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스필드는 20세기 초 영국에서 활동한 여성 작가로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와 비견될만큼 당대의 문학적 위상을 갖는다고는 하지만 중단편 소설을 주로 썼기 때문인지 그들만큼 인지도가 많지 않은듯하다. 어느 정도 독자들의 뇌리에 남을만한 드라마틱한 서사를 담으려면 단편으로는 무리다. 한 권이라도 묵직한 베스트셀러로 크게 이름을 떨쳐야 알려져야 작가의 명성도 함께 널리 알려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제임스 조이스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는데, <가든파티>에서 내가 읽은 두 개의 작품은 《더블린 사람들》에 실린 단편들과 느낌이 비슷하며 다른 면에서도 제임스 조이스와 유사점이 많다. 제임스 조이스가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하면서 내내 애증의 아일랜드에 천착했듯 맨스필드 역시 영국 식민지였던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하면서 뉴질랜드의 애증을 담았다. 그 애증의 고향이 섬이라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여성작가라면 더욱이 그가 다룬 주제가 소소한 일상에 머무를 때 여성작가의 한계라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안다. 다루는 내용이 너무나도 일상적인 모습 그 자체여서 기억할만한 서사가 부족하다고 느낀 것은 나뿐만은 아니었겠지만 그의 문학이 현대 문학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고 한다. 《만에서 at the bay》는 작가가 엮은 이 작품집의 첫번째 소설로 중단편 분량이다. 이 작품을 내가 두 번 읽었는데 끝까지 읽은 이유는 얼마나 더 읽어야 이 재미없음이 끝이 나나 보려는 마음에서였고 두 번째 읽은 것은 하도 아무 내용이 없어서 다시 읽으면 뭔 내용이 들어오려나 보려고였다. 

10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 장마다 인물의 시점이 제각각이다. 이 짧은 단편에 억수로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는 뜻이다. 바닷가 마을의 방갈로에서 여름을 보내는 가족의 어떤 평범한 하루의 일상을 가족 구성원 각각의 시점에서 묘사한다. 1장은 바닷가 근처 미개발 구역의 양떼와 목가적 풍경을 소개하는데 별 기억은 없다. 2장은 조금 더 흥미로와서, 이 대가족의 가장인 스탠리 버넬이 아침 수영을 호젓이 즐기려고 바다에 들어갔다가 조나선이 먼저 물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분이 잡치는 걸로 시작한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조나선 트라우트는 아내와 사돈간이지만 스탠리보다 직장에서 위치도 낮고 자유분방하고 예술적 기질을 가졌기에 스탠리가 대 놓고 무시한다. 하지만 조나선은 오히려 직장밖에 모르는 성실한 스탠리를 딱하다고 생각하며 쓸데 없는 이야기를 건네며 은근히 그를 조롱하고 그의 아내인 처제 린다에게도 친덜을 가장하여 아슬아슬하게 욕망을 드러낸다. 

성실하지만 가부장적인 권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스탠리는 온갖 요란을 떨며 식구들 모두를 자신의 출근 준비에 동원시키며 요란스럽게 출근 준비를 하는데 이 번잡한 밥상머리는 버넬가에서 스탠리의 가부장적 위치와 그 권위 밑에서 뭐든 복종하는 가족 구성원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내 린다는 방에서 신생아를 돌보고 있으므로 빠졌지만 식탁 앞에는 처제 베릴과 장모가 함께 더부살이를 하는 중인 것 같고 아이들은 간난 아이를 제하고도 셋이나 더 되고 하녀 앨리스도 있다. 어른만 다섯에 아이들 셋 거기에 신생아가 있는데 이렇게 함께 살아가는 가족 구성원들 모두 조금씩 다른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게다가 바닷가에서 여름을 보내는 가족은 이들 뿐이 아니다. 바닷가의 잡화점 주인이 앨리스를 초대하여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행실이 안좋다고 소문난 이웃이 베릴과 어울리고 조나선은 스탠리가의 안주인이자 처제에게 와서 집접거린다. 아이들은 아이들 대로 나름대로의 세계가 있고 관계와 질서가 있다.

