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엑시트 - 불평등의 미래, 케이지에서 빠져나오기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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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이철승의 『오픈 엑시트』는 지금 한국 사회가 직면한 구조적 불평등을 역사적·문명론적 기원에서부터 진단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상상과 실천의 경로를 제시하는 책이랄 수 있겠다.

저자는 "벼농사 체제"라는 문명적 구조가 어떻게 오늘날의 인구 위기, 노동시장 경직성, 이민 배제, 그리고 정치적 양극화까지를 이끌어 왔는지를 규명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엑시트"의 길을 찾는다.

저자는 우선 동아시아 문명의 근간을 형성해온 벼농사 체제를 서구의 밀농사 체제와 비교함으로써 한국 사회가 가진 독특한 사회구조를 조명한다.

밀농사 체제가 상대적으로 건조하고 개방적인 자연환경에서 사적 토지 소유와 가족 단위의 자율성을 강조하며 발전해온 데 반해, 벼농사 체제는 고도의 협력과 국가 주도의 수리체계, 혈연 중심의 공동체 의존을 낳았다.

이 구조는 국가와 가족이 개인 위에 군림하는 문화적 토양이 되었고, 지금의 노동시장, 교육제도, 가족정책에까지 깊게 뿌리내려 있다.

이 구조가 초래한 불평등은 세 가지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첫째는 인공지능과 자동화에 의한 노동시장 재편이다.

벼농사 체제에 뿌리를 둔 한국의 노동시장은 경직적이고 폐쇄적이며, 새로운 기술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결여하고 있다.

노동자는 이 체제에서 스스로 빠져나갈 수 있는 자율적 ‘엑시트’의 통로를 갖지 못한 채, 가족과 기업, 국가에 종속된다.

저자는 이러한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노동 시장의 경직성을 해소해야 하고, 평생학습과 생애 전환을 보장할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하다고 본다.

둘째는 초저출산 문제다.

한국 사회는 결혼과 출산을 여전히 이성애 가족 내에서만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케이지 구조’를 고수하고 있다.

이 구조는 비혼자·무자녀자에게는 사회적 자원과 휴식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고, 오히려 출산과 육아의 부담을 여성과 가족 단위에 전가한다.

저자는 이를 사회적 보험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육아휴직과 동등하게 ‘비출산자 휴직’을 보장함으로써, 가족이든 비가족이든 모두에게 삶의 여유와 생애 전환의 권리를 주자는 것이다.

이는 돌봄의 부담을 개인화하지 않고 사회화하는 하나의 전략적 전환을 뜻한다.

셋째는 이민과 이민자의 문제다.

한국은 여전히 민족 단일성 신화를 강하게 유지하며, 외국인을 ‘노동력’으로만 바라보는 협소한 시각을 지닌다.

그러나 저자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 기술 변화가 겹치는 상황 속에서 이민자야말로 한국 사회의 새로운 시민으로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선 이민자에게도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고, 공동체 구성의 주체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결국 정치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내 기준에선 한국 정치가 여전히 벼농사 체제의 가족주의·권위주의 문화를 답습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 구조 속에서 국민의힘이나 민주당이나 모두 기득권적 질서를 유지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본다.

또 저자는 미국의 트럼프주의처럼 한국에도 문화적 보수주의가 점차 확산될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그 대항선으로 새로운 시민성, 새로운 공동체 정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선 문화적 평등과 경제적 자유를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시민 주도적 엑시트’가 정치적 의제로 떠올라야 하며, 기존의 좌우 프레임을 넘는 사회적 상상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더불어 노동 시장에서의 엑시트 옵션의 증대는 저자의 주장과 같이 양 날의 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종국엔 "개인과 조직의 수준에서는 가장 혁명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불평등을 확대할 수 있다." (p347) 것에 대한 말이다.

저자가 줄곧 비판해온 기업 내의 연공 서열의 존재는 1990년 대 국내에 도입된 연봉제가 여전히 호봉제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결을 같이 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지적하듯 협업을 중시하는 벼농사 문화 체제의 우리로서는 칼로 자르는 듯한 직무 평가 조차 어려운 것이기도 하고, 그 놈의 정情은 연공 서열을 넘어선 지배층의 학연, 혈연, 지연이라는 연緣의 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그 연緣들에의 아웃사이더들끼리의 암묵적인 방어책이었기에 더더욱 이어지고 또 이어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엑시트 옵션의 증대란 결국 한 발 더 긱gig경제로의 진입을 의미하기도 하려니와, 최근에 읽은 <모두를 위한 자유>에서 언급된 노동 시간의 단축에 따라 확보된 개인의 자유 시간마저 여가가 아닌 개인 역량 확대, 확장 및 성장에 투입해야 함을 말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학교 교육에서 지적되던 교육 혜택의 불평등은 계속 이어진다는 말이기도 해서 계급, 계층 불평등의 격차는 확대될 수 밖에 없다는 말인게다.

