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
황인숙 지음 / 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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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반갑고 그리운 그곳 해방촌

 

우연히 읽게 된 산문집에서 나의 어릴 적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동네가 나왔다. 여전히 사랑하는 친구들과 이웃들이 살고 있는 동네 해방촌. 해방촌은 시간이 느리게 가는 동네다. 서울 시내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면서 남산을 자신의 뒷산쯤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곳에서 언덕과 오거리를 뛰어다니며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정일학원의 재수생들은 까마득한 어른이었다가 선배들이 되었고, 내 동기나 후배들로 변하였다가 지금은 사라지고 외국인 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얼마 전, 그 학교 앞 전봇대에 친구의 자동차 번호판이 걸려 있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떨어졌던 모양인데 그것을 친구의 조카가 보고 전화해 주어 찾으러 갔던 일이 생각나 한참을 웃었다.



나와 친구들, 가족과 이웃들이 얽히며 살았던 동네가 또 다른 사람들의 추억과 일상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책을 읽으며 깨닫는다. 저자의 발길이 닿는 곳 구석구석, 나 또한 머물다가 간 자리들이 많다. 공간이 주는 힘은 크다. 책을 읽으며 마치 시·공간을 초월하여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떠나왔지만 지나간 과거의 한때가 남아 추억을 소환하고, 동시에 현재진행형의 시간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동네. 그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작가와 고양이들의 치열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그래서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라 노래했던 시인처럼, ‘남산 길 눈송이 같은 벚꽃 흩뿌리는 사월이 되면하고 노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꽃 피면 어김없이 중간고사기간이 돌아온다는 친구의 푸념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은 두 달 만에 해방촌에 갔다. 그곳을 떠나왔지만 내가 다니는 교회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번지기 전에는 일요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남산을 한 바퀴 돌며 산책을 한 다음 남산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새롭게 생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에 돌아왔다.



 

카페를 한다는 건 1365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집들이를 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한다. 사 람을 환대하는 마음이 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70.p



 

그 시간이 꽤 길었으니 거리를 오가며 저자와 마주쳤을 수도 혹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각자의 오후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해방촌 곳곳에 크고 작은 카페들이 생겨났다. 그 중에는 친구가 살던 집이었던 곳도 있다. 커피를 마시며 여기가 마루였고, 저기가 안방이었는데 하며 또 지난 과거를 떠올렸었다. 공부한다고 모여서 밤새 만화책을 읽고 수다를 떨었던 10대의 여학생들. 부모님들은 이런 우리를 아마 알고도 속아 주었을 것이다. 카페를 한다는 건 집들이를 하듯 사람들을 환대하는 마음이 커야 가능하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그러나 그 시절 나와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제 집 드나들 듯이 찾아오는 철없는 우리들을 잔소리와 함께 맞아 주셨다. 그래서 지금까지 가슴 따뜻해지도록 환대받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감각적으로 체득할 수 있게 되었다. 검은 머리에 젊고 에너지 넘쳤던 우리의 엄마들이 눈에 선하다.



 

비를 맞으며 야옹이를 부르던 그리운 내 친구는 어디로 갔을까

 

이 동네에는 남산이 있어서 그런지 유독 길고양이들이 많다. 누군가 키웠다가 버린 고양이들도 많고, 그 고양이들이 새끼를 낳아서 더 많아지기도 하는 것 같다. 고등학교 때, 비가 많이 내리던 토요일 용산 도서관에 시험공부를 하러 가다가 비를 맞으며 자동차 밑을 들여다보고 있는 같은 반 친구를 만났다. 계속 야옹이를 부르는 친구를 따라 그 밑을 들여다보니 아주 작은 새끼 고양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참치캔을 그 밑으로 넣어주고 계속 지켜보던 친구는 야옹아, 야옹아 하고 연신 불러댔다. 친구의 눈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네 고양이야?”

아니. 집에 데리고 가고 싶은데 엄마한테 혼날 것 같아서 고민 중이야.”

학교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그 친구의 얼굴에 조금 놀랐었다. 그때까지 나는 고양이가 무섭고 징그러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었는데 조그만 생명이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은 내 마음에도 작은 떨림을 일으켰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친구에게 우산을 씌어 주는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때 그 친구는 아직도 그 동네에 살고 있을까.



