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산보
플로랑 샤부에 지음, 최유정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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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거나, 혹은 가지 않더라도 강한 인상으로 남는 시각적 이미지들을 기억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댄다. 물론 구글이 알아서 클라우드에 저장도 해주고, 분류도 해주고, 비디오랑 파노라마 사진 뿐만 아니라 필터까지 끼워서 테마별로 멋진 앨범을 만들어주고 몇년 전의 오늘을 상기해 보라며 퀘퀘묵은 사진을 꺼내다가 보여주기까지 하지만, 확실히 카메라는 너무 많은 사진을 찍고, 가끔은 그 속에서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나는 무엇을 간직하고 싶었던 건지 그런 것들이 묻혀가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책을 보고 나는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 빠르게 이동하면서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기록하기를 원한다. 한 번에 몽땅 보여주는 패키지 여행을 떠나 여행 대부분의 시간을 차창밖을 바라보며 보내고, 자유 여행을 하더라도 여행 책자에 나와있는 건 다 봐야 하고, 백종원이 추천한 맛집도 다 먹어봐야 하고, 보이는 건 다 찍어야 하고.. 그림을 그리면서 다닌다는 건 아주아주 천천히 내게 보이는 이 낯섬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로 그려서 간직하겠다는 거다. 


프랑스에 돌아오니 중국 여행이 어땠냐고 물어봤다. 어쨌든 거기 일본인들은 정말 친절했다고 대답해줬다. 


프랑스인들은 도쿄를 '못생긴' 도시라고 애기하는 모양이다. 중세풍 돌길이나 두오모와 뾰족 성당 같은 데 익숙한 유럽인들이 도쿄에서 어쩌다 만나는 유적이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저자는 유적은 아니지만 도쿄에는 두 눈에 가득 담아올 볼거리가 엄청 많다고 했다. 책의 성격은 일본 여행 책의 범주에 넣을 수 있겠지만 평범한 여행서는 아니고, 작가가 여러 도시를 돌면서 인상적이었던 것들을 말 대신 글 대신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6개월간 머물 기회가 있었고, 자전거를 타고 방방곡곡 다니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들, 이방인의 눈에 낯설게 비친 것들, 예쁜 것들을 그림에 담았다. 


그림은 나리타 신도쿄 국제 공항에서부터 시작한다. 간단한 스케치 수준은 훨씬 뛰어넘는다.



그리고 (아마도) 첫발을 딛고 아파트를 찾아 헤매면서 만난 편의점 음료와 간식들의 스케치와 느낌. 일기처럼. 작은 기록



지도도 있고, 집도 있고, 거리도 있고, 사람도 있고 여행정보 비슷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도 스토리가 있다. 여친과 함께다. 


어렵게 구한 집의 묘사는 깨알같다. 방 2개짜리 다다미집을 구했는데, '할머니들이 살 것 같은' 집이고, 둘은 요를 깔고 잔다.



