로는 계절이다. 식물학에서는 이것을 생장 가소성이라고 부른다. 같은 유전자를 가진 씨앗이라도, 빛이 있는 곳에서 발아하면 초록 떡잎을 펼치고, 어둠 속에서 발아하면 노란 하배축을 길게 뻗는다. 환경이 유전자의 표현을 다시 쓰는 것이다. 동물이 태어날 때 몸의 기관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달리, 식물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형태를 계속 만들어 간다. 식물은 영원히 배아 상태로 사는 생명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이 가소성은 느림의 산물이다. 빠르게 도망칠 수 없기에, 식물은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의 형태로 자신을 재설계한다. 불리한 환경을 피하는 대신, 그 환경을 이롭게 쓰는 방법을 몸으로 익힌다. 약한 빛에서는 잎을 넓고 길게 펼쳐 광합성 면적을 늘리고, 강한 빛에서는 잎을 둥글고 작게 만들어 자외선 피해를 줄인다. 이 정교한 적응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형태를 바꾸며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식물의 지혜는 빠른 판단이 아니라 느린 조율에서 나온다.<br>느림의 반대편에는 영속성이 있다. 식물은 느리기 때문에, 오래 산다. 식물의 줄기 끝과 뿌리 끝에는 정단분열조직이라 불리는 작은 세포 집단이 있다. 이 조직에서는 세포 분열이 쉬지 않고 일어나며, 새로운 잎과 줄기와 뿌리가 끝없이 만들어진다. 동물의 배아줄기세포처럼, 거의 모든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는 잠재력의 집합소다. 덕분에 식물은 이론적으로 영원히 살 수 있다. 외부의 병이나 재해가 없는 한, 정단분열조직의 활동이 멈추지 않는 한, 식물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뉴턴의 사과나무를 생각해 보자. 1816년 폭풍에 뿌리째 뽑혀 쓰러진 그 나무는 4년 뒤 그루터기에서 새싹을 틔웠다.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식물은 죽지 않았다. 오늘날 그 나무의 클론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 과학관 마당에서 자라고 있다. 2500년 전 부처가 그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나무의 가지를 잘라 스리랑카에 심은 나무의 후손이, 지금 서울 조계사 앞에 서 있다. 식물은 가지 하나를 잘라 새로운 땅에 심는 것만으로 개체를 이어 간다. 죽음을 넘어 생명을 이어가는 방법을 식물은 진화의 오랜 시간 속에서 스스로 발명했다. 이 영속성은 단지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다. 인간의 시간은 직선이다. 태어나고 늙고 죽는다. 우리는 언제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다. 그래서 빠름을 숭배한다. 빨리 배우고, 빨리 성취하고,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압박이 삶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식물의 시간은 순환한다. 낙엽은 썩어 흙이 되고, 그 흙에서 새 뿌리가 자란다. 개체는 사라지지만 생명의 리듬은 끊어지지 않는다. 식물의 느림은 그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br>곤충이 잎을 갉아 먹으면, 공격받은 잎 주변에서 단백질 분해효소 억제인자가 만들어진다. 놀라운 것은 공격받은 잎만이 아니라 같은 식물의 다른 가지, 심지어 이웃한 다른 식물까지 같은 방어 반응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시스테민이라는 펩타이드 신호가 식물체 안을 이동하고, 헥시놀 같은 휘발성 물질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 이웃 개체에게 경보를 전한다. 에틸렌이라는 기체 호르몬은 한 나무의 낙엽 소식을 이웃 나무에게 알린다. 가을 숲에서 같은 종의 두 나무가 나란히 잎을 떨어뜨리는 것은, 보이지 않는 화학의 언어로 나누는 대화의 결과다. 이 소통은 전화선도 신경도 없이 이루어진다. 화학 물질이 공기와 토양과 뿌리를 타고 천천히 퍼져나가며 정보를 전달한다. 느리지만, 식물은 이 방식으로 개체를 넘는 공동의 반응을 이끌어 낸다. 2020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연구에서 밝혀진 것처럼, 질소가 부족한 토양으로 뻗은 뿌리는 줄기를 통해 질소가 풍부한 쪽의 뿌리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뿌리 한쪽이 얻은 정보를 줄기가 통합해 다른 뿌리의 생장을 조절하는 것이다. 다윈이 140년 전에 직관적으로 포착했던 것, 식물의 뿌리는 단순한 흡수 기관이 아니라 생장 전체를 조율하는 중추라는 통찰이, 오늘날 분자 수준에서 증명되고 있다. 식물은 뇌가 없지만 판단한다. 신경이 없지만 소통한다. 형태가 아닌 기능으로 존재하는 식물의 지성은, 빠른 회로가 아니라 느린 화학의 흐름 속에서 작동한다.​우리는 왜 이 느림을 보지 못했을까. 아마도 우리 자신이 너무 빠르게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타임랩스로 촬영한 덩굴식물의 영상을 처음 본 사람은 놀란다. 