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 2 - 제1부 대망 2 인질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이길진 옮김 / 솔출판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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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핍의 사람.


 2권 인질편은 1권보다 훨씬 더 속도가 빠르게 읽힌다. 강한 다이묘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센고쿠 시대에서의 인물인 히로타다는 이마가와 요시모토 세력과 노다 가문의 입김으로 사랑하는 아내인 오다이와 이혼한다. 히로타다와의 사이에서 타케치요를 낳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밖에서 밀려오는 압박과 가문들과의 세력다툼이 한 가정을 갈라놓는다. 한 사람만의 비극이 아닌 개인의 비극 속에서 유독 미카와 오카자키 성주만이 홀로 패배를 안은 슬픔으로 다가온다.


마츠다이라 가문의 적장자에게만 쓰이는 아명인 타케치요는 훗날 이에야스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세력이 약한 성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다섯 살에 이미가와의 인질로 가게된다. 이마가와로 가려는 길목에서 납치되어 오아리의 노다 노부히데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처음 다케치요(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다가는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 원군을 청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지만 히로타다의 마음과 달리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오다이와 강제로 이혼한 그는 마음에 병이 들었다. 히로타다에게도 정실 부인을, 오다이에게도 두번째 남편과 재혼했지만 두 사람 모두 몸과 달리 마음은 서로를 향해있다. 오다이가 마음을 삭히며 승화하는 인물이라면 히로타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자신의 옆에 있는 여자들을 적대하고, 오다이와 닮았다는 이유로 가신의 정혼자를 취하고 잔인하게 버린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독이 되어 마음의 불씨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마음의 형질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모르는 성주 때문에 늙은 가신들은 한숨과 피로를 얻으며 겨우겨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가 마음먹고 안죠성을 탈취하기 위해 나선 길목에서도 그는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토요를 잃은 대신 목숨을 겨우 구명했다. 투구를 바꿔 쓴 덕분에 살았지만 병이 더 깊어졌고, 마음의 병까지도 더 깊어졌다. 그와 반대로 오다이는 인질이 된 아들과 닿기 위해 힘을 쓰게 되고, 오다 노부나가를 만나 아들이 죽을 뻔한 위기를 구해낸다. 그 이야기를 들은 히로타다는 더 격하게 오다이를 미워하게 되고 급기야 죽이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만든다.


각각의 위치에서 가신들은 똘똘 뭉쳐가며 마츠다이라 가문을 지켜나가지만 가장 우두머리인 성주는 바람에 불듯 갈피를 못 잡아나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성주이지만 자신의 마음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용맹했던 아버지와 달리 약했던 그는 아버지와도 비교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가신들의 마음 속에 유일한 희망으로 다가오는 타케치요를 바라보며 그는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버지이기에 겨우 몇 줄의 이야기라도 남길 수 있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하다. 용렬한 사람으로 인식되다니. 바람에 흔들리는 성주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그의 측근인 하츠야가 찌른 칼날에 숨을 거둔 후의 이야기는 훨씬 더 가파르게오카자키 성의 최후를 말해준다. 용맹한 장수도 지략이 좋은 성주는 아니었지만 시대의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히로타다의 모습에 자꾸 시선이 갔다. 그릇이 맞지 않은 자리에 앉아 어린 나이에도 꿋꿋하게 서 있을 수 밖에 없는 자리의 흔적은 여러 사람에게도 생채기를 냈지만 결국 그들 모두 자신의 염원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2권에서 가장 눈에 띈 인물로는 마츠다이라 히로타다와 가신인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토요, 이미가와가로 가기 위해 동행한 가신 카네다 요소자에몬이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힘은 약하지만 가신들의 끈끈함으로 오카자키 성을 지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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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깊이는 무슨 일에건 언제나 정면으로 대결하여 회피하지 않는 데서 생겨나는 것. 그런데도 중신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 p.41


빼앗은 것은 빼앗기는 것이 도리요. 그런데도 빼앗을 때의 일은 잊고, 빼앗겼을 때의 분함만 생각하고 있어요. - p.175


인간은 언제나 이해에 쫓기면서도 언제나 그것을 잊고 움직이는 숙명 같은 일면을 지니고 있었다. - p.270


'호방하기가 이를 데가 없는 장수, 형식에서 벗어난, 그러나 정에는 두터운 무인······' 오다이는 마음속으로 두 손을 모았다. 노부타가를 공경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p.282


생각이 단순한 그는 이혼 후 히로타다가 그토록 초조해하는 것이 모두 오다이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미묘한 감정의 움직임까지는 알지 못했다. 부자연스럽게 깨져버린 애정의 굴절은 사모가 되고 증오가 되었으며, 또 질투가 되고 시기가 되어 한없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 p.302


"잘······잘······찔렀다. 나, 난 말이다, 나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산다는 것이 무서웠어."

