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난해성이야 제쳐놓고라도, 이 작품이 연작인지, 단편인지, 헷갈렸다. 처음 줄간될 때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과 <기교들>로 따로 출간되었던 것을 두개로<픽션들>에 합친 것이라 그렇다. 첫 작품인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는  본편이 있고 그 본편과 연결되는 듯이 보이는 <1947의 후기>가 또 있다. 이 두 개의 작품은 연작처럼 내용이 연결되어 있고 1947의 후기라는 제목을 갖지만, 목차상으로는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 속해있다.


내가 꼽는 '가장 잠에 빠지기 좋은' 책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의 첫권인데, (늘 읽다 잠들어서, 2편까지 나가지를 못했다), 이 소설 역시 잠을 불러오는 데에 있어서는 만만치 않은 상대다. 비교적 얆음에도 불구하고, 몇 줄 읽기만 하면 늘 잠에 빠져서, 과연 이 책을 다 읽을 수는 있을까 의아했는데, <틀뢴>이 독자의 기선을 완전 제압해 놓은 후는 살짝 풀어주는 느낌으로, 그 다음부터는 읽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우선 해석적 난해성은 제쳐놓더라도, 실존인물들과 가상인물들이 마구 섞여 한도 끝도 없이 언급되어 내용 파악조차 어려웠다. 이 요약 불가능한 이 첫번째 소설을 억지로라도 요약해보면, 존재조차 의심스러운 괴상한 사람들과 괴상한 이론들이 브리태니어 백과사전의 해적판에 몰래 숨어있으면서 수 세기에 걸쳐 세계의 지식과 관념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는 내용이다. 이게 내가 내 식대로 파악한 전체적 줄기고, 실제로 그런 내용인지 확신할 수 없음을 실토한다.


제목을 볼 때, 틀뢴은 17세기에 결성된 비밀 결사이고, 우크바르는 그 특정 판본의 백과사전에 실린 지명 이름으로, 실제 틀뢴의 사상이 싹트고 발전하는 국경과 역사,  언어, 문학 등이 모호한 세계다. 존재한다는 증거를 찾기 어려우나, 여기 저기서 그 환상의 세계가 조금씩 드러나고 매혹되는데, 이것이 어떻게 현실에 침투할까.


이 모호하고 이상한 세계의 국가들은 태생부터 관념적이고, 그리하여 ‘틀뢴 사람들에게 세상이란 공간 속에 물체들이 뒤섞인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행위들로 이루어진 이질적인 연속물’이다. 틀뢴의 언어에는 명사가 없고, 동사로 이루어졌거나(남반구) 형용사로만 이루어졌다(북반구). 모든 학문은 심리학의 하위에 속해있고, 그들은 ‘우주를 공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계속적으로 전개되는 일련의 정신적 과정으로 이해(p23)’한다. 이 곳에서 ‘정신적 상태는 축약이 불가’능하므로, 거기에 ‘이름을 부여하고 분류하는 행위는  왜곡과 편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로 다른 지역의 언어 모두에서 왜 명사가 없는지를, 이해 가능한 몇 안되는 부분이다. 명사는 축약이고, 압축이다. MP3 포맷이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영역의 음폭을 모두 제거하여 깨끗하고 단순하게, 그리고 작디 작은 기기의 어느 작은 하드웨어가 담을 수 있는 적은 용량에 압축한다. jpg와 png 같은 사진 파일이 화면에 담을 수 있는 쓸모 있는 정보들만 축약하여 효율적으로 저장한다. 이처럼 언어(명사)는 모호하고 들쭉날쭉하고 무한한 어떤 세계를 하나의 단어로 그 복잡성을 마치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단호하게 그 단어가 오랫동안 품어온 뜻에 어긋나는 의미들을 그것을 표현하는 세계에서 제거해 버린다. 그렇다면 형용사나 동사는 다른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이해하자.


틀뢴의 한 학파는 시간을 부정하고, 다른 학파는 ‘이미 모든 시간은 지나갔고 우리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과정에 대한 어스레한 기억 혹은 반영이며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왜곡되고 훼손되었다고 단정(p25)’한다. 또다른 학파는 ‘우리가 여기서 잠들어 있는 동안 우리는 또 다른 어떤 곳에서 깨어 있고, 그래서 모든 사람은 사실상 두 사람’이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동시에 있다는 말에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유비쿼터스 시대가 연상되어 소름돋는다. 작품의 알레고리보다는 뭔가 괴상하고, 신비한 걸 찾다 보니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5도살장>도 생각난다. 아니나 다를까, 진중권은 틀뢴의 이러한 알레고리를 과학기술, 네트워크의 사이버 스페이스와 연결짓는 통찰을 보인 바 있다. 해석보다는 모호한 채로인 게 더 선호될 때가 있다. 소설 속에서 틀뢴이라는 비밀 결사가 생긴 17 혹은 18세기와 같은 시기에 서구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과학기술이 전면에 대신하면서 가치관, 패러다임의 변화가 가속화된 것을 주목했을 거란 건 확실하다.


