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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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히는 책은 좋은 스토리를 가져야 하지만, 튼튼한 스토리는 사설이 길다. 때문에 첫장부터 흥미를 느끼려면 매력적인 문체가 글자 속으로 빨아들여야 하는데, 이 작가의 책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여기 실린 연작 네 편 모두가 남주가 여주를 문자 그대로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면서 생기는 일이다.  앞서가고 뒤따라가는 두 사람의 동선을 주의깊게 파악해야 전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문체가 재치있고 발랄해서 처음부터 충분히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시작인데, 이야기를 진전시키다보면 또, 문체만 가지고 노닥거릴 수는 없지 않나. 독특하고 재치있는 문체로 시작한 첫번째 이야기는 한밤 교토의 거리 본토초 주변을 배경으로 하기에, 자연스럽게 배경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배경 묘사를 그닥 즐거워하지 않는 나지만, 나오는 곳곳의 실제 모습이 궁금해,  구글의 한일번역사이트를 오가며 확인했다.  이 책에서 이야기의 진행과 판타지의 실제가  공간을 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이름도 없는) 두 주인공 남녀는 하루 혹은 밤동안 일정 범위에서 작은 모험을 한다. 엉뚱 발랄한 돈키호테가 호기심과 영웅심에 쩔어 집을 떠나고 온갖 기이한 일들을 겪고 개고생을 한 끝에 돌아오는 모험담이라면, 이곳의 두 주인공이 겪는 일탈은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아주 아주 작은 판타지로 채워진 모험이다. 표지의 모습처럼, 까만 머리의 막 대학생이 된 여주를 짝사랑하는 남주는 학교 선배이고 클럽에서 알고 지내는 사이이면서도 직접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채, 우연을 가장한 인연을 만들고 싶어 여주가 가는 곳을 멀찌감치 따라다닌다.


하지만 곧,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인가가 생겨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따로따로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엮여 하룻밤 혹은 하루낮 동안의 모험을 경험하는데, 당연히 여자를 따라다니다가 잃어버렸으므로 두 사람은 여전히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며, 남주가 만난 사람을 여주가 만나고 여주가 만난 사람을 남주가 만나고, 남주가 있던 곳에 여주가 가고 여주가 갔던  곳에 남주가 가면서 동선이 절묘하게 포개졌다 떨어졌다 한다. <밤은 짧아..>에서는 결혼식 연회장 멀리 달팽이를 들여다보던 까만머리 후배를 멀리서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하다가, 까만머리가 먼저 일어나 나가자 그녀를 쫓아다니기 시작한다. <심해어들..>에서는 이벤트성으로 열리는 헌책시장에 까만머리가 간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우연을 가장해 같은 책을 집었다가 양보하는 그럴 듯한 계획을 가지고 헌책 시장을 간다.


<밤은 짧아..>에서는 술 마시는 이야기가 펼쳐지고, <심해어들>에서는 책 이야기가 펼쳐진다. 둘 다 너무 좋았다. 첫편을 읽을 때는 마치 잔뜩 취해 흐느적거리는 기분이 되었고, 둘째 편을 읽을 때는 애독자로서 책에 대한 애정과 헌책 시장 풍경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네 편 모두 연작 로맨틱 판타지이다.


첫편에서 어른들의 세계가 궁금해 밤거리를 홀로 걷는 까만 머리 여주는 처음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성기가 그려진 그림을 부적으로 선물받고 또 춘화를 접하기도 하지만, 그 못지 않게 그녀를 지켜주는 사람들(하구치와 히다치)이 있어, 따라다니면서 온갖 다채로운 성인 문화를 겪는다. 이 때 그녀를 가이드해주는 사람들이 다른 시리즈에서도 계속 등장하는데 이들을 매개로 하여 만나는 세계는 현실과 괴리된 판타지적 세계이면서도 또 현실과 밀착되어 있기도 하다. 판타지적 세계가 펼쳐지는 방식은 비단 잉어가 회오리에 쓸려 하늘로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거나, 하구치의 입에서 종이 잉어가 나오고 귓구멍에서 마네키네코를 꺼내 보이는 것 같은 소소한 것도 있지만, 그 클라이맥스적인 것은 공간의 왜곡에서 보여준다.


