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koogi386님의 서재 (koogi386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hu, 07 May 2026 05:23:43 +0900</lastBuildDate><image><title>koogi386</title><url>http://image.alad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koogi386</description></image><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영한 인생 사전 - [영한 인생 사전 - 두 언어를 오가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재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4137</link><pubDate>Sat, 02 May 2026 20: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413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136611&TPaperId=1725413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57/79/coveroff/k17213661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136611&TPaperId=1725413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영한 인생 사전 - 두 언어를 오가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재미</a><br/>박솔미 지음 / 북스톤 / 2026년 03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대학교 2학년 때였다. 영문학 개론 수업 교수님이 칠판에 한 문장을 썼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소크라테스의 말이었다. 교수님은 분필을 내려놓으며 잠시 침묵했고, 강의실 안에는 뭔가 의미심장한 공기가 흘렀다. 나는 노트에 그 문장을 받아 적었다. 그리고 옆에 조심스럽게 번역을 달았다. '성찰 없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다 쓰고 나서 밑줄을 그었다. 뭔가 대단한 것을 손에 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게 전부였다. 밑줄 하나 긋고, 노트를 덮었다. 시험에 나올 것 같은 문장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 문장이 내 삶과 무슨 상관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토익 점수를 올려야 했고, 자기소개서를 다듬어야 했으며, 졸업 후의 진로를 걱정하느라 바빴다. 영어는 그렇게 점점 성찰의 언어가 아니라 스펙의 언어로 자리를 옮겼고, 나는 그 이동을 눈치채지 못한 채 졸업을 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그 뒤로 오랫동안, 나는 영어 문장을 읽어도 '읽지' 않았다. 이메일을 해독하고, 계약서를 번역하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다듬었다. 영어가 필요했고, 영어를 썼고, 영어로 일했다. 하지만 어느 문장 앞에서 멈춰 선 적이 없었다. 단어 하나를 두고 '이게 왜 이 단어여야 했을까' 하고 오래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에게 영어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그 자체로 사유의 공간이 된 적이 없었다. 그러다 책을 읽으며, 한 문장을 만났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True integrity comes when we stop seeking approval."<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출처도 불분명했고, 누가 보내준 것도 아니었다. SNS 피드를 스크롤하다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던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가락이 멈췄다. 'integrity'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우리말로 뭐라고 옮겨야 하는지, 사전적 정의는 알지만 이 문장 안에서 정확히 무슨 무게를 지고 있는지, 금방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오랜만에, 문장 앞에서 멈췄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integrity'를 번역하려고 한참을 씨름했다. '정직함'이라 하기엔 도덕적 울림이 너무 표면적이고, '성실함'이라 하기엔 무언가 핵심을 비껴가는 느낌이었다. '온전함'은 근접했지만 조금 아쉬웠고, '완전함'은 결과의 뉘앙스가 너무 강했다. 무엇보다 이 단어에는 외부의 시선과 무관하게, 자기 스스로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만 풍기는 어떤 고요하고 단단한 인상이 담겨 있었다. 그게 한 단어로 딱 떨어지지 않았다. 대학 시절의 나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어림잡아 '성실함' 정도로 처리하고 다음 줄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애매함이 좋았다. 한 단어가 담고 있는 무게가 어느 언어의 그릇에도 완전히 옮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프기보다는 경이로웠다. 그건 어쩌면, 내가 그동안 잃어버렸던 감각이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나이가 들면서 많은 것들이 빠르게 처리된다. 감정도, 관계도, 생각도. 느리게 앉아서 한 문장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는 일을 언제부턴가 사치처럼 여기게 되었다. 빠른 결론이 능력처럼 느껴지고, 긴 침묵은 비효율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나도 모르게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문장은 달랐다. 문장은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틀린 번역이 있고 나쁜 번역이 있을 수는 있어도, 느린 번역이 나쁜 번역인 건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 들여다볼수록 문장은 다른 층위를 드러냈다. 'integrity'가 단순히 '정직한 사람'을 묘사하는 형용사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 자기 내면의 나침반을 흔들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나는 그 문장이 나에게 하는 말을 비로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지금, 나의 기준으로 살고 있는가. 영어 문장이 던진 질문이 이렇게 깊이 들어온 건 오랜만이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을 읽으며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아주 거창하게 달라진 건 아니다. 다만 예전엔 스크롤을 멈추지 않았을 문장에서 손가락이 멈추는 횟수가 늘었다. "Stay grounded." 요가 선생님이 즐겨 쓰던 표현인데, 어느 날 다시 읽었더니 삶 전체에 대한 조언처럼 들렸다. 흔들리는 건 두렵지 않다. 다만 중심축이 어디인지 모를 때가 두렵다. 그 말이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The way we talk to our children becomes their inner voice." 이 문장은 더 오래 앉아 있게 만들었다. 아이에게 하는 말이 결국 그 아이의 내면을 짓는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 내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들도, 나의 내면을 계속 짓고 있다는 것.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를 향해 내뱉는 말들을 돌아보게 됐다. 그 말들이 나를 자라게 하는지, 아니면 조용히 쪼그라들게 하는지. 번역을 하려다가 나 자신을 읽게 됐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When in eternal lines to time thou grow'st."<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셰익스피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말. 나의 언어로 너를 붙들어두겠다는 다짐. 그 오래된 문장을 읽으며 나는 생각한다. 나는 어떤 문장을 붙들고 살아가고 싶은가. 어떤 말을 내 내면의 목소리로 삼고 싶은가. 대학 시절, 밑줄 하나 긋고 덮었던 노트를 이제야 다시 펼치는 기분이다. 늦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문장은 기다려준다. 언제 돌아와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천천히, 다시 읽으면 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57/79/cover150/k17213661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6577944</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나이 묻는 사회 - [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4088</link><pubDate>Sat, 02 May 2026 19:5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408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8162&TPaperId=1725408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69/84/coveroff/k69213816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8162&TPaperId=1725408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a><br/>정회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5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처음 만난 사람에게 가장 먼저 묻는 것이 나이라는 사실을, 나는 오랫동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당연한 일이었다.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들은 질문받지 않는다. 우리가 언제부터 숨을 쉬기 시작했는지 묻지 않듯이, 나는 왜 나이를 먼저 묻는지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외국인 친구와 처음 만남을 가졌을 때, 그 친구가 내 나이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을 듣는지, 요즘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물었다. 그 대화는 이상하게도 훨씬 가벼웠고, 동시에 훨씬 깊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그 감정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숫자로 분류되지 않은 채 그냥 한 사람으로 존재했던 느낌이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나보다 어린 사람 앞에서 나는 선배가 되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 앞에서 나는 후배가 된다. 이 질서 속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하는지, 어떤 말투를 써야 하는지,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하는지를 순식간에 파악한다. 참으로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하지만 효율과 인간다움은 종종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나이가 위치를 결정하는 순간, 사람은 사라지고 숫자만 남는다. 서른 살의 누군가는 그가 어떤 슬픔을 안고 살아왔는지, 무엇에 웃음을 터뜨리는지, 새벽 세 시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와 무관하게, 그냥 '서른 살'이 된다. 예순 살의 누군가는 지난 수십 년간 쌓아온 경험과 지혜, 여전히 뛰고 있는 욕망과 꿈과 무관하게, 그냥 '예순 살'이 된다. 인간이라는 복잡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두 자리 숫자로 납작하게 눌린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가 나이 대신 다른 무언가를 먼저 물었다면 어땠을까. 요즘 가장 관심 있는 것이 무엇인지, 최근에 읽은 책이 무엇인지,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선택이 무엇인지. 그랬다면 우리는 훨씬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훨씬 많은 의외의 연결을 발견했을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나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집착이 만들어낸 가장 잔인한 결과 중 하나는, 모든 나이대가 차별받는다는 역설이다. 어린이는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발언권을 빼앗기고, 청년은 아직 모른다는 이유로 훈계를 듣고, 중년은 시대를 모른다는 이유로 조롱받고, 노인은 이미 늙었다는 이유로 배제된다. 어느 나이대도 온전히 환대받지 못한다. 모두가 차별받고 있으면서도, 역설적으로 모두가 누군가를 차별한다. 아무도 안전하지 않은 이 구조 속에서 우리는 그저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 더 씁쓸한 것은, 이 차별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을 차별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어린 사람에게 기특하다고 말하는 것이 칭찬이라고 생각하고, 늙은 사람에게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공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특하다'는 말 속에는 그가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는 전제가 숨어 있고, '어르신'이라는 호칭은 어느새 공동체의 중심에서 그를 밀어내는 거리감이 되었다. 좋은 의도가 차별이 되는 순간이다. 나는 한 초등학생이 헌법재판소에서 기후위기에 대해 또렷하게 발언하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그 목소리가 담고 있는 절박함과 진지함을 생각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대견하다는 것이었다면, 그 아이의 메시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 내용이 아닌 그 나이가 먼저 읽힌 것이다. 우리는 말의 내용 앞에 나이를 먼저 세워두는 사회에 살고 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나이에 맞는 삶이라는 개념이 우리를 얼마나 조여왔는지,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깨닫는다. 이십대에는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불안이 있었다. 삼십대에는 안정을 잡아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사십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은데, 그것이 나이가 들어서 용감해진 덕인지, 아니면 사회가 기대하는 역할들을 어느 정도 해냈기 때문에 허락된 자유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이에 맞는 직업, 나이에 맞는 결혼, 나이에 맞는 언어, 나이에 맞는 태도. 이 목록은 생각보다 훨씬 길고 촘촘하다. 우리는 매 순간 그 목록에 자신을 대입하며 맞는지 아닌지를 확인한다. 그 확인의 시선은 때로 타인의 것이고, 때로 나 자신의 것이다. 안으로 내면화된 나이의 감옥은 외부에서 잠그는 감옥보다 훨씬 빠져나오기 어렵다. 육십에도 하고 싶은 것이 생기고, 팔십에도 사랑이 찾아오고, 열두 살에도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이것은 나이와 무관한,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 증거들을 종종 예외나 이변으로 처리한다. 예순의 열정은 감동적인 뉴스가 되고, 열두 살의 용기는 기특한 해프닝이 된다. 예외는 기억되지만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나이라는 숫자가 갖는 의미를 완전히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쌓이는 것들이 있고, 나이는 그 축적의 흔적이다. 그러나 그 흔적이 사람을 설명하는 일차적 언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이는 그 사람이 몇 년을 살았는지를 알려줄 뿐, 어떻게 살았는지는 말해주지 못한다. 어떤 예순 살은 서른처럼 뜨겁고, 어떤 서른 살은 예순처럼 지쳐있다. 어떤 열 살은 어른들이 외면하는 진실을 보고, 어떤 어른은 평생 그 진실을 마주하기를 피한다. 역연령과 기능적 연령이 다르다는 말은 단지 의학적 사실이 아니라, 사람이란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오래된 진실을 다른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나는 언젠가 우리 사회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이 대신 다른 것을 먼저 묻게 되길 바란다. 그 변화는 작은 것 같지만, 실은 사람을 보는 방식 전체를 바꾸는 일이다. 나이를 먼저 묻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몇 살인지보다 어떤 사람인지가 더 궁금하다는 뜻이니까.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나이를 살고 있지만, 결국 같은 삶을 공유하고 있다. 태어나고 사랑하고 실패하고 늙어가는 그 과정을. 그 공통의 취약함 앞에서, 나이라는 숫자는 생각보다 훨씬 작은 것이 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69/84/cover150/k69213816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698413</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생업(生業) - [생업(生業) - 그 징하고도 찡한 노동의 표정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4014</link><pubDate>Sat, 02 May 2026 18: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401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52138163&TPaperId=1725401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70/11/coveroff/k55213816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52138163&TPaperId=1725401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생업(生業) - 그 징하고도 찡한 노동의 표정들</a><br/>은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5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5월의 첫날, 창밖으로 보이는 탄천의 연둣빛이 유난히 싱그러운 아침입니다. 거실 한편에 놓인 구슬픈 마리 로랑생의 그림 도록 옆으로, 오늘은 조금 묵직한 제목의 책 한 권을 놓아봅니다. 작가 은유의 인터뷰집 &lt;생업&gt;. 매년 돌아오는 노동절이지만, 올해는 유독 이 단어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아마도 정년퇴직을 코앞에 둔 남편의 뒷모습이나, 이제 막 사회라는 거친 파도에 올라탄 아들의 일상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장을 넘기자마자 조지 오웰의 문장이 마음을 툭 건드립니다. 대용량 음식을 제시간에 내놓기 위해 '인생이 단 5분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움직이는 파리 호텔 주방의 풍경. 그것은 단순히 '바쁘다'는 말로 설명하기엔 부족한, 일종의 장대한 협주곡과도 같다는 표현이었습니다. 곧바로 서울의 한 초등학교 급식실로 이어집니다. 매일 1,700인분의 밥을 짓는 김규희 님의 이야기는 제게 묘한 동질감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안겨주었습니다. 저 역시 수십 년간 가족의 삼시 세끼를 책임지며 '돌밥돌밥(돌아서면 밥)'의 회오리 속에서 지쳐본 경험이 있기에, "해방 삼아 집을 떠나고 싶었다"는 그녀의 고백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마주한 '밥 짓기'는 제가 집에서 정성스레 구워내는 빵이나 정갈하게 차려내는 반찬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였습니다. 치솟는 불길 앞에서의 사투, 거대한 솥을 젓는 삽질, 그리고 '동물적인 감각'으로 국수를 건져 올려야 하는 찰나의 판단들. 그녀는 말합니다. "요리는 과학이고, 판단이며,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라고요. 누군가는 '동네 아줌마들이 하는 하찮은 일'이라 치부했을지 모르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아이들의 점심시간을 지켜내는 숭고한 임무이자 자부심이었습니다. 뜨거운 튀김 솥 앞에서 땀을 흘리면서도 "애들 뜨끈하게 먹이려고" 배식 직전까지 튀겨내는 그 마음. 그것은 단순한 노동을 넘어선, 타인의 생을 지탱하는 '존엄의 기술'이었습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은 또 다른 '밥 장군' 김주휘 님의 이야기로 흐릅니다. 세월호 유가족부터 해고자 농성장까지, 아픈 현장마다 따뜻한 밥을 싣고 달려가는 그녀의 무기는 쇠붙이가 아닌 '따끈따끈한 밥상'입니다. 그녀의 이야기가 특히 가슴에 박혔던 이유는 '대접'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길 위에서 투쟁하는 이들이라고 해서 대충 때우는 밥이 아니라, 고향이 어디인지, 어떤 양념을 좋아하는지 집요하게 물어 차려내는 아홉 가지 반찬들. 얼어붙은 고기반찬 대신 따뜻하게 올린 시래기밥 한 그릇이 주는 위로. "음식은 추억이 7할이다" 그녀의 이 말은 우리가 왜 그토록 정성 들여 음식을 만들고 나누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답을 줍니다. 밥은 흩어진 존재들을 모으는 강력한 연결고리이며, 무너진 일상을 되돌려주는 가장 기본적인 의례입니다. 관절 마디마디가 닳도록 밥을 짓고도 "그분들에게 밥을 해드릴 수 있어 영광이었다"고 말하는 그녀의 꼿꼿한 자존감 앞에서, 제가 가졌던 소소한 고단함은 어느덧 경건함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마음을 머물게 한 것은 가수 안예은 님의 목소리였습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연예인이 아니라, 자신을 '예술업계 노동자'로 정의하는 그녀의 태도는 신선하고도 단단했습니다. 영감을 기다리기보다 매일 작업실로 '출근'하고, 동료들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돈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누는 프로의 모습. 자신의 아토피 흉터와 우울증마저 숨기지 않고 "내 몸은 나의 역사책"이라 말하는 용기는, 나이 듦의 흔적이나 삶의 생채기를 애써 가리고 싶어 하는 저 자신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그녀에게 기부는 '엄청난 가오'이자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당연한 행위였습니다. 선천적인 아픔을 딛고 일어선 그녀가 세상을 향해 건네는 위로는, 마치 잘 구워진 빵처럼 담백하면서도 깊은 풍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그림자 노동'이 존재합니다. 눈에 보일 때는 당연해 보이지만, 그들이 멈추는 순간 우리의 일상은 일순간 마비되고 맙니다. 급식 노동자, 활동가, 뮤지션...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악기를 들고 '생업'이라는 거대한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이제껏 살아오며 누군가의 노동 덕분에 따뜻한 밥을 먹고, 깨끗한 거리를 걷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 수고로움 뒤에 숨겨진 땀방울과 긍지를 예민하게 감각하는 눈을 갖고 싶습니다. 5월의 햇살 아래, 오늘도 각자의 현장에서 묵묵히 삽을 들고, 펜을 쥐고, 솥을 젓는 모든 '장군'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당신들이 차려준 이 세상이라는 밥상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힘을 내어 살아갑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70/11/cover150/k55213816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701106</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이토록 흥미로운 클래식 - [이토록 흥미로운 클래식 - 처음 만나는 클래식, 끝까지 빠져드는 이야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979</link><pubDate>Sat, 02 May 2026 18: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97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02138787&TPaperId=1725397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97/62/coveroff/k00213878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02138787&TPaperId=1725397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토록 흥미로운 클래식 - 처음 만나는 클래식, 끝까지 빠져드는 이야기</a><br/>송현석 지음 / 링크북스 / 2026년 05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우리는 종종 무언가를 깊이 이해하려 할 때, 그것을 잘게 쪼개어 분석하곤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단백질 함량이나 나트륨 수치를 따지는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인생의 후반전이라 불리는 50대 후반에 들어서니, 세상에는 분석보다 '느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할머니가 투박한 손으로 무쳐주셨던 나물 무침의 맛을 화학식으로 설명할 수 없듯, 클래식 음악 또한 화성학이나 대위법이라는 딱딱한 이론 이전에 '누군가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으로 다가옵니다. 최근 읽은 클래식에 관한 기록들은 저에게 음악이 아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1685년 같은 해에 태어난 바흐와 헨델, 그리고 샘물과 우물처럼 달랐던 모차르트와 베토벤, 마지막으로 침묵과 열정 사이를 오갔던 쇼팽과 리스트까지. 그들의 음악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내뱉은 고독한 외침이었습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바흐와 헨델의 대비는 마치 우리네 삶의 양면성을 보는 듯합니다. 아이제나흐의 고요한 숲길을 닮은 바흐의 삶은 경건하고 질서 정연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톱니바퀴처럼 정교한 대위법의 세계를 구축했지요. 그의 음악이 주는 안정감은 마치 잘 정돈된 집안에서 느끼는 평온함과 닮아 있습니다. 분당의 조용한 탄천 길을 산책하며 느끼는 그 정갈한 질서가 바흐의 음악에도 흐르고 있는 것이지요. 반면, 상업 도시 할레에서 태어난 헨델은 대중의 마음을 읽는 법을 아는 '일타 강사' 같았습니다. 그는 청중이 언제 환호하고 언제 눈물을 흘리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바흐가 보이지 않는 신을 향해 내면의 성벽을 쌓았다면, 헨델은 광장에 서서 사람들의 가슴에 직접 불을 지폈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내 안의 '바흐'와 '헨델'을 화해시키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나만의 원칙을 지키며 내면을 가꾸는 바흐의 성실함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헨델처럼 화려한 외출복을 차려입고 세상과 뜨겁게 소통하며 박수갈채를 즐기는 용기도 필요하니까요. 투자에서도 안정적인 배당을 챙기는 전략과 성장을 기대하는 도전이 공존해야 하듯, 우리 삶의 플레이리스트에도 이 두 거장의 균형이 절실합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이야기는 '재능'과 '숙명'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모차르트에게 작곡은 마치 잘 익은 과일을 따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의 악보는 수정 흔적 없이 깨끗했고, 선율은 맑은 샘물처럼 끊임없이 솟아올랐습니다. 반면 베토벤에게 음악은 마른 땅을 파고 또 파서 길어 올리는 깊은 우물과 같았습니다. 청력을 잃어가는 절망 속에서도 그는 주머니에 수첩을 넣고 산책하며 떠오른 악상을 수만 번 고치고 다듬었습니다. 저는 베토벤의 그 지저분한 악보에서 묘한 위로를 받습니다. 천재가 아닌 평범한 우리에게 삶은 늘 '베토벤식'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키우고, 살림을 꾸리고, 낯선 외국어를 익히고, 노후를 위해 경제적 기반을 닦는 모든 과정은 결코 '모차르트식'으로 술술 풀리지 않습니다. 실수하고, 지우고, 다시 쓰는 그 덧칠된 흔적들이 모여 결국 우리 인생의 '합창 교향곡'이 완성되는 것이겠지요. 특히 16살 된 노견 토토를 돌보며 보내는 매일의 시간 속에서, 저는 베토벤이 60알의 커피 원두를 정성껏 세던 그 집요한 루틴을 떠올립니다. 비록 화려하진 않아도 반복되는 일상의 규칙이 우리를 절망에서 구해준다는 사실을 그는 음악으로 증명해 보였습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마음을 흔든 것은 쇼팽과 리스트였습니다. 폴란드의 흙을 은잔에 담아 평생 간직했던 이방인 쇼팽.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대신 피아노의 쉼표 사이에 숨겨두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고백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돌아서야 했던 그의 내성적인 영혼은, 오히려 그 결핍 덕분에 가장 섬세한 '피아노의 시'를 낳았습니다. 그와 정반대 지점에 서 있던 리스트는 '리사이틀'이라는 형식을 만들고 피아노를 옆으로 돌려 자신의 연주하는 모습까지 예술로 승화시킨 스타였습니다. 그는 거침없이 사랑했고, 그 열정을 폭풍 같은 음표로 쏟아냈습니다. 쇼팽의 음악이 아늑한 살롱의 촛불 같다면, 리스트의 음악은 대극장의 화려한 샹들리에와 같습니다. 쇼팽이 평생 그리워했던 고향의 흙처럼, 우리에게도 저마다 가슴속에 품고 사는 '은잔'이 하나씩 있습니다. 그것은 지나간 청춘일 수도, 두고 온 꿈일 수도, 혹은 말하지 못한 진심일 수도 있습니다. 쇼팽은 그 그리움을 쉼표로 표현했고, 리스트는 그것을 화려한 변주로 승화시켰습니다. 방식은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나만의 방식으로 말하고 싶다'는 열망만큼은 같았습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클래식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작곡가의 상처와 나의 상처가 만나는 지점을 찾는 일입니다. 바흐의 경건함에서 삶의 태도를 배우고, 베토벤의 투쟁에서 용기를 얻으며, 쇼팽의 선율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이제 저는 클래식을 감상할 때 더 이상 형식을 분석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대신 그 선율 뒤에서 땀 흘리고 눈물지었을 한 인간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18세기에 태어난 그들의 고민이 21세기를 사는 저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반갑습니다. 인생의 계절이 깊어질수록, 음악은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닌 삶의 정수가 되어갑니다. 제가 앞으로 맞이할 시간들도 모차르트의 샘물처럼 맑을 때도, 베토벤의 우물처럼 깊고 힘들 때도 있겠지요. 