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의 책방 독본 - 실현 가능하고 지속하기 쉬운 앞으로의 책방
우치누마 신타로 지음, 양지윤 옮김 / 터닝포인트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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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면서 수많은 서점과 책방들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했지만 아직까지 책은 본래의 모습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속으로는 골병이 들고 있는 거 다 아는데 겉으로 괜찮다고 말하는 책들의 모습을 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시간이 흘러 현재엔 전자책과 오디오북의 역습으로 힘겹게 버티고 있는 책들에게 힘내라는 의미에서 책도 서점에 가서 구매하고, 독립서점에도 다니면서 응원해보지만 나의 응원이 책들에게 스며들기엔 너무나도 역부족임을 느낀다. 책방의 운명은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시간이 더 흐르게 되면 웃고, 울면서 책들과 함께했던 우리들의 행복했던 추억들은 이제 아련한 기억들로 마음속에서 리플레이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북 코디네이터가 바라본 앞으로의 책방은 어떻게 될까?

그렇게 낙관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비관적이지도 않다고 말해주고 싶다. 우선 책방이 성공하기 위해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여행할 때 즐거움, 친구들과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실 때의 즐거움처럼 책방도 즐거워야 사람들이 찾는다는 것이다. 책방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책을 발견했을 때, 책방을 통해 새로운 흥미를 발견했을 때, 책방에서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책방에 가는 것이 즐겁고, 그 즐거움이 책방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자 힘이다.


그렇다면 책방에 가는 즐거움만으로 책방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어느 누구도 내릴 수 없지만 이 책에서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긍정적인 책방의 모습을 제시한다. 책방은 서점보다 작으면서 동네 주민들이 오다가다 쉬면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사랑방 역할을 하면 더없이 좋겠다. 여기에 책만 팔아서 책방을 유지하는 시대는 끝났고, 책의 덧셈, 뺄셈만으로 이익을 내기가 어렵기에 이제 책방도 곱셈을 할 줄 알아야한다고 이 책의 저자 우치누마 신타로는 말하고 있다. 책의 판매뿐 아니라 이벤트나 각종 토크 이벤트 개최를 통해 책방에 다른 분야를 곱하라는 것이다. 책방에서 책을 파는 시대는 지났다. 책방에서 음반이나 가구, 생활에 필요한 잡화도 팔고 아침에는 영어 회화 교실, 저녁에는 맥주를 마시면서 북 콘서트도 여는 책맥 파티, 더 나아가 책만이 아닌 다른 물건의 판매를 통해 복수의 수입원이 생긴다면 책 판매가 부진할 때 그걸 보충할 수 있고, 그 보충을 통해 책방을 계속 유지해나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단, 책 자체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고 변하는 세상에서 책만큼은 변하지 말고 우리들 곁에 친구로 남았으면 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책방이 전자책과 오디오 앱과의 생존경쟁에서 지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우리들의 도움 또한 절실하다. 인터넷 보다는 서점을 이용하고, 우리 동네에 새로 생긴 책방이나 독립서점이 있다면 방문해서 책도 구경하고 책도 읽으면서 동네 사랑방처럼 책방을 이용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책방의 미래가 걱정되는 분들께 이 책에 나온 희망의 메시지로 책방은 계속해서 살아남을 거라고 말하고 싶다. 책방은 우리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애인 같은 존재니깐.