“고양이와 달마오뚝이가 우글우글한 바, 쌍둥이 형제가 운영하는 커피숍, 요염한 분위기의 재즈바, 지하 감옥 같은 술집…… 차례차례 나타나는 술 그리고 또 술, 문 그리고 또 문, 술 그리고 또 술”


이 때문에, 어? 내가 뭘 놓쳤나? 여기가 어떻게 된 상황이라는 거야 하며 다시 책을 찬찬히 뒤져봐야 했다. 밤새도록 이 술집 저술집을 돌아다니며 온갖 사람들을 만나고 흐느적거리는 궤변춤 같은 온갖 해괴한 짓을 배우고 술이 떡이 되어 다니는데, 그 곳 거리의 술꾼들에게 수도 없이 들은 전설의 이백 옹을 만나 술내기를 벌이는 장면이 벌어지는 곳은 다름아닌 이백옹의 전차다.


“3층짜리 전차의 옥상에서 자란 풀이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   수초가 떠다니는 오래된 연못도 있었고 연못 기슭에는 대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었습니다. 대숲 속에 등롱이 걸렸는데, 그 뒤편으로는 벽돌로 만든 그슬린 굴뚝 하나가 서 있고 그 옆으로 나선 계단이 아래로 나 있었습니다. 목욕탕 카운터가 있었고 옆에 놋쇠 열쇠가 딸린 목제 사물함이 벽을 가리고 섰으며 대나무 발을 깐 마룻바닥에는 옷 담는 바구니가 늘어섰습니다.”


상상이 되나, 본토초의 거리에 호수와 대나무 숲을 통채로 담을만한 항공모함 크기의 3층 전차가 나타난다니 이거 말이 되나.  해리포터 시리즈 영화에서도 밖에서 보기에는 엄청 작은 공간이 문을 열고 속에 들어가면 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크기로 변하는데, 정말 이런 말도 안되는 공간적 왜곡을 통한 판타지의 실현은 매혹적이다.  이런 공간의 왜곡은 심해어들에서도 나타나는데, 까만머리 여 주인공이 책을 통해 어릴 때 기억을 하나씩 떠올리다가 그리움에 몸을 떨며 찾아 헤매기 시작한 동화책 <라타타탐(비네텟 쉬레더)>이 그 여성을 따라다니던 남주에게 우연히 눈에 띄어 필사적으로 책 대결에 들어가게 되는 이상한 공간도 그러하다.  헌책 시장은 교토의 시모가모 신사의 다다즈 숲 내 승마장이다. 헌책방은 텐트로 지어진 임시 매장에 불과한데, 그 이상한 공간에는 책꽂이로 건축물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각자 저마다의 책을 구하고자 하는 대결자들은 이 책꽂이 사이의 통로를 통해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통로의 한쪽 끝은 다른쪽으로 구부러져 있고, 그 사이에 가득한 헌책들이 점점 더 낡아 나중에는 변색된 종이 다발에 지나지 않는 공간을 통해 계속 걷다보면, 경마장 흙길의 바닥이 서양풍의 돌길로 바뀌고 계단이 나타나고 중후한 철문이 나타나고 거기에서 목숨을 건 책시합이 나타난다.


책시합. 이게 무슨 소린지 궁금하신 분은 책을 보시라. '그래봤자 종이 다발이야.' 어떤 사람에게는 보물인 책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종이다발이 될 수도 있다. 한 철도연구회 회원인 학생은 이 목숨을 건 시합에서 메이지 시대의 열차시각표 기차 노선 여행 안내 일년분을 얻고자 했고,  자신을 도와달라고 남주를 꼬셔 데려온 규방조사단 대표 치토세가 노리는 책은 누군가가 그렸다는 음서고, 또 어떤 사람은 기시다(?)가 직접 쓴 일기장이다. 이렇듯 목숨을 건 대결에서 서로에게 양보하라며 하는 말은 그깟 기차시간표, 그깟 동화책, 그깟 음서 하며 다른 사람이 구하는 책을 깎아내리는데 여념이 없다.