<알모타심으로의 접근> ,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그리고 <원형의 폐허들>은 일단 황당함에 있어서 <틀뢴...>을 따라잡지 못하므로 읽기가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훨씬 수월했다. 그 중에서 <원형의 폐허들>이 가장 흥미로와서 리뷰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틀뢴의 난해성을 토로하다 보니 한쪽이 되었다. <원형의 폐허들>에 대해서는 훨씬 얘기거리가 풍부할 것 같다. 다음으로 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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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이야기를 더 어이없이 만드는 건 환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이다. 소설은 이반이라는 한 이발사가 아침에 빵굽는 냄새를 맡고 아내의 눈치를 보며 커피도 사양한 채 갓 구운 빵을 먹는 매우 현실적이고도 세부적인 디테일로 시작한다. 날짜와 장소까지도 정확하게 서술되는 이 부분은 사실상 보통의 미스터리 서사를 읽는 독자들에게 상황의 작은 디테일들에 주목하게 하여 긴장감을 유발하시키지만 그렇게 조심조심 읽어가며 갑자기 맞닥뜨리는 건 건 황당함 자체다. 마치 어둠속에서 더듬어 가다가 웅덩이에 빠진 기분이랄까. 그러면서도 그 엘리스처럼 그 이상한 세계를 배회하며 미스터리가 풀리기를 기대하며 글자들 사이를 움직여보지만 결국 작가에게 유린당하는 건 독자다. 


이발사 이반은 갓 구운 빵속에서 나타난 코가 자신이 이발한 코벨레프 8등관료의 코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기가 면도하다가 잘못해서 베어낸 걸로 생각하고 전전긍긍한다. 이 때 아내는 쓸데없이 소리를 지르고 이반에게 온갖 구박을 다한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그런 거 없다.   마치 어떤 영화에서 초반에 지나가는 행인이 마구 소리를 질러대는데 관객은 그게 맥거핀인 줄 알고 잔뜩 주목하는데 단지 그 씬을 길게 잡았을 뿐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소심한 이발사 이반의 성격을 나타내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 전체에서는 이렇게 중요하지 않고 사소한 일에는 정성들여 설명을 하고 객관적 정보와 세부사항을 전달하지만, 중요한 것, 가장 궁금한 것에 관해서는 설명이 야박하다. 모든 불가능한 일이 마치 원래 자연의 일부인 듯 천연덕스럽게 간략하게 말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천조각에 싸서 이를 몰래 버리고자 거리로 나가지만, 가는 데마다 사람들의 시선과 경찰관 때문에 쉽지 않고, 결국 다리 밑으로 던졌지만, 경찰에 걸리고 만다. 


한편 여자를 밝히는 8등관 코벨로프는 아침 잠에서 깨자 자신의 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는 좋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벌레로 변신하는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도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고골(1809~1852)은 카프카(1883~1923)보다 훨씬 전에 태어났다.  카프카가 고골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침에 일어나니 비현실적 세계와 맞닥뜨리는 시작이 비슷하다. 물론 작품의 분위기와 주제 그 모든 면에서 둘은 완전히 다르다. 


《코》를 읽게 된 계기는 사이트 파이크 아바스야느크(1906~1954)의 책날개에 소개된 작가 소개의 첫줄로부터다. “러시아 작가들이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면, 터키 작가들은 모두 사이트 파이크의 우산 아래서 나왔다.”[1].  찾아보니 고골의 러시안 문학적 위치에 대한 저 말은 도스토예프스키가 한 말이었다. 고골에 대한 이러저러한 평가는 이 말과 더불어 여러 핵심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 쪼가리들을  인용한 한 논문을 인용하면 설명이 될 듯하다. 아바스야느크의 첫 작품을 읽고 나서 뭔가 조금 기괴한 느낌이 들어, 작가 소개를 펼쳤다가 발견된 고골 <외투>의 문학적 위상이 그렇다는 걸 발견하고는, <외투>를 읽으려고 고골을 펼쳤다가 <코>에 빠졌던 것이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가장 독특한 해석과 창조의 전형인 고골의 문학은 예로부터 낭만성, 현실성, 상징성, 심리성, 신화성, 종교성 등의 다양한 요소들이 다채롭게 교차하는 수수께끼의 세계로 널리 평가되어 왔다.2) 일찍이 도스또옙스끼(Ф. М. Достоевский)가 “우리 모두는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Все мы вышли из гоголевской “Шинели.”)”라고 말했듯이, 작품 「외투 」는 고골 문학의 독창성과 풍부함을 함께 지닌 ‘가장 심오하고 가장 뛰어난 작 품의 하나’3)로서 러시아 문학사에서 실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2]


