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이야기 창비세계문학 5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석영중 옮김 / 창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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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체홉은 못 잃지.


 나의 또다른 적은 내 안에 앉아 있다. - p.27


 2022년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러시아의 푸틴의 의해 영토는 파괴 되었고, 많은 사상자들이 나왔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나와 피난을 가는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들이 연일 뉴스를 통해 터져 나왔다. 전쟁은 어떤 명분에 의해 이뤄진다. 대의명분이야 말로 전쟁의 한 일면에 불과하지만 현재 나라 밖에 들리는 소식이 슬프고 안타깝다 보니 자연스레 러시아 문학과 멀어졌다. 예전에도 러시아 문학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그들의 이름 때문에 읽기가 수월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안톤 체홉의 단편소설은 좋아서 늘, 소설 뿐만 아니라 그의 원작으로 된 작품들을 관람했다.


많은 단편들이 작가의 스펙트럼을 넓혀주는 하나의 단초이자 앞으로 장편으로 쓰여질 하나의 물감으로 쓰여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많은 작가들의 작품은 그들의 다양성을 알아보고 싶어 맛본 이야기라면 안톤 체호프의 단편은 인간에 대한 시니컬함과 냉정한 삶의 철학들이 곳곳에 베어져 있다. 마치 정돈되어 있는 서재에서 무게감 있게 짓누르고 있는 문진처럼 그의 글은 단단하면서도 간결하다. 오래 전 안톤 체호프의 <사랑의 관하여>를 통해 표제작인 '지루한 이야기'를 제외하고 '검은 옷의 수도사'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읽었다. 그는 이 이야기를 '지루한 이야기'라고 칭하며 어느 노인의 수기라는 부제를 달아 두었지만 으레 그렇듯이 그의 글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순간 제목 때문에 정말 지루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아 겁먹었지만 글을 쓴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안톤 체호프다. 그 누구도 아닌 그가 쓴 글이 지루하기란 쉽지 않는 것처럼 3편의 단편 중 2편의 단편은 이미 읽었지만 그 한 편의 이야기가 충만하다. 노인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애잔하면서도 겨울의 낙엽마냥 생의 촌음이 얼마 남지 않는 한 노인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그가 갖고 있는 것들. 보는 것, 느끼는 것들이 마냥 기쁘지 않고 바쁘게, 날카롭게 돌아간다.


젊었을 때의 행복을 어느새 저물고 그에게 남은 것은 속물스러운 아내와 딸, 자신이 아직까지 보살펴야 할 아들만이 그에게 짐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그에게는 오직 돈. 돈에 대해 관련된 것 뿐이다. 왜 아직도 나는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왜 그들은 나를 이렇게 실망시키는가에 대한 노인의 푸념과 고독함이 그를 사로 잡는다. 어디서 많이 들어봄직한 이야기지만 이야기꾼 안톤 체홉이 쓴 노인의 이야기는 정말 지루하지 않았다. 매혹적이지만 정말 인간의 희노애락의 끝이 결국은 슬픈 정점을 찍으며 살아가는 존재로서 보여지는 무게감이 계속해서 보여준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슬프지만 그래서 더 매혹적인 모습으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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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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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유산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늘 평타 이상의 재미가 있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재미와 감동에 반해 그의 작품을 전작하려고 했으나 한 해에도 몇 권씩 쏟아지는 방대한 양에 손을 들었다. 이제는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그의 작품을 즐기면서 한 권씩 읽고 있다. 많은 양에 숨가빠하지 않으면서. 그의 책은 늘 추리소설의 면모를 띄고 있지만 다양한 주제와 맛깔스러운 필치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선사한다. 어떤 책을 읽어도 늘, 재미를 추구할 수 있는 그의 글쓰기 실력이 놀라울 수 밖에. <몽화화>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다 싶을 정도로 페이지가 쑥쑥 넘어간다.