급속히 진화하는 가상 현실 기술은 머지않아 현실과 완전히 똑같은 수준에 도달하여 경험 그 자체가 될 것이다. 물론, 현실의 서점에 가서 책을 사는 체험도 디지털로 완전히 재현 가능하게 된다. 그때가 오면 현실의 서점이 무용지물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질문은 히말라야 상공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비용이 드는 경험이 저렴한 가격으로 가능해졌을 때 사람은 실제로 히말라야에 오르게 될지 묻는 것과 같다.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의 문제이다. 지금도 어떤 사람은 직접 여행을 가지 않고 구글 맵의 스트리트 뷰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는가 하면 오히려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지는 사람도 있다.(본문 40쪽 中)


당신은 구글 맵의 스트리트 뷰를 보면서 편한 의자에 앉아 여행을 하겠는가? 아니면 직접 걷고 체험하면서 여행의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겠는가? 앞으로의 책방 독본은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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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보는 미술관 - 명화를 이해하는 60가지 주제
이에인 잭젝 지음, 유영석 옮김 / 미술문화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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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 그림을 보면서 받았던 묘한 여운(충격)이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이탈리아 화가인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도마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1601~1602>란 그림인데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도마(토마스)가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상처가 난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는 그림이었다. 정말 실감날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도 묘사였지만 예수님이 오른손으로는 수의를 젖히고 왼손으로 도마의 손목을 잡아 그가 검지손가락을 상처 속으로 더 깊이 집어넣을 수 있도록 인도하는 모습은 정말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때의 자극이 그 어떤 배경이나 소품 없이 인물들의 사실적인 묘사만으로도 여운을 줄 수 있는 그림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 그림을 계기로 명화를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


혼자 그림을 감상하는 것과 미술관에서 도슨트(docent)에게 설명을 들으면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정말 천지차이다. 그림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혼자 감상하면서 그 그림에 표현된 기법이나 구성을 이해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혼자서 그림을 감상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런데 이 책 《가까이서 보는 미술관》을 읽으면서는 한 명의 친절한 도슨트와 함께 그림을 감상하는 느낌을 받았다. 60개의 그림을 친절한 설명과 함께 각자 그림에 사용된 양식과 기법을 말해주고, 그림을 세분화해서 그 부분마다 표현하려고 했던 작가의 의도를 설명해주고 있으니 정말 그림에 해박한 도슨트가 이 책 속에 들어있었다.


서양미술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그림은 <모나리자>다. 사람들은 <모나리자>란 그림은 잘 알지만,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물체의 윤곽선을 자연스럽게 번지듯 그리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이 적용된 사실은 잘 모른다. 단지 <모나리자>란 그림이 오래돼서 희미하게 보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나리자>에 나오는 여인이 머리에 쓰고 있는 검은색 투명 베일을 발견하고, 그 투명 베일을 통해 그녀가 상喪중임을 알아채는 분들은 얼마나 될까? 나도 <모나리자>에 나오는 여인에 검은 베일을 썼고, 그것이 상喪중임을 암시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이렇듯 우리는 그림을 감상하면서 작가와 그림의 이름은 잘 알지만 깊게 들어가서 이 그림이 어떤 기법을 사용했고,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른다. 그림을 감상함에 있어서 이런 취약한 부분을《가까이서 보는 미술관》이 채워주고 있는 이 부분이 이 책의 강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16세기 미술사학자 조르조 바사리는 모나리자에 대해 “너무나 완벽하다. 이는 인간의 솜씨가 아니라 신의 솜씨다”라고 극찬했다. 또한 19세기 비평가 월터 페이터는 불가해하다... 무언가의 불길한 손길이 여기 깃들어 있다. 이는 레오나르도의 전 작품에 깔려 있다”고 서술했다.(책 45쪽 中)


