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마지막 오랑캐
이영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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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8, 몽골에 도착하자 공항에서부터 알 수 없는 꼬릿한 냄새가 났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건 양 냄새였다. 몽골 깊은 곳곳마다 이 냄새가 배어 있었고, 당연히 여행 중 내 몸에도 몽골의 냄새가 묻어갔다. 처음 갔던 몽골은 친근하면서도 낯설었다. 울란바토르 도로 위로 ㅇㅇ유치원, **학원, ***갈비 등 알록달록한 한글글씨로 도배된 다인승 차들이 질주하고 있었고, 살짝 검게 그을리긴 했지만 우리와 생김새가 비슷해서인지 현지사람들에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햇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이라 뜨거웠지만 습기가 없어 그늘로 피하면 쾌적하고 상쾌했다. 10시가 되어야 해가 졌기에 덤처럼 주어진 한낮의 빛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지금은 울란바트로의 공기가 서울만큼 나빠졌다고 하지만 그 당시 처음 접한 하늘은 끝도 없이 넓고 푸르러서 나와 일행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몽골의 하늘은 낮보다 밤에 보아야 한다. 특히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올려다 본 하늘은 까만 융단 위에 눈 대신 별들이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몽골의 하늘은 내가 서 있는 거리와 매우 가까웠다. 살면서 그렇게 커다란 카시오페아와 북두칠성은 본 적이 없다. 낮에는 구름이 그늘이 되어 줄 정도였다. 차를 타고 초원을 달릴 때 비지아같은 목동들이 모는 양떼들을 만나면 잠깐 멈추고 사진을 찍으며 좋아했다. 비가 잘 오지 않은 나라인데 우리가 도착하고 밤새 비가 왔다며 마을 사람들은 좋아했다. 나와 일행들은 땅에 고인 깨끗한 빗물로 세수를 했지만. 테를지의 에델바이스는 아직도 널리 피어있을까. 내게 말 타기를 가르쳐 주던 토야도 잘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7월에 엄마가 큰 수술을 받았는데 당번이 되어 간호를 했던 밤이면 <<지상의 마지막 오랑캐>>를 읽었다. 몽골여행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고 내가 겪지 못했던 몽골의 다양한 모습들을 상상했다. 나는 책을 읽으며 엄마가 빨리 회복되기를 기도했고, 몽골의 하늘과 대지, 비지아와 그를 닮은 유목민들은 병실에서 밤을 보내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병실 창밖으로 네온싸인의 불빛이 빛나고 있는 한강을 바라보며, 몽골에 유학 갔던 친구가 추운 겨울엔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 때문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져. 뜨거운 찜질방에서 푹 지져야 하는데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어두운 밤, 병실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은 가로등 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초원을 떠나 도시로 간 유목민들은 참 답답했겠다. 광활한 몽골의 대지를 사랑한 사람들은 차보다 말을 타고 달리는 게 더 어울린다.

 

 

곡식이나 야채 대신 고가만을 먹고 살아야 했지만, 그렇게 유목민은 자칫 텅 비어서 공허가 됐을 유라시아의 심장부를 채움으로써 하나로 연결된 지구를 완성했다. 실크로드나 스텝 루트니 하는 중세의 교역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오늘날 지구가 손바닥 만해진 데에는 유라시아를 인간의 땅으로 만든 유목민의 공로를 외면할 수 없다. 초원에서 게르 하나를 만나도 반가운데, 그 천지가 다 비어버렸다면 인간은 그 광막한 대지를 여행하기는커녕 말조차 들여놓을 수 없었을 것이니 지구적 시각으로도 감사할 일 아닌가. - 126.p

 

 

