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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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변호해선 안 된다고 하는데 

왜 하시는 거예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읍내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고

이 군을 대표해서 주 의회에 나갈 수 없고,

너랑 네 오빠에게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다시는 말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야.

(148p)



아버지, 애티커스가 하려는 일은 흑인 강간범(이라고 의심받는)을 변호하는 것이다.

목화 농장을 운영하며 노예를 부려온 집안의 자손이,

흑인 알기를 발에 차이는 개똥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앨라바마에서.


딸이 묻는다.

동네 사람들이 다 욕하는데 그걸 왜 하세요, 라고.


아버지는 답한다.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어서,라고.


흑인 알기를 발에 차이는 개똥보다 못하다고 여겨서

흑인을 변호한다는 이유로 욕먹고 살해 협박까지 당하면서 한다는 말이,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어서-.


앞뒤가 맞나.


그 읍내란 곳은 흑인을 변호하는 그를 죽이려 드는 곳이라

그 일을 하지 않아야 거기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을 텐데 말이지...


그렇다면 애티커스는 이중의 노역(勞役)을 하겠다는 셈이다.


다들 안 그러는 게 옳다고 믿는 곳에서 혼자 그러기로 하기.

다들 안 그러는 게 옳다고 믿는 곳에서 혼자 그러기로 하면서도

고개를 들기.


내가 고개를 들고 다니는 곳은 어디인가.

나를 욕하는 이가 없다고 (내가) 철없이 믿는 곳에서 

나는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이 나를 좋아해주지는 않아도 최소한 욕은 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 곳.

그런 곳에서 나는 안심하고 고개를 들고 다닐 것이다.


고개를 숙이라고 강요당하는 곳에서 고개를 드는 일.

고개를 숙이라고 강요하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고개를 들기.


이런 장소, 이런 상태에서

고개를 든다는 것의 진의가 일어설 것이다.


누가 뭐래도 고개를 드는 일은 위험하다.

그 '누가'들이 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뭐란다고 고개를 들지 않는 일도 위험하다.

그 '누가'가 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누가'를 그닥 의식할 필요가 없을 지 모른다. 

어차피 누가 옳고 그른지 딱 꼬집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유일하게 딱 꼬집어 알 수 있는 것.

고개를 들기 위해 난 어쩌면 그것만 보면 되는지 모른다.


애티커스가 보여준 그대로.


양심. 


양심있는 이는

알고 보면 모두 고개 숙여야 하는데 바짝 고개들고 호령하는 무리들 속에서 

고개를 들 줄 안다.

양심있는 이는

혹 그런 무리에 맞아죽더라도, 양심에 두들겨 맞는 게 더 아프다는 사실을 안다.


내게 그런 양심이 있는지부터 궁금해서...


읍내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고,


이 간단한 문장에서 나는 오랫만에 내 양심에 노크한다.


어이, 자네, 거기 잘 있는가?


우리 읍내에서 고개 들고 다니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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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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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114p)


굳이 따져보자면 '선'보다는 '악'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솔직히. 악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니까 나는 악한 사람일까. 악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악한 사람일까. 나는 왜 악에 관해 생각하는가.


무엇보다, 나는 악에 관해 생각할 자격이 있는가.


이리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나는 악인은 악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악'에 관해 생각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착한 사람 축에 든다(고 믿고 싶다). 


설마, 싶겠지만 그런 것 같다.


자신이 하는 일이 악인지 알면서 하는 사이코패스는 빼놓고 일단 생각하자.


악인은 자기가 하는 일이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쁜 일이란 생각은 할 지도 모른다. 악인도 세상에 돌아다니는 법쪼가리 정도는 줏어 들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나쁜 일이 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좀, 다르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내가 악인일 수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말의 어미를 확정하긴 어렵다)


나쁜 일과 악은 다를 수도 있다.