지금은 표지가 바뀌었지만 김영하 작가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예전 표지가 프랑스 화가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책을 읽으면서 왜 이런 그림을 책의 표지로 썼는지 궁금했었는데《가까이서 보는 미술관》을 통해 설명을 들으니 죽음을 묘사하는 데 있어선 정말 절묘한 그림이었다고 생각한다. 친구이자 동료였던 마라의 죽음을 설득력 있을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려서 그의 죽음을 애도함과 동시에, 이 죽음과 관계없는 세세한 부분들은 과감하게 삭제함으로써 신고전주의 양식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화가로 기억된 다비드, 그의 그림도 이 책《가까이서 보는 미술관》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사람마다 책이나 영화를 보고 느낀 점들이 다르듯 그림 또한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 다양한 해석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림을 잘못 해석하고 이해한다면 그것 또한 좋지 못한 감상법이라고 본다. 그림을 통해 작가의 의도, 표현양식, 기법들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그림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올바른 감상법이 아닐는지. 고로 이 책《가까이서 보는 미술관》이라는 도슨트를 통해 명화를 쉽게 이해하고 올바르게 접근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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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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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포기한 책들이 더러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렵기만 한 책, 읽는데 하품이 나올 만큼 지루한 책, 내용보다는 작가 자신의 앎을 내세우는 책, 읽기 거북할 정도의 성적(性的) 묘사가 많은 책 등등. 그 중에서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파격적인 소재로 인해 읽기가 너무나도 거북했다. ‘롤리타’라는 선정적인 제목은 차치하고서라도 열두 살 소녀와 서른일곱 남자의 만남이라는 소재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다. 이름도 우스꽝스러운 ‘험버트 험버트’가 ‘롤리타’를 데리고 다니면서 나누는 노골적인 성적(性的) 묘사가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를 넘어서 인간이라면 넘어서는 안 될 윤리적인 선마저 무너트린 험버트 험버트가 너무나도 싫으면서 짜증이 났다. 언어적인 유희(遊戱)가 가득한 작품이라는 말만 믿고 읽다가 덮기를 두어 번, 그러다가 이번엔 독서모임에서 선정한 책이기에 끝까지 읽기만 하자는 마음으로 읽었고, 결국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숨죽이며 덮을 수 있었다. 다 읽은 후 나보코프가 쳐 놓은 덫에 걸려 허우적거리다가 책 읽기를 포기해버렸던 내 자신이 정말 싫었다. 소설은 말 그대로 작가가 지어낸 허구(fiction)이고,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의 장면들이 사실 그대로가 아닌 작가의 상상력으로 창조된 것일진대 그 거북함이 싫어서, 선정적인 소재와 험버트의 소아성애자 같은 삶이 싫어서 책 읽기를 포기했던 내 사유의 부족함에 절망했고, 그 절망을 통해 <롤리타>에서 나보코프가 묘사했던 언어의 희롱과 조롱이 나를 향하고 있는 거 같아서 괜히 창피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그녀의 정강이를 스치듯 쓰다듬는 내 손끝에 섬세한 털의 여리디여린 저항이 느껴졌다. 나는 어린 헤이즈Haze가 뿜어내는, 여름 안개Haze처럼 자극적이면서도 건강한 열기에 넋을 잃었다.(98쪽 中)


나보코프는 <롤리타>의 서문에서 ‘존 레이 주니어’ 박사라는 그럴듯한 인물(나보코프가 창조한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온 탄생 배경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서문의 마지막에서 소설의 주인공인 험버트를 병자로 취급하면서 정신병리학의 고전이자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끼칠 윤리적 충격은 대단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프로이트를 대단히 혐오했고, 그의 작품 속에 도덕적 교훈이나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거 자체를 싫어했다. 소설의 말미에 나오는 것처럼 나보코프는 ‘일단 책을 쓰기 시작하면 오로지 이 책을 끝내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500쪽)이었다. <롤리타> 또한 그렇게 해서 탄생한 책이고, 존 레이 주니어 박사의 서문을 통해 이 소설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시나브로 나보코프가 쳐놓은 덫에 꽁꽁 묶여서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할 거라고 본다. 이처럼 <롤리타>를 읽으면서 도덕적 교훈을 찾으려 하거나 윤리적인 잣대로 나보코프의 소설을 재단하려는 독자들이 계신다면 이 소설에서는 제발 그러지 말것을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나보코프의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그가 왜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롤리타>를 썼을는지 이해도 간다. 나보코프는 어려선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20대를 맞이해서 맞닥뜨린 아버지의 암살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리라. 아버지의 죽음으로 소년가장이 되어 생계를 책임졌을 그였기에 글을 쓰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생계수단 중 하나였고, 쓰다 보니 그가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는 걸 발견했을 거라고 본다. 탁월한 글쓰기에 돈벌이가 되는 에로티시즘이 콜라보 되었으니 독자들에게 소설이 팔리는 건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이와 함께 러시아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다시 미국으로 떠돌아다녀야 했던 그의 방랑자 같은 삶이 이꽃 저꽃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나비의 삶과 무척이나 닮았었고, 그의 나비 같은 삶이 <롤리타>에서 어린 소녀 ‘로’와 함께 미국 전역을 누비면서 험버트의 광기어린 사랑으로 표출되지 않았나 짐작해본다.


