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르노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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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글릭의 <야생 붓꽃>이 정원에서 영감을 받은 시라면 <아베르노>는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아베르노는 ‘아베르누스’라고도 부르는데 라틴어로 ‘지옥’이라는 의미이자 나폴리 서쪽에 있는 호수를 일컫는다. 근데 이 호수에는 유황이 분출해서 새들이 날아들 수 없는 곳이라 사람들은 이 호수 아래에 지옥이 있다고 믿었고, 고대 로마인들에게 지하 세계로 가는 입구로 알려진 곳이 바로 이 시의 제목인 <아베르노>인 것이다. 고로 아베르노가 공포의 장소이자 죽음의 이미지가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시를 읽어보면 무섭다기보다는 약간 몽환적이면서 내가 지금 구름 위를 걷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애틋함으로 포장된 싯구들이 가득하다.


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모티브는 ‘죽음’이다. 하지만 시를 읽다 보면 이 죽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시월」에서의 죽음은 사랑하는 삶을 위해 사수해야 하는 생존본능으로 다가오고, 이 시집의 제목인「아베르노」는 떠남(헤어짐)에 관한 이야기지만 그 헤어짐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것처럼 보인다. 봄이 되면 여름이 오고, 가을, 겨울이 오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상실과 죽음을 통해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벌판이 불에 타 없어져도 일 년 후에 다시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처럼 다시금 우리들 곁으로 돌아와 일 년 후 벌판의 모습처럼 활기 넘치는 생이 시작된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다.


알고 보면 자연도 우리와 같지 않다.

자연은 기억의 저장고가 없다.

벌판은 성냥을 두려워하게 되지 않고,

어린 소녀들을 두려워도 않는다.

벌판은 고랑들도 기억하지 않는다. 벌판은 몰살되고, 불에 타고, 그리하여 일 년 후에 다시 살아난다.

(본문 109쪽 ‘아베르노’ 中)


‘시(詩)’가 함축적 언어로 점철된 문학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를 감상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미국 시인의 시를 이해한다는 게 솔직히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시에 흐르는 정서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도 시이다. 다른 그 어떤 미사여구도 필요하지가 않는다. 루이즈 글릭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이 시가 나에게 주는 영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몽환적이면서도 애틋하고, 애틋하면서도 부질없는 삶과 죽음들, 그 속에 감춰져 있던 죽음의 기억들을 루이즈 글릭이 끌어내 올렸고, 그 끌어올린 사유의 단편들이 시집《아베르노》에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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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붓꽃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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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란 감상하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달리 읽히기도 하고, 의미 부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감상평이 갈리곤 한다. 기형도의 우울함이 좋아서 그의 시를 좋아하는가 하면 최승자의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나 사랑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낸 시들을 보면서 마구 분출되는 도파민을 통해 흥분을 끌어올리기도 한다. 짧은 문구에서 어쩜 저렇게 사람을 흥분시킬까 하겠지만 그 짧은 문장 속에 시인이 지금까지 습작하면서 피를 토한 문구들이 하나둘 응축돼 나타나기에 짧은 문장을 통해서도 그(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