법이 그러지 말라고 정한 일은 나쁜 일이지만 법이 금한 일이 다 악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사실은 명작일 뿐 아니라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어떤 책이나 영화를 별 시덥잖은 이유를 들어 묶어버리는 일 따위.


여기, 절도, 폭행, 강간이란 끔찍한 일은 다 저지르고 다니면서 그 일이 악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열 다섯 살, 알렉스가 있다. 그 동무들이 있다. 알렉스는 늘 이런 말을 읊조리고 소설의 챕터를 시작한다.


이제 어떻게 될까, 응?(What's it going to be then, eh)

얘도, 자신이 어찌될 지 모른다. 

그냥 하고 싶으니까 한다면서 사실은 얘도, 두려운 것이다.

법으로 금한 나쁜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 알렉스는 악인일까.

법으로 금하지는 않았는데 나쁜 일도 얼마든지 많다.

그런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 사람은 악인이 아닐까.

다 가진 사람이 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은 SNS에 다 가졌다고 자랑하는 일 따위.

혼밥할 사람이 더 많은 사무실에서 두 사람만 팔짱 끼고 오늘은 뭐 먹을까 하는 따위.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윤리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제거당하겠다는 선택을 내릴 때, 넌 진짜로 선을 선택한 것이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구나. 신이 우리 모두를 돌보시겠지(114p) 


내가 악에 관해서 더 많이 생각하는 이유는 혹시, 윤리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일까. 윤리적인 선택을 하기 위한 불면의 밤을 신에게 맡긴다면 나는 진짜로 선을 선택하는 것이 되는 걸까.


나쁜 짓을 다 하고 돌아다닌 알렉스는 '착해지는 요법'을 시술받고 나쁜 짓을 목격하거나 생각하면 토한다. 나는 세상 온갖 나쁜 짓을 봐도 더 이상 토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 매순간 토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세상에 산다는 걸, 또 매순간 깨닫게 되어서.


세상 온갖 나쁜 짓에 토하지 않는 나는 악인인가.


오늘 내가 실행한 어떤 자유의지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악이었을까.

스스로 선하다고, 선하고자 하는 자유의지를 안전하게 행사하고 있다고 믿는 우리.


시계태엽 오렌지나 읽...먹으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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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게 시끄럽고 참을 수 없게 억지스러운 - 콜센터 상담 노동 이야기
콜센터상담원 지음 / 코난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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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이름이 없다. 콜센터상담원,이 필명이다. 상담원은 알바고 본업은 에세이스트 아니면 소설가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요즘 유독 많은 알맹이 없는 에세이나 소설보다 백배 재미있고 의미있다. 게다가 ‘현실‘이다. 콜센터란, 분노와 인내의 교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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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책을 읽다 - 미술책 만드는 사람이 읽고 권하는 책 56
정민영 지음 / 아트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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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하는 미술서를 다 사고 싶을 정도로 문장도, 내용도 좋다. 그러나 소개하는 책을 태반은 살 수 없었다. 모두 절판이거나 품절. 경험상, ‘절판‘ 표시를 ‘어떻게든 구해서 읽을 책‘으로 이해했던 게 역시 옳았다. ‘어떻게든 구할‘ 투혼을 발휘, 절반은 건졌다. 절판책 사냥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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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열린책들 세계문학 227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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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몰래 다른 일과 연관시키면서 아버지의 꾸중을 참아 냈다. 

그와 동시에 야릇하게 새로운 감정, 갈고리로 콕콕 쑤시는 듯한

사악하고 날카로운 감정이 내 안에서 번득였다.


28p


더는 아버지가 무섭지 않아진 때를 기억한다. 더는 어머니가 어렵지 않아진 때를 기억한다. 때는 대학교 2학년이었다. 밤이면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를 더는 기다리지 않게 되고, 밤이면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머니를 곁에서 지키지도 않게 된 때와 겹친다. 더는 어머니가 가엾지 않았다. 왜냐하면 싱클레어가 느꼈던 바로 그 감정. 야릇하게 새로운 감정. 갈고리로 콕콕 쑤시는 듯한 사악하고 날카로운 감정이 내 안에서 번득인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보다 우월하다고 느껴졌다!

