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우스 엑스 마키나(Deux ex Machina)는 ‘기계를 타고 내려온 신’이라는 뜻인데, 즉 그동안 벌려놓은 수많은 갈등 해결과 결말이 개연성을 가지고 주인공들에 의해 직접 해결되는 게 아니라 난데없이 기계장치를 타고 내려온 신이 해결한다는 냉소적 의미로 해석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가장 먼저 쓰였는데, 여전히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소설에서도 차용되고 있다. 십여년 전 쯤 진중권이 심형래의 디워를 까다 까다 언급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현대 액션물들 대다수는 위기를 모면하는 효과로 부분적으로라도 데우스엑스 마키나를 활용하지 않고는 존재 기반마저 흔들리지 않을까 싶다.) 무슨 영화 평에 수천년 전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언급하나 싶어 원본을 찾아보니 이렇다.

“사건의 해결은 플롯(이야기) 그 자체에 의하여 이루어져야지, 메데이아나, 또는 일리아스에서 (희랍군의) 출항에 관련한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계장치에 의존해서는 안됨이 명백하다(아리스토텔레스 시학 1454b[1]). “


또한, 희극시인 안티파네스 역시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작품을 총체적으로 구성할 능력이 없는 시인들의 궁여지책에 불과하다.[2]고 했다.

브레히트도 냉소적인 면에 있어서는 진중권 삘이 나는 당대의 예술가가 아니였을 듯 싶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비교불가능한 큰 차이가 있다. 진중권은 말(비평)만 하고 예술을 하지는 않지만, 브레히트는 직접 창작활동 자체로서 시대와 예술을 조롱하고 비판했다.

브레히트는 이 작품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직접 사용하므로서 그것의 사용 의도를  조롱하고 비판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브레히트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지목되어 그의 모든 저술의 출판이 금지당했었다.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망명해야 했던 다수의 좌파 작가 중 하나였을 뿐인데 말이다.

원래는 영국의 극작가 존 게이John Gay의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를 개작한 것인데, 몇 번의 개작을 통해 탄생한 「서푼짜리 오페라」는 인물 간의 관계와 극의 진행의 세부 사항은 거지 오페라와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또한 오페라가 아닌 〈음악과 노래가 있는 연극〉이라는 형식으로 창작되었다. 즉, 이야기의 전체 스토리는 존 게이, 극 중 음악의 가사는 자작시와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 비용(Francois Villon)의 시, 그리고 음악은 클래식 오페라 작곡가가 아닌 실용 음악가 쿠르트 바일의 음악 이런 것들의 조합으로 탄생했다.

소설도 아니고, 일반 연극 대본도 아니고, 더욱이 음악이 있는 연극의 대본인데, 이 책의 독자는 극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본을 읽는다. 연출과 연극 배우와 무대와 조명과 그리고 음악 이 모든 것의 효과가 내는 극적인 분위기를 전적으로 상상력에만 의지해야 하므로, 실제 극이 올랐을 때 느끼는 감동을 비슷하게 느끼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특히 시에 붙인 음악이 주는 효과는 텍스트에만 익숙한 독자가 어찌할 수 없는 요소다.

다행히도, 독일에서 상영된 듯 보이는 제법 큰 규모의 연극 녹화 동영상과 1930년대 만들어진 영화 동영상을 찾아서, 그토록 궁금했던 가사의 음들과 노래 실황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확실히 음악과 연결되니 작품을 이해하고 느끼는 폭이 훨씬 풍부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기존의 오페라와도 형식이 조금 다르고, 연극과도 조금 다른 이러한 새로운 형식의 연극에서도 브레히트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관습과 전통을 깨고 낯선 것들을 시도한다. 작가 해설에 의하면 그 중 하나가 노래의 역할이다. 기존 연극에서 노래는 인물의 개성을 강화하고, 심리적 정황을 묘사하고 극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기여한다면,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새로운 극의 형태를 서사극이라고 했던 모양)의 기능은 극적 사건을 중단하고 정황을 설명하거나 해설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후렴구와 민중시 같은 사실적이고도 풍자적 묘사의 가사는 짧은 극중 대사들이 담을 수 없는 당대의 상황과 모순, 갈등을 설명한다.