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곁에 있어 줄 클래식이 있기에, 저의 에세이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도 저는 바흐의 정갈한 선율로 아침을 열고, 저녁에는 쇼팽의 쉼표 사이에서 하루를 정리하며 저만의 교향곡을 써 내려갑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97/62/cover150/k00213878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976230</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어떻게 원하는 인생을 살 것인가 - [어떻게 원하는 인생을 살 것인가 - 하루 한 문장, 흔들리는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946</link><pubDate>Sat, 02 May 2026 18: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94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02137056&TPaperId=1725394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91/69/coveroff/k80213705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02137056&TPaperId=1725394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어떻게 원하는 인생을 살 것인가 - 하루 한 문장, 흔들리는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법</a><br/>양현길 지음 / 다른상상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어느덧 해의 기울기가 길어지는 오후의 햇살을 마주할 때면, 문득 인생의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는 진부하지만 묵직한 진리를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평생 무언가를 성취하고,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키며, 세상이 정해놓은 표준에 자신을 맞추느라 분주하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숨 가쁜 일상의 소음이 잦아드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의 질문이 고개를 듭니다. "나는 지금 나답게 흐르고 있는가?" 양현길 작가가 전하는 철학자들의 지혜를 가만히 곱씹으며, 저는 제가 가야 할 인생의 지도를 다시 그려보았습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오랫동안 저는 '괜찮은 나'만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 했습니다. 단정하게 정돈된 옷차림, 우아한 말투, 그리고 흐트러짐 없는 일상. 하지만 카를 융의 말처럼,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것이 자연의 섭리입니다. 때로는 나이 들어가는 거울 속 내 모습이 낯설어 서글퍼지기도 하고,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인간관계에 날카로운 감정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인생의 본질에 다가가는 첫 번째 단계는 바로 이 '그림자'를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완벽해지려고 애쓰는 대신, 나의 부족함과 흔들림까지도 '나의 일부'로 껴안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단단함은 결점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결점마저 투명하게 인정하고 그 위에서 균형을 잡는 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나를 고쳐 쓰려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무늬를 깊이 이해하며 사랑해 주려 합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소로가 월든의 숲으로 들어간 것은 세상을 거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핵심만을 마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숲'은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정신적인 공간이어야 합니다. 끝없이 쏟아지는 디지털 정보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잠시 로그아웃하고, 오로지 나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정신적 거리 두기'가 절실합니다. 정교한 레시피를 따라 빵을 굽는 시간, 낯선 외국어의 문장을 한 줄씩 소리 내어 읽는 순간, 혹은 좋아하는 전시회에서 캔버스의 결을 응시하는 고요한 아침. 이러한 행위들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나만의 월든 숲을 가꾸는 일입니다. 외부의 소음이 차단될 때 비로소 우리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과 내가 사랑하는 것들의 목록을 선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에릭 호퍼는 배움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세상을 상대하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경험'이라는 이름의 고집입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 뒤로 숨기보다, "아직 배울 게 많다"는 겸손한 호기심을 유지하는 것이 진정으로 품위 있게 나이 드는 비결일 것입니다.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젊은 세대의 언어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내가 가진 고정관념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태도. 이러한 유연함이야말로 변화무쌍한 시대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나침반입니다. 배움은 단순히 지식을 채우는 과정이 아니라, 어제보다 조금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문을 여는 행위입니다.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에게 정년이란 없으며, 그 마음은 늘 청춘의 싱그러움을 머금고 있습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하이데거의 말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곧 우리가 사는 집입니다. 습관적으로 내뱉는 부정적인 말들은 내 삶의 풍경을 황폐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건네는 따뜻한 격려는 삶의 결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이제 와서 뭘"이라는 말보다는 "지금이라도 시작해서 다행이야"라는 말을, 타인을 향한 날 선 비판보다는 묵묵한 응원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나의 말이 곧 나의 삶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함부로 말을 내뱉을 수 없습니다. 빛나는 돌은 소리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빛이 나듯, 내면이 꽉 찬 사람의 언어는 요란하지 않아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나를 세우기 위해 타인을 깎아내리거나 나의 공을 과시하기보다, 정갈한 언어로 내 마음의 집을 아름답게 가꾸어나가고 싶습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인생의 후반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납니다. 그것이 건강의 문제일 수도, 익숙했던 역할의 상실일 수도, 혹은 소중한 이와의 이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의 통찰처럼, 나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종종 새로운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되기도 합니다. 길이 막혔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옆에 핀 들꽃을 보게 되고, 생각지 못했던 오솔길을 발견합니다. 실패나 좌절은 인생이 끝났다는 신호가 아니라, 이제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우주의 속삭임일지도 모릅니다. 장애물을 디딤돌 삼아 더 높은 곳을 조망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바로 삶의 본질에 맞닿아 있는 사람의 자세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변화는 거창한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 눈을 뜨며 마신 물 한 잔, 휴대폰 대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본 3분의 시간, 그리고 곁에 있는 가족에게 건넨 다정한 인사 한마디. 이런 작고 조용한 선택들이 모여 '나'라는 사람의 대지를 형성합니다. 인생의 본질은 결국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나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오늘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나만의 숲에서,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언어를 가꾸며 살아가는 것. 그렇게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아내다 보면, 어느덧 삶의 끝자락에서 "참 아름다운 소풍이었다"고, "의도한 대로 충실히 살았노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91/69/cover150/k80213705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916977</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알면 잠 못 드는 위험한 인문학 - [알면 잠 못 드는 위험한 인문학 - 인류학적 오답 연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918</link><pubDate>Sat, 02 May 2026 17: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91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82137054&TPaperId=1725391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90/91/coveroff/k98213705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82137054&TPaperId=1725391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알면 잠 못 드는 위험한 인문학 - 인류학적 오답 연구</a><br/>다크모드 지음 / 모티브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거대한 진보의 과정이라 믿어왔다. 야만에서 문명으로, 광기에서 이성으로 나아가는 우상향의 그래프 말이다. 하지만 그 화려한 연대표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치부했던 수많은 결정이 사실은 정교하게 설계된 ‘오답의 기록’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형벌과 통제의 역사는 인간이 정의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집요하게 자신의 폭력성을 정당화해왔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서늘한 지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고대 로마의 포에나 쿨레이(자루 형벌)는 죄인을 죽이는 행위만이 아니었다. 존속 살해라는 금기를 깬 자에게 내려진 이 형벌은, 죄인을 ‘인간의 영역’에서 완전히 삭제하려는 시도였다. 수탉, 개, 독사, 원숭이와 함께 자루에 갇혀 물속으로 던져지는 과정은 시각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그를 짐승의 반열로 떨어뜨리는 의식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단순한 참수나 교수형으로는 부족했을까? 로마인들에게 그것은 ‘너무 자비로운’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인의 육체뿐만 아니라 그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 했다. 얼굴을 짐승 가죽으로 가리고, 땅을 밟지 못하게 나무 신발을 신기는 절차는 “너는 이제 우리와 같은 공기를 마실 자격도, 우리와 같은 땅을 밟을 권리도 없다”는 선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잔혹한 절차가 집행관과 관중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심리적 장치’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복잡한 의식은 살인을 ‘정의로운 절차’로 변모시킨다. 사람들은 자루 안에서 벌어지는 비명 섞인 아비규환을 보며, 자신이 저 괴물과는 다른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임을 재확인하며 안도했다. 폭력은 의식의 옷을 입는 순간, 구경거리가 되고 정당한 대가가 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잔혹함이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가장 지독한 폭력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서 온다. 중세의 우블리엣(Oubliette)은 그 이름처럼 죄인을 ‘잊어버리는’ 곳이었다. 빛도, 소리도, 대화도 없는 수직 구멍 속에 던져진 인간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에 의해 무너진다. 이것은 정치적 숙청의 정점이다.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처형하면 그는 영웅이나 순교자가 될 수 있지만, 우블리엣에 갇혀 서서히 잊히면 그는 그저 ‘사라진 존재’가 된다. 이야기가 사라진 죽음에는 어떠한 힘도 남지 않는다. 현대의 블랙돌핀 교도소는 이 격리와 통제를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24시간 꺼지지 않는 불빛, 눈을 가린 채 굴욕적인 자세로 이동해야 하는 규칙들은 수감자가 공간의 구조를 파악하고 탈출을 꿈꿀 여지조차 박멸한다. 여기서 감옥은 죄인을 교화하는 장소가 아니라, ‘위험이라는 변수를 관리하는 정교한 기계’로 작동한다. 인간을 다루는 제도가 아니라, 고장 난 부품을 영구히 격리하는 시스템이 되어버린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현대에 이르러 형벌은 다시 한번 기묘한 진화를 거친다. 엘살바도르의 CECOT(테러범 수용 센터)는 감옥이 어떻게 하나의 ‘콘텐츠’가 될 수 있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삭발한 채 쇠사슬에 묶여 이동하는 수천 명의 갱단원 영상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국가는 이 영상을 통해 자신의 압도적인 힘을 증명하고, 오랫동안 폭력에 시달려온 국민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이제 형벌은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법 집행을 넘어,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쇼’가 된다. 카메라 렌즈가 비추는 화려한 통제 뒤편에서, 인권과 적법 절차라는 가치는 ‘질서 회복’이라는 명분 아래 조용히 묻힌다. 대중이 이 잔혹한 스펙터클에 열광할수록, 국가의 폭력은 가장 효율적인 정의로 둔갑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우리가 역사를 되짚으며 마주하는 이 기묘하고 잔인한 장면들은, 결코 미개한 옛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로마의 자루 형벌에서 엘살바도르의 메가 감옥까지, 관통하는 본질은 같다. 인간은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형식’을 만들고, ‘상징’을 부여하며, ‘적’을 비인간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오답의 기록’들이 우리에게 묘한 위로를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완벽해 보이는 국가 시스템이나 천재적인 설계자들조차 사소한 오만과 착각으로 무너졌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완벽하게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 착오를 일으키고, 잔혹함을 정의로 착각하며, 때로는 닭의 체온에 핵무기의 운명을 맡기기도 하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역사를 뒤집어 보는 행위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상식’이라 믿고 있는 것들 역시 훗날 누군가에게는 ‘기괴한 오답’으로 읽힐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겸허함의 과정이다. 실수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인간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일 뿐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우리가 가져야 할 시선은 비관이 아닌, 이 불완전함을 딛고 아주 조금씩이나마 덜 잔인한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여야 할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90/91/cover150/k98213705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909184</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기묘한 세계사의 미스터리 - [기묘한 세계사의 미스터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836</link><pubDate>Sat, 02 May 2026 16: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83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92137919&TPaperId=1725383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32/44/coveroff/k792137919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92137919&TPaperId=1725383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기묘한 세계사의 미스터리</a><br/>기묘한 밤 지음 / 믹스커피 / 2026년 04월<br/></td></tr></table><br/>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이야기'를 배우는 일처럼 느껴졌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으며, 영웅과 악인이 배치되고, 교훈이 정해진 서사. 교과서 속 역사는 늘 그런 형태였다. 그래서 나는 역사를 읽을 때마다 어딘가 무기력한 기분이 들곤 했다. 결말을 이미 아는 소설을 펼치는 느낌. 호기심보다는 의무감이 앞서는 독서다. 책은 그 무기력함에 조용히 금을 냈다. 책은 역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설명이 불가능한 역사를 모아 놓은 책에 가깝다. 기록은 분명히 남아 있지만, 그 기록이 가리키는 진실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는 사건들. 책을 덮고 나서도 오래 남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물음표였다.<br>책에 등장하는 이야기 중 처음 나를 붙잡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군에 실제로 병사로 등록된 곰 '보이텍'의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귀엽고 엉뚱한 에피소드처럼 읽혔다. 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웃음이 서서히 걷힌다. 병사들은 그 곰을 단순히 키운 것이 아니었다. 포탄을 나르는 훈련을 시켰고, 계급을 부여했으며, 실제 전투 현장에서 함께 움직였다. 전쟁이라는 극단의 상황 속에서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가 어떻게 녹아내렸는지를 이 이야기는 조용히 보여준다. 나는 보이텍에 관한 문장을 읽으면서 전쟁이라는 것이 단순히 전략과 전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생각했다. 공포 속에서도 유대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방식, 그리고 그 유대가 얼마나 예상치 못한 형태를 띨 수 있는지. 이 이야기는 실화다. 이것이 핵심이다. 단순히 '특이한 사실'이 아니라, 실제 역사 기록에 남아 있는 장면이라는 점이 나를 한동안 멍하게 만들었다. 역사는 때로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는 말을 실감한 순간이었다.<br>책은 우리나라 이야기도 빗겨가지 않는다. 홍길동. 나는 어릴 때부터 그 이름을 소설 속 인물로만 알았다. 적서 차별에 맞선 영웅, 허균이 창조한 상상의 존재.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실제로 그 이름이 등장한다. 연산군 시절, 강도 홍길동을 체포했다는 기록이 냉정한 문장으로 남아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이후다. 체포된 뒤 홍길동에 관한 공식 기록은 완전히 끊긴다. 처형 기록도 없고, 유배 기록도 없다. 그저 사라진다. 그리고 책은 한 가지 가설을 던진다. 일본 오키나와에 실존했던 '홍가와리'라는 인물과 같은 사람이 아니냐는 것이다. 국경을 넘어 이상 사회를 세운 조선의 도적. 이 가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불확실성 자체가 상상력을 자극한다. 역사에서 공백은 단순히 정보의 부재가 아닐 수 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운 흔적일 수도 있고, 아직 발굴되지 않은 진실의 잔상일 수도 있다. 홍길동의 사라짐은 그 공백의 의미를 다시 묻게 만든다.<br>책에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만든 이야기는 모세의 기적에 관한 것이었다. 히브리어 성경에 등장하는 '얌 수프'라는 단어, 오랫동안 '홍해(Red Sea)'로 번역되어 온 그 단어가 사실은 '갈대 바다(Reed Sea)'를 뜻한다는 가설. 번역의 오류가 수천 년간 이어져 왔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언어의 문제를 넘어 깊은 질문을 던진다. 탐험가는 이집트 카르나크 신전의 벽화에서 실마리를 찾아냈고, 결국 나일강 삼각주의 만잘라호를 추적해냈다. 사방이 갈대로 뒤덮인 그 거대한 호수. 그리고 대기과학자는 '윈드 셋 다운'이라는 자연 현상을 통해 그 바다가 실제로 갈라질 수 있음을 수치로 보여주었다. 신의 권능으로 알려진 그 장면이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결론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설명이 가능해진다고 해서 그 사건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일까? 극도의 두려움과 절박함 속에서 바람이 불어 물이 갈라지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기적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과 믿음, 과학과 신화가 같은 장소를 가리키는 그 지점에서 나는 한동안 멈춰 있었다.<br>트로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문학으로 분류되었다. 신들과 영웅들이 뒤엉킨 상상의 서사시. 그런데 하인리히 슐리만은 그 이야기를 실제 지도 위에서 찾아냈다. 발굴된 고대 도시 트로이는 신화가 역사와 접촉하는 순간을 증명해 보였다. 이 이야기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것은 경계의 흔들림이다. 신화와 역사, 전설과 사실, 상상과 실재 사이의 경계. 우리가 당연하게 그어놓은 그 선들이 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 흐릿해진다. 그리고 나는 그 흔들림이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방감 같은 것을 느꼈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단단하지 않았다는 것, 세계는 여전히 미완성이라는 것이다.<br>책의 서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미스터리가 이야기를 넘어 현실과 맞닿을 때, 그것은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고. 나는 이 문장을 책을 다 읽은 뒤에야 제대로 이해했다. 역사 속 미스터리는  '재미있는 이야기'만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균열을 내는 사건이다. 홍길동의 공백, 모세의 바람, 보이텍의 포탄, 발굴된 트로이. 이 이야기들은 모두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의 가장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가장자리를 따라 걷다 보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좁은 창문으로 역사를 보고 있었는지를 문득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지식을 채워주지 않는다. 대신 물음을 남긴다. 그리고 그 물음들은 책을 덮은 뒤에도 계속 말을 걸어온다. 나는 그 목소리를 오래 들어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답이 없는 질문이 때로는 답이 있는 지식보다 더 오래, 더 깊이 우리 안에 머문다는 것을 이 책은 조용히 가르쳐준다. 역사는 기록되지만, 이해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렇기에, 역사는 여전히 살아 있는지도 모른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32/44/cover150/k792137919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324442</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돈이 되네? 수익과 성장이 동시에 터지는 네이버 블로그 - [돈이 되네? 수익과 성장이 동시에 터지는 네이버 블로그 - N잡러, 경단녀, 육아맘을 위한 체험단, 애드포스트, 원고료, 브랜드 협업, 제휴마케팅, 쇼핑 커넥트까지 1일 1포스팅 꾸준함으로 완성하는 실전 수익화 비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770</link><pubDate>Sat, 02 May 2026 16: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77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52137742&TPaperId=1725377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28/27/coveroff/k35213774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52137742&TPaperId=1725377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돈이 되네? 수익과 성장이 동시에 터지는 네이버 블로그 - N잡러, 경단녀, 육아맘을 위한 체험단, 애드포스트, 원고료, 브랜드 협업, 제휴마케팅, 쇼핑 커넥트까지 1일 1포스팅 꾸준함으로 완성하는 실전 수익화 비법</a><br/>정소희 지음 / 골든래빗(주)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블로그를 처음 시작했을 때를 떠올려보면, 막연한 설렘과 동시에 막막함이 공존했다. 무언가를 써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정작 무엇을 쓰면 좋을지, 어떻게 써야 사람들이 읽어줄지,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게 과연 돈이 될 수 있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 막막함이 결국 많은 사람들을 세 달도 채 안 되어 블로그를 방치하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정소희 작가의 책 &lt;돈이 되네? 수익과 성장이 동시에 터지는 네이버 블로그&gt;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사람은 진짜 해봤구나"였다. 13년이라는 세월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누적 방문자 1800만이라는 기록도, 세 번의 저품질을 겪고도 다시 일어선 경험도, 모두 책상 앞에서 이론으로 쌓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글을 쓰고, 실패하고, 다시 써내려간 시간들의 결과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과장이 없다. 당장 내일부터 월 수백만 원을 벌 수 있다는 식의 달콤한 유혹 대신, 지금 어디에 서 있든 출발할 수 있는 현실적인 지도를 펼쳐 보여준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블로그를 단순히 일기장이나 취미의 연장선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직도 많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인식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블로그는 한 번 써두면 검색을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을 불러들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쌓이는 자산이다. 인스타그램 릴스나 유튜브 쇼츠처럼 올라가자마자 알고리즘의 파도를 타고 폭발적으로 퍼지다가 이내 묻혀버리는 콘텐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닌다. 잘 쓴 블로그 글 하나는 2년 후에도, 3년 후에도 검색창을 통해 조용히 문을 두드린다.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순간, 블로그를 바라보는 태도 자체가 달라진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키워드를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많은 블로거들이 키워드를 단순히 검색량 많은 단어를 고르는 문제로 접근한다. 하지만 저자는 키워드를 군집으로 이해하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라는 큰 키워드를 중심으로 식단, 멘탈 관리, 홈트 루틴, 워킹맘 다이어트처럼 주변으로 뻗어나가는 소재들을 함께 설계할 때, 블로그 전체가 하나의 주제로 묶인 전문적인 공간으로 네이버에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단발성 글이 아니라 연재처럼 서로 연결된 콘텐츠 구조가 만들어질 때 비로소 상위 노출이라는 결과가 따라온다. 이 개념은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대부분은 그날그날 쓰고 싶은 것을 쓰고, 그 글들이 서로 아무런 연결 없이 흩어진 채로 쌓인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저자가 제안하는 블로그 구조도 흥미롭다. 블로그를 베이스캠프로 두고,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로 확장하라는 전략은 지금 SNS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도, 이미 어느 정도 운영 중인 사람에게도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준다. 인스타그램은 트렌드를 빠르게 퍼뜨리는 곳이고, 유튜브는 깊이 있는 이야기로 신뢰를 쌓는 공간이지만, 두 채널 모두 알고리즘의 변화나 플랫폼의 정책에 따라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반면 블로그에 쌓인 글은 검색이라는 행위가 존재하는 한 살아남는다. 이 차이를 이해하고 나면, 블로그를 중심축으로 삼는 전략이 왜 합리적인지 자연스럽게 납득이 된다. 수익화에 관한 내용도 인상적이었다. 