이렇게 시작한 도쿄 생활, 보고 듣고 겪은 것들이 한장 한장 모두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 속 신사지기가 그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여러번 확인하고 갔다는 설명이 재밌다. 그림을 그리려면 확실히 모든 걸 주의깊게 보게 되고, 게다가 설명까지 넣게 되면 정지된 순간은 이렇게 포착되어 영원히 기억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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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비밀 네트워크 - 나무가 구름을 만들고 지렁이가 멧돼지를 조종하는 방법
페터 볼레벤 지음, 강영옥 옮김 / 더숲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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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가 자연이고 어디부터가 인공인가. 자연의 반대말은 인공이냐 문화냐 혹은 또다른 어떤 것이냐. 이런 정의와 범위의 문제에 부딪치지 않고서는 이 끝없는 개발과 보존 논쟁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콘크리트 건물 사이에서 미세먼지를 뒤집어 쓰고 사는 우리는 언젠가 계획적으로 고르게 심어 놓고 때가 되면 솎아주고 가지도 쳐주는 푸른 숲에 가서 그것을 '자연'이라 보른다. 꽃이 피고, 나무에 열매가 맺고, 새 소리가 나고 화들짝 놀란 작은 다람쥐가 나무 위로 쪼르르 올라가는 풍경은 전적으로 자연적인 풍경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꾼 숲을 자연이라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냥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책의 저자는 독일이어서 독일 사람들의 경향에 대해 써있다) 숲에 가면 언제든 풍부한 사냥감을 사냥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먹이(사료)를 숲에 인위적으로 가져다 준다고 한다. 고양이 밥 주는 사람들처럼 숲의 동물들에게 굶어 죽지 말라고, 밥을 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행위다. 채식동물들은 겨울에도 살아남아 배불리 먹고 편안하게 번식하기 때문에 대를 이으며 선택적으로 발전시켜온,  살아남기에 유리한 진화적 이점들을 잃는다. 갖다주는 밥을 편히 먹고 잔뜩 번식할 뿐 아니라, 개체수가 늘어나는 바람에 다른 식물을 포함한 다른 종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더 나아가서는 함께 살아가던 동식물 뿐만 아니라 기후와 환경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빽빽한 아파트 생활을 하는 곳에서는 좀처럼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넓은 땅과 아직은 쓸만한 전원적 주거 환경을 가진 미국 사람들은 새들을 위해 집도 지어 달아놓고, 먹이와 물도 매달아 놓곤 한다. 하지만 그런 행위 자체가 자연을, 스스로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가던 생태계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자연이란 우리 눈에 보이는 생물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 바이러스, 꿈틀거리는 땅밑의 작은 애벌레들, 곤충들, 날아다니는 것들 등 아직 인간이 그 존재를 알지도 못할 지도 모르는 수많은 미지의 생명들로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 사랑스러운 사슴들이 뛰어다니는 숲을 가꾸기 위해 먹이를 톤단위로 실어다가 뿌리는 일들이 결과적으로 어떤 재앙을 가져오는지 알지 못한다. 자세한 건 책에 써있지만, 이게 답이다 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환경 보호를 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환경이라는 것인가. 예를 들어 우리는 숲에 나무를 심고 가꾼다. 물론 한국전쟁 이후의 상황처럼 민둥산이 될때까지 나무를 베어 없애는 것 보다는 계속해서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게 훨씬 자연에 가까운 건 맞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인공적으로 계획적으로 식목된 것은 자연의 해당 지역의 기후와 식생에 적응하고 진화해온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는 거다.


우드와이드웹이라는 개념이 흥미롭다. 땅속 나무뿌리들과 균류들이 서로 연결해서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개념이다. 가령 어떤 동물이나 곤충들의 개체수를 조절하기 위해 이 우드와이드웹 신경마을 통해 나무들은 서로 회의하고 통신하여 어느 해에 더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인지 같은 것드을 결정한다고 한다. 또한 어떤 나무(너도밤나무가 예)들도 모성애가 있어서 씨앗을 자기 밑에 떨어뜨리고, 새끼 나무를 잘 자라게 하는 화학물질들을 분비하고 보호한다는 것이다.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하는 인위적인 행동들이 특정 인간이 선호하는 개체의 수를 증가시키면 반대로 다른 동식물들은 피해를 입는다는 것, 그게 이 책의 핵심 내용이거 되풀이되어 설명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꿈틀거리는 아주 작은 생물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것들이 자연을 계속 순환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많은 동물들이 숲에서 서로 먹고 먹히지만 뼈다귀와 털 같은 것들은 여전히 숲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것들을 분해하고 청소하는 일들을 우리가 혐오하는 온갖 종류의 수많은 작은 생명체들이 맡아 하고 있다. 나무잎이 떨어지면 그것은 그대로 쓰레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위별로 각기 다른 작은 생명체들이 그것들로부터 영양분을 취하고 똥을 싸면 그게 부식토가 되어 다시 숲을 가꾼다.