<롤리타>를 읽으면서 세상과 등장인물들을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언어적 유희 못지않게 시점의 변화 또한 이 소설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부분이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험버트는 소설에서 ‘나’라는 1인칭으로도, ‘험버트’라는 3인칭으로도 불린다. ‘나’와 ‘험버트’를 넘나들며 이 소설의 주인공인 ‘험버트’는 이 소설의 작가이자 주인공의 행세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누가 쓴 소설이던가? 바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쓴 소설이고, ‘험버트’는 ‘나보코프’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아니던가? ‘험버트’를 나보코프와 동일시하는 순간 이 소설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헷갈리게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나보코프’가 쳐놓은 또다른 덫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롤리타>를 읽으면서 순간순간 저자 행세를 하는 험버트를 잡아내지 못한다면 나보코프의 비웃음을 책을 통해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절망적이고 가슴 아픈 것은 내 곁에 롤리타가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화음 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495쪽 中)


책 서문부터 독자들을 농락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지금에서야 완독할 수 있었음에 나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다. 이번에도 읽다가 포기했더라면 <롤리타>는 어린 여자아이를 좋아한 한 남성의 변태적인 소설이자 소아성애자의 사랑을 거침없이 묘사한 쓰레기 같은 소설이었다고 자위하며 험버트에게 저주를 퍼부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의 고향인 러시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공간적 상실감과 어린 시절의 나보코프로 돌아갈 수 없는 추억에 대한 부재, 그리고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언어에 대한 상실감이 <롤리타>를 통해 주인공인 험버트의 광기어린 사랑에 투영됐다고 말하고 싶다. 더 나아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엔 그가 그리워한 추억들을 숨긴 채 여기 저기에 덫을 놓고 순진한 나비들을 아름다운 꽃으로 유혹하고 있는 나보코프가 있을 뿐이다. <롤리타>가 포르노그래피적인 소설이자 비윤리적인 소설이라고 말하는 순간 나보코프는 언어유희(言語遊戱)라는 페르소나 속에서 ‘큭큭’ 하고 비웃으면서 독자들을 조롱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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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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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강렬함에 이끌려 사랑에 빠졌던 두 사람 폴과 수전, 그리고 그렇게 불타올랐던 사랑이 점점 변해감을 느끼게 되고, 마지막에 가서는 서로에게 깊은 상처만을 남긴 연애의 아픔으로 남았을 소설이 줄리언 반스의 《연애의 기억》이다. 그들이 했던 사랑의 기억 속에는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사랑의 달달함과 함께 첫사랑에 임하는 순수와 열정도, 남편의 폭력에 상처받은 깊은 슬픔도, 사랑이 계속 지속될 거라는 행복과 그 행복이 얼마 가지 못하고 파멸해가는 고통도 함께였다. 하나 이 모든 것들이 쌓이고 쌓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그들의 사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는지 도통 모르겠다. 소설을 읽었음에도 뭔가 찝찝한 이 기분을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참, 좆같다.