  18년 전 내가 경험한 몽골의 모습과 사람들, 환경은 많이 달라져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을 타고 누비며 달렸던 땅과 하늘, 사람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뻥 뚫린 초원을 앞마당처럼 누비며 달려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내 마음도 시원해지고 광대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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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하고 게으르게
문소영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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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대하고 게으르게사이에는 어떤 단어들이 있을까. ‘광대하게속에는 무슨 내용들이 들어 있어서 등장부터 무거운 느낌을 주는 걸까. 의구심을 품고 책을 펼쳤는데 제목과 다르게 <게으르게>로 시작한다. 우리의 광대한 포부는 멀리 있지만 게으른 자신은 바로 코앞에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처음 만나는 첫 번째 소제목도 마음에 들었다. 늦게 꽃핀 대가들이라니. 나도 혹시 늦게 꽃필 수 있지 않을까.’(11.p)하는 문장에 밑줄을 치며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았고, 한편으로 고맙고 위로가 되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또 있구나. 만약 <광대하고>가 먼저 나왔다면 나는 아마  끝까지 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광대하고 게으르게>>는 미술 전문 기자인 문소영씨가 삶속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 예술, 책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써나간 에세이다. 1게으르게로 시작하여 불편하게’, ‘엉뚱하게’, ‘자유롭게’, ‘광대하게’, ‘행복하게로 총 6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 개인의 감정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친 깊은 사유가 담겨 있다. 그림과 영화, 사진, 책 등을 단순히 스토리위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다양한 고민과 새로운 도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차분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책상에 앉아 첫 장부터 작가의 생각에 공감하며 읽다보니 어느 새 하루가 저물었다. 책의 중간마다 밑줄 쳐진 문장과 그 옆에 써 내려간 나의 글들이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작가가 언급한 그림과 책, 영화들 중에는 내가 보고 읽고 공감했던 것과 같은 것들이 많았다. <케빈에 대하여>를 보며 새로운 모성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공감이 갔고, 유행하는 먹방에 대한 해석과 위장과 심장을 동시에 건드리는 소박한 음식에 대한 작가의 말에 나도 그렇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블랙페이스에 대하여 나조차 크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점도 발견했다.  사소한 것 같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인종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 물방울처럼 사라진 나의 생각들을 붙잡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다. 스페인 여행 중 티센보르네미서 미술관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hotel room', 1931을 보고 당시에 느낀 기쁨을 단 몇 줄이라도 적어 놓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리듬에 맞춰 발을 까딱거리며 보았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 대한 감상을 남겼다면 나의 생활은 좀 더 달라졌을까. 20년 동안 새벽 4시부터 묵묵히 빵을 만들어 살아온 제빵사의 이야기를 듣고 오던 날 들었던 다양한 생각을 정리만 했더라도 나의 마음이 조금은 성숙해질 수 있었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록하지 않았기에 추상적으로 머릿속에 머물다 떠난 것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엉성하더라도 나만의 그물을 짜 놓았다면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비교하고 공유하며 삶의 좋은 자양분이 되었을텐데 하고 아쉬움이 남았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고 넓은 세상에서 명성을 떨치기를 꿈꾸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참으로 게으르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이 많지만 몸의 한계는 너무나 뚜렷하고 절망적이다. 그렇다고 금방 포기하거나 외면할 자신도 없다. 그 동안 작게나마 성취한 검험의 달콤함이 머리와 가슴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까. 프랭크 매코트의 계속 끼적거리세요! 뭔가가 일어날 겁니다.(Keep scribbling Something will happen).”(20.p)라는 말을 지도삼아 지금 내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을 계속 해 나갈 수밖에 없다. 때로는 게으른 내 자신과 싸우다가 가끔은 타협하게 되더라도 매일 조금씩 무언가를 해 나간다면 그것이 쌓여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우리의 생각이 각자의 가치관이 되고, 실천의 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들을 어떤 형태로든 표현할 수 있어야 하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매일 무언가를 한다가 될 것이다. 이 책도 작가가 게으른 자신과 싸우거나 혹은 다독이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꾸준하게 천천히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무언가 커다란 것을 이루어 내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과 공간 속에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것들이 찾아오고, 또 스쳐지나 간다. 그중에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기도 하고, 가벼운 목례만 하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또 차를 마시거나 산책을 하며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가 있다. 혹시 그런 휴식 같은 시간이 찾아왔을 때 <<광대하고 게으르게>>에 대해 함께 읽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충분히 우리의 시간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좋은 생각들이 많이 담겨 있는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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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그리고 엄마
마야 안젤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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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사람을 성장하게 해주고 상처를 치유하며, 과거에서 현재, 미래를 지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수많은 장벽들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을 먹고 큰다. 사랑은 힘이 세다. 산부인과 의사나 전문적 지식이 출중한 학자보다 출산과 육아에 무지하고 경험이 없던 엄마가 아이를 더 잘 키우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이 빠진 인생은 삭막하고 건조하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작품을 통해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고 답했나 보다.

 

 

사랑은 사람을 치유한다. 치유하고 해방시킨다. 내가 여기에서 말한 사랑이라는 단어는 감정적인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들을 그 자리에 있게 하고 혈액이 우리 몸속 혈관을 타고 질서정연하게 흐르도록 만드는 강력한 힘을 의미한다.

