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짧고 읽을 책은 많다. 내 삶은 내가 만드는 이야기지만, 책 속에는 내가 되지 못한, 혹은 내가 아니어서 다행인, 하지만 내가 이 짧은 생애 동안 현실에서는 결코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내가 있다. 현실의 나는 나를 현실화하기 위해, 물리적으로 숨쉬고 살아있게 하기 위해, 나를 더 축소시키도록 지시한다. 내가 물고 태어난 숫가락의 재질과, 내가 먹고 살기 위해 부딪치며 살아야 하는 아주 작은 영역의 사람들을 떠나면 나의 생은 위태로와진다. 우주적 차원에서 본다면 아주 작디 작은 세계에서 생을 보내는 일이 생을 지키는 일이지만, 그 작은 세계에 난 세계 문학이라는 창은 제약도 없는 시공간을 넘는 거대한 세계 속에 서 생을 더 경험할 수 있게 한다.
그것 역시 시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인생은 짧지만, 읽고 싶은 책을 다 못읽고 죽는 것이 억울한 것 못지 않게, 짧은 인생 그 자체의 리얼한 세계를 사는 일도 중요하다. 스스로 경험하고 살이 닿고 표정의 미묘한 변화와 웃음소리에 반응하는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 몸을 움직여서 스스로 먹을 것을 잠잘 것을 그러한 노동을 하는 것, 그런 현실 말이다. 그러니 결국 읽고 싶은 책을 다 읽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읽고 싶은 책을 살 수는 있다. 읽지 못해도 꽂아만 두어도 괜찮겠다, 언젠가는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바깥으로 난 창을 활짝 열어두기 때문이다. 꽂아만 두어도 읽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위안이 되겠다 라고 생각하려면 누군가가 권위 있는 사람이 그렇다 라고 말해주면 더욱 위안이 되겠다.
책을 구매하는 행위는 다만 서점 주인들과 저자들을 ¸ 먹여 살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책을 소유하는 일(그것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체가 그 자신의 기쁨과 그 자신의 윤리 규범을 갖는 일이다. 예를 들면, 주머니 사정이 지극히 빠듯한 상황에서도 가장 저렴한 보급판들을 이용하고, 많은 도서 목록들을 끊임없이 연구하면서, 온갖 어려움들을 무릅쓰고 영리하고 끈질기며 재치있게 점차 작고 아름다운 도서관을 만드는 일은 하나의 기쁨이고 매혹적인...
그렇다. 내가 먹는 것보다 읽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면, 냉장고에서 뭔가가 자꾸 쌓여가는 것보다는 책장에 뭔가가 쌓이는 게 더 좋다면 그 기쁨을 가져다 주는 서점 주인과 저자들을 좀 먹여살리는 일도 나의 기쁨 아니겠는가. 이제껏 비싸네 어쩌네 불평불판만 많았는데, 이렇게 생각을 전환할 수도 있다. 무슨 책을 꽂아둘까. 언제라도 읽을 수 있게, 또 언젠가는 꼭 읽어야 할 책으로 리스트를 만들고 그 책을 하나씩 사들이는 일. 그것을 헤세와 함께 해보자. 이 책은 헤세가 '나만의 도서관'에 꽂아놓을 책들의 목록을 만든다. 나만의 도서관에서 빠질 수 없는 책, 꼭 반드시 꽂아놓아야 할 책들을 태고적 신화에서부터 시작해서 19세기 해세가 살던 동시대 이전 세기까지 거슬러 올라오면서 목록을 작성한다.


헤세와 함께 만드는 나만의 도서관에 반드시 꽂아놓을 책들은 시대 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가로지른다. 인도 신화와 장자 싯다르타를 비롯한 중국의 고대 사상가들 에코가 <책의 우주>에서 문학이 특히 풍부한 나라로 프랑스, 러시아, 또 하나는 영국이었던가 독일이었던가 아무튼 또 한나라를 뽑았는데, 독일이야 헤세가 자국 사람이니까 많이 언급했을테지만 역시 프랑스와 러시아 쪽에서 리스트가 많다. 고대 희극에서 비롯해서 중세를 빼뜨리지 않고 동서양의 문물을 교차시키며 어머 이건 꼭 사야돼과의 많은 작가들의 뛰어난 작품들을 빠르게 열거해가는 책이기에, 여기에 일일히 열거할 수는 없지만, 최근 읽은 작가 중 볼테르와 발자크 등도 언급했고, 특히 최고의 찬사가 함께 한 작가와 작품으로 신랄한 풍자와 냉소로 빚어낸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웅장하고 동시에 가장 매력적인 작품의 하나로서' 고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기억에 남는다. 걸리버에 대해서는 '아일랜드의 천부적 시인'이며 '위대한 정신, 신랄하고 통렬한 유모, 고독한 천재성은 그의 온갖 변덕스러운 기행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으며, 톨스토이에 대해서는 '왕왕 설교조와 개혁정신으로 인하여 잊혀지기도' 했지만 <전쟁과 평화> 그리고 <안나 카레리나> 민화집은 리스트에서 빠뜨릴 수 없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도 그런 언급을 했던 것 같은데 특히 안나 카레리나는 가장 아름다운 러시아어 장편소설이라고 했다.
이렇게 목록을 작성해 나가다가 독일 문학 쪽으로 가서 다소 길어지는데, 그러다가 헤세는 이렇게 완성해 놓은 목록들을 되풀이 관찰하고 조사해보니 리스트가 주관적이며,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라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귀한 보석함과 같으며 훌륭한 작품이 누락되어 있을지는 모르지만, 모든 시대의 주옥같은 작품이 망라되어 있고, 그 작품들의 훌륭함과 객관적 가치면에서 이 수집물들을 크게 능가하지 못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길은 얼마든지 있다. 각자가 책을 읽기 시작하고 이곳까지 인도한 그 길을 따라, 각자의 도서관(목록)을 만들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