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다시 만난 세계 (CREBBP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5307136</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at, 10 Oct 2026 17:26:09 +0900</lastBuildDate><image><title>CREBBP</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053071362027774.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05307136</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CREBBP</description></image><item><author>CREBBP</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오디세이아] 집으로 가는 길 - [오뒷세이아 (알라딘 리커버 특별판) - (영화 &amp;lt;오디세이&amp;gt; 원작)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5307136/17554029</link><pubDate>Sun, 04 Oct 2026 17: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5307136/1755402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290159&TPaperId=1755402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99/1/coveroff/k49213035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290159&TPaperId=1755402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오뒷세이아 (알라딘 리커버 특별판) - (영화 &lt;오디세이&gt; 원작)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a><br/>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09월<br/></td></tr></table><br/><br><br><br><br>전쟁은 끝났다.<br>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br>전쟁에서 살아남았다고 해서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귀향길에 죽었고, 누군가는 집까지 돌아와 죽었으며, 오디세우스는 살아 있으면서도 돌아오지 못했다.&nbsp;&nbsp;『오디세이아』는 바로 그 귀향의 이야기다.<br>『오디세이아』는 『일리아스』의 인물과 사건을 이어받지만, 서사는 트로이아 전쟁 직후부터 시간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소식을 찾아 나선 텔레마코스가 전우들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난 전쟁과 귀향의 흔적이 조금씩 드러난다.&nbsp;<br>초반에는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없다. 무대는 그의 고향 이타케다. 트로이아 전쟁에서 누가 얼마나 큰 공을 세웠으며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었느냐 같은 문제는 이미 과거가 되어 있다. 그 유명한 트로이아의 목마조차 회상이나 노래를 통해 부분적으로 들을 수 있을 뿐이다.<br>숱한 병사들의 목숨값을 치르고 되찾은 헬레네는 메넬라오스와 아주 잘 살고 있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그들을 찾아왔을 때 헬레네는 오디세우스의 활약을 회상한다.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내고 누더기를 걸쳐 노예처럼 변장한 채 트로이아 성안에 침투해 정보를 얻어 나왔고, 목마 속에서도 지략을 발휘했다는 것이다.&nbsp;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전설처럼 활약상만 떠돌 뿐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집에는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이 눌러앉아 있다.<br>그가 이타케를 떠날 때 아들 텔레마코스는 갓난아이였다.<br>살면서 늘 입을 조심해야 하는데, 트로이아 전쟁의 배경에는 오디세우스의 입이 한몫했다.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에는 직접 나오지 않지만, 다른 고대 그리스 신화 전승에는 헬레네의 구혼자들이 그녀가 선택한 남편의 결혼을 함께 지켜주겠다고 맹세하는 이야기가 있다. 아폴로도로스의 『도서관』에는 이 맹세를 고안해낸 사람이 바로 오디세우스라고 나온다.<br>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을까.<br>수많은 구혼자 때문에 골치를 앓던 헬레네의 아버지 틴다레오스에게, 자신이 페넬로페와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해결책을 알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 해결책이 바로 누구든 헬레네의 남편으로 선택되면 다른 구혼자들이 그 결혼을 함께 지켜주도록 맹세시키는 것이었다.&nbsp;페넬로페를 얻으려고 고안했던 발상이 페넬로페와의 긴 이별의 서막이 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사랑하는 페넬로페와 갓난아기를 두고 남의 애정 문제로 벌어진 전쟁터에 나가서 개죽음당하고 싶지는 않다.<br>이러한 상황을 호메로스의 원문에서는 아가멤논이 메넬라오스와 함께 이타케까지 찾아가 오디세우스를 트로이 원정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회상하는 장면으로 보여준다. 다른 신화 전승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디세우스가 미친 척하며 징집을 피하려 했다고 전한다.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가 전쟁에 끌려가기 싫어하는 설정 자체가 호메로스의 원전에 기초하고 있지만, 미친 척했다는 구체적인 일화는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 바깥의 이야기다.<br>영화의 기본적인 뼈대와 구성 방식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차용했지만 영화는 『오디세이아』 한 권에만 갇혀 있지 않다. 호메로스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던 전쟁 이전의 이야기와 다른 고전 전승들을 끌어와 하나의 오디세우스 이야기로 다시 구성한다. 놀란 역시 원작이 당대 청중의 기존 신화 지식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 관객에게는 더 많은 앞이야기와 배경 설명이 필요했다고 밝힌 바 있다.<br>‘트로이아 전쟁’의 전체 이야기는 사실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 어느 한 권에도 온전히 들어 있지 않다. 『오디세이아』에서도 트로이아의 목마와 함락 과정의 일부를 회상 형식으로 들려줄 뿐, 완전한 이야기로 서술되지는 않는다. 수많은 구전과 서사시와 비극이 오랜 시간 서로 겹쳐지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의 ‘트로이아 전쟁 이야기’가 된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죽음과 파리스의 죽음, 헬레네 구혼자들의 맹세 같은 이야기도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 바깥의 다른 전승을 통해 전해졌다.<br>그렇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어떻게 여자 하나 때문에 그리스 전역에서 그렇게 많은 군대를 모을 수 있었으며, 남의 일에 그토록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었을까. 명예라는 당대의 가치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현재의 가치로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어떤 전쟁인들 안 그렇겠느냐마는. 