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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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를 향해 가는 사회에 던진 희망의 메시지

                                  조지 오웰의 1984

 

 

 

 

  조지 오웰의 소설 1984화창하지만 쌀쌀한 4월의 어느 날이었고, 시계는 13시를 치고 있었다.’로 시작한다. 주인공 윈스턴은 무엇을 하기 위해 그날의 날씨와 시간을 제일 먼저 내세웠을까. 바로 일기 쓰기였다. 집안에서까지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 당하는 가운데 텔레스크린의 눈을 피해 그는 자신의 감정을 일기 속에 담으려 애썼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하기 싫어했던 숙제가 일기 쓰기였지만, 선생님이 마지막에 달아 주었던 문장들이 좋아서 계속 썼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그 문장들을 통해 선생님과 나만의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일기 쓰기는 가장 사적인 정신 활동으로 자기고백과 자아성찰이 이루어지는 고차원적인 행위이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삶의 흔적을 남기고 힘을 구축하려는 글쓰기는 인간의 본능적인 행동이다. 당은 과거보다 현재가 더 풍요로워졌으며, 전쟁은 늘 승리한다고 말하지만, 그 주장과 현실 사이에 커다란 괴리감을 느낀 윈스턴은 소극적인 저항으로 일기 쓰기를 시작한다. 그것은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소설 속 영국사회주의(영사)의 당과 빅 브라더는 텔레스크린, 마이크로칩, 사상경찰 등을 내세워 모든 것을 감시하고 통제한다. 당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침실 깊숙한 곳의 비밀은 자녀들을 통하여 고발하게 만든다. 개인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통제하려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사색을 하며, 글을 쓰고,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나아가 당과 반대편에 설 것을 맹세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아주 작은 희망을 걸고 통제 사회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인상 깊으면서도 두려웠던 것은 언어를 없애고 줄이는 일이었다. 풍부한 언어는 사고체계를 조작하고 왜곡하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낱말들을 매일 같이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씩 폐기하고 있는 거야. 언어를 뼈만 남기고 깎아 내는 거지. 11판에는 2050년 이전에 없어질 낱말은 한 가지도 수록하지 않았다네. …… 말을 없앤다는 건 멋진 일이야. 물론 제일 쓰레기 같은 건 동사와 형용사들이지만.

 

 

  단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의 폭을 좁히고, 지혜롭지 못하게 우매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동사란 무엇인가. 우리가 생각하고 활동하며 무언가를 추진할 수 있는 힘이다. 사람은 먼저 어떻게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뒤,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 출발선이 동사이다.

 

 

 ‘걷고 싶다’, ‘공부하다’, ‘뛰다’, ‘먹다등등 동사를 수반하여 움직이고 이루고 성취한다. 만약에 언어에서 동사를 최대한 줄이거나 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로봇이나 기계에 불과하다. 파워버튼을 누르고 끌 때까지 한두 가지 일만 반복하는 인간기계 말이다.

 

 

  ‘형용사도 마찬가지이다. 형용사는 건조한 세상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는 품사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단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자연과 사랑, 감정 등 사람에 대하여 생기를 머금고 아름답고 풍요롭게 표현해 줄 수 있는 것은 형용사가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모든 사물과 자연 속에서 각각의 색깔을 빼고, 회색 도시로 이미지화 된 것은 형용사를 빼고, 언어의 확장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자유란 개념이 없어진 세상에서 자유는 굴종이란 슬로건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랑이란 단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우리가 감정을 무엇으로 표현하고 확장시킬 수 있을지 두렵고 무섭다. 당은 사람들의 성본능을 말살시키려 했으며, 만약 말살되지 않으면 그때는 그것을 왜곡하거나 추한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인간의 본능까지 조작하려는 세상이 두렵다.

 

 

  조지 오웰은동물농장을 통해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을 경고하며, 스탈린 체제의 공포와 억압을 풍자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 피를 토하며 온 힘을 다해1984를 완성했다. 그는 소설 속에서 혹시 도래할지도 모를 미래 사회의 국민 지배 감시 환경에 대해 경고한다. 그가 상상력으로 써내려간 미래 사회는 권력의 장악과 통제 시스템 속에서 끔찍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세상에 대해 그 또한 두려움과 섬뜩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2020년을 살고 있는 나도 그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몸의 모든 감각으로 느끼고 있다.