바위를 향해 뻗어 가고, 장애물을 넘고, 지지대를 찾아 줄기를 감는 그 움직임이,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것은 의지는 아니지만, 환경을 읽고 반응하는 정교한 생물학적 과정이다. 다만 우리의 시간 감각에는 그것이 정지로 보일 뿐이다. 식물의 눈으로 보면, 인간이야말로 부산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식물이 느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빠른 것이다. 정확히는, 우리가 너무 빠른 채널에 맞춰져 있어서 식물의 주파수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식물학자들이 쌓아온 지식은, 그 주파수에 귀를 맞추는 법을 알려준다. 광합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루비스코가 얼마나 느리고 비효율적이면서도 지구 전체 생명의 토대가 되는지, 파이토크롬이 어떻게 빛의 파장을 읽어 개화의 타이밍을 결정하는지, ABC 모델이 어떻게 꽃잎과 수술과 암술의 배치를 유전자의 조합으로 설명하는지. 이 지식들은 단순한 사실의 목록이 아니다. 식물이 세계를 감각하고, 판단하고, 응답하는 방식에 대한 기록이다. 알면 더 잘 보인다는 말은 여기서 진실이 된다.<br>루비스코는 지구상에서 가장 느리고 가장 많은 효소다. 초당 두세 번밖에 반응하지 못하는 이 효소를 보완하기 위해 식물은 잎 전체 단백질의 20퍼센트 이상을 루비스코로 채운다. 느림을 풍요로 메우는 것이다. 지구 전체에서 루비스코는 가장 많은 단백질이다. 그 느리고 비효율적인 분자가, 지구 생명계의 에너지 순환을 떠받치고 있다. 이것이 식물의 시간이 가르쳐 주는 역설이다. 빠른 것이 반드시 강한 것은 아니다. 느리더라도, 충분히 많고 충분히 오래 지속되면, 그것이 세계를 움직인다. 개화를 결정하는 것은 낮의 길이가 아니라 밤의 길이라는 발견처럼, 우리가 주목하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진짜 원인이 있을 때가 많다. 식물의 시간은 그렇게 우리의 시선을 비튼다. 창가에 놓인 화분으로 다시 돌아간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정단분열조직의 세포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분열하고 있다는 것을. 뿌리털이 토양의 수분을 감지하고 있다는 것을. 잎의 기공이 빛의 양에 따라 열리고 닫히며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눈에는 정지로 보이는 시간 속에서, 식물 자신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 멈추면 비로소 보이고, 알면 더 잘 보인다. 식물의 시간에 잠시 속도를 맞추어 보는 일. 그것이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생명의 언어를 읽는 첫 번째 방법이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8/27/cover150/k98213720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782718</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한의학을 위한 의학사 강의 - [한의학을 위한 의학사 강의 - 과학의학이 담지 못한 동아시아 의학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196705</link><pubDate>Sat, 04 Apr 2026 20: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19670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228268&TPaperId=1719670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32/35/coveroff/898222826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228268&TPaperId=1719670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한의학을 위한 의학사 강의 - 과학의학이 담지 못한 동아시아 의학사</a><br/>차웅석.김동율 지음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6년 02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우리는 흔히 의학의 역사를 진보의 서사로 이해한다. 무지에서 지식으로, 미신에서 과학으로, 전통에서 현대로 나아가는 일직선의 이야기. 그 관점에서 보면 한의학은 언젠가 사라져야 할 유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의학의 역사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면, 그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훨씬 흥미롭다. 기원을 둘러싼 논쟁, 국가 간 지식의 이동, 제도와 인간 사이의 긴장, 그리고 전통이 현대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 이 모든 것이 한의학의 역사 안에 촘촘히 얽혀 있다.<br>한의학의 역사에서 가장 도발적인 질문은 출발점 자체에서 나온다. 침술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중국의 전통적인 답은 확고하다. 