번역상의 문제인지, 글 자체가 문제인지, 한 문장 한 문장 각각은 매끄러운데, 나로서는 전체적으로 맥락이 연결되지 않는 문장이 많았다. 어쩌면 환경이라는 문제가 이게 답이다 라고 과학적 해답을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원글 자체가 그렇게 쓰였을 수도 있겠는데,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이 아무 설명없이 모순되는 경우가 그예다.  꼼꼼히 해석해서 읽지 않으면 대체 어떤 원리로 그게 그렇게 되었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내게는) 많았다. 아는 건 설명이 자세한데, 모르는 건 대충 넘어가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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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턴 휴스 -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 외 4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0
랭스턴 휴스 지음, 오세원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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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중기의 작품속에 등장하는 흑인들의 모습은 전형적이다. 당시 문학이 백인눈에 비친 흑인의 모습으로 주로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흑인의 인권을 다루고 있는 <앵무새 죽이기>에 나오는 가정부 흑인들은 목소리가 없다. 내면이 잘 읽혀지지 않는다. 아이가 흑인 가정부를 굉장히 따르고 좋아하는데, 현재를 살아가는 독자에게는 그 모습조차도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그 선의로,  그러니까 아주 좋은 사람으로 포장된 흑인조차도, 그들은 주체적인 모습이 아니라 보조적이고 기댈 수 있는 버팀목 같은 존재, 좋게 봐줘봤자 엄마같은 존재로 등장하는 데 있다.  <앵무새죽이기>가 탄생할 당시의 남부에서 흑인의 무엇이 존재했었겠느냐라고 한다면 탄압과 억압과 차별 밖에 기억나지 않을테지만,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다 하더라도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스스로 생각하고 즐거워할 문화적 코드와 그걸 향유할 권리가 있다. 블루스가 탄생하고 흑인 내부에서 부흥을 맞고 있을 무렵 흑인 문학의 정점에 있었던 랭스턴 휴스의 단편들은 이제껏 읽었던 그 어떤 소설보다도 소수자 고유의 생각과 문화들을 잘 나타낸다.


작가 자신이  흑인 혼혈이었던 랭스턴 휴스의 흑인에 대한 단편들에는, 흑인들이 스스로 향유했던 문화가 정치적 담론으로 훼손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담겨있다. 랭스턴 휴스는 할렘 르네상스를 이끈 흑인 문학의 거장이라 알려져 있는데, 할렘 르네상스는 그렇게 모여든 흑인들이 할렘가에서 모여살면서 공동체적인 문화를 만들어가고, 블루스와 재즈 같은 찬란한 문화가 꽃피고 백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문화적 확산 현상을 말하는 듯하다. 모두 특별했지만 두 편만 소개한다.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


어떤 (백인) 여자가 돈방석에서 헤엄을 처도 남아돌만큼 많은데, 남편이 죽었고, 자식은 없고, 예술적 안목은 대단히 커서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재미로 살고 있었는데, 할렘에 살고 있는 어떤 흑인 여자(오시올라)가 재능있다는 말을 듣고 후원을 하고 싶어한다. 오시올라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교회 성가대를 지도하고, 매일밤 흑인 집에서 벌어지는 파티에서 연주를 하느라 바뻐, 부자백인이 저명한 음악 비평가를 통해 연주를 해달라는 청을 거절하는데, 이유가 멋지다. '일면식도 없는 늙은 백인 여인 앞에서 연주를 하기 위해 시내로 나가는 일이 별로 탐탁잖'아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둘은 부모 자식과도 같은 사이가 되고, 재능있는 오시올라는 백인 여사의 후원으로 대가에게서 레슨도 받고 유럽으로도 콘서트도 떠나는 완전히 다른 생을 살게 된다. 여사는 다른 어떤 후원대상자들 보다도 그녀에게 애정을 쏟고, 재능있는 피아니스트도 세계적인 호평을 받으며 점점 더 자리를 굳건히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오시올라는 할렘의 파티장에서 치던 여사가 싫어하는 블루스를 여전히 사랑하고, 사랑하는 흑인남자와 결혼하고 할렘으로 돌아가서 살고 싶어한다. 여사의 의견은 결혼은 재능있는 한 예술가의 앞날을 망칠거라며, 앞으로 결혼하고 애낳고, 살림하고 뭘 할 수 있겠냐며 극구 만류하지만, 자신은 결혼해서도 계속해서 예술을 할 거라고, 그렇게 갈등이 생기는데, 갈등의 최고조는 여사 앞에서 오시올라가 블루스를 연주하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너는 네 음악으로 하늘의 별들도 움직일 수 있어, 오시올라. 경제가 불황이든 활황이든 나는 너를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만들 수 있다고. 하지만 너는 기껏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잖니? 예술은 사랑보다 훨씬 크단다.”