이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아침식사 테이불에서 베릴이 그에게 차를 준비해 주는데 스탠리가 한모금 마셔보니 설탕이 빠져있다. 설탕을 안넣었군 하니 설탕을 떠서 타주는 대신 통을 그에게 밀어준다. 신기한 건 설탕을 알아서 타 마시라는 뜻으로 설탕을 통째로 주는 행위에 스탠리는 크게 당황하고 모욕을 느낀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서는 자기 지팡이가 없어졌다고 온 식구들을 달달 볶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아내에게는 자기 물건을 제대로 관리 못했다는 벌로 항상 하던 굿바이 키스를 생략하고 비쁘다며 빠져나간다. 제 딴에는 복수라고 요란을 떨고 키스도 않고 나가지만, 식구들은 그가 떠나자마자 야 갔냐? 갔어!!  와 신난다 이제 우리 세상이다 이런 모드가 되어 하녀 앨리스 마저도 집안이 경쾌하고 집에 남겨진 모든 구성원들은 서로를 향해 다정하고 친밀한 분위기로 바뀌며 안도하는 장면이다. 

21세기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텅빈 가부장적 권위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모습이다. 길고 긴 하루가 끝나고 9장에서 남편이 헐레벌떡 가죽장갑 한켤레를 사들고 퇴근하며 하는 말이 가관이다. 여보 나를 용서해 주겠어? 그는 식구들이 그가 키스하지 않고 갔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바닷가 여름을 즐겁게 지내는 동안 자책과 후회로 하루를 다 보냈고 아내를 보자마자 용서를 구하는데, 아내는 이 사람이 뭔소리를 하는 건지 왜 그러는 건지 어리둥절할 뿐이다. 용서라뇨 무얼 말이죠? 

하루 중 짧은 에피소드들을 통해 본 각기 다른 인물들의 속내는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한 인간 관계를 엿보게 한다. 태어난 지 채 몇달 되지 않은 아기조차 한 인간으로서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짊어진 자신만의 존재가치를 짧은 토막극 속에 표현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에서>와 <가든파티> 두 편을 읽으니 이 소설집의 약 1/3 정도를 읽은 것 같다. 만에서보다는 가든파티가 크게 마음에 와 닿았는데, 쓰다 보니 <만에서>에 에너지를 다 썼다.  펭귄클래식의 이북 버전을 읽었지만, 번역본은 몇 개 더 있어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다. 표지는 펭귄이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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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에서 나온 곤충극장은 희곡 모음집이다. 애석하게도 카렐 차페크(체코,1890~1938) 의 대표작 R.U.R(로썸의 만능 로봇, 국내에 로봇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음)는 없다. 로봇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발원지이다. 노벨상 후보로도 올랐으나 정치적인 색채 때문에 보류되었고 정치적 색채가 없는 두루뭉실한 단 한 건의 글을 쓰면 그 책을 지명하여 노벨상을 주겠다고 스웨덴 한림원이 제안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역자는 진짜인지 확실치 않은 소문을 전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극작가이자 저널리스트 소설 동화 등 다양한 세계에 몸담았던 한 작가의 이상과 작품성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곤충극장은 의인화한 곤충의 세계를 여행하는 여행가의 눈을 통해 곤충과 다르지 않은 인간의 본질을 노출한다. 상징은 모호하지 않으며 직접적이다. 무대에서 본다면 연출의 변주로 더욱 재미있고 유머있게 텍스트보다 훨씬 재미있게 올릴수 있을 것같다. 정치적 목적을 갖는다면 현학적이거나 심오한 대사로 졸려 빠진 극이 될 수 있었겠지만 해학적이어서 실제 무대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여러 곤충들의 서식 환경과 외형을 무대장치와 의상 등으로 다채롭게 연출할 수 있어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은 연극이 되었을 것 같다. 등장인물이 워낙 많아 아마추어 무대에서 가장 선호하는 극이라고도 하고 현대까지 많은 나라에서 무대에 올리고 있다고 한다.

1막에는 매혹적인 나비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프롤로그에는 짝짓기의 계절에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들을 조심스레 채집하여 손상 없이 박제하며 생명을 영원히 보존한다고 말하는 교수가 등장한다. 죽여아 영원해지는 아이러니라니. 여행자는 나비들의 세계에서 그들을 관찰한다. 짝짓기 철에 나비들이 서로를 유혹하고 구애하고 옭아매고 배신하고 도망간다. 교수의 말에 따르면 이는 교미를 위한 서곡이다. 암컷은 체취로 수컷을 유혹하고 수컷은 암컷을 쫓고 다시 암컷은 도망가고 구애하는 수컷을 옭아매고 수컷이 쓰러지면 새롭고 더 튼실한 짝을 찾아 다시 체취로 수컷을 희롱하고 사랑의 행각은 이렇게 현란하게 짝을 바꿔가며 계속된다. 