<몽환화>는 '노란 나팔꽃'을 주제로 한 이야기다. 중학교 때 등교하던 길목마다 피던 꽃이 나팔꽃이었다. 아침마다 청초하게 핀 나팔꽃을 볼 때마다 어찌 기분이 좋던지. 해가지면 잎이 다물어지고, 아침이면 나팔처럼 환하게 피던 나팔꽃의 색깔이 '노란'색이 있었나 잠시 기억을 더듬어본다. 많은 꽃들이 다양한 색을 갖고 있음에도 노란색 나팔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책의 시작은 누군가의 평온한 일상에 한 남자가 몰고온 날카로운 칼끝으로 시작된다. 피바람이 불러온 야차같은 그들의 시간을 뒤로하고 한 가정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들려온다. 가모 가(家)의 이야기는 신지와 시마코의 둘째 아들인 소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버지와 형을 어려워하고 매번 가족들의 연례행사로 나팔꽃 시장을 둘러본다. 그들이 관심갖고 있는 것에 관심이 없는 소타는 마침 발을 다쳐 한 곳에 있다가 한 여자아이를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자신의 또래인 한 아이를 만나게 되고 연락을 나누면서 관심을 갖게 되지만 아버지 신지가 이메일을 발견하면서 그 아이와 연락을 끊기에 된다.


시간이 지나 수영선수로 이름을 알렸던 리노가 사촌인 나오토의 자살로 가족들과 함께 되고 퇴직 후 식물을 키우는 슈지 할아버지를 돕게 된다. 사진을 찍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서 할아버지를 돕던 와중 슈지가 돌연 누군가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경찰에 연락해 범인을 쫓고 있지만 가져간 것은 없고 며칠 후 노란 나팔꽃이 심어진 화분 하나만 없어진 상황이다. 손녀딸인 리노는 할아버지를 범인을 찾기 위해 신경을 쓰던 와중 블로그를 본 요스케를 만나게 된다. 소속을 밝히지 않고 만났던 요스케의 만남을 통해 후에 요스케의 이복동생인 소타와 만난다.


탐문수사 중인 형사 가운데 슈지의 도움을 받은 하야세의 아들 유타는 아버지에게 꼭 범인을 잡아 달라고 한다. 불륜을 저질러 이혼을 한 이후 혼자 살고 있는 하야세는 아들에게 속죄를 하는 기분으로 슈지를 죽인 범을 쫓기 시작한다. 각각의 방향에서 갖은 사연으로 슈지를 죽인 범인을 찾는다. 갈길을 잘 가고 있다가 어느 순간 길을 헤메고 있는 리노와 오사카에서 원자력 전공을 했지만 더이상 미래가 창창하지 않는 소타와의 만남은 보이지 않던 사건의 진실 속에 한걸음 더 나아간다.


각각의 상황도 그들의 직업도 겉돌았던 퍼즐이 어느 순간 맞닿아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진다. 그 부분이 가장 짜릿하면서도 쉽게 퍼즐이 맞춰졌다. 사람에게 해가 되는 잘 지키지 못한 결과로 빚어진 사건을 계기로 전해 내려온 빛의 유산. 노란꽃을 쫓지마라는 이야기 속에서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신비하고도 몽환적인 꽃이 실제 등장한다. 그것이 또 하나의 사람을 살해하는 동기가 되었지만 집안대대로 살피며 '황소개구리'처럼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꽃을 저지하려는 한 가문의 이야기를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들이 갖는 질곡의 시간 속에서 뼈저리게 겪은 트라우마의 이야기가 환상의 꽃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곁가지들이 많고, 결말이 허무하게 밝혀진다. 잡은 범인이 내가 생각한 이와 달랐다. 한 껏 시동을 걸며 달려갈 일만 남았는데 푸시시 바람이 빠지는 결말이랄까. 그럼에도 드러난 진실을 받아들이고 이어나가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빛났던 작품이었다. 명확한 색을 띄고 있던 이들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던 이들은 다시 앞을 내다보며 걷는 발걸음이 활기차 보였다. 어떤 그림자를 품고 다시 뛰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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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캉티뉴쓰 호텔
리보칭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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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용의자!

