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 베이식 아트 2.0
프랑크 죌너 지음, 최재혁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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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에서 모나리자의 그림을 본 건 처음이다. 그것도 미술관이 아닌 가로 22, 세로 27의 미술책 판형을 통해서. 처음 봤을 땐 “이게 레오나르도 다빈치 하면 떠올리는 모나리잔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는데 계속 보고 있으니 판본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과 묘하게 웃고 있는 눈가의 미소가 점점 그림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누구의 말처럼 “눈썹도 없고 그렇게 미인 같지도 않은 여인을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열광을 할까?” 란 생각을 해보게 되지만 결국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이라서 뭔가 특별할 거 같은 기대감 속에 다빈치가 모델로 삼은 여성의 원숙미가 더해져서 지금의 모나리자를 만들지 않았나 싶다.

피렌체에서 화가로서의 견습 생활을 시작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드로잉 솜씨는 가희 천재적이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 시대의 작가와 비평가들은 그에게 “결코 평범하지 않으면서 독보적이기에 언제나 주목할 수밖에 없는 작품(본문 7쪽)”이라는 찬사를 남길 정도로 다빈치의 그림 솜씨는 처음부터 수준급이었다. 이런 천재적인 드로잉 기술을 가졌음에도 완벽함을 추구하는 그의 열정과 한 번에 너무 많은 작품을 손대다 보니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포기해버린다는 치명적 단점이 항상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불안을 뒤로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건축학, 해부학, 과학 등 여러 분야의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의 그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런 과도기를 발판 삼아 그의 나이 서른에 밀라노에서 <암굴의 성모>란 작품을 통해 화가로서의 지위를 확실하게 각인시킨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궁정화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기에 이른다. 궁정화가가 됐다는 것은 이른바 ‘궁정’이라는 안정적인 무대가 있으니 그가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더 안정적이면서 편안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해석하면 편할 듯하다. 이때 그린 그림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함께 화가로서 명성을 널리 알린 <최후의 만찬>이었다. 예수를 둘러싸고 나는 배반자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듯한 열두 제자의 모습을 네 무리로 나누어 각 인물에 맞는 표정과 몸짓을 정확히 표현해낸 생동감 있는 요소들과 장소적 특성을 고려한 원근감 및 인물들에 대한 리듬감의 부여 등을 통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술의 혁신적인 모든 것을 <최후의 만찬>에 쏟아부었고, 그 결과 <최후의 만찬>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 지금은 많이 손상되었지만 이 벽화는 치밀하게 계획된 인물들 각각의 표정과 자세의 표현 이외에도 무엇보다 인물을 몇 개의 무리로 나누어 대조적인 효과를 주었다는 점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본문 52쪽 中)

96쪽 분량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읽으면서 그의 드로잉 솜씨에 놀랐고,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서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이라는 타이틀이 괜히 붙은 게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스푸마토’라는 기법으로 그렸다는 <세례자 성 요한>을 보면서는 컴컴한 방 안에서 홀로 빛을 발하는 촛불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요한의 모습과 투명한 도료를 여러 번 겹쳐 바르면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기에 열심인 다빈치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묘한 신비감을 주기도 했다. 이처럼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통해 그가 그림을 통해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화가였다는 사실과 그런 호기심을 그림을 통해 불어넣었던 그의 천재적인 영감들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어서 읽는 내내 즐거웠고 행복했다. 이런 행복감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좋아하는 다른 분들도 느꼈으면 좋겠고, 이 책에 실린 그림들을 통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가를 다시 한번 확인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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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 숲속의 올빼미
고이케 마리코 지음, 정영희 옮김 / 시공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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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달밤 숲속에서 한 마리 올빼미가 소리를 죽여가며 울고 있다. 삶이 즐거운 사람에게 그 울음소리는 하늘에 떠있는 달을 더 밝게 비추는 조명효과가 될 테지만 마음 한구석에 슬픔을 간직한 사람에게 달밤 숲속 올빼미의 울음소리는 그리움에 사무친 이별가처럼 들린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이별을 한다. 다양한 이별 속에서 여기 남편과 사별한 한 여자의 그리움이 올빼미라는 대상에 감정이입되어 구슬프게 울고 있다. 그리움에 문득 떠난 그 사람을 생각해 보면 내 옆에서 한없이 조잘거리던 그였고, 매번 무덤덤하게 말하던 그였는데, 해맑은 얼굴로 나에게 장난치던 그가 지금 내 옆에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쓰디쓴 울음이 터져 나온다.