애드포스트, 체험단, 원고료, 제휴마케팅, 전자책, 커뮤니티 운영에 이르기까지 블로그 하나에서 뻗어나갈 수 있는 수익 루트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다는 사실은 읽는 사람에게 작은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하루 방문자가 50명밖에 되지 않아도 체험단에 선정될 수 있다는 내용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 특히 현실적인 희망이 된다. 중요한 건 완벽한 준비가 아니라 지금 있는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이라는 메시지가 책 전반에 조용히 흐른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물론 이 책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마법의 답안지는 아니다. 저자 스스로도 강조하듯, 꾸준함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 설계의 문제다. 경쟁자를 스스로 정해두고 선의의 긴장감을 만들고, 목표를 주변에 선언해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상태를 만들고, 글 쓰는 공간을 물리적으로 고정해 앉는 순간 일하는 모드가 되도록 훈련하는 것. 이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 비로소 꾸준함이 의지가 아닌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는 설명은 막연한 "열심히 해야지"와는 전혀 다른 접근이다. 책을 덮고 나서 가장 크게 남은 건 블로그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였다. 빠르게 반응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 쓴 것이 아니고, 방문자가 적다고 해서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지금 쓰는 글 한 편이 1년 후, 2년 후에 누군가의 검색창을 통해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 그 글이 조용히 일하면서 수익을 만들고, 신뢰를 쌓고, 기회를 불러들인다는 사실. 블로그는 그런 공간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이 전하는 핵심은 하나다. 전략적으로 쌓아가는 사람만이 그 과실을 거둔다. 열심히 쓰는 것과 잘 쓰는 것은 다르고, 잘 쓰는 것과 전략적으로 쓰는 것은 또 다르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바로 키워드를 읽는 눈이고, 콘텐츠를 구조화하는 감각이고, 수익으로 연결되는 흐름을 설계하는 능력이다. 그 모든 것을 이 책은 현실의 언어로 담아냈다. 블로그를 시작했지만 방향을 잃었거나, 꾸준히 쓰고 있지만 성장이 느껴지지 않거나, 아예 시작조차 망설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분명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처음부터 완벽할 필요는 없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지금 가진 이야기로 시작하면 된다. 그리고 그 시작을 조금 더 영리하게 만들어줄 지도가 여기 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28/27/cover150/k35213774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282791</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이방인 - [이방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736</link><pubDate>Sat, 02 May 2026 15: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73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92138164&TPaperId=1725373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70/48/coveroff/k39213816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92138164&TPaperId=1725373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방인</a><br/>알베르 카뮈 지음, 랭브릿지 옮김 / 리프레시 / 2026년 05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대학교 1학년 교양 수업에서 이방인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뫼르소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해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고, 그 다음 날 연인과 수영을 즐기며, 살인의 이유를 '태양이 눈부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인물. 교수님은 그를 실존주의와 부조리의 상징이라 설명했고, 나는 그 말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시험에 나올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사회에 나온 지 몇 해가 지나, 다시 이 책을 펼쳤을 때 나는 예상치 못한 감각과 마주했다. 뫼르소가 낯선 인물이 아니라, 어딘가 익숙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그가 느끼는 피로, 무료함, 그리고 세계가 자신에게 특정한 감정을 요구한다는 그 압박감. 나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카뮈는 서문에서 뫼르소를 이렇게 설명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그는 거짓말하기를 거부한다. 거짓말이란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아니 무엇보다도, 실제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일이며, 인간의 마음과 관련해서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일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학생 때 이 구절을 읽었다면 나는 아마도 '그래, 진실을 말하는 용기 있는 인간'이라고 개념적으로 정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 문장이 가슴을 건드리는 이유는, 내가 매일 그 반대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부장님의 아재 개그에 웃고, 전혀 공감되지 않는 회식 자리에서 즐거운 척하며, 실은 대단히 피곤한 금요일 오후에도 '한 주도 수고하셨어요'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건넨다. 느끼지 않은 것을 느낀 척하는 일. 카뮈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이야말로 거짓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거짓말을 매일 연습하며 살아간다. 뫼르소는 그것을 거부했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은 그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순간 자신이 실제로 느끼는 감정이 눈물의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애도를 모르는 인간이 아니다. 다만 그는 사회가 요청하는 형식의 애도를 수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은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사회에 나온다는 것은 수많은 형식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떤 자리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실망했을 때도 어떤 말로 포장해야 하는지, 분노가 치밀어도 어떤 온도로 말을 낮춰야 하는지. 나는 그것을 사회화라 부르며 자연스럽게 익혔다. 그러나 이따금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이 형식들이 나를 부드럽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내 안의 무언가를 조금씩 지우고 있는 것인지. 뫼르소의 재판은 그 의문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이야기다. 법정에서 심판받는 것은 그의 살인 행위가 아니다. 실제로 재판의 핵심은 그가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것, 장례 다음 날 여자를 만났다는 것, 커피를 마셨다는 것이다. 그는 감정의 형식을 위반한 죄로 죽음을 선고받는다. 그 논리는 소설 속에만 있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어떤 사람이 충분히 슬퍼 보이지 않으면 그 슬픔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충분히 후회하는 표정을 짓지 않으면 그 후회의 진정성을 박탈한다. 형식이 곧 진실이 되는 세계. 뫼르소는 그 세계 안에서 형식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진실을 지키려 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가혹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카뮈는 뫼르소를 '가난하고 벌거벗은 인간'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이 표현이 잘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그것은 무언가를 덮지 않은 인간, 포장하지 않은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감정 위에 적절한 포장을 얹어 세상에 내놓는다. 그것이 예의이고, 때로는 배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포장이 두꺼워질수록, 우리는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느끼는지 점점 모르게 된다. 뫼르소는 그 포장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추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었고, 그 시선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심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인간이었다. 알제의 태양, 바다의 냄새, 마리의 웃음. 그는 그것들을 가감 없이 받아들였다. 때로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어떤 감정을 가감 없이 느꼈던 게 언제인지를 떠올려본다. 기쁠 때 충분히 기뻐했는지, 슬플 때 스스로의 슬픔을 허락했는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조금 멈추게 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소설의 마지막에서 뫼르소는 신부의 위로를 거부하며 폭발한다. 그 장면을 다시 읽으며 나는, 그것이 분노가 아니라 해방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오랫동안 세상이 그에게 씌우려 한 의미들을 거부한다. 신의 은총도, 회개의 서사도, 죽음 앞에서의 극적인 각성도. 그는 끝까지 자기 자신이었다. 그리고 죽음을 앞에 두고 그는 이렇게 느낀다. 밤 냄새와 흙 냄새, 소금 냄새가 관자놀이를 식혀주고, 잠든 여름의 경이로운 평화가 밀물처럼 밀려들어온다고. 그것은 패배의 장면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장면이다. 대학 때 나는 그 장면을 허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눈부시다. 형식을 걷어낸 자리에 남은 것, 냄새와 온도와 감각으로 이루어진 날것의 삶. 그것이 뫼르소가 끝끝내 놓지 않은 것이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이방인을 다시 읽으며 나는, 이 소설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 아님을 알았다. 뫼르소처럼 모든 형식을 거부하며 살 수는 없고, 어쩌면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내게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나는 지금 내가 실제로 느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아니면 느껴야 한다고 배운 것만을 느끼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춘다. 그리고 그 멈춤이, 이 책을 다시 읽은 이유였는지도 모른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70/48/cover150/k39213816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704824</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씽크 딥 - [씽크 딥 - 가짜 생각에서 벗어나 진짜 생각이 시작되는 순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702</link><pubDate>Sat, 02 May 2026 15:0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70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72137351&TPaperId=1725370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17/36/coveroff/k57213735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72137351&TPaperId=1725370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씽크 딥 - 가짜 생각에서 벗어나 진짜 생각이 시작되는 순간</a><br/>유디트 베르너 지음, 배명자 옮김 / 페이지2(page2)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밤 열한 시, 나는 또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오늘 낮에 내가 한 말이 틀리지는 않았을까. 그 사람이 내 문자를 읽고도 답하지 않은 건 무 슨 의미일까. 내일 회의에서 상사가 내 보고서를 어떻게 볼지. 5년 후 나는 지금보다 나아져 있을까, 아니면 그때도 이렇게 같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멈추려 해도 멈춰지지 않는다. 숫자를 세어 보고, 음악을 틀어 보고,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반복해 보지만 머릿속의 소용돌이는 잠잠해질 기미가 없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생각이 많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생각이 많은 것이 아니라 생각이 제자리를 맴도는 것이다. 더 정확한 단어가 있다. 오버싱킹(Overthinking). 생각 과잉이다. 생각 과잉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구조를 가진 사고의 패턴이다. 출발은 있으나 도착이 없고, 문제는 인식하나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며, 에너지는 소진되지만 결과는 남지 않는 일종의 지적 공회전 상태. 엔진은 힘차게 돌아가는데 차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 상태에서 보통 세상이 건네는 처방전은 대개 두 가지다. 그냥 하는 것. 생각을 멈추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그러나 이 두 가지 처방은 생각 과잉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조언들은 하 나같이 생각 자체를 문제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생각이 많은 것이 문제인가? 아니면 생각의 방향이 문제인가?<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생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실제로 필요한 것은 출구가 아니라 나침반이다. 오버싱킹과 딥싱킹(Deep Thinking)의 차이는 생각 의 양에 있지 않다. 방향과 구조에 있다. 오버싱킹이 같은 지점을 계속 맴도는 원운동이라면, 딥싱킹은 표면에서 시작해 점점 더 근본 적인 질문을 향해 내려가는 수직 운동이다. 오버싱킹이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를 반복한다면, 딥싱킹은 왜 나는 이것을 두려워하는가", "이 두려움은 어디서 왔는가", "내가 실제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 전환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도 않다. 몇 가지 실마리를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생각에 이름을 붙인다. 소용돌이치는 생각들을 그대로 두면 덩어리가 되어 압도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지금 나는 타인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다"처럼 이름을 붙이는 순간, 생각은 감정의 덩어리에서 분리되어 관찰 가능한 대상이 된다. 이것이 딥싱킹의 첫 걸음이다. 생각에 잡아먹히지 않고, 생각을 바라보는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사실'과 '해석'을 분리해야 한다. 오버싱킹의 상당 부분은 사실이 아닌 해석에서 자란다. 상사가 오늘 내 인사를 짧게 받았다는 것은 사 실이다. 그러나 '나를 싫어한다, '해고될 것이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이다'는 모두 해석이다. 딥싱킹은 이 두 가지를 의식적으로 분리 하는 훈련이다. 사실의 층위에 머물 때, 우리의 생각은 훨씬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또한 혼자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우리의 생각은 혼자 완결되지 않는다.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각도를 발견하고, 내 생 각의 맹점을 인식하게 된다. 오버싱킹하는 사람들이 종종 타인과의 관계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관계 속에서 생각을 완성할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에 '기한'을 두어야 한다. 이것은 생각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각을 존중하는 방식이다. "이 문제는 오늘 저녁 한 시간 동안 충분히 생각하겠다. 그 이후에는 내일로 미루겠다." 이 렇게 의식적으로 생각의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면, 생각은 삶 전체를 잠식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무한정 열려 있는 생각의 문을 일부러 닫는 것, 이것이 생각을 더 잘 하는 방법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왜 우리는 생각하는가? 생존을 위해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물론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다. 생각 없이 경험은 축적되지 않는다. 반성 없이 실수는 반복된다. 성찰 없이 우리는 타인의 언어와 논리 속에서 부유하게 된다. 오버싱킹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생각을 멈추라'고 말할 때, 그 말의 이면에는 사실 이런 메시지가 숨어 있다. 그냥 순응하라. 지금 있는 자리에서 효율적으로 움직여라. 큰 그림은 네가 신경 쓸 일이 아 니다." 그러나 이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 바로 더 잘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가다듬는 것. 소음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소음 속에서 내 목소리를 찾는 것. 불안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의 정체를 직시하는 것이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다만 그 의지가 제 방향을 찾지 못하고 내면에서 소진될 때, 우리는 지치고 무너진다. 오버싱킹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다만, 그 생각을 데리고 좀 더 깊은 곳으로 가는 것이다. 천장을 바라보며 같은 걱정을 되풀이하는 대신, 그 걱정의 뿌리를 향해 한 걸음씩 내려가 보는 것이다. 아마도 그 끝에는,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고요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17/36/cover150/k57213735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173642</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우리가 용기가 없지, 질문이 없냐 - [우리가 용기가 없지, 질문이 없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678</link><pubDate>Sat, 02 May 2026 14: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67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02138061&TPaperId=1725367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65/55/coveroff/k20213806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02138061&TPaperId=1725367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우리가 용기가 없지, 질문이 없냐</a><br/>구정화 지음 / 해냄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역사에는 서로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기원전 아테네의 광장을 누비며 쉼 없이 물음을 던졌고, 그 때문에 독배를 들었다. 다른 한 사람은 20세기 유럽의 관료실에 앉아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고, 그 때문에 교수대에 올랐다. 소크라테스와 아이히만. 한 사람은 너무 많이 물어서, 다른 한 사람은 전혀 묻지 않아서 생을 마감했다. 아이히만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이송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재판정에서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자신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며, 책임이 없다고.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 모습에서 악의 본질을 읽어냈다.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 한 번도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묻지 않았기에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의 공범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를 '사유의 무능함'이라 불렀다. 질문하지 않는 삶이 어디까지 인간을 타락시킬 수 있는지를 아이히만은 온몸으로 증명했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묻는 행위 그 자체를 삶의 방식으로 삼았다. 그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깨달음에서 출발하여, 사람들이 스스로 지혜에 이르도록 질문으로 이끌었다. 그것은 단순한 교육 방법이 아니었다. 질문은 그에게 잠든 사회를 깨우는 유일한 도구였다. 권력자들이 그를 두려워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질문은 권력보다 강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기자에게 직접 질문 기회를 주었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2021년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세계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한국의 기자들은 침묵했다. 이것은 개인의 용기 부족이 아니다. 사회 구조가 오랜 시간에 걸쳐 질문을 억압해 온 결과다. 한국의 학교에서 학생은 지식을 수용하는 존재로 길러졌다. 교사가 전달하고 학생이 받아 적는 구조에서, 질문은 수업의 흐름을 방해하는 행위이자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 된다. 초등학교 교실을 가득 채우던 손들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하나둘 내려가는 것은 그 아이들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이 배운 것이 변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학교 나왔냐', '연봉이 얼마냐', '아이는 언제 낳을 거냐'는 질문들이 상처로 되돌아오는 경험이 쌓이면서, 우리는 아예 묻는 것 자체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질문을 두려워한 나머지 질문이라는 행위 전체를 내팽개친 것과 같다. 나쁜 칼이 무서워 요리를 포기한 셈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이제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고 있다. 인공지능은 우리가 묻는 거의 모든 것에 답한다. 검색창에 무언가를 치면 수십만 건의 정보가 쏟아지고, AI 챗봇은 논문을 요약해 주고 코드를 짜주고 이메일 초안까지 작성해 준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이제 질문 능력이 더 중요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답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질문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 아닐까. 그러나 정반대다. AI가 답을 내놓으려면 먼저 질문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이 얼마나 정교하고 깊은지에 따라 AI가 내놓는 답의 품질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기후변화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과 '기후변화가 한국 10대의 진로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고 묻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AI 시대에 프롬프트 능력이 중요한 기술로 부상한 이유가 여기 있다. 결국 프롬프트는 질문이다. 더 나아가 AI는 인지적 공감은 흉내 낼 수 있어도 정서적 공감은 하지 못한다. 표정이 어두운 친구에게 '무슨 일 있어?'라고 묻는 것, 갈등하는 동료에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까?'라고 묻는 것은 AI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행위다.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순간, 우리는 질문을 통해 서로에게 닿는다. 질문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온기로 작동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질문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질문이 무지한 사람이 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것처럼 질문은 대화를 이끄는 사람의 도구다. 질문하는 사람이 주도권을 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은 사회가 안정적으로 변화할 때나 통하는 이야기다. 기술과 산업이 통째로 뒤집히는 전환의 시대에 침묵은 도태를 의미한다. 좋은 질문은 해결책을 불러온다. 어린 딸이 '왜 지금 바로 사진을 볼 수 없어요?'라고 물었을 때, 그 물음을 흘려듣지 않은 아버지는 즉석카메라를 발명했다. 수많은 발명과 제도의 시작에는 사소해 보이는 질문이 있었다. 그 질문들은 세상을 바꿨다. 질문은 또한 스스로를 알아가는 통로다. '나는 왜 이 상황이 불편한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내가 지금 선택한 행동은 나와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런 질문들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아이히만이 평생 한 번도 자신에게 이 질문들을 던지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바쁜 일상 속에서 자신에게 묻는 것을 잊고 살기 쉽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그렇다면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거창할 필요는 없다. 처음에는 작은 것부터 묻는 연습을 해도 충분하다. 오늘 내가 한 선택 중 하나를 골라 '이 선택의 결과는 어떨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 친구가 힘들어 보일 때 '괜찮아?'라고 먼저 묻는 것. 수업 중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그냥 넘기지 않고 질문하는 것. 이 모든 소소한 행위들이 질문하는 삶의 시작이다. 질문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야 하고, 때로는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가르쳐주었듯,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의 출발점이다. 질문하지 않는 확신보다, 질문하는 의심이 우리를 더 멀리 데려간다. AI는 점점 더 많은 답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답을 구할 것인지, 왜 그 답이 필요한지, 그 답이 내 삶과 우리 공동체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결국 인간이 결정해야 한다. 그 결정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너무 오래 묻는 법을 잊고 살았을 뿐이다. 이제 다시 물을 차례다. 질문은 인간임을 증명하는 가장 용기 있는 방법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65/55/cover150/k20213806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655555</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방구석 식물학 - [방구석 식물학 - 이름은 알지만 사연은 몰랐던 105가지 꽃과 풀의 속사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624</link><pubDate>Sat, 02 May 2026 14: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62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32137644&TPaperId=1725362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58/11/coveroff/k93213764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32137644&TPaperId=1725362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방구석 식물학 - 이름은 알지만 사연은 몰랐던 105가지 꽃과 풀의 속사정</a><br/>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김수경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길을 걷다 보면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밟고 지나친다. 돌멩이, 낙엽, 그리고 이름도 모를 풀 한 포기. 아무도 멈추지 않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밟히는 것들은 무엇을 느낄까? 아니, 더 정확히는 밟히면서도 꽃을 피우는 것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 걸까? 민들레는 참 이상한 식물이다. 꽃이 피면 줄기를 곧게 세우고, 꽃이 지면 땅으로 몸을 눕히고, 씨앗이 여물면 다시 일어나 홀씨를 바람에 내어준다. 어릴 적 우리는 이 홀씨를 입으로 후 불며 소원을 빌었다. 