미국 작가이자 시인인 루이즈 글릭의 작품은 우리나라에 번역된 적이 없어서 읽고 싶어도 읽지 못하다가 이번에 시공사에서 출간돼 운 좋게 읽을 수 있었다. <아베르노>를 통해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이번에 읽은 <야생 붓꽃>을 통해 퓰리처상을 받았으니 그녀의 시 세계가 미국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고 있는지 알만 하다. <야생 붓꽃>에서는 54편의 짤막한 시들이 담겨 있는데 미국인(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본 정원의 세계, 그리고 그 정원의 세계를 가꾸는 정원사(시인)와 그 세계를 넌지시 바라보는 관조자(신)이 있다. 자연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야생 붓꽃’을 보면서 고통의 끝은 죽음이라고 외치는 한 인간이 있고, 그 고통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야생 붓꽃, 거기에 이런 상황을 무심한 듯 관조하는 신의 모습에서 야생 붓꽃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자연(정원) 속에서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서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가늠해볼 수 있고, 꽃들의 변화무쌍한 모습들 속에서 인간들 또한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루이즈 글릭이 <야생 붓꽃>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루이즈 글릭의 <야생 붓꽃> 속 54편의 시를 읽으면서 그녀의 시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시 속에 감춰진 응축된 언어들은 기형도의 우울함을 넘어선 기쁨이었고, 최승자의 죽음에 대한 초월이었으며, 이상의 난해함 속의 감춰진 평범함과 같았다. 제일 마지막에 실린 ‘흰 백합’을 읽으면서 그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이 됐다. 실수를 해서는 안 되지만 실수를 하고야 마는, 하지만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한 인간의 마음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축 처진 손을 꼭 잡아주는 그(그녀)가 있기에 흰 백합이 그렇게 고결하며 아름다운 지도 모르겠다.


쉿, 사랑하는 이여. 되돌아오려고 내가

몇 번의 여름을 사는지 그건 내게 중요하지 않아요:

이 한 번의 여름에 우리는 영원으로 들어갔어요.

그 찬란한 빛을 풀어 주려고 나를 파묻는

당신 두 손을 나 느꼈어요. (본문 95쪽, 흰 백합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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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 아름다움은 인간을 구원하는가
조주관 지음 / arte(아르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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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그림을 감상(鑑商) 하는데 있어서 육하원칙에 따라 감상평이 갈리곤 한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에 따라 그림을 감상(感想) 하는 느낌이 달라지기에 내가 굉장히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보는 것과 꿈길을 걷는 것처럼 행복할 때 ‘자화상’을 보는 건 다가오는 느낌이 천지차이다. 아름다움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하지만 구원하기 이전에 아름다움을 보는 시각은 우리들 모두가 다르기에 언제 어느 순간에 그 아름다움을 느끼느냐가 그림이 나에게 아름다움을 선물하는지 아니면 크나큰 슬픔을 선물하는지 알게 될 거라고 본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들이 우리들에게 기쁨과 행복만을 선물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행복함을, 때로는 쓸쓸함을 선물하기도 하면서 그 그림을 통해 내가 그 어떤 위로라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림은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길에 동반자 같은 역할을 해주는 친구이기에.


도스토옙스키는 모스크바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청년 시절을 페테르부르크에서, 그리고 한 남자에게 있어 한창일 나이인 30대를 허허벌판인 시베리아에서 형벌 아닌 형벌을 받으면서 보냈다. 어린 시절 엄격하고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지내다가 이제 자신의 적성을 찾아 꿈을 펼칠 나이에 자신의 우상이었던 푸시 킨과 자신을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줬던 어머니의 죽음은 문학소년이었던 도스토옙스키의 목소리가 한동안 나오지 않을 정도의 큰 슬픔을 안겨줬다. ‘페트라솁스키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사형 직전 감형되어 시베리아로 유형을 선고받은 이력을 포함해서 그의 유년시절부터 청년 시절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그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우면서 처절하고 고독한 시간을 보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그에게 글쓰기는 유일한 벗이었고, 무작정 글을 쓰면서 머리에 쌓인 상념을 그림을 감상하면서 그 고독의 끝을 즐겼을 도스토옙스키다.


도스토옙스키는 아름다움의 비밀을 탐구한 작가다. 그의 소설에서 아름다움(美)은 진(眞)과 선(善)을 그 안에서 포괄하고 있다. 인간의 감각에서 아름다움은 유일하게 현시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진과 선의 육화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은 진과 선의 ‘보이지 않는 추상성’이 ‘보이는 이미지’로 현현된 것이다.(본문 138쪽 中)