어릴 때 읽었던 책들은 그 누구도 어른이 되도록 간직하는 경우가 드문 것 같다. 삐뚤빼뚤 자기 이름까지 새겨진 자신의 어린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책을 헌책방에서 조우하는 기분은 어떨까. 시간 여행을 떠나 멀고 먼 아득한 자신의 어린 시절과 만나는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과거의 어떤 물건, 특히 책을 갖고 싶어하는 것은 책을 통해 경험한 그 소중한 감정, 차곡 차곡 쌓여 나를 만들고 인생의 일부가 되어 온 정신 세계에 관여했던 그 기억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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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의 뇌 - 뇌과학으로 풀어낸 음악과 인체의 신비
후루야 신이치 지음, 홍주영 옮김 / 끌레마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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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를 연주할때, 음악을 들을 때, 심지어 수학을 계산하거나 언어를 이해할 때까지 피아니스트의 뇌가 어떻게 동작하는지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친절한 그림과 함께 다룬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11살 이전의 연습량은 양손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운동 기능을 담당하는 수초의 발달과 관계가 있지만, 그 나이 이후의 연습량은 수초의 발달과 크게 관계가 없다. 살짝 아쉬운 점은 이러한 지식의 전달이 아주 개략적이고 간략한 전달에서 끝난다. 자세히 써 봤자 독자들이 뭐 이해나 하려나 라기 보다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쓰려한 흔적이다. 친절한 그림들을 보면 그런 마음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사실들 하나 하나가 깊이가 없어서, 뭔가 오 그렇구나 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한상에 골고루 차려진 요리를 조금씩 맛보다 보니, 뭔가 깊은 맛을 지닌 진짜 메인요리를 안먹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피아니스트라는 한정적 범위의 기술을 가진 사람의 뇌가 특별하다는 접근 보다는 일반적인 접근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 피아니스트의 뇌 발달이 반드시 피아니스트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뇌신경의 전반적 작동 및 발달 원리가 피아니스트에게 적용된 사례에 해당되는 것이다. 피아니스트로서의 뇌를 가지고 태어나기보다는 어릴 때부터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피아니스트로서 가져야할 여러가지 기술을 연마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음감이 발달하고, 해당 뇌 영역이 커지고, 일반인과 똑같이 손가락을 움직이더라도 에너지를 덜 사용하고, 왼손과 오른손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게 되는 거다. 이것은 비단 피아니스트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반복적으로 꾸준한 연마를 하면 따라오게 되는 정신적 육체적 승리이다.


피아노를 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왼손 오른손 부분이다. 초보 시절에야 멜로디를 담당하는 오른손에 맞춰 왼손은 뚱땅 뚱땅 박자나 화음을 맞춰주는 선에서 얌전히 물러나 있는게 왼손인데, 어느 시점을 지나가면 왼손이 오른손과 함께 화합하고 대결하고 때로 독립적인 멜로디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게 된다. 그럴 시점이 되면 오른손에 비해 왼손이 제대로 안움직여질 뿐만 아니라, 다음음을 예측하지 못하고 헤매게 되는데, 그 원인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왼손은 오른쪽 뇌가 오른손은 왼쪽뇌가 움직이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뇌의 왼쪽과 오른쪽이 신체의 오른쪽과 왼쪽으로 교차되어 있으니 뇌량이라는 다리를 건너 반대편 신체로 가야 한다. 이 때, 손가락을 너무 빨리 움직여야 하다 보니 다리에서 신호가 샌다는 거다. 오른쪽으로 가야 할 강한 왼쪽 뇌의 신호는 왼쪽으로 보내져서 왼손아 나 좀 따라다니지 말고 너는 너 할일이나 하렴 이라고 오른손이 아무리 핀잔을 줘도 같이가 같이가 하며 자기 일은 내던지고 오른손을 쫓아다니는 것이다.


다른 것도 다 그렇지만, 이미지 트레이닝은 특히 피아노 말고 일반적인 영역에서 활용할만한 좋은 뇌훈련인 것 같다. 예를 들어, 김연아가 시합전에 대기실에 앉아서 머리속으로 자신의 시합의 공연 모습을 그대로 그려본다면, 시합할 때와 똑같은 운동 피질이 활성화되고, 시합할 때와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책에는 당연히 피아니스트의 예를 들었다.