“아니에요.” 오시올라가 자르듯 말했다. “이건 제 거예요…… 들어 보세요! ……얼마나 슬프고도 쾌활한 소리인지. 우울하면서도 행복하고—웃으면서 눈물이 흐르고…… 얼마나 여사님처럼 희지만 나처럼 검은지…… 얼마나 남자 같으면서…… 얼마나 여성스러운지…… 피트의 입술처럼 따뜻한지…… 이게 지금 제가 연주하고 있는…… 블루스예요.”



이 작품 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에서는 흑인을 혹은 흑인 문화를 사랑하거나 호기심을 가진 백인들이 등장한다. 얼핏보면 굉장히 선한 사람들이고, 흑인의 인권 향상에 큰 도움을 준 사람들이지만, 누가 보면 예민하다고 할 수 있을만한 섬뜩한 느낌이 나는 부분이 있다. 나는 이 책의 핵심이 바로 그 섬뜩함에 있다고 본다. 흑인을 미화하고 후원하고 대접하고 찬양하는 사람들은 흑인들을 자신과는 다른 어떤 대상으로 흠... 그러니까 내적으로는 인지하지 못할지언정 욕망의 대상으로 탐욕스럽게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오시올라는 재능이 있었고 생기가 넘쳤으며, 이제껐 그녀가 가까이했던 어떤 사람들과도 전혀 다르게 생겼다. 우단같은 윤기나는 검은 피부, 젊은 육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런 생기나고 반짝이도는 정체성의 근원인 흑인사회의 모든 것과는 그녀를 떼어놓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녀를 그 지저분한 할렘에서 구해내어 깨끗하고 예술적이고 위선적인 백인 사회에 융화시키고 싶어하는 것이다. 


경매 부쳐진 소년(Slave on the Block)

경매 부쳐진 소년(Slave on the Block)에서 더욱 노골적인 백인 예술가의 시선이 전해지는데, 마이클과 앤 캐러웨이 부부는 대놓고 흑인들을 좋아했다. 그들이 볼때 흑인은 매력적이고 순수하고 너무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흑인은 돕와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다. 예술을 간섭하지 않고, 그들이 그린 그림을 구매하고 찬양하고 따라한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그래서 흑인들을 자주 그 거대한 저택에 초대하여 파티도 열곤 하는데, 이상한 건 그 집을 반복해서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오갈 데 없는 어떤 흑인 아이가 일거리를 찾는 걸 알고 코딱지만한 정원을 가꾸는 일을 억지로 만들어 데려다 놓았는데, 그의 육체가 너무 아름다와 앤은 그 아이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쟤는 자체가 정글이에요' 


루서는 경매대로 사용될 상자 위로 올라갔고 앤은 스케치를 시작했다. 점심 전에 집에 돌아온 마이클은 이제 막 팔려 갈 노예로 웃통을 벗고 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루서를 보곤 입에 거품을 물며 칭찬을 했다. 그는 당장 그의 모습을 곡으로 남겨야겠다고 말했다.


마이클에겐 뮤즈이자 집안의 정원사이자 앤에게는 모델인 루스는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밤새 집안의 다른 하녀(매티)랑 클럽에 가서 놀다 와서는 모델 설 때는 꾸벅꾸벅 졸아, 앤은 아얘 자는 모습을 스케치한다. 일거리가 없어 전전하던 때와 비하면 세상 편한 직업이다. 두 사람은 흑인 하인들에게 늘 친절했고 급여도 넉넉히 준다. 그러면서 부부는 점점 더 두 사람을 다루기 힘들어진다. 두 흑인은 서로 아예 부부처럼 행동하고 놀러 다니고 쇼핑다니고 하면서 집안일은 소홀히 한다. 그러다 어느날 마이클의 어머니가 부부를 찾아오자, 원래 있던 하녀 매티의 행동이 복종적으로 달라지지만, 사정을 모르는 루스는 까불다가(멋대로 안녕하시냐고 얼마나 계시게 될 것이냐라고 아는 척 한 것) 자기는 흑인들이 스스럼없이 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게 되자, "어쩌나, 나도 가난한 백인들은 딱 질색인데"하고 맞받아쳤다가 사단이 난다. 마이클의 어머니는 세상이 두 조각이라도 난듯 고래고래 난리 부르스를 치고, 마이클은 그 자리에서 루서를 내보내겠다고 아이에게 나가라 소리치는데, 앤은 그꼴을 모고, 자기는 그림<경매 부쳐진 소년>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며 징징거리고, 그러자 이제까지 복종적이었던 매티까지 가세해서 너님들의 멍충한 짓거리에 염증이 나있던 참이다 나가겠다고 큰소리친다. 