대사집 만으로도 전체 내용을 따라가기에는 큰 무리가 없고, 딱딱하다는 독일인에 대한 편견이 불식될 수 있을 만큼 풍자적인 내용이다. ‘런던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거지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 피첨 부부와 그의 딸 폴리, 런던에서 가장 잔인한 갱스터의 두목 맥, 런던에서 가장 엄격하고 무섭다는 경시청장 브라운, 그의 딸 루시, 피첨 부부에게 고용된 거지들, 맥에게 고용된 갱스터들, 창녀들이 등장하는 액션 코미디,  로맨스를 두루 갖춘 극이다. 맥과 폴리 루시의 삼각관계, 피첨과 거지 사이의 약탈관계, 범죄자 맥과 경시청장 브라운의 결탁 관계에 창녀와 기둥서방 사이의 약탈과 폭력과 순애보까지 깨알같이 표현하는 이 새로운 (실용)음악 연극이 당대에 성공을 거두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

노래에 의하면 강도, 강간, 살인을 서슴지 않은 맥은 창녀들은 물론이고 지체높은 ‘아가씨’로 묘사되는 폴리와 루시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데 본인이 감옥에 갇혀도 그를 두고 경쟁할만큼 경쟁력있는 남성일 뿐만 아니라, 브라운 경장 역시 그의 투옥을 마음아파 하고 헌신적(?)으로 그를 돕는다. 하지만 창녀들의 배신으로 두 번째 감옥에 들어가게 되자, 더는 사형 집행을 미룰 수 없게 된다. 독자들 입장에서는 그가 얼마나 악인인지 알기에 뭐 주인공이긴 하지만 공개 처형되는 것도 즐거움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브레히트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연극은 현실과 다르기에 연극이지 않은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이 때 등장하는 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난데 없이 개입한 신은 다름아닌 여왕이다. 여왕의 메신저는 맥의 처형을 중단시키고 뜻하지 않은 귀족 작위까지 받게 된다.  얼마나 기교적이고 날카로운 조롱인가.

현실에서 사회적인 불공정함이나 부당함을 해결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 그러니 현실과 같은 극을 만들다 보면, 불공정함과 부당함에 무게를 실어 스토리를 진행시켜 봤자, 결국 우리가 사는 삶과 다름없지 않은가. 이를 해피엔딩으로 만들 수 있는 건 현실에 없다. 마술적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가능한 그 이야기가 현실이 아닌 극과 소설 속일 때 뿐이란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브레히트는 그것이 예술가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현실의 삶에서 말을 타고 오는 구원자는 없다. 가난한 이가 구원되는 일도 없다.

지 않겠어!


[1]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1998.  [2]에서 재인용

[2] 필록테테스 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준석, 서양고전학연구 26, 2006.12, 41-55 (15 pages)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 것을 나누는 것, 왜 아니겠어?    
모두들 선하면 하느님 나라가 멀지 않으리.    
누군들 하느님의 광명 속에 살고 싶지 않겠어?    
선한 인간이 되는 것?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겠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별에서    
식량은 빠듯하고 인간은 야비하지.    
누군들 평화 속에 조화롭게 살고 싶지 않겠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 그렇질 않아.    

폴리와 피첨 부인  유감이지만 그 말이 맞아요.    
세상은 가난하고, 사람들은 악해요.    
피첨  유감스럽게도 내 말이 맞지.    
세상은 가난하고, 사람들은 악해.    
누군들 지상에서 파라다이스를 꿈꾸지 않겠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 그걸 허락하나?    
아니, 상황은 그걸 허락하지 않아.    
너를 몹시 걱정하던 네 형제.    
고기가 부족해지면    
바로 네 얼굴을 밟아 버리지.    
그래, 성실하게 사는 것,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겠어?    
하지만 너를 걱정하던 네 부인    
네 사랑이 충분하지 않으면    
바로 네 얼굴을 밟아 버리지.    
그래, 감사하며 사는 것.
누가 그러고 싶지 않겠어?    
하지만 너를 걱정하던 네 아이    
노년에 빵이 부족해지면    
바로 네 얼굴을 밟아 버리지.    
그래, 인간적인 것.
누가 그러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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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하고 디스토피아적인 장면이 머리속에 맴돈다. 영화로도 나왔다고 해서 찾아서 대충 봤는데, 오래된 영화인데도 소설에서 풍기는 황폐한 분위기를 나름 잘 표현했고, 연기도 괜찮았다.

