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빌리기에 좋은 책들이 있다.

궁금하기는 한데 돈 주고 사기는 아까운 책 혹은

사고는 싶은데 과연 살만한 책인지 미리 검증해보고 싶을 때.

(책이 번식하는 걸 싫어한다. 장서의 괴로움이니 어쩌니 하는 헛소리들을 들으면 마구잡이로 먹어서  늘어진 뱃살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하는 족속을 보는 듯 하다.만고 자랑할 게 없어 책으로 자랑을?)

 

어린시절과 대학시절을 빼고는 도서관에서 책 빌리는 걸 싫어했다.(어린시절은 소득이 없으니 맘껏 책을 사들일 수 없었고 대학때는 도서관측에서 관심가는 책들을  빨리 업데잇시켰기 때문에 좀만 부지런을 떨면 깨끗한 책으로 빌려볼 수 있었다.)

감각으로 받아들일  형태가 있는 것이라면 정신과 육체 공히  만족시켜줘야 접촉할 기분이 난다.

내게 있어 책은 일용할 양식, 달콤한 후식,심심할 때 간식이라는 필요불가결한 소비재이므로 

불결한 책들을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 남이 남긴 잔반으로 차린 밥상을 받고 싶지 않은 것처럼.

 

지금 내가 사는 곳에는 도서관이 개관한지 얼마되지 않아 책들이 모두 펼치면 쩍쩍 갈라질 듯한 새것이다. 이사를 다니면서 짐을 더욱더 줄여야겠다고 결심한 바가 있어 뭐든 사들이는 걸 자제하는 중인데 이렇게 멋진 일이 생겼으니 아주 애용해주고 있는 중이다.그리하여 이번에 빌린 책이 장윤현 감독의 '외로워서 완벽한'이다.

 

예전에도 페이퍼 어딘가에 쓴 것 같은데 나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필름이 돌아가는 동안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거액이 차르르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해서다.  감독이 과연 감독 자신만의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배우와 스탭과 그 무엇보다도 자본! 글을 쓰는 건 별로 돈이 들지 않는 일이고 그러므로 자기 마음 가는 대로 써도 돈을 끌어다 쓸 필요가 없으므로 영화 감독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자유로울 듯 하다. 최악의 경우 자기만 읽어도 되니까. 누구에겐가 돈을 지불해야할 필요가 없으니까.누군가에게 자기에게 투자하라고 설득할 필요가 없으니까.도서관에서 빌린 장윤현의 책,'외로워서 완벽한'에도 내가 생각했던  이 부분이 나온다.영화감독이란 참 쓰라린 일이겠다.

 

책을 주욱 읽어내려가다 흠칫 저자의 약력을 찾아보게 되었다. 아,이 사람은 나와 동년배이다. 그런 감이 찌르르 손끝을 타고 흘렀다. 저자가 곳곳에 배치한 모티브들이 내게도 피붙이처럼 친숙했다.

 

첫번째 단서가 이 성복의 시 한 편이었다.(예전에 페이퍼의 카테고리명을 여기서 따왔었다.)

 

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고 - 詩 이 성복(시집;남해금산)

 

기억에는 평화가 오지 않고 기억의 카타콤에는 공기가 더럽고 아픈 기억의 아픈, 국수 빼는 기계처럼 튼튼한 기억의 막국수, 기억의 원형 경기장에는 혀 떨어진 입과 꼭지 떨어진 젖과......찢긴 기억의 天幕에는 흰 피가 눈내림,내리다 그침,기억의 따스한 카타콤으로 갈까요,갑시다,가자니까,기억의 눅눅한 카타콤으로!

 

이성복,바그다드까페,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역시 그는 나와 동갑이었다. 차분하게 담담하게 써내려간 글을 읽으면서 다시 80년대 90년대로 되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얼마전 좋아하던 작가 김지원을 검색하다가 그녀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그것도 2013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게 되어 쿵 하고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었다.김지원과 오경아는 내게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작가이다.  주저주저 하면서 말할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말하려는 작가.감성적이고 소심하고 생각이 많은 여자들.

 

이성복과 최승자의 시집을 지니고 다니면서 많이도 읽어댔구나.이 성복은 대학교수로 안정되게 사는 걸까? 최 승자 시인은 아이오와에 다녀온 후 내놓은 시나 근황이 너무 아니어서 가슴 아팠었다.교수니 가정이니 그런 것에 기대지 않고 어떤 권위나 단체에도 끼이지 않고 자신만으로 사는 건 너무 힘든 것이었을까?

 

 

장윤현은 상처받은 자의 연대를 믿는가 보다. 정치적 연대는 가능할지 몰라도 상처받은 인간들이 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내가 살아본 바로는 그렇다.때는 때로서 녹일 수 없다.기름때는 맑은 기름으로 녹일 수 있다. 그 기름이 때보다 더 더러워지면 때를 빼줄 수 없다.인간이 인간에게  상처없이 줄 수 있는 건 작은 친절밖에 없지 않을까? 아니면 장윤현은 나와는 달리 선량하고 현명한 인간이어서 유유상종, 선한 사람들을 만났던 것일까?

