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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4월
평점 :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2019년 초판)
저자 - 임성순
출판사 - 은행나무
정가 - 14000원
페이지 - 248p
장르종합선물세트
때때로 아무생각 없이 전혀 기대하지 않고 집어든 작품에서 레전드급 재미를 경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로지 감과 느낌에 의지한 초이스와 그 감이 맞아 떨어졌을때의 기분좋은 쾌감...그리고 내겐 무명이었던 아무개 작가는 완소작가로 거듭나게 된다. 바로 이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번도 들어본적 없는 처음 접하는 작가이기에 작품에 대해 어떠한 사전 지식도 없었고 오로지 띠지의 "블랙코미디, 디스토피아, 오컬트, 패러디……"라는 문구에 끌려 서평단을 신청한 책인데, 그 막연한 기대감이 완전히 적중한 것이다.
그동안 장르문학 앤솔러지나 출판사 공모에 투고했던 단편들과 이 단편집을 위해 새롭게 써낸 단편을 모아 6가지 독특한 발상의 강렬한 색체를 띈 작품집으로 독자를 맞이한다. 공포와 호러, SF를 넘나들며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선보이는 극단적 세계와 그 안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발버둥치는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들이 무섭도록 날카로운 사회 비판의 칼날로, 웃픈 블랙코미디로, 잔혹한 크로테스크 호러로, 외로운 쓸쓸함으로...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개성넘치는 독특한 매력을 선사한다.
1. 몰:mall:沒
군제대 직후부터 기울어진 집안을 위해 노가다 판에 뛰어든 일용직 청년에게 새롭게 떨어진 임무...정부관리자와 경찰이 지켜보는 앞에서 건물 잔해를 파헤쳐야 한다...
-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건물 잔해를 난지도로 실어와 그곳에서 시체와 잔해를 분리했다는 짧막한 신문기사를 모티브로 쓰인 작품이라고 한다. 물론 작품안에서 '삼풍'이라는 직접적 언급은 없다. 다만 당시 엄청난 희생자를 낳았던 이 전대미문의 사고를 축소, 은폐하려는 국가의 만행과 잔혹한 현실 앞에서 멘탈이 붕괴되어가는 사회 초년생의 모습이 비극으로 가슴을 후벼판다. 대형사고 후 망각....그리고 또다시 인제로 인한 대형사고가 터지는 한국사회 특유의 무능력한 위기대응 로테이션은 이후에도 계속되니까 말이다...
2.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
신인 미술작가들을 발굴하고 이 작품들을 부유층에 고가에 팔아넘기는 미술 브로커였던 남성은 뜻하지 않은 예술작품 탈세 사건에 연루된 후 쭈욱 내리막길을 달린다. 이혼에 파산위기에도 정신못차린 남성은 해외로 시장을 넗힌다며 미국으로 떠나고, 예술관계자들이 참석한 파티에서 우연히 기묘한 전시회에 관해 듣게된다. 프라이빗하고, 강렬하고, 위험한 전시회 '회랑을 배회하는 양떼와 그 포식자들'에 관심이 동한 남성은 전시장을 찾아가는데....
- 영화 [상류사회]에서 특권의식을 가진 상류층 사람들이 예술의 본질을 호도하고 권력과 부의 도구로 사용하던 장면이 떠오른다...AV배우 '하마사키 마오'의 육체로 그려낸 미술작품을 보고 현웃터졌었는데, 작품 초반엔 거품이 잔뜩낀 미술업계의 현실을 냉혹하게 비판하는 사회비판물로 가는가 싶더니 비밀에 쌓인 전시회가 언급되면서 부터는 하드고어 호러로 분위기 급변한다. 후반부의 이야기는 '오쓰이치'의 단편집 [메리 수를 죽이고]에서 마지막 단편 [에바 마리 크로스]와 비슷하면서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이 떠오르는...비밀스럽고 음침하고 그로테스크한 피의 축제가 벌어진다. 예술과 오컬트 악마숭배가 뒤섞인 웨스턴 공포 단편이었다.