그럴듯한 명분을 가졌다 한들.<br>그런데 정작 오디세우스는 어디에 있는 걸까.<br>아들은 아버지를 기다리는 동안 어른이 되었다. 텔레마코스다. 왕이 집을 비운 지 오래되자 이타케의 유력자들은 페넬로페에게 구혼한답시고 집안에 몰려와 먹고 마시며 재산을 거덜낸다. 시아버지 라에르테스는 농장으로 물러나 있었고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는 왕 없는 집을 지켜야 했다.<br>신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이야기의 흐름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유사하다. 그러나 수많은 신들의 진흙탕 싸움이었던 『일리아스』와는 달리,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신은 아테나다.<br>아테나는 『일리아스』 때부터 오디세우스를 도왔고, 『오디세이아』에서도 그의 귀향과 텔레마코스의 여정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둘은 꽤 닮았다. 머리를 쓰고, 필요하면 속이고 변장하며 빠져나갈 길을 찾는 데 능하다. 어쩌면 아테나는 오디세우스에게서 자신과 닮은 점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br>아테나는 멘테스의 모습으로 변장해 텔레마코스를 찾아가 아버지의 소식을 찾아 떠나라고 등을 떠민다. 놀란의 영화에서 젠데이아가 연기한, 오디세우스에게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아테나와는 다르다. 호메로스의 아테나는 실재하는 신으로서 오디세우스를 위해 사람의 모습을 바꿔가며 여기저기 나타나고, 그의 아들에게까지 손을 뻗는다.<br>그렇게 텔레마코스는 처음으로 이타케를 떠난다. 필로스에서 네스토르를 만나고, 스파르타에서 메넬라오스와 헬레네를 만난다.그의 행방은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의 회상, 그리고 메넬라오스가 프로테우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통해서만 전해진다.전쟁을 함께한 사람들의 소식도 듣는다. 아이아스는 신들의 도움 없이도 살아남았다고 자만했다가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서 죽었다. 아가멤논은 10년 전쟁을 살아남아 집까지 왔지만, 그의 귀환을 반기지 않았던 아내와 내연남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오디세우스는 아직 살아 있다.<br>드디어 우리의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등장한다. 귀향의 막바지에 이르러 배도 전우도 모두 잃은 채 오기기아섬에서 요정 칼립소에게 붙들려 있다. 놀란의 영화에서는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바로 그 칼립소다. 여기서 감독은 원작과 달리 기억상실이라는 요소를 끌어들여, 오디세우스가 기억과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까지 귀향의 일부로 만든다.<br>오디세우스를 사랑하게 된 칼립소는 그를 오기기아섬에 붙잡아두고, 자신과 함께 산다면 불멸의 삶까지 주겠다고 한다. 오디세우스는 날마다 바닷가에 앉아 고향을 그리워한다. 아름다운 칼립소와 낙원 같은 섬에서 영원히 사는 것보다 필멸의 인간으로 페넬로페와 함께 늙고 싶다. 그러나 배도 동료도 모두 잃은 그에게는 그 섬을 떠날 방법이 없다. 그렇게 7년을 보내고, 8년째가 되어서야 제우스의 개입으로 마침내 오기기아를 떠날 수 있게 된다.<br>칼립소를 벗어나 우여곡절 끝에 파이아케스인들의 땅에 도착하는데, 우리가 오디세우스의 모험이라고 알고 있는 이야기는 사실 그가 파이아케스인들에게 들려주는 회고담이다.&nbsp;놀란 영화도 원작의 이러한 비선형 구조를 적극 수용한다.<br>이때부터 진짜 모험 이야기가 시작된다.&nbsp;영화에서도 압도적인 비주얼을 선보였던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 이야기는 단연코 모험 중의 탑이다. 원작에서 오디세우스는 거인에게 자기 이름을 ‘아무도 아니다’라고 속여 다른 퀴클롭스들의 도움을 피하고 탈출하지만, 안전해지자 굳이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혀버리는 오두방정을 떨어 포세이돈의 저주를 자초한다.<br>그 뒤의 귀향길도 순탄할 리 없다. 외눈박이 아들을 눈멀게 한 오디세우스에게 복수하려는 포세이돈이 그의 귀향을 가로막는 반면, 바람을 다루는 아이올로스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불리한 바람들을 자루 안에 넣어준다.<br>신들이 방해하지 않아도 인간끼리 귀향을 스스로 망치기도 한다. 놀란의 영화에서는 빠졌지만, 원작에서 오디세우스 일행은 외눈박이 거인에게서 살아남은 뒤 아이올로스를 만나 바람 자루를 받고, 그 덕분에 이타케가 눈앞에 보일 만큼 가까이까지 돌아온다. 그런데 이들을 끝내 이타케에 발 디디지 못하게 한 것은 인간의 시기와 질투였다. 왜 애초에 자루의 정체를 모두에게 알려주지 않았을까.<br>스스로 자초한 표류에 밀려 도착한 곳은 점입가경이다. 라이스트뤼고네스인들이 사는 이곳은 아예 도시 전체가 식인 거인들의 사회다. 항구 안쪽에 정박한 배들은 이들의 습격을 받아 파괴되고, 선원들은 꼬챙이에 물고기처럼 꿰여 잡아먹힌다.<br>그런데 경계심 때문이었는지 무슨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오디세우스만 자신의 배를 항구 바깥쪽에 따로 정박시켜 놓았다. 덕분에 그의 배와 선원들만 간신히 빠져나온다. 그 많던 함대의 대부분과 수많은 부하를 한꺼번에 잃고, 이제 귀향길의 식구들도 단출해졌다.<br>키르케의 섬에서 인간이 돼지로 바뀌는 장면은 놀란의 영화와 원작의 디테일이 다르다. 호메로스의 원작은 약을 탄 음식을 먹은 동료들을 키르케가 지팡이로 돼지로 바꾼다. 영화에서는 인간들이 자기가 돼지인지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동안 키르케가 마구 주물러 돼지로 성형하는데 그 모습이 여간 끔찍하지 않다. 탐욕스런 인간의 본모습을 그대로 은유하는 놀란의 통찰이 놀랍다.<br>이 대목에서도 오디세우스는 돼지가 되지 않는다. 원전에서 주인공 예외의 법칙은 신들의 전령 헤르메스가 건네준 약초로 해결된다. 헤르메스를 삭제한 놀란의 영화에서도 오디세우스만 예외인 건 마찬가지다.<br>사실 오디세우스가 오매불망 아내만 생각하며 귀향만을 원하는 지고지순한 인물은 아니라는 사실은 놀란 감독이 생략한 키르케와의 1년에 숨어 있다. 원작의 키르케는 영화 속 음산한 마녀가 아니라 아름다운 여신이다. 오디세우스는 풍요롭고 평화로운 그곳에서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하며 1년을 보낸다. 전쟁의 기억도, 동료들을 잃은 데 대한 죄책감과 책임도, 귀향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도 모두 잊고 싶다. 그렇다고 마냥 그곳에 주저앉아 일평생 나른하게 현실을 외면한 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귀향길을 먼저 재촉한 것은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부하들이다.<br>고향으로 돌아가려면 죽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만나야 한다. 떠나고 싶다고 했더니 키르케는 그래? 좋아, 하며 쿨하게 보내준다. 몸까지 섞고 1년을 함께 지냈으면서도 별 미련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방법까지 알려준다. 역시 신들이란.<br>오디세우스는 오케아노스의 끝, 안개와 어둠에 싸인 키메리아인들의 땅에서 제물을 바쳐 죽은 자들의 혼을 불러낸다. 지하세계로 내려갔다기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가 맞닿는 곳에서 망자들을 만난 셈이다.&nbsp;놀란의 영화에서도 오디세우스는 하데스가 아닌 황량한 검은 해변에서 죽은 자들을 만난다. 저승세계를 해변으로 대신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원작의 묘사에 가까운 장면이다.&nbsp;그곳에서 오디세우스는 죽어서도 예언의 능력을 잃지 않은 테이레시아스를 만난다. 