또한 피아니스트는 많은 단어를 떠올리는 실험을 했을 때, 시각 피질이 활성화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이는 악기 연주와 같은 예술적 훈련에 의해 공감각 기능이 후천적으로 발달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음악을 연주하려면 듣는 것을 잘 해야 한다. 당연히 청각 피질도 일반인에 비해 훨씬 발달했고, 음과 음사이의 미묘한 음의 변화 박자의 변화 이런 것들을 잘 포착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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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88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현 옮김 / 책세상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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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서부터 정치, 경제학, 그리고 혁명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를 휩쓸어 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인물이라고 말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이나 유물론 같이 한 때 한쪽 이념의 신봉자들이게는 성서이자 교과서였고 대립된 반대쪽에게는 불온서였던 책들 말고 유대인이라는 다소 지엽적으로 보이는 문제에 대한 글을 썼다는 사실이 일반 대중에게는 그리 크게 알려져있지 않은 듯하다. 


1844년에 발표한 두 편의 글은 당대 헤겔 철학파 부르노 바우어가 쓴 두 편의 유대인 비평에 관한 비평글과 우리말 번역자의 상세한 해제를 묶은 비교적 짧은 책이다. 짧다고 무슨 책이든 금방 읽히는 건 아니다. 특히 철학서란 내게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 용어의 추상성으로 인해 1차적으로 힘들고 특유의 번역체 때문에 한번 더 힘들다. 때로 이게 무슨 셀프 고문인가 싶은 짓이 철학책 읽기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기도 하고 안그렇기도 하다.


내가 약 10프로 정도나 이해했을까 그나마도 제대로 이해했는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이해됐다고 믿는 부분만 요악하면 이렇다. 바우어가 말하기를, '유대인이 기독교 국가(독일)에서 유대교의 종교적 특수성을 주장하는 것은 민족적 특권을 주장하는 것이므로 어리석다. 기독교를 믿어라.' 라는 것인데, 이에 대해 마르크스가 그의 논리를 반박하며 '유대인을 유대인이게 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그 반대다. 국가의 종교적 탄압이 그들에게 종교를 유지시킨다'는 것이다. 


통채로 인용되는바우어의 문장을 보면 당대 독일 내 유대인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마르크스가 바우어의 글을 반박한다고 해서 유대인 편들가를 하는 것은 아니다. 해제에서 밝혔듯이 한 때 이 글이 마르크스의 반유대적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라 잘못 해석되기도 했다는데 당연히 그의 유대인에 대한 적나라한 비평은 과연 칼 마르크스가 이런 사람이구나를 느끼게 해준다. 그런데 알고보니 마르크스는 유대인이었다. 알고보면 유대인이었구나 하는 사람 참 많다. 



“화폐는 이스라엘의 질투 많은 신이다. 그 앞에서는 다른 어떤 신도 존립해서는 안 된다. 화폐는 인간의 모든 신들을 낮추어서 그 신들을 상품으로 변화시킨다.화폐는 보편적인, 그 자체로 구성된 모든 사물의 가치이다. 때문에 화폐는 세계 전체에서,인간 세계 및 자연에서 그들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강탈했다. 화폐는 인간에게 낯선 인간 노동의 본질이자, 인간에게 낯선 인간 현존의 본질이다. 이 낯선 본질이 인간을 지배하며 인간을 지배하며 인간은 그것을 숭배한다.(46/110)”


당대 유럽에서 유대인은 참징권도 없고 사회 경져적 전반에 걸쳐 예외 대상이었는데 이 책의 흐름으로 짐작컨대 당대 유디인 해방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동시에 반유대적 정서가 널리 퍼져있는 듯한데 그 원인을 바우어는 1차원적으로  동화되지 않고 사회적 규율과 관습에 어긋나는 그들만의 종교에 집착하는 것이라 믿는다. 한 마디로 기독교가 유대교보다 더 진보되고 우월한 종교이니 그걸 믿어야 그들이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마르크스는 그러한 논리 뒤에 숨어있는 자본이라는, 시장이라는, 종교적 현상을 캐치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을 읽어보면 당대 유대인이 얼마나 악착같이 부에 집착했는지 또 사회적으로 유대인에게 부가 쏠리고 있는 현상을 비유대인들이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신랄하게 비판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유대교의 폐기가 아닌 종교 전반의 폐기, 종교는 사적인 영역으로 개인에게 맡기고 국가가 기독교를 믿던 유대교를 믿던 귀신을 믿던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듯하다.