이에 두 부부는 벙 찐다. 그들은 두 사람에게 얼마나 친절히 대해주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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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서버 - 윈십 부부의 결별 외 35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9
제임스 서버 지음, 오세원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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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술집에서 만나 책 얘기를 한다. 여자는 추리물 매니아인데 자신이 어제 책방에서 추리소설인줄 알고 잘못 사서 읽은 게 맥베스라고 하면서 불만을 토로한다. 중고딩들이나 읽는 고리타분한 책을 왜 추리소설 문고판과 같은 사이즈로 만들었느냐는 거다. 재미있었냐고 남자가 묻는데, 여자가 딱 잘라 재미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엉뚱하고 기발하다.



“전 잠깐이라도 맥베스가 왕을 죽였다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요.”



아무리 단편이지만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몇 줄도 안읽고 당황해 하는 사람은 책 속의 남자 뿐이 아니다. 여자의 확신에 찬 대답에 독자 역시 황당스럽다.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여자는 한 마디 덧붙인다. 아내도 그 일에 연루되지 않았을 거라고. 물론 그 두 사람이 가장 의심스럽기는 하겠지만 그 둘은 덩컨 왕을 죽인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 여자의 말이다. 



탐정소설의 매니아인 이 여인은 탐정 소설의 규칙을 잘 알고 있다. 남자는 황당해서, 그럼 누 누 누가,..  이러고 있는 사이 여자는 아 정말 모르겠느냐고, 세계적 대작가인 셰익스피어가 누가 그랬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도록,  재미없는 그런 책을 썼겠느냐는 거다. 세계적으로 햄릿이란 인물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 거의 없으니 맥베스 역시 파악하기 쉬운 인물일 리가 없을 거란다. 



맙소사. 탐정 소설만 읽는 여성은 맥베스를 덩컨 왕 살인 사건과 그 이후에 계속되는 연쇄 살인 사건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 리뷰에도 썼지만, 대본에는 맥베스가 직접 덩컨 왕을 찌르는 장면이 명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 셰익스피어는 살인 전의 심리와 살인 후의 심리를 대사와 암시를 통해 그의 살인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으므로 독자가 그것을 모를 수는 없다. 더욱이 대부분의 독자는 책을 읽기도 전에 맥베스의 내용을 대략 알고 있기 때문에 과정과 대사의 디테일에만 관심이 있지 어떻게 죽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다시 맥베스 희곡으로 뒤져보고, 어떻게 이 여인이 덩컨왕의 살인이 맥베스 부부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믿을 수 있는 게 가능한지 살펴보자.


마녀들의 왕이 될거라는 예언을 전하는 남편의 편지를 읽으며 동시에,  살해를 결심하는 맥베스 부인은 ‘사악한 생각을 돕는 악령이여, 이리 와서 나의 여성성을 제거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무시무시한 잔인함으로 채워 다오.’라고 결심을 굳히고, 자신의 집에서 열린 연회에 마실 술에 약을 탄다. 모두들 깊이 잠든 밤, 홀로 깨어 있는 맥베스는 부인이 준비해둔 단도를 발견한다. 셰익스피어는 피묻은 칼을 보고, 자신이 해야 할 살해와 양심 사이의 갈등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에만 촛점을 맞출 뿐이어서, 직접 찌르는 장면이 어디였는지 기억하기 힘들었는데,  찾아보면  없다. 칼로 찌르는 장면은 없다. 칼을 대하는 그의 독백에 자신이 저지르려는 잔인한 행위에 대한 불길한 예감과 한탄으로 가득차 있을 뿐이다. 