하지만 민들레가 왜 한 번은 눕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 이유가 밝혀진 것도, 어떤 설명에 따르면, 민들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 막 피어난 주변 꽃들이 벌과 나비의 눈에 더 잘 띄도록 비켜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자신이 낮아짐으로써 다른 생명이 빛날 수 있도록. 나는 이 대목에서 한참을 멈췄다. 사람이 무언가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그것을 종종 패배라 부른다. 물러서는 것을 나약함이라 여기고, 양보를 손해라 계산한다. 하지만 민들레는 그 순간을 다르게 쓴다. 눕는 것이 곧 배려이고, 낮아지는 것이 또 다른 형태의 존재 방식이다. 강한 척하지 않아도, 언제나 꼿꼿하지 않아도,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듯이.<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잡초는 강하다고 배웠다. 밟혀도 일어서고, 뽑혀도 다시 나고. 우리는 그 이미지에 기대어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나는 잡초처럼 살겠다"고. 그런데 식물학 교과서는 뜻밖의 말을 한다—잡초는 강하지 않다고. 오히려 경쟁에 약한 식물이라고. 잡초는 강한 식물들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는 자리, 자꾸 밟히고 훼손되는 척박한 곳에서 살아간다. 그 말인즉슨, 잡초는 이기는 전략 대신 비켜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정면 승부를 포기한 대신 아무도 탐내지 않는 자리를 자기 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환경의 변화에 가장 잘 버티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야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 잡초는 최소한 자신이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잊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밟히든, 꺾이든, 뽑히든) 씨앗을 남기는 것, 그 하나의 목표를 절대로 놓지 않는다. 화려하게 일어서는 대신, 엎드린 채로 꽃을 피운다. 그게 무의미해 보일지 몰라도, 생명이란 결국 그 작은 완고함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자주 '어떻게 보이느냐'에 에너지를 쏟는다. 쓰러졌다 일어서는 드라마를 연출하고, 역경을 이겨냈다는 서사를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는 잊어버릴 때가 많다. 잡초는 그 점에서 훨씬 현명하다. 엎드린 채로 피운 꽃 한 송이가, 화려하게 일어서다 결국 씨앗을 맺지 못한 식물보다 훨씬 더 오래 이 땅에 남는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네잎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이라고 했다. 어릴 때 풀밭에서 그것을 찾아 헤매던 기억이 있다. 찾으면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고, 찾지 못하면 오늘의 운이 나쁜 것 같았다. 그런데 네잎클로버가 자주 발견되는 곳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밟고 지나가는 자리라는 사실은, 어쩐지 마음을 이상하게 건드린다. 상처 때문에 생겨난 것이 행운이라고 불린다. 누군가의 발에 짓밟혀 잎의 원기가 상처를 입고, 그로 인해 하나가 둘로 나뉘어 네 개의 잎이 생겨난다. 다시 말하면 행운이란, 완벽한 조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틈에서 예상치 못한 모양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살면서 우리가 '운이 좋다'고 부르는 순간들을 돌이켜보면, 대부분 무언가 어긋났던 순간 뒤에 찾아온다. 계획이 틀어지고, 관계가 어그러지고, 믿었던 것이 흔들렸을 때—그 틈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나고, 예상치 못한 길이 열리고, 스스로도 몰랐던 가능성을 발견한다. 네잎클로버가 그것을 알고 밟히는 곳을 택한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많이 밟히는 곳에서 가장 많이 피어난다. 행운은 고요하고 안전한 풀밭보다,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길 위에 더 자주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봄망초라는 꽃이 있다. 꽃봉오리일 때 고개를 땅으로 떨구고 있다가, 꽃이 피면서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고 한다. 의기소침하게 웅크리고 있던 누군가가 마침내 무언가를 결심하고 일어서는 것처럼. 나는 이 식물의 이야기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에게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묻는다. 빨리 털고 일어나라고, 지금 뭐하고 있느냐고. 하지만 봄망초는 그 자세로 꽃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것이 포기가 아니라, 피어나기 위한 과정이었다. 어떤 침묵은 준비이고, 어떤 움츠림은 도약이다. 지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반드시 무너진 것은 아닐 수 있다. 봄망초처럼, 안으로 무언가를 모으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식물을 들여다보는 일이 결국 사람을 들여다보는 일이 된다. 타민들레는 눕는 법을 알고, 잡초는 엎드려 꽃을 피우고, 네잎클로버는 상처에서 피어나고, 봄망초는 고개를 숙인 채 꽃을 준비한다. 이들이 가르쳐주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다만, 살아남는 것이 언제나 씩씩하게 서 있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 때로는 눕는 것이, 비켜서는 것이, 고개를 숙이는 것이 더 깊은 생의 전략일 수 있다는 것이다. 봄이 오면 길가에 핀 이름 모를 풀꽃 앞에서 발걸음을 한 번 멈춰보고 싶다. 저 작은 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해왔는지를, 얼마나 많이 밟혔는지를, 그럼에도 지금 이 자리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그러면 어쩐지, 나의 엎드림도 나의 침묵도, 조금은 다르게 보일 것 같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58/11/cover150/k93213764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581106</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X와의 안전 이별 - [X와의 안전 이별 - 보복 없이 손해 없이 나르시시스트와 멀어지는 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609</link><pubDate>Sat, 02 May 2026 14: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60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138960&TPaperId=1725360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55/26/coveroff/k10213896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138960&TPaperId=1725360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X와의 안전 이별 - 보복 없이 손해 없이 나르시시스트와 멀어지는 법</a><br/>레베카 정 지음, 고영훈 옮김 / 생각정거장 / 2026년 05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우리는 살면서 한 번쯤 이런 사람을 만난다. 처음에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처럼 보인다. 말도 잘하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카리스마가 있으며, 나를 특별한 존재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이상하다. 내가 점점 작아지는 느낌, 내 말이 무시당하는 경험,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늘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 어느 순간 나는 그 사람 주위를 맴도는 위성이 되어 있고, 내 삶의 중심은 온통 그 사람의 감정을 맞추는 일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나르시시스트와의 관계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만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본질은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나르시시스트의 내면에는 깊고 어두운 공허함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가치 있는 존재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외부에서 그 결핍을 채우려 한다. 화려한 성공을 과시하거나, 타인을 조종하고 지배함으로써 잠시나마 그 공허함을 달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구멍이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빼앗아도, 아무리 많은 사람을 지배해도, 그 갈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가 없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나르시시스트가 특히 위험한 이유는 그들이 항상 명백하게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특히 '은밀한 나르시시스트', 즉 내향형 나르시시스트는 겉으로는 조용하고 배려 있으며 심지어 피해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큰 소리로 군림하는 대신, 조용한 무시와 은근한 비교, 교묘한 죄책감 심기로 상대를 무너뜨린다. "내가 그런 말을 했나요? 기억이 나지 않는데"라고 말하며 상대방의 현실 인식 자체를 흔들어 놓기도 한다. 이것을 '가스라이팅'이라고 부른다. 피해자는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보이지 않는 사슬은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멍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내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의심하게 된 사람의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나르시스트와의 관계에서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내가 왜 그걸 그렇게 오래 참았을까. 왜 진작 알아채지 못했을까." 하지만 이 자책은 부당하다. 나르시시스트는 바로 그 눈치채지 못하도록 설계된 방식으로 관계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나르시스트를 이해하는 데 있어 뇌과학적 관점도 중요하다. 그들의 뇌는 반복적인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다르게 발달했다. 감정과 생존 본능을 관장하는 변연계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채 굳어버렸고, 그 결과 위협을 느끼는 순간 이성이 아닌 생존 본능이 작동한다. 그들이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은 실제로 그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르시스트를 단순히 '나쁜 사람'으로만 규정하는 것이 때로는 불완전한 이해라는 이유다. 물론, 이해가 곧 용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그렇다면 나르시스트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이상적인 답은 물론 그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함께 아이를 키우는 관계라면, 오랜 직장 동료라면, 혹은 가족이라면 완전한 단절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살아남기 위해, 나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다르게 싸워야 한다. 나르시스트와의 싸움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상대방이 언젠가는 이해해 줄 것'이라는 기대다. 그들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화하지 않는다. 논리나 공감으로 설득이 되지 않는다. 그들의 목표는 문제 해결이 아니라 상대를 흔드는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르시시스트와 마주했을 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다. 흔들리는 나의 모습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대응은 감정을 걷어 낸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들의 공격에 동요하지 않는 태도, 의도적인 침착함, 그리고 전략적인 정보 관리가 필요하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 것, 그들의 모순과 거짓을 조용히 수집해 두는 것, 그리고 그 증거를 가장 유리한 순간에 활용하는 것. 이것은 비겁한 전략이 아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상대와 싸울 때, 그 규칙에 맞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생존의 지혜다. 그러나 이 모든 전략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다. 바로 나 자신의 내면적 힘을 되찾는 일이다. 나르시스트는 상대방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지배력을 유지한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내 자신의 가치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한, 그들의 공격은 빗나간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는 폭풍이 지나가도 뿌리가 뽑히지 않는다. 나르시시스트와의 싸움에서 궁극적인 승리란 그들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나르시스트와의 관계를 끝내거나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길고 고통스럽다. 그 관계에서 나온 이후에도 한동안은 그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린다. "네가 부족해서 그런 거야", "너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라는 말들이 내면의 독백이 되어 버린다. 이것을 극복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회복의 과정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들이 겪는 이 고통이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적인 따뜻함과 공감 능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나르시스트의 조종에 더 취약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상대도 우리처럼 느끼고, 변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그 믿음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나르시스트와의 관계로 인해 스스로를 의심하고, 지치고, 무너지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이나 "왜 진작 떠나지 않았냐"는 질문 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당신의 고통은 실재한다"는 인정이며, 당신은 이 관계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 자격이 있다"는 확신이다.<br>나르시스트를 이해하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왜 그 관계에 머물렀는지, 내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더 단단해진 자신을 만나게 된다. 빼앗겼던 이름을 되찾고, 잊고 있었던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된다. 그것이 진정한 승리다.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55/26/cover150/k10213896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552656</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나는 나답게 죽기로 했습니다 - [나는 나답게 죽기로 했습니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604</link><pubDate>Sat, 02 May 2026 14: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60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02137354&TPaperId=1725360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18/29/coveroff/k00213735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02137354&TPaperId=1725360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는 나답게 죽기로 했습니다</a><br/>나이토 이즈미 지음, 위지영 옮김 / 마음의숲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우리는 오랫동안 죽음을 병원의 일로 여겨왔다. 하얀 커튼 너머, 모니터의 숫자들 사이에서, 낯선 천장을 바라보며 맞이하는 임종. 그것이 현대인에게 주어진 죽음의 표준적 풍경이 되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마지막인가. 나이토 이즈미의 기록을 따라 가다 보면, 그 질문이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익숙한 냄새가 배어 있는 방, 오래 앉아 있던 창가의 의자,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 그 안에서 눈을 감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른 일인지를, 책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한국은 지금 인구 구조의 거대한 전환점을 통과하고 있다. 2025년 현재, 65세 이상 고령 인구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20%를 넘어서 며 초고령사회에 공식적으로 진입했다. 통계청의 추산에 따르면, 2050년에는 노인 인구 비율이 40%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숫자들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노인이 많아진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질문이 이 사회 전체의 과제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그 질문에 답할 준비가 충분하지 않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불길하게 여기는 문화, 호스피스를 '포기'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인식, 그리고 재택 돌봄을 뒷받침할 제도적 기반의 미비. 이 세 가지가 맞물려 있는 한, 우리는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마감할 권리를 사실상 갖지 못한다. 그래서 나이토 이즈미의 이야기는 일본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마주해야 할 거울이기도 하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재택 호스피스는 병원 대신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제도적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삶의 연장선 위에 놓겠다는 철학적 선언에 가깝다. 사람은 살아온 방식으로 떠난다는 명제는, 역으로 말하면 마지막 순간의 환경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완성하거나 훼손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병원은 치료를 위한 공간이다. 그 설계의 중심에는 생명 연장이라는 목표가 있으며, 죽음은 그 목표의 실패로 읽히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병원에서의 임종은 종종 관계보다 기계가, 온기보다 절차가 앞서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물론 의료진의 헌신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시스템의 구조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 구조 안에서 환자는 주체가 되기 어렵고, 마지막 순간조차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갈 자유를 빼앗기는 경우가 생긴다. 반면 재택 호스피스는 환자를 삶의 공간으로 돌려보낸다. 거기서 그는 여전히 가족의 밥상을 차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고, 장부의 계절을 눈에 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나이토 이즈미의 기록 속 인물들 이 인상적인 이유는 그들이 죽음을 앞두고도 '지금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게 문을 끝까지 열어두고, 봄날 딸기를 으깨어 우유를 만들고, 손자에게 삶의 졸업장 이야기를 전하던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삶을 포기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삶의 마지막 챕터를 가장 자기답게 써 내려가고 있었다. 이것이 재택 호스피스가 복지 제도를 넘어 하나의 가치 체계로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다. 어디서 죽는가의 문제는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일본은 1990년대 이후 재택 의료 체계를 꾸준히 정비해왔다. 방문 진료와 방문 간호를 중심으로 한 재택 호스피스 모델은 지역사회 의료와 연계되어 있으며, 환자가 자택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닌 사회적 선택지로 자리 잡았다. 나이토 이즈미가 설립한 후지 내과병원의 사례는 그러한 흐름의 한 상징이기도 하다. 한국의 현실은 다소 다른 지점에 있다. 물론 완화의료 및 호스피스 제도는 법적으로 정비되어 있고, 2016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의 제정 이후 제도적 틀은 어느 정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실제 현장의 층위에서는 여전히 많은 간극이 존재한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재택형 호스피스 서비스의 접근성이다. 전국적으로 재택 호스피스를 제공하는 기관은 아직 충분하지 않으며, 지역 간 편차도 크다. 대도시와 농촌 지역 사이의 격차는 단순한 서비스 밀도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돌봄의 상당 부분이 여전히 가족, 특히 여성 가족 구성원에게 집중되는 구조적 문제도 있다. 재택 돌봄이 확대되는 만큼, 그 부담을 누가 감당하는가에 대 한 사회적 논의와 지원이 함께 성장하지 않으면, 제도는 되레 특정 계층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울 수 있다. 인식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호스피스는 여전히 '치료를 포기하는 것, '마지막 선택지'라는 이미지와 결부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호스피스를 치료의 실패가 아닌 '삶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문화적 전환이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 려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삶의 마무리를 사전에 설계하고 논의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나이토 이즈미는 말한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건강할 때 휘파람을 불며 해야 한다. 역설이 아니다. 죽음을 일상의 언어로 끌어들이는 것, 그것이 곧 삶을 더 진지하게 살아가는 출발점이라는 뜻이다. 초고령화 사회에서 재택 호스피스를 활성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제도적 확충만이 아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문화적 감수성의 성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은 초고령화 사회는 우리에게 제도적 과제를 던지는 동시에,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철학적 물음을 사회 전체 앞에 내려놓는다. 재택 호스피스는 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실천적 응답이다. 하지만 그 응답이 온전히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먼저 그 질문을 두려움없이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18/29/cover150/k00213735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182990</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메르헨의 가만히 듣는 마음 - [메르헨의 가만히 듣는 마음 - 음악으로 감정을 사유하는 방법에 대하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578</link><pubDate>Sat, 02 May 2026 13: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57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138960&TPaperId=1725357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55/23/coveroff/k17213896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72138960&TPaperId=1725357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메르헨의 가만히 듣는 마음 - 음악으로 감정을 사유하는 방법에 대하여</a><br/>메르헨 지음 / 더웨이브 / 2026년 05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밤이 완전히 어둡기 전에 찾아오는 그 시간을 나는 안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경계의 틈새. 세상이 숨을 고르는 그 짧은 순간, 나는 이어폰을 꽂는다.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다. 이루마의 건반이 첫 음표를 떨구는 순간, 무언가가 가슴 안쪽에서 조용히 무너진다. 무너진다는 표현이 두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슬픔의 무너짐이 아니다. 오랫동안 단단하게 버텨왔던 것들이, 이제는 좀 쉬어도 된다는 듯 스르르 내려앉는 느낌. 꽉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은, 그런 고요한 무너짐이다. 나는 음악이 위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위로란 누군가가 건네는 말, 등을 토닥이는 손길, 따뜻한 차 한 잔 같은 것 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어느 새벽, 에릭 사티의짐노페디가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음악은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니라, 위로받 아도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라는 걸. 말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 그저 선율로만, 지금 네가 느끼는 그 감정이 맞다고 조용히 끄덕 여 주는 것이라는 걸. 조용한 마음이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느끼되, 그 감정에 이름 붙이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다. 그냥 흘러가도록, 그냥 스쳐 지나가도록, 그냥 나를 통과하도록 두는 것. 음악은 그 허락을 준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솔직히 말하면, 나는 좋은 음악을 들을 때마다 조금 무서워진다.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오기 때문이다.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그 무언가. 슬픔이라 부르기엔 너무 아름답고, 기쁨이라 부르기엔 너무 쓸쓸한, 언어가 닿지 않는 자리에 있는 감정들이다. 올라푸르 아르날즈의 음악이 흐를 때, 나는 감정의 관찰자가 된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파동들을 바라보되, 그 파동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렇게 거리를 두고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 파동 안에 완전히 잠겨 있다는 것이다. 음악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저항할 틈을 주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어지러운 마음 은 병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는 증거다. 완전히 무감각해지지 않았다는 신호다. 마음이 어지럽다는 건, 마음이 살아있다는 뜻이다. 불협화음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조화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 갈망이 있는 한, 우리는 음악을 놓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어지러운 마음을 음악에게 맡기는 법을 배웠다. 정리하려 하지 않고,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냥 음악 앞에 내어놓는 것이다. 그러면 음악은 내 마음의 어지러운 실들을 하나하나 풀어주지 않는다. 다만, 그 실들이 엉켜있어도 아름 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완전함이 오히려 완전할 수 있다는 것을.<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어느 날 문득, 내가 나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적 있다.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을 바라보는데, 그 눈동자 속에 있는 사람이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는 순간. 분명히 나인데, 분명히 내가 살아온 시간들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데, 왜인지 처음 보는 사람 같은. 그 당혹스러운 낯섦 앞에 서 있을 때, 나는 음악을 들었다. 가브리엘 포레의시칠리엔이 흐르기 시작하자, 낯섦은 두려움이 아니라 경이로움으로 바뀌었다. 내가 나를 완전히 알 필요가 없다는 것. 내 안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방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 방들이 열릴 때마다 새로운 감정이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것. 그것이 두려운 일이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 낯선 마음은 길을 잃은 마음이 아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새로운 지도를 그리기 시작하는 마음이다. 계절이 다섯 번째 얼굴을 가진다면 어떨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하지만 그 모든 계절의 기억을 품은 계절. 