 

 천혜의 요새와도 같은 그랜드 캉티뉴스 호텔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5성급 호텔답게 최신식 시설과 캉티호를 내다 볼 수 있는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캉티호를 둘러싼 산책로에서 그 곳의 수장인 바이웨이더가 총을 맞고 숨진채 발견되었다.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큰 호텔의 규모답게 오가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들이 즐비한 가운데 살인사건을 조사하러 온 낯선 사람들이 그랜드 캉티뉴쓰 호텔로 발걸음을 옮겨온다. 죽은 이는 한 명. 그러나 등장하는 인물은 각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인물이 바이웨이더의 장면 속에 등장한다. 수 많은 장면과 관계 속에서 누가 과연 마지막으로 바이웨이더를 만났을까.

한 공간 안에서 서로의 머릿속을 훔쳐보듯 밀당을 벌이는 밀실추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기존의 밀실추리가 돋보기를 들여다 보듯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매력을 가졌다면 리보칭이 쓰는 이야기는 브레이크 없는 엑셀만 밟을 수 있는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것 같았다. 각 장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통해 당시에 일어난 사건을 재현한다. 단순한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거미줄 같이 얽힌 이야기들이 마구 쏟아진다.

웨이바이더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 샤이엔의 장녀 위빙과 화원야의 장남 웨이즈 군의 약혼식이 열렸다. 웨이즈의 약혼식을 축하해주러 온 푸얼타이 교수를 시작으로 뤄밍싱 경관, 거레이 변호사, 인텔 선생의 삶의 이야기들이 그들의 시선으로 시공간을 뛰어넘어 그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마치 옴니버스 식으로 그려진 이야기들이 아무 이야기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마지막에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들이 어찌나 찰떡같은지.

누구지? 누구지? 하며 그들을 손가락을 짚을 때마다 작가는 마치 '이 사람은 아니야'라고 뒤통수를 치는 것처럼 내다보지 못한 다른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범인을 찾았다고 안심하는 순간 또다른 문제에 봉착한다. 그것이 리보칭의 <그랜드 캉티뉴스 호텔>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라니. 천혜의 공간을 갖고 있지만 이전에 살던 이들이 어떤 이유로 모두 죽게되고, 그곳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갖는 원한과 누군가의 사랑과 욕망으로 인한 손길이 모두 그랜드 캉티뉴스 호텔에 가득 모여 있었다. 경관이나 검사를 넘나드는 추리력으로 초반 푸어타이 교수가 유머로 큰 재미를 주었다면, 거레이의 차분함과 지혜가 돋보였다.

지난 날 누군가의 과오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일들을 시간이 지나 다시금 마주쳤을 때 드러난 진실의 이야기가 매콤쌉쌀하게 느껴졌다. 지난 과오와 현재, 미래의 이야기는 그렇게 네 사람의 이야기로 귀결되었다가 다시 하나의 큰 조각으로 맞추며 끝이 난다. 책을 읽는 내내 타이완 소설이 낯설어 그런지 이름이 매번 헷갈렸다. 그들이 먹는 음식, 차,술, 거리의 이름 조차도. 곡예 운전을 하다가 끝에 다다러서야 선 자동차의 궤적을 따라 처음부터 다시 사건의 퍼즐을 맞추고 싶었다. 다시금 돌이켜보면 그들이 하는 행동, 말투, 지나가는 풍경 조차도 누군가를 손짓하고 말하는 것인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이지가 쉬이 넘어가기도 했지만 넘어가는 페이지 만큼이나 세밀하게 인물들을 들여다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아쉬움이 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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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하루아침에 변화시키는 방법은 세상에 없어. 천천히 설득해야 해. 그 과정이 무척 고통스럽고 실망스러울 거야. 예수님은 일생 동안 제자를 일흔 두 명밖에 얻지 못했어. 그나마도 그중 한 명은 예수님을 팔아넘겼지······. 자넨 똑똑하고 유능해.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세상에 있지도 않은 성니콜라스 십자가를 찾는 것과 같아. 정말로 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자네에게 필요한 건 뜨거운 피와 땀이라네.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자네 것 말이야." - p.326

모든 행동에는 동기가 있고, 모든 동기는 그 사람이 처한 환경과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모든 행동에는 결과도 있다. 성인이라면 그 행동의 결과에 책임져야 마땅하지 않은가? - p.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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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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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어 더 아름다운 이야기


우리가 서로를 열면

너는 너를 내게 그리고 나를 네게.