 

 

  현재 내가 걸어 다니는 거리와 골목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CCTV와 자동차들의 블랙박스는 그나마 통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감시 시스템이다. 나도 모르게 찍히는 사진이라 동영상, SNS에 올라간 사진의 도용과 개인번호의 유출은 무방비 된 삶 속에 어떤 위협이 될지 모른다. 인간의 좋은 의도는 과학의 비인간성과 비윤리적인 팽창 안에서 점점 처음 의도와 다르게 변질되어 간다. 코로나 19바이러스로 인한 휴대폰 프로그램은 사생활 침해 논란을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다.

 

 

  그렇다고 불안과 두려움 속에 하소연과 불평만을 늘어놓을 수 없다. 조지 오웰은1984을 통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국가의 지배 권력이 개인의 자유보다 우선 될 수 있을까.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될 때 무조건 복종해야 할까 저항하고 질문해야 할까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권력층에 대한 국가 정책과 사회가 흘러가는 방향에 대해 깨어 있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지혜를 추구하는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와 감정에 대해 마음껏 표현하고 제대로 느낄 수 있는지 우리는 생각하고 해답을 찾아가야 한다

 

 

 어쩌면 각자의 가장 나약한 부분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끝까지 생각하고 고민하며, 행동하는 것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을 지키고 삶을 향유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면 전쟁은 평화가 아니라 끝없는 고통이자 죽음이며, 자유는 굴종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숭고한 가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무지가 힘이 아니라 지혜가 힘이라는 것을, 무지는 곧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지혜롭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할 책임이 있다. 1984를 읽으며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고,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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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과 탄광
진 필립스 지음, 조혜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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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유대감을 느끼며 살아가면서도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는 장소에서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길 원한다. 테스 또한 부모님과 언니, 남동생 잭을 피해 집의 뒤테라스에 편하게 앉아 나무로 된 우물을 바라보는 시간을 즐겼다. 그것은 테스에게 최고의 시간이자 행복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어두운 밤,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테스는 낯선 여인이 우물에 아기를 빠트리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그 여자가 아기를 내버리고 간 뒤, 한동안 꽤 오래도록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내 귓가에는 그 첨벙하는 물소리가 계속 맴돌았다. (13.p)

 

 

  그 물소리는 아기가 수면에 부딪혔다기보단 우물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 같았다. 자신 안에 끔찍한 뭔가가 떨어진 사실을 알고 놀라고 당황해 소리를 내지르듯 내게 도움이라도 요청하듯(15.p)

 

 

  그날 밤부터 테스는 악몽에 시달린다. 테스와 그 가족에게 있어 우물과 탄광은 어떤 것일까? 탄광은 아버지 앨버트의 세계이자 그의 가족들의 삶을 유지하고 지탱하게 해 주는 근원이다. 탄광이 있고 그곳에서 계속 일을 해나가는 아버지 앨버트가 있는 한 테스의 가족은 부유하지 않지만 평화롭고 소박한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 있다면 어둠 속을 불빛으로 비춰보는 일이었다. 나는 어둠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아니, 어둠에 찌들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팔꿈치 주름과 손금 사이사이 그리고 손톱 밑마다 지워지지도 않는 새카만 자국이 들러붙어 있었다. 늘 목구멍 저 밑에서부터 어둠의 맛이 느껴졌고, 한밤중이면 기침을 해대며 그 어둠을 뱉어내곤 했다. 19.p

 

 

  또 다른 면에서 그들이 일상생활을 이어나가는 중심에 우물이 있다. 우물은 갈증과 배고픔을 해결해 주고, 인간으로서 존재를 지키며 살아가는 데 있어 꼭 필요한 한 축이다. 그래서 어린 아기의 시체가 발견된 사건은 가족 전체의 삶과 가치관, 그들의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상하지 못한 끔찍한 일은 갖가지 모양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했지만 그로인해 세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성숙한 한 사람으로 발전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테스가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죽은 아기의 이름을 찾아 주고 싶어 하는 것이나 버지가 의심이 가는 부인들의 리스트를 작성한 뒤, 그들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면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부끄러움과 잘못을 깨닫게 되는 것까지 말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빈부 차이와 상관없이 사람들 나름대로의 생활이 있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우물사건이 아니었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앨버트 역시 우물에 아기를 버리는 것이 끔찍한 일이긴 하나 그 이유가 전부 잔인하고 악의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흑인이자 성실한 동료인 조나를 통해 깨닫게 된다.