 

내 삶은 확실히 길고양이들 밥을 주기 전과 후로 갈렸다. 요점만 말하자면,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기 시작한 뒤로 나는 사람들에게 훨씬 착해졌고, 순해졌다. 유독 못난 사람들에게 유독 해코지를 당하는 고양이들을 보호하려는 이념으로 유독 못난 인간한테 참을성은 또 얼마나 많아졌는지……. 2층 세입자는 그런 걸 알 바 없으니 움찔한 것이다. - 146.p



 

책을 읽으며 고양이에 대해 모르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고양이란 동물이 물을 많이 먹어야 하는 것도, 삼색 고양이 수컷이 희귀하다는 이유로 일본에서는 2천만 원이 넘는다는 것, 더불어 비둘기가 젖을 먹이는 새라는 것 까지. 내 주변에 늘 있는 존재들인데 그들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 미안했다. 동물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은 사람과 사회에 대해 염려하고 분노하는 것에 대해서도 확실하다. 약자를 외면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질문을 던져 준다는 것 등 말이다.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을 생명에 대한 측은지심이 들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이 조금은 더 천천히 차가워지는 것 같다.



우리를 지켜줄 영혼의 동네를 잃어버리지 않길

 

해방촌에 살던 시절, 나는 학교, 교회 수련회나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때 남산 타워가 보이기 시작하면 불안한 마음이 평온해졌다. 남산타워가 보인다는 것은 어느 방향에 있든지 걸어서라도 집에 찾아갈 수 있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가끔 살면서 길을 잃거나 헤맬 때 편안하게 길잡이가 되어줄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남산타워는 아니지만, 사회생활에 지치고 마음이 차가워질 때 따뜻했던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이 오래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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슌킨 이야기 쏜살 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박연정 외 옮김 / 민음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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슌킨 이야기를 읽기 전 표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표지의 그림만으로도 일본소설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환상적이면서도 몽환적의 느낌이 드는 것이 소설과 수수께끼를 하는 것 같았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은 처음 접하는 거라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고, 표지를 보며 상상해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무엇보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는 주인공 슌킨과 사스케의 관계, 칠현금과 샤미센 가락에 대한 모든 것이 표지 그림 속에 다 담겨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설을 읽기 전에 보는 것과 다 읽고 나서 다시 표지를 보며 음미하는 기쁨 또한 이 책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표지 그림과 함께 쏜살문고의 장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부담 없는 분량과 무게, 휴대하기 좋은 크기가 더해져 장식품 같은 느낌이 더해진다. 그래서 외출할 때 읽지 않더라도 책을 들고 나가지 않으면 조금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딱 좋다

 

 

이처럼 슌킨은 고집도 세고 제멋대로였지만 다른 고용인들에게는 심술궂게 행동하지 않았다. 유난히 사스케를 대할 때만 그녀의 심술이 심해졌는데 원래 그런 기질이 있는 데다 사스케만이 애써 비위를 맞추려 했기에 그를 가장 편하게 생각해서 그런 극단적인 행동이 나타났던 것이다. 사스케 또한 고달프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였는데, 필시 그녀의 유난스러운 심술을 응석으로 여기며 일종의 은총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29.p

 

 

슌킨과 사스케의 관계는 평범하지 않다. 두 사람은 처음 주인과 하인의 관계에서 시작했지만, 사미센 연주를 통해 예술적 스승과 제자의 연으로 발전했다.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인아씨의 손바닥 같은 존재였던 사스케는 여전히 슌킨에게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을 받지만 그것은 다른 모습의 집착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슌킨이 다른 이들에게는 친절하나 분명한 선을 긋고, 사스케에게는 자신의 부끄럽고 민망한 일까지 모두 맡기는 것을 보며 사랑의 다른 면에 그려진 가혹함과 잔인성을 보게 된다. 그런 슌킨에 대한 사스케의 사랑은 지극하다. 그녀가 자신에게만은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장님이 되기를 선택하는 장면에서 그의 사랑은 절정을 이룬다. 잔혹함 속에서 사랑의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그를 통해 사랑이란 이름으로 품을 수 있는 수많은 감정과 관계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을 말할 때, 대부분 여성 숭배와 육체적인 사랑, 마조히즘이나 사디즘, 예술 지상주의 등을 논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처음 표지를 보았을 때의 느낌과 맞아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이 또한 정형화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랑의 모습이나 인간관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1933, 전 세계가 광란의 전쟁과 폭력 속에 휘말려 가고 있을 때, 암울하고 섬세한 작가의 떨림은 오히려 약한 것 같지만 강인한 여성과 예술에 무조건적인 굴종과 순응의 모습을 그려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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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논란의 상당수는 예의와 윤혼동하는 데서 비롯된 것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예의와 원는 폭력을 줄이기 위한 두 가지 수단이다. 이 두 덕성은 세겹치지 않으며, 맥락과 상황의 문제(예의)를 보편적인(윤리)으로 만들고자 할 때 종종 충돌이 발생한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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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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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를 견디게 해준 모든 이름, 사랑

                    여름의 빌라,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시선으로부터,

 

 

1. 여전히 우리가 기다리고 기대하는 것은 사랑 - 여름의 빌라/백수린

 

 

