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응구기 와 시응오가 노벨상을 받지 않을까 싶었다. 이시오구가 본인은 일본사람이라 하지만, 영어가 모국어인데, 아무리 하루키에게 노벨상을 주고 싶다고 해도, 혹은 주고 싶지 않다고 해도, 일본 태생일 뿐 일본문학으로서 받은 상은 아니라는 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니 말이다. 작년에도 영어 문화권에서 받았고, 그 전에도 계속 서구 문화권에서 받았으니까. 그런 하루키와 시응오가 확률이 높았던 모양인데, 다시 영어문화권으로 상을 주려니 노벨상위원회 쪽에서도 캥기는 게 있는지, 이시구로의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 운운하는데, 문화는 생김새나 유전자에서 생기는 게 아니지 않은가.
세계에 많은 나라들이 있고, 많은 민족들이 있지만 아프리카의 나라들은 유독 개별적인 나라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기 보다는 아프리카라고 통칭한다. 아프리카 내에서 개별 나라들의 정체성보다는 아프리카 대륙이라는 큰 덩어리의 정체성이 더 강렬하기 때문이다. 검은 피부, 가난한 땅, 핍박받고 굶주린 사람들과 부패한 정권, 부패한 정권과 분노한 반군이 총과 칼을 들고 서로를 겨누는 대신, 약자를 겨누는 황폐한 땅. 이런 것들 말고 한 개인이 세계에 대한 어떤 이해를 바탕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꾸려나가고 있을까. 그런 질문을 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피의 꽃잎들》은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글자가 빽빽한 탓도 있었겠지만, 이질적 문화에 대한 생경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등장 인물도 많고 시점이 명확하지 않아서 지금 누가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황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예정된 비극적 결말을 유예시키고 싶었던 거다.
제국의 지배가 물러난 후, 식민 청산을 하는 일은 공산주의 혁명을 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듯하다. 어느 나라가 제대로 그 일을 해냈을 지 궁금하다. 제국의 그늘 아래 제국의 문화와 제도를 동경하고, 그들에게서 교육받아 제국을 위해 민초들의 피를 빨았던 특권층은 제국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물러난 후, 스스로 괴물이 된다. 친일파의 후손들이 친일을 한 덕에 모은 재산과 권력을 대대 손손 유전자가 멀겋게 희석되도록 물려받고 아직까지도 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지배 권력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케냐의 외진 마을 일모로그의 한 매음굴에서 방화사건이 일어난다. 사건의 희생자들은 추이, 키메리아, 음지고 세 사람이고 이들은 생게타 양조회사의 이사들이다. 이 사건의 용의자로 무니라, 압둘라, 완자, 카레가가 지목되고 감옥에 갇힌다. 이 일의 시작은 아주 오래 전 초등학교 교장 무니라가 황폐하고 버려진 땅 일모로그에 처음으로 도착했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모로그의 가난, 가뭄에 시달리고 인구마저 줄어든 황무지, 내일이면 그가 잔인함을 경험했던 도시로 달아나 신기루에 불과한 미래에 직면하게 될 아이들의 기대에 찬 눈을 바라보는 것은 더 심오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그 자신을 대면하는 것이었다. 221
오래 전 선조들은 그 풍요로운 땅에서 평화롭게 지냈으리라. 하지만 식민주의 시대에, 전쟁으로, 개발로, 숲을 빼앗기고 남자들은 모두 마을을 떠나 전쟁에서 죽거나 도시 빈민이 되고, 노인과 아이들만 남은 일모로그에 처음 무니라가 학교를 운영하러 도착하자 사람들은 그를 신뢰하지 못한다. 이런 버려진 땅에 젊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무니라는 그곳에 정착한다. 한 명의 학생이 둘이 되고, 셋이 되고 학생수가 늘어가고, 잘린 다리 대신 나귀 한 마리를 데리고 마을에 새로 정착하여 가게 겸 술집을 차린 압둘라, 그리고 고등학교 때 임신을 하고 집을 떠나 전전하다가 다시 되돌아온 완자와 친해지고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카레가는 무니라와 같은 학교를 나온 후배로 나중에 무니라를 찾아왔다가 이들과 알게 되고, 나중에 학교 선생으로 채용된다.