 

  …… 그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봐온 느낌이야. 그게 껍데기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껍데기를 까거나 깨서 그 안에 든 걸 보려는 시도도 안 했던 거지. 171.p

 

 

  우리도 살다보면 자신과 무관하거나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이 삶 속에 불쑥 끼어드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로 인해 아픔의 시간을 겪거나 괴로워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조금은 예전과 달라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란 존재가 세상에 당당히 소리치고, 무엇이든지 마음먹은 일은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착각하면서 살아왔지만, 국가적 재난과 사회관계망의 불신, 사람들과의 갈등과 경제적 어려움 등 불가항력적인 일을 겪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돌아보고 나약한 자신을 인정하며 타인과 협력하며 해결방법을 찾아 애를 쓰게 된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겪었다고 삶이 끝나거나 일단락되어진 후 다시 이어서 시작할 수 없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테스와 그의 가족이 우물 속에서 아기 시신을 발견하고 나서도 힘겨운 일상을 계속해서 살아내는 것처럼. 소설은 무언가 삶을 흔들고 고통스럽게 만들 수는 있지만, 우리의 삶은 그 속에 빠져서 마냥 허우적대며 있을 수는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소설을 읽는 내내 우물과 탄광이 단편이었다면 우물사건이 소설전반에 중심이 되고, 그 순간이 주는 이미지와 묘사가 독자를 끌어당기는 묘미가 되었을 것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장편이었기에 우물 사건은 화두가 되고, 그것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성장과 변화해 가는 모습들이 핵심이 되었다. 그것이 물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정해놓은 규율 안에서만 행해졌던 선의에 대한 앨버트의 자각과 테스가 우물에 아기를 버린 여자를 찾아내고 그녀에게 용서한다고 말해주는 장면은 독자로서 잊혀 지지 않는 장면이다. 그 가운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하고 치열하며, 생생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또한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앨버트와 리타, 그들의 보호 아래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끈끈한 우애를 보여주며 성장해 나가는 버지, 테스, 잭의 모습을 통해 가족의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등장인물의 각 시점으로 진행되는 구성도 소설의 지루함을 없애주는 데 한 몫 한다. 추리소설일줄 알았던 나의 추측이 빗나간 것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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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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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에 드는 시집은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 수 있지만, 소설은 여간해서 반복하여 읽기가 힘들다. 대신 기억에 남는 장면과 문장, 이야기가 주는 매력과 위로로 작품을 기억한다. 그런데 김은국의 <<순교자>>는 장편소설이지만 예외였다. 이 소설은 대학시절 갓 입학한 신입생인 나와 친구들에게 교수님이 내준 과제였다. 지금은 절판된 을유 출판사에 나온 회색 바탕의 <순교자>, 소설을 읽고 그 내용과 감상을 오픈 북 테스트로 중간고사를 보았었다. 당시 스무 살도 채 안 된 나는 시험 보기 직전까지 조바심 내며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 답안지에는 신과 성도들을 배신한 12명의 목사들은 순교자의 영광을 얻고,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킨 두 명의 목사들은 배신자로 낙인찍힌 채 살아가는 기독교 소설이다가 주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험을 끝내고 나오면서 무언가에 끌린 듯 다시 시간을 갖고 깊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책보다 재미있고 짜릿했던 대학 생활에 그 호기심은 금세 잊혀 졌었다.