과연 엑시트 옵션의 증대가 보통의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유용한 것이긴 하는 것일까?

저자의 주장을 되새겨보면 전통적 좌파나 우파의 이념 틀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노동시장에서의 엑시트, 가족제도의 유연화, 젠더·이민 정책, 기본소득적 상상력 등은 좌파적이다.

반면, 노조 비판, 문화적 보수성과의 접점, 자율성 강조는 우파적 요소도 내포한다.

그의 사상은 중도 또는 제3지대적 성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 기준에서는 보수 우파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보수 우파가 잘못되었다거나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정치적 성향이 혹시 이쪽이 아닌가 싶다는 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엑시트 옵션의 다양화, 확대라고 말하지만 그 옵션에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는 눈뜨고 코 베이는 현실의 확장이라고 밖에 안보인다.

약자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강자가 더 강해지는 마당을 더 견고하게 다지고 있는 것, 그 자체라는 말이다.

"내가 너무 멀리 나갔다."

모든 사람이 약자는 아니고, 그 약자 중에서 강자로의 도전을 성공적으로 이루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여하튼...

『오픈 엑시트』는 우리 사회가 케이지를 부수고 열려 있는 탈출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책이다.

그리고 그 탈출은 단지 개인의 탈출이 아닌, 사회 전체의 질적 전환을 뜻한다.

이 책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문제를 문화적·제도적 기원을 통해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독자에게 꼭 필요한 사유의 지도이며, 동시에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담론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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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자유 - 일의 미래, 그리고 기본 소득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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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1700년 대의 산업 혁명 이후로 우리네의 삶은 많이 변했다.

하지만 유지되고 있는 것도 있으니 그 중 하나는 "일, 노동, 근로, 직업" 이런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는 동의하지 않는 것 같지만 노동은 여전히 생계 수단이자 자존심이며, 인정받는 수단이며, 내가 하루를 생활하는 데 있어 근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대해 저자는 노동labour와 일work는 같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뭘까?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 본다.

기계가 대신하고 생산성은 나날이 치솟아 이 세상은 생산되자 마자 쓰레기로 버려지는 풍족함으로 가득찬 시대가 되었다. (물론 어딘가의 누구들은 굶주리고 빈곤하게 살아가지만 그것은 분배의 문제이고 생산된 물건과 먹거리는 버려지는 양이 어마어마한 것이 현실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노동의 시간은 줄어들었다.

이제는 주5일 근무를 넘어 주4일 근무제를 말하는 시대다.

그렇게 우리는 노동 시간이 줄어들었는 데 그만큼의 여가와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을까?

노동 시장의 구조적 문제인지 아니면 더딘 경제 성장의 여파 때문인지 일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 늘어나고 질나쁜 일자리만 넘쳐나서 투잡, 쓰리잡에, 보다 보수 좋은 일자리로의 이직을 위한 자기 역량 강화에 내 시간을 온통 쏟아붓고 있으니 그것이 과연 여가 시간이고 자유 시간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저자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더 이상 생존을 위해서만 일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회적 소속감을 추구하려고, 그 속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노동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생업 노동과 성과 사회는 점차 <의미 사회>로 전환되고 있으며, 물질적 번영과 양적 성장보다는 일의 질과 조건, 자유로운 삶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저자가 말하는 의미 사회란, 전통적인 생존 중심 사회에서 벗어나 인간이 삶의 목적과 가치, 존재의 이유를 근본적으로 묻는 새로운 사회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산업사회에서는 노동이 곧 정체성이었고, 노동을 통한 생산성과 효율이 사회적 가치를 구성했다.

그러나 인공지능과 자동화 기술이 노동을 대체하면서, 더 이상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보다 ‘왜 그것을 하느냐’가 중요해지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저자는 노동의 의미 변화를 주목한다.

그는 노동이 인간의 존엄을 구성하는 핵심이라고 보았던 전통적인 인식이 기술사회에서 무력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미래에는 단순 반복 노동이나 기계적 업무는 기계에 의해 대체될 것이며,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일은 감정, 창의성, 관계와 같은 ‘비계량적 가치’를 중심으로 재정의될 것이라 주장한다.