"뭐?"

"너는 모른다. 산다는 것······ 산다는 것은 말이다······죄업을······천박한······죄업을 되풀이하는 것임을······뒷일을······뒷일을······" - p.305


'그래, 인생이라는 요망한 괴물을 만나보지 못해 그런 수작을 하는거야······' 그런 생각과 함께 갑자기 이 대결이 무의미해졌다. 지금 이긴다고 한들 도대체 어떻다는 말인가? 삶이 꿈일까? 죽음이 현실일까?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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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1 - 제1부 대망 1 출생의 비밀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이길진 옮김 / 솔출판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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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시작점.


 11년이 넘어서야 다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집어 들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를 줄이야. 32권의 책 중 1부에 해당하는 9권만 읽고 버려두었다. 정확히는 오다 노부나가가 등장하고 혼노사의 변으로 지는 과정의 이야기였다. 당시만 해도 주인공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멋있는 모습을 기대했나보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혼란한 시기에 강한 세력에 밀려 풍파에 휘말리는 이에야스의 모습에 실망하고, 오다 노부다가의 독특하고 선명하게 길을 내는 모습이 훨씬 더 좋아보였다. 확실한 캐릭터가 살아있는 모습이었다. 좋은 캐릭터가 사라지고 보니 책을 읽을 흥미가 사라져버려 오랜시간 책을 방치해 두었다. 읽어야지 하면서도 언젠가 읽겠지 하며 두었더니 시간이 강산을 훌쩍 넘어버렸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1권을 집어들었다. 


오래 전에 읽었어도 1권의 이야기만큼은 기억한다고 했었는데 다시 읽으니 다른 인물이 두드러져 보인다. 바람에 등불이 일렁이는 것처럼 히로타다와 오다이의 사랑이 애처롭고 애절해 보였는데 다시 읽으니 그들을 둘러싼 마츠다이라 가문과 미즈노 가문의 웃지못할 사연이 얽키설키 꼬여있다. 시작은 오카자기의 성주인 히로타다의 아버지 키요야스가 미카와 카리야의 성주인 미즈노 타다마스에게 자신의 부분인 케요인을 자신의 첩으로 데려가겠다는 이유에서 시작된다. 사랑하는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였던 케요인을 후처로 들이고 나서부터 그들의 실타래는 꼬여 버렸고 타다마사는 이내 자신의 딸과 케요인 사이에서 낳은 막내딸인 오다이를 다시 히로타다에게 시집보낸다.


그동안 묵힌 원한의 세월을 잊고 화합하자는 의미로. 가문과 가문의 성장은 혼란을 틈타 자신들의 살길을 강구하는 하나의 언약이었다. 막부시대가 힘을 잃어가고 다이묘들이 서로 자웅을 다투며 힘겨루기를 하던 시대였다. 누가 살아나고 남는가를 알 수 없는 시기였고, 한쪽이 강했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 다시 힘의 세기는 넘어가 약해져 있는 시기였다. 두 가문이 결혼을 하려고 해도 쉽게 서로의 영토를 넘어가는 것조차 지략이 필요한 시기였다. 오다이의 결혼이 그러했고, 아버지의 후처로 온 케요인과 미즈노가문과의 이야기를 잘 알지 못했던 히로타다의 반감은 오다이가 오기 전부터 살벌하게 진행된다.


각각의 인물이 등장하고 서로 맞물리는 인물들이 갖는 모습들이 하나의 그릇으로 보여진다. 누군가 앞날을 내다보는 현명한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성급한 처사에 일을 그르치게 한다. 1권에서 대표적인 인물로는 오다이의 오빠 노부모토다. 자신의 성질을 어쩌지 못하고 급하게 잔인하게 처리해나가는 수법이 오다이의 삶을 휘청이게 만들 것 같은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동생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랑했던 한 여자의 인생 또한 자신의 동생과 함께 해치워버린다.


이마가와 가문과 오다 가문의 힘겨루기가 마츠다이라 가문과 미즈노 가문에게도 화가 미친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 가문과 결합이 되어 있고 미즈노 가문은 이내 오다 가문과 결탁해있다. 그들 사이의 실리와 힘겨루기는 나약한 히로타다에게는 힘겨웠다. 자신의 아버지와 달리 가신들에게도 끌려다닌다. 열일곱의 어린 성주에게 더없이 나약한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지만 다행히고 가신들의 합이 잘 맞아떨어지는 반면 미즈노 가문은 타다마사가 죽은 이후 그의 아들인 노부모토는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자신의 가문의 성격을 바꾼다. 살아남기위해 벌이는 경쟁이 결국 어느 쪽으로 화살이 갈 것인가는 알 수 없지만 시대의 극한은 남자 여자 할 것없이 비정하게 흐르는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었고,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극한으로 맞닿게 된다.