한때 거인의 눈을 멀게 했던 오디세우스가, 이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 자신의 앞날을 묻는다.&nbsp;어머니와 전우들을 비롯한 여러 죽은 사람들의 혼도 만난다. 스스로 긴 삶을 버리고 영원한 명성을 선택한 아킬레우스는 죽은 자들의 왕으로 군림하느니 차라리 가난한 사람 밑에서 품팔이하며 살아 있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nbsp;살아 있는 자들을 위해 고안된 명예라는 기만적인 단어가 얼마나 헛되고 무가치한 것인지, 죽어서야 깨달은 아킬레우스가 가장 잔인하게 증명하고 있다.<br>어쩌면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에서 미처 다 전하지 못한 반전의 메시지를 죽은 아킬레우스를 통해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남의 애정과 남의 명예 때문에 전쟁터에 끌려가 칼과 창에 찔려 잔인하게 희생된 수없이 많은 개죽음들. 그 개죽음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것 자체가 『일리아스』가 자신이 노래하는 영웅주의를 스스로 비판하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br>드디어 우리에게 익숙한 세이렌의 노래 장면이다. 놀란의 영화에서도 비교적 원작에 충실히 구현해 놓은 부분이다. 오디세우스는 노래 소리를 듣고 싶다. 그러나 들으면 안 된다. 미래의 자신이 노래 소리에 홀려 귀향이고 뭐고 또 망쳐버린다는 걸 아는 오디세우스가 아직 듣지도 못한 노래 소리에 이미 홀려 자신의 귀만을 열어두고 홀로 돛대에 묶인다. 시키는 대로 밀랍으로 귀를 막은 선원들은 돛대에 묶여 세이렌의 노래 소리에 홀려 풀어달라고 몸부림치는 오디세우스의 명령을 듣지 못한다. 오히려 미리 받은 명령대로 그를 더 단단히 묶는다.<br>세이렌의 유혹을 빠져나온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제 윤리적 딜레마의 순간이다. 두 갈래 길이 있다. 한쪽으로 가면 모두 죽을 수 있다. 다른 한쪽으로 가면 여섯 명이 반드시 죽는다. 가능성으로서의 전멸과 확정된 여섯 명의 죽음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br>오디세우스가 선택한 길에는 여섯 명의 확정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선원들은 모른다. 동료들의 목숨값을 치르고 얻은 생존이 배신처럼 남는 무거운 짐은 오롯이 오디세우스가 짊어지게 될 터이다. 영화에서는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선원들의 비난까지 보탠다.<br>헬리오스의 소 앞에서 그 여섯 명의 희생도 결국 허사가 된다. 키르케가 얼마나 강조했던가. 절대, 절대 태양신의 소를 건드리지 말라고. 먹다가 돼지로 변해버린 경험도 잊었는지 또다시 먹는 것 앞에서 이성을 잃는 우리의 조연들. 결국 이렇게 해서 ‘주인공만 살아남고 다 죽는다’ 법칙은 완성된다.<br>모두 잃었다. 열두 척의 배도, 수많은 부하도, 전리품도. 승리를 안고 트로이아를 떠날 때 가졌던 모든 것을 잃고 이제 홀홀단신 몸 하나만 남았다.<br>그렇게 도착한 곳이 바로 이야기의 처음에서 만났던 칼립소의 섬이다. 훗날 파이아케스인들에게 들려주던 긴 회고담은 칼립소의 섬에서 앞서 우리가 보았던 오디세우스의 현재와 접속한다.<br>항해에 능한 파이아케스인들은 그 긴 이야기를 들은 뒤,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실제로 끝내주는 마지막 운송자가 된다. 공주의 도움과 왕궁에서의 극진한 대접을 받은 그는 잠든 새 이타케로 옮겨지며 마침내 귀향에 성공한다.<br>그렇게 쉽게.<br>잠든 사이에도 건너갈 수 있었던 그 바닷길을 무엇이 10년이나 가로막았을까. 신들의 장난? 자기 이름을 밝혀버린 실수? 바람 자루를 열어버린 부하들의 욕망? 키르케와의 나른한 1년? 아니면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조차 때때로 흐려졌던 것일까.<br>집에는 페넬로페와 결혼해 이타케의 왕이 되려는 적들이 가득하다. 자신의 부재 기간 동안 누가 충성했고 누가 배신했는지도 알아야 한다. 신분을 숨긴 채 늙은 거지의 모습으로 집에 들어간다.<br>집에 돌아온 그를 가장 먼저 알아보는 것은 늙은 개다.<br>귀향이란 떠날 때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이미 변해버린 시간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일이다. 모든 것은 변했다. 어머니는 죽었고 아버지는 늙었고 아들은 다 자라 청년이 되었다.<br>낮에 짜고 밤에 푸는 페넬로페의 수의 속임수도 결국 들통난다. 마침내 그녀는 오디세우스의 활로 열두 개의 도끼 구멍을 통과시킨 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그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변장한 오디세우스뿐이다. 구혼자와 배신자들을 향한 살육이 벌어진다.&nbsp;적들이 모두 죽었지만 귀향은 아직이다.&nbsp;이제 아내에게 자기가 남편이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 트로이아 전쟁과 십 년의 모험담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세상이 아는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가 아는 오디세우스는 다르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시간, 올리브나무 침대의 비밀이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던 가장 확실한 표지가 된다.<br>오디세우스가 그토록 버텨 돌아온 곳에는 영웅의 명예가 아니라 남은 생애 동안 살아내야 할 인간의 삶이 있었다.&nbsp;트로이아의 영웅 오디세우스에서&nbsp;페넬로페의 남편으로 돌아오는 거리.&nbsp;부재 동안 아기에서 성인이 된 텔레마코스의 아버지로 돌아오는 거리.&nbsp;그 거리가 이타케까지의 거리보다 훨씬 멀었는지도 모른다.<br>바닷가에 앉아 고향을 바라던 남자.&nbsp;&nbsp;낮에 짠 천을 밤마다 다시 풀며 20년을 버틴 여자.&nbsp;거지로 변한 주인을 알아보고 죽는 늙은 개.&nbsp;두 사람의 삶을 증명하는 움직일 수 없는 올리브나무 침대.&nbsp;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곳.&nbsp;집이었다.<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99/1/cover150/k49213035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990175</link></image></item><item><author>CREBBP</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오디세이아가 시작되기 전, 신과 인간의 이야기 - [일리아스 (알라딘 리커버 특별판) -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5307136/17541644</link><pubDate>Mon, 28 Sep 2026 17: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5307136/1754164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22130359&TPaperId=1754164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99/1/coveroff/k32213035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22130359&TPaperId=1754164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일리아스 (알라딘 리커버 특별판) -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a><br/>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06월<br/></td></tr></table><br/>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양적인 방대함이나 예술적 완성도, 그리고 무엇보다 거의 30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까지 생각하면 서구 문학의 기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일리아스』는 신과 인간과 운명과 명예가 전쟁 속에서 뒤엉키는 거대한 이야기다.