즉, 돌봄 노동, 예술, 교육, 철학과 같은 활동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러한 변화는 노동시장의 대규모 구조조정을 의미하며, 필연적으로 소득 불균형과 대량 실직 문제를 동반한다.

저자는 여기에 대한 해법으로 기본소득을 제안한다.

그는 기본소득을 단순한 복지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존재적 조으로 본다.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억지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고, 각자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 있는 일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사고방식과 사회 구조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며, 기술의 발전이 인간 소외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철학적 성찰과 윤리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의미 사회는 기술적 진보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술을 통해 삶의 질과 자율성, 내면적 충만을 실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재편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는 우리 사회가 이제 "어떻게 더 많이 생산할 것인가"에서 벗어나, "무엇이 좋은 삶인가",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에 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이런 프레히트의 철학은 단지 미래의 예측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삶의 방향성과도 맞닿아 있다.

기술이 아닌 의미가 중심이 되는 사회, 즉 <의미 사회>는 더 이상 공상적인 비전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앞에 놓인 현실적인 과제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오늘날 모두를 위한 번영에 속하는 것은 산업 사회의 역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더 많은 자유다.

1950년대와 달리 번영은 이제 순수 경제적인 개념이 아니라 건강한 몸과 마음의 문제이자 온전한 환경, 평화로운 공존, 문화적 혜택, 감각적 욕구 충족의 문제다.

p14~15, '들어가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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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영감에 관하여 - 천천히 사유할 때 얻는 진정한 통찰의 기쁨
머리나 밴줄렌 지음, 박효은 옮김 / 다산초당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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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산만함을 좋지 않은 것이라고 배운다.

집중은 미덕이고, 산만함은 그 반대라는 말이다.

하지만 Marina Van Zuylen의 이 책 <창조적 영감에 관하여 (원제 : 『The Plenitude of Distraction』>는 이런 상식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산만해도 괜찮다'는 말을 넘어, 산만함이야말로 깊은 사유와 창의적 발상의 출발점일 수 있다는 그녀의 주장이 은근하고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저자는 현대 사회가 효율성과 결과 중심의 가치에 매몰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우리는 늘 뭔가를 해내야 하고, 집중해야 하며, 성과를 내야 한다.

산만함은 이 리듬을 흐트러뜨리는 장애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녀는 이 장애를 하나의 '틈'으로 보는 듯 하다.

그리고 이 틈을 통해, 우리는 오히려 사유의 여백과 감정의 느슨함, 창조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주장은 저자가 여러 고전 철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고민하고, 몽테뉴와 데이비드 흄을 통해 산만함에 대한 자신의 논지의 바탕을 풍부하게 제시한다.

몽테뉴는 자신의 수상록에서 일정한 흐름 없이 주제를 넘나들고, 스스로의 생각을 끊임없이 뒤집는다.

집중 대신, 그는 산만함의 형식을 글쓰기의 미학으로 승화시켰다.

저자는 이 점을 짚으며, 산만함이 단지 주의력 결핍이 아니라, 자기 반성적 사유의 한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흄 또한 ‘자아’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상과 감각의 다발로 보았고, 인간의 사고는 감정과 연상작용에 의해 산만하게 흘러간다고 보았다.

집중이 아니라 흐름과 연상, 이것이 사고의 진짜 모습이라는 점에서, 흄의 철학은 저자의 주장과 절묘하게 닿아 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녀가 산만함을 '만족 지연'과 연결시키는 대목이다.

현대의 주의력 위기 담론은 산만함을 즉각적인 자극 추구와 동일시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산만함이 만족을 미루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하나의 생각에 몰입하지 않고 머뭇거릴 수 있는 힘, 결론을 유보하고 다른 길로 새는 용기, 바로 그 유예의 순간이야말로 창의성과 사유의 가능성을 여는 문인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창작 과정에서 겪는 ‘막힘’이나 ‘돌아섬’이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무의식적 사유가 작동하는 창조의 배경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고 저자가 무조건적인 산만함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말하는 산만함은 깊은 사유와 연결된 지연의 미학이지, 아무 데로나 튀는 집중력 저하 상태가 아니다.

그녀는 산만함이 “escape”가 아니라 “delay”라고 말하고 있다.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핑계가 아니라, 어떤 생각을 더 오래 숙성시키기 위해 걸음을 늦추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특정한 결론으로 독자를 밀어붙이지 않는다.

오히려 책 자체가 산만함의 형식을 닮았다.

서술은 유려하지만 일직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다양한 철학자와 문학가의 사유를 참조하면서 지적 유영을 유도한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한 부분을 읽고 나서 다음 장을 넘길 때 뜬금없는 사진들을 보며 딴 생각에 빠지곤 했던 것 같다.