내 마음이 꼭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어느 감정으로도 온전히 설명되지 않지만, 모든 감정의 결을 동시에 지닌. 음악은 그 다섯 번째 계절에 이름을 붙여준다. 말이 아닌 선율로 다가온다. 마지막 축제라는 말이 어쩜 이렇게 아름답고 슬플 수 있을까. 끝이 있기 때문에 축제는 눈부신 것이다. 영원한 축제라면, 우리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을 것 이다. 음악이 끝나는 순간의 그 여운. 마지막 음표가 공기 속으로 녹아들고, 침묵이 내려앉는 그 찰나의 시간. 나는 그 순간을 위해 음 악을 듣는지도 모른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너무 거창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가 어제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 바람이 지나갈 때 피부가 느끼는 온도의 미세한 차이. 커피 한 모금을 넘길 때 목을 타고 내려가는 따뜻함. 이런 것들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그것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인가. 음악은 그 기적을 선명하게 만들어준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선율이 흐를 때, 나는 잊고 있었던 누군가를 떠올린다. 특별히 생각하려 한 것도 아닌데, 음표 하나가 기억의 문을 두드리고, 그 문 너머에서 오래된 얼굴이 걸어나온다. 그리움이란 이런 것이다. 내가 원할 때 꺼내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불러낼 때 찾아오는 것이다. 그리움은 상실이 아니다. 그 사람이, 그 시간이, 그 감정이, 한때 내 삶에 존재했다는 증거다. 흔적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깊이 살았다는 뜻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을 덮고 나서도, 음악은 계속 흐른다. 귀에 들리지 않아도, 이어폰을 뽑았어도, 선율은 기억 속 어딘가에 남아 우리를 조용히 따라온다. 어떤 냄새가 기억을 불러오듯, 어떤 음표는 감정을 불러온다. 그것이 음악이 가진, 언어가 닿지 못하는 자리까지 뻗어가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55/23/cover150/k17213896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552389</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논어×중용 필사책 - [논어×중용 필사책]</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570</link><pubDate>Sat, 02 May 2026 13: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57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02034980&TPaperId=1725357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031/2/coveroff/k80203498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02034980&TPaperId=1725357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논어×중용 필사책</a><br/>공자.자사 지음, 최종엽 편저 / 유노북스 / 2025년 12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처음에는 그냥 써보자 싶었다. 논어와 중용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 한자가 빽빽한 지면이 주는 낯섦,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논해온 그 깊이에 압도될 것 같아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읽다가 덮고, 또 읽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필사라는 방식이 달랐다. 이해하려는 부담 없이, 그냥 한 글자씩 따라 써도 된다는 것. 어쩌면 그 허락이 나를 다시 앉게 만들었는지 모른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논어를 필사하는 동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쓰는 속도에 맞추어 생각도 느려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흘려 지나쳤을 문장들이 손끝에서 잠시 머물다 갔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아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쓸 때 나는 얼마나 아는 척을 하며 살아왔는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남의 기준으로 달려가다 정작 나 자신의 속도를 잃어버린 건 아닌가.<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공자의 말은 거창하지 않았다. 배우고 익히는 것, 남을 대할 때의 태도, 작은 성실함, 이런 일상의 덕목들이 쌓여 삶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화려한 성취가 아니라 하루하루의 결이 인생을 만든다는 것을 필사를 하며 몸으로 느꼈다. 쓰는 행위 자체가 이미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었다. 한 획을 정성껏 긋는 동안 마음도 조금씩 정돈되었다. 논어가 전하고자 했던 것이 어쩌면 바로 이 감각이 아니었을까 싶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중용은 더 어려웠다. '중도를 지킨다'는 말은 알 것 같으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극단을 피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 딱 맞는 적정한 지점을 찾으라는 것인가. 그런데 한 글자씩 써내려가다 보니 중용이 이야기하는 것은 완벽한 균형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흔들리는 것을 인정하되, 다시 돌아오려는 마음의 노력, 그것이 중용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불완전함 위에서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의지.<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면 겉으로 드러나고,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움직이게 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이 문장 앞에서 한참 멈추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데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머리로만 알았던 것 같다. 필사를 하며 이 문장을 손으로 쓰는 순간, 그것이 발끝까지 내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영웅은 멀리 있지 않다. 자신의 하루를 맑게, 분명하게 살아내는 사람이 바로 영웅이라는 것이다. 숏츠와 알고리즘이 쏟아내는 소음 속에서 나는 얼마나 많이 휩쓸렸는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에 감정을 소비하고, 남의 고통을 구경하며 시간을 흘려보낸 날들.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손끝에서 새겨졌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필사는 느리다. 그 느림이 처음에는 불편했다. 빠르게 읽고 빠르게 넘어가는 습관이 몸에 밴 나에게 한 글자씩 또박또박 써내려가는 시간은 낯설었다. 그런데 그 느림 속에서 고요함이 왔다. 헐렁해진 마음이 조금씩 조여드는 느낌, 소란했던 안이 잠잠해지는 느낌. 문장이 끝날 때쯤이면 내가 쓴 것인지 문장이 나를 쓴 것인지 모를 정도로 그 내용이 마음 안에 내려앉아 있었다. 결심을 새로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잊고 지냈던 기준들을 다시 꺼내어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논어와 중용을 읽으며 내가 발견한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무엇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싶은지.<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다산이 유배지에서 글을 베끼며 정신을 다듬었던 것처럼, 나 역시 이 작은 책상 앞에서 손끝으로 마음의 근육을 키운 것 같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작은 정성의 반복. 그것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어디로 돌아와야 하는가를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책을 덮으며, 그 답이 손끝에 남아 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031/2/cover150/k80203498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0310210</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우리는 언제 어른이 되는가 -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되는가 - 서른에 다시 읽는 어린 왕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561</link><pubDate>Sat, 02 May 2026 13: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56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137959&TPaperId=1725356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78/23/coveroff/k10213795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137959&TPaperId=1725356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우리는 언제 어른이 되는가 - 서른에 다시 읽는 어린 왕자</a><br/>김진하 지음 / 21세기북스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처음 어린 왕자를 읽었을 때, 나는 아마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장미가 왜 그렇게 까다롭게 구는지, 여우가 말하는 '길들임'이 왜 그토록 특별한 것인지, 왕자가 결국 자신의 별로 돌아가기 위해 뱀에게 물리는 장면이 왜 슬픔이 아니라 선택처럼 읽혀야 하는지...아무것도. 그러나 이상하게도 책은 재미있었고, 삽화는 예뻤으며, 나는 별 감흥 없이 책을 덮었다. 어린이는 그렇게 어린 왕자를 지나쳤다. 어른이 되어 다시 펼쳤을 때, 나는 첫 페이지에서 이미 멈추었다. 생텍쥐페리가 그린 보아뱀 그림을 보고 어른들이 모자라고 말한다는 대목. 어릴 때는 그 '어른들'이 남의 이야기였는데, 이제 나는 그 어른들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보아도 모자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 어른들. 놀랍게도 나는 그게 슬펐다.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어른이 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얻는 과정처럼 보인다. 지식이 쌓이고, 경험이 두터워지며, 세상을 읽는 눈이 생긴다. 그런데 어린 왕자는 조용히 반문한다. 당신은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었느냐고.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알던 감각,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던 힘, 관계를 '쓸모'가 아닌 '고유함'으로 느끼던 마음, 그것들은 언제 어디서 사라진 걸까. 우리는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그 상실을 기꺼이 정당화했던 건 아닐까.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한다. 나를 길들여 달라고. 프랑스어로 '아프리부아제(apprivoiser)', 사적인 것으로 만들다는 뜻의 이 단어는 단순히 친해지는 것을 넘어선다. 서로의 마음에 길을 내는 일, 시간을 들이고 책임을 지는 일,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존재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 일. 어른의 언어로 말하자면 번거롭고 비효율적인 일이다. 그러나 여우는 말한다. 길들여진 것만이 진정으로 알 수 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나는 요즘 얼마나 많은 관계를 '기능'으로 대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필요할 때 연락하고, 일이 끝나면 잊어버리는 관계들. 상대방을 하나의 고유한 사람이 아니라 어떤 역할로, 어떤 수단으로 인식하는 순간들. 어린 왕자의 장미가 까다롭고 허영 가득해 보여도 왕자가 그토록 그리워한 것은, 바로 그 꽃과 나누었던 시간과 정성의 무게 때문이었다. 세상의 수많은 장미들 중에서 그 꽃이 유일한 것은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길들임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사람들에게 그런 시간을 얼마나 내어주고 있는가. 별별 소행성을 돌아다니며 왕자가 만나는 어른들은 우스꽝스럽다. 권력만 원하는 왕, 칭찬만 원하는 허영쟁이, 숫자만 세는 사업가. 읽으면서 나는 웃었다가, 이내 멈추었다. 그들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들의 인정 없이는 불안한 나, 숫자로 환산되지 않으면 가치를 의심하는 나, 가진 것을 세느라 정작 누리지 못하는 나. 생텍쥐페리는 그 인물들을 조롱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준다. 그리고 독자 스스로가 거울을 보게 만든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사막 한가운데에서 어린 왕자는 우물을 찾는다. 어른인 나는 지도가 없으면 길을 나서지 않으려 한다. 실패의 가능성을 먼저 계산하고, 성과가 보장되지 않으면 마음을 거두어들인다. 그런데 왕자는 그냥 걷는다. 사막에 우물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희망이란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가능성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행위 그 자체임을, 어른이 된 나는 머리로는 알지만 몸으로는 잊어버렸다. 왕자가 뱀에게 물리는 마지막 장면을 다시 읽으며, 나는 오래 앉아 있었다. 그것이 죽음인지 귀환인지 모호하게 그려진다는 것을 이번에는 알아챘다. 어쩌면 그 모호함 자체가 생텍쥐페리의 말이었을 것이다. 사라지는 것이 곧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별을 보면 웃음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조종사에게 왕자는 말한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철학이었다. 이별 이후에도 의미는 다른 방식으로 남는다는 것.<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을 덮고 나서 한참을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린 왕자를 처음 읽었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여러 해의 시간이 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많은 것을 얻었고, 조용히 잃었다. 이 책이 슬픈 것은 어떤 비극 때문이 아니라, 읽는 내내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명함 속에서, 아직 늦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작은 가능성도 함께 보인다. 어른이 된다는 것의 역설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지만, 깊이 살기 위해서는 다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 어린 왕자는 동화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이들에게,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말하는 조용한 초대장이다. 별을 보며 꿈을 꾸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으로 보고, 소중한 이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일. 그것이 나이를 먹어도 잃지 말아야 할, 어른이 되어서도 간직해야 할 삶의 태도가 아닐까.<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여우의 이 말을 어릴 때는 그냥 읽었다. 이제는 그 말 앞에서 한참을 머문다.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나는 오늘 무엇을 보고 살았는지. 어린 왕자는 그런 질문을 남긴다. 대답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묻게 만든다. 그리고 그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어른다움의 진짜 시작인지도 모른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78/23/cover150/k10213795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782381</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하버드 식사 혁명 - [하버드 식사 혁명 - 먹어서 병을 예방하는 아주 작은 식습관의 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554</link><pubDate>Sat, 02 May 2026 13: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5355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52137757&TPaperId=1725355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66/47/coveroff/k95213775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52137757&TPaperId=1725355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하버드 식사 혁명 - 먹어서 병을 예방하는 아주 작은 식습관의 힘</a><br/>하마야 리쿠타 지음, 오시연 옮김, 김민지 감수, 김혜민 감수도움 / 부키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냉장고를 열 때마다 나는 잠시 멈칫한다. 어제 사다 놓은 두부, 방치된 채로 시들어가는 대파, 그리고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요거트. 나는 분명히 '건강하게 먹으려고' 산 것들인데, 왜 이렇게 자주 버리게 되는 걸까. 그 질문은 오래된 것이었지만, 나는 늘 같은 결론으로 도망쳤다. "의지가 부족해서."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문제는 의지가 아니라, 내가 '식사'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의 하루 식사를 솔직하게 되돌아보면 부끄러운 장면들이 많다. 아침은 거르거나 커피 한 잔으로 때우고, 점심은 편의점 삼각김밥과 컵라면, 저녁은 퇴근 후 반쯤 지쳐 배달 앱을 뒤적이다 마라탕이나 치킨을 시키는 날이 적지 않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건강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가끔 채소를 잔뜩 넣은 샐러드를 먹거나 현미밥으로 바꿔보려 했다. 이런 노력이 꽤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내 시도가 왜 번번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조용하지만 명확하게 설명해줬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에서 가장 먼저 흔들린 것은 나의 이분법이었다. 나는 음식을 늘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눠서 생각해왔다. 현미는 좋고, 흰쌀밥은 나쁘다. 채소는 좋고, 햄버거는 나쁘다. 술은 나쁘지만, 레드와인은 조금 좋다. 이런 식의 이분법은 건강 정보를 소비하는 나의 기본 언어였다. 그런데 그 판단의 근거가 대부분 흐릿하다는 것, 심지어 어디서 들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직면했다. 예를 들어 나는 달걀을 하루에 하나 이상 먹으면 안 된다고 굳게 믿었다. 콜레스테롤 때문이라는 이유도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책에 따르면 이 믿음에는 실제로 확립된 과학적 근거가 없다. 더 흥미로운 것은, 어떤 식재료가 건강에 좋은지 나쁜지를 단순하게 판단할 수 없는 이유다. 모든 음식에는 여러 성분이 복잡하게 섞여 있고, 그것이 몸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단 하나의 영양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커피에 발암물질이 들어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커피는 암 예방 효과가 있다는 연구도 많다. 나는 그동안 단편적인 정보들을 모아 나만의 '건강 교리'를 만들어왔던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대신 무엇을 먹는가"라는 시각의 중요성. 어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덜 먹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특히 오래 머릿속에 남았다. 나는 채소 주스를 마시면서 건강해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만약 그 주스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무엇을 마셨을까. 아마 달콤한 아이스 음료나 탄산음료를 집어들었을 것이다. 그 맥락에서는 채소 주스가 나쁜 선택이 아니다. 반대로, 평소에 충분히 채소를 잘 먹는 사람이 채소 주스를 마신다면 그건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음식의 가치는 그 자체만이 아니라, 무엇을 대신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발상은 내 머릿속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그 다음으로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환경'에 관한 이야기였다. 책은 식습관이 개인의 의지보다 환경에 훨씬 더 크게 좌우된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이 말이 변명처럼 들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수없이 많은 상황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특정 음식을 선택해왔다. 회의가 길어져 점심 시간이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편의점으로 향했다. 야근 후에는 배달 앱 외에 다른 선택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은 날 저녁에는 단 것이 당겼다. 이것들이 과연 순수한 '선택'이었을까. 책에서 말하는 '시스템화'라는 개념이 흥미로웠다. 올바른 지식을 가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지식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이어지는 환경을 만드는 것. 예를 들어 냉장고에 건강한 음식을 먼저 눈에 띄는 곳에 두거나, 사 놓는 식재료의 종류 자체를 바꾸는 일 같은 것들이다. 의지력을 높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의지력이 필요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것. 이 발상은 나에게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사실 나는 집에 과자가 있으면 반드시 먹고, 없으면 굳이 사러 나가지 않는다. 환경이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면서, 왜 항상 의지 탓만 했을까.<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깨달은 것은, 내가 '식사 패턴'이 아닌 '식재료'에 집착해왔다는 사실이다. 오늘 뭘 먹었는지, 그 음식이 좋은 음식인지 나쁜 음식인지에 집중하면서, 정작 한 달 동안 내 식사 전체가 어떤 모양인지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책은 하루 단위가 아니라 일주일, 혹은 한 달을 단위로 식습관을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어느 날 햄버거를 먹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쁜 식습관이 되는 게 아니다. 그 햄버거 안에 채소가 들어있다면, 그날따라 채소 섭취량이 평소보다 늘었을 수도 있다. 반대로 매일 샐러드를 먹더라도, 부족한 열량을 단 빵으로 채운다면 전체적인 균형은 무너진다. 이 관점에서 나의 식사를 다시 보면, 나는 생각보다 형편없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개선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 채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나트륨은 과하며, 과일은 거의 먹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가끔 먹는 마라탕에 들어있는 다양한 채소들, 편의점 도시락 옆에 끼워 먹는 삶은 계란 하나, 저녁에 무심코 마신 두유 한 팩. 이것들이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것도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완벽한 식사가 아니어도 괜찮다. 중요한 건, 전체적인 흐름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가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을 덮고 나서, 나는 냉장고를 다시 열어봤다. 시들어가는 대파가 여전히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죄책감이나 자괴감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하면 이걸 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가벼운 궁금증이 생겼다. 냉장고 앞자리에 두거나, 사는 양을 줄이거나, 아예 냉동 채소로 대체하거나.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작고 구체적인 변화. 아마도 그게 지속 가능한 첫걸음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식사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르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는 알게 됐다. 완벽한 식사를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조금 덜 나쁜 선택을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66/47/cover150/k95213775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664772</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모든 생명은 지키는 것이다 - [모든 생명은 지키는 것이다 - 농부와 소설가가 심은 한 알의 진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7690</link><pubDate>Sat, 25 Apr 2026 12: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769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42137355&TPaperId=1723769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18/69/coveroff/k94213735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42137355&TPaperId=1723769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모든 생명은 지키는 것이다 - 농부와 소설가가 심은 한 알의 진심</a><br/>이동현.김탁환 지음 / 해냄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우리는 늘 어딘가를 지나친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이름 모를 마을들, 고속도로 표지판에 잠깐 눈길을 주다 이내 잊어버리는 지명들. 곡성도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남원과 구례 사이, 어느 쪽으로도 확실하게 기울지 않는 그 어정쩡한 자리. 지도 위에서조차 존재감이 희미한 고장. 누군가 거기 뭐 있어요?"라고 물으면,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 머뭇거려야 하는 이름. 그런데 어쩌면, 우리가 지나쳐온 것은 곡성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나쳐온 것은, 느리게 살아가는 것들이었는지도. 우리가 지나쳐온 것은, 계절의 속도를 따라 숨 쉬는 삶이었는지도. 섬진강은 말없이 흐른다. 굽이굽이 돌아 구례로, 하동으로, 광양으로 내려가는 그 강물은 곡성을 가로지르면서도 요란하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냥 흐른다. 그냥 거기 있다. 어쩌면 그것이 곡성을 닮았다. 어쩌면 그것이 미실란을 닮았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옛 초등학교 교정을 상상해본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운동장, 칠판 먼지가 내려앉던 교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리던 복도. 그 자리에 이제는 논이 생겼다. 교실 대신 발아현미 연구실이 들어섰고, 운동장이었을 자리엔 텃밭이 쌀 미 자 모양으로 일궈졌다. 아이들 대신 벼가 자라고, 수업 종소리 대신 개구리 울음소리가 절기를 알린다. 처음엔 낯설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미생물을 연구하던 박사가 흙냄새 나는 시골 마을에 뿌리를 내리는 일. 논문과 데이터로 가득한 세계를 뒤로하고, 손에 흙을 묻히는 농부의 삶을 선택하는 일. 사람들은 물었을 것이다. "박사 양반이 왜 이렇게 힘든 일을?" 하고. 하지만 과학자가 된 농부는 알았을 것이다. 볍씨 한 알 안에 담긴 것이 어떤 논문보다 깊다는 사실을. 흙과 물과 햇볕이 빚어내는 화학반응은 실험실에서 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씨앗이 땅 속에서 발아하는 순간, 그 생명의 떨림은 어떤 첨단 장비로도 완전히 측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630종의 벼를 한 논에 심는다는 것은 농사 실험만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선언 이다. 하나의 품종만을 대량으로 키워 효율을 극대화하는 시대에, 다양성을 지키겠다는 완고하고 아름다운 고집. 소멸해 가는 품종들을 붙잡아두려는 조용한 저항. 씨앗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역사를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려는 긴 호흡의 의지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현대 도시의 삶은 항상 어딘가를 향해 달려간다. 빠르게, 더 빠르게. 효율적으로, 더 효율적으로. 우리는 목적지만 바라보며 걷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사치로 여기며 산다. 걷다가 길 위에 눕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퐁퐁 다리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드러눕는 두 중년 남자의 이미지가 그토록 선명하게 마음에 남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등을 통해 올라오는 강물 소리. 온몸을 감싸는 물의 진동. 하늘과 땅 사이에 그냥 존재하는 것.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것이 자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는 비밀이다. 미실란의 시간은 절기를 따라 흐른다. 소한과 대한의 고요 속에서 한 해를 준비하고, 입춘과 우수의 기운을 따라 땅을 깨운다. 