<br>『일리아스』가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아의 전쟁을 주로 다룬다면, 『오디세이아』는 그 전쟁에서 살아남은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다룬다. 두 작품은 등장인물과 신화적 세계관이 그대로 이어지고, 『일리아스』의 인물들이 『오디세이아』에서 다시 등장하거나 이야기 속에서 회상되기 때문에 일종의 후속판처럼 읽히기도 한다. 다만 『일리아스』가 피와 창과 방패와 시체가 널려 있는 전쟁터의 이야기라면, 『오디세이아』에는 외눈박이 거인과 마녀와 요정과 괴물과 죽은 자들의 나라와 사람을 홀리는 노래가 등장한다.<br>우리가 그리스 신화라고 하면 떠올리는 기이하고 환상적인 이야기 가운데 상당수가 이 작품들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일리아스』를 단순히 전쟁 이야기로만 분류할 수는 없다. 이 오래된 작품을 뒤져 읽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속한 시간과 공간의 경계 밖으로 잠시 어슬렁거리기 위해서다. 거의 3천 년 전 사람들에게 명예란 무엇이었는지, 가족은 어떤 의미였는지, 인간과 신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다.<br>『일리아스』에는 정작 트로이아 전쟁의 결말이 없다. 트로이아의 목마도 없고 트로이아가 함락되는 장면도 없다. 그 유명한 목마 이야기는 『오디세이아』에서 전쟁이 끝난 뒤 사람들의 회상과 노래를 통해 뒤늦게 등장한다. 『일리아스』의 중심에 있는 것은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아킬레우스의 분노다.&nbsp;사건의 발단에는 아가멤논이 전리품으로 차지한 크리세이스가 있었다. 아폴론의 사제를 아빠로 둔 크리세이스가 아빠 찬스로 풀려나자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의 전리품 브리세이스를 대신 빼앗아 자신의 권력을 과시한다. 격노한 아킬레우스는 전쟁에서 빠져 함선 근처 막사에 틀어박혀 수금을 타며 노래를 부르고 지낸다.<br>과연 아킬레우스가 없는 그리스 연합군은 헥토르에게 밀리고, 결국 아가멤논은 사절단을 보내 브리세이스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하고 막대한 보상까지 얹어 화해를 청한다. 그가 삐진 이유는 브리세이스를 품고 싶어서가 아니다. 이미 짓밟힌 명예를 되돌릴 수 없어서다. 자신이 싸워 얻은 전리품을 빼앗길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세상 그 누구보다 압도적인 전투 능력을 가진 아킬레우스는 납득할 수 없다.&nbsp;사절단의 제안을 거절한다. 3000년을 이어갈 이야기의 꾀쟁이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설득도 통하지 않는다.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고 무엇이 자랑스러운 일인지, 무엇 때문에 죽을 수 있고 무엇을 빼앗겼을 때 견딜 수 없는지는 시대가 결정한다.<br>그동안 그리스군은 죽어나간다. 트로이아의 영웅 헥토르가 그리스 연합군을 몰아붙이는 동안, 신들도 그리스와 트로이아 양편으로 갈라져 서로 다투며 전쟁에 가세한다. 인간을 속이고, 창의 방향을 바꾸고, 안개를 만들고, 마음을 흔든다. 이쯤 되면 트로이아 전쟁은 인간들의 전쟁인지 신들의 대리전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nbsp;<br>게다가 전투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가문과 사연이 붙는다. 누구의 아들이고, 어느 신과 어떤 관계인지, 중간중간 들려주는 이야기는 일종의 플래시백처럼 기능한다. 그렇게 한 사람의 과거와 가문을 한참 들려준 다음 그 사람이 창에 찔려 죽는 장면을 보면 죽음의 무게가 달라진다. 전장에서 쓰러지는 것은 이름 없는 병사 한 명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들이고 남편이고 한 가문의 후손이다.<br>그 복잡한 전쟁의 한가운데에 트로이아의 헥토르가 있다. 성안으로 들어오면 헥토르는 안드로마케의 남편이고 어린 아스티아낙스의 아버지다. 안드로마케는 헥토르에게 전장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애원한다. 이미 자신의 가족을 전쟁으로 잃은 그녀에게 헥토르마저 죽으면 남는 것이 없다. 그런데 완전무장을 한 아버지를 본 어린아들은 투구 위에서 흔들리는 말총 장식을 무서워해 울음을 터뜨린다. 헥토르는 웃으며 투구를 벗어놓고 아이를 안는다. 전쟁터에서는 죽여야 할 적인데 성벽 안에서는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내와 어린아이를 둔 남편이고 아버지다. 이 장면은 적을 신나게 때려부수고 우리 편이 이기는 전쟁 이야기를 쾌감으로 소비하려는 독자에게 다른 시선을 던진다.<br>그리고 그 헥토르를 결국 죽이는 사람이 아킬레우스다. 아킬레우스는 신적인 혈통을 가진 인간이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필멸자다. 그에게는 두 개의 운명이 주어져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오래 살면 이름은 잊힌다. 트로이아에 남아 싸우면 젊어서 죽지만 영원한 명성을 얻는다.그런 아킬레우스를 다시 전쟁터로 끌어낸 것은 국가도, 정의도 아닌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다. 파트로클로스는 단순히 전쟁터에서 만난 동료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킬레우스의 아버지 펠레우스의 집에서 함께 지냈고, 아킬레우스가 전쟁에서 빠진 뒤에도 곁에 남아 있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갑옷을 파트로클로스에게 입혀 전장으로 보낸다. 그러나 파트로클로스는 전장에서 부상을 입은 뒤 헥토르에게 최후의 일격을 받고 죽는다. 아킬레우스는 무너진다. 그리스군이 얼마나 죽어나가든 꿈쩍하지 않던 사람을 다시 전쟁터로 끌어낸 것은 결국 단 한 사람의 죽음이었다.<br>헥토르를 죽이면 자신의 죽음도 곧 뒤따를 것이라고 바다의 여신인 어머니 테티스가 경고한다. 아킬레우스도 그것을 안다. 그런데도 헥토르를 죽이기로 한다. 그 순간 그는 오래 사는 삶을 포기한 것이다. 그가 전장으로 돌아간 이유는 파트로클로스를 잃은 슬픔과 분노, 복수 때문이다.&nbsp;<br>아킬레우스의 분노는 헥토르를 죽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 뒤에 매달아 끌고 다니며 모욕한다. 헥토르를 죽인 뒤에도 분이 풀리지 않을 만큼 파트로클로스와의 우정은 그에게 깊고 소중했던 것이다.그런데 『일리아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트로이아의 함락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헥토르의 늙은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아들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한밤중에 적진으로 들어와 아킬레우스를 찾아간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의 손에 입을 맞추며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간청한다.<br>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에게 그의 아버지를 생각해 보라고 한다. 그 순간 아킬레우스 역시 고향에 두고 온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한 사람은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울고, 다른 한 사람은 멀리 떨어져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아버지와 죽은 친구를 생각하며 운다. 조금 전까지 원수였던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함께 운다. 분노에 사로잡혀 죽은 사람의 몸까지 모욕하던 아킬레우스가 그제야 자신이 죽인 헥토르 역시 누군가의 아들이었다는 사실과 마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준다.