이런 것도 저자가 의도했던 바였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산만한’ 독서 경험이 이 책의 주제를 더 깊게 체험하게 만들었다.

이른바 '유익한 산만함'을 통해서라는 말이다.

더불어, 이 책과 저자의 주장들은 산만함에 대한 죄책감을 거두어낸다.

오히려 그 산만함을 인간다운 사고의 조건으로 보게 만든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다음 번 집중이 흐트러지는 순간이 꼭 실패처럼 느껴지지는 않을 것같다.

어쩌면 그때가, 새로운 사유가 싹트는 순간일지도 모르니까.

우리의 사고방식을 재정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유연하고 복잡하며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지난한 노력이 요구되지만, 지금 우리가 탐구하고 있는 '유익한 산만함'이라는 독특한 경험은 우리를 틀에 박힌 사고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분명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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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 - 창의성은 어떻게 현대사회의 중요한 가치가 되었는가
새뮤얼 W. 프랭클린 지음, 고현석 옮김 / 해나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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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창의성을 거의 신념에 가깝게 믿는다.

창의성은 경쟁력을 높이고, 혁신을 가능케 하며, 문제 해결의 핵심 자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새뮤얼 W. 프랭클린은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The Cult of Creativity)』에서 이런 믿음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명되고 숭배되기 시작한 문화적 산물임을 짚어낸다.

그는 특히 냉전기의 미국 사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심리학의 도구화가 맞물려 창의성이 체제 우월성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동원되었음을 언급한다.

창의성은 자유, 개인주의,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지만, 실은 자유시장과 경쟁의 가치관을 주입하는 기제로 기능했다.

오늘날의 창의성 개념은 이와 같은 기원을 잊은 채 사회 전반에 숭배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저자는 이 숭배의 세 가지 우려를 말한다.

첫째, 창의성이 예술에서 ‘새로움’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정립되며, 과거의 기법이나 유지·재현의 노력은 예술에서조차 비창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둘째, ‘새로운 아이디어’의 생산 자체가 창의성의 핵심으로 간주되면서, 과정, 관계, 반복, 숙련과 같은 요소는 창의성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셋째, 창의적인 직업과 그렇지 않은 일을 분류하는 사회적 위계가 만들어지며, 돌봄, 청소, 정비 같은 유지의 노동은 비창의적인 저가치 노동으로 취급된다.

이에 덧붙여 저자는 창의성이 윤리와 공존을 위한 역량이어야 하며, 돌봄의 노동, 관계를 회복시키는 기술, 느린 변화와 같은 요소들도 창의성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 싶다. (내가 너무 앞서 간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ㅠㅠ)

어떤 면에서 2025년형 창의성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관계적 전환’과 ‘공동체적 재구성’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여하튼 저자의 지적처럼, 현재의 창의성 숭배가 지속되는 한 이런 창의성에 대한 생각은 보완과 수정이 필요해보인다.

이 책은 단지 창의성이라는 개념을 역사적으로 따라가본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무엇을 가치 있다고 믿고 있는지, 그 믿음이 어떤 위계와 배제를 낳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고 보인다.

저자는 "창조하는 능력은 중요하지만, 창의성이라는 개념은 자본주의 외부에서 존재하지 않았으니, 혁명적 힘의 원천이라는 생각은 내려놓는 것이 타당할 것"(p328) 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곧 창의성이라는 말 자체를 무력화하자는 뜻이라기 보다는, 그 개념을 둘러싼 신화를 걷어내고, 다시 정립하자는 제안이라고 읽힌다.

돌봄 노동이 ‘창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저평가받고, 반복과 유지의 일이 ‘혁신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게 되는 현실의 우려는 우리가 창의성이라는 개념을 대면할 때의 생각을 다시금 하게 만드는 것 같다.

창의성은 발명의 능력이 아니라, 보살핌과 책임의 감각일 수도 있다.

그럴 때, 창의성은 다시 ‘살아있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좀 낭만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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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마음 - 도시는 어떻게 시민을 환대할 수 있는가
김승수 지음 / 다산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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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전주라는 도시에 가본 적이 있을까?

일 때문에 주변 완주, 봉동읍까지는 다녀봤지만 사실 전주라는 도시 속으로 들어간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같다.

아직 난 우리나라에서 안가본 곳이 너무나도 많다는 이야기다. ㅡ.ㅡ

저자는 2014년부터 8년 간 전주 시장을 지낸 정치인이자 도시 혁신가라고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본다.

저자는 정치인과 도시혁신가라는 둘 중에서 어느 쪽을 자신의 본캐로 생각할까?