다시 작품으로 돌아와서, 코대신 코가 있던 자리가 평평해진 걸 발견하는 코벨로프는 황당하고 낙심하고 무엇보다도 수치스러워 코(가 있던 자리)를 손수건으로 감춘 채로 돌아다니다가 마차에서 내리는 5등관료를 발견하는데, 그 5등관이 자신의 코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코에게 가서 당신은 내 코이니 자신의 위치에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지만, 코는 자신은 당신의 코가 아니며 자신은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고, 그러던 중 어떤 여자에 눈이 팔리는 동안 자신의 코이자 신사는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나서 코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가. 코면 코고 사람이면 사람이지, 자신보다도 신분이 높은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코가,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면 일단 스케일이 맞지가 않고, 물리적으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없는데, 바로 알아보다니, 그런데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는 곳곳에서 벌어진다. 후에 경찰이 코를 가져와서는 이발사 이반이 꾸민 짓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더욱이 코를 발견한 당시 경찰관의 눈에도 코는 신사로 보였다는 것이다.  마차에 타고 있는 '그'를 길에서 잡았다고, 처음엔 자기도 그가 평범한 신사로 보였지만, 근시여서 코나 수염 같은 건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이 안경이 있었기에 그가 코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냈다고 말한다.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 깨알같은 디테일이라니. 


하지만 정작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이야기들만 골라서 빠져있고, 장소와 시간 혹은 그 외에 쓸데 없는 부분에서만 객관성과 정교함을 유지한다. 즉 코가 어떻게 사람으로 보이는지,  그렇게 보인건지 혹은 변신한건지에 대한 설명은 없고, 빵 속으로 들어갔다가 물에 빠졌다가 살아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이반을 잡은 경찰에게 잡혀서 다시 코로 변신했는지에 대한 가장 황당한 부분에 대한 디테일들이 뭉텅이로 빠진채, 화자는 자기도 이 이야기가 참으로 이상하다고 이렇게 비상식적인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으며, 더욱이 작가들이 어떻게 이런 내용을 소재로 삼는지 알 수가 없다며 발뺌하면서 미스터리를 푸는 대신 메타소설의 형식으로 마감하고 있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상황을 마치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묘사하고 있는 재기발랄한 문체와 다중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한도 끝도 없는 이야기거리를 줄 것 같지만, 19세기 초, 이러한 소설을 썼고, 결국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에 있는 오늘날의 소설들도 다양한 경로로 고골의 영향을 받았을 것임을 알 수 있겠다. 오래된 작품이라 조금은 고리타분한 문체를 예상했는데, 하도 황당하다 보니까, 그리고 그 황당한 방식이 그 옛날 것인데도 낯설고 새롭게 느껴져서 흥미롭게 읽혔다. 