독백이 끝나면 바로 장면이 바뀌고 2막 2장에서 부인에게 돌아온 맥베스가 해치웠다고 말한다. 영어로 해치웠다가 어떻게 쓰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술집에서 맥베스를 토론하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이 해치웠다는 것에 대한 해석은 없다.  맥베스는 모든 일을 주관하는 아내에게 내가 직접 죽였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 자기가 본 환영들과 불안감. 아내가 보기에 남편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손에는 피가 묻어있고, 찌른 단도가 들려있었을 것이다. 아내는 손에 묻은 증거를 물로 씻으라고 시킨다. 게다가 단도들을 도로 가져가서 피를 잠든 신하들 손에 묻혀놓으라고 시키는데, 오 무서워 나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야 하니 , 저런 한심한 인간이 왕이 어찌되나 싶어서 쯧쯧거리며 단도를 가지고 나간다. 돌아와서 독백에는 이제 자신의 손도 붉어졌지만 남편만큼 두려움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지는 않았다고 손을 씻자고 얘기한다.(그녀는 후에도 손을 반복해서 씻는다.)



이게 다다. 머리 속으로는 분명 맥베스가 찌르고 부인이 피를 바르고 하는 장면이 마치 본 것처럼 떠오르는데, 이것은 모두 대사 속에만 있을 뿐 실제로 장면으로 나타나지는 않은 것이다. 음모론자들은 믿을 수 밖에 없는 수천 개의 증거보다는 확실하지 않은 의심 몇 가지로도 세상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다. 이 명백한 맥베스의 살해 계획과 이후에 계속되는 암시와 대사로도, 의심을 해소할 수 있는 물리적 증거가 없는 틈을 제임스 서버는 발견한 것이다. 다시 제임스 서버의 소설로 돌아오면, 여자가 의심하는 사람은 맥더프다. 처음엔 뱅코우를 의심했는데, 이야기 속에서 뱅코우는 맥베스와 함께 무훈을 세우고 마녀가 예언하는 걸 함께 목격한 자다. 훗날 그의 아들들이 왕권을 이어갈 거라는 예언도 함께 했기 때문에 역시 광기에 휩싸인 맥베스의 다음 희생물이 된다. 이 일을 두고 여자는 교묘한 대목이었다고, 추리법칙상,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른 범인으로 지목한 사람은 언제나 두 번째 희생자가 된다는 점을 치켜세운다. 



아버지가 살해된 것을 알고 자신들의 안위마저 위태로움을 직감한 두 왕자 맬컴과 도널베인이 아버지의 살해자로 지목되어 도망가는데, 남자는 혹시 이들이 의심스럽지는 않냐고 묻는다. 여기에 대해서도 이 추리 매니아는 이론이 있다. 살인은 극중 비중있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거다. 나 역시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는데, 전에 히가시노 게이고 였던가 어떤 장편 소설을 읽는데, 비중 없는 인물이 혜성처럼 비밀을 잔뜩 들고 등장해서 범인이 되어 마무리되는 경우다. 이 여성이 말하는 잡배다. 물론 중간 중간에 한두번 언급이 있기야 했겠지만, 스토리 전체에 녹아있지 않고 비중이 없던 사람이 범인인 경우, 독자들은 이야기의 핵심에서 소외된다. 



놀란 남자는 다시 책을 읽겠다고 하고 그녀와 헤어진다. 다음 날 새로운 시각으로 그러니까 추리 소설의 시각으로 맥베스를 다시 읽는다. 맥베스를 다시 읽은 남자는 그녀를 찾아와 더욱 황당한 주장을 한다. 주의깊게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조금은 뚱딴지 같은 대목이었는데, 2막 2장에서 맥베스 부인이 남편의 살인을 돕기 위해 잠든 사람들 옆에 단검을 빼놓아두었다고 독백하는 장면에 있다. 맥베스의 부인은 잠든 모습이 아버님을 닮지 않았던들 자기가 틀림없이 그 일을 직접 했을 거라는 거였는데, 이 남성은 이 대사를 보고, 이 잠든 남자가 사실은 덩컨왕이 아니라 아버지(맥베스의 아버지 혹은 맥베스 부인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아버님을 닮은 게 아니라 아버지였다는 것이다. 