책은 저자가 전주 시장으로 취임해서 전주라는 도시를 정의하고, 그에 맞춰 도시의 한 부분을 바꾸어나간 과정과 결과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책의 도시, 전주

책이 삶이 되는 책의 도시, 전주

p336

언젠가 읽었던 유현준 교수의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이 떠올랐다.

그때는 유현준 교수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잘모르면서 저자가 말하던 "거리 (골목)"에 눈이 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무엇'은 결국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 관계, 사회적 상호작용, 문화적 맥락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고, 도시의 생명력은 이런 비가시적인 것들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관계가 생기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욕망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과거와 연결된 공간을 존중해야 한다."

"도시는 ‘시간의 구조’도 고려해야 한다."

"건축가와 정책 입안자가 사람의 ‘생활’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더불어 건축과 도시 공간은 기능이 아니라, 관계와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이 그 책이 주는 메세지였다는 생각이다.

이번 책 <도시의 마음>은 저자가 유현준 교수의 생각을 현실에 그대로 실현시켜 놓은 과정이 아닌지 싶을 정도로 닮았다.

도시의 가치는 시민들의 평범한 삶을 지키는 데 있습니다. 평범한 삶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균열 없는 일상이 응축되어 평범해지고, 그렇게 삶의 균형이 내재화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다움'입니다. (...)

도시의 기본은 평범한 삶을 비범한 삶으로 도약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상을 지켜서 평범에 이르게 하는 도시가 좋은 도시입니다.

p29-30

저자가 말하는 도시의 가치가 이러한데 현실의 도시는 '시민은 없고 고객만 남은' 휴먼 스케일의 도시에서 자본 스케일의 도시로 향해 가고 있다.

저자는 주장한다.

자본사회가 잉태한 경쟁과 승자 독식의 세계에서 이와 같은 것들을 중재하고 완화하며 어울어지도록 할 수 있는 도시 내 '공공장소'가 필요해졌다고 말이다.

그 '공공장소'를 만들어가는 일이 그의 앞에 주어졌다는 말이다.

도시는 '사람을 담는 그릇'이니, 사람이 사용할 그릇, 사람이 살아갈 도시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는 사람들의 힘이 모여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방향의 설정이 필요하고, 이 방향의 좌표가 되어주는 것이 관점과 안목이며,

관점은 연대와 변화를, 안목은 깊이를 이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관점의 공유는 방향성에 대한, '왜'라는 질문에 대한 인식의 공유가 된다.

저자가 "책의 도시"를 만들어가기 위해 공을 들인 부분이다.

시장으로서의 저자가 생각한 '공공장소'는 도서관이었다.

저자의 재임기간동안 시작되고, 계획되고, 완결된 많은 도서관들을 책을 통해 보여준다.

그 도서관 하나 하나에 저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땀과 고민과 수고가 들어갔고, 그것들을 우리는 책을 통해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전주의 도서관들은 책을 통해 전달받는 것에서 멈추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기분이다.

시간을 내서 그 한 곳 한 곳을 둘러보며 그 마다 마다의 장소가 가진 풍경과 분위기와 느낌을 공유하고 싶어진다.

이렇게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읽고 있으면, 저자가 고민했을 '공공장소'라는 개념의 정의와 역할에 대한 생각은 한발 물러서게 된다.

그래도 공공장소가 적당한 성공을 뛰어넘어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사회적 설득'이라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우리나라는 인구의 많은 숫자가 도시에 몰려산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도시는 도시로서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무언가를 통해 존재의미를 살려야 하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경험적 확장을 이어가야 한다.

이런 도시의 확장은 결국 시민 삶의 확장이 될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거쳐 현재를 살고 미래를 살아갈 것이다.

도시 역시 미래에도 사람들의 삶의 현장으로서 존재하고 이어질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는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필요합니다." (p332) 라는 말을 저자는 인용해서 들려준다.

계속 변화, 발전해나가는 도시에는 어떤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필요할까?

"변화된 공무원 집단"이 그 중 하나라고 저자가 말하는 듯 싶다.

나아가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란 새롭게 태어난 인간이 아니라 자각하는 인간" 이며, "관점과 안목이 내재화된 성실함을 가진 인간"이라고 말하며, "이 새로운 인간이 도시의 안정된 다른 힘" (p336) 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런 새로운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도시는 미래에도 도시가 사람들의 그릇이 되도록 지켜낼 것이고, 관계가 유지되는 그런 공간으로 만들어 갈 것임을 믿는다.

저자가 자랑하는 전주, 책의 도시 전주로 찾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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