《연애의 기억》을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는 테마는 남녀 간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나이 차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 얘기가 이 소설의 기본적인 플롯인데, 과연 줄리언 반스는 풋내 나면서 실수투성이인 첫사랑을 기억하고자 이 소설을 쓰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 그(줄리언 반스)가 이 소설을 쓴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행복할 줄만 알았던 결혼생활이 두 딸을 낳고부터 점점 힘들어지더니 남편이 가하는 폭력성은 나날이 더 심해져만 가고, 그 폭력을 통해 여자로서의 수전은 생이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으리라. 이런 상처 덩어리들이 그녀를 비참하고 더 우울하게 만들었을 테고, 그 괴로움으로 인해 잠 못 드는 밤을 약간의 알코올이 그녀를 잠들게 만들었겠지. 그러다가 우연히 나간 테니스 클럽에서 풋풋한 폴을 만나게 되면서 수잔 그녀에게 사라졌던 여성의 아름다움을 되찾았을 것이다.


불처럼 훨훨 타오를 줄만 알았던 폴과 수전은 살아온 방식과 나이차에서 오는 세대 차이, 사랑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조금씩 차이를 보이게 되고, 그 차이가 점점 벌어지면서 영원하기만을 바랐던 그들의 사랑은 삐걱대기 시작한다. 돈이 없어도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폴과 사랑을 하며 같이 살려면 방 한 칸이라도 빌릴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한다는 수전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이 그들을 점점 멀어지게 했으며, 그 괴리감을 좁히기 위해 술을 마셔야 했던 수전은 다시금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이라는 깊은 늪 속에서 점점 파멸되어 가는데...


책 본문을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그는 자살을 하는 사람처럼 사랑에 빠졌다.” (298쪽)

이 문장만으로도 폴이 얼마나 맹목적이면서 위태위태한 사랑을 했을지 짐작이 간다. 자살을 하는 사람처럼 사랑을 했다면 그 사랑은 분명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수전은 폴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했다. 그녀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를 있는 그대로 보았고, 그를 있는 그대로 믿고 사랑했다. 그렇지만 폴은 달랐다. 처음엔 수전의 마음과 같았을지 모르겠으나 나중에 가서는 자살을 하는 사람처럼 사랑에 빠졌으니 폴이 했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에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중년 여인에 대한 연민이 아니었을는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그 자신의 미래를 보면서 확률을 평가한 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가운데 어느 것이 어울리는 전망인지 결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기질에 삶을 갖다 놓았다. 반면 그녀는 삶에 자신의 기질을 갖다 놓았다. 물론 그것이 더 위험했다. 기쁨은 더 주지만, 안전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본문 295쪽 中)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가 ‘은수’에게 외쳤던 저 한 마디가 수전이 폴에게 전하는 메시지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서로가 사랑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 사실 속에서 폴과 수전이 거짓 없는 사랑을 했다면 그들의 사랑은 그 누구에게도 손가락질 당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사랑은 두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그 사랑의 한 축인 수전의 목소리가 이 소설에 반영이 안 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수전이 이 소설에 화자로 등장한다면 과연 그녀는 무슨 이야깃거리를 우리에게 풀어놓을까? 이런 여운을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놓는다는 게 줄리언 반스의 필력이고, 그의 소설이 많은 분들께 사랑받는 요소일 것이다. 줄리언 반스의 사랑을 이 책 《연애의 기억》을 통해 확인했으면 좋겠고,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자주 등장했던 문구를 통해 우리들의 연애의 기억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다시 한번 떠올렸으면 한다.


사랑에서는 모든 것이 진실인 동시에 거짓이다. 사랑은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한 가지 주제다.