  언젠가 읽었던 그림책 주인공 프레드릭, 귀여운 생쥐 프레드릭은 곧 닥치게 될 추운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자연의 색깔과 소리, 바람의 흔적과 향기 등을 모았다. 내가 해야 할 일도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코로나19로 인해 세상과 단절되고 갑자기 주어진 시간을 견디기 위해 소설을 읽으며 꿈꾸고 상상했다. 거리두기와 멈춤을 반복하면서 춥고 어두운 겨울을 견디고 있는 요즘, 다른 사람들은 지리멸렬한 일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8편의 단편을 담고 있는 백수린의 여름의 빌라속 인물들은 나이도 처해있는 상황도 다양하지만 나름대로의 사랑을 시작하거나 진행 중에 있다. 사랑 속에는 달콤한 것만 있지 않다. 결혼한 옛 애인을 잊지 못하는 주재원이 있고, 임용되지 못한 채 대학가를 떠돌다가 아내의 친한 친구들과 언쟁을 버리는 대학 강사가 있는가 하면, 어린 딸을 남겨둔 채 이혼을 하고 다른 남자를 따라 미국으로 떠나는 비정한 엄마도 있다. 산다는 것이 고통과 상처주고받기의 연속처럼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한 동네에 살면서도 앞으로 서로 다른 계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을 감지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프랑스에서 혼자 고독한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노년의 여인도 있고, 바쁜 육아와 살림에 지쳐 상실감에 빠진 주부의 아픔도 뒤따른다. 일상을 살아낸다는 것은 어쩌면 평범함과 안온함을 가장한 불안한 줄타기 같은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사람들의 일상을 관통하며 각자의 삶을 버티게 해준다. 작가는 유유히 흐르고 있는 시간과 상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삶이 계속 되는 가운데 반짝 하고 빛나게 해 주었던 사랑의 순간을 포착한다. 그래서 겉으로 보여 지는 일상의 반복과 당연한 듯 바쁘게 움직이던 순간에도 가슴 설레며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던 것 중에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환기 시켜준다. 그러고 보면 사랑도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무엇이 아닌가 싶다. 지금 현재의 상황도 지나고 나면 무엇인가가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할머니는 점점 더 늘어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채웠을까?

-예상치 못했던 일이 주는 즐거움. 계획이 어그러진 순간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기쁨. 다 잃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 새 한여름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던 행복의 찰나들. 그리고 할머니는 일어나서 브뤼니에 씨와 함께 탑 위에 각설탕 하나를 더 쌓았다.

-이별의 순간에야 처음으로 잡은 남자의 주름투성이인 손은 따뜻해서, 할머니는 생각한다. 그것은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던가 하고. 노인의 삶이 사지가 마비된 뇌졸증 환자의 것과 다르지 않다니. 이렇게 살아서, 할머니의 몸은 이렇게 살아서 이 모든 것을 생생히 느끼고 있는데.

- 여름의 빌라/<흑설탕 캔디>중에서

 

 나또한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던 10대를 지나, 풋풋한 첫사랑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던 20대도 이미 떠나보낸 지 오래다. 다른 사랑을 꿈꾸었던 30대를 건너 현재에 이르렀지만 사랑에 대한 기대는 식지 않는다. 사람들이 추억하고 꿈꾸는 것은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또다시 찾아올 여러 모양의 사랑일 것이다.

 

 

 

 

 

 

2. 작가는 글로 말하고 독자는 읽기로 응원한다 - 사랑 밖의 모든 말들/김금희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을 읽다보면 문장과 문장 사이 보이지 않는 행간의 여백 속에 작가의 눈물과 한숨, 그리고 더 단단해 지기위한 노력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안타까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묵묵히 글을 쓰면서 앞으로 걸어갈 길을 만들어 내는 작가임을 믿고 응원할 수 있었다. 김금희 작가가 그동안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느끼며 사색과 글쓰기로 이만큼 치열하게 걸어주었던 것처럼.

 

 

  올해 나는 김금희 작가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아팠고, 그녀의 이름으로 나온 책은 대부분 구입해 읽으며 말없이 응원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것에 대하여 거절을 표현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흐르는 물줄기를 억지로 막을 수는 없지만,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누군가 용기를 내주어야 한다. 김금희 작가가 아니었다면 인지도 있는 유명한 상이 그런 불합리한 방식으로 계약을 맺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작가들이 전면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보다 자기를 가리고 작품으로 이야기하는 내성적인 직업군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한 일에 대한 결과와 파급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 매우 힘들었을 것을 느낀다. 그러나 또 그만큼 자신의 삶에 대하여 성찰하고 깊어 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창작자가 자신의 창작물을 만들어내면서 고유하게 생기는 권리를 저작권이라고 하고, 작가에게 그것은 생계와 자신의 존엄 그리고 이후의 노동을 반복할 수 있는 힘이다.