책에서는 여러 그림들이 나오는데 무리요의 <성스러운 가족>을 보면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라진 못했지만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란 도스토옙스키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고,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이 고팠던 어린 시절의 도스토옙스키가 떠올랐다. 프리스의 <세례자 요한의 참수>란 그림을 보면서는 총살 직전 가까스로 사형을 면하고 유배지였던 시베리아로 떠나는 도스토옙스키의 공포스러운 마음을 대변할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야코비의 <죄수들의 휴식>에서는 시베리아에서 4년간 감옥생활을 한 그의 고통이 나에게까지 전해지면서 도스토옙스키가 러시아의 대문호란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힘든 생활을 버티면서 느낀 감정들을 오롯이 자신의 글 속에 투영시킨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을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유명 화가의 그림들을 보면서 도스토옙스키의 삶을 통한 애환이 떠올랐다는 점이다. 유년시절부터 청년기, 결혼 후 삶,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 소개된 그림을 보면서 그가 느꼈을 감정들을 내가 이심전심 느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게 아렸다. 평탄한 삶을 살았던 작가가 아니었기에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거기에 조주관 교수의 안목이 더해져 도스토옙스키가 어떤 그림을 그렸고, 어떤 그림을 사랑했는지 그의 미술관(美術觀)을 알 수 있었던 것도 책을 읽는 내내 큰 행복이자 즐거움이었다. 마지막으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보면서 환하게 나를 안아줄 그 누군가를 위해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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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평전 - 경험하고, 생각하고, 사랑하라
사만다 로즈 힐 지음, 전혜란 옮김, 김만권 감수 / 혜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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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나 아렌트 평전》을 읽은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유대인의 삶이었다. 얼마 전 읽었던 지그문트 바우만도 그렇고, 이번 한나 아렌트도 그렇고, 유대인으로 20세기를 살았다는 게 녹록지 않았음을 새삼 느낀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유대인을 욕하는 소리를 듣고 자라야 했던 한나 아렌트는 언제 어디서나 당당할 수 있게끔 닥치는 대로 읽고 공부하면서 또래보다 뛰어난 학생이 되려고 노력했고, 유대인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차별과 괄시를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것을 태어나면서부터 몸소 터득한 아이였다. 열네 살 무렵에 철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난해함의 최고봉이었던 칸트와 카를 야스퍼스를 섭렵하고, 괴테, 호메로스를 읽고 외웠으며, 하이데거의 철학을 배우기 위해 거의 필사적으로 매달려 철학 공부에 매진했다. 이런 밑바탕이 한나 아렌트가 세계적인 철학자이자 사상가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고, 그녀가 유대인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차별을 이겨낼 수 있는 큰 방패막이가 되었다.


책을 읽다 보면 한나 아렌트와 교감(교류)이 있었던 친구들이 나오는데 그 이름만 들어도 너무 쟁쟁하다. <존재와 시간>으로 유명한 하이데거부터 실존주의의 대부인 카를 야스퍼스, 독일의 사회학자 레로폴트 폰 비제, 한나의 첫 번째 남편이자 독일 철학자인 귄터 안더스, 두 번째 남편이었던 하인리히 블뤼허, 독일 평론가인 발터 벤야민, 프랑스 망명을 통해 알게 된 실존주의의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소설가 알베르 카뮈, 그녀의 소올 메이트였던 힐데 프랑켈, 작가인 메리 매카시, 시인이자 소설가인 랜달 자렐, 오스트리아 소설가 헤르만 브로흐 등 한 세상을 풍미했던 철학자, 사상가, 소설가들과 교감을 나눴다는 사실에 그녀가 더 대단해 보이기도 하면서 이렇게 쟁쟁한 분들과 치열하게 토론하고 경쟁하면서 자랐기에 지금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두 번의 전쟁(1, 2차 세계대전)으로 난민과, 망명생활(수용소)을 경험한 한나 아렌트, 그녀에게 있어서 국가는 자신을 보호해줄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홀로코스트’라는 유대인 대학살을 저지른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 저지른 만행이었기에 더 큰 상처가 됐으리라. 그녀의 전작 <인간의 조건>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인간이 필요 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목표 아래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쓸모없게 만드는 것이 전체주의적 과정이고,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을 쓸모없게 만들어버리는 전체주의적 체계가 근본악을 만들었다."라고 말이다.(‘인간의 조건’ 31쪽 中) 이걸 계기로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을 완전히 말살해버리는 전체주의의 무서움을 알게 됐고, 더 나아가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에서 ‘사유의 부재(무사유)’를 발견한 한나 아렌트는 사실적 경험에서 형성되는 도덕적 질문들에 대한 의구심을 자신이 쓴 책들을 통해 대변했고, 그 책들이 지금도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무솔리니의 파시즘, 스탈린의 볼셰비즘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많은 사람들이 한나 아렌트의 책들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오해는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평범이란 단어를 어디에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어요. 그렇지만 제 말은... 저는 그런 의미로 말하지 않았어요. 우리 모두의 안에 아이히만이 있다는 뜻, 그러니까 개개인 모두의 안에 아이히만이 있고 또 뭐가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 아니었어요. 전혀요! 이를테면, 제가 어떤 사람과 대화하는데 이 사람이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제 반응은 이래요. “정말 어이가 없군요.” 그러니깐 제 의도는 이런 의미였어요. (본문 238쪽 中)