서문에서도 말했듯 현재 이슬람교의 폭력의 근원을 이슬람교라는 종교 그 자체로 보고 히잡을 금지한다거나 하는 단편적 조치를 취하는 바보같은 짓을 할 게 아니다. 그것은 이제 지난 세기의 유대인과 똑같은 처지가 되어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들에게 그들의 종교가 이 모든 원인이이니까 종교를 버려라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우리는 유대인의 비밀을 그들의 종교에서 찾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종교의 비밀을 현실의 유대인에게서 찾는다.˚


이렇게 주장하는 마르크스는 '유대교의 세속적 근거를 사욕'에서 '유대인의 세속적 제의를 악덕상행위'에서 '유대인의 세속적 신을 화폐'에서 찾는다. 따라서 악덕상행위를 뿌리 뽑히도록 사회를 조직하면 유대인이 존립 불가능해지며 유대인의 종교적 의식은 현실적 삶의 공기속으로 사라잘 것이라는 거다. 당대 유대인의 경제적 지배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훗날 나치에 의한 학살이 당대의 일부(?) 국민들에게 지지받게 될만큼 유대인은 사회의 모든 부를  빨아들이며 이를 유대교라는 종교에 의해 선택받은 민족적 특권으로 치환하여 이해한 것이 모순이었다는 뜻으러 이해할 수 있겠다. 


정치적으로 받는 차별되고 핍박을 받는 압박을 종교적 특권을 포기하여 해결할 수 있다는 바우어의 견해에 대치되는 마르크스의 이런 주장은 이미 화폐가 세계의 힘이 되었기에 화폐를 지배한 유대인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해방되었다는 것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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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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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껏 쓴 글을 누군가가 붉은 펜으로 문장의 앞뒤를 바꾸고, 조사를 빼거나 바꾸는 등 많은 수정을 가하면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수정 후의 원고가 수정 전의 원고와 비교했을 때, 뜻을 명료하게 전달하고 읽기 편하다면 잠시의 불쾌함 보다는 원고를 수정한 당사자에게 고마워할 듯 하다. 아울러, 고친 부분의 문장을 들여다 보면서 내 문장의 어디가 무슨 이유로 수정되었는지 검토해서, 다음 번 글쓰기에는 좀 더 매끈한 문장을 쓰게 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문장을 수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소설가 김훈은 은는 과 이가의 선택에도 심혈을 기울이는데, 매끄러운 문장을 만들기 위해 다듬은 문장이 저자가 애초에 전달하고자 했던 뜻을 희석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 함인주라고 하는 사람이 이러한 불쾌감을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화자는 책에서 이상한 문장을 지적하고 수정하는 것만을 가르치지 않고, 교열자와 원작자 간에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긴장감과 불쾌감을 소설적 형식으로 포함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두가지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함인주와 화자의 서신 교환으로 교정과 문장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이 교환되며 동시에 또 한 갈래는 실제로 글쓰기 사례에서 빈번하게 잘못 혹은 어색하게 사용되고 있는 부분을 예를 통해 제시한다.


읽다 보면 함인주라는 사람의 집요한 따지기가 짜증스럽기도 하지만, 자신의 문장이 난도질 당하는 느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본문과 함께 병행 진행되는 스토리지만 나름 소설적 형식을 갖춰서 나중에 두 사람의 관계에 반전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래도 주요 내용은 문장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적의’를 보이는 ‘것들’이란 별 보태는 뜻도 없이 습관적으로 혹은 중독적으로 사용되는 흔한 예로, ‘OO적, OO의, OO하는 것, OO들’을 말한다. 다시 말해 접미사 ‘–적’的과 조사 ‘–의’ 그리고 의존 명사 ‘’, 접미사 ‘–들’이 문장 안에 습관적으로 쓰일 때가 많으니 주의해서 잡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들’을 반복해서 쓴 원고를 ‘재봉틀 원고’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모든’ 이 붙은 명사에는 ‘들’을 붙이지 말라고 충고한다. ‘적의’를 보이는 것들의 예는 대략 이렇다.

