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언수 소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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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 억울하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재미있다가 눈물이 나는 슬픈 소설을 이제야 읽었다. 제목이 주는 밝고 희망적인 느낌 때문에 소설을 읽는 동안 받게 된 아픔은 두 배가 되었다. 그러나 김언수의 소설에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본다. 소설이 우리의 삶과 닮았으면서도 극적이라 책을 덮고 나서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눈을 떴을 땐 자동차 안이었다.

……나를 어디로끌고 가는 것일까? 아니다. 대체 나를 끌고 가는 것일까? (117.p)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하지도 않은 일을 진술해야 하는 등 일방적으로 무차별 폭력을 당하는 삶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 오늘도 운 좋게 살아남아 편안한 일상을 살고 있지만, 그 일상을 깨고 뒤흔드는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저 편안한 하루가 지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안심하고 가슴 조이며 살아갈 뿐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자기 자신을 향해 수많은 질문을 던지지만 답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공포와 두려움 속으로 집어넣은 누군가와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요구받은 것을 완벽하게 해 나가는 것 밖에. 그때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소설 속 스티로폼 라면 용기 만드는 일을 했던 평범한 가 감금된 후 장비에 다시 올라가지 않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술서를 깔끔하게 써내려 가는 것처럼. 김석산을 죽인 암살범이 되어 말이다.

 

 

진짜 극한의 고통이 오면 인간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면도날로 신경을 한 꺼풀씩 벗겨내는 것 같은, 갈기갈기 찢어놓은 신경을 다시 염산 속에 담가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130~131.p)

 

  고통의 기억을 안고 있는 한 는 또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 거짓과 진실을 따질 겨를 도 없이 진술서를 써내려 갈 수밖에 없다. 내가 세월호사건 이후 제주도를 갈 때 마다 배를 타고 갈까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처럼. 극복되지 못한 아픔이 행동과 사고의 한계를 만들고 거짓된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 무섭다. 사람들이 두려움을 잊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는 자신의 회사 책상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줄 것을 요구하고 진술서를 쓰기 시작한다.

 

 

탁자 위에 가득 놓인 검정, 빨강, 파랑 볼펜들과 일곱 가지 색의 형광펜, 포스트잇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노라니 어쩐지 갑자기 행복해진 느낌이었다. (140.p)

 

 

  그 순간 그는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한다. 카키양복이 보내주는 칭찬과 당근을 먹으며, 자신의 쓴 진술서의 주인공이 되어간다. 단련되고 훈련되어진 그의 글 솜씨도 날마다 일취월장한다.

 

 

나는 날마다 진술서 속의 이야기들을 상상하고 느끼고 호흡했다. 그러자 나는 진술서의 세계가 점점 좋아졌다. 아무런 의혹도 모순도 없는 세계! 이처럼 논리적이고 명확한 곳 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지!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암살범이라는 가짜 암시를 주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암살범 그 자체이고, 진술서 그 자체였다. 나는 이제 자료만 준다면 어떤 진술서도 열두 시간 안에 완벽하게 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143.p )

 

 

현실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도 안 되는 일을 겪게 되다보니 오히려 상상의 세계가 더 현실 같고,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비현실적인 일처럼 보이게 되는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이제 가 살아가는 세상은 현실이 아니라 그가 쓴 진술서의 세계이다. 그곳에서 그는 대단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두었고, 자기 자신 또한 냉정한 암살범이 되어 있다. 진실과 왜곡이 한 몸이 되어 가고 있는 과정이 눈앞에서 펼쳐지지만 그것을 가려낼 힘이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런 곳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소설 속에서 벌어진 일들을 우리의 일상생활 속 그 무엇에 빗대어도 이야기는 진행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받는 수많은 일들을 물론이고, 입시와 미래의 불안에 시달려 본 사람들은 좁은 교실 속에서 교과서와 성적의 세계에 매달리며 편안함을 찾을 수 있다. 가끔씩 주어지는 성적과 비교, 자존감 상실과 왕따의 공포에 대한 두려움만 피해갈 수 있다면.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비정규직에게도 소설의 내용이 무관하지 않다. 물질로 인한 갑과 을의 횡포, 가정폭력과 수많은 차별, 그 차별 뒤에 숨어있는 일상 속 공포들이 불쑥불쑥 얼굴을 드러낼 때마다 우리의 삶이 마냥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거침없는 문장과 한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소설 속에서 세상은 마냥 상식과 질서로 돌아가는 평화롭고 권태로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갖게 되지만 그래서 더 서글퍼진다.