(그녀가 사랑했고, 그녀를 사랑한) 한나 아렌트의 러브 스토리를 읽으면서 그녀도 사랑을 하고 낭만을 즐기는 여자였다는 것을 알게 됐고, 하이데거를 무척이나 사랑했지만 그가 나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7년이나 말을 섞지 않았다는 걸 보면서 그녀가 나치즘을 얼마나 혐오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 책《한나 아렌트 평전》을 통해 한나 아렌트의 핵심적인 철학적 사상과 사유에 대해 깊이 있게 알 수 없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평전’이라는 타이틀을 달았기에 그녀의 핵심적 사상을 공부하고 싶은 분들은 그녀의 다른 책들을 통해 지적 욕구를 충족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시중에 나온 한나 아렌트의 책들은 거의 다 읽은 거 같은데 그녀의 새로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그녀가 줄곧 외치는 사유 속에 더 들어가고 싶다는 지적 호기심이 나를 자극한다. 더불어 평탄치 않았던 그녀의 삶 속에서 사유와 사랑을 통해 그녀의 정신적 삶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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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 - 유동하는 삶을 헤쳐나간 영혼
이자벨라 바그너 지음, 김정아 옮김 / 북스힐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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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문트 바우만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 폴란드, 유대인, 유동성(Liquid), 사회학자 등등 그중에서도 유대인은 지그문트 바우만을 평생 괴롭혔던 단어 중 하나였다. 10세기경 지금의 폴란드 서쪽 지방을 중심으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폴란드는 18세기에 이르러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의 침입으로 분할지배를 받다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8년에 새롭게 독립한 나라인데 지그문트 바우만이 태어난 1925년은 폴란드가 독일과 소련이라는 강대국들의 침입을 받던 시기라 나라의 정세 또한 굉장히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이런 시기에 폴란드 내의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거의 눈엣가시와 마찬가지였다. 독일에서도 홀로코스트란 이름으로 수많은 유대인이 학살을 당했고, 소련도 여기저기에도 속하지 않는 유대인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니 유대인은 설 곳이 없었고, 지그문트 바우만 역시 태어남과 동시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폴란드 내에서 많은 탄압과 모욕, 멸시를 받아야만 했다.