3. 계절의 끝
종말학자를 남친을 위한 목숨건 단심가
- 사회비판, 하드고어를 잇는 이번 작품은 SF...무려 포스트 아포칼립스다. 의문의 사고와 함께 2년간의 겨울이 찾아오고 생존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는 주인공 여성의 고군분투가 아련한 일상적 남친과의 에피소드라는 전혀 상반된 분위기 속에서 교차된다. 전지구에 몰아친 극한 상황과 한 생존자의 애틋한 사랑이란 급격한 갭의 차이만큼 뛰어난 몰입감과 감정이입이 되는 작품이었다. 작품속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든 종말의 이유가 공교롭게도 얼마전 들었던 인기팟캐 '엘랑'작가의 [우주별곡]의 Ep.14~15에서 다뤘던 [대멸종 시나리오 TOP 7] 중 한가지 이유가 다뤄지니 이 어찌 신기한 우연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단편속 종말을 야기하는 대멸종 인자는 팟캐의 몇 위일지..ㅎㅎㅎ 익숙한 소재지만 그 익숙함이 친숙함으로 다가온다.
4. 사장님이 악마예요
악마 사장님 아이를 갖고 싶습니다!
- 이 지옥같은 시대에서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건 어쩌면 지옥보다 더한 불지옥을 걷는것일지도
모르겠다. 코믹한 사회풍자와 촌철살인 그리고 오컬트...-_- 이 작품집을 위해 쓰여진 단편인데, 급하게 쓴 탓인지 중도에 끊은듯한 결말이 아쉽다. 좀 더 딥하고 극악의 오컬트를 보여줬어도 좋았을듯...
5. 불용(不用)
마음이 구멍난 열쇠수리공의 이야기
- 6편의 단편중 가장 감성적이고 쓸쓸한 작품이다. 세상과 단절된 주인공이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법은 '자물쇠 없는 열쇠'를 깎는 일이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상처받고 상처받던 주인공은 급기야 가슴에 구멍이 나버리고...이 텅빈 구멍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까...작가 자신의 감정이 묻어있는 작품이라는 설명이 좀 더 작품을 와닿게 한다. 나의 구멍난 마음속엔 어떤 물건들이 담겨 있을지 생각해 본다.
6. 인류 낚시 통신
인류의 휴머니즘 실현을 위해...인류를 낚는다.
- 작품을 읽고 작가 후기를 보고나서야 이 작품이 [은어낚시통신]이라는 작품의 패러디(혹은 오마쥬)라는걸 알았다. 상당히 원작과 대구를 맞추려 공들인듯 한데, 원작을 전혀 모르니 100% 즐겼다고는 볼 수 없겠구나....허나 패러디의 원소스를 모른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건 없던것 같다. 패러디던 오마쥬건 비틀기던 작품을 통해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은 뇌에 때려박히니 말이다. 이번 작품의 소재는 역겨운 정치판 + 인구폭발 + 휴머니즘의 실종이란 신랄한 사회비판에 한국판 비밀결사 프리메이슨을 양념으로 얹은듯한 느낌이다. 인류 낚시 통신의 대의를 위해 일반인들 속에 암약한 이들은 과연 어떤 계략을 획책할것인가.....
"아마 모르셨겠지만 이 소설집의 콘셉트는 '니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닥치는 대로 준비했어' 입니다. ~중략~ 사실 소비자 맞춤으로 구성했다기보다는 제가 써보고 싶은, 지금까지 안 써봤던 걸 쓰려다 보니 이렇게 된 겁니다. ~중략~ '한번 해보지 뭐....' 이렇게 해서 쓰게 된 소설입니다." _작가의말_241p
매우 솔직한 작가의 변이긴 한데, 한가지 간과해선 안되는건 누구나 쓰고 싶다고 해서 다 쓸 수 있는게 아니라는 거다. -_- 다양한 장르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각 특성에 맞는 재미포인트와 그 안에 자신만의 메시지까지 녹여내는 능수능란한 필력은 그저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는 나올 수 없으리라...개인적으로 6편 모두 마음에 드는건 아니지만 이 소설집을 읽다보니 오래전 '오츠이치'의 단편집 [Zoo]를 읽었을때의 신박한 감정이 살짝 되살아 났다. 오로지 극렬한 사회비판만 있었다면 이렇게 집중하지 못했으리라. 정치, 경제, 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찰진 비판과 풍자가 문학의 마이너 장르와 성공적으로 이종교합되어 입가엔 쓰디쓴 웃음과 가슴속엔 깊은 울림을 남긴다. '임성순'이란 이름 석자가 뇌리에 박혔으니 앞으로 여러 작품들로 만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