영혼을 다해 이리스에게 시를 지어 바치던 펠리스는 이리스가 곧 자신의 시에 싫증을 내고 빅토르와 함께 날아가 버리자 이번에는 오타카르와 함께 날아온 클리티에에게로 열정의 대상을 바꾸고 그들 셋은 팰리스의 시를 조롱이라도 하듯 운율 맞추기 놀이를 하는데 그러다가 클리티에는 함께 온 오타카르를 쫓아버리고는 아직 굼벵이에서 변신한지 얼마 안 돼 사랑을 잘 모르는 펠리스와 놀아난다. 조금 후 깔깔거리며 돌아온 이리스는 빅토르가 순식간에 새에게 잡아먹힌 놀러운 소식을 재밌어하며 전하면서 동시에 클라리스를 놀리듯 너의 오타카르가 자신과 짝짓기를 했다고 요란을 떤다. 하지만 이내 이리스의 웃음은 울음으로 바뀐다. 짝짓기를 한 이리스는 알을 품게 될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의 몸매는 엉망이 될 것이며 이 짜릿한 유혹의 파티는 이제 끝났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여행자는 이렇게 나비들의 세계에서 살롱에 모여 얄팍하게 시를 논하며 달콤한 전율과 불화와 욕구 불만에 가득찬 청춘의 유혹을 보며 지옥으로 향한 그들의 세계를 저주하며 인간은 나비들의 찰라적 즐거움보다는 훨씬 더 가치있는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행자가 보는 다른곤충들의 모습에서 역시 인간의 본질이 없지 않다. 2막에서는 쇠똥을 굴리며 등장하는 쇠똥구리 부부와 그 똥뭉치를 훔치는 제3자 쇠똥구리를 통해 물질 만능의 인간의 모습을 희화화한다.

인간에게는 한낮 더럽고 냄새나고 쓸모없는 똥덩어리. 쇠똥구리에게는 생명만큼이나 소중한 최고의 가치다. 이렇게 소중하게 굴려온 소똥덩어리 하나로 금슬 좋아보이던 쇠똥구리 부부 사이는 깨어지고 여행자는 도둑놈에 살인자 누명까지 쓴다. 이 때 번데기 한마리가 극중 내내 자신의 새로운 탄생을 우주적 사건으로 예고하고 동시에 귀뚜라미 부부가 임신한 귀뚜라미 부인과 함께 등장하여 찌르레기가 살던 곳에 안식처를 삼고는 앞으로 태어날 아기등과 함께 행복하게 살 날을 기대하며 행복해한다. 먼저 살던 찌르레기는 등에 창이 꽂힌채 살해되었는데 결국 찌르레기의 죽음이 자신들에게 새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며 기뻐하는 모습, 커튼을 사다 달고 태어날 아기들에게 흔들어줄 딸랑이를 흔드는 부부의 행복한 모습은 소시민의 모습으로 비친다.  

그들의 아늑한 저택은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곳인가. 하지만 곧 이 매정한 생태계에서는 찌르레기건 귀뚜라미건 자신의 적을 노리는 적이 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귀뚜라미 부부의 짧은 행복은 그 행복을 안겨다 준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최후를 맞는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맵시벌로, 그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자신의 딸인 유충을 위해 곤충들에게 침을 꽂아 죽이고는 유충의 먹이로 갖다 준다. 쌓이고 쌓인 먹이를 두고도 계속 다른 곤충을 사냥중인 맵시벌의 유충은 다시 또 배고픈 기생충에게 희생당하고. 하루 살이는 영원을 찬양하며 빙굴빙굴 돌고 그토록 2박 내내 자신의 탈피를 예고했던 번데기는 드디어 하루살이로 새탄생을 맞아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지만 날자 마자 떨어져 죽음을 맞이한다.

