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귓속말
이승우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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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처음 만난 건 <식물들의 사생활>을 통해서였다. 이승우라는 소설가의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소설의 제목에 반해서 읽었던 소설 중에 몇 안 되는 소설이 바로 <식물들의 사생활>이었다. 긴 호흡, 쉽게 다가오는 문장들, 구(句)의 반복, 간결한 문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다 읽은 후 다시 읽었을 때 그 문장이나 구절들이 심오하면서 난해하게 다가왔다. 이런 심오함과 난해함을 독자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가 친절하게 부연 설명을 해주고 있다는 것도 시나브로 알게 됐다. 그 뒤로 <생의 이면>과 <사랑의 생애>를 읽으면서 이승우란 작가가 우리에게 베푸는 문장의 친절함은 친절함을 과장한 메타포란 것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이렇듯 사랑과 인생에 대해 그만의 글을 쓰고 있는 이승우 작가는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는지 궁금했고, 그 글쓰기 속에 담긴 함의가 무엇인지 더 알고 싶어졌다.


글쓰기에 대한 그의 귓속말은 올곧으면서도 정직했다. 소설가는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알기를 원하는 것을 쓰기에 자신을 잘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타인의 삶을 소재로 글을 쓰기 이전에 자기 자신의 삶을 알아야 하고, 그 삶을 통해 글쓰기가 이루어져야 타인의 삶에 대해서도 글을 쓸 수 있다는 단순 명료한 진실을 이야기한다. 자신을 적나라하게 해부하고 난 다음 타인의 삶에 욕망과 사랑이라는 덩어리를 뒤집어씌우면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가 삶이 되어 우리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책에서는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길 한복판에 웅크리고 앉아서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덩치 큰 개를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글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큰 웅덩이에 빠진 자기 자신을 구해달라고 신에게 손을 내밀어 보지만 되돌아오는 건 무신론자들의 믿음이 더 강하다는 진실과 그 진실 속에 묻혀버린 소설가들의 믿음이 그들보다 더 약하다는 현실의 냉혹함뿐이다.


글쓰기에 대한 그의 귓속말은 불완전하면서도 완전했고, 불친절하면서도 친절했다. 제아무리 완전하게 쓰려고 해도 불완전한 게 문장이고, 잘 쓴 문장도 그 속성 자체로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것이지만 자꾸 덧붙이고 끊임없이 퇴고하면서 완전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작가의 운명이라고 말한다. 누구나가 다 아는 일반론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내가 관찰하고 연구하고 따져보고 사색해서 나온 결과물이 바로 글쓰기의 기본자세라는 것이다. 글쓰기가 부담으로 다가오는 순간 그 글쓰기는 더 이상 글쓰기가 아닌 과업으로 남게 되는 숙명이 바로 글쓰기인 것처럼.


그 사람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할 때 그 일은 과업, 즉 부담이 된다. 그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할 때 그 일은 자부심, 즉 영광이 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은 그 사람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반대는 아니다.(본문 62쪽 中)


글쓰기에 대한 그의 귓속말은 야릇하면서도 냉철했다. 야릇한 말로 글을 쓰라고 하지만 그 야릇한 글쓰기 뒤에는 욕망이 숨어서 작가들을 유혹한다. 나만을 위해 글을 쓸 것인지, 독자나 출판시장을 겨냥해서 글을 쓸 것인지는 오롯이 작가의 몫이지만 그 선택이 어려운 건 생존의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우는 ‘초연함’이라는 단어를 통해 이 상황에 대처했다고 말한다. 독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 하는 어름산이처럼 글을 써왔기에 지금까지 왔고 현재의 위치에 오른 그이지만 초연함이 왠지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번 에세이는 그의 전작들에 비해 조금 쉽게 읽으려고 했는데 이것 또한 내 욕심이었다. 나태주의 ‘풀꽃’에 나오는 시처럼 자세히 보아야 보이고, 오래 보아야 이해가 됐다. 이승우의 글이 바로 그렇다. 그는 허투루 글을 쓰는 법이 없다. 잘못 읽어서 삼천포로 빠지길 바라는 것처럼 글을 쓴다. 그걸 깨닫고 이해하는 건 나중 문제다. 자만심으로 글을 읽어선 안 된다는 걸 이번 이승우의 《소설가의 귓속말》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에세이에 나오는 ‘엔도 슈사쿠’와 ‘조성기’의 작품들 또한 꼭 읽어보려 한다. 그들의 작품에서 글쓰기의 영감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책을 읽으면서 그가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다.