우리가 깊이 빠져들면

너는 내 안으로 그리고 나는 네 안으로.

우리가 사라지면

너는 내 안으로 그리고 나는 네 안으로.

 

 

그러면

나는 나

그리고 너는 너.

- 『책 읽어주는 남자』 중에서


 꽤 오랫동안 책 한 권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읽더라도 앞 부분만 읽거나, 부분부분 읽거나, 읽고 싶은 부분만 읽었던 것 같다. 좀처럼 집중 하기가 어려웠달까. 주변에서는 생각이 많아서 그렇다는 진단도 내렸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안드레 애치먼의 <하버드 스퀘어>가 참 잘 읽혔다. 작품 속에 나오는 '나'는 작가의 자전소설이자 그 시절의 방황과 혼재된 어려움을 '나'와 칼라지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잘 그려낸다. 1977년의 케임브리지에서 두 사람은 한 곳에 머물렀지만 거울처럼 같은 처지는 아니었다. 한 사람은 아랍인이인 동시에 택시 운전사였고, 한 사람은 유대인이자 하버드 대학원생이었다. 처지는 같을 수 없지만 시스템 안에 겉돌던 두 사람이 카페 '알제'에서 우정을 쌓는다. 그이는 '나'와 다른 사람이었고, 다다다다다 하며 확신에 찬 말을 뱉는 그를 좋아한다.


타지에 온 사람들만이 갖는 고향에 대한 향수병과 같은 삶이, 가난과 자신들 앞에 닥친 차가운 눈길과 관계가 힘겹게 다가온다. 소소한 행복이라고는 싸구려 커피와 술을 나눠마시고, 수영을 하고, 옥상에 올라가 책을 읽는 것이다. 그러다 마음이 동할 때면 여자들과 만나 온기를 나누다가 다시 자기만의 울타리로 돌아가 문을 꽁꽁 잠근다. 들어왔다가 나갔다 하는 썰물처럼 주인공인 '나'는 칼라지와 같은 함께 왈자패처럼 어울리다가 이내 다시 자신이 속한 대학원생으로 돌아가 그만의 시간을 누린다.


같으면서도 아니고,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그의 시선이 자꾸만 칼라지의 체크 택시에 눈을 돌린다. 혹은 그를 찾거나 밀어내거나. 이미 한 남자의 사춘기라고 하기에는 그는 자아가 형성되었으나 미래가 내다 보이지 않는 암흑의 시간 속에서 그는 '칼라지와의 관계'를 조각조각내어 그와 만난다. 호탕아같은 그와 소심하지만 생각이 많았던 한 젊은이와의 관계는 그렇게 봄이 되어 싹이 텄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관계의 끝을 고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을 읽어주는 남자>가 생각났다. 한 때 사랑했지만 함께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 것이 삶의 한 부분이라고 하기에는 주인공인 '나'는 참 매몰차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에는 찌질했고, 그러다 다시 온기가 필요하면 다른 이를 필요로 했다.


그렇게 그는 성장한다. 책은 훗날 그가 아들을 데리고 와 하버드 캠퍼스 투어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 무엇도 남지 않는 시절을 그는 떠올린다. 그가 떠나고, 그도 떠난 시절의 봉함된 그 이야기를. 아들은 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때 만났던 한 사람을 알지 못한다. 머물렀지만 활성화되지 못한 그의 현재의 상태를 '나'는 노란 택시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처럼 그 시절로 나를 환기 시킨다. 부정하다가도 돌고 도는 도돌이표처럼 그를 떠올리는 그의 이야기가 에필로그를 다 읽었음에도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향수와 그리움. 그리고 애증의 시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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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무슨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 한, 케임브리지에 와서 몇 년을 살았음에도 이곳에, 이 행성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걸까. 시스템에 들어 있지 않다. 그 말을 들으니 내가 과연 여기 시스템에 들어 있었던 적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한때 이곳에 속해 있었지만, 이곳이 정말 내 집이었을까? 아니면 이곳에 속해 있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없는데도, 이곳이 내 집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시스템에 들어 있지 않다는 말은 이 두가지 의미를 모두 담고 있었다. -p.20