황제의 시대, 혹은 신석기시대부터 이미 침의 원형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생각보다 취약한 근거 위에 서 있다. 발굴된 바늘 같은 도구를 곧바로 침 도구로 단정하는 것은,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발굴되는 동일한 형태의 도구도 침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뾰족한 도구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으로 경혈을 자극했다는 사실 사이에는 증명되지 않은 긴 거리가 있다.​일본 학자 야마다 케이지는 이 문제를 문헌학적으로 정밀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뜸이 기원전 5세기, 침은 그보다 늦은 기원전 3세기경에 등장했다고 보았다. 더 중요한 것은 흔히 침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폄석이 실은 침과는 전혀 다른 계통의 도구라는 지적이다. 폄석은 상처를 째고 고름을 빼내는 외과적 도구였고, 침은 건강한 피부에 자극을 주어 치료하는 전혀 다른 방식의 의료 행위였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진화했다는 중국 학자들의 주장은 논리적 연속성을 가정하지만, 실제로 두 도구의 용도와 원리는 본질적으로 달랐다.<br>여기에 두만강 유역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사료가 끼어든다. 1937년 처음 발굴되었지만 전쟁의 혼란 속에 잊혔던 소영자 유적은, 수십 년이 지난 뒤 재조사를 통해 새로운 빛을 받는다. 청동기시대 석관묘에서 발견된 수많은 바늘들 — 그것도 군사 지도자나 지역 유지로 추정되는 남성들의 시신 위, 즉 가장 소중한 물건을 함께 묻는 자리에서 — 은 단순한 생활 도구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직조 바늘이라면 여성의 무덤에, 방추차 같은 관련 유물과 함께 나왔어야 했다. 화살촉이라면 유기물 흔적이 남았어야 했다. 남은 가능성은 의료 도구였다. 물론 이것은 가설이다. 하지만 이 가설이 의미 있는 이유는 단순히 침의 발원지를 한반도 북쪽으로 옮기는 데 있지 않다. 중국의 고전 황제내경이 세계를 인식하던 범위 바깥에, 이미 독자적인 의료문화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역사는 늘 기록된 것의 역사이지만, 기록되지 않은 것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이 발굴은 조용히 상기시킨다.​지식은 권력이다. 이 명제는 한의학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증명된다. 고려가 과거제도를 실시하면서 문관 선발과 함께 의업 고시를 함께 도입한 것은 의료 인력을 국가가 통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의업과 주금업이라는 두 개의 의과 고시는, 오늘날의 언어로 옮기자면 내과의와 외과의를 별도로 선발하는 체계에 해당한다. 치료하는 자의 자격을 국가가 인증한다는 발상은, 의료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사회적 질서의 일부임을 뜻한다. 조선의 경우는 더욱 흥미롭다. 세종 시대에 등장한 의서습독관이라는 직책은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던 고유한 제도였다. 이들은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 의서를 읽고 분류하고 요약하여, 조선의 현실에 맞는 의료 지식으로 재구성하는 역할을 했다. 번역이나 요약이 아니라, 지식을 소화하고 재편집하는 일이었다. 향약집성방이나 의방유취 같은 방대한 편찬 사업이 가능했던 것은 이들의 조용한 노동 덕분이었다. 역사는 이름을 남긴 편찬 책임자들을 기억하지만, 실제로 지식을 처리하고 연결한 것은 이름 없는 습독관들이었다.<br>의녀 제도는 또 다른 층위를 보여준다. 허도가 처음 건의했을 때의 명분은 남녀유별이라는 유교적 가치였지만, 실질적 이유는 의료 인력의 절대적 부족이었다. 노비 출신의 어린 여성들을 선발해 훈련시킨 이 제도는, 역설적으로 조선 왕실에서 가장 전문화된 의료 인력 집단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 종기 치료, 침술, 산부인과적 처치, 약재 감별 — 이들이 담당한 업무의 범위는 단순한 보조 역할을 훨씬 넘어섰다. 성종 때 제정된 의녀권과조목은 실력이 없으면 퇴출한다고 명시했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실력만 있으면 신분을 초월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귀금이라는 의녀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기술을 숨기지 않았다고 항변한 사건은, 그 기술이 얼마나 오랜 수련의 산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일곱 살에 시작해 열여섯에 겨우 터득했다는 말에서, 우리는 전통 의료 기술이 얼마나 체득에 의존하는 것이었는지를 느낀다.​의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전염병이다. 삼국시대 천연두는 신라 왕을 두 명이나 죽였고, 일본 인구의 절반을 앗아갔다. 