&nbsp;그리고 『일리아스』는 트로이아에서 헥토르의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끝난다. 헥토르의 죽음으로 전세가 바뀌어 트로이아의 패배가 눈앞에 보일 뿐, 정작 그리스군이 트로이아를 함락하는 장면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br>그러므로 『일리아스』의 목적이 ‘그리스가 트로이아를 이겼다’라는 전쟁사를 들려주는 데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전쟁을 일으키는 욕망과 명예, 신들의 질투와 인간의 분노, 죽음과 상실, 그리고 원수마저 결국 자신과 똑같이 아들을 잃고 아버지를 잃는 인간이라는 사실.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br>도대체 남의 여자 하나 빼앗아 오자고 그리스 전역에서 어떻게 그 많은 군대를 끌어모을 수 있었을까? 메넬라우스의 아내 헬레네가 트로이아의 파리스와 떠났다고 그 많은 왕과 장수들이 왜 남의 부부 문제에 자기 목숨까지 걸까? 후대에는 이 전쟁의 실제 배경을 해상 교역로와 상권을 둘러싼 이해관계로 보는 해석도 존재한다. 그러나 신화가 전하는 전쟁의 이유는 헬레네와 명예다.<br>다른 신화 전승에 따르면 헬레네가 결혼하기 전에는 그리스 전역의 수많은 남자가 그녀에게 청혼했다. 누구를 남편으로 선택하든 나머지 구혼자들이 그 결혼을 인정하고 남편의 권리를 함께 지켜주자는 맹세를 하게 되는데, 그 방안을 제안한 인물로 전승되는 사람이 바로 오디세우스다.&nbsp;결국 헬레네가 파리스와 트로이아로 떠나자 그 맹세가 작동한다. 당시 전사들에게 아름다운 여자를 차지한다는 것은 단순한 사랑의 문제가 아니었다. 메넬라우스에게는 소유와 명예의 문제였고, 맹세한 사람들에게는 구속력의 문제였다. 신들 앞에서 이루어진 맹세는 거역하기 어려운 신성한 의무였다. 그래서 그들은 헬레네를 되찾기 위한 목숨을 건 전투에 뛰어들어야 했을 것이다. 헬레네 한 사람을 되찾겠다고 수없이 많은 젊은이가 죽지만, 정작 전쟁의 발단에 놓인 메넬라우스와 헬레네는 살아남는다.<br>그렇다면 헬레네 자신의 입장은 무엇일까? 헬레네의 처지도 브리세이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메넬라우스에게는 빼앗긴 아내이고, 파리스에게는 차지한 여자이며, 아프로디테에게는 파리스에게 약속한 보상이고, 그리스군에게는 되찾아야 할 명예의 대상이 된다. 아프로디테의 개입은 분명하지만 처음 파리스를 따라 나설 때 헬레네 자신의 자유의지가 어디까지였는지는 모호하다. 브리세이스는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이고 헬레네는 신이 남자에게 약속한 보상이다.<br>





















두 사람 모두 남성들의 명예와 욕망을 움직이는 중심에 있지만 정작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에서는 비켜나 있다. 여성은 전쟁을 움직이는 이유가 되지만 그들의 욕망이나 의사가 무엇이었는지는 그 거대한 명예의 싸움 뒤로 밀려나 있다.<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99/1/cover150/k32213035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990114</link></image></item><item><author>CREBBP</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사랑이 아니라 존재였던 사람들 - [폭풍의 언덕]</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5307136/17537450</link><pubDate>Sat, 26 Sep 2026 11: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5307136/1753745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82135236&TPaperId=1753745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34/93/coveroff/k682135236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82135236&TPaperId=1753745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폭풍의 언덕</a><br/>에밀리 브론테 지음, 박찬원 옮김 / 윌북 / 2026년 01월<br/></td></tr></table><br/><br><br>사랑이 아니라 존재였던 사람들<br>&nbsp;<br>《폭풍의 언덕》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책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nbsp; 이야기가 아름다워서라기보다 너무 격렬하고 잔인해서였다.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파괴적이고, 집착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깊으며, 운명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상처를 입는다.<br>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서로 사랑했다. 그 사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연인의 사랑과는 조금 달랐다.&nbsp;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연인이라기보다, 서로를 자기 존재의 일부로 느끼는 사람들에 가까웠다.&nbsp; 캐시가 “나는 히스클리프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과장된 사랑의 고백이 아니다. 그녀에게 히스클리프는 사랑하는 남자이기 전에 어린 시절의 자신이고, 함께 황야를 달리던 자유이며, 사회적 신분과 예절이 그녀를 길들이기 전의 본성이었다.<br>캐시는 정말 히스클리프를 배신했을까?<br>캐시는 에드거도 사랑했다.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는 방식과 달랐을 뿐이다. 에드거는 아름답고 다정하며 교양이 있었고, 캐시에게 안전하고 세련된 삶을 열어주었다. 몰락해가는 언쇼 집안에서 살아온 캐시에게 그의 청혼은 자신이 동경하던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었고, 거칠고 불안정한 현실에서 벗어날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에드거는 함께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었고, 히스클리프는 자기 자신이라고 느끼는 존재였다.<br>히스클리프와 결혼했다면 행복했을까? 힌들리는 그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이 도망쳤다 한들 궁핍과 사회적 멸시 속에서 살며, 자책과 포기한 삶에 대한 아쉬움으로 사랑은 서서히 빛을 잃고, 초라하고 몰락한 두 개인이 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캐시의 선택을 배신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당대의 관습과 제도 아래, 몰락해가는 집안의 캐시에게 남은 유일한 현실적 선택지였을 것이다.<br>캐시는 왜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못했을까?캐시는 에드거와 결혼하더라도 히스클리프와의 결속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에드거의 재산과 지위로 히스클리프를 도울 수 있고, 에드거와의 결혼생활과 히스클리프와의 결속을 함께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캐시의 오만이자 절박한 바람이었다. 가당치 않은 생각이었다.<br>캐시에게 에드거와 히스클리프는 공존 가능한 서로 다른 세계다.에드거는 결혼과 생활의 세계고,히스클리프는 존재와 기억의 세계다. 그러나 두 남자는 한 여자를 공유할 생각이 전혀 없다.에드거에게 히스클리프는 아내의 마음을 차지한 남자고, 히스클리프에게 에드거는 캐시가 자신을 버리고 선택한 사람이었다. 