그날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어느 진영에 속하는지, 로웰 기숙사인지 칼라지 옆인지 잘 모르겠다면, 양쪽에 한 발씩 걸치고 둘 사이를 오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 했다. 나는 집을 가졌지만 이곳에 소속된 적 없는 것처럼, 두 곳 모두에 발을 걸치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느 쪽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 p.245~246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유령을 갖고 있다. 나는 처음으로 칼라지의 유형을 보고 있었다. 그건 그가 고함을 질러 그 유령을 쫒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p.270


우리 각자가 마치 달처럼 수많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지인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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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매미 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7
하무로 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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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의 正道  


 책을 읽다보면 각각의 때가 있나보다. 어느 날은 페이지 한 장도 넘기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고, 또 어떤 날은 그 힘겹던 책이 무던하게 잘 읽힐 때가 있다. 하무로 린의 <저녁매미 일기>는 나에게 그런 소설이다. 읽고 싶어 책을 펼쳤음에도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다가 갑자기 말을 탄듯 훨훨 잘 넘어가는 책이었다. 요즘 다시 전집을 읽고자 펼친 <도쿠가와 이에야스> 덕분인지 일본 소설이 잘 읽힌다.


<저녁매미 일기>는 한 무사의 正道에 관한 이야기다. 주군의 부인을 탐했다는 이유로 슈코쿠는 10년 후에 할복 할 것을 명 받고 무카이야마 촌에 유폐된다. 쇼자부로는 어느 날 집무실에서 일하던 중 쇼자부로의 붓에서 먹물이 튀겨 옆자리에 앉은 신고의 얼굴에 묻어버렸다. 보는 즉시 미안하다고 하면 되었을 일을 그는 신고의 얼굴을 보고 웃어버렸다. 마음이 상한 그는 화를 냈고, 이내 싸움으로 번진다. 두 사람이 싸우던 도중 그의 칼날이 신고에 발을 베어 버려 그는 절뚝 거리게 만들어 버렸다.


 다이묘의 으뜸 가신인 나카네 헤이에몬의 조카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그는 헤이에몬의 명을 받고 무카이야마 촌으로 내려가 슈코쿠를 만난다. 당시 그는 주군 가문의 가보를 작성하고 있었다. 가보 편찬에 열을 올린 6대 번주 가네미치는 자신의 측실과 사통했다는 이유를 가진 슈코쿠에게 10년의 유예기간을 준다. 가보편찬이 중단되지 않기 위해 그에게 가보편찬을 계속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그후 그는 유폐된 곳에서 주군 가문의 가보를 쓰는 일을 계속 하며 시간을 보낸다. 쇼자부로가 헤이에몬 명을 받고 슈코쿠에게 남은 3년동안 그가 도망을 가면 그를 즉시 없애라는 명령과 함께 그가 하는 작업에 대해 자세히 알리라는 명령을 받고 내려간다.


감시자의 역할로 간 그. 쇼자부로가 내려간 시점만 해도 그는 무사로서 칼과 기술을 쓰는 것은 날렵했지만 무사로서 살아가는 마음은 단단하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한 일에 대해서 자신의 목숨을 건지는 것으로 마음을 다하는 사내였다. 무사의 마음이라던가, 자긍심, 신념이 없던 이였다. 그런 그가 이제 3년 밖에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슈코쿠와 함께 살면서 '그날'의 일을 밝혀 그의 목숨을 구명하려고 한다. 그날에 얽힌 주군의 측실이었다가 절에 들어간 오요시도 만난다. 다방면으로 그가 할복을 하지 않도록 힘쓰지만 당사자인 슈코쿠만은 그저 자신이 맡은 소임을 다 할 뿐이다. 그의 가족과 함께 살면서 쇼자부로는 마을 사람들과 얽히게도 된다. 슈코쿠의 아들인 이쿠타로와 그의 친구 겐키치의 이야기가 슈코쿠의 이야기와 함께 하나의 변수로 작용한다.