이전에는 히로타다와 오다이가 선명하게 보였다면, 지금은 오다이의 엄마이자 시어머니인 케요인이 더 눈에 들어온다. 지혜와 지력이 돋보인 케요인과 성급의 아이콘 노부모토의 이야기는 2권에서 어떤 활약을 펼칠지 궁금하다. 주인공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이기 때문에 그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로 시작되었을 뿐이지만 위로 올라간다면 히로타다의 아버지와 오다이의 아버지와 엄마의 이야기도 두 사람의 이야기 못지 않게 다양한 색깔로 메워져 있었을 것이다. 그 시기의 사람들은 어쨋든 누군가 살아남았듯 한 시대가 저물고 한 인물이 잉태되었다.

가문과 가문과의 힘겨루기가 재밌게 느껴지면서도 여전히 다양한 이름들에 섞인 관직명이 적힌 이름에 적응 중이다. 책을 읽으면서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를 제대로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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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간다는 것이, 언제부터인지 '인질'의 뜻을 지니게 되었다. 난세는 사랑을 짓밟고, 여자들은 이미 자유로운 감정의 발로를 가엾게도 봉쇄당하고 있었다. - p.46


"사람의 마음속에는 부처님과 악귀가 함께 살고 있어. 악귀뿐인 사람도 없고 부처님뿐인 사람도 없는 게야. 알겠느냐? 상대의 마음속에 있는 악귀와 사귀어서는 안된다. 그러면 너도 악귀가 될 수밖에 없는게 이치니까." - p.85


시대의 기형畸形은 그대로 인간을 기형으로 만든다. 이미 육친의 살상 따위는 도리에 어긋난다고 보지 않는 난세였다. - p.142


그릇이 큰 장수는 결코 그 부하를 죽음의 땅에 몰아넣지 않는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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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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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모티프


 양 어깨에 가볍지 않은 생각들을 짊어지다보니 간헐적으로 두통이 찾아온다. 오랜만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었다. 읽다가 나도 모르게 아, 내가 이런 여유로움을 그리워했구나 싶다. 빡빡한 일상 속에서 뾰족뾰족한 마음이 일어 때때로 나를 괴롭히기도 하고, 때때로 누군가에게 마음이 상해 있었다. 좋아하는 것들을 뒤로하고 새로운 것을 접하는 것은 눈길을 걷는 것 마냥 새롭기도 하거니와 더 많은 수고로움을 몸에 인다. 그런 시간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갭을 두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 영감을 얻어 하나의 글이 되고, 작품이 되는 한 노 작가의 모티프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날렵하게 휘두른 글이 아니라 이미 숙련된 어느 장인이 손쉽게 칼을 휘두르며 가벼이 썰어대는 것처럼 무라카미가 그동안 모아온 티셔츠에 관한 글들이 다양한 주제로 묶여 있는 책이다. 같은 주제이지만 다양한 그림과 색채가 묻어나는 디자인을 통해 작가는 그것을 어떻게 모아왔고,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맛깔스럽게 그려져 있다. 때때로 탐나는 티셔츠도 있었지만 이런 티셔츠도 모으다니 하는 그런 티셔츠도 있었다. 수백장의 티셔츠들을 모으면서도 허투루 쓰지 않는 작가의 소소한 이야기에 웃음이 났다. 아무런 의미없는 글귀라도 그것에 천착하여 입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도 버리지 못한 그의 소소함과 새것이 아닌 중고시장에서 여러장의 득템이야기들도 재미나게 읽힌다.


정말 각가지의 주제가 즐비하면서도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그의 이야기가 마치 펍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 같이 느껴졌다. 한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매력이 뭘까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도무지 나와 맞지 않는 색깔을 가진 소설가구나 싶을 때도 있었고, 그가 내민 작품 속에 흘러들어지 못하는 시간도 있었다. 지금도 다 알고 있지는 않지만 더 알고 싶은 작가로 매김하게 되었는데 특유의 나른함과 소소한 것들을 지나치지 않는 섬세함이 그의 글 곳에 묻어난다.