3막은 직접적인 전체주의에 대한 비유와 풍자로 개미들의 전투를 묘사한다. 장님 개미는 하나 둘 셋 넷 구령을 부루고 모든 일개미들은 구령에 맞춰 일을 한다. 그러다가 두 개의 나뭇잎 사이에 난 길, 인간이 보기에 한 뼘이나 될까 하는 길을 두고 영토 분쟁이 일어나 흰개미들과 전투가 벌어진다. 처절한 전투 장면과 계속되는 병사 모집, 패배와 퇴각에도 불구하고 독재자는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며, 계획대로 잘 되어가고 있음을 강조하며 전투는 계속된다. 카렐 차페크가 반 나치 정치색을 강하게 비판했던 부분임을 누가 봐도 알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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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트 파이크는 터키의 작가로 서구의 어느 영향도 받지 않은 독보적인 자신의 스타일로 많은 단편을 썼고 현대 터키 문학에 큰 영향을 준 작가라고 한다. 처음 두 단편은 상징을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충격적인 내용이어서 계속해서 읽을까 말까 망설였는데 그 이후의 소설들은 재미있어서 한개씩 야금 야금 읽다가 한 20여개의 단편을 읽었다. 도시 빈민들의 일상을 소재로한 짦막한 스토리들로, 20세기 초중반의 터키라는 생소한 환경에서 하찮고 보잘것 것 없고 가난한 민초들의 순박한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 


읽은 곳까지 20여개 단편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다수의 소설이 매우 짧은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충분한 이야기 삶의 변곡점들이 담겨있고, 짐꾼이나 농부 공장노동자 웨이터에서 실업자까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점, 사건이 발생하고 서사가 만들어지는 와중에도 딱히 악인은 등장하지도 맡은 역할도 없으며 대개 좀도둑마저도 선량하고 어리숙하게 다루어지는 점을 떠올릴 수 있다. 

첫 소설 <해변의 거울>은 읽은 소설 중 조금 예외적이다. 가난하고 위악적인 소년과 아들 앞에서 매춘을 하며 돈울 뜯어내던 소년의 엄마가 악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설이 다른 소설과 달리 읽기에 불편했던 건 어쩔 수 없었든 싶다. 알고 보면 소설이 불편 그러한 삶이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이 불편한 거겠지만. 이 첫 소설 <해변의 거울>은 중기에 해당하는 소설이어서 실험적인 작품이었을 수도 있고, 나머지는 초기작이어서 보다 이야기거리가 풍성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짦막한 소설 두 개만 소개해 본다. 전체적으로 이런 분위기이고 조금 더 따뜻한 것도 조금 더 슬픈 것도 있다. 그 분윅기와 정서라는 것이 흔히 읽을 수 있는 서구의 것이 아니라 터키 고유의 것이라 할 수 있을 정겹고 푸근하다. 20세기 초중반이라 전쟁과 세계 대공항의 여파로 모두들 힘겹게 살아가고 있르므로 지금의 정서와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한 무리의 사람들

‘나의 침대는 전차를 기다렸던 순간들의 그 익숙한 상태를 이제는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 그저 하나의 침대였다. 그 안에 잠잘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아침에 문을 여는 카페를 강제로 닫기 전에 밤을 보낼 수 있는 몇 개의 집이 간절하게 필요한 이스탄불의 겨울이 때로 얼마나 길고, 끝없는 재앙인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위의 인용에서 마지막 문장은 흠..해당 단편을 읽으면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는데 찰떡같이 입에 붙는 번역이 아니라서 아쉽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려면 내용을 조금 알아야 한다. 소설은 자정이 지난 얼음장같은 한파 속에서 시간 전차를 기다리는 풍경으로 시작된다. 전철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너무 추워 발을 동동 구르며 각자를 기다리고 있는 따스한 집과 아늑한 침대 생각이 간절하다. 그 때 어떤 사람이 다가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 무리가 지나가는 걸 혹시 못봤느냐고 묻는다. 그같은 사람들이란 무엇일까? 잠시 의아하지만, 그것이 행색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전차 속에서 밖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비슷한 사람을 보고서야 알아차린다. 그와 비슷한 사람은 추운 겨울 외투도 모자도 부츠도 없이 허름한 옷을 걸친 궁핍해 보이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짐꾼이나 하인 같은 일을 하는 값싼 일용직으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사람들로, 숙소 비용을 절약하려고 여러 카페 구석에서 약간의 돈을 내고 잠을 자는데 경찰이 불법이라며 쫓아냈다는 것이다. 쫓겨난 사람들은 연합을 해서 주지사라도 만나 딱한 사정을 얘기하려고 찾아가는 길이었는데 딴전을 팔다가 그 일행을 놓쳤다는 것이다. 말을 마치고 그는 사라졌고 전철을 탄 화자는 전차 밖으로 걸어가는 그들을 묵도한다. 