종의 분주함 속에서 씨앗을 심고, 백로의 이슬이 벼 이삭을 여물게 한다. 인간이 만든 시계가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리듬 위에 삶을 얹는 것이다. 그 삶은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자동화된 농기계 대신 손으로 모내기를 하고, 제초제 대신 직접 김을 매고, 데이터 대신 하늘의 구름을 읽는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 비효율은 다른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계절을 잃어버리고, 흙을 잊어버리고, 밥 한 그릇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짜 비효율인지도 모른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우리 세대는 조급하다. 결과를 빨리 보고 싶고, 변화를 당장 확인하고 싶다. 심은 씨앗이 그날 안에 싹트기를 원하고, 뿌린 노력이 이번 달 안에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 하지만 농사는 다르다. 농사는 계절을 앞서갈 수 없다. 절기를 건너뛸 수 없다. 봄에 심어 가을에 거두는 것이 자연의 이치고, 그 이치 앞에서 인간은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미실란이 2006년에 시 작해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그 자리를 지켜온 것은 그래서 의미 깊다. 유기농 쌀 시장이 외면받던 시절에도, 농촌이 소멸해간다는 뉴스가 쏟아지던 때에도, 미실란은 볍씨를 뿌렸다. 음악회를 열었다. 책방을 만들었다. 글쓰기를 가르쳤다. 아이들을 논에 데려와 흙을 만지게 했다. 천년 숲도 오늘 심은 묘목 한 그루에서 시작된다. 지금 당장 울창한 숲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묘목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당장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 자신이 심은 나무의 그늘 아래 자신이 쉬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미래를 향한 행동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 사실이 슬프지 않은 이유는, 흙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 살았다는 것을, 우리가 씨앗을 심었다는 것을, 우리가 이 땅을 사랑했다는 것을. 미실란은 그 기억을 만들어가는 곳이다. 섬진강이 굽이쳐 흐르는 들녘에서, 계절의 리듬을 따라 숨쉬며, 흙과 씨앗과 사람을 잇는 공동체. 그곳에서 나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18/69/cover150/k94213735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186949</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처음 만나는 예술학 - [처음 만나는 예술학 - 큐레이터와 예비 전공자를 위한 예술의 길잡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7677</link><pubDate>Sat, 25 Apr 2026 12:0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767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52136511&TPaperId=1723767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47/99/coveroff/k55213651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52136511&TPaperId=1723767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처음 만나는 예술학 - 큐레이터와 예비 전공자를 위한 예술의 길잡이</a><br/>홍보라매 지음 / 씨마스21 / 2026년 03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예술을 앞에 두고 우리는 으레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보인다. "아름답다"고 느끼거나, "이게 뭔가"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그런데 여기, 그 둘 다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느끼는 것도, 철학적으로 사변하는 것도 부족하다고 여긴 이들이 묻기 시작했다. "예술이라는 현상을, 과학처럼 연구할 수는 없을까?" 이것이 예술학이 시작된 자리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예술을 진지하게 탐구하려는 사람 앞에는 세 갈래 길이 놓인다. 첫 번째는 예술철학의 길이다. 플라톤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이 길을 걸어온 사람들은 "예술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미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질문이 크고 장엄한 만큼 답도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두 번째는 비평철학의 길이다. 20세기 분석철학의 영향 아래, 이 길을 택한 사람들은 오히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의심했다. 철학자 모리스 웨이츠는 예술은 애초에 정의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질문을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철학적 엄밀함을 얻으려 한 것이다. 세 번째가 예술학의 길이다. 이 길은 앞의 두 길과 달리 경험과 사실에서 출발한다. 예술 작품이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사람들은 예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예술은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 이 길은 철학자의 서재가 아니라 실험실과 현장에서 시작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예술학이 독립적인 학문으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이 시기는 헤겔 철학이 기울고 자연과학이 부상하던 때였다. 다윈의 진화론, 헬름홀츠의 생리학, 분트의 실험심리학은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놓았다. 형이상학적 사변보다 측정하고 관찰하고 검증하는 태도가 지식의 표준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는 물었다. "왜 예술만 사변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하는가?" 추상적인 '미의 본질'을 논하는 대신, 실제 예술 현상을 경험적으로 탐구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물음에 답하려 나선 인물이 구스타프 테오도르 페히너다. 페히너는 기존 미학을 '위로부터의 미학'이라고 불렀다. 미의 본질이라는 추상적 원리에서 출발해 개별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는 이것을 뒤집어 '아래로부터의 미학'을 제창했다.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는지를 먼저 관찰하고, 거기서 일반 법칙을 끌어내자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직사각형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어느 것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물었다. 결과는 가로세로 비율이 황금비에 가까운 형태가 가장 선호된다는 것이었다. 소박해 보이는 이 실험은 미적 판단을 측정하고 수량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열어젖혔다. 물론 페히너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 방법만으로 예술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위로부터의 미학과 아래로부터의 미학이 서로 보완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통합적 관점이 훗날 예술학의 토대가 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예술학이 독립 학문임을 주장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인식이 하나 있었다. 미와 예술은 서로 다른 범주라는 것이다. 전통 미학은 예술의 목적이 미의 실현이라고 보았다. 예술의 문제는 곧 미의 문제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전제에는 두 가지 균열이 있다. 하나는, 미는 예술에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석양도 아름답고, 수학 공식도 아름다울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예술이 반드시 미를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비극은 고통을 다루고, 풍자는 추함을 이용하며, 현대 예술은 종종 의도적으로 아름다움을 거부한다. 이 두 균열 앞에서 '예술을 다루는 학문은 미학으로 충분하다'는 주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에른스트 그로세는 민족학적 방법으로 원시 민족의 예술을 연구하면서, 예술을 철학적으로 사변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예술 현상을 수집하고 분석하고 비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과학이 자연을 연구하듯 예술도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로세의 이 주장은 예술학이 독립 학문으로 성립 가능하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중요한 시도였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예술학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것은 실패한 학문의 역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독립 학문으로 정착하지 못했고, 야심찬 프로그램은 절반만 실현되었다. 그러나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예술학은 하나의 물음을 남겼다. 예술을 느끼는 것만으로, 혹은 철학적으로 사변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그 물음은 지금도 유효하다. 예술을 앞에 두고 우리가 단지 감동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왜 그런 감동이 일어나는지, 그 작품이 어떤 구조와 원리로 작동하는지, 그것이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묻기 시작할 때 — 우리는 이미 예술학의 입구에 서 있는 것이다. 예술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기도 하고, 역사적 탐구의 대상이기도 하며, 과학적 분석의 대상이기도 하다. 어느 하나를 배제하는 것은 예술의 풍요로움을 스스로 축소하는 일이다. 예술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예술 앞에서 우리는 더 많은 방식으로 물을 수 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47/99/cover150/k55213651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6479991</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인생의 오후에는 잃어야 얻는다 - [인생의 오후에는 잃어야 얻는다 - 흔들리는 영혼을 위한 카를 융의 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7619</link><pubDate>Sat, 25 Apr 2026 11: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761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52137355&TPaperId=1723761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18/93/coveroff/k45213735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52137355&TPaperId=1723761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인생의 오후에는 잃어야 얻는다 - 흔들리는 영혼을 위한 카를 융의 말</a><br/>칼 구스타프 융 지음, 변지영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하루의 한가운데, 태양은 더 이상 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정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쌓아온 빛의 방향을 반전시키며 내려가기 시작한다. 융은 이 순간을 단순한 하강이 아니라, 삶의 문법이 바뀌는 전환점으로 읽었다. 아침의 언어로는 더 이상 오후를 말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그가 인생의 정오에서 발견한 핵심이다. 우리는 흔히 성공을 쌓아가는 이야기에 익숙하다. 더 높이, 더 넓게, 더 많이. 그러나 융은 묻는다. 오르는 것만이 성장인가? 내려가는 일, 덜어내는 일, 포기하는 일에도 고유한 의미가 있지 않은가? 오후의 태양이 빛을 거두어들이듯, 인간도 외부를 향해 뻗치던 에너지를 자기 내면으로 돌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생 후반부의 과제다.<br>삼십대와 사십대를 지나며 우리는 이른바 '자신만의 방식'을 구축한다. 직함, 인간관계, 세계관, 삶의 원칙들. 이것들은 처음에는 생존을 위한 방패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우리가 실제 어떤 사람인지를 가리는 가면이 된다. 융은 이를 '페르소나'라고 불렀다.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쓴 가면이 너무 오래되면, 우리는 그것이 곧 자신의 얼굴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문제는 페르소나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억압하고, 외면하고, 창고 깊숙이 밀어넣은 자신의 다른 면들이 있다는 것이다. 눈물, 두려움, 어린 시절의 꿈, 충족되지 못한 갈망들. 그것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재 속에서 여전히 이글거리는 불씨처럼, 언젠가 연기로 피어오를 때를 기다린다. 그 불씨를 무시하는 한, 중년의 우울과 공허함은 필연적으로 찾아온다.<br>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극단으로 달려간 것은 언젠가 반드시 그 반대로 흐른다. 융은 이 원리를 심리학의 언어로 다시 꺼냈다. 한쪽 방향으로만 달려온 삶은 결국 그 반대편 힘에 의해 뒤흔들린다. 너무 오래 이성만을 추구해온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비합리적인 충동에 사로잡히고, 너무 오래 타인을 위해서만 살아온 사람은 어느 순간 공허함에 무너진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법칙이다. 인생의 오후가 불편한 것은 우리가 그동안 억눌러온 것들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그 불편함을 병으로 여기고 억누르려 할수록, 반전의 힘은 더 강해진다. 오히려 그 흔들림을 받아들이고, 자신 안에 있는 '타자'와 마주 앉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통합이 시작된다. 아침의 나는 '원했다'. 오후의 나는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산다. 그러나 더 깊이 나아간 사람은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인가? 원함도 의무도 아닌, 그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융이 말하는 인생 후반부의 진짜 탐색이다.<br>인생의 오후를 제대로 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잃어야 하는가. 첫째,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다. 지금까지 유효했던 진리가 이제는 낡은 틀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둘째, 외부의 인정에 대한 집착이다. 성취와 평판이라는 거울로 자신을 확인하는 방식을 내려놓는 것. 셋째, 젊음의 방식을 붙들려는 관성이다. 더 이상 상승이 미덕이 아닌 시기에, 상승만을 추구하면 분열이 생긴다. 이 상실들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것들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공간이 생긴다. 외부로 향하던 시선이 안으로 돌아오고, 거울에 비추던 나 대신 진짜 나를 마주하게 된다. 융은 이 과정을 개성화(individuation)라 불렀다. 집단이 씌워준 가면을 벗고,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여정. 이것은 노년의 쓸쓸한 수습이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깊은 성장의 형태다.<br>융은 문화를 창조하는 것은 젊은이의 몫이 아니라고 말한다. 과거를 충분히 살아낸 사람, 삶의 정오를 통과한 사람만이 진정한 문화를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문화란 자연의 목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번식하고, 생존하고, 확장하는 것은 자연의 목적이다. 그것을 넘어서서 의미를 묻고,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지혜를 전하는 것이 문화다. 인생의 오후는 쇠락의 시간이 아니다. 도리어 아침에는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해지는 시간이다. 고통을 충분히 겪은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을 깊이 들여다본 사람만이 타인을 진심으로 볼 수 있다. 상실이 쌓이면 공감이 생기고, 공감이 깊어지면 지혜가 된다. 그것이 오후의 선물이다. 우리는 아침의 방식으로 오후를 살려 한다.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증명하고, 더 빠르게 움직이면서. 그러나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 때, 그 빛은 동쪽의 것과 다르다. 기울어진 빛이라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주름, 그림자, 사물의 결. 그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만이, 인생의 오후를 낭비하지 않는다.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18/93/cover150/k45213735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189344</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내 삶을 바꾸는 100일 영어 필사 - [내 삶을 바꾸는 100일 영어 필사 - 천천히 음미하고 깊이 되새기는 고전 읽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7602</link><pubDate>Sat, 25 Apr 2026 11:2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760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42137357&TPaperId=1723760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20/92/coveroff/k84213735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42137357&TPaperId=1723760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내 삶을 바꾸는 100일 영어 필사 - 천천히 음미하고 깊이 되새기는 고전 읽기</a><br/>서메리 지음 / 청림Life / 2026년 05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을 읽다 보면 가끔 이런 순간이 찾아온다.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멈추고, 눈이 한 문장 위에 오래 머무르는 순간. 그 문장이 특별히 화려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단순한데, 어딘가 깊은 곳을 건드리는 느낌. 마치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생각을 누군가 대신 꺼내 말해 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나는 그런 순간을 위해 책을 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영어로 쓰인 고전 앞에서 나는 종종 문을 닫아 버렸다. 언어의 장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단어 하나 찾다 문맥을 잃고, 문법 구조를 분석하다 감동을 놓치기 일쑤였다. 영어 원문을 읽는다는 것은 내게 공부에 가까운 일이었지, 마음을 여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번역본에 기대어 고전을 읽어 왔다. 번역이 훌륭할 때도 있었지만, 무언가 한 겹이 벗겨진 듯한 아쉬움은 늘 남아 있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lt;내 삶을 바꾸는 100일 영어 필사&gt;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것이 단순한 어학 교재일 거라고 생각했다. 영어 실력을 키우기 위한, 조금 멋진 문장들을 베껴 쓰는 책. 그런데 읽어 가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 책은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문장들과 직접 마주하는 경험을 선물하고 있었다. 허먼 멜빌이 『모비 딕』에서 말했던 것, 위대한 주제만이 사람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생각. 나는 그 문장을 영어로 읽으며 처음으로 그 진의를 온전히 느꼈다. 번역을 통해 읽을 때는 의미를 이해했다. 그러나 원문을 직접 눈으로 따라가며, 그 문장의 리듬과 무게를 느낄 때, 비로소 무언가가 달라졌다. 마치 악보를 보는 것과 실제 연주를 듣는 것의 차이랄까. 의미를 아는 것과 그것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필사라는 행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눈으로 읽는 것과 손으로 쓰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손끝으로 한 글자씩 옮겨 적을 때, 문장은 훨씬 천천히 내 안으로 들어온다. 서두르지 않는다. 한 단어, 한 구절에 충분히 머무르게 된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한 '주기적인 멈춤의 힘'이란 것이 단지 일상의 휴식만을 뜻하는 게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이런 행위, 속도를 늦추고 깊이 들어가는 모든 순간에 해당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필사는 그 자체로 멈춤이다. 그리고 그 멈춤 안에서 문장이 살아난다.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말이 소통에서 가장 얕은 부분일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읽으며 나는 아이러니를 느꼈다. 말이 얕다고 말하는 바로 그 문장이, 다른 어떤 말보다 깊이 마음을 건드렸으니까. 결국 언어는 그것을 다루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조심스럽고 진실하게 고른 언어는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지금 이 자리의 누군가에게 닿는다. 고전이 살아남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을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100일이라는 시간이 흥미롭다. 하루 하루가 쌓여 백 개의 문장을 만나는 여정. 어떤 날은 가슴을 치는 문장을 만날 것이고, 어떤 날은 그저 손만 움직이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괜찮다. 베이컨의 말처럼, 쉼 없이 몰아붙이는 것보다 꾸준히 이어 가는 것이 더 오래가는 법이다. 완벽한 집중보다 지속 가능한 리듬이 중요하다. 나는 요즘 그것을 배우고 있다. 매일 조금씩,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위대한 책을 읽는 일도, 결국은 오늘 이 한 페이지를 넘기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한 페이지 안에 때로 화살 같은 문장이 들어 있다. 예고 없이 날아와 가슴 한가운데를 꿰뚫는 문장. 그 순간을 위해, 나는 오늘도 책을 펼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어떤 책이 오래 살아남는 이유를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그것은 세련된 문장 때문도, 유명한 작가의 이름 때문도 아니다. 시대와 상관없이 인간의 본질적인 무언가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두려움, 욕망, 멈추고 싶은 마음, 더 잘하고 싶은 마음, 진심으로 소통하고 싶은 마음. 그 감정들은 수백 년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전은 낡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낡은 책을 펼친다. &lt;내 삶을 바꾸는 100일 영어 필사&gt;는 그 낡은 화살들을 다시 날려 보내는 책이다. 활시위를 당기는 건 책이지만, 맞는 건 결국 지금의 나다. 그리고 그 화살이 지나간 자리에서, 무언가 조금씩 달라진다. 그것이 필사의 힘이고, 고전의 힘이며, 언어의 힘이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20/92/cover150/k84213735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209281</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나무아미타불 마음수업 - [나무아미타불 마음수업 - 초조 불안 걱정을 단숨에 사라지게 하는 부처의 지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7587</link><pubDate>Sat, 25 Apr 2026 11: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758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32137758&TPaperId=1723758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61/40/coveroff/k03213775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32137758&TPaperId=1723758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무아미타불 마음수업 - 초조 불안 걱정을 단숨에 사라지게 하는 부처의 지혜</a><br/>페이융 지음, 허유영 옮김 / 향기책방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한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지금 이 선택이 옳은지. 질문이 많을수록 답은 멀어지고, 생각이 깊어질수록 발은 땅에서 떠오르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 만든 미로 안에서 초조해한다. &lt;아미타경&gt;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있다. 석가모니가 제자들의 질문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말을 꺼낸다. 보통 불법은 누군가 물어야 가르침이 시작되지만, 이 경전에서만큼은 부처가 먼저 입을 연다. 왜 그랬을까. 아마 이 가르침만큼은, 묻고 기다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총명하지 않아도 되고, 이해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잡념을 내려놓고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된다는 것. 불법 중에서 가장 단순한 이 가르침은, 어쩌면 가장 많은 사람을 위한 가르침이었다. 나는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다소 싱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름을 열 번 부르면 극락에 간다는 것이 너무 쉬워 보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 단순함 안에 무언가 깊은 것이 숨어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핵심은 열 번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일념으로 집중하여 흐트러지지 않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말은 입에서 나오지만, 그 말이 온전히 마음에서 나오려면 잡념이 먼저 비워져야 한다. 결국 이 수행은 이름을 외우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비우는 훈련인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주리반타가의 이야기는 그 점에서 더욱 선명하다. 그는 아무리 공부해도 이해하지 못했고, 짧은 게송 하나조차 외우지 못했다. 보통이라면 수행을 포기하거나 스스로를 책망하며 더 깊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석가모니는 그에게 도리를 가르치는 대신 빗자루를 쥐어주었다. 바닥을 쓸어라. 단지 그것만 하면 된다. 이 가르침의 놀라운 점은, 주리반타가가 비질을 하면서 점차 마음의 먼지까지 쓸어내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불법의 심오한 도리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행위에 온전히 집중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깨달음에 닿게 된 것이다. 지식이 아니라 집중이, 이해가 아니라 반복이, 그를 변화시켰다.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우리는 흔히 삶의 방향을 먼저 알아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표가 명확해야 노력할 수 있고, 의미를 알아야 행동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정작 살아보면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무작정 움직이다가 방향을 발견하고, 일단 시작했기에 의미가 생겨난다. 주리반타가가 비질을 하면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법장비구가 아미타불이 되는 과정도 비슷한 결을 지닌다. 그는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뒤, 210억 개의 불국정토를 하나하나 살피는 데 천억 년을 보냈다. 천억 년이라는 시간 앞에서 인간의 조급함은 얼마나 작은가.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충분히 보고, 충분히 생각하고, 그런 다음 48가지 대원을 세웠다. 그 서원들의 핵심은 자신의 해탈이 아니었다. 자신이 만드는 정토에 오는 이라면 누구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오직 그 하나였다. 여기서 아미타불의 이야기가 단순한 신화를 넘어 삶의 지혜가 된다. 우리가 가진 서원 중 얼마나 많은 것이 타인을 향해 있는가. 대부분은 나의 성공, 나의 안락, 나의 안전을 향해 있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서원만으로는 우리 삶이 어딘가 비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법장비구가 이미 왕궁이라는 낙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넓은 서원을 품었던 것처럼, 내 삶 너머를 향하는 바람 하나가 삶 전체를 다르게 만들 수 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나무아미타불은 어떤 이에게는 단순한 주문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명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들여다봐야 한다. 아미타는 무량, 즉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함을 뜻한다. 