 
•선수들은 소속 팀에서의 활약 여부에 따라 올스타에 뽑힐 수 있다.=> 팀에서 보이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 => 있다는 
우리가 서로 알고 지낸 것은 어린 시절부터였다.=>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서로 알고 지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내가 느낀 분노의 강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 컸는지
•실패한다는 것은 단지 출구를 찾지 못했다는 것일 뿐이다.=>란 , 못한 것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딱 꼬집어 말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 부르는 게, 말하기는


이 문장들은 얼핏 내가 보기에 크게 어색한 게 없어보이지만 이렇게 바꾼 정답지(?)를 보고 나니 무엇이 문제인지 알겠다. 특히 세번째 문장 처럼 ~것을 주어로 하지 말고 우리를 주어로 바꾸면 문장이 놀랍도록 쉬운 문장으로 바뀐다.

 

굳이 있다고 쓰지 않아도 어차피 ‘있는’ 역시 습관적으로 붙이는 표현 중의 하나인데, 잘못쓰는 세 가지 경우를 소개한다. 1)  진행될 수 없는 동사에 ‘있다’를 붙이는 경우(예 ‘출발하고 있다' 는 ‘출발했다’가 맞음). 2)술어에 별 의미 없는 ‘있었다’를 쓰는 경우  3)  반복적으로 쓰이는 대표적인 표현 ‘–관계에 있다’, ‘–에(게) 있어’, ‘–하는 데 있어’, ‘–함에 있어’, ‘–있음(함)에 틀림없다’가 그것으로 다음 예를 보면 우리가(아니 내가) 얼마나 이렇게 안이하게 글을 쓰고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멸치는 바싹 말라 있는 상태였다. => 마른
•눈으로 덮여 있는 마을 => 덮인
•도시 끝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기념비 => 잡은
•길 끝으로 작은 숲이 이어지고 있었다.=>이어졌다.
회원들로부터 정기 모임 날짜를 당기라는 요청이 있었다.=> 이, 당기라고, 요청했다.(2번째 경우)
•그 제안에 대한 검토가 있을 예정이다.=>‘그 제안을 검토할 예정이다'
•런던에서 있었던 사고 때문에 귀국이 늦어졌다.=>‘런던에서 생긴(겪은, 터진, 맞닥뜨린) 사고 때문에 귀국이 늦어졌다.
그에게 있어 가족은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그에게
•그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주목해야 할 부분은 무엇보다 비용이다.=> 다룰 때


지적으로 게을러 보이게 만드는 표현으로 1) –에 대한(대해), 2) -–들 중 한 사람, 3)–들 중(가운데) 하나, 4)–들 중 어떤 을 제시한다. 많은 예를 통해 일단 대충 읽으면 지적으로 보이나 꼼꼼이 따져보면 단어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서술하지 않고 대충 ‘대한’이라는 말로 얼버무린 것을 알겠다. ‘사랑에 대한 배신’,  ‘노력에 대한 대가 ‘ 등 저자는 이러한 표현이 ‘대한’을 활용한 문장이라기보다 ‘대한’이라는 붙박이 단어를 중심으로 나머지 단어를 배치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고 말한다. 이렇게 대한을 자주 쓰는 이유는 표현을 '더 정확히 하려고 고민할 필요가 없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아 정말 맞는 말이다. 사랑에 대한 배신이라는 말은 사랑을 저버리는 일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는 행위, 사랑에 등 돌리는 짓 등이 있고 두번째는 노력에 걸맞은 대가 또는 노력에 합당한 대가 또는 노력에 상응하는 대가 등 정확한 표현이 얼마든지 있다.

•종말에 대한 동경이 구원에 대한 희망을 능가했다.=> 을 향한, 을 바라는
•과대망상에 대한 증거를 찾았다. =>을 증명해 줄(밝혀 줄) ]

  

이 밖에도 지적으로 게을러 보이는 표현중에는,

1) -같은 경우
    •나 같은 경우, 그 같은 경우, 중국과 같은 경우는 ⇒ 내 경우, 그 경우, 중국의 경우 =>나, 그, 중국)

2) -에 의한, -으로 인한
    •시스템 고장에 의한 동작 오류로 인해 발생한 사고=>에 따른, 때문에
    •실수에 의한 피해를 복구하다.=>로 빚어진
    •지배 계급의 손에 의해 조종되는 존재들 => 손에

 

 등이 있다.