책 속의 이야기 중에서 위스키에 대한 이야기와 마지막 말미에 붙은 그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독특하지만 젊잖은 그의 이야기가 이렇게 웃기다니. 혼자 이불 속에서 누워 한참을 깔깔 거렸다. 한 개 두개 물건을 모았을 때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다가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때의 묵직함을 하루키는 각각 선별하여 이렇게 글 속에 담아두니 마치 티셔츠 사진첩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 나중에 그 옷을 가지고 있지 못하더라도 활자속에, 그림 속에 차곡차곡 모아두는 컬렉터의 삶이라니.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가볍게 옷차림을 할 때 입는 티셔츠가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모티프라니. 역시 글감은 늘 생활 속에 있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냐에 따라 입지 않고도 입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이런 명랑하고도 쾌활한 그의 라이프를 한층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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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그럼 무얼 부르지 - 오늘의 작가 총서 34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4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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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요즘은 명확함 보다는 모호하게 흐릿한 선을 따라 가는 것 같다. 정확하게 예측을 할 수도 없고, 하더라도 그것이 수학공식 마냥 딱 떨어지지 않는다. 질병과 재해가 얼마나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 실감하고 있는 요즘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듯 텅 빈 세계를 그린 작가가 있다. 박솔뫼 작가는 이전에 <도시의 시간>을 통해 처음 그의 작품을 접했다. 장편의 호흡을 통해 그가 그린 회색빛의 세계를 관통하며 무감하고 차가운 색감을 많이 나타낸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럼 무얼 부르지> 역시 같은 색깔을 띄고 있다.


누군가는 눈이 안 좋으면 안경을 써서 명확하게 바라보려 하지만, 누군가는 안경을 쓰지 않고 세상을 흐릿하게 본다고 한다. 많은 것들을 명확하게 보는 것이 너무나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라고. 때때로 나 역시도 많은 것들을 선명하게 보려 노력하지만 한 편으로는 흐릿한 세계가 더 편할 때가 있다. 박솔뫼 작가가 그린 인물들은 그 어떤 액션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삶에서 수긍하며 살고 있다.


2014년에 출간된 이 단편집은 총 7편의 작품을 엮어 만든 책이다. 이전 보다 훨씬 더 멋집 옷을 입고 나온 이 책은 단편이 주는 색다름을 많이 가지고 있다. 단편의 매력은 뭐니뭐니 해도 지금껏 장편에서 느껴보지 못한 실험적인 소설이나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로 하여금 독자에게 짜릿함을 안겨준다. 박솔뫼 작가의 단편역시 단편의 장점과 더불어 실패한 세계에 대한 사랑과 더해지지 않는 현실의 이야기를 과감없이 그려낸다. 마치 수학공식을 그려내듯 증명을 해 보이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순간순간 장막을 들춰보이듯 보이지 않는 이면 속 이야기가 등장한다.


마치 안경을 벗고 흐릿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그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파도에 밀려나가듯 그렇게 이야기를 타고 흘러간다. 그리고 생각한다. 박솔뫼 작가가 그리는 의미를 찾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겠구나 하고 말이다. 인물의 성격이나 그리고 있는 배경의 면면 까지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어딘가로 관통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제자리에 서서 그저 상상만을 하며 멈춰있는 것 같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얼음 같은 삶이 책 속에 숨어 있다.


요즘 같이 모호하고 모호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맞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명확한 이야기를 좋아함에도 어딘지 모르고 관통하는 이야기처럼 우리의 삶 역시 이와 같이 명확히 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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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는 모든 게 같다고 생각해. 시간은 천천히 흐르지만 하는 일은 없다. 다른 사람들은 시간이 빠르다고 해. 그리고 그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한다. 언젠가부터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나는 내 시작이 그랬던 것 같다. 시간이 빨리 흐른 적이 없었다. 늘 하루가 길기만 하다. 태어날때부터 지루하고 이미 늙은 사람 같다. 나는 할아버지가 손녀를 보는 것처럼 누나를 보았다. 누나는 사과 같고 오렌지 같고 사슴 같고 토끼 같다. 누나는 내가 보는 것을 평생 보지 못할 것이다. 사장은, 사장도 같아. 이것으로 우리 셋은 똑같다. 우리는 누군가의 삼각형이 되지 못하지만 우리 셋은 같다. 이것으로 우리 셋은 똑같다. -p. 33


해만에서 우리는 문을 열고 인사를 하고 그러다 말이없고 흔들흔들거리고 떠나고 돌아가고 그리고 생각한다. 그처럼 해만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천천히 모든 것이 멀어지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나요? 사라진 곳에 대고 묻는다. 결국 텅 비어 버린 자신이 강렬해질 뿡이지. 아, 정말 그렇지? 질문들도 빠져나간 텅 빈 곳에 대고 대답했다. 아, 그렇네 하고.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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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지나가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3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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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의 공간 속에서