아랫동네 윗동네라는 말이 계속 나와서 업타운 다운타운 같은 걸 그렇게 번역한 건가 했다. 핵전쟁 같은 걸로 황폐화된 도시에 남자들이 사람이랑 텔레파시 형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개랑 어울려 살고 있고, 일부는 지하에 세계를 만들어 살고 있다. 소년은 글도 못읽고 역사도 전혀 알지 못하는 무식쟁이인데 반대로 개는 소년에게 글도 가르쳐줄 만큼  똑똑하고 지혜롭다.  소년은 모든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활동을 개에게 의지하고, 소년은 개를 먹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윗동네에서는 전쟁때 여자들을 다 죽여버려서 여자가 거의 없고, 여자와 섹스하고 싶은 욕구는 간혹 눈에 띄는 여성을 강간하여 채운다.

종말론적 세계 속의 허구 속에서 여성은 성적 욕망의 분출구에서 한 뼘도 나아가지 못한 존재다. ‘정치적으로 옳지 않‘게 다루기에 읽으면서 굉장히 읽을 때 불편하고 불쾌하기까지 하다. 포스트아포칼립스라고 하더라도, 생존자들은 나름대로 먹고살 궁리를 하기에 폐허 위에 남겨진 것들을 사고 팔며 상업적 이익을 받는 무리들이 있는데 주인공 소년은 혼자서 개랑 같이 지낸다. 어느 교활한 패거리들이 남아있는 포르노 필름들을 접수하고 이어 붙여 영화 상영을 하는데, 생존자들은 개랑 같이 와서 영화를 보며 자위를 하는게 일상이다. 어휴. 어두 컴컴한 곳에서 개와 남자들이 한꺼번에 그러고 있는 장면이란걸 상상하다니 그렇게 필름 속의 여성을 상대로 단체 자위를 하던 어느날 그 영화관에서 소년의 개가 ‘여자 냄새‘를 맡는다. 그들(개와 소년)은 아랫동네에서 올라온 호기심 많은 여자가 남장을 하고 성욕을 달래러 영화관에 온것으로 추측한다.

남자들만 있는 세계에서 여자가 한 명 나타나면 모두가 다같이 달려들기 때문에, 여자의 안위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쟁탈전 때문에 나머지들을 경계하며 개의 코를 이용하여 여자를 추적하는데, 여자가 예전에 학교였던 건물의 체육관의 일부 남아있는 건물에서 남장옷을 벗고 원래 옷으로 갈아입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던 소년은 이제껏 강간할 때 경험했던 종류의 느낌과는 다른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여성이라면 성욕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대상 이상의 존재가 아니었는데, 갑자기 소년의 눈에 이 여성의 여성스러움이 이제껏 살아남기 위해 가지고 있던 폭력성과 방어성을 허무는 순간이다. 이 때 느끼는 낯선 감정에서 독자는 둘 사이의 관계가 러브 스토리로 발전하길 기대하지만, 그리고 조금은 그렇게 흘러가지만, 문명이 파괴된 현장에 사랑이 남아있을 리 있을까. 없을까. 여자 냄새를 자기 개만 맡으라는 법은 없고, 성욕에 환장한 짐승같은 무리들에게 포위되어 두 사람과 개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험에 처하지만, 소년은 소녀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강간하려던 소녀와 강간이 아닌 섹스를 하는데, 알고 보니 소녀는 다른 목적이 있다.

개와의 교감, 소녀와의 사랑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소년, 지역사회의 역할과 사랑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소녀. 자신의 주인의 잘못된(?) 선택을 주시하며 항상 살아남을 수 있도록 리드하며 충성을 바치는 개.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둘 사이를 가르는 게 있다. 소녀는 아랫동네에서 남자 사냥을 하러 올라온 미끼였고, 소녀를 따라 아랫동네로 내려간 그는 이제껏 자신이 저질렀던 성적 쾌락을 남자 자손을 생산하기 의무로서 봉사해야 한다.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남자 아기를 낳지 못했던 것이다. 하고 싶은 섹스 맘껏 하고 여자랑 같이 자고 하면 안되나? 노예로 싫컷 섹스하느니, 섹스없는 자유를 선택할까. 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개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마지막 장면은 명시적으로는 밝히지 않고 있으나 너무나도 끔찍하고 섬뜩한 결론을 암시한다. 폭력적이고 섬뜩한 장면을 연출하는 소년이 소년이기에 짠하기도 하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

<제프리는 다섯살>은 늙지 않고 계속 다섯살 상태로 있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이고 <회개하라 할리퀸 째깍맨이 말했다>는 짧고 인상적인 소설이긴 했는데, 규칙적인 세상을 사는 인간에 대한 비약이 너무 심해 재미가 덜했는데, 영어로 가장 많이 읽히는 컨텐츠 10개 중 하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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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2 : 국가 이중톈 중국사 2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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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사회조직   - 문화지표 - 대표 인물          - 이미지              - 시기구분