[1] 현대문학단편선 11 사이트 파이크 아바스야느크 : 세상을 사고 싶은 남자 외 38편 - 세계문학단편선 11


[2] 은닉된 논쟁: 고골의 「외투」와 체홉의 「관리의 죽음」의 비교 분석, 오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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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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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사람의 감정을 만져주는 것일까? 소설이 만들어 놓은 서사 속에서 인물이 겪는 감정은 나의 감정과 경계가 흐려지면서, 내가 그동안 해명해내지 못했던 온갖 감정들 심지어 감정들이라고조차 느끼지 못했던 무형의 마음에 들어와 살살 만지고 다독이고 주물러 형태와 질감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아무것도 아닌 상념과 어두운 바다 속 같이 알 수 없고, 떠다니는 안개처럼 흐릿하기만 한 마음의 본질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슬픔이나 외로움이나 고독함이나 그런 두리 뭉실한 단어, 혹은 그 조차도 아니어서 형체없이 부스러지고 가루가 되어 초미세먼지 입자처럼 멀리는 가지 않은채 맑은 날조차도 풍경을 흐릿게 만들던 그 마음의 진정성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슬퍼했어야 할 기억에 작은 눈시울의 애도를 보내고, 탄식했어야 할 사건의 실체를 바라보게 하고, 온당하게 화냈어야 했을 기억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사는 것이 때로 좀비처럼 느껴질 때, 어떤 힘에 의해 점령 당해 그저 그렇고 그런 매일 똑같은 하루하루를, 미드 <웨스트필드>의 AI 호스트들처럼 각본대로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는 똑같은 인생을, 예정되고 계획된 일을 그 예정대로 계획대로 감정을 흉태내고 있을 지 모른다는 막연하고 허망하지만, 어쩌면 그로써, 이 무위의 날들을 설명함으로써 흩어지고 멀어지는 정체없는 마음 부스러기들을 판타지의 저편 먼 곳으로 자유롭게 날려보내며, 무위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그리고 이 문장을 완성시키지 못한다는 걸 알았을 때처럼 쉽게 자신을 붙들고 떠나지 못했던 또 다른 한 조각의 마음을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을 때, 이 책은 나에게 마음에 형체를 부여하였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의 미소 p24)


이성간의 나의 우정은 대부분 연애 같은 양상의 조짐이 보였을 때, 끝이 함께 보였다. 그래서 이성에게는 연애 같은 우정도 우정같은 연애도 존재하지 않았다. 연애가 되고 싶었지만 우정이라도 가지고 싶어 거리를 두었으나 연애는 커녕 우정 마저 품을 수 없었던 스무살 짝사랑이 아니었더라도, 이성은 우정이라고 말할 만큼 충분히 가까울 수 없었다. 이런 말을 하면 일상 속에서 만나 가까이 지냈던 많은 아는 이성 사람들에게 섭섭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우정은, 적어도 우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벽을 허물고 나를 보여주고, 허물어진 틈 새로 새어나오는 것들을 안아준 우정이라면 언제나 동성과의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팀 플레이를 잘 못했다. 그래서 언제나 단짝이 있었고, 연애같은 우정을 나눴다. 싸우고 삐지고, 누가 먼너 말 거나를 지켜보다 서로를 잃을 두려움에 서로에게 해명도 없이 사과도 없이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어색하게 다시 시작했던 관계들은, 떼거리 속의 하나라는 팀플레이 속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계기 그게 뭔지도 모를 이상한 힘에 의해 금이 가거나 멀어지게 되면 그로 인한 충격을 흡수하고 거리를 메꿀 완충장치가 전무했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씬짜오 씬짜오 p91)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떠난 사람 같다. 매몰찬 인간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남겨진 쪽이었다. 외로운 인간이다. 멀어지는 계기는 아주 작은 말과 행동들을 단서로 오래된 층위의 가느다란 매듭을 따라 끝도 없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길을 잃는 일이다. 지치는 일이다. 어쨌든 멀어지게 되어 있고, 어쨌든 헤어지게 되어 있고, 어쨌든 망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누가 먼저 떠났건,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형태로든 둘은 서로를 떠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추축해볼 수는 있다. <한지와 영주>는 어차피 서로를 떠나게 되어 있는 관계였다. 그들을 가깝게 만든 건 서로가 한 번도 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라, 처음으로 대한 이질적이면서도 경외스러운 생소한 인종이라는 다름이다. 이 다름 때문에 영주는 한지에게, 자신이 아닌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옮길 수 없는 한지에게 자신의 이야기들을 한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한지지만 넓은 아량의 이면에 누구나 갖고 있을 어둠을 숨긴 한지 역시 영주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둘이 가까와진 건, 둘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둘이 헤어진 것도 둘이 살아온 환경과 인종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일탈에서의 소중한 만남과 추억 그 이상의 미래를 상상해볼 수도 없는 둘은, 아직 그렇게 사이가 틀어지기 이전까지 2주간의 여유가 있었다. 관계가 관계를 완전히 망쳐버려 서로가 서로를 투명인간처럼 대하던 또다른 어느 날 귀국을 앞둔 몇일 전에도 기회가 있었다. 영주는 한지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걸 알았고, 그가 울고 있는 걸 알았고, 그래서 그 때에도 기회가 있었다. 까닭과 이유를 캐묻고 마음을 드러내고, 자신이 꾸던 둘이 함께 하는 그 아름다운 백일몽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하는 동안, 무슨 말이든 그렇게 끝내지는 않을 수도 있을 단 한마디로도 할 수도 있었을 한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고, 그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그랬다면 그들은 어쩌면 훗날 계속 편지를, 이메일과 SNS를 주고받으며 평생 친구로 남았을 수도 있다. 그들은 조금 편지를 보내다가 서로의 삶에서의 위상이 점점 줄어들고 희미해져 잊혀졌을 수도 있다. 매우 희박하지만 둘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둘 중 하나가 자신의 나라와 다른 모든 관계와 위치를 포기하고 그 둘 중 하나의 나라에 와서 사랑하고 살고 싸우며 지지고 볶다가 혹은 싸워 헤어지거나 혹은 무덤덤히 가족이 되어 그 완성(?)적 형태의 속된 사랑을 이루고 살다가 훗날 죽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선택지들의 끝은 둘이 함께 걸으며 우정과 사랑사이의 어떤 감정 속에서 느끼던 그 다름을 기반으로 다져진 관계와는 다른 양상으로 돌아갔을 것임을 우리는 안다. 