그녀는 그와 37年을 함께 살았다. 말이 37年이지 강산이 세 번도 더 변했을 시간 동안 그와 그녀는 함께 했다. 서로가 글을 쓴다는 이유로 묘한 동질감도 있었고, 혈기왕성할 때 만나 치열하게 싸운 적도 많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고, 각자가 쓴 작품들을 공유하면서 앞으로 쓸 소설들과 함께 미래를 얘기했다. 함께 쓰고, 함께 사유하면서 일본의 권위 있는 상인 나오키상도 차례로 받은 그들이었다. 이런 부부에게 있어 남편인 후지타 요시나가의 암 선고와 사망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들 부부의 삶이 암으로 인해 남편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거기에 코로나19가 함께 온 순간 그들의 삶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가 각자가 겪은 슬픔들을 어깨에 얹고 살아가지만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떤 슬픔이나 고통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 상실이나 아픔에 대해 함부로 재단할 수도 없다. 섣불리 한 위로가 상대에게는 더 큰 상실감을 주기도 하고, 한 사람의 삶을 망쳐버릴 수도 있기에 큰 상실감을 겪은 분들께 위로나 충고도 쉽지 않다. 고이케 마리코의 《달밤 숲속의 올빼미》란 에세이를 읽으면서 그녀가 남편과의 사별을 잘 극복하고 있구나! 란 생각을 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그녀의 외로움에 사무친 슬픔과 쓸쓸함이 나에게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거 같아 마음이 많이 아프다. 곁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죽으면 너무나 큰 상실감으로 인해 눈물도 나오지 않다가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울음이 터진다고 하는데 고이케 마리코의 상황이 딱 그 상황인 거 같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잘 대처했고 잘 견뎌왔다고 생각한 나(고이케 마리코)였는데 문 앞에 가지런히 놓인 그의 신발이나 옷을 보면서 갑자기 터져버린 울음이 그치지 않는 그런 상황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그녀를 위로하고 누가 그녀의 어깨에 얹힌 슬픔을 거둬들일 수 있을까? 그건 바로 깊은 달밤 숲속에서 울고 있는 올빼미처럼 자기 스스로가 슬퍼하고 애도하면서 그 슬픔을 극복하는 거 말고는 그 누구도 위로를 대신할 수 없다. 그녀와 함께 살아가는 창밖 작은 생명체들이 그녀 옆에서 그녀의 삶을 지켜보는 거 말고는.

가을 기운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마당에는 엉겅퀴 꽃이 무리 지어 피었고, 동글동글한 말벌과 작은 박새가 꿀을 먹으러 찾아든다. 먼 나무에서, 기름매미 한 마리가 조금은 쓸쓸히 울고 있다. (본문 71쪽 中)