 

  그러다 20년도 훌쩍 넘어버린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새롭게 디자인 되어 나온 세계문학전집 중에서 <<순교자>>를 만났다. 한국 작가가 쓴 글이 세계문학 속에 들어있다는 것과 김은국이란 작가의 이름이 아주 옛날 기억을 소환했고, 2019년 가을, 책상에 앉아 시험을 공부를 하듯 탐독한 <<순교자>>는 내가 기억하는 소설과 전혀 다른 작품이었다. 그 시절 나는 무엇을 읽었던 걸까? 세월이 흐르면서 사유의 능력은 조금씩 변하고 성숙해졌다. 그동안 꾸준한 독서가 이해와 감동의 폭을 넓혀 주기도 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낮아진 마음과 독서에 대한 애정이 읽게 되는 작품들과 그것을 쓴 작가에게 존경심을 갖게 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기독교 소설이란 좁은 카테고리 속에 가둘 수 없었다. 기독교와 전쟁을 의지하고 있지만 오히려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혹은 신을 가진 인간과 이성을 의지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까. 또한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감추려는 자에 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쪽으로 선택하고 해석하든 전쟁이란 고통의 역사 속에서 신음하고 고통당하나 쉽게 전멸하지 않는 인간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인류문명사를 강의했던 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대위가 되어 평양으로 파견된다. 그가 평양에 도착하여 처음 본 광경은 전쟁으로 파괴되고 부서진 장로교 평양 중앙교회였다. ‘와 대학에서 함께 근무한 박 중위의 아버지가 시무했던 교회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 평양은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신앙의 열기는 북쪽 사람들의 마음을 새롭게 달구었고, 평양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그런 땅에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정권이 들어섰고 식민지시대와 견주어도 나을 것 없는 심한 박해를 받게 된다. 그런 평양에서 는 장 대령의 명령으로 공산군에게 순교당한 12명의 목사들에 대하여 자세히 조사한 뒤 마무리 짓는 일을 맡게 된다

 

  순교당한 12명의 목사들과 살아서 돌아온 2, 바로 신 목사한 목사이다. 그 중 순교당한 박 목사를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던 젊은 한 목사는 무엇 때문인지 정신적 충격을 입고 폐허가 된 교회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알 수 없는 기도를 하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런 한 목사를 마주 했을 때, 이 대위는 북진 초기에 후퇴하던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목격하고, 그 현장에서 경험했던 어떤 분노를 떠올리며 힘겨워한다. 시체와 배설물 속에서 끌어낸 한 사람, 꺼져가는 목숨을 부여잡고 힘겹게 의식을 잃어가는 그에게 수없이 많은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어떤 이상하고도 강렬한 부끄러움에 휩싸였다. 나는 카메라 뒤의 무관심하고 차가운 눈초리들로부터 한 인간이 지닌 고난의 말없는 위엄을 내 온몸으로 지켜주기라도 할 듯 이, 남자의 몸 위로 상체를 구부리고 연옥과도 같은 그의 납빛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36.p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비참하게 죽어가는 같은 종족을 향해 세상 어느 생물이 카메라를 누르며 보도를 하고 기록을 남기려고 혈안이 될 수 있는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이 대위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울부짖으며 카메라를 부수었다. 이 대위가 느낀 부끄러움은 애도 받지 못한 인간에 대한, 나아가 생명에 대한 존엄함이 무시당하는데서 오는 수치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나또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나 존엄함을 지니고 있는지, 슬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부조리한 세상에 분노하기보다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기 위해 애써 외면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아마 그 누구도 이런 의구심 앞에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적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움직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의 모습이 신의 침묵을 가져왔는지 아니면 내려진 신의 대답을 못 듣게 한 것은 아닌지 짐작해 볼 뿐이다. 그때와 비슷한 부끄러움을 느낀 이 대위는 비틀거리다 쓰러진 한 목사를 부축하여 돌아가는 신 목사에게 질문한다.