‘–에’와 ‘–으로’는 혼동해 써서는 안 되는 조사라며  ‘용언의 어간에 붙는 건 어미고, 체언에 붙는 건 조사다.’는 설명이 앞서는데 아 진짜, 용언이며 어간 어미 체언 이런 어려운 말들은 쥐약같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엔 새겨들을 말이 많아, 네이버에 찾아봤다. 체언은 주어같은 몸말이고, 용언은 문장에서 서술어의 기능을 하는 동사, 형용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대충 알겠다.. 그러고보니, 에와 으로 뿐만 아니라 에서 으로부터 이런 게 총체적으로 다 헷갈리는데, 설명과 특히 예문이 알기 쉽게 잘 나와있다. 에’는 처소나 방향 등을 나타내고, ‘을(를)’은 목적이나 장소를 나타내는 격 조사.

 

•자식이 명문대 가는 게 꿈인 부모들=>에
•학원 보낸다고 성적이 오르는 건 아닙니다.=>에

조사 ‘–에’는 무생물에, ‘–에게’는 생물에 붙친다. ‘–에게서’는 ‘–에게’와 ‘–에서’가 합쳐진 조사인데 쓰임에 따라 표현이 어색해질 수 있으니 가려 써야 한다. 이건 진짜 몰랐다.

 

•적국에게 선전 포고를 하다. =>적국에
•우리 정부는 미국에게 바뀐 정책에 대해 설명했다.=>미국에
•업자에게서 뇌물을 받은 공무원이 적발되다.=>에게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를
•그들은 내게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O)

 

번역체에서 자주 쓰이는 ‘으로부터’ 역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문법적으로보면, ‘‘–로’는 체언이 움직여 가는 방향을 나타내는 조사인 반면 ‘–부터’는 출발점을 뜻하는 조사다. 그러니 ‘–로부터’라고 쓰면 방향이 서로 어긋나는 셈이다.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에게
•부모로부터의 이별    => 와의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사람들    =>과
•서울로부터 온 사람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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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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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처럼 흩어지고 사라지고 변하는 생각을 언어로 바꿀 때 이리저리 흩어져 가던 생각들은 잠시 자리를 잡고 고정된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혹은 자주 생각을 언어로 한다. 선택하고 표현하는 언어 속에 생각이 스밀 때, 모양도 형체도 없이 자유자재로 흩어지던 생각의 한 자락은 언어 속에 잠시 고정된다. 그 언어가 글씨가 되면 생각은 남겨진다.


글쓰기는 그 남겨지는 생각의 한 자락이다. 남겨지기 때문에, 우리는 글을 잘 쓰고 싶어진다. 학창 시절  일기가 방학 숙제의 피날레였을 적, 일기 조차 일기는 (때로? 언제나?) 선생님이라는 독자를 고려하고 작성했다. 책에서도 언급되는 부분인데, 일기장의 끝에는 결말이 필요했다.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 앞으로 착한일을 많이 하겠다고 생각했다 등등 마음에 없는 말이지만 글쓰기의 한  형식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생각을 만들어냈다. 전혀 즐겁지 않았던 어린이날의 긴 줄서기와 만원버스의 시달림의 시간이 끝나고 일기장에 그 즐거운 하루였다는 말을 쓰는 동안, 생각과 기억은 하루 중 잠시 머물렀던 즐거움의 조각을 붙들어 글씨 속에 붙여 놓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분리시키는 일이고, ‘나’와 ‘나를 바라보는 나’가 대화하는 일이므로 ‘나를 바라보는 나’가 존재하는 순간, 누군가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




멀티 미디어의 시대에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대고 움직이고 말하고 동영상과 사진과 음성 파일이 대세인 오늘날이지만, 텍스트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탄하는 오늘날이지만, 오히려 직접 보고 말하는 커뮤니케이션보다는 더 많이 글자에 의존하게 되었다. 오늘날 간단한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 신호음을 기다리거나 집중하고 있던 일을 잠시 멈추는 일은 드물다. 개인과 친교 집단간에는 문자와 카톡이, 취미집단간에는 카페와 SNS 등으로 얼굴을 보지 않고도 말을 하지 않고도 글을 매개로 의사전달이 이루어진다. 