점    - 원시공동체 - 나체직립 - 이브

면    - 씨족         - 생식 숭배 - 모계씨족  여와  - 물고기 개구리 달  - 삼황

L부계씨족 복희 - 새, 뱀, 태양 - 삼황

편 - 부락 - 토템 숭배 - 초기부락 염제 - 소 - 삼황

- 후기 부락 황제 - 곰(혹은 기타) - 오제

권 - 부락 연맹 - - 초기 요 - - 오제

- 중기 순 - 오제

- 후기 우

국 - 부락 국가 - 조상숭배 - 하나라 계


이 책에서 다루는 중국사는 이전 편의 여와, 복희, 염제, 황제, 치우에 이어 요, 순, 우, 하나라 계까지다, 사기에서 찾아 보면 요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게 다 유가 사상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편협한 시각에서 그들을 미화했으며, 실은 요 순이 아주 작은 부락 연맹의 CEO였으며, 선양은 말이 좋아 선양이지, 겸손하고 양보하고 선량하라는 유가사상에 부합되도록 잘 치장된 말이었고, 그런 좋은 말은 다 헛소리이며, 요, 순 우의 시대에는 선양이 제도화되어 있고, 부자 상속이라는 것이 아직 제도화되지 전이었을 것이라는 게 이중톈의 견해다. 그는 존경받는 사마천도, 근거없는 고대 신화에 영향받아 뿌리깊은 전통처럼 되어 버린 선양, 양보라는 위선을 뿌리치지 못한 뿌리 깊은 악습이라 평가한다. 


이중텐은 선사시대의 문화 궤적이 원시공동체, 씨족, 부락, 부락연맹, 부락국가 순으로 전개되었다고 말한다. 최초의 원시 문화의 형태는 점으로 문화점은 세계 각지에 분산된 채 스스로 생겨나고 소멸한 무수히 많은 공동체다. 이것들이 살아남아 발전을 이루고 강력해지면 ‘문화면’이되고, 문화면들이 분열과 확산, 상호 영향과 융합으로 인해 ‘문화편’이 되고, 또다시 문화편들이 이주, 연합, 겸병, 나아가 전쟁으로 인해 ‘문화권’을 형성했는데,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국가가 탄생되고, 인류는 문명시대로 들어선다.


이런 문화의 전개 과정에 맞춰 시리즈의 첫 편에서는 원시공동체와 씨족, 부락까지를 다루었고, 신화 속 안개처럼 쌓인 삼황이 어떤 한 시대에 존재했던 특정 영웅이나 개인이 아니라 시대를 상징하며 조금씩 변화하고 다른 인물로 교체되던 시대의 대표상이었다는 것이다.


평화롭고 좋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막 직립하기 시작한, 나체로 다녀도 창피한 줄 몰랐던 이브가 에덴 동산을 떠난 이후, 모계 씨족의 여와가 대표하던 여성 생식숭배의 시대에도 평화롭고 자유롭고 싸울 일 없이 평안했다. 권력이 생기고 남성생식 숭배로 변하면서 세상은 조금 더 피곤해지기 시작했고, 초기 부락 시대부터는 피와 살이 터져 대지를 물들이는 잔혹한 전쟁이 시작된다.


딴소리지만, 이렇게 보면, 인류 진화의 역사는 학살의 역사, 전쟁의 역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적어도 이브의 시대에 서로 잡아먹기야 했겠는가, 창과 칼이 태어나기 이전에 그들이 싸운 무기는 고작 눈에 띄는 뽀족한 돌맹이였을테니, 뾰족한 이빨도, 날카로운 발톱도 갖지 못한 인류가 거센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었던 도구들이 인구증가와 경쟁을 부축였고, 결국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싸워 이기는 쪽이 생존에 유리하도록 진화해서 생긴게 현재의 인간 아닌가. 그러므로 아무리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 할지라도 전쟁은 유전자에 깊이 새겨진 운명을 이끄는 하나의 코드가 아닌가 싶다.


