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와 배우가 - 김신록 인터뷰집, 두 번의 만남, 두 번의 이야기
김신록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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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란,


내 몸을 통해 세계의 상태나 리듬을 드러내는 것(16p)

/황혜란 배우의 말 중에서


단어 놀이를 해 보자.

많은 게 말 된다.

그리고 의미 깊다.


글쓰기란,

내 글을 통해 세계의 상태나 리듬을 드러내는 것


책읽기란,

책을 통해 세계의 상태라 리듬을 포착하는 것


랑이란,

사람을 통해 세계의 상태나 리듬을 껴안는 것.


육아란,

아이를 통해 세계의 상태나 리듬을 내려보내는 것


삶이란,

나를 통해 세계의 상태나 리듬을 흘러가는 것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란,

삶을 통해 세계의 상태나 리듬을......................올라타는 것.


운명을 극복한다는 것이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통해 세계의 상태나 리듬을 '제대로' 올라타는 것


이런 책은 무조건 사야지.

이렇게 짧은 말로 이 긴 단어놀이를 할 수 있게 해준다면, 

보나마나 그 역량은 굿.

연기와 관련해 아주 오랫동안 ‘인식‘을 화두로 삼고 있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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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슬픔 아시아 문학선 1
바오 닌 지음, 하재홍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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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실로 넓고, 깊고, 풍요롭고, 활기찬 것 같아도 결국엔 여전히 무언가 빠져 있는 듯한, 부족한 듯한, 그래서 누구나 죽음에 이르면 갚지 못한 부채나 의무 같은 것이 마음에 휘감기고 엉겨 붙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161p)


아침에 눈 뜨면 의욕이 솟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것 같다. '아침'을 굉장히 의욕적인 시간으로 여긴다. 

내겐 아니다. 


아침이면,

오늘도 일해야 하는구나. 먹어야 하는구나. 말해야 하는구나. 


나는 어쩌면 내 삶에 부채나 의무 같은 걸 느끼는구나.


전쟁의 슬픔을 겪은 끼엔의 부채나 의무 같은 것에 비하면야 그 질감과 양감이 턱도 없이 작고 초라하겠지만.


난 어떤 삶의 부채나 의무 같은 게 있어 아침마다 무거운 발을 침대 밑으로 떨구고 바닥을 밟고 천근같은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걸까. 나를 일으키는 건 삶의 의지가 아닌 것 같다. 그냥 삶, 자체인 것 같다. 삶이 알아서, 이어 잠자고 싶어하는 날 깨워 일으키는 것 같다.  


손이 알아서 칫솔을 집어 이를 닦고 비누칠해서 얼굴을 닦고.

이젠 예뻐지기 위해 하는 화장이 아니라 '노화'를 가리는 말 그대로 'make UP'을 하고.


'전쟁의 슬픔'의 끼엔에겐 선명한 삶의 부채나 의무가 있다.

전쟁에서 이유도 모르고 죽어간 자들의 혼령을 위로하는 일.

그들의 죽음에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관심 좀 가지라고 알리는 일.

죽어간 자들의 묻힌 유골을 캐내어 이름과 정체를 찾아주는 일


바로, 소설을 쓰는 일.


끼엔이 소설을 쓰는 이유는 부채갚음이다.


그 부채는 끼엔의 유익을 향해 있지 않다. 

끼엔은 그 일을 할 의무가 없다.

그냥 끼엔을 찾아왔다.


열명 정찰대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기에.


유일하게 살아남아 숨이 붙었다는 이유로 끼엔은 부채를 스스로 짊어졌다.


나도 소설을 쓴다.

부채의식 같은 건 없었다. 당연히, 부채갚음도 없었다.


이 소설의 뒤로 갈수록 끼엔이 소설을 쓰는 이유는 사실, 그를 향해 있었음이 드러난다.

더 읽어봐야 그 확연한 정체를 만질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지금은 


누구나 죽음에 이르면 갚지 못한 부채나 의무 같은 것이 마음에 휘감기고 엉겨 붙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부채나 의무 같은 것이 마음에 휘감기고 엉겨 붙는 것을 느끼게 되는 일이다.