 

 

- 사랑의 문제가 사랑 이외의 모든 문제를 다루게 되는 것이다.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중에서

 

 

 소설가의 소설이 아닌 산문은 작가의 내면을 드러내는 글이다. 허구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세상이 아닌 우리가 함께 살고 겪으며 공유하고 있는 현실의 삶에 대한 생각이 펼쳐지는 글이기 때문에 작가 입장에서는 오히려 소설보다 더 조심스러울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대중 앞에서 벌거벗고 있는 느낌도 들 것 같다. 그럼에도 산문이 주는 감동은 현재 여기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은 그녀가 소설가로서 소설을 쓰기 위해 소설이란 무엇인지를 나아가 자신은 누구인지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사유했는지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현재 많은 사람들처럼 작가도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겠구나. 가장 사랑하는 것을 계속 해 나가기 위해 사랑하는 것 이외의 문제로 힘겨워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과정이 힘들어도 우리는 각자 그 시간을 견디는 방법을 알고 있다. 사랑하는 것에 대한 끝없는 바람과 그 끈을 놓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지금의 자신을 더 단단하게 해줄 것을.

 

 

-소설의 시간이라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종결을 피하거나 지연시키면서 견뎌야 이야기가 된다. 연속에 대한 신뢰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버틴다는 감각도 없이 그저 사라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안 의외의 것에서 삶은 동력을 얻고 이어지며 종결을 피한다. 덩그러니 쓰인 한 문장은 그 하나이외에 언제라도 연속된 문장들이 있음을 지시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도 계속 쓸 수 있지 않을까.

 /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중에서

 

 

  작가가 사라지지 않기 위해 버티는 줄도 모르고 한 단어, 한 문장을 계속 이어나가듯이 우리도 각자의 시간 속에서 삶을 지키고 버티기 위해 오늘도 애를 쓴다. 그 속에서 새로운 동력이 만들어지고 우리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낼 것을 믿으면서 말이다. 작가가 글로 계속 쓰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독자가 읽기로 끝까지 응원하듯이.

 

 

 

 

  

3. 강인한 사랑의 힘- 시선으로부터,/정세랑

 

 

 

 나는 동사와 명사 혹은 명사와 고유명사가 겹치는 단어를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심시선 여사로부터 시작된 가족의 역사와 끈질기게 이어온 삶에 대한 열정이 마음에 들었다. 소설 속에서 시선의 삶과 목소리는 주로 생전의 인터뷰나 강의, 강연, TV토론, 축사, 편지 등을 통해 전해진다. 시작도 시선의 인터뷰부터이다.

 

 

  진행자와 그녀는 제사 문화에 대해 토론 중이었는데 시선은 제사 문화에 대한 강경한 반대 발언과 함께 자녀들에게도 자신의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시선의 10주기를 맞이하여 그녀의 가족들은 하와이에 가서 딱 한 번 처음이자 마지막 제사를 지내기로 결정한다. 왜 하필 하와이였을까. 하와이는 시선이 6·25때 가족을 잃고, 사진 속 신부가 되어 떠나간 곳이었다. 어린 시선의 삶이 다시 시작된 곳이자 불행과 고통의 불씨가 된 마티아스 마우어를 만나게 된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후손들은 시선을 추억하고 기억할 수 있는 각자의 제수(祭需)들을 준비한다. 하와이와 제사, 모계를 중심으로 한 가족사 등 거시적인 역사와 문화를 개인적인 한 여인의 역사와 함께 묶어 풀어나간 작가의 노력이 빛난다. 맨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은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라고 표현했다.

 

 

  역사는 통계와 수치, 공적인 기록으로 남아 후세에 전해지지만, 감동과 여운은 주지 못한다. 한 사람의 작은 인생 속에 커다란 역사가 담겨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전체 속에 파묻혀 생생하게 전달되지 못한다. 우리가 역사 속 사실을 체온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삶을 통해서이고, 문학이 감당해야 할 역할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랑을 기반으로 한 인간에 대한 존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뿌리를 내린 나무의 가지들은 바람에 흔들리고 떨어져서 사라지지만 다시 그 나무에 거름이 되고 가지가 되어 꽃으로 피어난다. 그것을 각자의 세밀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공감할 수 있다면 지나간 시간을 살다간 사람들과 또 과거가 될 현재 우리의 삶도 슬프지만은 않을 것 같다.

 

 

  소설을 읽는 동안 조금은 달라져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시선의 가문을 이룬 다양한 자녀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던지고 바라보았던 여러 모양의 폭력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서울에서 하와이로, 하와이에서 독일까지 70년에 가까운 시간을 오가며 나약할 것만 같았던 한 여성의 삶이 끊어지지 않고 면면하게 이어져 내려 올 수 있었던 것은 생명력 위에 더해진 강인한 사랑이 밑바탕 되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시선으로부터, 중에서

 

                              

사랑은 우리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줄 만큼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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