런 와중에 제2차 세계대전은 바우만에게 있어 공포이자 기회였다. 독일군의 거센 폭격을 맞아가며 떠나야 했던 피난길은 어린 바우만에겐 크나큰 충격이자 공포였지만 여러 언어와 민족이 섞여 있는 모워데치노(전쟁 전에는 폴란드의 소도시, 전쟁 후에는 소련의 지배를 받는 벨라루스로 편입)로의 피난은 바우만에게 있어 유대인의 차별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여러 문화와 여러 인종, 여러 언어가 뒤섞인 곳에서 차별 없이 자신의 능력을 키우기에 이만한 곳이 없었고, 후에 지그문트 바우만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회학자로 우뚝 설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제는 군대를 들어가서도 유대인이라는 꼬리표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는 것이지만 그 차별 속에서도 승승장구 진급을 했고, 바르샤바라는 새로운 도시에서 시나브로 사회주의라는 체제 속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교수에 임용되었지만 폴란드 사회는 바우만의 정치 활동과 학문 활동이 불순하다는 것, 유대인이라는 출신 성분, 이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바우만과 야니나를 ‘공공의 적’으로 분류해서 감시와 통제를 서슴지 않았다. 이 이유가 바우만이 폴란드를 떠나 이스라엘로 이주하게 한 결정적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니 이 세계적인 사회학자를 폴란드가 버렸다는 게 맞을 듯싶다.


집 아닌 트집을 잡아 폴란드를 떠나게 만들었고, 새롭게 이주한 이스라엘에서 바우만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었다. 소위 말하는 ‘3월 알리야’(알리야는 원래 히브리어로 ‘위로 오르다’는 뜻이다. 그리고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더는 소수에 속하지 않는 나라에서 살기로 마음먹고 그동안 살던 곳을 떠나는 이동을 가르킨다. 461쪽)의 첫 주자가 바우만이었고, 힘들고 고독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가야 했지만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전문적 지식인과 학자에 속해 많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다 해도 바우만의 조국은 폴란드였기에 폴란드는 바우만을 과감히 버렸지만 그는 폴란드에 대한 귀를 열어두면서 여러 경로를 통해 폴란드의 소식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르샤바에서의 바우만이 유대인으로서 받는 차별을 걷어내기 위해 열심이었다면 텔아비브에서의 바우만은 정서적인 안정 속에서 그의 전공을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고, 영국 리즈에서는 바우만의 학문이 꽃을 피웠던 시절이 아닐까 생각한다. 폴란드에서 이스라엘로 다시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유대인으로서 디아스포라의 애환을 겪었지만 그의 학문에 있어서 만큼은 이런 시련이 세계 속의 바우만을 있게 만들었지 않았나 생각해보게 된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용기란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영웅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두려움에 지배받기 전에 두려움을 억누른다. 그래서 영웅이 된다.(본문 129쪽 中)


리는 유동의 세계에 살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액체처럼 끊임없이 유동하며 변하고 있다. 바우만도 그가 말하는 유동성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유동의 세계를 살았다. 폴란드의 포즈난에서, 바르샤바에서,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서, 영국의 리즈에서, 그리고 다시 폴란드로 유동하면서 힘들고 어려웠던 삶을 그가 연구하고 공부했던 학문에 투영시켰고, 불안정한 삶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으며,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조언을 우리들에게 아끼지 않았다. 


개(滿開)한 삶을 살았던 바우만은 우리 곁에 없지만 그의 사상과 철학은 우리 곁에 남아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로한다. 이 책《지그문트 바우만》을 읽으면서 지정학적 위치와 복잡한 정치 상황 등 우리나라와 닮은 꼴인 폴란드 역사를 공부하는 게 재밌었고, 바우만의 출생과 사망이라는 기간 동안 그가 걸어갔던 길들을 다시 반추해보면서 그의 삶을 재조명할 수 있었다는 게 너무나도 유익했다. 바우만이 어떻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가 될 수 있었는지, 유대인으로서의 외로운 삶을 어떻게 헤쳐나갔는지, 그의 유동하는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게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지금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변하는 삶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정체성의 혼란이 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항상 움직이고 있기에 나도 무엇을 해야 할 것만 같고, 액체처럼 유동하면서 위태위태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우만의 철학과 사상이 유동하며 갈팡질팡하는 영혼들에게 하나의 위로가 되어줬으면 좋겠다. 그 위로가 수없이 변하는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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