캐시는 자기 안에서 형성된 두 세계의 분리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다시 찾아온 선택의 순간에도 캐시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nbsp;<br>신사로 변신한 히스클리프가 캐시의 안온한 일상을 깨고 돌아온 후에 말이다. 그 어떤 남편이 아내와 다른 남자의 이토록 깊은 결속을 흔쾌히 받아들이겠는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에드거의 요구는 타당했다.그러나 캐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다. 히스클리프를 선택하면 에드거가 준 사랑과 안정, 집과 지위, 자신이 선택해 살아온 현실을 버려야 했다. 에드거를 선택하면 자기 영혼과도 같은 히스클리프를 버려야 했다. 캐시는 두 남자 사이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자신의 본질 사이에 서 있었다.<br>캐시는 선택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캐시가 죽은 이유는 안정과 본질, 두 세계 사이의 분열을 견딜 수 없어서다. 사랑하는 남편과 자기 자신과도 같은 히스클리프.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어서다. 병든 캐시가 어린 시절의 방과 황야를 그리워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nbsp; 그녀가 그리워한 것은 히스클리프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결혼하기 전의 자신, 사회적 선택을 하기 전의 자신, 황야의 바람 속에서 누구의 아내도 누구의 안주인도 아니었던 자신이었다.<br>그레인지의 방 안에서 캐시는 온전한 자신으로 살 수 없는 삶 속에 갇혀 있었다. 히스클리프는 그녀에게 말한다.자신이 캐시의 마음을 부순 것이 아니라, 캐시 스스로 자기 마음을 부쉈고,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까지 부쉈다고.이 말은 비수처럼 캐시를 찌른다. 캐시가 감당해야 했던 현실과 그 선택에 내재한 불가능성을 보지 못한 비난이기도 하다. 캐시는 자신의 삶을 둘로 나누었고, 그 둘이 함께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현실은 끝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br>히스클리프의 사랑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히스클리프 역시 캐시를 사랑했다. 그의 사랑은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이었다. 자비롭지도 성숙하지도 않았다. 그는 캐시 없이 살 수 없었지만, 캐시가 자신 없이 살아가는 것도 허락할 수 없었다. 정말 캐시의 행복을 자기 욕망보다 더 사랑했다면, 에드거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았어야 했다. 돌아왔다 하더라도 결혼을 존중하고 거리를 두었어야 했다.<br>히스클리프에게는 캐시의 평온보다 자신과의 결속을 확인받는 일이 중요했다.자신이 버림받지 않았다는 증거가 필요했고, 자신을 멸시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그의 사랑은 절대적이지만 상대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nbsp;캐시를 독립된 한 인간이라기보다 자기 존재의 일부로 붙잡는다.<br>캐시가 죽은 뒤에는 그 욕망이 더욱 적나라해진다. 편히 쉬지 말라고 한다. 자신을 괴롭히고 미치게 하고, 귀신이 되어 따라다녀도 좋으니 떠나지만 말라고 외친다.사랑하는 사람의 평안을 바라기보다 자신의 고통 속에라도 계속 붙잡아두려 한다.캐시를 놓아주는 일은 그에게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배신이었다.<br>무슨 사랑이 이래?<br>캐시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녀의 숨결을 느꼈다고 믿으며 집과 황야의 모든 곳에서 그녀를 찾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놀라울 만큼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복수한다. 힌들리의 몰락을 이용해 워더링 하이츠를 차지하고, 아들 린튼과 캐시의 딸 캐서린을 도구로 삼아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까지 손에 넣는다.<br><br>복수는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캐시가 죽은 뒤 히스클리프는 약 18년을 더 살았다. 그 시간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히스클리프가 돌아온 뒤 캐시가 죽기까지는 반년 남짓이다. 그마저 자유로운 연인으로 함께한 시간도 아니었다.&nbsp;에드거가 마지못해 허락한 방문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만났고, 마지막에야 병든 캐시와 단둘이 마주한다.&nbsp;함께한 시간은 짧았고, 잃어버린 뒤의 시간은 지나치게 길었다.&nbsp;<br>그 긴 18년 동안 히스클리프는 계획된 복수를 완결한다. 복수의 열매로 두 저택을 손에 넣은 지 몇 달 만에 그 역시 죽는다. 복수의 열매로 두 저택을 손에 넣은 지 몇 달 만에 그 역시 죽는다. 먹지 않고 잠들지 않으며 황야를 헤맨다.&nbsp;허공을 바라보고 웃으며 주변의 모든 것에서 캐시를 본다. 캐시가 죽은 날부터 이어져온 병적인 애도가 복수라는 마지막 목적이 사라지자 그를 완전히 삼킨 듯하다. 복수는 캐시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이유였다.복수가 끝나자 살아 있어야 할 이유도 끝났다.<br>히스클리프는 대체 누구였을까?이야기 전반에 걸쳐 히스클리프는 수수께끼이다. 애초에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인종적 배경을 지녔는지, 워더링 하이츠를 떠난 뒤 어디에서 무엇을 해서 불과 몇 년 만에 그 큰돈을 벌었는지도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학자들은 군대, 식민지 무역이나 해운, 도박이나 사채 등을 추측하지만 소설은 아무것도 확인해주지 않는다.&nbsp;<br>에밀리 브론테가 처했던 환경의 제약과 제한된 사회 경험이 남성들이 활동하던 외부 세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데 한계로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토지와 혼인, 상속과 가문의 몰락처럼 자신이 잘 알고 있던 세계는 세밀하게 묘사했지만, 히스클리프가 바깥세상에서 어떻게 신사적 태도와 자본을 얻었는지는 통째로 비워두었다.&nbsp;<br>그런데 오히려 그 공백이 히스클리프를 더 강력한 존재로 만든다. 그는 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고 어떤 사회적 범주에도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다. 특정 인종으로 규정되지 않은 채 계속 타자화된다. 제대로 된 성도 없고 혈통도 없으며 돈의 출처도 없다. 사회 밖에서 나타나 그 사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재산과 혈통의 질서를 모두 장악한 뒤, 다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처럼 사라진다.<br>우리가 본 캐시는 정말 캐시였을까?넬리는 이 소설의 화자인 동시에 흥미로운 등장인물이다. 이야기 속에서 넬리는 언쇼 가문의 가정부이고 유모이지만, 일반적인 하녀와는 달리 비밀을 공유하고 고충을 상담하며 가족의 일에 깊이 개입한다. 이야기 밖에서 넬리의 영향력은 더욱 막강해진다. 캐시와 히스클리프의 이야기는 대부분 넬리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nbsp;<br>우리가 보는 캐시는 넬리의 눈에 비친 캐시다. 아름답고 고혹적이며 생명력이 넘치지만 동시에 변덕스럽고 이기적이며 잔인한 여자다. 히스클리프 역시 넬리의 도덕관을 통과한다. 그의 사랑은 절대적이지만 병적이고, 그의 고통은 진실하지만 행동은 사악하다. 넬리의 판단에는 기독교적 윤리와 가정의 질서, 절제와 책임에 대한 믿음이 강하게 들어 있다.<br>넬리를 화자로 대체함으로써 작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소설 속에서 거의 완전히 지우는 데 성공했다. 