방금 만난 사람과 비슷한 사람들의 무리들 말이다. 추운 겨울 돌아갈 침대가 있지 않은 사람들. 하찮은 일을 하며 겨우 먹고 살만큼의 푼돈만 손에 쥐지만 어렵게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힘겼게 일하지만 살을 에는 추위에 변변한 외투도 없이 부츠도 방한 모자도 장갑도 없이 문닫은 카페의 한쪽 구석에서 쪽잠을 자다가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 부드럽고 달콤한 아나톨리아 말투를 쓰던 사람처럼 시골에서 올라온 순박하기 그지 없는 사람들. 그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주지사를 찾아가서 사정 얘기를 하면 다시 푼돈을 내고 카페 한구석에서 한파 속위 하루밤를 지낼 수 있을 걸 기대하는 순박하고 헐벗은 한무리가 주지사의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질투

다른 작품도 그렇지만 이 소설은 한편의 긴 시다. '닭장 같은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골의 한 가난한 선생은 이웃 사람들에게 떠밀려 마을의 또 다른 가난한 여인인 파디메와 결혼을 한다. 아내는 남편이 시키는 대로 하지만 그는 아내가 동반자로 여겨지지 않고 자신에게는 아내 대신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내에게는 아내의 염소를 먹이는 목동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날 어스름 무렵 그림 같은 목가적 풍경 속 나뭇잎 사이로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아내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나는 잎사귀들을 헤치며 다가갔다. 휘스레브는 파디메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나를 보고도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철학자처럼 ‘열일곱 살의 남자아이가 열일곱 살의 여자아이의 손을 손을 잡는다면 서른다섯 살 먹은, 여자아이의 남편이라도 놀랄 일은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

아내의 나이가 남편 나이의 거의 두 배라는 사실은 이 대목에서야 알려준다. 그가 아내에게 나쁘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입맞춤도 하는 사이임에도 뭐 아이를 가져야될 이유가 굳이 있느냐는 둥 동반자로 생각되지 않았다는 하는 말을 전하는 화자의 심리가 그제서야 이해가 된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녀에게 자신이 너무 늙은 거다. 열일곱의 소녀에게 서른 일곱살의 남자가 부부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이 손을 잡고 있음에도 화자는 화조차 내지 못하고 철학자처럼 놀랄 일은 아니라 생각하고 더욱이 목동과 아내에게 잘 있었냐고 말을 걸고 숫양을 쓰다듬고 지나간다. 하지만 ‘웬일인지 가슴에 멍이 든 느낌’이고 ‘속도 거북’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파람을 불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아내는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방 안으로 들어와 헤나로 물들인 손을 비비며 “저녁밥 준비되었어요”라고 말한다. 그의 소심한 질투는 자신은 입맛이 전혀 없으니 너 먼저 먹으라고 하는 말이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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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향적이라는 말을 종종 듣고, 나 스스로도 그렇다고 인정해왔는데, 때로 완전히 반대로 내가 굉장히 내향적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대화 중에 우연히 내가 좀 낯가리잖아 혹은 내가 수줍어서 말을 먼저 잘 못거는데 같은 말을 흘리면, 친구들은 웃기시네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내가 외향적인지 내향적인지 잘 모르는데, 수전 케인의 콰이어트에 보면 내향성을 판단하는 설문지가 나와있다. 이 질문지가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남들에게 외향적으로 비치는 내 성격에서 내향성의 점수가 굉장히 높게 나왔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고, 그게 내 참모습인데 속이고 살려니 피곤한 듯하다.


1. 나는 단체 활동보다는 일대일 대화가 좋다.

2. 나는 글로 자신을 표현하는 게 좋을 때가 많다.

3. 나는 혼자 있는 게 좋다.

4. 나는 동년배들보다 부나 명예나 지위에 덜 신경 쓰는 것 같다.

5. 나는 잡담은 싫어하지만 내게 중요한 문제를 깊이 논의하는 것은 좋아한다.

6. 사람들이 나더러 “잘 들어준다”고 말한다.