 

-장윤현의 영화를 한 편도 안봤네.

접속이 대유행할 때도 텔미썸씽도 황진이는 물론이고 가배역시.

(다만 어디선가 고종이 커피를 무척 좋아했다는 말을 듣고  울보인상의 왕이 조금 좋아졌었다.)

 

 장윤현의 얼굴을 보니 늦된,섬세하고 따스한 곰돌이같이 생겼다.아마 그가 동급생이었다면 난 걔랑 별로 친하지 않았을거다. 답답하다고. 범생이라고. 장윤현 측에서도 나를 경원했을 것이다. 성실하지 않고 엄살이 심하고 게으르다고. 그처럼 차근차근,허세없이 실력을 쌓고 고통을 묵묵히 견디고 진중하고 뭐,..그런 훌륭한 사람이 못되어서 유감이긴 하다만, 나는 습자지 한 겹보다 더 가볍게 흔적없이 살다가고 싶을 따름이다.세상에는 덧없는 것에 매혹되는 작자도 있는 법이니까.

 

*PS 1;신기한 일이다.지금 CBS FM에서 calling you가 나온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동경기담집'에서 재즈의 신과 잠시 접신했다고 우겼었는데 난 그럼 도서관의 신과 윙크라도 한건가?

 

*PS2;홍차를 연구하다가 찻잔에 빠질 뻔한 꼭지를 보고는 쿡쿡 웃었다. 아,이런 심성의 소유자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몇 안되지만) 비싼 찻잔 한 벌 보내줄까?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이 사람에게 입양된 찻잔은 아마 소중히 오래오래 고이고이 다뤄질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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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15-02-03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달에 한 번씩 우엉을 사다 채썰어 말려서 덖는데 오늘이 덖는 날이었어요. 생각보다 우엉이 빨리 떨어져서 이번에는 욕심을 부렸는지 양이 많아 평소에는 한 시간이면 덖을 것을 두 시간이나 했더니 녹초가 돼버렸어요. 그래도 내일은 우엉차를 끓여 마실 수 있겠다 생각하니 아이고 뿌듯해라 ㅋㅋ

남이 보다 만 헌 책, 저도 꽤 싫어라하거든요. 근데 그게 저의 허영, 사치 폴더에 들어가는 것 같아 혼자 괜히 눈치보며 입 꾹 다물고 있었어요. 근데 이제 어깨 펼래요. 제 어깨 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잔반으로 차린 밥상이라는 비유... 너무너무 좋아요. ㅎㅎ 거기에 덧붙여 저는 도서관이나 서점 시끄러워서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 책들이 떠드는 소리에 조금만 있어도 금방 머리가 아프더라구요. 나중에는 어지럽고 속도 메스껍고 ㅋㅋ 그래서 제가 대장 노릇할 수 있고, 제 마음에 드는 책들만 들어앉아 입 다물고 가만들 있는 제 책장이 좋아요. 서점보다는 백화점이 좋구요. ㅎㅎ

hanicare 2015-02-04 12:20   좋아요 0 | URL
가정경제 파탄나는 정도 아니면 약간의 사치와 허영은 정신건강에 좋지 않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일말의 허영도 없는 사람은 살벌해서 싫어요. 인간이 동물에서 좀 발전한 원동력 중 하나가 허영심도 있지않을까 싶거든요.인간이 인간다우려면 약간의 허영은 양념으로 ㅎㅎㅎ

저는 어릴 때는 예쁘고 상냥한 언니들(예전엔 특히 인형처럼 예쁜 여인네들로 엄선된 엘리베이터걸이 있었거든요.)과 반짝반짝 디자인 좋고 질좋은 제품때문에 백화점을 좋아라했어요.(단,바겐세일 중의 백화점은 딱 질색.)

도서관도 좋아해요. 초딩때 햇빛 눈부신 하얀색 어린이전용 시립도서관 별관에 들어갔을 때 마치 3단 케이크에 떨어진 개미처럼 황홀했던 기억,잊을 수가 없네요.그때 점심으로 호빵 하나 우유 하나 사면 딱 백원이었던 것도 좋았구요.