요동치는 세계의 변화와 상관없이, 혹은 그 때문에 더욱 자기 문학을 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용기가 아니라 욕망의 억제, 세상과의 거리두기, 일종의 초연함일 것이다. 하기야 모든 것을 흡수해버린 시장의 한복판에 살면서 이런 것을 지킨다는 것이 용기 없이 가능한 일 같지는 않다.(본문 204쪽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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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의 인문학 - 미셸 파스투로가 들려주는 색의 비하인드 스토리
미셸 파스투로 지음, 고봉만 옮김, 도미니크 시모네 대담 / 미술문화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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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만 되면 여당, 야당 할 거 없이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그들을 대표하는 색이 등장한다. 당도 당이지만 색을 통해 당의 이미지를 알리고 선전하는 것이다. 파란색, 핑크색, 노란색, 녹색 등등 그들만의 색상을 드러내놓고 유권자들을 유혹한다. “투표는 투표이고, 색은 색이다”라는 분들도 계실 테지만 색상은 분명 ‘정치’라는 다소 무거운 분위기를 밝게 상쇄시키는데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됨과 동시에 유권자들의 마음을 유혹하기에 무척 매력적인 요소다. 이번 선거에 그들만의 색상을 두르고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는데 있어서 어떤 색깔이 대한민국 이곳저곳을 수놓을는지는 지켜볼 일이다.


어려서부터 초록색과 노란색을 좋아했다. 초록색은 파릇파릇하고 생동감 넘쳐서 좋았고, 노란색은 내가 좋아하는 꽃들_개나리, 프리지어, 유채꽃_을 보고 있으면 향기는 물론 노랑 자체가 마냥 좋았다. 초등학교 때 비 오는 날 노란 우비를 입고 오는 친구들을 보면서는 부러움의 대상에서 은연중에 노란색을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한데 미셸 파스투로가 전하는《색의 인문학》을 읽고선 초록색과 노란색은 내가 생각하는 그런 행복한 색깔이 아니었다. 겉보기엔 생동감 넘치고 파릇파릇함이 느껴지는 녹색이었는데 그 속을 들여다보니 이질감을 느낄 정도로 생소했다. 오래전부터 중세 사람들은 녹색 뒤에는 무언가 흉계를 꾸미고 있어 음흉하고, 위선적이며, 불안정한 본성을 지니고 있어 위험한 색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증거로 중세 시대 그려진 악마의 모습은 녹색으로 그려졌고, 빨거나 햇볕을 받은 녹색은 쉽게 바랜다는 사실, 16세기부터 녹색 펠트를 두른 탁자 위에서 도박을 했고,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에도 이어져서 관청 회의실의 탁자와 잔디가 깔린 스포츠 경기장, 테니스 코트나 탁구대도 녹색이라는 것이다. 스포츠에 녹색을 많이 사용한다는 건 중세부터 내려온 노름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증거다. 거기에 미국 달러가 초록색인 것도 도박을 상징한다는 초록의 어두운 면을 간접적으로 방증하고 있다.


색은 복잡하고 기이하다. 우리가 만든 범주로 쉽게 분류하여 설명하기 쉽지 않다. 색의 개수는 과연 몇 개인가? 아이들은 자동으로 네 개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섯 개라고 생각했다. 뉴턴은 프리즘을 통과한 스펙트럼의 색들을 일곱 개로 나누었다. 미셸 파스투로는 우리가 빨강, 하양, 초록, 노랑, 검정의 여섯 가지 색으로 이루어진 체계 속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11쪽, 책 첫 머리 中)