(본문 304쪽, 331쪽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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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섬으로 가다 - 열두 달 남이섬 나무 여행기
김선미 지음 / 나미북스(여성신문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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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면 산에 오르곤 한다. 요즘 같은 겨울엔 하루가 멀다 하고 산에 오르고 있다. 겨울 산을 좋아하거니와 눈꽃으로 멋을 부린 나무를 보면 쌓인 스트레스가 스르르 녹는다. 산에 오르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설해목(雪害木)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지만 이것 또한 자연의 섭리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무들의 고통을 갈음해본다. 내가 가는 등산로 코스에 거의 다 오르면 크리스마스트리로 잘 알려진 구상나무를 만나게 되는데 눈에 덥힌 구상나무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壯觀)을 연출한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곧추선 솔방울 닮은 열매를 보고 있으니 순간 이희승 선생님의 수필인 <딸깍발이>가 생각났다. 의복은 남루하고, 코에는 콧물이 질질 흘러내리는 남산골샌님이었지만 청렴과 지조는 그 서릿발 내리는 강추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그들의 모습에서 구상나무의 곧추선 열매가 딸깍발이를 연상케 했다. 이런 겨울에 눈 덮인 구상나무도 구경하고, 정말 이런 호사를 누리는 나는 참 행복하다.


앞에서 느꼈던 행복감과 이에 더해 놀라움을 이 책《나무, 섬으로 가다》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남이섬에 나무의 종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고, 그 많은 나무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24절기를 기준으로 남이섬의 사계절을 나무와 결부시킨 책의 구성도 좋았고, 나무들의 특성이나 열매를 컬러풀한 사진들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작가의 세심함이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모로 부족한 나를 위로했다. “이 나무의 열매는 이렇게 생겼구나”, “산에 오르면서 본 나무가 이 나무였어”, “내가 알고 있던 나무의 이름이 그게 아니었네?", 이 나무 이름의 유래가 이래서 이렇게 지어진 거구나“ 등등 작가가 책에 올려놓은 나무의 사진들은 내가 알고 있는 나무의 지식들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에 충분했다.


꽃이 지고 잎이 나든, 꽃과 잎이 함께 나든, 아니면 잎을 먼저 내밀든 선택은 오롯이 나무 몫이다. 나무는 오랜 세월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방식을 취하고 유전자 속에 각인시켰다. 그것을 두고 왜 그랬는지 따져 물을 수는 없다.(본문 106쪽 中)


옛날 왕실의 시녀들이 임금이나 왕비의 좌우에서 들던 커다란 의장 부채가 ‘미선(尾扇)’인데, 그 미선이라는 부채를 닮아 이름 붙여진 미선나무와 모과나무의 열매를 가리키는 ‘명자’에서 유래한 명자나무의 꽃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무에서 피는 꽃들의 미모가 뛰어나서 노총각의 마음을 이렇게 마구 흔들어댈 수도 있구나“를 가슴 저리게 느끼는 순간이다. 봄의 전령사인 노오란 복수초를 보고 있으면 입에서 침을 흘리고야 마는 나를 발견한다. 긴말하고 싶지 않다. 책 속의 말처럼 ‘봄이 와서 복수초가 핀 것이 아니라 복수초가 피어서 비로소 봄이 온다’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이뿐만이 아니다. 벚꽃을 필두로 여름엔 나무수국, 배롱나무, 가을엔 산딸나무와 측백나무, 겨울엔 구상나무와 주목, 개비자 등 이 책에서 소개하는 나무들을 보면서 남이섬의 사계절을 나무들의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남이섬은 나무들의 천국이자 나무들로 가득 찬 섬이었다.


꽃바람 부는 봄날,  남이섬에 가야지. 가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 통보를 받고 꽃잎을 떨군 채 시무룩한 히어리의 어깨도 두드려주고 싶고, 미선나무와 명자나무의 미모 대결에 승자를 가려주고 싶다. 이러면 남이섬의 왕벚나무가 시샘하겠지만 섭섭하더라도 이번만큼은 벚꽃 네가 미선 양과 명자 씨에게 양보해줬으면 좋겠어. 책 한 권 가져가 버드나무 밑에서 책도 읽고 싶고, 축의금도 두둑이 넣어가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 주목(朱木)의 주례로 산사나무의 결혼식에도 참석할 거야. 집으로 오는 길엔 산사 氏가 답례로 건네준 화관을 그녀에게 전해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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