7. 나는 위험을 무릅쓰는 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8. 나는 방해받지 않고 깊이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즐긴다.

9. 나는 생일에 친한 친구 한두 명이나 가족과 소박하게 지내는 게 좋다.

10. 사람들이 나더러 “상냥하다 거나 “온화하다”고 한다.

11.나는 일이 끝날 때까지는 사람들에게 내 작업을 보여주거나 그것을 논의하지 않

12. 나는 갈등을 싫어한다.

13. 나는 스스로 최선을 다해 일한다.

14. 나는 먼저 생각하고 말하는 편이다.

15. 나는 밖에 나가 돌아다니고 나면, 즐거운 시간을 보냈더라도 기운이 빠진다.

16. 나는 전화를 받지 않고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게 내버려둘 때가 종종 있다.

17. 꼭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일정이 꽉 찬 주말보다는 전혀 할 일이 없는 주말을 선택하겠다.

18.나는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19. 나는 쉽게 집중할 수 있다.

20. 수업을 들을 때는 토론식 세미나보다는 강의가 좋다.


이 20개 문항중에서 14, 19, 20을 빼놓고는 대부분이 해당된다. 결국 나의 내향성은 나의 내향성 속으로 깊이 감출 수밖에 없고 외향성의 외피를 쓰고 계속 살아가고 있지만, 내 방을 처음 가졌을 때, 대가족으로 북적대던 ‘안방’에서 빠져나와 나 홀로 가질 수 있는 깊은 밤의 시간들을 내가 얼마나 사랑했던가를 회상하면 나의 내향적 내향성은 나만 알고 있는 깊은 내면 속에 숨겨져 있던 것 같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외향성의 이면은 어떻게 된 것일까. 성격이든, 능력이든, 신체 사이즈이든, 뇌의 활동 부분이든 어떤 표준 속에 여러가지의 멀티속성을 한꺼번에 다 구겨넣고 그것을 표현하면 개인이 가진 고유성 그러니까 여러가지 속성들의 들쑥날쑥함은 사라지고당 단어 혹은 범주보다 낮거나 높거나 하는 단순한 비교만 남는다. 평균의 종말이라는 책이 있다. 서두(와 1장)의 내용을 축약해 보았다.


공군 전투기의 잦은 사고로 조종석의 규격이 최근 전투병들의 신체 사이즈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가정을 했고, 조종석 설계상 가장 연관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10개 항목의 신체 치수에 대해 평균값을 냈다. 이 평균값을 바탕으로 평균적 조종사를 각 평균값과의 편차가 30퍼센트 이내인 사람으로 넓게 잡았다.조종사 4천여명 가운데 10개 전 항목에서 평균치에 해당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10개 사이즈 중 3개 항목만을 골라서 평균치에 드는 조종사를 골라도 3.5퍼센트 미만이었다. 그들은 이미 전투조종사의 신체조건이라는 기준을 통과한 자들이었는데도 말이다. 평균적 조종사 같은 것은 없었다. 이것이 대니얼스라는 한 젊은 장교가 밝혀낸 사실이었다. 놀랍게도 뷰로크라틱의 전형일 것같은 군에 그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받아들여져 평균치가 아닌 개개인에 맞춘 시스템으로 바뀐다.엔지니어들은 비용이 많이 들고 불가능하다고 꺼려했지만 군이 밀어붙이자 곧 해결책을 제시했다. 현재 모든 자동차의 표준으로 자리잡은 조절가능한 시트가 그렇게 탄생되었다.


노르마는 1만5천명의 젊은 성인 여성들에서 수집한 신체 치수 자료로 평균값을 내어 젊은 여성의 표준 체격을 만든 조각상이다(조각가 아브람 벨스키, 의사 로버트 L 디킨스). 이 완벽한 표준에 가장 부합하는 대회가 열렸는데, 치열한 경쟁 끝에 막판 경쟁에서는 밀리미터 단위로 우승자가 결정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참가자 3천8백여명 가운데 9개 항목 치수중 5개 항목에서 평균치에 든 참가자들이 40명도 채 되지 않았다.당시 대다수의 의사와 과학자들은 이러한 결과를 미국 여성들이 건강하지 못하고 몸상태가 나쁘다고 결론내렸다. 미공군 대니얼스의 직관과 어긋난다.