다시 중국사로 돌아오면, 이 책은 국가의 탄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중국 국가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문명이 태동하고 도시 규모의 국가가 탄생한 배경과 의미에 대한 여러 역사 학자들의 서술을 시공을 초월하여 넘나들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황금시대, 은의시대, 철의시대, 청동시대와 같은 은유적 구분을 중국에 적용하여 국가의 탄생 단계를 4단계로 여와와 복희까지의 황금시대, 염제와 황제에서 요순까지를 은의 시대,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시대를 청동시대, 그리고 춘추전국시대를 철의 시대로 비슷하게 끌어다 붙였다. 즉 역사학자들은 인류가 국가가 탄생한 이래로 점점 더 나빠진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씨족 부락 시대가 훌륭해서 그런 건 절대로 아니고, 밤에 문을 안잠근건 훔칠 게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국가와 문명을 삐딱하게 보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문명을 지탱하는 힘이자 필수불가결한 종착역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어떤 민족이 국가가 없으면 아메리칸 인디안의 운명처럼 ‘역사는 선사시대에 머물’지만, 국가를 세우고 나면 그 국가가 쇠락하여 사라지더라도 고유한 문명은 남는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2천년동안 떠돌이 삶을 살아각면서도 고유 문명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결속할 수 있는 국가라는 공동체적인 허구의 개념을 그토록 끈덕지게 대대손손 믿어왔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요소 중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민주주의다. 그것은 2천년도 더 전에 그리스와 로마에서 싹튼 민주주의와 공화정은 먼 옛날의 일이었고, 오래전 몰락한 이후, 최초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대부분 군주제였고 ‘서양 학문이 도입되기 전까지 중국인들은 군주제를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여겨서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 역시 무수히 많은 민주적 시도를 했었다고 한다. 직접 군주제라는 걸 시행한 적도 있었고, 로마의 법치와 같이 예치를 실행을 시도했으며, 갖가지 방안을 설계하여 군권과 민권을 함께 존중할 수 있는 길을 찾았으나, 번번히 실패했으며 ‘분권은 집권으로, 집권은 전제로, 전제는 독재로 변하면서, 진, 한, 수, 당, 송, 원, 명, 청으로 가면 갈수록 상황이 나빠지고, 왕조가 바뀔 때마다 위기와 부패가 반복’되어 결국 서양 열강을 스승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민주적 권리로 맘껏 민주제를 풍자하면서도 아리스토파네스는 당연히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아테네의 겨우 2550제곱킬로미터의 국토에서 행해진 정치적 실천의 성공과 실패, 경험과 교훈이 어떤 씨앗과 원천이 되어 수천 년 뒤 하늘을 찌르는 거목과 도도한 강으로 변해서 “순응하는 자는 번창하고 거스르는 자는 멸망하는順之者昌逆之者亡” 세계사적 조류가 되리라는 것을.


제목은 역사책으로 되어 있지만, 이 시리즈의 책들은 엄청 지식이 많은 학자의 역사 비평 혹은 에세이집에 가까운데, 그럼에도 역사책인 이유는 엄청 딴얘기를 하는 것 같아도 금새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커다란 줄기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시공을 넘나드는 방대한 지식으로 무장하고 거대한 세계사의 흐름 속의 일부인 중국, 세계사의 맥락 속에서 중국을 바라보는 시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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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1 : 선조 이중톈 중국사 1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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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하늘에 서광이 비칠 때 아침별은 아직 남아 있고 달빛도 어슴푸레했다. 자신의 과업을 마치고 물러나면서 이브는 쏜살같이 날아가는 여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리고 동양의 그 위대한 여신이 구름에 휩싸인 황토 언덕 위에 서서 사방에 빛을 뿌리며 포효하는 것을 확인했다.”


역사책이라고는 하지만, 눈에 잡히지 않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이전의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 중국사에서는 맨 앞의 약 반쪽에 해당되는 내용이고, 사기에서는 단 몇줄, 혹은 몇 단어에 해당되는 내용을 가지고 한 권의 책을 엮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신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갑골과 금문 문자 이야기이다. 유물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중국 역사가 아니라, 성경을 포함한 전세계의 역사가 총동원되어, 중국인들의 창조신화 여와와 복희의 신화를 세계라는 전체 속에서 본다.


여와는 중국의 창조신으로 진흑으로 사람을 빚다가 빚다가 지쳐 나중에는 나뭇가지에 진흙을 묻혀 마구 흩뿌려 사람들을 창조해낸다. 평균 수명이 스무살도 되지 않던 네안데르탈인의 서른살도 넘지 못했던 베이징원인을 생각해보면, 오래 전 인간(혹은 인간 이전 단계의 어떤 생명체)의 수명은 매우 짧았으며, 따라서 생식능력은 신비한 힘이었고 여성 생식기가 숭배되었는데, 그것이 개구리와 물고기에 대한 토템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최초의 여와의 신화는 개구리라는 주장으로 시작한다. 그는 이 최초의 모계적인 씨족사회를 다음과 같이 상상했다.