도덕적으로 변호하기 어려운 사랑, 폭력, 복수, 학대, 강제결혼과 재산 탈취에 대해 넬리가 작가를 대신해 그들의 비도덕성을 비난한다.<br>그렇다고 넬리가 작가의 최종 판단을 그대로 대변하는 인물도 아니다. 넬리 자신의 허점도 꾸준히 드러난다. 자신이 묘사하는 행동만 보아도 늘 현명하거나 선량하지 않다. 중요한 사실을 늦게 전하고, 사건을 방관하며, 때로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지나치게 냉정하게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행동은 계속 변호하고, 자신은 상식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믿는다.<br>캐시와 히스클리프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보았지만 그들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행동은 정확히 관찰하지만 감정의 깊이에는 닿지 못한다. 그녀가 두 사람을 비난할수록 그 비난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남는다.<br>“나는 히스클리프다.”<br>캐시가 이렇게 말할 때, 넬리의 상식으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히스클리프가 죽은 캐시에게 자신을 괴롭혀달라고 절규할 때도 마찬가지다. 넬리는 그것을 광기와 죄악이라고 부른다. 에밀리 브론테는 넬리 뒤에 숨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비난은 넬리에게 맡겨두고, 작가 자신은 끝내 판결하지 않는다.<br><br>결국 양다리를 걸치고 싶었던 캐시는 어느 쪽도 붙잡지 못한 채 그대로 추락했다. 캐시가 인생 전부였던 히스클리프는 그것이 사라지자 사랑을 복수로 치환했다.<br>무슨 사랑이 이래,<br>**&nbsp;AI를 이용해 위의 내용을 시각화해 보았습니다. 초보라 미숙합니다.<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34/93/cover150/k682135236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349301</link></image></item><item><author>CREBBP</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고고의 구멍, 나의 구멍은 무엇일까 - [고고의 구멍]</title><link>https://blog.aladin.co.kr/705307136/17450641</link><pubDate>Fri, 14 Aug 2026 15: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05307136/1745064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82832808&TPaperId=1745064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364/54/coveroff/k482832808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82832808&TPaperId=1745064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고고의 구멍</a><br/>현호정 지음 / 허블 / 2023년 03월<br/></td></tr></table><br/>『고고의 구멍』을 관통하는 가장 선명한 이미지는 제목 그대로 고고의 가슴에 뚫린 구멍이다. 처음에 이 구멍은 비교적 쉽게 이해되는 상징처럼 보인다. 노노를 잃고, 자신이 살던 터전을 잃고, 혼자가 된 고고에게 구멍은 상실과 결핍, 그리고 공동체에서 밀려난 소외의 흔적처럼 보인다. 그래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고고의 여정을 ‘구멍을 메우는 과정’, 다시 말해 상실을 치유하고 완전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br><br>그러나 소설이 진행될수록 이 구멍은 그렇게 단순한 의미를 거부한다.<br><br>거인들의 땅에 이르렀을 때 구멍은 고고에게는 명백하게 존재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된다. 비비낙안과 비비유지는 고고를 먹이고 입히고 보호하며 그의 생존을 돕지만, 정작 고고가 가장 절박하게 느끼는 구멍을 보지 못한다. 그들에게 그것은 실제 몸에 난 구멍이라기보다 기껏해야 ‘정신적인 구멍’으로 해석될 뿐이다.<br><br>이때 고고의 괴로움은 단순히 상처가 있다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내가 분명하게 경험하고 있는 고통을 타인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더욱 커진다. 그래서 고고가 조바심을 내고 화를 내는 것은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이 느끼는 분노와 닮아 있다. 아무리 친절한 타인이라도 나의 고통을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친절에는 도달할 수 없는 벽이 남는다.<br><br>비비낙안과 비비유지는 고고에게 가장 많은 것을 제공한 존재들이지만, 역설적으로 고고의 가장 중요한 결핍 앞에서는 무력하다.<br><br>반대로 작은 사람들의 세계에서 구멍은 더 이상 고고 혼자만의 이상 현상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구멍이 보이고, 공유될 수 있으며, 다른 존재와 연결되는 통로가 된다. 금은 고고의 구멍을 실제로 메울 수 있다. 여기서 고고는 처음으로 자신의 결핍이 타인에게 이해되는 경험을 한다.<br><br>그런데 소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예상했던 치유의 서사를 뒤집는다.<br><br>구멍이 메워진다는 것은 단순히 상처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었다. 너무 깊게 연결됨으로써 타인의 감정과 경험이 고고에게 밀려들어온다. 완벽한 이해와 완벽한 공감은 오히려 자아의 경계를 위협한다. 고고가 원했던 것은 분명 구멍의 치유였지만, 막상 그것이 가능해졌을 때 그 치유는 또 다른 고통이 된다.<br><br>나는 이 대목이 『고고의 구멍』에서 가장 흥미로웠다.<br><br>우리는 흔히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의 반대편에 ‘완벽하게 이해받는 상태’를 놓는다. 그러나 현호정은 양쪽 모두를 불완전한 것으로 만든다.<br><br>아무도 내 구멍을 보지 못한다면 나는 고립된다.<br>그러나 누군가가 내 구멍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압도된다.<br><br>그렇다고 고고가 구멍을 메우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끝까지 그 욕망은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고는 구멍을 지닌 채 사는 법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인물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라고, 동시에 그것이 쉽게 없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인물에 가깝다.<br><br>그래서 고고의 여정은 ‘구멍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기보다, 구멍을 메우고 싶다는 욕망과 그것이 메워질 수 없거나, 메워진다 해도 또 다른 고통을 낳을 수 있다는 현실 사이에서 끝까지 흔들리는 과정처럼 읽힌다.<br><br>노노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노노를 되찾으면 구멍도 사라질 것처럼 느껴진다. 상실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면 모든 것이 복구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노노새를 찾는다고 해서 구멍이 단순히 메워지는 것은 아니다.<br><br>그렇다면 구멍은 무엇일까.<br><br>나는 그것을 특정한 사건 때문에 생겨난 하나의 상처라기보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한 완전히 제거하기 어려운 결여에 가깝게 읽었다.