 이뿐만이 아니다. 이 책에서 노란색은 온갖 오명을 다 뒤집어쓴 색이라고 말한다. 빛바랜 사진, 쓸쓸히 떨어진 낙엽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시쳇말로 을씨년스럽다. 배신의 상징인 유다의 옷 색깔, 화폐 위조범의 집 문에 칠해진 색깔은 노란색이었고, 나치의 계획에 의해 ‘게토’에 강제 수용된 유대인들의 명찰(별)의 색깔 또한 노란색이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종교 의식이나 결혼식 등 중요한 행사에 노란색을 입었고, 중국에서는 오로지 황제만이 노란 옷을 입을 만큼 사랑받았던 노랑이 중세에 이르러 금색과 경쟁에서 노랑이 패했기 때문에 온갖 오명을 쓴 색으로 전락했다고 미셸 파스투로는 말한다. 생명, 에너지, 환희, 권력의 상징은 금색에 내어준 채 쇠퇴, 질병, 흐릿함을 넘어 배반, 협잡과 거짓을 상징함과 동시에 유럽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색이 바로 노랑이 돼버린 것이다.


노랑, 사람들은 이 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색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노랑은 이방인이요, 무국적자다. 또한 사람들이 경계하며 불명예스럽다고 여기는 색이다. (본문 101쪽 中)


내가 좋아하는 색 위주로 초록과 노랑의 숨겨진 이야기에 대해 말했는데 미셸 파스투로의《색의 인문학》에는 파랑과 빨강, 하양, 검정, 그레이 색 등의 숨겨진 이야기도 함께 설명하고 있다. 사회자와 주고받는 대담 형식의 책이기에 사회자가 질문하면 미셸 파스투로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색에 대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펼쳐진다. 유럽인들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파란색부터 사랑과 지옥이라는 양면성을 돋보이게 하는 빨강, 삶과 죽음이라는 핵심을 말해주는 하양 등의 색깔이 미셸 파스투로의 인문학적 소양과 더해져서 읽으면 읽을수록 색에 대한 재발견을 할 거라고 본다.


‘노랑’처럼 역사를 통해 인류의 아픔이 하나의 색깔에 투영되어 있으면 그 색깔이나 색상은 사랑받지 못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준 색상이 사랑을 못 받는다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진리처럼 보이지만 유행은 반복되기에 과거에 사랑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현재에 와서는 노란색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그 색상 뒤에 숨은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 그 나라의 색상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고, 그 이해를 통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될 거라 생각한다. 색은 모두에게 열려 있고, 그 색을 선택하는 건 바로 우리들의 몫이 될 테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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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화훼영모화
장지성 지음 / 안그라픽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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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자처럼 보이지만 병풍으로 제작된 조선 중기 이영운의 <화조도 8폭>과 우리에게 진경산수화로 잘 알려진 조선 후기 겸재 정선의 <화훼영모초충도 8폭>의 그림들을 보면서 이 책을 읽지 않은 분들께 어떻게 하면 내가 느낀 감정들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그들의 그림에서 아름다움 속에 감춰진 신비로움을 느꼈으며, 우리의 자연과 문화를 사랑한 그들의 마음이 이심전심 내게 전해졌는지 그림을 보는 순간 묘하게 떨렸다. 지금의 시대에서 조선 시대 화가가 그린 꽃과 새, 가축과 곤충들의 그림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고 하면 비웃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영운과 정선의 화훼영모화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나 클로드 모네의 풍경화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울림으로 내게 다가왔다.


대충 그린 듯 보이지만 엄연히 구도가 존재하고, 꽃과 동물, 곤충들을 그린 듯하지만 그것들을 통해 화가의 의도나 주제, 그 시대의 시대상이 반영된 그림이 화훼영모화다. 자연을 소재로 하기에 고독이나 행복, 사랑, 기쁨 등 다양한 감정들을 시적으로 담아내기도 하고, 인간이 바라는 부귀영화나 출세, 소망 등이 그림에 투영되기도 한다. 언어유희를 통해 그 시대를 풍자하기도 하고, 동물들이 상징하는 바를 그림에 표현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시대상을 반영함과 동시에 수신(修身)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세상의 힘듦과 거침을 그림을 통해 묘사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그림에서 찾으려 했고, 그 중심에 화훼영모화가 있었다.