책 내용은 단순히 신변잡기적인 내용이었지만 그녀가 처한 상황에 감정이입이 되는 순간 이 책에 실린 글은 단순한 수필이 아닌 위로의 글이 됐고, 위안의 글이 됐다. 별 얘기가 아닌 듯 보이지만 별 얘기였고, 상실감을 크게 느낀 사람들이 읽으면 동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마리코 여사의 글들은 담백하면서 따뜻했다. 오늘도 그 누군가의 부모님, 남편, 아내, 아들, 딸, 반려동물이 세상과 작별 인사를 하게 된다. 그 이별이 누군가에겐 큰 상실감으로, 큰 고통으로 다가올 테지만 그 슬픔과 아픔을 오롯이 견뎌낼 수 있는 것도 인간이라는 동물이 가진 능력이라고 본다. 그 능력이 슬픔을 아우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만약 부족하다면 고이케 마리코가 쓴 《달밤 숲속의 올빼미》를 통해 위로 아닌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기본이 갖춰진 소설가라 글도 잘 쓰고, 읽다 보면 어느새 내가 겪고 있는 슬픔이 반감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꼭 반감됐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고이케 마리코 여사처럼 슬픔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그 슬픔을 시간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게 삶에 젖어드는 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께 힘내라는 안부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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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사랑한 나무들 - 명화 속 101가지 나무 이야기
앵거스 하일랜드.켄드라 윌슨 지음, 김정연.주은정 옮김 / 오후의서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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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아름답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책장을 넘기는 순간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으면서 세계에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나무 사랑이 이 정도 일 줄은 몰랐고, 나무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그들의 붓에 묻어나면서 나무들은 화가들의 터치에 화사한 옷들을 입었다. 그 옷들을 보고 있으니 황홀하면서 형형색색의 나무들이 내뿜는 아우라에 빠져들었다.

 

역시나 나무를 그린 그림에서도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은 경쾌하면서도 발랄했다. 늦봄의 터널에 빠져서 나오고 싶지 않을 만큼 호크니의 붓에서 그려낸 봄의 정취는 산뜻함 그 자체다. 호크니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쩜 저렇게 색감(色感)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자유자재 붓 터치가 너무 부럽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배나무의 터치를 보면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배나무에 달린 배들과 나뭇잎들을 한 번의 붓질로 채색되고 묘사했다고 하니 클림트 당신은 그림에 있어서 붓질의 마술사라 부르고 싶다. 나무가 주는 황홀감과 생동감을 느끼고 싶다면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사이프러스 나무》를 보면 된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고흐가 나무를 통해 활기찬 모습으로 되돌아가고픈 마음을 사이프러스 나무에 투영시킨 듯하다. 러시아에서 ‘숲의 시인’이자 ‘나무의 회계사’로 불린 이반 이바노비치 시시킨의 그림은 사진으로 착각할 정도로 대단히 사실적이다. 눈 덮인 전나무의 위태위태하면서도 의젓한 모습의 《황량한 북쪽에서》란 그림은 처음엔 사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림이었다. 나무의 회계사란 별명처럼 그가 나무 그림에 있어서 얼마나 세밀하게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나무의 가지는 큰 눈이 내려 얼어붙어도 상처받지 않는다.

눈이 녹으면 가지들은 다시 새로운 싹을 틔운다. (본문 22쪽 中)

 

 

책에서는 아름다움만 보여주지는 않는다. 전쟁을 통한 파멸의 현장을 그린 폴 내시의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다》를 보고 있으면 전쟁이 우리를 어떻게 만들지를 나무를 통해 미리 보여준다. 나무들은 불타고, 꺾이고, 뿌리째 뽑혀 있다. 거의 혼돈의 아수라장이다. 하지만 거의 죽은 땅이라고 생각했던 곳 뒤편 산에서는 반짝반짝 해가 떠오르고 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떠오르는 해를 자양분 삼아 죽은 나무에서 싹이 돋고 새 생명이 태어나듯이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폴 내시의 마음이 그림 속에 녹아들어 있어서 안심이 된다. 우울함과 고독함의 아이콘이자 표현주의 화가인 에곤 실레, 그의 그림에서도 별반 다르지가 않다. 《가을 나무》에서는 쓸쓸하면서 왠지 모를 고독함이 묻어난다. 끝나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는 에곤 실레의 마음이 가을 나무에 고스란히 묻어 있는 느낌이다. 이 이외에도 르네 마그리트, 클로드 모네, 피에트 몬드리안, 로라 나이트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화가들이 그린 나무들이 이 책을 살아 숨 쉬게 하고 있다.