여기 살린 모든 이야기는 소중한 관계의 과정과 그 끝을 다룬다. 우리의 삶은 무수한 만남과 그 속에서 생긴 소중한 관계와 그 관계의 끝으로 생명력이 더해진다. 엄마가 순애 언니를 먼저 떠났을까? 순애 엄마가 언니를 먼저 떠났을까. 한 때 순애 언니도 부모가 다 살아있었을 때가,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였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행동과는 관계없이, 대가 없이 조건 없이 사랑해줄 부모는 떠났고, 혼자 남겨져 있던 순애에게, 동생이 생겼다. 예전에 식모라고 부르던 그저 밥한술이라도 덜고자 남의 집에 가정부로 어린 소녀들을 보내던 시기가 있었다. 식모는 아니지만 남들이 학교 다닐 나이에 옷 수선집을 하는 친척집에 맡겨져, 재봉을 돌리던 순애, 열한살 엄마보다 더 체구가 작은 열여섯 소녀가 주인집 열한 살 딸이 즉 화자의 엄마와의 관계는 어떤 연애 장면 보다도 아름답다. 인간의 본성이 관계에 바탕을 둘 때 이토록 맑고 투명할 수 있음을 생각케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런 순수한 시선을 나누면서 관계의 애틋함을 느낀다. 엄마에겐 언니가 생겼고, 순애에겐 동생이 생겼다. 엄마는 순애를, 개의 시선으로 본다. 이 장면을 읽으며 눈물이 나왔다. 함부로 새개씨니 개놈이니 하면서 개를 모욕하지 말아야 한다. 순애가 어릴 때 키우던 개가, 버림받고 외톨이인 순애를 세상 누구보다도 애정어린 시선으로 누구보다 귀하게 보았기 때문에, 먹을 수 없는 밥을 먹는 척 하던 개가 자신의 죽을 자리를 찾아간 듯 사라진 이야기를 듣고, 회상하는 장면이다. 


곰 (개 이름)의 이야기를 들을 때 엄마는 곰이 되어서 곰에게 이야기하는 이모(화자의 이모 = 순애)의 모습을 봤다. 곰아. 밥 먹어. 그 말을 하고 엉엉 우는 이모의 모습을 바라봤다. 곰의 마음으로 이모를 바라보면 이모는 세상 누구보다 귀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그 후로도 죽은 개의 마음으로 이모를 바라보곤 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두를 읽고 나서도 더 잃을 것이 남아 있던 이모의 모습을.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p100)


누군가를 향한 나의 마음은 반향되어 나를 향한 그의 마음으로 되돌아오고, 연애처럼 애틋한 우정은 영원할 것처럼 빛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도 언젠가는 뜨거운 태양도 언젠가 수십억년 후에는 초신성과 적색거성이 되고 백색왜성으로 스러질 것인데, 매일매일 작심삼일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것처럼 삼일을 견뎌내지 못하는 의지력을 가진 나약한 인간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과 의지와 바람과는 상관없이 변하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변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떠나고 떠나 보내고, 마음에 담았다고 퍼내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덜 상처받고 무뎌지는 법을 배운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동반 여행을 하고 등산을 했다. 스무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 받으면서, 그 때는 뭘 모르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면서 (씬짜오 씬짜오 - p116)