- <프롤로그>중에서-

 

 

  자신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마음을 다해 사랑해 준 사람이 단 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랑을 몸과 마음에 축적한 사람은 망가지지 않는다. 아니 망가졌다가도 다시 일어나거나 힘들어도 삶을 쉽게 포기 하지 않을 것이다.

 

 

  나또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딸만 넷이었지만 부모님은 아들타령을 하거나 여자라고 무시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한 존재로서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과 부모님께 받은 사랑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엄마는 우리 네 자매에게 절대적인 사랑과 지지를 보낸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 자매는 중·고등학교 시절 엄마가 싸다준 도시락을 평생 잊지 못 한다.

 

 

  큰언니를 제외한 우리는 세 살, 두 살 터울이기 때문에 2~3년 간격으로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녔다. 엄마는 세 딸이 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약 10년 동안 3~5개의 도시락을 싸서 4교시가 끝날 때 쯤 되는 시간에 맞춰 경비실에 갖다 놓았다. 당시 고등학교 등교 시간이 710분이었고, 야간 자율학습은 밤 10시가 되어야 끝이 났다. 나는 짜증을 내거나 잠에 취해 아침밥을 먹고 그대로 학교에 갔다. 그리고 4교시가 끝나자마자 경비실에 가서 경비아저씨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엄마가 놓고 간 도시락을 찾아와 맛있게 먹었다. 도시락 가방을 열면 편지가 아닌 천 원짜리 지폐 2장도 함께 들어 있었다. 급식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나는 6년 동안 김이 올라오고 있는 점심 도시락을 먹고 공부를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정신적인 허기에 시달린다는 말을 깊이 이해하지 못 한다. 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고 힘들어도 견뎌나간다. 물리적 어려움을 겪거나 경제적으로 힘들어져도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금방 좋아질 거라고 낙관하는 편이다.

 

 

이사하던 날, 어머니는 자신이 내 편이라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나를 해방시켰다. 나는 자라면서 어머니와 점점 가까워졌다는 것을, 그리고 어머니가 나를 해방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내가 밑바닥 중에서도 밑바닥으로 간주됐을 사회로부터 나를 해방시켰다. 나를 삶으로 해방시켰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인생의 옷자락을 붙들고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살고 있다. “이봐, 내가 옆에 있어.” (103.p)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지난 삶을 솔직하면서도 당당하게 고백한다. 백인이 마을에 하나뿐인 포장도로를 걸어갈 때면 어느 흑인이라도 옆으로 비켜 도랑으로 가야 할 만큼 인종차별이 심한 시대에 부모에게 버림받고 친할머니 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또 일곱 살 때는 성폭력을 당했으며, 다시 엄마에게 돌아갔을 때 그녀를 엄마가 아닌 레이디라고 부르는 것이 더 편했던 것까지. 그뿐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 호기심으로 성관계를 맺고 임신을 하여 미혼모가 되었던 것과 심각한 데이트 폭력에 시달려 죽을 뻔 했던 일도 서술한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그림자 취급을 받았던 것과 자신의 정체성을 영영 잃어버릴까봐 백인 남편과 이혼한 이야기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맞설 수 있었던 것은 그때마다 이봐, 내가 옆에 있어.”, “역시 내 딸이네. 하라는 대로 하면 쓰나. 너 스스로 결정해야지.”라고 말해 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엄마 비비언 백스터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와 시대,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단단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의 삶은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거나 흔들려도 뽑히지 않는다. 그러나 마야 안젤루와 그녀의 엄마, 그리고 나의 엄마를 통해 깨달은 것은 사랑받은 것보다 더 중요한 깨달음이다. 바로 받은 사랑에 대한 책임이다. 받은 사랑을 나만 갖고 나눠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을 베푼 사람에 대해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면 거짓 사랑을 받은 것이나. 진짜 사랑을 받았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향해 흐르게 되어 있다. 마야는 자신의 인생을 통해 그렇게 했고, 미약하지만 나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은 아름다우면서도 힘까지 세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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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그 여자의 부엌 - 부엌에서 마주한 사랑과 이별
오다이라 가즈에 지음, 김단비 옮김 / 앨리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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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제가 부엌에서 마주한 사랑과 이별 <그 남자, 그 여자의 부엌>이었다. 부엌이란 장소는 참 신기하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같지만 누군가 그 안에 들어가 무언가를 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1년에 네 번 정도, 그러고 보니 봄, 여름, 가을, 겨울 대전에 사는 친구 집에 찾아가 하루를 머물다 온다. 서울에서 내려간 두 명이 초인종을 누르면 함께 사는 다롱이(반려묘)가 야옹 하고 먼저 나와 반겨주었는데 이제 그 녀석도 나이가 들었는지 올해는 우리를 슬쩍 한 번 쳐다보고 말았다. 손을 씻고 식탁에 앉으면 친구는 저녁과 후식, 차까지 코스로 준비해놓는다. 우리는 식사를 하며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주고받는다. 올 봄에 함께 가기로 한 스페인 여행 준비와 얼마 전에 읽었던 책에 대한 이야기. 또 조카들과 고양이에 대해 말하고, 직장 생활에 대한 스트레스도 털어놓는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들어있던 이야기들이 술술 나오고 만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에서 밥을 함께 먹는 식구가 되었다.