 

아름다운 책을 만나니 마음속에 감춰져있던 응어리들이 풀린 느낌이자 치유받은 느낌이다. 산에 가면 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를 마시면서 머릿속을 정화하곤 하는데 이 책에서는 저 마다의 나무들이 뽐내는 그들의 자태에 넋이 빠져 버렸다. 그러고 보면 화가들도 그들의 직업에 자부심을 느낄만하다. 그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서 치유받는 사람들이 있고, 나처럼 스트레스가 확 풀려서 리프레시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깐. 마지막으로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화가들이 선물하는 나무들을 통해 본인이 좋아하는 나무와 화가들을 찜해서 그 화가들이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연상작용으로 공부한다면 그림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여줄 거라 생각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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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에 답할게요 - 8인의 시인, 8인의 화가 : 천진하게 들끓는 시절을 추억하며
김연덕 외 지음 / 미술문화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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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한쪽은 글로 쓴 예술이고, 다른 한쪽은 선과 색으로 그린 예술이라고”(본문 5쪽). 달리 말하면 화가는 선과 색이라는 비기(秘器)를 통해 화가가 말하고자 하는 작품이나 인물을 그렸고, 시인은 글이라는 문력(文力)을 통해 그(그녀)가 원하는 그 무언가를 창조해냈다. 화가와 시인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다르지만 그들이 창조해낸 결과물은 우리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의 글을 통해, 하나의 그림을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땅의 예술가들이 그 힘든 과정을 마다하면서 예술을 하는 이유일 것이다.

 

『당신의 그림에 답할게요』는 글로 쓴 시인 8인이 그들의 기준으로 그들이 사랑하는 화가들의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인의 면면들이 낯익지 않은 것을 보면서 나를 자책하는 것도 잠시, 그들의 언어를 통해 그림을 감상하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든다. 최승자 시인을 무작정 사랑했고, 파울 클레를 맹목적으로 좋아했던 이십 대를 떠올리는 안희연 시인, 그리고 최승자가 말하는 ‘나의 시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시’와 파울 클레의 ‘그녀는 소리를 지르고 우리는 연주한다’는 그들을 대표하는 문구들에서 안희연 시인의 처절했던 이십 대를 떠올리게 된다. 쓰다만 시구를 던져버리고, 그리다만 캔버스를 찢어버리고 말지만 결국엔 그 고통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낸 그들이었기에 그들의 시와 그림들이 더 대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인이라는 일을 하면서 방황했던 이십 대의 우울한 청춘인 서윤후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준 가쓰시카 호쿠사이, 그리고 그들 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있는 성난 파도의 모습을 보여준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그림을 보면서 그들의 우정이 파도보다 높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해보게 된다. 우스갯소리지만 2023년 다이어리를 구매하면서 성난 파도 위에서 그물질을 하는 다이어리 커버의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무심코 구매를 했는데 그게 바로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토미야 36경이었다. 책을 통해 만난 호쿠사이지만 그의 그림을 선택한 시인의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서윤후 시인 같은 심정으로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그림을 선택한 건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이외에도 춤을 좋아해서 앙리 마티스의 춤추는 그림들 또한 좋아했던 오은 시인과 어린 시절 다른 어린이들과는 달라 보이기를 바랐던 김현덕 시인의 눈에 들어온 헤몽 페네의 그림들, 무작정 피아노가 좋았고, 성화(聖畵)가 좋아서 들락거린 교회를 통해 만난 밀레의 만종과 신미나, 간송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난 최북의 그림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된 이현호, 피에르 보나르를 통해 어린 시절 그리운 기억을 반추해낸 최재원 , 우연히 그녀(이소화)를 만났지만 얼굴보다 그림을 통해 그녀를 더 애정 하게 된 박세미 시인 등 당신들의 그림들의 8인의 시인들 눈에 들어왔고, 당신들의 그림에 답해주고 있는 시인들을 보면서 그들의 시들이 읽고 싶어졌다.