나는 이 단락의  마지막 구절에 마른 흐느낌이 나왔다. 아이들이 소리 내 울다가 들숨이 부족해 쉬는 숨 같은 거 말이다. 그 때는 뭘 모르지 않았나... 그 때는 뭘 모르지 않았나... 이 대목에서. 그 몰랐던 시절의 열린 빗장과, 빗장 바깥에서 만든 관계들, 빗장 속에서 형성되었으나 이제는 빗장 바깥에 있는 관계들, 빗장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도 없을만큼 먼지 쌓인 빗장 안에서 정말로 정말로 누구를 곰처럼 소중히 여겼던 시간들. 그리고 할머니도 생각났다. 길고 한많은 생을 살았지만 한 번도 빗장을 걸어 닫지 았았던 분, 하지만 쇠약한 몸과 늙음, 그 축복받은 장수가, 할머니가 주신 분에 차고도 넘치게 받았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어느 새 겨우 자신의 빗장 밖에서밖에 그분을 만나지 못하던 나날들을 한탄한다. 나는 왜 그랬을까. 한 때는 '전화도 편지도 불통인 중국 기간제 교사로 간 미진이처럼 할머니를 그토록 소중하게 아꼈었는데, 나는 빗장을 걸 필요가 전혀 없는 내 할머니에게 애기처럼 매달리지도 젖을 주물거리지도 언 손과 발을 따뜻하고 물컹물컹한 배속에 올려놓거나 품속으로 기어들지도 않게 되었다. 내 할머니가 쇠약해지는 동안 점점 그렇게 되었다.  돌아가시기 한참 전부터 이미 이별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줌마가 준 마음 한 조각을 엄마는 얼마나 소중히 돌보았을까 (씬짜오 씬짜오 p92). 


소중하게 붙잡고는 있지만, 그것은 기억일 뿐 더는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관계. 어차피 틀어질 수밖에 없는 수많은 까닭들. 그래서 아마도 쇼코의 미소는 서늘했을 것이다. 둘은 다시 만났지만, 그리하여 그간 쌓인 오해를 풀고, 할아버지가 남긴 유품을 읽고 다소간은 소중하게 붙잡았던 과거의 기억을 붙잡고 다시 채우려는 시도를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 때의 시간은 그 때 서로 몰랐던 그 우울한 비밀들과 할아버지와 공유했던 관계 속에서 생성된 특별한 것이기에 다시 만난 관계에서 생기는 새로운 관계는 고교시절에 간직한 것들과는 다른 양상을 띤 소중한 것들은 빗장 속에 걸어둔 채, 그 바깥에서 잃지 않고 상처받지 않을 것들로만 윤을 내는 서늘한 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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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와 함께 하는 나의 삶?  정도로 번역해야 할까. 얼마전 아주 짧으면서 인상적인 단편 하나를 만났다. 영어로 읽었고, 모르는 단어도 꽤 있었지만, 그 단어들의 여울이 주는 파도가 강렬하면서도 스산하게 마음을 건드린다. 100년의 고독 같은 중남미 작가의 작품은 고독의 심연이 주는 여운을 일평생 흔적처럼 지니게 된다. 시적인 작품이어서 찾아보니 원래 옥타비오 파즈 이 양반이 외교관이기도 했는데, 작가로서 주로 몰두한 것은 시였던 것 같다. 시인이 소설을 쓰면 긴 시처럼 읽힌다. 국내에 나온 번역서에는 이 작품이 포함된 작품들은 없는 것 같고, 주로 시론집 평론집 비평집 등인 것 같다. 


그 중, <우리집에 온 파도>는 바로 이 작품을 어린이용 그림책으로 각색한 아름다운 그림책으로, 책이 없어 미리보기로 살짝 앞부분만 읽어봤는데, 그림도 내용도 원작을 아주 잘 살렸는데, 이 책을 읽어본 친구가 그러는데 원래 작품과는 결론은 다르다고 한다. 


바닷가에서 파도가 내 집에 온다. 그 파도가 집에 와서 얼마나 집을 환하고 생기있게 해 주었는지, 온갖 형태로 모양을 바꾸면서 애무하고 속삭이고 노래하며 마음에 파고들던 파도는 햇빛마저도 더 오랫동안 집에 머물게 만든다. 새로운 만남, 새로운 관계, 새로운 취미,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사랑과 애정, 애착이 조금씩 그 실체를 드리우고, 결국은 파멸로 향해가는 모든 것에 대한 상징으로 읽힐 수 있다. 


영문 번역은 누가 했는지 떠도는 글이라 잘 모르겠는데, 어떤 라틴 아메리카 작가는 자신의 글을 영어로 번역된 걸 읽을 때 감명을 받는다고 했다고 한다. 구글에 영어로 번역된 pdf 스캔본이 돌아다닌다.