죽음에 이르면,이 아니라 죽음에 가까이 가고 있으면,의 자세로.


지금 살아 있는 자들은 어쨌든 모두 죽음에 다가들고 있는 걸 테니까.

오늘 하루 만큼 더 가까이.


뱀들은 사는 게 지겨운지 전혀 꿈틀거리지 않고 몸을 길게 쭉 늘어뜨렸다. - P268

과거는 최후가 없고 과거는 우정, 형제애, 동지애, 그리고 일반적으로 불멸의 인간성과 더불어 영원히 정절을 유지한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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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1-24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했는데 젤소민아님 리뷰 보니 더 읽고 싶어지네요.
부채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삶의 슬픔이 느껴집니다.

젤소민아 2023-01-24 22:52   좋아요 0 | URL
와, 올리자마자 이리 댓글을 주셨네요~~바오닌의 단편, ‘물결의 비밀‘을 읽어 보셨는지요. 그 단편 보면 무조건 반합니다~~ㅎㅎ 그래서 이 소설에 관해 잘 모르지만 작가 보고 무조건 샀어요. 한 페이지가 잘 안 넘어갑니다. 너무 묵직해요. 어렵진 않은데 이리 묵직하게 써낼 수 있는 능력. 정말 대단한 작가 같아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초반 20분은 비교도 안 되게 전쟁의 참상이 적나라합니다. 각오는 하셔야 할 거여요 ㅠㅠ
 
사랑하는 소년이 얼음 밑에 살아서 시간의흐름 시인선 1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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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 울다가 웃으면 어른된다//첫문장에서 피식, 웃다가, 찔끔. 뭐야, 나 어른 맞네. 이런, 잛고 단순하고 밋밋한데, 강력한 문장은 어찌 만드는 거지? 잘쓴 글은 앞문장이 뒷문장을 이미 품는 식인데, 이 시인은 앞이 뒤를 품고 바로 등돌리는 식. 근데 그 등이 서러운 식. 서러운데 좋은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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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슬픔 아시아 문학선 1
바오 닌 지음, 하재홍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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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 소설 뭔가. 어느 문장도 버릴 게 없다. 몇 문장은 좀 쉬어가야 하는데. ‘물결의 비밀‘에서 이미 알아본 필력과 사유지만, 이다지도 글을 잘 쓸 줄은 몰랐다. 죽었다 깨어나도 못 쓰고 죽을 문장들이 마침표처럼 많다. 전쟁을 겪은 소설가의 슬픔은 서럽다 못해, 찬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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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맨 2023-11-23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전쟁의 슬픔‘을 번역한 하재홍입니다. ‘전쟁의 슬픔‘을 잘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바오 닌 작가께서 번역 추천한 소설 ‘나 그리고 그들‘이 최근에 나왔습니다. 아주 독특한 소설입니다. 한번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젤소민아 2023-11-23 00:29   좋아요 0 | URL
와~~~번역자님이시군요~~베트남어를 한글로 옮기신 거죠~영광입니다~. 저도 영어를 한글로 옮기는 일을 합니다. ㅎㅎ 바오 닌의 문장은 곧 번역자님의 문장이기도 하지요~~그런 멋진 문장을 접하게 해주셔서 이 기회에 감사드립니다.
[나 그리고 그들]을 장바구니에 바로 넣었습니다~건필하시길요~~

vnroute 2023-11-25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어 번역을 하고 계시군요. 반갑습니다. ‘나 그리고 그들‘ 구매까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젤소민아님께서 추천하시는 책 꼭 읽어보도록 할게요. 좋은 책 많이 번역하시고, 본인의 글도 많이 쓰시길 바랍니다.^^
 
길 위의 집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8
이혜경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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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가 1개? 내 눈을 의심했다. ‘길 위의 집‘이 가진 비범한 반전을 모르는 이가 더 많다는 이야긴가? 이 소설의 반전은 결말에 있지 않다. 서두에...있다. 책을 덮고 나면 살짝 떨리는 손가락으로 서두를 다시 펼치게 된다. 그때, 완전히 다르게 다가드는 텍스트. 놀라지 못했다면 눈치 못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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