이 소설은 전체가 은유덩어리이다. 리뷰를 쓰고 있는 나에게도 말이다. 싸구려 감성은 버리고 냉정하고 명료하게 경제적으로 써야 하는데 생각이 많아진 나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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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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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가 모르는 사람

김영하의 <여행>

    

 

 

 한 번 끝난 인연이 무엇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만나야 하는 것일까? 한때 연인이었으나 이제 더 이상 연인이 아닌, 남남이 된 수진과 한선은 마지막으로 여행을 가기로 한다. 한선의 일방적인 계획에 결혼을 앞둔 수진은 꺼림칙했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알겠다고 약속을 했다. 한선에게도 어린 애인이 있다. 9세 연하의 중국인 유학생 친친. 그러나 그에게 친친은 그냥 가벼운 인스턴트 같은 상대이다. 당장의 허기와 나트륨의 짭조름한 맛을 즐기기 위한 딱 그 정도의 관계. 솔직히 한선에게 그 정도의 관계도 과분하다. 수진의 생각대로 캠퍼스의 늙은 어린이 같은 존재인 그에게 말이다.

 

 

  한선은 아무리 기다려도 수진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자 그의 온 SNS를 뒤지기 시작한다. 그것이 개인의 사생활 침해이자 스토커적인 행동이라는 것은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그녀가 미국에서 이혼한 백인 남자와 유학생 등을 사귀다 지금의 애인을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된 것과 결혼식 날짜와 장소까지 알아낸다. 그리고 한선은 그녀의 집 주소까지 찾아내어 무작정 찾아간 다음, 당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순식간에 바닷가 시골 마을까지 차를 몰아왔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결과는 그녀를 납치한 것과 같은 상황이다. 수진쪽에서도 그를 포스트잇같이 부드럽고 유연하고 뒤끝 없는 관계라고 믿지 않았다면, 자신의 인터넷 세계를 헤집고 다니며 은밀한 개인정보와 살고 있는 집까지 찾아내는 한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면 아마 쉽게 그의 차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근데 오빠.”

?”왜 나하고 여행을 가려고 해? 그러니까 나 같은 애 말고도……

한신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우리 옛날에 여행 많이 다녔잖아.”

그랬었나?”

경주도, 설악산도, 제주도도…… 콘도에서 맛있는 것도 해 먹고 참 좋았는데.”

에이, . 주로 라면이었지. 회 좀 떠다 먹고. 오빠는 만날 술 먹고 뻗었잖아.”

그땐 꿈이 있었던 것 같아.”

지금은 없어?”

인생을 실패한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이제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이상하게 네 얼굴이 떠올라. 네가 내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아간 것 같아.”

(41.p)

 

 

  한선은 왜 그녀와 여행을 가려고 했던 것일까? 정말 수진이 자신의 중요한 무언가를 빼앗아갔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지난 과거일 뿐이다. 그의 말은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모래구멍 속에 자기 혼자 남겨두고 너만 잘 살기위해 탈출 할 수 있냐고 그녀에게 떼를 쓰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미 두 사람은 완벽한 타인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수진이 위기 상황에서도 냉정한 태도를 잊지 않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 전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시공간 이동이라도 한 것 같았다. 백오십 킬로미터를 넘나드는 위태로운 운전도 남의 일 같았다. 나는 이딴 일로 죽지는 않을 거야. 수진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49.p)

 

 

  그녀는 애초에 한선이란 모래구멍 속에 빠질 마음이 없다. 그와는 이미 지나간 사이일 뿐, 함께 사막을 건널 사이는 아니니까.

 

 

그 만 멈추어 달라는 수진의 요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페달을 밟으며 달려갔던 한선에게 분노와 두려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두 사람 앞에 또 다른 존재가 등장한다. 예기치 않는 상황의 연속이다. 그는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공포분위를 만들어내며 음흉하게 농을 던지다 가차 없이 폭력을 휘두른다. 그 느닷없는 폭력 앞에 두 사람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차에 다다랐을 즈음에는 무슨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가 벌써 와 있었다. 한선이 수진을 젖히고 앞으로 나서 뭔가 말하려는 찰나, 고무장화가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막대기를 벼락같이 휘둘렀다. 채찍으로 짐승의 등을 때리는 듯 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한선이 모로 쓰러졌다. 고무장화는 쓰러진 한선의 머리를 거듭하여 찼다. 거센 발길질에 한선의 몸이 범퍼 아래로 구겨져들어갔다.

(56.p)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정해진 규칙처럼 잘 진행되어 가다가도 한순간 어디에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돌덩어리들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질 수 있는 곳이다. 언제 그러한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 혹은 그 순간 내 손을 잡고 함께 구급차에 올라가줄 사람은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한선에게 수진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에게 수진은 느닷없이 찾아와 여행을 가자고 고집을 부리고,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먼 길까지 와서 그녀를 공포와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는 고무장화와 다르지 않는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전 안 가요.”

, 보호자 아니세요?”

대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수진은 단호하게 다시 한번 반복했다.