즉, 잠든 덩컨 왕이 ‘아버지’를 닮은 이유는 그가 덩컨 왕이 아니라 아버지였기 때문이며, 덩컨 왕을 죽인 사람은 딸을 왕비로 만들고 싶은 아버지였음에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여성은 놀랄만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면서도 반박한다. 이야기에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 범인이 될 수는 없다는 건데, 여기에 대해서도 남자는 설명이 있다. 2막 4장에 (로스가 늙은 남자와 등장)이라는 지문이 있는데, 이 노인이 누구인지는 책에서 한 번도 밝혀진 바가 없다. 바로 이 사람이 딸을 왕비로 만들고 싶어 하는 늙은 맥베스라는 것이다. 이걸로도 충분치 않다고 여성이 반박하자, 남자는 예언을 한 세 명의 마녀들 중 한 명이 변장한 사람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내민다. 여자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둘은 다음 번엔 햄릿을 분석해볼 작정이라고 한다.


현대 문학에서 선정한 세계 문학 단편집들이  대부분 그런 것 같은데, 제임스 서버의 단편들 역시 개성이 뚜렷하다. 카투니스트로도 활동했던 그의 단편 중 월터의 상상이 현실이 되다는 2번이나 영화화 되었다. 카툰 그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물의 특징을 포착하고, 그것을 조금 과장되게 그림으로써 익살과 유머를 전달한다. 서버의 단편들에서는 물체의 시각적 특징 대신 캐릭터의 특징을 행동과 대화로 생생하게 포착한다. 복잡한 서사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이 가진 개성 때문에 생기는 특별한 상황을 그의 단편들은 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추리소설 매니아의 특성이 강하게 나타나지만, 다른 소설들 역시 짧지만 굉장히 인상적인 캐릭터의 특징들 때문에 잘 읽히고 엉뚱하지만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져서 헤어지기 아쉬운 인물들이 된다. 



35개의 단편 중 [쏙독새, Whip-poor-will], [아홉 개의 바늘], [윈십 부부의 결별], [에마 인치, 떠나다], [햄버거 몇개] 등이 인상적이다. 특히 쏙독새는 라임이랑 이런 게 잘 맞아떨어지고, 웃픈 내용의 결말이 충격적 비극으로 끝나기에 잊기 전에 다시 한 번 내용을 정리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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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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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꾸로 돌려 물리적인 나 자신과 만나야 한다는 조건을 뺀다면, 누구나 과거와 만날 수 있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 둘은 닮은 듯하지만 다르기도 하다. 나는 어느날 수십년 전에 함께 기숙사에서 반년을 지냈던 대학 동창 한 명을 만났다. 그 애가 기억하는 나, 그 애가 묘사하는 어떤 순간 그애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긴 시간동안 친구의 기억 속에 저장되며 변형된 이미지와 묘사를 통해 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굉장히 낯설었다. 오랜 시간동안 변해온 지금의 나와 연결되고 결국은 어떤 본질이 그 안에도 지금의 내 안에도 있을 것이다. 


엠마누웰 카레르의 이 소설, 한달 내내 읽게되는 <왕국>의 초반 ⅓ 분량을 읽을 당시의 마음이 그랬다.  바오로와 루카가 등장한 이후 수도 없이 밑줄을 그었지만, 결국 내 얘기로 돌아와서 서두를 시작했다. 카레르처럼 나도 그러고 있다. 


