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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터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파우스터 (2019년 초판)
저자 - 김호연
출판사 - 위즈덤하우스
정가 - 16800원
페이지 - 542p
부유한 노인네의 위험한 비밀놀이
자신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무궁무진한 재능을 가진 젊은이들의 뇌에 전송장치 심고 막대한 부를 휘두르는 노년의 노인들에게 돈을 받고 젊은이들의 오감을 직접 체험하게 하는 메피스토 컴퍼니의 파우스트 시스템...죽음을 앞둔 노인네들은 자신들의 꼭두각시...파우스터인 젊은이들을 조종하여 인생의 목표를 성취하게 만들고 젊은이들이 느끼는 성취감에 빨대를 꽂아 인생을 도둑질한다.
메이저 리그 진출을 앞둔 국내 최고의 투수 준석은 느닷없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급히 병원에 실려간다. 다행히 가벼운 찰과상만 입고 정신을 차린 준석 앞에 나타난 의문의 여인은 준석에게 10년간 그의 인생이 모두 가짜였다는 말과 함께 휴대폰을 남기고 사라진다. 자신의 피땀흘린 노력과 성공이 오로지 자신이 이룩한 것이 아님을 자각한 준석은 자신을 조종하는 파우스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메피스토 컴퍼니를 무너뜨리기 위해 남은 인생을 걸고 위험한 도박을 시작하는데....
제목부터 '괴테'의 고전 [파우스트]를 모티브로 했다는것을 알 수 있는데, 고전 [파우스트]는 못읽어 봤지만 노인이 젊음을 사기 위해 악마와 거래를 한다는 정도는 이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을것 같고 두 작품의 공통된 소재라는것도 유추할 수 있었다. 다만 21세기의 파우스트는 좀 더 사회적이고 구체적이며 악랄하다는것이 다를뿐...파우스터 시스템...세상의 유희는 시들해지고, 인생의 쓴맛 단맛 다보고 막판엔 다 쓰지도 못할 돈만 남은 노인네들에겐 굉장히 달콤한 유혹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작품 소개를 봤을땐 젊은이의 뇌로 접속하여 육체를 빼앗는 SF일거라 예상했는데, 작품속 파우스트(노인)와 파우스터(젊은이)의 관계는 예상보다는 좀 더 제약적인 관계였다. 파우스터 시스템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1. 메피스토 컴퍼니에서 재능 많은 파우스터 후보들을 몰카로 찍은 영상을 보여준다.
2. 노인네는 마음에 드는 파우스터를 찍고 수십억의 계약금을 지불
3. 노인네가 집에서 파우스트 헬멧을 쓰면 파우스터의 뇌에 심어진 전송칩을 통해 시각과 촉각을 포함한 뇌의 감정들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4. 파우스트는 파우스터와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없으며 메피스토라는 메피스토 컴퍼니의 도우미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다.
5. 파우스터의 성공을 위해 메피스토에게 돈을 주면 메피스토는 파우스터의 성공을 위한 주변 환경을 셋팅하여 파우스트의 인생을 조종한다.
6. 3개월마다 노인네들이 모여서 가장 높은 성취감을 느끼게 조종한 노인네를 선발하고, 다음 모임에 1등 예상자에게 배팅을 건다.
사실 조금 갸우뚱 한게...작품속 파우스트 시스템이란게 너무나 불편하고 너무나 즉흥적이고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젊은이들의 뇌와 접속해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의사결정권을 쥐고 있는것은 아니고 그냥 도둑놈 처럼 몰래 엿보는 것일뿐. 막대한 돈을 들여 주변 환경을 셋팅은 한다지만 한사람의 인생을 마음대로 한다는게 어디 그리 쉬운일이랴...-_- 그런 답답함을 인내로 극복하고 거기에서 회춘의 쾌락을 찾는 노인네들이 악마라기 보단 생즉불로 보일정도 였다.
어쨌던, 작품에서 파우스트와 파우스터의 관계는 [프린세스 메이커] 같은 게임속 육성형 시뮬레이션의 현실화에 인간의 관음적 욕구를 적절히 짬뽕한 관계로 보면 될 것 같다. 그렇다면 노인네들은 이런 비효율의 극치인 파우스팅에 왜그리 집착하는가...왜그리 커다란 성공에 목을 메는가? 생각해보니 현실의 육체는 제기능을 못하고 그동안 쌓은 권력과 부로 기존의 쾌락과 자극은 익숙해진 상태...그때 젊은이의 뇌속에서 느끼는 성취의 자극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할 만큼, 생의 의지를 다시금 불어넣을 에너지로 가득차 있지 않을까?...이런 생각을 해봤다. 박사가 아주 어려운 수학 난제를 수십시간 수십일에 걸쳐 풀어냈을때의 성취감과 미취학 아동이 1+1=2 라는 아주 간단한 산수 이론을 깨우쳤을때의 성취감의 차이를...무섭도록 활발히 운동하는 뇌에서 생산되는 성취감과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과 각종 호르몬들이 마약보다 더욱 커다란 쾌락을 이끌어 내고, 그 감각에 노인네들은 차츰 차츰 중독되고 마는 것이리라...머..젊은이들이 느끼는 섹스의 오르가즘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고..그러니 노인네들이 재산을 다 탕진할정도로 파우스터에게 집착하고 그들의 성공을 이뤄내려는 것이겠지...
작품은 도망치려는 파우스터 준석과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파우스트 노인네 태근의 쫓고 쫓기는 반전과 역전의 이야기가 숨가쁘게 펼쳐진다. 물론 준석과 태근외에도 다른 조종자와 꼭두각시들을 등장시키면서 여러 생각지 못한 사건들을 통해 파국의 결말로 치달아간다. 현실 세상의 스폰관계를 극단적으로 비꼬는 사회비판적 성격을 띄면서 고전 [파우스트]를 SF적 상상력으로 변용하여 만들어 가는 이야기는 신선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지만 그래도 SF라는 장르를 달고 나온 작품인만큼 가장 중심이 되는 파우스팅 시스템의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설정의 결여는 다소 아쉬운 느낌이 든다. 얼마전 봤던 공포영화 [US] 처럼 하나 하나 뜯어보면 구멍투성이지만 일단 그런건 차치하고 독특한 설정과 분위기로 밀고 나가는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분량을 좀 줄이고 속도감을 높였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대중적 재미를 갖고 있는 SF 스릴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