무한한 빛, 무한한 수명, 무한한 자비. 이 명호를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신에게 기도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어딘가에 광명이 있다는 믿음을 자기 안에 새기는 행위다. 지금 길이 막혀 있어도,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해도, 결국에는 닿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어두운 세상을 걸어갈 힘을 만든다. 믿음과 서원과 행동, 이 세 가지가 갖춰져야 염불이 온전해진다고 경전은 말한다. 믿음 없이는 방향이 없고, 서원 없이는 동력이 없고, 행동 없이는 아무것도 현실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비단 수행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모든 삶에 해당하는 구조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결국 나무아미타불 마음 수업이 가르치는 것은 이것이다.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차분하게 하면 된다. 길이 막혔을 때는 억지로 뚫으려 하지 말고 잠시 멈추어도 된다. 그 멈춤 속에서, 그 단순한 반복 속에서,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주리반타가는 비질을 하다가 깨달음을 얻었고, 법장비구는 천억 년을 기다린 끝에 가장 아름다운 세계를 완성했다. 그들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이다. 나무아미타불. 이 단순한 소리 안에 담긴 것은 결국,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오래된 가르침이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61/40/cover150/k03213775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614071</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터보 스트래티지 - [터보 스트래티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7570</link><pubDate>Sat, 25 Apr 2026 11:1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757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425963X&TPaperId=1723757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89/31/coveroff/897425963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425963X&TPaperId=1723757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터보 스트래티지</a><br/>브라이언 트레이시 지음, 황선영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경영 환경이 급변하는 시대일수록 전략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시장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경쟁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제기하며, 고객의 요구는 갈수록 다양해진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기업이 살아남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반응이 아닌 능동적인 전략적 사고가 필수적이다.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터보 전략(Turbo Strategy)에서 이 문제에 정면으로 맞선다. 전략적 계획 수립이야말로 오늘날 경영자가 활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도구라는 믿음 아래, 그는 실질적이고 즉시 적용 가능한 21가지 원칙을 제시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트레이시는 먼저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 물음은 단순해 보이지만, 많은 기업들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과거의 성공에 도취되거나 근거 없는 낙관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핵심적인 출발점이 된다. 그는 전략 수립의 첫 번째 조건으로 현재 상황에 대한 냉철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꼽는다. 특히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것을 강조한다. 과거의 결정, 투자, 방식에 집착하는 이른바 '매몰 비용의 오류'는 기업이 새로운 전략을 도입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다. 지금 이 순간 백지 상태에서 다시 시작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전략적 사고의 진정한 출발점이 된다. 이러한 접근법은 비즈니스 분석의 기본인 SWOT 분석과도 맞닿아 있다. 내부 강점과 약점을 솔직하게 파악하고, 외부의 기회와 위협을 정확히 읽어내는 것이 전략 설계의 토대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트레이시는 전략적 계획 수립에서 목표의 명확성을 매우 중시한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지 못하면,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그는 이상적인 미래를 먼저 선명하게 그린 다음, 거기서 현재로 역산하는 방식의 사고를 권장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 미래를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라는 피터 드러커의 통찰이 이 접근법의 철학적 배경이 된다. 사명서(mission statement)의 작성 역시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명서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조직 전체가 지향하는 방향을 하나로 모으는 나침반이다. 모든 구성원이 같은 목표를 향해 움직일 때 비로소 조직의 에너지가 집중되고, 전략은 실행력을 얻는다. 트레이시는 사명서가 구체적이고 측정 가능해야 하며, 조직 내 모든 의사결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터보 전략의 핵심 주제 중 하나는 경쟁 우위의 발견과 강화다. 트레이시는 잭 웰치의 말을 인용하며 경쟁 우위 없이는 경쟁하지 말라고 단언한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전략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객이 특정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선택하는 이유는 그 기업이 어떤 면에서든 경쟁자보다 더 나은 가치를 제공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트레이시는 기본적인 비즈니스 분석을 통해 자사가 시장에서 1위 혹은 2위를 차지할 수 있는 영역이 어디인지 묻는다. 만약 그런 영역이 없다면, 어떻게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탁월할 수 있는 무대를 선택하고 그 무대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전략적 결단이다. 핵심 비즈니스에 집중하라는 조언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다. 크리스 주크와 제임스 앨런의 연구가 보여주듯, 경쟁이 치열해지거나 시장이 축소될 때 가장 현명한 전략은 핵심 역량으로 돌아가 거기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것이다. 핵심에서 벗어난 사업 다각화는 자원의 분산을 낳고, 결국 본업의 경쟁력마저 약화시킬 수 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트레이시는 아무리 훌륭한 제품이나 서비스라도 효과적인 마케팅과 판매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더 효과적으로 마케팅하고 더 효과적으로 판매하라는 원칙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고객의 관점에서 자사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재정의하고 전달하라는 요구다. 마케팅 믹스를 끊임없이 검토하고 조정하며, 시장의 변화에 맞게 메시지와 채널을 진화시켜야 한다. 그는 또한 '더 낫게, 더 빨리, 더 싸게'라는 원칙을 제시하며 운영 효율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고객에게 더 높은 가치를 제공하면서도 비용을 줄이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탐색하는 것이 장기적 경쟁력의 원천이다. 이는 단순한 원가 절감이 아니라, 프로세스와 제품, 서비스 전반에 걸친 혁신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전략적 과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아무리 훌륭한 전략도 그것을 실행할 사람이 없다면 공허한 계획에 그치고 만다. 트레이시는 조직의 재창조와 적합한 인재 선별을 전략 실행의 필수 조건으로 본다. 올바른 사람이 올바른 자리에 있을 때, 전략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특히 각자가 자신의 목표와 전략에 대해 주인 의식을 가질 때 조직의 실행력은 극대화된다. 트레이시는 장애물 제거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조직 내부에는 전략 실행을 방해하는 다양한 장벽이 존재한다. 비효율적인 프로세스, 명확하지 않은 역할 분담, 소통 부재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장애물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제거하는 것이 전략을 현실로 만드는 리더의 중요한 역할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브라이언 트레이시의 터보 전략은 복잡한 경영 환경을 헤쳐 나가기 위한 명확하고 실용적인 로드맵을 제공한다. 현재를 직시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이상적인 미래를 설계하고, 핵심 역량을 강화하며,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적응하는 과정이 전략적 성공의 본질이라는 메시지는 시대를 초월한 경영 지혜를 담고 있다. 물론 이 책이 모든 산업과 상황에 완벽하게 적용될 수 있는 만능 해법을 제시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일부 개념들은 더 깊은 탐구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보완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전략적 사고의 기본 원칙들을 간결하고 접근하기 쉬운 언어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경영자와 기업가 모두에게 훌륭한 출발점이 된다.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 자에게 미래란 없다는 말처럼, 전략적 사고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다. 트레이시가 제시하는 21가지 원칙을 자신의 상황에 맞게 적용하고 내재화할 때, 개인과 조직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89/31/cover150/897425963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893124</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중독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 - [중독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 - 숏폼, 데이팅 앱, 초가공식품은 나의 뇌를 어떻게 점령했는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7548</link><pubDate>Sat, 25 Apr 2026 11: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754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12137558&TPaperId=1723754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28/73/coveroff/k51213755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12137558&TPaperId=1723754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중독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 - 숏폼, 데이팅 앱, 초가공식품은 나의 뇌를 어떻게 점령했는가</a><br/>니클라스 브렌보르 지음, 김성훈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좋아하는 영화를 본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편안하게 앉아있지만, 어느 순간 손은 과자 봉지를 향해 뻗어 있다. 영화가 끝 날 때쯤 봉지는 비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 이 행동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흔히 이 렇게 생각한다. "내가 그냥 먹고 싶었던 거야. 내 선택이었어."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진짜 우리의 선택이었을까? 덴마크의 생명공학 연구자 Nicklas Brendborg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충동들, 즉 배 가 고프지 않아도 손이 가는 과자, 특별한 이유 없이 습관적으로 집어 드는 스마트폰, 끝없이 이어지는 소셜 미디어 스크롤이 개인의 나약함이나 의지력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이것들은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을 정밀하 게 조준한 산업의 설계물이며, 우리는 그 설계 안에서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이 개념의 기원은 인간이 아닌 새에게서 출발한다. 네덜란드의 과학자 Nikolaas Tinbergen은 조류 실험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새장 안에 자신의 알보다 훨씬 크고 선명한 색깔의 가짜 알을 넣어두었을 때, 새들은 예외 없이 가짜 알 위에 앉으려 했다. 이는 새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었다. 더 크고 선명한 알일수록 암컷의 건강 상태가 좋고 풍부한 먹이를 섭취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진화는 그 방향으로 본능을 설계해 두었던 것이다. 문제는 자연 속에는 새 자신의 몸집보다 큰 알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진화는 그 욕구에 어떠한 상한선도 설정해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Brendborg가 초자극(superstimuli)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자극보다 더 크고, 더 강렬하고, 더 집중된 형태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자극들. 그것들은 우리의 본능이 원래 반응하도록 설계된 신호를 극단적으로 모방하여, 뇌가 저항하기 어려운 반응을 끌어낸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초자극은 식품 산업에서 그치지 않는다. Brendborg는 음식, 기술, 오락 산업이 모두 동일한 논리, 즉 인간 뇌의 보상 회로를 활성화하여 더 많이 소비하게 만드는 구조 위에 설계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식품 회사들은 소비자를 뇌 스캐너에 넣고 어떤 맛의 조합이 보상 중추를 가장 강하게 자극하는지 실험한다. 포화 상태를 최대한 늦추기 위해 레시피를 조정하고, 짠맛과 단맛과 지방의 비율을 정교하게 계산한다. 제품은 우리가 충분히 먹었다고 느끼지 못하도록 설계된다. 이는 상술이 아니라 생물학적 본능을 겨냥한 정밀 공학이다. 영국 성인의 3분의 2가 과체중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은 이 설계가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에 불과하다.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도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앱의 밝은 색상은 자연에서 잘 익은 열매를 가리키던 시각적 신호를 모방한 것이다. 알림음과 빨간 뱃지는 즉각적인 주의를 요구하는 사회적 신호로 기능하며, '좋아요'와 조회수는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구를 증폭시킨다. 한두 명의 지인에게 칭찬받던 경험이 수백 명에게 동시에 인정받는 경험으로 확장되고, 뇌는 그 자극을 실제 사회적 유대와 구분하지 못한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시스템이 실시간으로 최적화된다는 점이다. 수십억 개의 사용자 데이터를 바탕으로, 거대 테크 기업들은 끊임없이 알고리즘을 수정하며 우리가 화면 앞에 더 오래 머물게 만든다. Brendborg의 표현을 빌리자면, 수천억의 자본을 등에 업은 극도로 지능적인 사람들이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 불공정한 싸움에서 개인의 의지력을 탓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전제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endborg가 제시하는 또 다른 핵심 개념은 둔감화(desensitisation)다. 특정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될수록, 우리의 감각은 점점 그 자극에 무뎌진다. 더 자극적인 맛을 원하게 되고, 더 강렬한 자극이 없으면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에 산업은 더 강한 자극으로 응답하고, 인간은 또다시 둔감해진다. 이것이 바로 악순환의 구조이다. 이 과정이 반복될수 록 현실은 점점 평범하게 느껴진다. 자연의 맛은 심심해지고, 조용한 시간은 불안해지며, 직접 마주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덜 흥미롭게 보인다. 주의력, 휴식, 관계는 스크린과 경쟁해야 하고, 현실의 사회적 유대는 소셜 미디어의 즉각적인 반응 과 경쟁해야 한다. 알고리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장 매력적이고 성공적인 사람들을 보여주며, 우리는 무의식중에 자신 을 그들과 비교하고 열등감을 느낀다. 이것이 통제라는 착각이다. 우리는 선택하고 있다고 믿지만, 비교의 기준 자체가 이 미 조작되어 있다. 우리가 욕망한다고 느끼는 것들은 사실 우리가 원하도록 설계된 것들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Brendborg는 금욕이나 강박적인 절제를 해결책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특정 음식을 금지하거나 스마트폰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그는 구조적 접근을 권한다. 즉, 의지력 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에 노출되는 환경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식단과 관련해서, 그는 역설적이게도 식사를 더 단 조롭게 만들 것을 제안한다. 다양성은 과식의 주요 요인 중 하나이며, 음식의 자극이 줄어들수록 뇌는 더 빠르게 만족 신 호를 보낸다. 실제로 한 연구에서 3개월간 설탕 섭취를 줄인 실험 참가자들은 대조군에 비해 같은 디저트를 40퍼센트 더 달게 느꼈다. 초자극에서 멀어질수록, 자연적인 자극이 다시 충분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감화는 가역적이다.<br>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루함의 복권이다. 지루함은 현대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감각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잠깐의 여백조차 채우려 하고, 침묵이 오면 곧바로 화면을 켠다. 하지만 Brendborg는 바로 그 지 루함이야말로 뇌를 재설정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소비하지 않는 시간, 아무것도 채우지 않는 공간이 우리를 다시 현실과 연결시킨다. 통제한다는 착각에서 깨어나는 것은 자책이나 포기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욕망과 중 동이 어디서 왔는지를 이해하고, 그것이 진짜 나의 것인지 묻는 것에서 시작된다. 먹고 싶어서 먹는 것과, 먹도록 설계되 어 있어서 먹는 것은 다르다. 연결되고 싶어서 소셜 미디어를 여는 것과, 열도록 훈련되어 있어서 여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설계를 완전히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설계를 이해하는 순간, 최소한의 여백이 생긴다. 그리고 그 여백 속 에서 비로소 진짜 선택이 시작된다. 통제는 강철 같은 의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던 착각을 인식하는 것에서 조용히 되찾아진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28/73/cover150/k51213755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287387</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내면 근력 - [내면 근력]</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7539</link><pubDate>Sat, 25 Apr 2026 10: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753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02137608&TPaperId=1723753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95/53/coveroff/k60213760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02137608&TPaperId=1723753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내면 근력</a><br/>짐 머피 지음, 지여울 옮김 / 윌북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우리는 흔히 리더십을 외부에서 찾는다. 더 높은 직위, 더 많은 권한, 더 뛰어난 전략. 성과 지표를 달성하고, 팀을 이끌며, 조직을 성장시키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오랫동안 수많은 리더들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한 가지 공통 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오래도록 흔들리지 않고 탁월함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기술이나 전략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남들과는 다른 '내면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2025년 1월, NFL 와일드카드 경기 도중 필라델피아 이 글스의 와이드리시버 AJ 브라운이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경기 중에. 그 책은 짐 머피(Jim Murphy)의 &lt;Inner Excellence&gt;였다. 그 한 장면은 엄청난 화제거리였다. 하나의 메시지였다. 진정한 탁월함은 경기장 밖, 즉 내면에서부터 준비된다는 것이다. 책은 이 메시지에서 출발한다. 내면 근력이란 무엇인가. 왜 그것이 현대의 리더 에게, 아니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키워갈 수 있는가.<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근력'이라는 단어는 본래 신체적인 힘을 뜻한다. 근육이 저항을 이겨내는 힘. 그런데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저항은 신체 적인 것만이 아니다. 실패의 두려움, 타인의 시선, 불확실한 미래, 끊임없이 속삭이는 자기 의심의 목소리. 이 모든 심리적 저항을 이겨내는 힘, 그것이 바로 내면 근력이다. 내면 근력은 긍정적 사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잘 될 거야'라고 되뇌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내면 근력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면서도 그 현실에 압도되지 않는 능력이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상태다. 폭풍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폭 풍 속에서도 춤출 수 있는 능력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짐 머피는 이를 '탁월한 수행 능력'의 핵심으로 본다. 외부 조 건이 완벽하게 갖춰졌을 때만 최선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능력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오늘 컨디션이 최악이더라도,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가진 것 안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내면 근력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선물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내면 근력을 이야기할 때 피해갈 수 없는 주제가 있다. 바로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나쁜 것이 아니다. 두려움은 본래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감정이다. 뜨거운 불 앞에서 움츠러드는 것, 낭떠러지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것. 이런 두려움은 생존을 위한 지혜다. 문제는 우리의 뇌가 물리적 위협과 심리적 위협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회의실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것, 실패할 수도 있는 도전에 뛰어드는 것, 진심을 담아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 이런 순간에도 뇌 는 동일한 경고 신호를 보낸다. "위험하다. 멈춰라."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길을 선택한다. 익숙한 것, 예측 가능한 것, 실패할 가능성이 낮은 것. 이 길은 분명히 편안하다. 그러나 편안함에는 대가가 따른다. 성장의 포기, 가능성의 축소,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이게 전부인가'라는 공허함이다. 머피는 두려움의 본질을 '자기중심성(self-centeredness)'에서 찾는다. 이것은 이기심과는 다르다. 지나치게 자신의 실패, 자신의 평판, 자신의 고통에 집중한 나머지, 더 넓은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되는 상태다. 내가 어떻게 보일까, 틀리면 어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이 좁은 시야 속에서 두려움은 더욱 크게 자란다. 반면, 자신의 시선을 더 큰 무언가로 돌릴 때, 두려움은 조금씩 그 힘을 잃는다. 이것이 역설이다. 나 자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오히려 나는 더 강해진다. 내면 근력은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두려 움보다 더 강한 무언가를 내면에 키우는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현대의 삶은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스마트폰 알림, 끊임없는 업무 메시지, 뉴스 피드,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내면의 소음. 머피는 이 내면의 소음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내면의 비평가(Inner Critic)다.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지난번에도 실패했잖아." 이 목소리는 우리가 가장 용기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가장 크게 들린다. 결정을 앞두고, 발표를 앞두고, 중요한 대화를 앞두고. 이 목소리는 과거의 실패와 상처로 만들어진 경고 시스템이지만, 그것이 현재의 우리를 정의하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된다. 두 번째는 산만한 마음(Monkey Mind)이다. 원숭이가 나뭇가지에서 나뭇가지로 쉼없이 뛰어다니듯, 우리의 마음은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걱정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대화, 지금 이 일에 완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 분산된 주의력은 리더십의 질을 떨어뜨리고, 관계의 깊이를 얕게 만들며, 판단 력을 흐린다. 세 번째는 기만하는 마음(Trickster)이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 내일 하면 되잖아. 지금 상황이 적절하지 않아." 이 목소리는 교묘하게 합리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회피가 있다. 어렵고 불편한 것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충동이 이성적인 언어로 포장된 것이다. 이 세 가지 마음의 소음에 공통적으로 효과적인 처방은 알아차림(awareness)이다. 그 목소리가 들릴 때,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 "아, 지금 내 내면의 비평가가 말하고 있구나.""이것은 원숭이 마음의 소음이야."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목소리와 나 사이에 공간이 생긴다. 나는 그 생각이 아니라, 그 생각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된다. 그리고 그 공간 속에서 비로소 선택이 가능해진다. 내면 근력은 이 공간을 만드는 능력이다. 자극과 반응 사이 의 그 찰나의 공간을 넓히는 능력.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의 극한 상황 속에서 발견한 그 자유.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 속에 우리의 성장과 자유가 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내면 근력은 한 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의 작은 선택들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95/53/cover150/k60213760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955379</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히든 사이드 - [히든 사이드 - 손해 보지 않고 똑똑하게 살아내는 행동경제학 수업]</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7522</link><pubDate>Sat, 25 Apr 2026 10: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752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32137646&TPaperId=1723752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60/1/coveroff/k83213764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32137646&TPaperId=1723752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히든 사이드 - 손해 보지 않고 똑똑하게 살아내는 행동경제학 수업</a><br/>정태성 지음 / 더블북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주식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스스로를 꽤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다. 