의사소통에 미괄식과 두괄식 타입 중 하나를 선호하는 사람들 얘기가 나온다. 학교 때를 돌이켜 보면, 요란하게 교실문을 들어오면서 대단한 소식을 전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어떤 아이는 애들아 대박 옆반 선생님이 결혼한대 이렇게 빵 하고 터뜨리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아침에 집을 나와 길을 건너는데 저 앞에 자전거가 한대 오는 거야. 로 아주 평범하게 시작하면서 점점 긴장을 끌어오다가 끝에가서 빵 터뜨리는 아이가 있다. (김중혁 작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풍성할 수록 글쓰기에 뜯어먹을 풀밭이 풍요로와진다는 얘기를 하는데, 나도 진짜 많이 뜯어먹고 산다. 어린 시절 얘기가 나오니 갑자기 또 아빠와 할머니가 생각나서 눈시울이 붉어진다). 작가가 한 얘기를 조금 바꾼건데, 소설에서도 그렇고, 모든 글에서 미괄식과 두괄식의 경우로 나누어볼 수 있을텐데, 그걸 누가 갈켜 줘서 하는 게 아니라, 개인적인 스타일이 아닐까 싶다. 




내 경우, 생각이 산만하다 보니 결론을 먼저 내버리고 그것을 서포트하는 글을 써나가기가 어렵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언어로 바꿔나가다보면 조금씩 정리가 되어 결론을 향해 가기도 하고, 그냥 두서없이 생각만 적다가 끝나기도 하고 하는데, 작가는 반드시 결론이 있어야 되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한다. 마음에 든다. 생각없이 생각을 글로 적다보면 한참 길어지고, 그러다보면, 아 너무 길다. 끝내자. 하고 중간에 끝내는 경우도 많다. 예전엔 TV 쇼가 끝날 때 구구절절 안녕히 계시라 시청해 줘서 감사하다 이런 뻔한 인사의 말이 길었는데, 요즘은 막 말하다가 시간되면 중간에 네 마치겠습니다. 하고 끝내는 경우도 많다. 




김중혁 작가가 신뢰하지 못하는 글,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건  교훈이나 반성으로 끝나는 글이다. 자신의 주장을 지나치게 반복하거나 한 문장에 똑같은 단어가 서너개 있을 때에도 신뢰하지 못한다고(이말은 백번쯤 들은듯). 화가 폴 가드너의 “그림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다만 흥미로운 곳에서 멈출 뿐이다.”를 인용하며 원고지 14매 정도의 산문을 잘쓰는 방법은 “글을 쓰기 시작하여 원고지 14매가 되면 멈춘다.”라고 자신의 버전을 만들 만큼 글쓰기에 있어서 형식을 중시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의 말에는 어느정도 공감하지만 한 권의 책을 묶는 것과 짧은 글 한 편을 쓰는 것과는 다르다고 본다. 이 책은 좀 두서없다. 시집도 아닌데 책의 텍스트 자체가 빈곤한 것은 출판시장의 전략인듯 싶지만, 기존에 발표한 글들을 대충 엮은 듯하게 일관성이 없다. 앞부분은 문구류 소개 중간은 글쓰기에 대한 생각과 경험, 뒷부분은 인용문 빈칸 퀴즈맞추기 이런 식인데, 따로따로 놓고 보면 괜찮은데, 한 권 묶이기에는 좀 따로 논다는 느낌이다.




“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문장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잘 살아보세’라는 간단한 문장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웠다. ‘대학 가서 미팅 할래, 공장 가서 미싱 할래’, ‘10분만 더 공부하면 마누라가 바뀐다’ 같은 고등학교 교실의 급훈은 세상 그 어느 문장보다도 폭력적이다. 어떤 문장은 칼이나 총보다 폭력적이다.”




책을 읽는 이유는 무얼까. 작가는 두 가지 중 하나로 본다.    ①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멋진 문장을 만났을 때    ② 내가 원하는 문장을 찾았을 때.  전자는 새로운 것과 신비한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고 후자는 익숙함과 공감, 위안을 준다. 하지만 ① 은 쉽게 지칠 수 있으며 ② 만으로 점철된 책은 민망하다. 




“종이 위의 문장들은, 일종의 평행 우주다. 종이 위의 문장들은 실재하는 현실과 무척 닮아 있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글을 쓰는 사람은 종이 위에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고, 가보지 못한 길을 상상할 수 있다. 픽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글이 그렇다. 우리는 글 속에다 새로운 우리를 창조할 수 있다. 우리는 글을 통해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인 척할 수 있다. 더 현명하거나 더 세련된 사람인 척할 수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나 그럴 수 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더 나은 사람인 척하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다. 글쓰기는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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