“남녀가 뒤섞여 놀고 중매나 약혼도 없었으며 어머니가 누구인지만 알고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섹스도 자유로웠고 선택권은 주로 여성에게 있었다. 여성은 심지어 원하기만 하면 동시에 여러 남자친구를 가질 수도 있었다. 여성의 유일한 ‘횡포’는 더 나은 섹스 상대의 선택이었지만 어쨌든 그것도 종족 보존이 목적이었으므로 탈락자에 대한 냉대나 소외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물며 선택은 자유롭고 쌍방향적이었다. 강간도, 매음도, 감정적인 갈등도 없었다. 재산 분규도 없었다”


그러나 권력이 일단 탄생하자 관리는 통치로, 소유는 점유로, 안배는 사주로, 배치는 노역으로 바뀌고 감옥, 군대, 정부, 국가가 연이어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부계씨족으로 가는 과정에서, 그 모호한 의식 속에서 여성생식숭배만으로는 모자라고, 생명 창조에서 남성의 작용을 인정하고 긍정해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일치해서 탄생한 것이 남성생식숭배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의 상징으로서 뱀이 등장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여와의 시대가 가고 복희의 시대가 오는데, 흥미로운 점은 신화에 등장하는 여와와 복희는 모두 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라는 것이다.  여와가 상징하는 것은 모계씨족사회이고, 복희가 상징하는 것은 1000년의 역사를 가진 부계 씨족 사회다.


즉 이 책에서 설명하는 역사는 하나라 이전의 역사를 여와-복희-염제-황제-요순이라는 기호로 해석하고 각기 모계씨족, 부계씨족, 초기부락, 후기부락, 부락연맹을 대표하는 인물로 규정하고 그 변천사를 추정한다. 중국 역사와 신화를 제대로 잘 몰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겠지만, 베스트셀러 작가 답게 아무것도 몰라도 홀리듯 읽을 수 있게 흥미로운 문체를 유지한다.


선사시대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보잘것 없는 한 줌의 유물과 현대인의 가치에 갇힌 제한된 상상력의 결합이다. 길고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선조들의 삶에 대해 말해주는 유물과 전승은 공기 중의 물방울 만큼이나 작다. 결국 우리가 선사시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경험과 통찰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의 총합일 수밖에 없다. 신비로운 미지의 과거로 가는 빗장을 열어주는 열쇠 중 하나는 신화다. 신화를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는 것처럼 역사를 재구성하는 관점도 무한대다.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과 신화가 기록되는 순간이 일치하지 않는다. 신화는 누구의 상상력에 의해서건, 혹은 어떤 사건에 의해서건, 그것이 발생한 순간의 이야기가 공간을 넓혀 말과 말로 세대와 세대를 넘어 시공을 퍼져 가며 더 그럴싸한 이야기로 변모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는 그것이 기록되던 어느 순간의 사진과 같은 것이다. 이중택은 신화를 “세계적 범위의 집단몽상”이라고 썼다. 민족끼리 자원을 공유하는 신화는 결국 이브라는 세계 최초의 여성에게 도달한다.


제목에서 풍기는 딱딱한 역사책의 이미지와는 달리, 이 책을 이토록 흥미로운 추리와 가설로 된 확실하지 않은 시작을 보는 새로운 관점이다. 여와는 뱀이 아니라 개구리였다라는 주장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중국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던 중국 신화를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최초 공동체가 모계사회였다고 공언한다. 신화와 유물, 그리고 한글 만큼 훌륭한 그들의 문자들이 결합해서 뜻을 이룬 과정 등을 통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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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이야기 - 음식에 숨겨진 맛있는 과학
최낙언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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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처럼 다양한 재료를 먹는 동물은 없다고 한다. 대개 동물들은 초식이거나 육식이고 매우 편식을 하며, 잡식동물이라 하더라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 잡식하는데 비해 인간은 육해공 모든 곳에서 나는 모든 생물들을 에너지원으로 취한다. 왜일까. 다른 동물들에 비해 맛을 느끼는 감각이 발달해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엄청난 종류의 음식이 있고, 인간은 그 많은 음식의 맛을 다르게 느낀다. 혀에는 1천만 개의 미각세포가 있지만, 그 종류는 겨우 5가지일 뿐이다. 전에 우리가 배운 단,신,짠,쓴맛에서 감칠맛이 추가된 것 정도다. 감칠맛 성분은 글루탐산이다. 일본에서 발견했고 공식 학술 용어도 우마미(Umami)라고 한다. 대부분 알다시피 그 많은 다른 맛은 대부분 향이다.