뉴스를 챙겨보고, 재무제표를 훑어보고, 전문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결과는 늘 비슷했다. 사면 떨어지고, 팔면 올랐다. 처음엔 운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엔 시장이 이상하다고 했다. 세 번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의심하기 시작했다. 혹시 문제가 시장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는 건 아닐까. &lt;히든 사이드&gt;는 바로 그 의심에 정확하게 답을 건네는 책이다. 저자 정태성은 책을 통해 우리가 반복적으로 틀린 선택을 하는 이유가 정보의 부족이나 지능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원인은 훨씬 더 근본적인 곳에 있다. 그것은 인간의 뇌가 태생적으로 지닌 인지의 구조, 즉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작동하는 수많은 편향과 심리 패턴이다. 책의 제목처럼, 우리의 판단을 실제로 이끄는 것은 눈에 보이는 논리가 아니라 숨겨진 심리의 이면, 바로 '히든 사이드'다. 인간은 스스로를 이성적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한다. 우리는 충분히 생각하고, 따져보고, 결론을 내린다고 느낀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은 그 믿음에 조용히 균열을 낸다. 실제로 인간의 의사결정은 논리보다 감정이, 분석보다 직관이 훨씬 먼저 작동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감정과 직관은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생존에는 유리했을지 몰라도 현대의 복잡한 경제 구조 속에서는 오히려 우리를 함정으로 이끄는 경우가 더 많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에서 가장 먼저 마음을 두드린 개념은 '확증 편향'이었다. 우리는 자신이 이미 믿고 싶은 것을 뒷받침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어떤 종목이 오를 것 같다는 확신이 생기면, 그 이후에는 오를 것이라는 뉴스만 눈에 들어오고, 위험 신호는 자연스럽게 흘려보낸다. 이것은 의도적인 외면이 아니다. 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래서 확신은 강해지고, 판단은 점점 좁아지고, 결국 손실은 깊어진다. 이와 함께 손실 회피 본능은 투자에서 가 장 치명적인 심리 중 하나다. 인간은 100만 원을 버는 기쁨보다 100만 원을 잃는 고통을 약 두 배 더 크게 느낀다고 한다. 이 비대칭적인 감각이 우리를 어떻게 왜곡시키는지를 생각해보면 소름이 돋는다. 이미 손실이 난 종목을 팔지 못하는 것, ‘물타기'를 반복하는 것, 손해를 확정짓는 그 순간이 너무 두려워 더 큰 손실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것 등 이 모든 행동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우리 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문제는 그 반응이 금융 시장에서는 독이 된다는 사실이다. 책이 투자 심리 가이드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같은 원리를 일상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건을 살 때, 정치적 뉴스를 접할 때, 사람을 판단할 때,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선택할 때조차 히든 사이드는 작동하고 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마트에서 9,900원짜리 상품을 보며 '싸다'고 느끼는 것, 한정 수량이라는 문구 앞에서 갑자기 손이 빨라지는 것, 이것은 단순한 소비 행태가 아니다. '기준점 효과'와 '희소성 편향'이라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정교하게 작동한 결과다. 우리는 절대적인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와 감각에 의해 가치를 인식한다. 그리고 마케터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치와 사회의 영역에서도 다르지 않다. 가짜 뉴스가 사실보다 빠르게 퍼지는 이유, 혐오와 갈등이 이성 적 토론보다 더 쉽게 확산되는 이유, 그 답 역시 같은 곳에 있다. 인간은 사실에 반응하기 전에 감정에 먼저 반응한다. 분노와 두려움은 공유를 자극하고, 공유는 확산을 낳고, 확산은 사실처럼 보이는 거짓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의도치 않게 조작의 일부가 된다. 책을 읽으며 가장 불편했던 부분은 역설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이 모든 편향은 '나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논리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도, 심지어 행동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조차 이 편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지식이 면역을 주지는 않는다. 다만 인식이 잠시 멈출 수 있는 기회를 줄 뿐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멈춤'이다. 어떤 선택의 순간, "지금 내가 무언가에 끌려가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질문하는 능력. 군중이 환호할 때 거리를 두고, 공포가 퍼질 때 냉정을 유지하고, 확신이 강해질수록 오히려 반대 증거를 찾아보는 습관. 이것이 책이 궁극적으로 가르치려는 태도다. 우리는 지금 AI와 알고리즘이 일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유튜브는 내가 좋아할 영상을 끊임없이 추천하고, 쇼핑 앱은 내가 살 것 같은 물건을 먼저 보여주며, 뉴스 피드는 내 성 향에 맞는 정보만 걸러서 제공한다. 이 구조 속에서 확증 편향은 더욱 강화되고, 우리의 세계관은 점점 좁은 거품 안에 갇힌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의 판단은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정교하게 설계된 유도 안에 놓이게 된다. 히든 사이드는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한 책이다. 단순히 심리학 지식을 쌓으라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우리의 선택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를 직시하고, 그 앎을 바탕으로 조금 더 의식적으로 살아가라는 권유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을 덮고 나서 나는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과거의 실패들이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였다. 그건 운이 나빠서도, 시장이 나빠서도 아니었다. 내 안의 패턴이 반복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패턴을 안다면, 이제는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논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비논리에는 일정한 구조가 있다. 그 구조를 이해하는 사람은 더 이상 같은 자리에서 넘어지지 않는다. &lt;히든 사이드&gt;는 그 구조를 보는 눈을 건네주는 책이다. 똑똑하게 살아내는 것은 더 많이 아는 것 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더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60/1/cover150/k83213764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600109</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 릴케 시 필사집 -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 릴케 시 필사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2642</link><pubDate>Wed, 22 Apr 2026 19: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264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7639&TPaperId=1723264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19/47/coveroff/k71213763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7639&TPaperId=1723264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 릴케 시 필사집</a><br/>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배명자 옮김 / 나무생각 / 2026년 04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파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처음에는 그냥 베끼는 일이라 생각했다. 종이 위에 남의 문장을 옮겨 적는 일, 손목이나 조금 피로하겠거니 하고 펜을 들었다. 하지만 릴케의 첫 행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무언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손끝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글자 하나하나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받침 하나, 쉼표 하나에서 멈추게 된다. 활자로 읽을 때는 눈이 미끄러지듯 지나쳐 버렸던 것들이, 손으로 쓸 때는 발목을 잡는다. 필사를 시작한 건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어수선한 계절의 끝 무렵, 오래 묵혀두었던 노트 한 권을 꺼냈다. 마침 읽고 있던 릴케의 시집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고, 나는 별 생각 없이 첫 구절을 따라 적기 시작했다. 그것이 계기라면 계기였다. 목적도, 의지도 아닌 그냥 손이 먼저 움직인 것이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그래요, 그대를 그리워합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나를 잃어가며<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내 손에서조차 나를 놓습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 릴케, 사랑에 빠진 여인<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쓰다가 한참을 멈췄다. 내 손에서조차 나를 놓는다. 손으로 쓰고 있는 나는, 지금 내 손에서 무엇을 쥐고 있는 것인지, 또는 놓아버리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릴케의 말은 그렇게 작동한다. 읽는 사람의 내부에 들어와, 본래 그 사람의 것이었던 무언가를 건드린다. 마치 오래된 서랍을 열었을 때 잊고 있던 물건이 나오는 것처럼.<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릴케는 자신의 묘비에 짧은 시 하나를 남겨달라고 유언했다 한다. 스위스의 어느 작은 마을, 그의 무덤 앞에 서면 그 말을 직접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장미와 모순과 눈꺼풀에 관한 말. 나는 아직 그 무덤 앞에 가본 적이 없지만, 필사하는 동안 여러 번 그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말들을 내 손이 다시 한 번 세상에 쓴다는 것이 묘하게 엄숙하고, 또 묘하게 가까웠다. 죽음 직전까지도 그는 장미 가시에 찔린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백혈병으로 떠난 그가 장미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이 돌 만큼, 그의 삶과 장미는 하나의 이미지로 엉켜 있다. 필사하면서 나는 자꾸 그 장면을 상상하게 되었다. 꽃을 꺾으려 손을 뻗는 시인의 손목. 붉어지는 피부. 그리고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눈빛. 아름다운 것을 가까이하려다 상처를 입는 일. 그것이 시를 쓰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필사를 마친 노트를 덮으면서 나는 무언가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지식이나 교훈 같은 것이 아니다. 더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말의 무게를 손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 시인이 고른 단어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침묵이 담겨 있는지를, 읽어서는 알 수 없고 써봐야만 알 수 있다는 것. 릴케는 인간 존재의 고독과 아름다움과 죽음을 노래했지만, 그것이 추상적인 주제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의 언어가 몸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그 언어를 손으로 받아 쓰는 동안, 나도 잠시 그 통로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오늘도 노트를 편다. 펜을 고른다. 그리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한 줄을 찾는다. 내가 고르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의 내가 필요로 하는 한 줄이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들이 있다. 그런 날, 나는 릴케가 백 년 전 어딘가에서 손수 쓴 것처럼, 조금 천천히, 한 글자씩 받아 적는다. 그 느린 시간이 하루에서 가장 고요한 시간이 되어가고 있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19/47/cover150/k71213763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194710</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부의 자율주행 : AI MONEY FLOW - [부의 자율주행 : AI MONEY FLOW - 하류 인생을 거슬러 부의 상류로 도약하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2606</link><pubDate>Wed, 22 Apr 2026 19: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260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22137107&TPaperId=1723260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6/0/coveroff/k22213710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22137107&TPaperId=1723260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부의 자율주행 : AI MONEY FLOW - 하류 인생을 거슬러 부의 상류로 도약하라</a><br/>AI 머니(이진재) 지음 / 모티브 / 2026년 03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어릴 때부터 우리는 하나의 공식을 주입받으며 자랐다.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사회도 그 말을 의심 없이 반복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믿었다.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늦게 잠들고, 더 많은 것을 배우면 언젠가는 반드시 보상이 온다고 배웠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열심히 살아왔는데, 왜 통장 잔고는 제자리인가? 왜 몸은 점점 지쳐가는데, 삶의 여유는 오히려 줄어드는가? 왜 더 바쁠수록 더 가난해지는 느낌이 드는가? 저자는 바로 그 불편한 질문에 정면으로 답한다. 그리고 그 답은 생각보다 훨씬 근본적인 곳에서 출발한다. 문제는 노력의 양이 아니라, 구조의 부재였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많은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한 채 하나의 함정 속에서 살아간다. 그 함정의 이름은 '시간을 파는 삶'이다. 직장인은 하루 8 시간, 자영업자는 하루 12시간, 프리랜서는 프로젝트 단위로 자신의 시간을 돈과 교환한다. 표면적으로는 서로 다른 삶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같다. 일을 멈추는 순간 수입도 멈춘다. 아프면 돈이 끊기고, 쉬면 불안해진다. 이 구조는 인간을 끊임없이 소모시키는'노동의 트레드밀'이다. 더 무서운 것은 이 트레드밀이 가속된다는 점이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더 많은 기술을 배우고,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하고, 더 많은 에너지를 소진한다. 그러나 트레드밀 위에서 아무리 빨리 달려도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성장'이라 부르지만, 실은 소모의 가속화일 뿐이다. 책이 말하는 핵심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한다.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고, 몸은 소모되며, 노동력에는 반드시 한계가 온다. 그렇다면 그 한계를 전제로 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더 열심히 달리는 것이 아니라, 트레드밀에서 내려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저자가 제시하는 통찰 중 하나는 돈은 버는 것이 아니라 흐르게 만드는 것"이라는 명제다. 이것은 단순한 표현의 차이가 아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이다. 강물은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흐른다. 상류에 위치한 사람은 물이 저절로 모이는 구조 속에 있고, 하류에 위치한 사람은 끊임없이 물을 길어 올려야 한다. 노동 기반의 삶은 하류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행위다. 구조 기반의 삶은 상류에 댐을 놓고, 물이 저절로 모이고 흐르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행위다. 이 비 유는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더 좋은 바가지를 구하고, 더 빠른 팔 동작을 익히는데 집중하기 때 문이다. 아무도 왜 하류에 있어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하지만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돈을 '흘러가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자산에 대한 이해도 바꾼다. 수입이 들어와서 소비로 빠져나가는 구조에서는 돈은 항상 사라진다. 그러나 수입이 들어와 콘텐츠로, 데이터로, 디지털 자산으로 축적되는 구조에서는 돈은 흐름을 만드는 관 이 된다. 즉, 오늘 내가 만든 콘텐츠 하나가 내일의 수익을 만들고, 그 수익이 또 다른 구조를 낳는 복리의 시스템이 작 동하기 시작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AI의 등장이 구조 설계의 장벽을 극적으로 낮췄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자동화된 수익 구조를 만들기 위해 개발자가 필요했고, 마케터가 필요했고, 운영 인력이 필요했다. 그것은 자본이 있는 사람들만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AI는 콘텐츠를 생성하고, 고객의 질문에 응답하며, 데이터를 분석하고, 반복적인 운영 업무를 처리한다. AI는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능력을 수십 명 수준으로 확장시키는 도구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레버리지'의 핵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AI를 편리한 도구로만 쓰는 것과, AI를 시스템의 엔진으로 설계하는 것 사이의 차이다. 전자는 AI를 쓰는 사람이고, 후자는 AI가 일하는 구조를 만드는 사람이다. 이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진다. 블로그 하나, 유튜브 채널 하나, 뉴스레터 하나가 검색 알고리즘과 추천 시스템이라는 '수로'를 타고 자동으로 유입을 만들어낸다. 광고 수익, 디지털 상품, 구독 모델이 여러 갈래의 파이프라인을 형성한다. 이것이 완 성되면 잠을 자는 동안에도,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구조가 작동한다. 이것이 바로 '부의 자율주행' 상태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책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해방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묘한 불편함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까지 잘못된 게임을 열심히 해왔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 열심히 일하면 된다고 믿었던 시간들. 그 믿음 자체가 나를 하류 에 묶어두는 족쇄였을지 모른다. 노력은 미덕이다. 그러나 잘못 설계된 구조 안에서의 노력은 소모일 뿐이다. 책이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술도, AI도, 특정 수의 모델도 아니다. 이 책의 본질적인 메시지는 사고방식의 전환이다. 노력하는 사람에서 설계하는 사람으로, 소비하는 시간에서 축적하는 구조로, 당장의 수입에서 지속적인 흐름으로 바꾸는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미래의 부는 가장 오래 일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먼저 구조를 이해하고 설계를 시작한 사람에게 귀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 오늘, 지금,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하나의 자산으로 전환하려는 작은 결심 하나면 충분하다. 나는 더 이상 시간을 팔지 않기로 했다. 대신, 흐름을 설계하기로 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6/0/cover150/k22213710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760069</link></image></item><item><author>koogi386</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포닝 - [포닝 - 끝없이 나를 타인에 맞추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심리학]</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2600</link><pubDate>Wed, 22 Apr 2026 19:2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7015249/1723260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22138769&TPaperId=172326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38/57/coveroff/k32213876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22138769&TPaperId=1723260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포닝 - 끝없이 나를 타인에 맞추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심리학</a><br/>잉그리드 클레이튼 지음, 최시은 옮김, 김현수 감수 / 센시오 / 2026년 05월<br/></td></tr></table><br/>*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회의실 안에서 팀장이 별로 재미없는 농담을 던졌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때 나는 웃었다. 크게, 자연스럽게. 마치 그 말이 정말 재치 있었던 것처럼. 자리로 돌아오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웃었을까? 공포 때문도 아니었고, 아부를 계획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몸이 먼저 반응했다. 상대방이 불편해지지 않도록,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어쩌면 내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도록. 이 무의식적인 반응에 요즘 심리 학계와 소셜미디어는 하나의 이름을 붙이고 있다. 포닝(fawning), 아첨하듯 비위를 맞추는 반응, 혹은 '새끼 사 슴 반응' 이다. 포닝이라는 개념은 원래 심리치료사 피트 워커(Pete Walker)가 트라우마 반응의 한 유형으로 제안한 것이다. 우리가 위협을 마주했을 때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얼어붙거나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은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고 자신을 지우는 방식으로 위험에서 살아남으려 한다. 힘 있는 사람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혹은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혹은 그냥 공기처럼 존재하기 위해, 이것이 포닝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포닝이 트라우마 반응이다. 폭력적이거나 불안정한 양육자 밑에서 자란 아이는 일찍부터 배운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고. 분노도, 슬픔도, 심지어 기쁨조차도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독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아이는 자신의 내면을 지우고, 상대방의 기분을 읽는 데 모든 감각을 집중한다. 이 생존 전략은 놀랍도록 효율적이다. 폭풍우를 예측하고, 상대방의 미소 뒤에 숨은 냉기를 감지하며, 분위기가 나빠지기 전에 먼저 움직인다. 문제는 이 전략이 위기 상황을 벗어난 뒤에도 계속된다는 점이다. 몸은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일상 속에서 도 경보를 울린다. 직장 동료의 한숨 소리, 연인의 짧은 문자 답장, 친구의 표정 변화. 뇌는 이것들을 위협으로 등록하고, 몸은 반사적으로 상대방을 달래는 쪽으로 움직인다. 그것이 싫어하는 선물에 "너무 예쁘다"고 말하는 것이든, 가기 싫은 자리에 "당연히 가야지"라고 답하는 것이든. 흥미로운 것은 포닝이 참거나 억누르는 행동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종종 진심처럼 느껴진다. 포닝하는 사람은 자신이 거짓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실제로 상대방을 위한다고 믿고, 배려한다고 느끼며, 자신의 바람이 사라진 자리에 타인의 바람을 채워 넣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 잊어버린다. 좋아하는 색깔조차 떠올릴 수 없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혹은 나는 존재하기는 하는가?<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포닝 개념이 요즘 이토록 공명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역할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 웃어야 할 것 같아서 웃고, 도와야 할 것 같아서 돕고, 좋아해야 할 것 같아서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 누 적된 피로감 속에서 "사실 당신은 괜찮아. 당신이 지쳐있는 건 트라우마 때문이야"라는 말은 엄청난 해방감을 준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 개념을 접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다. 드디어 내가 설명됐다는 안도감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포닝에서 벗어나는 것', 즉 언포닝(unfawning)의 처방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자신의 욕구를 먼저 살피고, 하기 싫은 것을 거절하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것은 분명 건강한 지향이다. 그러나 이 처방이 지나치게 확장될 때, 이상한 역설이 생겨난다. 자선 기부조차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행동인지 점검하라는 조언, 남의 강아지를 봐주는 것도 진심으로 원하는지 되물어야 한다는 권고. 모든 이타적 행동이 의심의 대상이 된다. 친절이 병의 증상이 된다. 이는 개인주의와 자기계 발 담론이 익숙하게 걸어온 길이다. 스스로를 돌보라는 메시지는 언제부터인가 타인을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면죄부로 미끄러진다. 소셜미디어에는 약속을 취소하는 것을 자기돌봄이라 정당화하는 인포그래픽이 넘쳐나고, 공감 능력을 '연약함의 징표'로 비하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포닝 담론이 무비판적으로 이 흐름에 합류할 때,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고립이 된다. 나라는 주인공만 남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배경으로 흐릿해진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포닝 개념이 우리에게 가장 정확하게 짚어주는 것은 우리에게는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미리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그 두려움을 관리하려 한다. 포닝은 연결에 대한 갈망이 뒤틀린 형태다. 사랑받기 위해 사랑받을 자신을 없애버리는 것이다.<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br style="font-family: Roboto, &quot;Noto Sans KR&quot;, &quot;PingFang SC&quot;, &quot;Apple SD Gothic Neo&quot;, &quot;Microsoft YaHei UI&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font-size: 14px; letter-spacing: -0.14px;">그렇다면 해답은 연결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더 정직한 연결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상대방이 날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내가 진짜로 느끼는 것을 내보이는 것. 친절이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진심에서 흘러나오도록 내면의 원천을 다시 찾는 것. 상대방의 농담이 재미없을 때, 웃지 않아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조금씩 배우는 것이다. 철학자 아이리스 머독은 사랑이란 "자신 이외의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지극히 어려운 과정"이라고 했다. 포닝에서 벗어나는 일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타인을 달래기 위해 자신을 지우지 않고, 그렇다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지우지도 않으면서, 둘 다 실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어렵고도 필요한 연습. 그것이 사슴이 숲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일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38/57/cover150/k32213876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385746</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