평균이 쓸모가 있을 때도 있다. 두 집단간을 비교할 때다. 개개인에게 평균은 허상이며, 평균에 기반해서 비교당할 때 개인의 자신의 고유 가치를 잃게 된다는 게 저자가 서두에서 강조하는 말이다. GPA 평균(-D)에 의해 자신이 젊은 날의 한 때를 얼마나 낙오자로, 우울하게 지내게 되었는지를 고백하면서 이 책은 시작하고 있다. 고등학교 중퇴 후 15년만에 하버드 대학 교수가 된 저자는 어떤 추상적 철학을 발견하거나, 공부에 눈을 떠서가 아니며, 처음에는 직관에 의해 그 다음에는 의식적으로, 모든 인간은 다르며, 그 개개인의 원칙을 따라 삶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앞장에 소개된 뇌 활동 영역에 대한 내용인데, 우리가 무얼 하면 어떤 영역이 활성화되고 저걸 생각하면 또 어떤 영역이 활성화된다는 식으로, 그러니까 뇌의 어떤 정해진 영역이 특정 기능을 한다는 식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런 영역 역시 앞에서 본 것처럼 많은 데이터의 평균을 낸 것으로서, 같은 활동에 대해 뇌가 활성화되는 영역은 천지차이로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전적으로 외향적이거나 전적으로 내향적이지 않다. 평소에 말이 없고 타인과 거리를 두는 듯 해 보이는 사람도 끊임없이 사람과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와 사회적 활동을 찾는 것을 보면 평균이라는 것은 어떤 단어로 뭉뜽그려 표현하는 수단이될 뿐 다양성이 가진 개별 인간의 특징을 절대로 표현해주지 못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나는 내향적이기도 하지만, 사람들과 만나고 말하고 듣고 즐거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내향성의 측면을 남들이 못보는 거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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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9-02-18 12:19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평균이라는 허수가 삶을 수치화해서 끊임없이 비교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어요
 


이런 깔끔하고 산뜻한 문체에 섬뜩하거나 잔인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강한 심리적 반전이라니. 계속 보고 읽고 알고 있던 주인공의 습관적 행위를, 이미 한 번의 반전으로 해피 엔딩의 결말을 맺나 하고 안심하고 나서야, 눈여겨 본다. 

처음 만남부터 남의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래서 언젠가는 헤어져야 겠기에, 철저히 베일에 쌓인 남자이기에,  그가 남긴 모든 것, 커피에 넣어 마시고 남은 각설탕, 콘돔 껍데기 같은 잘잘한 흔적들마저도 소중하다.  그런 것까지 모은다니 우웩 소리가 나오려는 것까지 그가 남기고 간 것은 그렇게 서랍 깊숙히 은밀하게 보관된다.  

그렇게 읽었다. 이해할 수 있다. 남자는 근처 아파트 공사장에서 건축사로 일하는 데 그 공사가 끝나면 그들의 관계도 끝난다.아이가 둘 씩이나 있는 남의 남자를 안을 시간은 퇴근과 귀가 사이의 얇은 시간의 틈새 한시간 절도 뿐이다. 문체가 어찌나 간결하고 건조한지 도통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힌트도 주지 않지만 둘의 애정행각은 영화로 본 장면처럼 시각적으로 생생하다.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하다 못해 조금만 더 있어달라 투정부리지도 못하는 사랑. 그의 아내와 가족은 금기시된 주제다.   이별의 시간은 다가오고 그녀가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하는 그의 흔적들을 다루는 그녀의 행위 만으로 그녀의 절절함이 전해질 것 같은데….끝이 다가오자 그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진다.  

이별을 준비하는 것일까. 긴장했던 순간에 반전이 일어난다. 이제 그의 물건은 이제 더 소중하지 않다.  잠겨진 서랍 속에 새로운 물건이 들어가기 시작하는데 이 두번째 반전은 첫번째 반전보다 더 충격적이다. 문체가 건조하지만, 묘하게 시적 반복성과 중독성이 있다.  뭐 대단한 상징이나 문학적 기법 같은 걸 찾을 필요 없이 소재 자체가 일상적 드라마에 머물러서 쉽게 읽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메디치상이 프랑스 문학상 중에서도 새롭고 독특한 실험적인 작품에 수여한다는데, 정말 새롭고 독특하다.1993년 수상작이다. 종이책이랑 전자책 모두 단행본으로도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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