Her presence changed my life. The house of dark corridors and dusty furniture was filled with air with sun, with green and blue reflections, a numerous and happy populace of reverberations and echoes. How many waves one wave is, and how it create a beach or rock or jetty out of wall , a chest, a forehead that it crowns with foam! Even the abandoned corners, the abject corners  of  dust  and  debris  were  touched  by  her  light hands. Everything began to laugh and everywhere white teeth shone. The sun entered the old rooms with pleasure and stayed for hours when it should have left the other houses, the district, the city, the country. And some nights, very late, the scandalized stars would watch it sneak out of my house.


(그녀의 존재는 나의 삶을 변화시켰다. 어두운 복도와 먼지 쌓인 가구들의 집은 햇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녹색과 파란색의 반사, 수많은 행복한 반향과 메아리로 가득차 있었다. 하나의 파도는 얼마나 많은 파도인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벽, 가슴, 이마를 거품이 일게 만드는가! 버려진 구석, 먼지와 파편의 처량한 구석까지도 그녀의 가벼운 손에 닿았다. 모든 것이 웃기 시작했고 모든 곳에서 하얀 치아가 빛났다. 태양은 기쁨으로 옛 방에 들어가, 다른 집, 지구, 도시, 나라로 가야 했을 때 몇 시간 동안 우리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아주 늦은 밤, 그 스캔들로 얼룩진 별들은 그것이 우리 집에서 몰래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 번역 파파고)


 If I embraced her, she would swell with pride, incredibly tall like the liquid stalk of a poplar, and soon thinness would flower into fountains of white feathers, into a plume of laughs that fell over my head and back and covered me with whiteness. Or she would stretch out in front of me, infinite as the horizon, until I too became horizon and silence. Full and sinuous, she would envelop me like music or some giant lips. Her presence was a going and coming of caresses, of murmurs, of kisses. Pluming into her waters, I would be drenched to the socks and then, in the wink of an eye, find myself high above, at a dizzying height, mysteriously suspended, to fall like a stone, and feel myself gently deposited on dry land  like a feather. 


내가 그녀를 안을 때 그녀는 자랑스럽게 부풀어 오르고, 포플러의 액체 줄기처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키가 커지다가 곧 가늘어져서는 하얀 깃털의 샘으로 꽃을 피우고, 내 머리와 등을 넘어져 나를 하얗게 덮는 웃음의 기세로 변할 것이다. 아니면 그녀는 내 앞에서 무한히 뻗어서, 내가 수평선이 되어 침묵할 때까지. 그녀는 음악이나 거대한 입술처럼 나를 감싸주곤 했다. 그녀의 참석은 애무와 속삭임, 입맞춤의 오락가락했다. 그녀의 물에 몸을 담그면, 나는 양말에 흠뻑 젖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현기증날 정도로 높은 곳에서, 불가사의하게 멈춰진 채, 돌처럼 떨어져, 그리고 깃털처럼 마른 땅에 부드럽게 내 자신을 느낀다.


모든 것의 양면성의 진실은 시간이 말해주던가. 이랬던 파도가...


At unexpected hours she roared, moaned, twisted. Her groans woke the neighbors. Upon hearing her, the sea wind would scratch at the door of the house or rave in a loud voice on the roof. Cloudy days irritated her; she broke furniture, said foul words, covered me with insults and gray and greenish foam. She spat, cried, swore, prophesied. Subject to the moon, the stars, the influence of the light of other worlds, she changed her moods and appearance in a way that I thought fantastic, but was as fatal as the tide.