화훼영모화란 쉽게 이야기해서 동물과 식물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꽃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한 쌍의 새나 정원 한편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처럼, 주로 동식물의 시정(詩情) 어린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책 첫머리 中)


책에서는 통일신라 이전의 화훼영모화의 흔적부터 시작해서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와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의 화훼영모화를 연대기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 통일신라 이전에는 그림이라기보다는 ‘흔적’이나 ‘표식’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화훼영모화의 그림들이 미비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소와 말의 그림들과 신라시대 천마도와 유물에 그려진 동식물의 흔적들을 통해 화훼영모화가 시작됐음을 유추할 뿐이다. 고려 시대에 와서는 송나라의 화풍을 답습한 회화와 불교를 중심으로 한 그림이 유행이었는데 공민왕이 그린 <이양도 二羊圖>와 불교의 색채가 강한 고려 불화, 예술품인 고려청자를 통해 화훼영모화가 즐겨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조선 시대에 와서 성리학적 유교문화와 만나 화훼영모화는 꽃을 피우게 된다. 조선 초기 송대 원체화풍(화원畵院 스타일의 그림)에서 유교 중심의 사대부를 바탕으로 한 문인화풍의 조선 중기를 거쳐, 중화주의를 바탕으로 청을 통해 들어온 서양화풍의 영향이 화훼영모화에 투영되고 빛을 발했다. 윤두서를 필두로 심사정, 정선, 강세황, 최북, 변상벽, 김홍도의 그림들이 조선 후기에 그려졌다. 조선 말기에 외척의 세도정치가 본격화되면서 지방은 부패했고, 민중들은 봉기를 일으키는 등 사회혼란이 극에 달했지만 예술 문화는 청대 화풍을 닮아서 더 독특하면서 개성이 넘친 화훼영모화가 탄생했다. 장승업, 김정희, 김수철, 신명연, 남계우 등이 조선 말기에 활약했다. 이렇듯 화훼영모화는 오백 년 조선의 역사를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대상을 반영했고, 문화를 반영했는데 조선 말기 민화를 마지막으로 화훼영모화의 명맥이 끊겼다는 게 정말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물론 그 뒤 장우성, 홍석창, 천경자의 그림에서 꽃과 새가 등장하긴 하지만 예전의 전통적인 화훼영모화가 아닌 다양한 실험과 모색 속에서 새로운 화훼영모화로 창조됐기에 예전 화훼영모화가 퇴색됐음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다.


오늘날 과연 화훼영모화라고 부를 수 있는 그림들이 존재하는지, 또 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입체와 평면의 경계가 무너지고 심지어 연극, 음악, 영상 등 미술 바깥에 있는 것이 미술 안에서 융합하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소재의 그림으로 접근하는 화훼영모화는 마냥 미약해 보였다.(책 387쪽 中)


 이 책을 통해 통일신라 이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화훼영모화를 눈으로 즐길 수 있어서 큰 기쁨이었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가 초충도와 화조도 등 화훼영모를 그리는데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고, 산수화의 대가로 알려진 겸재 정선의 화훼영모화를 통해선 자연을 사랑하는 그림의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비운의 천재화가였던 장승업이 청대 화풍의 영향을 받아 조선 회화의 전통을 끊어놓았다는 비판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선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가 그린 <영모도 대련>이란 그림을 보면 다른 걸 다 떠나서 살아서 나를 노려보는 듯한 매와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놀고 있는 꿩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제 책장을 다 넘기고 난 후 아쉬움은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들을 통해 달래보려 한다. 봄기운이 완연한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화훼영모화는 나에게 가슴 떨린 봄바람을 선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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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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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포터의 소설을 읽고 난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이 ‘기억’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고, 기억하지 않아야 하지만, 어느 찰나에 기억 나고야 마는, 그런 기억의 조각들이 앤드루 포터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사랑과 죽음, 이별과 헤어짐이라는 단어들을 이리 맞추고, 저리 맞추면서 ‘무뎌짐‘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달리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앤드루 포터의 단편들에 고스란히 들어있었다고나 할까. 우리 모두 그 기억에 대해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엔 우리 마음 어딘가에 깊숙이 남아 있었고, 단편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 기억들이 며칠 전 일어난 사건처럼 선명하게 생각이 나서 책장을 넘길수록 그 기억에 대한 긴장감이 나를 더욱 흥분시켰다.


