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의 위대한 강연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진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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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가능한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영원히,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의 욕망이 닿지 않게, 일은 다 일어났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이 좌절을 받아들이고 그로써 숙명에 전율해야 한다]


이 당연한 말을 이제껏 한 사람이 없어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다.


소설은 하지 않은, 혹은 하지 못한 좌절을 연습하는 공간이다.


나는,

좌절다운 좌절을 언제 했던가.


오늘 내가 한 좌절은 좌절다운 것인가.

그렇다면 소설을 눈여겨 보리라.


누군가의 소설에 그 좌절이 등장할 테니.


그런 좌절만 할 수 있다면

나의 매일이 좌절이라 해도 웃으며 좌절하리.


전율할... 나의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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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박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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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아버지는 남편에 비하면 늘 헐렁했다.

누군가가 생각해서 챙겨주더라도 

헐렁한 옷 사이로 모두 빠져나가버리는 그런 헐렁한 사람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여자는 

아버지가 던져준 헐렁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무렵부터 여자는 어떤 끈이든 단단하게 조이는 버릇이 생겼다.

풀려 있거나 느쓴해진 끈만 보면 꽉 조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여자를 짓누르고 있었던 헐렁한 삶에서 비로소 벗어난 것은 

바로 속싸개로 아기를 친친 동여매었을 때였다. 


-왜 이렇게 옷이 헐렁하다니, 얘야.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이 시시하고 헐렁한 농담 같았다.


아버지의 수의를 꼭 조였을 때, 그제야 여자는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했다.


여자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헐렁함'과 '조임'이란,

너무 흔해 빠진,

단 두 개의 심상만으로 빚어낸 현실.


움직임 없는 텍스트가 

유독 소설 속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소설가가 있기 때문이다.


박성원.


내 주위에 숱하게 널린 것들에서  

그의 눈에 뜨인 것들을 조각으로 꿰면,

내가 거한 작은 우주가 손에 만져질 것 같다.


내 눈에도 보이도록.


나는 무엇이 헐렁한가.

나는 무엇을 조여야 내 결핍의 민낯을 조우할 것인가.


아버지의 수의를 꼭 조여야만 하기 전에,

조일 것을 찾아내고자.


땡큐.


 

여자가 간선도로를 빠져나온 시각은 오후 세 시 십구 분이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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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소멸 -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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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럴 줄 알았다. ‘사물‘에 삶이 있을 줄 진즉 알아봤다. ‘정보‘를 지향했다. 정보가 많으면 유복할 줄 알았다. 정보의 즉각성과 휘발성은, 못본 체했다. 정보에 의해 사물이 소멸되는 중이다. 사물이 품은 실재와 시간이 아울러 소멸되는 중이다. 잊지 말자. 정보보다, 사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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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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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목을 매 죽은 이후로 내겐 두려울 게 없었다.

그때 나는 열아홉 살이었고,

말린 단풍잎을 책갈피로 쓰던 여고생이었고,

오 남매 중 막내였지만,

침착하게 부엌칼을 가지고 와서 아버지의 목을 죄고 있는 끈을 잘랐다.

시체가 된 아버지의 머리가 마룻바닥에 부딪치는 순간

이제 가족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겁나는 일이 없었다.

그보다 더한 일은 없을 테니까.


버스 정류장 근처 꽃집에서 나를 위해 꽃다발을 샀다. 


축의금이나 조의금도 섭섭지 않게 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오빠들은 집을 떠났고,

나는 어머니와 둘이 남았다. (10p, 여름방학 중에서)


아버지가 목을 냈고 그 끈을 잘랐는데

퇴직을 했고

그 때문에 꽃집에서 나를 위해 꽃다발을 사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오빠들은 집을 떠났다...


완전히 상관없는 사건들의 혼재가 덩어리로 이어진다.


의식의 흐름.

과거의 경험에 뿌리를 둔 의식이 자발적으로 튀어 오르는.


그 돌연함에 신기하게도 어긋남이 없다.


잘 섞인다.


윤성희, 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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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하는 마음 - 김혜리 영화 산문집
김혜리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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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 작가의 책은 챙겨 본다. 글 잘 쓴다...그런 건 잘 모르겠다. 책을 낼 정도면 글을 잘 쓰겠지. 좀 당연한 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나는 영화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 그의 책을 읽는다. 그는 영화를 많이, 누구보다 많이 보는 사람 같아서. 그것만으로도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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