이렇게 된다. 파파고는 이렇게 번역했다. 이번엔 고칠 것도 없네


(예상치 못한 시간에 그녀는 울부짖고, 신음하고, 뒤틀렸다. 그녀의 신음소리가 이웃들을 깨웠다. 그녀의 말을 듣고, 바닷바람은 집 문을 긁거나 지붕 위에서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곤 했다. 흐린 날들이 그녀를 짜증나게 했다. 그녀는 가구를 부수고 욕설을 했고, 나를 모욕하고 회색과 녹색의 거품으로 덮었다. 그녀는 침을 뱉고, 울고, 욕을 하고, 예언을 했다. 달과 별, 다른 세상의 빛에 영향을 받아, 그녀는 내가 환상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류만큼이나 치명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그녀의 기분과 외모를 바꾸었다. 번역- 파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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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SF 소설에 관심을 가져볼까 해서 찾다가 (썰렁한) SF 협회 홈피에 들어가니 2018년 SF 어워드를 진행중이었다. 작품이 많이 않아서인지, 2017년과 2018년에 출간된 작품중 최고작을 고르는데, 단편, 중편, 장편, 코믹 등 네 분야의 후보작, 본심진출작, 최종 후보작 별로 목록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지난 2년동안 출간된 SF 작품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장편 부문 최종 후보작은 아래 세권이다. 이 중에서 대상과 우수상이 모두 나온다는 소리다. 모두 생소하다. 짦막한 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에셔의 손>은 이미 한국과학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전자 두뇌가 일상화된 시대에 기억삭제에 얽힌 미스터리를 다루는 듯하다. 넷플릭스에서 내가 가장 애정하는 프로그램인 블랙 미러의 에피소드들을 연상시킨다. <이방인의 성>은 소재면에서 보다 흥미로와 보이는데 17세기 명나라 패망 이후 중원을 접수한 조선이 2010년 건국 619년째 되는 해에 세계적 연회를 주최하며 이야기가 시작되는 대체역사소설에 과학소설의 온갖 현란한 기술들이 등장하는 이 책에 마음이 꽂혔다. 늦기 전에 격쿠 기간 중에 이북으로 구매해야겠다. 무한의 책은 메이저 출판사인 현대문학의 안목으로 출간한 SF인 만큼 작품성이 신뢰가는 면도 없지 않지만, 표지 역시 멋지지 않은가. 소재는 진부할 수도 있는, 시간여행과 평행우주인 듯 한데, 알라디너 평균 별점이 (많지는 않지만) 아주 좋다.















이 세 작품 이전에 최종후보작에 올린 장편은  다음과 같다.(출처 한국SF 협회 koreasf.org). 이 중에서 이보영의 <저 이승의 선지자>를 쫌 읽다 말았는데, 내용이 너무나도 철학적이고 심오해서, 자꾸 졸리고, 계속 읽게 될 것 같지가 않다.

장편소설

작품명작가출판사
러브비츠 평전김상원소울파트
무한의 책김희선현대문학
알렙이 알렙에게최영희해와나무
이방인의 성홍준영멘토프레스
에셔의 손김백상허블
저 이승의 선지자김보영아작
창백한 말최민호황금가지















나머지 부분의 본심 진출작도 모두 나열해본다.

중·단편소설

작품명작가출판사/플랫폼수록된 곳
어째서고호관크로스로드
만날 수 있을까곽재식그래비티북스행성대관람차
얼마나 닮았는가김보영한겨레출판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
라만차의 기사김성일브릿G
로드킬아밀(김지현)온우주여성작가SF단편모음집
원통 안의 소녀김초엽이음과학잡지 에피
단발리체르카브릿G
온도계의 수은박부용브릿G
꿈의 중첩박성환크로스로드
토요일박애진온우주여성작가SF단편모음집
원본증명배명훈동아사이언스과학동아
증명된 사실이산화황금가지단편들, 한국 공포문학의 밤
센서티브이서영동아사이언스과학동아
궤도의 끝에서전삼혜온우주여성작가SF단편모음집
위대한 침묵해도연크로스로드
나 누구랑 이야기하는 거니Nosmos브릿G

만화/웹툰

작품명작가출판사/플랫폼
꿈의 기업문지현네이버
신도림오세영네이버
드림사이드홍정훈/신월카카오페이지
부딪치다지완카카오페이지
브릿지강풀다음
언더그라운드 블러드팩OZI다음
그리고 인간이 되었다레진
무당석정현투믹스
심해수이경탁/노미영투믹스
엑스트라데이즈아니영케이툰
다리 위 차차윤필/재수저스툰
에이디키티콘/김종환저스툰/카카오

영상

작품명감독유통
낙진권혁준센트럴파크
서바이벌 가이드정철민카라멜이엔티
옥자봉준호루이스 픽쳐스 외
오제이티: On the Job Training최수진센트럴파크
종말의 주행자조현민센트럴파크
후보작들의 대다수는 같은 앤솔로지에 수록된 작품이 많다. 특히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와 세 개의 시간, 관내 분실, 단편들 한국 공포문학의 밤 등에서 많이 나왔다. 나머지는 대부분 브릿 G, 이북은 잘 보지만 온라인으로 소설을 쬘끔쬘끔 보는 게 익숙하지 않아 브릿G에 가입은 해 놓고도 아직 입문은 하지 못한 상태인데, 온라인 후보작의 대다수가 브릿G임을 보면 그쪽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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