나이가 들수록, 경험하고 하루이틀 지난 일보다 수년 전에 있었던 일을 더 생생하게 기억하게 된다고 한다.(11쪽 ‘구멍’ 中)


‘구멍’이라는 암흑 속에 봉지를 떨어뜨린 후, 그 봉지를 주우려 내려갔다 다시 오지 못한 친구 ‘탈’의 죽음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나’의 이야기를 다룬 <구멍>, 아버지의 부재와 그 부재를 통해 다른 남자를 사랑한 어머니, 그리고 혼자 남은 나의 유일한 벗이었던 코요테의 울음소리를 기억하는 <코요테>, 어른으로서의 가정의 의무와 책임의 경계를 다룬 <아술>, 노 교수와 젊은 여성의 사랑을 통해 이성 간 느끼게 되는 사랑의 감정과 도적적인 윤리 사이에서 방황하는 ‘헤더’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형의 잘못된 행동(폭력)이 얼마나 큰 오해와 왜곡을 불러올 수 있는지에 대한 단상이 씁쓸했던 <강가의 개>, 믿음이라는 미명하에 어릴 때 친구들과 저질렀던 무모함에 대한 기억을 다룬 <외출>, 소통의 부재 속에 관계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 <머킨>,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가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불행을 안고 있다.”라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생각난 <폭풍>, 3쪽이라는 아주 짧은 분량을 통해 사랑의 이중적인 면을 고발한 <피부>, 마지막으로 십 대 시절 목격했던 동성애에 대한 강렬한 기억을 묘사한 <코네티컷>을 끝으로 앤드루 포터의 소설은 끝을 맺는다.


단편들 대부분이 10년도 전인 사건이나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는 것도 특이했고, 화자의 대부분이 ‘나’라고 말하는 남자인데 반하여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만 ‘헤더’라는 여성(나)이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는 점, 대부분의 화자가 어린아이와 성인의 중간 언저리쯤에서 방황하고 배회하는 청소년이라는 점이 이 소설의 특징인데 호기심 많고, 사고뭉치인 청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의 부조리함과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지만 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버거웠던 죽음과 불륜, 폭력과 동성애들이 시간이 지나 어떤 기억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지를 앤드루 포터는 기억하고, 10개의 단편을 통해 세상 밖으로 담담하게 끄집어내 놓았다.


무언가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편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강해져서 그것을 대항하려 애쓴다.(117쪽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中)


친한 친구의 죽음, 부모의 불륜, 가정의 불화, 폭력, 동성애 등 대단히 자극적인 소재인데도 불구하고 앤드루 포터의 단편들은 ‘나’라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사건에 대한 기억들을 그만의 담담한 필체로 써 내려가고 있다. 본인은 이것이 앤드루 포터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의 기복 없이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면서 주인공들 간의 심리적 상황을 툭툭 건드리듯이 자극한다. 읽는 독자로서는 그것이 때론 불쾌하지만 그 불쾌함이 부지불식간에 나를 그 상황 속에 빠져들게 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나에게도 있었는지, 그런 불행한 기억들을 어떻게 지워냈는지를 스스로 자위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이런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겐 이 소설을 읽는 것이 어찌 보면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상실을 경험한 사람을 위로하는 따뜻한 포옹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다음 해에 내가 국어 선생님이 과제로 내준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서 읽게 될 포옹이었다. 사회통념에 어긋나는 포옹이었다. 사랑의 포옹이었다.(257쪽 ‘코네티컷’ 中)