 

목사님의 신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37.p

 

  신을 섬기는 목사는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대답할 수가 없다. 목사 또한 신이 가르쳐주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다. 고난은 고스란히 인간의 몫이고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이란 고통 중에서 견디는 것뿐이니까. 어쩌면 고난 속에서 답을 찾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박해와 억압에 눌려있던 성도들은 광적인 모습으로 순교한 12명의 목사들을 추앙하고, 비겁하게 살아남은 두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간다. 무언가 비밀을 감춘 채 동료 목사들을 잃고, 정신이 나간 젊은 후배를 돌보며 간신히 버티고 있는 신 목사 또한 고난에 대해 대답해 줄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호소하기보다 모든 것을 떠안고 죄인이라 고백한다. 그런 신 목사에게 진실을 알려달라고 이 대위는 끈질기게 매달린다. 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장 대령 또한 굳이 진실을 밝힐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전쟁이 나기 전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게 된 고 군목 또한 집요하게 진실을 캐고 다니는 이 대위에게 그 젊음과 열정이 부럽다고 말 할 뿐 그가 알고자 하는 진실에 대해서는 답해 주지 않는다.

 

…… 진실을 타협해버릴 순 없어. 진실은 숨겨둘 수 없는 거야. 어쩌면 이렇게 뼈아픈 진실이 교인들에게 찾아온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인지도 몰라.”

……

대령님, 진실은 그것이 그저 진실이기 때문에 밝혀지고 발표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진실은 묻어두어도 여전히 진실이야. 그걸 꼭 까발리고 떠들어야 하나?” 152~153.p

 

  진실을 감추고 죄인의 길로 들어가 기꺼이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하는 신 목사와 열 두 명의 순교자들을 빨갱이들에 대한 정신적 승리의 상징으로 둔갑시키려고 하는 장 대령이나 이 대위에게는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들이다. 과연 진실은 밝혀지고 발표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 진실의 무게를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반면에 진실은 묻어 두어도 여전히 진실이기에 까발리고 떠들어 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면 거짓에 짓눌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영원히 외면하며 살 수 있을지 묻고 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 대위는 군인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인류문명사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역사 속 사건들을 연구하며 인간의 고통에 대해 추상적으로 해석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이론을 세워 나갔을 것이다. 열 네 명의 목사들 또한 신에 대한 믿음을 지키며 자신들의 신앙을 살아가며 그들이 밝히거나 숨겨야 할 진실은 또 다른 곳에서 맞닥뜨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만약이란 것은 가정할 수 없다고 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고 그것을 맞이하는 인간은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고통은 잔인하지만 인간이 인간일수 있는 이유를 알게 해주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애써 감추려고 했던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주 우연한 기회에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순식간에 튀어 나올 수도 있다. 상황이 수없이 바뀌면서 각 진영에 유리한 쪽으로 왜곡될 수 있지만, 해석하는 데 차이가 있을 뿐이지 벌어진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평양을 점령했던 국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상황은 또 바뀌게 된다. 국군은 서울을 버리고 피란을 갔던 것처럼 또 평양을 떠난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뒤를 따라 고향을 버리고 살고자 남으로 내려온다. 살아온 터전을 버리고 기약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가는 동안 사람들은 또 많은 고난을 겪게 될 것이다. 굶주림과 추위에 떨다가 죽어갈 수 도 있을 것이고, 인간이 아닌 짐승처럼 본능만 남은 사람들에게 여자들은 강간을 당하며 공포와 수치심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한 번 전쟁 속에 내버려진 인간은 싸우고 견디며 살 수 밖에 없다. 결국 고통은 인간의 몫이지만 그것을 통해 인간은 자신들의 존재를 재확인하게 된다.

 

  어쩌면 인간이 살고 있는 곳곳이 전쟁터일지 모른다.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전쟁이 아닐지라도 살고 버티기 위해 매일을 바동거리며 살아야 하는 삶에 진정한 평화가 자리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마음속에서도 수많은 갈등과 잔인함이 도사리고 싸우기를 반복한다. 그럼에도 인간의 삶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삶의 한순간, 반짝거리며 빛나게 해 주는 환희의 순간을 경험하기 위해서일지 모른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없으나 한번쯤 주어진 인생 속에 느끼고 나서야 떠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그것을 절망에 대한 희망이라고 말 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죽음 속에서도 다시 태어나는 생명이라고 할 것이다. 아니면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확실한 것은 그것은 오로지 한계가 있고 유한한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천사도 악마도 그것은 누릴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그 짜릿한 순간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느끼기 위해 수많은 고통의 시간을 견뎌왔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의 삶은 너무 슬프고 무의미하다.