호텔도 나름 좋아합니다.특히 여름 휴가 때 패키지의 조식부페가 좋아요.취사 청소 세탁 이딴 것들이 얼마나 내 신경을 좀먹는가 절실히 느끼죠.내 사생활에 빨대와 확대경,이빨을 들이대지 않는 건조한 친절이 좋더라구요. 그리하여 언젠가 쥴님께 그런 댓글도 달았죠. 장기투숙되는 괜찮은 호텔에 가방 하나 들고 들어가 살고 싶다구요.^^

흠 이러고 보면 부자이긴 해야 하는데 이승에서는 힘들 거 같네요.상상이라도 넉넉히~




치니 2015-02-04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짧다면 짧은 페이퍼 안에 대체 얼마나 많은 통찰의 내력이 들어갔는지, 적어도 세 번은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요.
이성복, 바그다드 카페, 최승자, 키에슬로프스키......으음, 저도 역시 그 세대가 전혀 낯설지 않네요.
`접속`을 끝으로 저 역시 그의 영화는 안 봤지만(영화가 재미없었으니까), 책은 괜찮은 모양이네요.
걸어 갈 만한 도서관이 늘상 꿈인데 생각보다 대한민국에선 쉽지 않아요. 여기서조차도 차를 타고 가야하니, 마음은 늘 가고 싶어하는데 몸이 안 따라주네요. 이 포스팅 본 김에 조만간 가야겠어요.

장서의 괴로움 운운하는 헛소리 대목에서 또 크게 웃었습니다. 하니케어 님 포스팅은 읽자마자 속이 시원해지는, 대빵 잘 듣는 소화제 같아요.
위에 답글 쓰신 것처럼 저도 호텔 좋아요. 로또 되면 집 안 사고 전 세계 호텔 돌아다니며 장기투숙하겠노라, 늘 그랬는데 뭐 로또는 무슨. 가끔이나마 제주도에 우후죽순 생겨나는 이쁘장한 단독 펜션이나 호텔 중 하나라도 가서 며칠 자고 오고 싶을 뿐입니다.

hanicare 2015-02-05 12:43   좋아요 0 | URL
언제나 없는 재주에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주절주절 끄적거려
포스팅을 올리거나 댓글 달 때 송구스런 마음이 자주 들어요.
(늙으면 입은 꼬매고 지갑은 열어놓으라 했건만,에휴)
과찬하셨지만 서재동네분의 따뜻한 격려(?)로 생각하고 감사드립니다.

집 위치가 걸어서 마트 도서관 대중교통 이용이 손쉬운 곳이면 참 좋겠지요.
저는 집에서 도서관까지 도보로 10분 정도 소요되네요.(마트는 차를 이용해야함)
새 도서관이고 창가에 Bar처럼 주욱 붙여놓은 좁은 책상에 앉으면
맞은 편에는 오직 하늘과 나무와 얕은 산이 있을 따름이어서
타인과 마주 앉을 필요 없다는 것이 더욱 좋아요.감사할 일 중 하나입니다.

스님들이 도 닦을 때
제일 먼저 가족과 인연을 끊고 출가해서
머리 깎고 제복입고 탁발한 이유를 알겠어요.
일상을 기본 수준이라도 유지하면서 도 닦는 게 힘든 일이라 그랬겠지요.
침식 제공되는 곳에서 암 생각없이 한 달만이라도 빈둥거리고 싶은 게 소원 중 하나입니다.

일상이란 이토록 사소하면서 이토록 무겁군요.

chaire 2015-02-05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텔은 아니고 친구가 잡아놓은 레지던스에서 침대에 몸을 기대고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의 등그림자를 느끼며 손전화의 작은 자판을 간신히 누르고 있노라니, 제 검지가 너무 느려 하고 싶은 말이 계속 사라져가네요. 뭐 덧붙일 말도 없습니다만 구구절절 마음을 달구네요. 아, 사람이 이렇게 섬세하게 생각을 정돈하고 다림질하며 살아야 하는데 전 꾸역꾸역 종이 구기듯 뭉개며 사는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 내 발로는 나아가지 못하고 구석으로 떠밀리게 되는 듯... 상처받은 자들의 연대는 불가능하다는 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또 이상하게도 상처받은 자만이 상처받은 자를 알아보는 것도 같고. 어쨌거나 상처를 묵은때처럼 키워선 안되겠다고 다짐. 이성복의 시, 또 뒤지게 만드시네요.

hanicare 2015-02-06 10:43   좋아요 1 | URL
이성복의 시집 `남해금산` `그 여름의 끝` 질기게 읽었네요.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신대철,황지우,오규원.(황인숙 허수경도 넣어줄까요.)
아, 참 기형도가 있었군요.봄날 저녁 그의 사망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곧 그는 신화 비슷한 것이 되었죠.

그 당시 내 주위엔 이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음반같은 것도 구하기 힘들었고 소문으로 글로만 듣던 영화들도 접하기 힘들었죠. 나라가 촌스럽고 척박했고 그 중에 지방은 더 척박한 토양이었으니까요.

그 중 최승자 시인을 가장 좋아했는데schizophrenia라니. 충격을 받았었어요. 그 재능이 아깝고 ! 결국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나. 시인에게 깃들 곳이 이 나라엔 그 병동 밖에 없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