정말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59.p)

 

 

  끝 난 인연은 이미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고 공포와 두려움을 몰고 온 사람에게 신고를 하거나 도망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김영하의 문장은 매끄럽고 거침이 없어 소설 속 상황이 바로 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생생하다. 로맨스와 코믹인가 하는 순간 무서움으로 바뀐다. 그것이 <여행>을 읽는 동안 더 공포감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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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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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폴에 관한 이야기다. 더도 덜도 말고 딱. 내가 아는 만큼의 폴에 관한 이야기. 이것이 폴이라는 한 인간의 실체인가 하면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타인과 조우하고,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착각하며, 그 착각이 주는 달콤함과 씁쓸함 사이를 길 잃은 사람처럼 헤매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그것을 폴에게서 배웠다. 폴 자신은 내게 그런 것을 가르쳐준 일 없노라고 고개를 저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므로 나는 폴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63.p)

 

 

  ‘는 사랑에 빠졌다. 폴에게 말이다. 그래서 나는 폴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폴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이다.

 

 

나는 도대체 어쩌다가 폴에게 빠져버린 것일까.

(63.p)

 

 

  ‘가 폴에게 빠져버린 것은 규칙적으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났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의 시간과 삶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적인 업무로 만났고, 여섯 살 차이 나는 선생과 제자로 생각했다고 해도 그들이 나눈 시간과 익숙함은 무시할 수가 없다. 원래 사랑이라는 것이 만남을 가져야지만 시작할 수 있다. 물론 상대방이 서로 좋아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기적이겠지만 큐피드의 화살이 어긋났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물이 흐르듯이 마음이 가는 곳까지 바라볼 수밖에. 그래서 폴의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결국 이것은 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는 폴을 만날 즈음부터 교사 일에 염증이 났다. 몸도 마음도 가장 지치고 힘들 때 옆에 있어준 사람 폴. ‘가 상대방의 힘든 이야기를 들어주며 상담을 해주었지만, 자신도 불연 듯 현재의 고충과 힘든 마음을 그에게 기대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폴과의 만남은 포근했고, 안정감을 주었으며 새로운 돌파구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폴이 유리꼬에게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 한국말도 사랑에 빠지다, 이렇게 말하는 거라면서요. 영어도 fall in love인데. 선생님, 저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언젠가 유리꼬를 향한 그의 사랑을 알게 됐던 날 느꼈던 상실감이 다시 가슴을 차갑게 베고 지나갔다.

(73.p)

 

 

  그전까지 확실하게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에 는 더욱 참담했고, 고독했고, 괴로웠다. 그래서 몇 번 맞선을 보았고, 번듯한 직업을 가진, 머리숱이 적고 배가 나온 단정한 사람이 어떤 계기로 한국어 교사가 되셨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나는 어쩌다 한국어 교사가 되었는가를 스스로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폴을 몹시 그리워했다.

 

 

  평범하고 극적일 것 하나 없는 사랑의 서사를 작가는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의 고향집 벽에 두 부자가 오줌을 누는 장면을 보여주었을 때 아련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폴을 향한 의 마음은 이런 서정적인 장면을 지나 간다. 그리고 마음이 커지든 말든 폴은 그녀에게 유리꼬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가족들이 결혼을 반대해도 헤어질 수 없다는 것 등을 쏟아놓는다. ‘의 마음을 알았다고 해도 아마 폴은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자신의 고민과 아픔을 들어준 사람은 유리꼬가 아니라 그녀였으니까. 그것은 두 사람이 쌓아놓은 시간과 비례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사랑은 참 잔인한 면이 있다. 사랑을 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함께 한 시간 속에서 키워온 마음과 행동을 무시할 수 없다.

 

 

…… 설혹 그림책의 한 장면처럼 달빛 아래 함께 오줌을 눌 수 있었다 해도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바람과 달리 아름다운 엔딩을 갖고 있지 않은 법이니까.

…… 삶이란 신파와 진부, 통속과 전형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에 의해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자 내게 실연을 안겨준 그가 더 이상 원망스럽지만은 않았다. 실연당한 여자의 자기 위안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그가 해준 이야기가 내 초라한 사랑에 대한 그만의 응답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

 

…… 한 번도 그럴듯하게 명명된 적이 없는 초라한 내 사랑.

(85~86.p)

 

 

  아주 짧은 세월 “Junchan”이라고 불렸다가 이 된 남자를 사랑한 나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사랑은 끝났어도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는 다시 누군가를 만나면 조금은 더 두려워하고, 진력을 내기도 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다 가끔 사랑에 빠졌던 이 생각나기도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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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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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과 물>은 처음 읽은 배수아의 작품이다.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확실하고 마니아층이 형성될 만큼 영향력 있는 작가이기에 호기심을 갖고 소설을 읽었다. 소설 속 이미지들은 강렬하면서도 담대하고 섬세하다. 전통적 서사구조를 벗어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화자가 소설을 이끌어간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누군가 내게 20센티미터쯤 되는 뱀을 건네주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도 뱀은 징그러웠고 받자마자 손에서 놓쳐버렸는데 그것이 목옆을 스르륵 지나가는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그만큼 이 작품은 메시지보다 이미지가 더 크게 다가왔다.