 

신 목사가 다시 소곤거리듯 말했다. “인간을 사랑하시오. 대위, 그들을 사랑해주시오! 용기를 갖고 십자가를 지시오. 절망과 싸우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 유한한 인간을 동정해줄 용기를 가지시오.” 283.p

 

신 목사의 당부 속에서 이성적이던 이 대위도 흔들리게 된다. 당신의 백성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신은 알고 있는지 여전히 의문을 떨칠 수 없으나 고통 중에서 힘겹게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는 또 다른 질문을 만들고 애정을 느낀다.

 

사람들은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하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을 향해 들려오는 두 개의 목소리하나는 역사의 안에서, 또 하나는 역사의 건너편 저 멀리에서 각기 구원과 정의를 약속하며 각각 자기 쪽에 충성해줄 것을 요구하는 그 두 개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것인가? 310.p

 

신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질문할 것이고, 인간은 그 속에서 방황하며 답을 찾으려고 애쓰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신을 믿지 않는 인간도 고통 속에서 무언가 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각자의 진실을 찾기 위해 애쓰며 살아갈 것이다. 생명은 살아가라는 명령이니까. 산다는 것은 역시 무언가를 계속 하는 것일 테니까. 살아가는 한 아무리 죽음과 썩은 배설물 같은 땅을 헤맬지라도 각자에게 주어진 반짝거리는 고유한 순간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초에 창조되던 순간 신이 불어넣은 생령을 가진 존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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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 이야기 1
김은성 지음 / 애니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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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색 판화로 그려진 만화가 왜 이렇게 아름답고 눈물이 나는 걸까? 아마 작가의 엄마와 그 엄마의 엄마 목소리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함경도 북청 사투리에 담겨 전해졌기 때문인가 보다. 80대 엄마의 이야기를 40대 딸인 작가가 10년 걸쳐 만화로 만들어냈다니 그 자체가 위대한 역사가 된다. 이제 작가의 엄마는 90대가 되었고, 이야기를 끌어낸 작가는 50대가 되었겠지. 호호할머니가 된 엄마도 아기였고, 부끄럼 많은 소녀였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새집에 다시 고양이가 살기 시작한 것처럼 엄마와 나도 다시 힘을 내서 살아보기로 했다. 이제 엄마는 엄마 일, 나는 내 일을 하면 된다. 엄마는 1927년생으로 팔십 년의 삶을 되짚어보고 있고, 나는 그런 엄마를 만화로 그리기 시작했다. 엄마의 고향은 물장수로 유명한 함경남도 북청이다. 38.p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어른들은 아이들을 아주 많이 낳았다. 우리 부모님의 형제도 양쪽 모두 8남매이다. 삼촌, 고모, 이모가 골고루 있다. 우리 엄마는 나를 포함해서 네 명의 딸을 낳았다. 장남인 아빠와 큰딸이었던 엄마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은 지방에서 올라온 친척들이 머물다 떠나갔다. 가깝고 길게는 삼촌들과 이모들, 멀고 짧게는 아빠의 사돈의 팔촌의 동생 등등 까지 말이다. 우리의 할머니들과 엄마들은 이 많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나누어 주었을까. 어렸을 때는 우리 가족만 오붓하게 사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어느 덧 시집 간 언니들과 돌아가신 아빠를 빼고 엄마와 나, 동생, 이렇게 세 식구만 남게 되었다.