 

…… 그곳에는 반드시 크고 작은 이야기가 있다. 부엌이란 참으로 희한한 공간이다. 첫 만남임에도 부엌에서 마주하면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둔 응어리와 고충을 털어놓게 된다. 과거의 쓰라린 이별이나, 현재의 고민과 골칫거리를 토로하는 이도 있다. …… 왜 이토록 부엌에는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가 가득할까. ……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운이 있는 날이나 없는 날이나 밥을 지어야 한다. 언제 어느 때건 부엌에 서서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는 변함이 없다.

(5~6.p)

 

  언젠가부터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하여 밥을 함께 먹는 일들이 사라졌다. 손님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즐거운 시간을 나누며 서로의 삶을 나누던 우리 부모님 세대와 다르게 대접을 하거나 모임을 가질 때, 대부분 음식점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다보니 서로의 민낯이나 속마음을 나누기 더더욱 힘들어졌다. 적당히 분위기를 맞추고 주어진 시간을 잘 보내면 서로가 시간을 함께 보내었어도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기가 어렵다. 집이란 그만큼 사적이면서도 내밀한 공간이고, 집 안에서도 부엌은 더더욱 속살을 보여주는 것처럼 모든 것을 드러내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집으로 초대하고 자신이 늘 이용하는 부엌에서 익숙한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대접받는 일이 귀하고 아름답다. 초대하는 이도 초대받는 사람도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마음을 나누며 함께 기뻐하고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임을 말하지 않아도 알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나도 그들의 부엌에 초대받은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식탁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하며 삶에 대해 나누는 것 같았다. 인스턴트와 술을 마시고, 과식을 한 뒤 약을 먹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현대 직장인 남자들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는 것 같았고, 채식을 권하는 부인과 싸우는 모습에 아 저들은 곧 헤어지게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54년이란 긴 시간을 한 공간에서 만들어낸 음식을 먹고 살아온 노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관계 속에 세월이 쌓이고 서로에게 스며드는 나 아닌 또 다른 나를 그려보았다. 같은 음식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도 인식하지 못한 채 서로를 닮아가게 된다. 그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아름답다.

 

 

  부엌에 서서 음식을 만든 시간이 짧든 길든 혹은 혼자 먹는 것이나 함께 먹는 음식이나 그것을 직접 만든다는 것은 실제로 만지고 볼 수 있는 몸을 가진 존재들과 시간과 마음을 나누겠다는 또 다른 표현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와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이 음식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을 먹고 지금까지 살아왔기 때문이다.

 

 

  조르바 처럼 말하고 싶다. “당신이 먹는 음식이 무엇인지 말해주시오,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소.” 나의 친구는 우리를 위해 밥도 하고, 떡국도 끓였다. 모이면 즐겨 마시는 와인과 함께 요리한 불고기를 내놓은 다음 자신이 평소에 먹는 김과 김치 등 반찬을 꺼냈다. 식사를 마치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좋아하는 감바스를 뚝딱 만들어냈다. 좋아하는 홍차도 예쁜 다기에 담아 내놓았다.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 내게 온 음식들이 맛있어서 행복했다. 불이 꺼지지 않는 부엌은 온기가 있고 따뜻하다. 그리고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한 번쯤은 그곳에 서고 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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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외출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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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좋은 시간을 많이 쌓아가고 있는 중에 읽게 되어 기쁘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순간순간 과정에 충실하며 빛나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나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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