책은 할복을 앞둔 무사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지만 그 속에는 양파처럼 드러내지 못한 비밀이 숨어 있다. 그일이 공교롭게도 슈코쿠가 관리의 자리에 물러난 '그날'과 맞물려있다. 자신의 가문에 대한 가보를 쓰는 것에 가장 적합한 이를 택한 동시에 한 사람의 의심의 씨앗이 한 무사를 시간의 굴레에 묶어 놓았다. 그는 관리로서 출중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이였다. 농사의 풍년과 흉년에 따라 마을 사람들의 봉기에 대해 다독거릴 뿐 아니라 위험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그만큼 마을 사람들의 이익과 이치를 아는 관리는 많지 않았으며 오는 이로 하여금 마을 사람들을 괴롭힌다. 마치 한 놈만 나와봐 하는 식으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고조되어 슈코쿠의 안전을 위협한다.


곧고 곧는 마음으로는 슈코쿠와 아들의 친우인 켄키치가 그와 같은 결을 함께 한다. 돌을 던지는 자가 있는가 하면 수면을 흐트러뜨리는 역할을 하는 이가 있다. 여름 한 철 살아가는 매미처럼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무겁고 어려운지 아는 동시에 자신에게 유리한 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유리한 패를 자신에게 쓰지 않았다. 무사의 신념으로, 한 가문의 역사를 엮는 이에게는 그런 것이 해가 되므로. 모래시계는 자꾸만 뒤돌려 놓아도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 나가듯 빠져 나간다. 그 사이 그들에게 닥친 또 하나의 사건이 그를 결국 조이고 만다.


밝히고 싶지 않는 비밀이, 한 사람의 의심으로, 또다른 사람의 시기로 그의 삶은 여러 번 장면장면이 바뀐다. 너무나 곧아서 바른 길로만 가면 창창했을 한 사람의 길이 여러사람의 눈길로 그를 헤쳤다. 그럼에도 각오를 한 일에 물러섬이 없었던 그의 일은 탁월하면서도 안타깝게 느껴졌다. 감히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그는 그의 신념으로 지켜나가는 것을. 마을에서 불미스럽게도 한 아이가 죽고 그것을 복수하기 위해 나아간 이가 던질 돌은 또 사람의 욕심과 시기와 먼 훗날의 약속을 기하며 끝을 맺는다. 일본 역사에 대해 깊이 알았더라면 더 의미를 생각하며 <저녁매미 일기>를 읽었을 것 같다. 역사가 갖는 내재적 의미와 무사의 신념, 할복이라는 무사의 철칙과 같은 마음이 느껴지면서도 생경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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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죽는다고 합니다. 오십 년 뒤, 백년 뒤에는 수명이 다하지요. 나는 그 기한이 삼 년 뒤로 정해진 것일 뿐. 하면 남은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가고 싶습니다." - p.27


"어찌하여 저녁매미입니까?"

쇼자부로가 의아해하자, 슈코쿠는 빙긋 웃었다.

"여름이 오면 이 부근에서 저녁매미가 많이 웁니다. 특히 가을기운이 완연해지는 여름이 끝나는 것을 슬퍼하는 울음소리로 들리지요. 나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몸으로 '하루살이'의 뜻을 담아 이름을 지었습니다." - p.30


부모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자식을 지키고 자식의 무사를 빌어준다. 자식은 그런 마음에 힘입어 자라는 것이다. - p.37


"가보를 만든다는 것은 본래 그같은 일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일도, 불리한 일도 모두 기록해 자자손손 전해야 비로소 지침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 p.46


"허나 시대가 바뀌면 원리도 바뀔지 모르는 일. 바로 그러하기에 이처럼 과거의 사적을 기록해두어야 하는 것이야.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후세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말이지." - p.53~54


"준케이인 님은 명군이셨네. 그러한 까닭에 나는 최선을 다해 섬겼지. 의심은 의심하는 마음이 있을 때 생겨나는 법. 변명한들 마음을 바꾸지는 못하네. 마음은 마음으로만 바꿀 수 있는 것이야." - p.135


사람은 마음이 정하는 곳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음이 향하는 곳에 뜻이 있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목숨을 잃는 것도 두렵지 않다. -p.305~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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