딸기에는 딸기맛 성분이 있는 게 아니라, 딸기 향 성분만 있습니다. 사과에는 사과 맛 성분이 있는 게 아니라 사과 향 성분이 있습니다.


이 과일들의 맛 성분은 단맛과 신맛이 대부분이지만, 나머지 아주 지극히 적은 양의 향기 물질에 의해 과일의 맛을 느끼게 해준다. 음식을 먹을 때 입 뒤로 코와 연결된 작은 통로를 통해 냄새 물질이 휘발해 느껴지는 향이 수만 가지 맛의 실체인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아주 적은 양의 향기 물질이 얼마나 적으냐 하면, 예를 들어 강력한 향기를 내뿜는 꽃에서 꽃향기를 좌우하는 향기 성분은 0.01퍼센트 이하이고, 이 중에서도 실제 향에 기여하는 성분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떤 식품이라도 식품 이전에는 생명이었고, 그 생명의 대부분(98%)은 무색 무미 무취의 고분자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으로 이루어지며 2퍼센트 이하를 차지하는 나머지 저분자를 통해 맛과 향 색 등을 통해 음식을 느끼고 사는 것이다.


특정한 맛에 민감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유전자의 차이로 결정된다.  예를 들어 7번염색체의 TAS2R38은 쓴맛에 민감한 타입과 둔감한 타입을 결정하는데, 오이가 쓰다고 못먹는 사람들은 이 쓴맛 수용체 민감도가 큰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지 가정교육이 잘못되거나 유별떠는 걸 좋아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특히 미각과 후각은 신생아 시절 가장 예민해서 맛없는 밍숭맹숭한 우유와 엄마젖 유아식 같은 것에 들어있는 아주 약간의 단맛을 민감하고 달달하게 느낀다고 한다. 신생아 시절 가득 혀 가득 솟아있던 맛봉오리들은 10세를 전후해 사라지기 시작한다. 남아있는 미뢰의 수가 제곱센티미터당 몇 개냐에 따라 맛이 결정되는데, 많이 남아있다고 좋은 게 아니라 쓴맛봉우리가 얼마나 유독 쓴맛에 민감하게 된다고 한다. 이걸로 아이들이 왜 야채를 싫어하는지, 설명이 된다.


책을 읽으면, 쓴맛 말고도,  단맛, 짠맛, 매운맛 등에 관한 재미있는 과학을 만날 수 있다. 예전에는 소금이 아주 귀해서, 김치를 담글 때 고추, 마늘, 파, 젓갈 등의 양념을 김치에 많이 쓰라고, 즉 소금 대체물을 권장했다고 한다. 지금의 매콤하고 강력한 김치 맛에는 그런 역사적 애로사항이 숨겨져 있었던 것. 저자는 MSG를 비롯하여 좋지 않다고 알려진 백설탕, 정제염 등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한다. MSG라는 게 글루탐산 나트륨인데, 글루탐산은 우리몸에서 사용하는 아미노산이고 나트륨은 소금에 있는 그 나트륨으로 둘이 결합되어 있는 상태다. 독성도 소금의 1/7, 사용량도 1/6에 불과하며 안전성도 소금에 비해 40배 안전한 물질이라는 것. 글루탐산과 나트륨이 따로따로 해롭지 않다고 해서 글루탐산 나트륨이 해롭지 않다는 건 어차피 그들이 체내에서 다시 글루탐산과 나트륨으로 분해되기 때문이라는 소리같은데. 그렇게 간단히 설명가능한 걸 이제껏 모르고 해롭다고 여겼던건가. 어쨌든 여기까지는 알겠고, MSG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로 원재료의 (신선하지 않는) 맛을 속일 수 있다는 편견이 있는데, 맛을 내기 위해 소금과 설탕을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원리로 MSG를 사용하면서 그렇게 사용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비논리라는 저자의 입장이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다고 다시다를 사러 가게 될 거 같지는 않다.