백제 멸망 과정에서 나당연합군이 갑자기 철수한 것은 군대에 전염병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를 사실상 구한 것도 거란군을 물러나게 만든 전염병이었다. 역사는 군사력과 외교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병원균은 어떤 지휘관도 내리지 않은 명령을 실행했다. 조선의 방역 체계는 이 맥락에서 흥미롭다. 1786년 홍역 유행 당시 정조가 시행한 대책을 보면, 의료진 당직제, 구역별 환자 배당, 무료 치료 대상자 지정, 치료 실적 보고, 교통편 제공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현대의 감염병 대응 매뉴얼과 비교해도 크게 낯설지 않은 구조다. 물론 그 당시의 치료가 효과적이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37만 명이 사망한 해에 서울에서 치료한 환자가 6000명 남짓이었다는 숫자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국가가 위기 상황에서 의료를 공공의 책임으로 조직화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는 주목할 만하다. 전염병이 돌 때 왕이 제사를 지낸 것을 미신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해석은 다르다. 그것은 동요하는 백성을 위한 정치적 의례였다. 국가가 나서고 있다는 상징적 메시지, 지도자가 책임을 공유한다는 표현. 오늘날에도 대형 재난 앞에서 대통령이 현장을 찾고 사과를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형식은 달라졌지만, 공동체가 위기 앞에서 요구하는 것의 구조는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br>19세기는 조선 의학이 자기 자신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시기였다. 정약용은 음양오행, 오장육부, 맥으로 오장의 상태를 읽는다는 전통의학의 이론 체계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최한기는 서양의 해부학을 접하며 인체를 기계로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조선에 소개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전통 치료 기술 자체를 버리지는 않았다. 정약용은 이론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도 유배지에서 수십 년간 지역민들의 의사 역할을 했고, 홍역 전문서를 저술했다. 이것은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이론과 실천은 때로 독립적으로 작동한다. 왜 효과가 있는지 설명하는 언어가 틀렸더라도, 어떤 처치가 효과적이라는 경험적 축적은 별도로 존재한다. 현대 의학도 많은 치료법의 기전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 채 임상에서 활용한다. 설명의 정합성과 치료의 유효성은 동일하지 않다. 이제마의 사상체질의학은 이 맥락에서 특히 흥미롭다. 동의보감을 중심으로 흘러오던 전통의학의 흐름에서 갑작스럽게 체질 분류 체계가 등장한다. 19세기 유럽에서도 골상학을 비롯한 다양한 체질론이 유행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제마의 발상이 완전히 고립된 천재성의 산물이었을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유럽의 체질론들이 도태된 반면 사상체질의학이 살아남은 것은, 그것이 실제 치료 경험에 근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찰과 분류만으로는 의학이 되지 않는다. 그 분류가 실제 치료 결과와 연결될 때 비로소 임상 언어가 된다.<br>한의학의 역사를 읽는 것은 지식이 어떻게 여행하는지를 보는 일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온 의서들이 조선의 현실에 맞게 재편집되고, 조선의 인삼이 일본으로 넘어가 새로운 산업을 낳고, 서양의 해부학이 동아시아의 기 개념으로 재해석된다. 지식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송나라는 황제내경 영추 완본을 구하기 위해 고려에 요청해야 했다. 지금 우리가 읽는 그 텍스트는 고려가 보내준 것이다. 그리고 현재. 한의학은 여전히 과학의학과 마찰하면서도 공존하고 있다. 그 경계를 둘러싼 논쟁,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서 제한할 것인가의 문제는 단순히 이해관계의 충돌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앎이 공인된 지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에 관한, 더 오래된 질문의 반복이다. 한의학의 역사는 그 질문에 아직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이 역사를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32/35/cover150/898222826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323564</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