 

 

  이제 나와 우리 엄마도 작가가 이야기를 시작한 때와 같이 80대와 40대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천안이 고향이었던 외갓집 식구들과 전주가 고향인 친가 쪽 삼촌들이 우리 집에서 천안 북일고와 군산상고의 고교야구를 보며 싸우던 모습이 떠올랐다. 둘째 언니 출생신고가 다르게 되어 있어 학교 들어갈 때, 아빠가 동사무소 직원들에게 얼마를 주고 칼로 긁어 고쳤다는 것과 월남전에 가 있는 셋째 외삼촌에게 또 입영통지서가 나왔다는 엄마 얘기는 항상 쌍으로 등장했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어른들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낄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 것과 같다고 했지만, 도서관은 너무 작다. 하나의 세상이 사라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화 곳곳에서 웃음과 눈물이 나지만 내 마음속에 깊은 감동을 준 곳을 꼽으라면 세 장면을 들 수 있다. 제일 먼저 대마씨를 갈아서 만든 국수를 먹고 온 가족이 두둥실 떠오른 장면이다. 부모님과 놋새, 숙자, , 강아지, 삽과 죽부인까지 모든 것이 하늘 높이 둥실 떠서 웃고 있다.

 

  

 

 

! 냉국이 있다! 촌에서는 삼을 키우잖아. 삼씨가 맺히도록 뒀다가 그걸 베어 도리깨질을 해. 그러면 삼씨가 녹두알만한 기 나오거덩. 그걸 볶아서 디딜방아로 찧어. 그걸 첼루 치면 가루가 나와. 그 삼가루를 새암물 질어온 디다 옇고, (오이)를 썰어 옇고 소금 간을 해서 냉국을 풀어. 그걸 먹으면 속이 이상하게 시원해. 삼씨라는 기 먹어서는 아이 될 물건이야. 그걸 먹고 나면 심이 나고, 속이 편안하고 화다분한 기 기분이 얼매나 좋은지 몰라. 123.p

 

 

  이 장면을 읽으며 혼자 깔깔 거리며 웃었다. ‘삼씨라는 기 먹어서는 아이 될 물건이야.’ 정확한 말이다. 가난하고 힘든 그 당시 삶에서 한 번 웃고 넘어갈 수 있는 해프닝이었지만, 먹거리가 부족한 그때, 모든 것이 음식이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 민족의 아픔을 노래한 시인 이용악의 <<그리움>>이란 시와 함께 눈이 내리고 기차가 달리는 장면이다. 그 기차가 달리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사람들이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을까.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 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174.p

 

 

  눈이 내리고 기차는 달려가고 작가인 나는 글을 쓰고, 그 시대를 온 몸으로 통과해 온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 척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를자를 재봉틀만 돌린다. 교과서에서 배운 몇 줄의 시와 역사는 엄마의 재봉틀 박는 소리로 인해 살아난다. 참 힘든 시간을 살아온 우리의 엄마들은 그렇게 역사가 되고, 자식들을 든든히 떠받치고 있는 사랑이 된다.

 

 

죽을 뻔한 엄마가 다 낫자 너무 좋아서. 동네마다 새로 사논 밭을 엄마 손을 꼭 잡고 도던 기억이 나. 그렇기 좋아하던 엄마였는데222.p

 

  <<내 어머니 이야기>>1권의 맨 마지막 문장이다. 그리고 그림의 두 모녀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고 끝이 난다. “엄마!!”, “엄마가 그렇게 좋니야? 결혼하면 신랑이 더 좋아. 우리 놋새도 이제 시잡갈 때가 됐구나이.” 그렇게 두 사람이 멀어지고 작가와 놋새였던 엄마가 똑같은 대사를 나눈다. 엄마는 부르는 것만으로도 참 좋고, 그리운 존재이다. 놋새는 그렇게 좋아하는 엄마를 똥개 같은 전쟁 때문에 하루 아침에 잃게 된다. 똥개 같은 전쟁!!

 

 