오래 전 유럽에 살 때가 있었는데, 삼겹살이 먹고 싶었었는데, 일반 대형마트에서는 삼겹살을 구할 수 없었다. 한인이나 중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마트에서 구할 수는 있었지만, 나중에 귀국해서 그곳 마트에서는 잘 포장해 비싼 가격에 팔리던 돼지 안심 부위가 그토록 저렴한 걸 알고 기절할 뻔했다. 그들이 그 부위를 안먹는 이유는 안그래도 점점 뚱뚱해지는 추세에 있는 국민건강상, 동물성 지방이 건강에 안좋다고 마르고 닳도록 교육시켜서가 아닐까 생각해봤는데, 소고기 양고기에 비해 돼지 고기 자체를 별로 안좋아하다보니 돼지고기의 참맛을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고기에는 기름이 좌르르 흘러야 맛있으니까.


그러면 그토록 귀가 닳도록 안좋다는 기름이 겹겹이 쌓여진 바로 그 부위 삼겹살, 그리고 층층이 지방이 마블링된 쇠고기의 부위를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향기 성분이 기름에 잘 녹기 때문에 기름은 향을 유지하는 능력이 크고, 그래서 가열중에 발생한 향이 기름에 포집되어 풍부한 향을 즐길 수 있단다. 비오는 날이면 가끔 파전을 붙여먹는데 어느날 내가 부침개를 정말 맛있게 붙이는 방법을 알아냈다고 친구들한테 떠벌였다. 비결은 기름을 아주 아주 많이 튀기듯이 많이 두르고 부침재료는 얇게 해서 부치는 거라고 했더니, 한 친구가, 튀기면 뭐든 맛있어진다고, 신발을 튀겨도 맛있어진다 했다. 그 이후로 부침개를 부칠때마다 신발을 튀기는 장면, 신발 이 튀김 옷에 입혀져 바삭바삭 튀겨진 모습이 상상되곤 한다. 튀김이 맛있는 건 과학적으로 설명되는 이유가 있었던 거다.


마이야르 반응은 160도에서 왕성하게 일어나는데, 그건 100도에서 국물요리에서 불가능한 맛이며, 이 마이야르 반응에서 일어나는 향을, 다시 향을 유지하는 능력이 큰 기름에 튀길 때 속속 스며들어 튀김은 맛있어지는 것이다. 더욱이, 튀길 때 식물성 기름 대신 우지와 돈지를 쓰면 더욱 맛있어지는 이유는 어떤 식재료에든 들어있는 당과 시스테인황 함유 아미노산이 소기름과 만나면 소고기향이 돼지고기 기름과 만나면 돼지고기 향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오래 전에 있었던 삼양 쇠고기라면의 우지 파동은 실소를 금치 못할 사건이다. 어떤 기자가 쇠기름 우지에 ‘공업용’이라는 말을 (프레임인가) 붙여, 사람이 못먹을 기름에 라면을 튀겨냈다고 보도했기 때문에, 이후 삼양 라면은 폭망하고 농심이 승승장구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후로 삼양이 라면의 1인자를 농심에게 빼앗긴건 맞지만 농심이 승승장구한 건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어쨌든 거기에 어떤 정치적 음모가 있었는지는 모르겠고, 애초 삼양이 우지에 라면을 튀긴 건 맛있으라고 그랬던 거고, 지금은 그 맛을 잃은 게 사실이다.


때로 전자렌지에 요리를 하면 맛이 없어지는 음식들이 있는데, 고구마가 그 예다. 고구마에 아밀라제라는 당화효소는 50도 전후에서 활발하게 작용해 고구마 전분을 달콤한 당으로 바꾸는데, 전자렌지는 순식간에 이 온도 범위를 지나버려 그렇다는 것이다. 또한 로스팅 향을 내는 마일라드 반응 역시 160도 올라가야 가능한데, 속부터 가열시키기 때문에 수분이 존재하는 한 100도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 전자렌지는 겉면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워야 하는 요리에도 적합하지 않고, 결국 밥이나 물렁한 음식 데우는 거에 최적화된 거지, 만능 기계는 아니라는 것이 요리 과학이 말해주고 있다.


이 책 참 좋다. 저자의 가치 철학이 잘 드러나 있고, 깔끔하다. 책에서 드러난 저자의 식품에 대한 고민, 가치관 이런 게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고, 잘못 알고 있는 상식, 근거없이 믿고 있는 잘못된 정보들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류의 생활밀착형 과학책이 미국작가가 쓰면 산만하고 장황해지고, 일본 작가가 쓰면 허접해지고, 한국 작가가 쓰면 복불복이 된다는 내 나름의 편견이 존재하는데, 이 작가를 잘 기억해뒀다가 식품 과학에 관한 다른 책들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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