 올해의 봄은 마스크로 시작해서 끝이나지 않았고, 여름은 기나긴 장마와 함께 여름을 지나가고 있다. 시작점은 있으나 끝이 보이지 않고, 계속 무게감에 피로감이 더해간다. 최악의 나날이다 싶을만큼 중간이 없는 시간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뉴스를 보면 새로운 질병 뿐 아니라 기상이변으로 재난이 발생하고, 우리의 삶의 터전이 비로 인해 무너지거나 씻겨 나간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한 사건이 나비효과가 되어 한 사람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안정적으로 탄탄하게 기틀을 쌓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평온한 일상이 어느 순간 무너져 내린다.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의 누수는 내내 삶의 생채기가 되어 버린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후회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미련의 감정이 남는 것처럼.


요즘처럼 일상이 공간이 거리를 두는 시간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생활의 반경이 좁아졌다. 아마도 많은 상흔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삶은 또다른 형태로 변하게 될 것이지만. 상황에 맞는 선택들이 이전의 자유로움 보다는 제한적인 선택지로 한해 행동반경이 좁아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우리의 시간의 빛과 어둠의 공간을 제한하는 것처럼 조해진 작가의 <여름을 지나가다> 또한 빛과 어둠의 공간 속에서 인물들이 떠돌고 있었다.


민은 탄탄하게 회사생활을 하며 종우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지만 연인인 종우의 선택들이 결국 그들이 함께 할 모든 것들을 끊어냈다. 민은 일을 그만두고 공인중개사 일을 하며 사람들이 살아갈 집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에게 집을 소개하면서 짧은 시간이나마 그들이 살았던 집을 돌아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그 중 폐업한 가구점에서 머물며 자신의 시간을 위로 받고 있었다. 민이 빠져 나간 그곳에 수호는 가구점에 들른다. 아버지의 공간이었던 그곳에 머물며 지나간 시간들을 떠올린다. 가구점을 운영했던 아버지의 폐업은 곧 가족에게 들이닥칠 큰 위험이었고, 그는 이내 빛더미에 오르내리며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힘을 내어 일을 해봐도 계속해서 도돌이표가 되어버리는 현실에 좌절을 겪게 되고, 그는 아버지의 가구점에 들어가 힘겨운 삶의 무게에 가구점을 방문하게 된다. 잠시 잠깐이지만 누군가의 손길이 위로가 되는 삶. 각박한 현실 속에서 개인의 슬픔과 아픔이 누군가에게 다시 잊혀지고, 다듬어지면서 다시 삶의 정렬을 해나가는 순간이 아닌가 싶다.


잠시 잠깐 머물면서 만나게 되는 개개인의 이야기들. 그 속에서 이어지는 사람들과의 인연들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개인의 선택이 아닌 누군가의 삶이 더해질 때 순간적으로 삐그덕대는 순간의 나락과 그로 인한 고독함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잠시 잠깐이지만 누군가의 삶을 따라 가면서 위안을 받은 민의 모습에 어쩌면 우리는 사람들과 부딪히며 때때로 환멸을 느끼면서도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잊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 같다.  


2015년에 문예중앙에서 한 차례 출간되었던 작품이었던 <여름을 지나가다>는 오늘의 작가 총서를 통해 새옷을 입고 나왔다. 전혀 접해보지 않았던 작가의 작품이라 더 좋았고, 여름의 습하고 후덥지근한 뭉근함을 잘 나타내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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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일정 기간 살다가 미련없이 죽고 그 죽음에서 빠져나온 뒤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다시 태어나는, 그러니까 일생이란 개념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태어남과 죽음의 끊임없는 반복. 그런 식의 삶은 기차 같은 거라고 민은 생각했다. 수많은 칸들이 연결된 기차처럼 각기 다른 생애들이 길게 이어져 전체 삶을 완성하는 것이다. - p.9


삶이란 결국, 집과 집을 떠도는 과정이 아닐까. - p.44


삶에도 누수의 흔적은 남기 마련이고, 그 흔적은 좀처럼 복원되지 않는다. 아니, 절대로 복원될 수 없는 흔적도 있다. - p.135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은 노인이 되는 동안 결핍은 보완되고 상처는 치유되는 것, 혹은 삶이란 둥근 테두리 안에서 부드럽게 합쳐지고 공평하게 섞이는 것이므로 아른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는 것, 그런 환상이 가능할까.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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