이 책은 과거 나였던 그 젊은이와 그가 믿었던 주님을 배신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름의 방식으로 이들에게 충실하게 남아있는 것일까?” 에필로그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렇다면 시작은 어떨까. SF 작가 필립 K 딕의 뒷담화를 나누다가 한 말이다. 그는 “지극히 정상적이고도 지적인 사람들이 기독교처럼 말도 안되는 것을, 그리스 신화나 도깨비들이 나오는 동화와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때, 그러니까 기독교 탄생 초기에는 과학도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도 달랐으니 그럴 수 있겠지만, 오늘날에 만일 어떤 신들이 백조로 변신한다던가 두꺼비에 키스하면 백마탄 왕자로 변신하는 스토리를 믿는다면 미친놈이라고 할 그런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을 믿고 있어도, 미친놈으로 여겨지지 않고, 설사 그 믿음을 공유하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진지하게 대해주는 일들이 참으로 희한한 일들이라고 썼다. 


그는 이 책을 기획했고, 그러기 위해 그 희한한 기독교 세계의 믿음에 관해 취재하기 위해, 기독교 커뮤니티들과 함께 하는 크루즈 여행에 신청했다가 취소한다. 여기서 깜짝 놀랄만한 반전을 시전하시는데,  알고보니 작가 자신이 20여년 전에 열혈 기독교 신자였던 것. 그는 믿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대신 20년 전의 자기 자신을 찾는다. 자신이 수년간 매일 읽고 공부하고 암기하고 메모했던 수십권에 걸치는 자신의 노트와 대면한다. 믿었던 과거의 자기 자신과 믿지 않는 현재의 자기 자신이 충돌한다. 그가 만나는 과거의 노트에는 훗날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그 날과 같이 종교적으로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라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현재 그는 그때 바랐던 그 상태가 아니다. 그 점에 안도한다. 


나는 카레르가 글을 쓰는 방식이 첫번째는 솔직해서 좋다. 이 솔직함은 자기 자신을 후벼 파고 구멍을 뚫어 깊이 깊이 들여다보고 오랜 시간 단어를 조합해야 표현 가능한 지적인 솔직함이다. 말할 수 없는 어떤 느낌, 자아에 대한 자부심과 환멸 같은 복합적인 감정을 슬퍼 허무해 쓸쓸해 기분나뻐 이런 식의 빈약한 몇 개의 미리 만들어놓은 진부한 형용사 조합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조목조목 발가 벗어 헤쳐보고 들이다 보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고통스러웠으리라.


그리하여 그가 기획한 바오로의 여정이 시작되는 지점은 과거의 종교적 체험과 현재 그것을 반추하는 시간들을 인내심있게 읽어내야 하는 130쪽이 이후에야 시작하는데,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종교적 체험에 관련된 생각, 그리고 역사와 신화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결국은 이것이 역사책이냐, 유사 역사책이냐, 혹은 개인적 체험을 담은 에세이냐, 혹은 바오로와 루카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냐 라고 그보다 더 많은 쟝르의 특징들을 말해도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은 카레르식의 저작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책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범주화하기를 좋아하고, 제목을 붙이기 좋아하고, 뭔가 정의하기를 좋아하니, 내식대로 이 책을 다시 정리해본다면 역사의 재구성 혹은 역사 소설을 위한 자료 조사라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 역시 틀렸다. 핵심은 이 책 속에 종교의 기원을 찾는 역사적 탐구 이외에도 기록의 빈틈을 빼곡히 메운 무한 상상력이 레고 블럭처럼 촘촘히 기록의 틈새와,논리의 헛점을 메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바오로의 자취와 루카의 자취를 따라간다. 고대 로마의 역사, 유대의 역사 속에서 네 개의 성경이 어떤 방식으로 쓰여지고, 유대교에서 탄생한 기독교가 어떻게 유대인만 제외하고 전세계인의 종교가 되었는지에 대해 유추한다. 상상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상상인지 유추인지 이런 것은 내가 논할 문제가 못된다. 이 책은 내가 그동안 살면서 종교에 대해, 아니 기독교라는 종교를 대해 늘 의문을 품었던 여러가지 주워들은 사실의 기원에 대해 풍부한 단서를 제공한다. 성경과 성경이 쓰여진 당대 역사와 언어를 제대로 공부하고 거기에 충만한 종교적 체험까지 갖춘 저자가 분석한 텍스트를 통해 궁금했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주는 것은 물론, 종교의 탄생이라는 근본적인 과정까지 흥미롭게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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