소설의 전개는 방화사건의 범인을 찾아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는 방화사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 네 사람들은 각자 말하지 못한, 혹은 말할 수 없는 아픈 사연들을 지니고 있다. 대지주이면서 목사인 아버지를 가진 무니라는, 주류에 편입하지 못하고 주변부에서만 머무는 햄릿형 인간이다. 그들의 과거가 드러날 수록 그들의 관계는 복잡하게 얽혀있다. 즉 일모로그의 발전과 교육을 위해 헌신하던 무니라가 그의 고등학교 후배이자 후배 교사인 카라가와의 관계가 전에 반정부 투쟁을 하던 중 자신의 가족이 귀에 잘리고 누이 동생이 죽는 일과 관계가 있음이 드러나고, 이로 인해 분노한 무니라는 자신의 추천으로 고용한 카라가를 해고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러한 관계는 완자와 압둘라가 죽은 세 사람과의 관계에서 더욱 극명한 갈등을 내포한다.
이렇게 사회 속에서 개인과 개인이 서로 얽히고 섥힌 관계는 우리 사회가 개인의 행동과 관계 들의 상호 조합 속에 서로 뒤엉켜 일으키는 커다란 작용들임을 시사한다. 지식인들의 투쟁과 상호 갈등과 또 절망과 변절 과정을 겪으면서 사회는 사회 대로 국가라는 제도 내에서 서구 제국주의가 들여온 개발 논리를 받아들이면서 더이상 원주민의 사회 그대로 정체되어 있을 수 없는 현실은 수탈과 약탈을 감내해야 했던 원주민들의 삶에 미세하게 현미경의 초점을 맞춤으로서만이 가능하다.
처음에 완자가, 무니라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녀는 임신이 하고 싶다. 결혼도 안한 처녀가 왜 임신이 하고 싶을까. 어떻게 먹여 살리려고?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이러한 사고방식들은 후에 완자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알고 보면 무니라의 시점에서 쓰여지긴 했지만 완자가 주인공인 듯하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그녀는 자신을 위협하는 어떤 불의에도 승복하지 않고, 맞서 싸운다. 그리고 마침내 전통주인 생게타 주조로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사업을 확장하여 지역 사회에서 성공을 거머쥔다. 평범한 소설이었다면, 혹은 헐리우드식 영화였다면 여기서 끝났어야 옳다.
가뭄 때문에 거지떼들 처럼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도시로 가면서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는 장면은 아름답고 슬프지만 한편으로 코믹하기까지 한 로드 무비같다. 그 모든 것을 겪어내고, 어떤 고비와 시련에서도 강인한 의지와 실천 그리고 혜안 있는 선택으로 성공을 가졌을 때, 마을에 사람들이 몰려오고, 자본이 몰아치고, 넓직한 신작로가 생기고, 비가 곡식을 열매맺어 풍성한 먹거리들이 넘쳐날 때, 이제까지 가뭄에 사람들이 죽어가도 처내버려두었던 일모로그를 그 땅을 그들의 생게타를 자본이라는 괴물이 그 소박한 사람들의 몫으로 남아있도록 그대로 둘 리가 없다.
마지막 완자의 선택이 옳으냐 그르냐는 더이상 질문의 가치가 없다. 그녀는 살아남아야 했고, 보고 배운대로 살아남아야 했을 뿐이다. 인간의 대지에서 솟아나는 새싹들이 열매를 맺고 곡식을 거두어 먹고, 이웃이 서로 아플 때, 배고플 때 돕고 살아가는 그 단순한 삶이, 어떤 이유로든, 가뭄이든, 산업화든, 신식민주의든, 자본주의적 약탈이든, 더 이상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떤 선택이 남아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다시 우리에게 메아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