28p


그때의 감정에 이름표를 붙이지 못했다. 나는 헤세가 아니니까. 이제야 그 감정의 이름표를 찾는다. 학창시절 읽었던 '데미안'은 이런 게 아니었다. 감히, 아버지보다 어떻게 우월하다고...이런 생각도 못할만치 집에서 나는 포복할 듯 몸을 낮추고 살았으니까. 대학교에 들어가고 한 일년 쯤 지나 내가 아버지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았다. 밤이면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가 나보다 우월할 턱이 없었다. 그걸 왜 그렇게 늦게 알았는지 분할 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아버지 앞에서 몸을 낮추게 되었다. 아버지는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더는 두 다리를 움직여 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버지보다 한참은 내가 우월하다고 느낄 이 즈음, 나는 아버지보다 전혀 우월하지 않다는 걸 또 알았다. 


아버지는 그저, 아버지의 방식대로 자신의 삶을 살고 또 즐겼던 것임을 안다. 자신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았던 것임을 안다. 비록 어머니를 밤이면 기다리게 했지만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머니도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던...그게 어머니의 최선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벽시계와 탁자, 성경과 거울, 책꽂이와 벽에 걸린 그림들이 내게 작별을 고하는 듯했다. 나의 세계, 나의 즐겁고 행복한 삶이 어떻게 과거가 되고 어떻게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지 얼어붙는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다.


싱클레어는 완벽한 도덕을 추구하고 또 지킬 줄 아는 완벽한 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면서 죄의식을 느끼는 대신 아버지보다 자신을 우월하게 생각하는 방식을 택했다. 새로운 감정에 겁을 집어먹고 아버지 발에 입 맞추며 용서를 구하고 싶었지만 본질적인 일에 대 용서를 구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다른 방식을 택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방식을.


떨어져 나가기.

행복하고 안정적인 과거의 삶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기.


그리고 싱클레어는 침대에 누워 더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싱클레어는 더이상 가족과 노래하지 않고 아버지의 축복의 기도문에 감동하지 않는다. 싱클레어는 그 아버지가 삶을 사는 최선의 방식을 택하지 않기로 하고 '떨어져 나간다'. 떨어져나간 싱클레어의 자아는 세상으로 나가 자신을 꼭 닮은 '클론'을 찾는다. 막스 데미안. 그리고 데미안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어머니를 닮은 에바 부인. 


하지만 이따금 열쇠를 찾아서 나 자신 안으로 침잠하면, 운명의 형상들이 어두운 거울 속에서 잠들어 있는 곳으로 완전히 침잠하면, 검은 거울 위로 몸을 굽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나의 친구이면서 인도자인 그와 똑같은 모습이. 

226p)


내 방식대로 집에서 떨어져나와 세상 속으로 파고든 나는 데미안과 에바 부인을 만나지 못했다. 세상 사람 모두에게 나는 타자였고 내게 그들은 완벽한 타인이었다. 날이 갈수록 그걸 더 깨닫고 확인하는 중이다. 다만, 다르다면, 더는 서럽지 않다는 사실이랄까. 타자여서 오히려 안도할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이랄까.


그시절 내 아버지의 나이 무렵에 와 선 지금, 나는 여전히 운나쁘게도, 데미안도 에바 부인도 만나지 못했다. 소설이 좋은 이유가 이것이다. 좋은 소설을 시간의 주기가 바뀔 때쯤 다시 읽어도 좋은 이유가 이것이다. 어둠의 거울 위로 몸을 굽히면, 싱클레어보다 운이 좋지 못한 내게도 보이는 얼굴이 생겼다. 그게 누구인지 중요치는 않다. 중요한 건, 그게 누구든 알에서 깨어나려 파이는 날갯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데미안'을 펼칠 때마다.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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