<br><br>노노를 잃어서 생긴 구멍이기도 하지만 오직 노노만이 채울 수 있는 구멍은 아니다. 고향을 잃어서 생긴 구멍이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사랑으로 채울 수도 없고, 완벽한 공감으로 채우려 하면 오히려 자신이 사라질 위험이 있다.<br><br>이와 함께 흥미로웠던 것은 작품 속 ‘몸’의 문제다. 『고고의 구멍』에서는 몸의 크기와 형태가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조건으로 작동한다.<br><br>거인인 비비낙안에게는 하찮을 만큼 작은 음식 한 조각이 고고에게는 넘치는 식량이 된다. 처음에 고고는 비비낙안에게 먹고 입고 이동하는 거의 모든 것을 의존하지만, 떠날 무렵에는 자신의 작은 몸 자체가 오히려 생존에 유리한 조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br><br>작은 사람 금과의 관계에서는 그 구조가 다시 뒤집힌다. 이번에는 고고가 금을 먹이고 보호하며 생존을 돕는다. 그러나 고고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구멍의 문제에서는 금이 우위를 갖는다. 금은 고고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고고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br><br>따라서 둘의 관계에는 일방적인 강자와 약자가 없다.<br><br>고고는 금을 살게 하고, 금은 고고의 구멍에 접근한다.<br><br>한쪽의 결핍이 다른 쪽의 능력을 필요로 하고, 그 능력이 다시 상대에게 의존을 만들어낸다. 이 소설에서 권력은 몸의 크기에 단순히 비례하지 않는다. 누구의 몸이 누구에게 필요한가에 따라 끊임없이 이동한다.<br><br>밤과 금의 이야기에서도 이런 구조가 반복된다. 몸을 굽혀 사족보행을 하며 금을 등에 태우는 밤은 외형적으로는 낮은 자세를 취하지만 오히려 의기양양해진다. 낮아진 몸이 반드시 낮은 지위를 뜻하지 않는다. 상대를 운반할 수 있는 몸, 먹일 수 있는 몸, 구멍을 볼 수 있는 몸처럼 각각의 몸이 가진 능력이 순간순간 관계의 권력을 재배치한다.<br><br>그런 의미에서 『고고의 구멍』에서 몸은 단순한 외형이 아니다. 몸은 관계가 이루어지는 방식 그 자체이다.<br><br>또 하나 내가 계속 의문을 품게 된 부분은 고고의 성별이다.<br><br>해설이나 작품 외부의 소개에서는 고고를 흔히 ‘소녀’라고 부른다. 그러나 적어도 소설 자체를 읽는 동안 나는 고고를 여성으로 확정할 만한 뚜렷한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고고의 성별을 처음부터 소녀라고 규정하면 고고가 타인에게 느끼는 애착과 질투 역시 자연스럽게 연애의 언어로 번역되기 쉽기 때문이다.<br><br>하지만 작품 안에서 고고가 비비낙안이나 다른 존재들과 맺는 관계를 반드시 이성적 사랑이라고 읽어야 할 이유는 별로 없어 보였다.<br><br>고고가 비비낙안과 비비유지의 키스를 목격하고 분노하는 장면 역시 꼭 ‘좋아하는 사람을 빼앗긴 연애 감정’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고고가 자라온 쌍둥이 마을의 문화가 더 중요해 보인다.<br><br>고고가 알고 있던 세계에서는 존재들이 둘씩 짝을 이루어 살아간다. 그것은 사랑에 앞서 삶의 기본적인 형식이며 거의 자연법처럼 받아들여지는 질서다. 노노와 고고 역시 그런 한 쌍이었다.<br><br>그렇다면 노노를 잃은 뒤 고고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품게 되는 욕망은 반드시 연애적 욕망이라기보다 ‘누군가와 다시 배타적인 한 쌍이 되고 싶다’는 욕망일 수 있다.<br><br>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고가 이 오래된 관념에서 깔끔하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br><br>고고는 다른 관계의 가능성을 보고, 그것을 이해하려고도 한다. 하지만 이해와 수용은 감정의 해소와 같지 않다. 금과 곰의 관계를 보는 일은 여전히 고고를 아프게 하고, 노노새와 커플새가 한 쌍으로 존재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다시 상처받는다.<br><br>고고는 밀접한 상대에게 자신 말고도 다른 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점차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덜 아픈 것은 아니다.<br><br>이 점이 오히려 현실적이었다.<br><br>사람은 자신이 가진 관계의 관념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방식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래 몸에 밴 욕망과 상처까지 이성적으로 정리되지는 않는다.<br><br>고고는 ‘둘이 한 쌍’이라는 관습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그 관습이 자신을 얼마나 깊이 지배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 채 계속 아파한다.<br><br>그래서 이 소설에는 관계에 대한 명쾌한 해답도 없다.<br><br>누군가와 깊이 연결되면 다른 관계를 배제하고 싶어지고, 그러나 상대는 나만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을 이해하면서도 질투하고, 수용하면서도 상처받는다. 고고의 구멍이 끝내 완전히 메워지지 않는 것처럼, 이 관계의 모순 역시 끝까지 풀리지 않는다.<br><br>그래서 『고고의 구멍』을 다 읽고 나면 처음의 질문 자체가 조금 달라진다.<br><br>고고의 구멍은 무엇으로 메워질 수 있는가?<br><br>라고 물었던 것이,<br><br>우리에게 있는 구멍은 과연 완전히 메워질 수 있는가?<br><br>라는 질문으로 바뀐다.<br><br>우리 모두에게도 각자의 구멍이 있을지 모른다.<br><br>어떤 구멍은 너무도 분명해서 나 자신에게는 견딜 수 없이 아픈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설명하려 애쓰고, 보아달라고 요구하고,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할 때 화가 나기도 한다.<br><br>그러나 반대로 누군가가 그 구멍을 너무 완벽하게 이해하고, 너무 깊이 들어온다면 그것 또한 구원이 아닐 수 있다. 타인의 감정과 상처가 내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서로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 공감은 또 다른 고통이 될 수도 있다.<br><br>고고는 끝까지 구멍을 메우고 싶어한다. 아마 우리도 그럴 것이다.<br><br>잃은 것을 되찾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으면, 누군가가 나를 완전히 이해해주면 비로소 이 구멍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br><br>하지만 어떤 구멍은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br><br>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구멍이 없다고 가장하는 것도, 그것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것도 아닐 것이다.<br><br>내 안에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때로는 아파하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때로는 끝내 이해받지 못한 채로도 그것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br><br>책을 덮고 나서 나는 결국 이런 질문으로 돌아왔다.<br><br>고고의 구멍은 무엇이었을까.<br><br>그리고,&nbsp;<br>나의 구멍은 무엇일까.<br><br>** 위 내용을 바탕으로 AI를 이용하여 고고의 구멍을 시각화해봤습니다. 처음 해보는 것이라서 미숙합니다.<br><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364/54/cover150/k482832808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3645418</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