앤드루 포터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버지니아의 무더운 여름 날씨에 수영도 해보고 싶고,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해 질 녘에 들려오는 코요테의 울음소리도 듣고 싶어졌다. ‘로버트’와 ‘헤더’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글렌 굴드’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도 해보고 싶고, 코네티컷 연안의 섬에서 여름휴가도 즐겨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 기억을 통해 앤드루 포터가 단편에서 묘사한 안 좋았던 기억, 불행한 사건들을 행복한 모습들로 바꾸고 싶다. 인생은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겠지만, 인생은 그렇게 달콤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로버트가 죽었다는 사실에 통곡하던 헤더의 모습에서 콜린의 가여움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던 나의 모습을 반성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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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 용서받을 자격과 용서할 권리에 대하여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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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죽을 때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저질렀던 악행이나 비리에 대해 참회를 하는 경우가 많다. 용서를 바라는 의미도 있겠고, 반성의 의미도 있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자기 자신에게는 참회나 반성의 계기가 될진 몰라도 그 행위로 인해 고통받았고, 현재도 계속 고통받는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잔인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참회하고 반성하고 있으니 자신의 죄를 사하여 준다거나, 이제 죽을 때가 됐으니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덜었으면 한다는 그들의 참회가 어떻게 생각하면 화가 난다. 물론 그들의 진정성 있는 고해나 고백을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단, 거기까지다. 어느 누구도 가해자의 범죄나 악행으로 인해 희생이 된 사람들의 용서를 대신할 수 없다. 용서는 피해자가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는 하늘에서 가해자를 지켜보며 읊조릴 것이다. “당신이 죽어서 무덤에 묻혔을 때 그 무덤가에 피어나는 해바라기조차도 보기 싫다고, 그 해바라기를 뽑아 없애버리고 싶다”고 말이다.


킬링필드로 불리는 캄보디아 내전, 르완다의 종족 분쟁, 보스니아 내전,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인 시리아 내전은 학살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손에 꼽는 게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인데 학살된 수만 해도 600만 명이 넘으니 정말 인간의 광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한 가운데 있던 군인 한 명(카를)이 시몬 비젠탈에게 사죄와 반성을 하게 되면서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는 시작한다. 죽어가는 나치 병사가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수감 중인 한 유대인에게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용서를 구했지만 그 유대인은 침묵했다. 그 침묵이 용서의 의미였을 수도 있고, 그 용서의 거절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나치 병사의 용서에 침묵한 시몬 비젠탈은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남긴 채 53명의 답변으로 그 질문을 대신한다. 53명의 면면에는 티베트의 불교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도 보이고, 후기 산업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남긴 철학자인 허버트 마르쿠제도 용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남겼다. 영화 <킬링 필드>의 실제 주인공인 디트 프란, 198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데스먼드 투투 등 세계에서 정치, 역사, 윤리, 문화, 종교 등 각 분야 유명 인사들의 답을 통해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지, 아닌지를 밝히고 있다.


다른 고결한 행동들과 마찬가지로 용서라는 행위는, 용서받는 당사자들을 포함한 타인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즉, 내가 베푼 자비조차도 가까이서 뜯어보면 일종의 오만한 행위로 드러날 수 있다. 어쩌면 내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내가 상대방보다 우위에 선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즉, 내가 상대방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게 된다. “도대체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누군가를 용서하는가?” (본문 201쪽 中)


53명의 ‘용서’에 대한 답변에는 카를의 참회를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의 목소리도 있었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통해 카를을 용서했어야 한다는 입장도 있었다. 그중에서 같은 종교인이면서 ‘용서’에 대해 다른 목소리를 낸 유대교 신학자 앨런 L. 버거와 가톨릭 수녀인 호세 호브데이의 답변은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내게 죄를 짓는 사람은 용서할 수 있지만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사람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앨런과 망각과 용서는 다른 듯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이고, 자신이 당한 악행을 떠올릴 때마다 용서라는 단어가 떠오르기에,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호세 호브데이 수녀의 말에서 용서라는 단어 속에 포함된 함의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해바라기는 기다림을 상징한다. 공교롭게도 이 책은 <해바라기>라는 이름으로 1976년에 출간됐다. 여기서 해바라기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가해자의 무덤 옆에 조용히 피어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참회하고 반성하기만을 기다렸을 거라고 본다. 그 참회와 반성을 피해자가 받아주고 용서해주는 것은 다음의 문제다. 먼저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고, 거기에 대한 죄를 달게 받는 것이 가해자가 피해자를 위한 최선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도 이 세상엔 용서받지 못할 일들이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학살이 자행되는 그곳에서 죽음을 당했던, 지금도 죽음을 당하고 있는 그들의 마음속이 어떠할지를 생각해본다면 과연 용서가 아름다울 수 있을지는 시몬 비젠탈처럼 침묵으로 대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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