  1권만 읽었는데 2~4권에서 놋새가 겪어야만 할 아픔과 고통이 저절로 떠올랐다. 살아가다 보면 똥개 같은 일들이 너무 많다. 그래도 엄마는 그 똥개 같은 일들에 지지 않고 살아간다. 그리움은 가슴에 묻고 계속 살아간다. “나 같은 사람을 그린 것도 만화가 되냐?”고 말한 어머니들의 삶은 계속 이어지고, 이 땅의 역사가 되고, 사랑이 되어 그게 뭔지도 모른 나 같은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정말 아름답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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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이야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9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고봉만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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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무엇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충성할 수 있을까? 자신을 알아주는 한 사람에게 전 생애를 걸고 따르는가 하면 종교적 신념에 따라 세상의 부귀영화를 내려놓고 신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예술, 꿈과 야망에 일생을 걸기도 한다. 주인공 펠리시테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며 사랑한 존재는 오뱅 부인과 그의 가족, 그리고 앵무새 룰루였다. 그들은 펠리시테의 전부였다. 비록 적은 돈의 보수를 받고 하녀의 삶을 살았을지라도 그녀의 헌신은 아름답고 고결하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분과 동체이신 귀한 분이시다. 그런 신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었고, 인간의 몸과 영혼을 구원했으나 외면당하고 배척당했다. 인간들은 신의 아들을 조롱하고 죽였다. 그런 가운데 순전한 영혼의 목소리처럼 펠리시테의 질문이 전해진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마구간 짚더미 위에서 태어나고자 하신 그 착한 분을, 사람들은 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을까? 26.p

 

 

  펠리시테는 폴이 떠나자 그리워했지만, 비르지니가 성당에 가서 교리 교육을 받는 동안 함께 동행 하며 시중을 든다. 그리고 자신도 비르지니처럼 교리를 외우고 신앙고백을 영적인 환희까지 느낀다. 그런 경험이 그녀를 기쁘게 만들었다. 인간 세상에서는 몰락한 귀족집의 가난한 하녀이지만 신 앞에서는 귀족도 그녀도 별반 다르지 않은 귀한 존재이다. 예수는 귀족인 비르지니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천한 펠리시테를 위해서도 인간이 되어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신 앞에서는 두 사람 모두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 펠리시테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소유라 할 수 있는 앵무새가 생긴다. 그녀는 앵무새에게 룰루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룰루는 자신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나버린 라르소니에르 부인과 오벵 부인에게는 귀찮고 버려진 존재이지만, 펠리시테에게 만큼은 가장 소중하고 귀한 존재이다.

 

 

고독한 그녀에게 룰루는 자식이자 애인이나 마찬가지였다. 48.p

 

 

  살아가는 동안 외롭고 힘들었을 그녀에게 룰루는 위로와 힘이 되어준 존재였다. 그녀의 사랑은 인간을 지나 앵무새에게까지 뻗어 간다. 그리고 사라진 룰루를 찾기 위해 자신의 몸이 병드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중에 룰루가 병에 들어 죽자 박제를 만들어 매일 아침 애도를 넘어 숭배하기까지 이르는데 그만큼 룰루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깊고 뜨거웠다. 다른 사람들 눈에 볼품없고 낡아버린 박제된 룰루였지만, 그녀에게는 한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인 것이다. 온통 벌레가 슬고, 한쪽 날개가 부러져 있는 초라한 룰루의 모습과 그녀의 모습은 닮아있다. 그러나 룰루는 임시 제단위에 세워졌고, 펠리시테는 그녀의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순간에 눈을 감는다.

 

 

푸른빛 향연이 펠리시테의 방까지 올라왔다. 그녀는 코를 벌름거리며 신비로운 쾌락에 휩싸인 채 향내음을 맡은 후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술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치 샘이 말라 없어져가듯. 메아리가 사라지듯. 심장박동이 차츰차츰 약해지다 아주 잦아들었다. 마지막 숨을 내쉴 때, 그녀는 반쯤 열린 하늘에서 그녀의 머리 위를 활공하는 거대한 앵무새 한 마리를 본 것 같았다. 60.p

 

 

  고통 받고 힘겨웠던 삶을 위로하듯 그녀의 마지막은 평안하고 아름다웠다. 하녀로서의 삶은 가난과 고통, 눈물로 이루어진 듯 보이나 마지막 그녀의 모습은 성녀로 느껴졌다. 다만 이것이 귀족이었던 플로베르의 하층민들을 향한 위로였는지 혹은 순종과 교화로서 작용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펠리시테의 모습에서 거짓과 꾸밈이 없는 순수한 인간의 마음을 볼 수 있었다. 작고 초라한 인간이기에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펠리시테가 되고, 룰루가 되어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신이 인간에게 불어 넣어준 순박한 마음을 가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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