 

열여덟, 내 인생은 용도를 알 수 없는, 피아노의 가운데 페달 같았다.(122쪽)

 

이 책을 읽으면서 시인과 화가라는 예술가들의 조합도 신선했지만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시인들은 어떤 방식으로 접했고, 어떻게 느꼈으며, 무엇을 통해 감상하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았고,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시인들의 감성과 그 감성으로 무장한 어린 청춘들의 치기 어린 모습을 엿볼 수 있어서 더 좋았던 거 같다. 가면 갈수록 시인들의 설자리가 줄어들고 있지만, 시(詩)는 우리들의 보편적 정서를 담고 있는 창작물이기에 예전처럼 많은 분들에게 다시 사랑받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고, 여기에 나온 8인의 시인들이 그 중심에 서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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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하고 고결한 밤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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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루이즈 글릭의 시집(야생 붓꽃, 아베르노, 신실하고 고결한 밤)들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집이《신실하고 고결한 밤》이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묘했던 게 옛날 어렸을 때의 추억이 생각이 났다. 아주 어렸을 때 처음 집을 떠나 여행을 갔던 외삼촌댁의 허름한 마룻바닥에서 낮에 잠을 자다가 밤낮이 바뀐 줄도 모르고 밤을 아침으로 착각했던 기억, 혼자 집을 지키면서 부모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리던 모습들, 가족들과 기차로 여행하면서 창밖으로 무수히 지나간 수채화 같은 장면들의 지나침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어린 시절 가족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소중한 기억으로 다가왔다.


《신실하고 고결한 밤》에 수록된 시는 24편인데 그 중에서 이 시집의 표제작인 《신실하고 고결한 밤》은 이 시집에서 가장 긴 8쪽짜리 장시(長詩)이면서 서사가 가미된 한 편의 수필을 읽은 기분이다. 작가 자신의 행복했던 이야기를 단순하게 시작해서 묘한 여운을 주며 끝을 낸다. 한 소년의 아주 어렸을 때 사소한 관찰의 기억들을 통해 루이즈 글릭은 자신의 이야기를 살포시 집어넣는 것처럼 보인다. 집 밖의 곤충들이 알을 까고, 새들이 지저귀며, 개와 공놀이하며 놀았던 모습들, 그 기억 속에 큰 나무처럼 존재하던 부모님과 형과 이모가 이제는 옆에 없다는 공허함이, 그리고 이제는 그 위치가 돼버린 내 모습을 보면서 느꼈을 허전함이 이 시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어서 묘한 아련함이 밀려왔다. 상대를 떠나보낼 때 ‘완벽한 끝은 없고 무한한 끝만 있다’(본문 29쪽)는 이 시의 마지막 문구를 읽으면서는 어딘지 모를 종착역을 향해 나가가야 하는 우리들의 삶 또한 무한한 끝을 향해 달리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에서 나 생각하네, 너를 떠나야겠다고. 보자 하니

완벽한 끝은 없는 것만 같아.

사실, 무한한 끝들이 있지.

아니면 일단 누군가 시작하면,

다만 끝이 있을 뿐.

(본문 29쪽, ‘신실하고 고결한 밤’ 中)


​루이즈 글릭의 시집 3권을 읽으면서 시(詩) 문학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과 정말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삶이라는 여정을 통해 끝이 어딘지도 모를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는 우리들, 그 달리는 와중에 여러 경험들을 하게 되는데 죽음이 될 수도 있고, 신화가 되기도 하고, 자연과 합일되는 동화 같은 삶을 살기도 한다. 그 가운데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의 기준은 바로 나다. 나를 통해 너가 되고, 너를 통해 우리가 된다. 나를 넘어 우리가 되어가는 모습들 속에서 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루이즈 글릭이 말하는 삶을 대하는 명료함을 위한 노력들이 아닐까? 상처와 죽음, 헤어짐과 만남을 수없이 반복하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무수한 끝을 대면했을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는지, 그 끝에서 우리는 무엇을 사유해야 하는지 루이즈 글릭의 시집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무수한 끝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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