 

 

난 너를 알아. 1972년에 넌 전학생이었잖아. 우리는 같은 책상에 나란히 앉아서 수업을 들었고……

 

  소설은 나를 안다는,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받는 것부터 시작된다. 전화를 받은 인 김길라가 어린 소녀가 되어 전학서류를 건네러 가고 여교사 김길라를 만난다. 그리고 운동장 가운데에서 늙은 길라를 만나며 끝이 난다. 시간을 초월한 세계 안에서 방황하고 폭행당하며 현재를 벗어나고자 하는 많은 김길라가 중심에 서있다. 이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등장하고 이야기하고 꿈을 꾼 뒤 죽어간다. 한 사람 안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날 만큼 부딪치고 깨지면서 쌓여진 역사와 아픔, 고통이 있다.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 폭탄과 핵무기, 전쟁 그리고 무서운 소문들 앞에서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떨게 된다. 그런 인간의 심리 속으로 길라가 되어 한없이 들어가다 보면 물과 뱀에게 둘러싸여 악몽을 꾸는 여교사 김길라를 만날 수 있다. 물과 뱀은 여교사 김길라에게 끔찍한 폭력을 휘두르고 그 안에서 빠져 나오 지 못하는 그녀는 마지막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그들의 존재를 마주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것만은 제발 안 된다고.

 

 

날 죽여줘. 소리도 없이. 직관도 없이.

하지만 뱀과 물은 여교사를 죽이지 않았다. 아니, 그러기 전에 그들은 마지막 의례를 치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여교사의 양쪽에서 나란히 서서, 천천히 마스크를 벗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여교사는 극도의 패닉에 빠졌다. 지금까지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자비로운 전희에 불과했다. 그녀는 제정신을 잃었다. 머리를 움켜쥐고 쓰러지며 발광했다.

안 돼, 안 돼! 마스크를 벗으면 안 돼! 그건 안 돼! 너희들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날 계속 때리고 모욕해! 날 강간하고 살해해도 좋아! 날 고기 가는 기계에 넣고 갈아버려! 내 껍질을 벗기고 피와 기름을 끓여서 비누로 만들어버려! 하지만 제발 부탁이니 마스크는 벗지 마! 마스크는 벗지 마! 내가 너희의 얼굴을 보게 하지는 마! 너희가 누구인지 알게 하지는 마! 216~217.p

 

  꿈속에서 여교사 김길라는 뱀과 물에게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내던져 준다. 그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처럼. 그러나 그들이 마스크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려고 했을 때 제발 그것만은 감당할 수 없다며 멈추어 달라고 애원한다. 그녀가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폭력을 당하는 가 폭력을 휘두르는 와 만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고통의 가장 밑바닥, 그 근원을 마주대할 용기가 우리에게는 없다. 아니 그것과 마주하는 것은 자신을 분해시키는 가장 큰 형벌일 것이다. 우리는 예의와 규칙, 법과 상식 안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지만 어떤 상황에서 자신도 몰랐던 악의가 튀어나오고, 끔찍한 상상을 하며, 믿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모습들을 많이 보아왔고, 또 잊었다.

 

 

어린 시절. 그것은 막 덤벼들기 직전의 야수와 같았다고 여교사는 생각했다. 모든 비명이 터지기 직전, 입들은 가장 적막했다. 시간과 공기는 맑은 술처럼 여교사의 갈비뼈 사이에 고여 있었다. 염세적인 사람은 일생에 걸친 일기를 쓴다.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

223.p

 

 

  <뱀과 물>을 읽다가 미궁 속을 헤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계속 읽고 무슨 말이라도 쓰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내 안에 있는 것 중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내 안에도 수많은 내가 존재하니까. 그렇지만 나또한 내안의 어두운 무언가를 마주하기란 두렵고 무섭다. 나를 바라보는 나의 눈이 제일 무섭다. 뱀과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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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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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이라고 하기에 분량이 꽤 많았던 표제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긴 제목에서 느껴지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 그것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인물들의 섬세한 몸놀림, 넘어지고 상처받는 사회에서 한 개의 작은 점으로라도 남고 싶어 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접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소수자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과장하거나 동정심을 유발 하지 않은 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낯선 세계에 대한 낯설지 않은 그의 글이 작품을 읽는 사람들을 흡수한다. 우리는 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한 개의 점이라고. 아이러니한 유머가 절망의 습기를 머금고 작품 곳곳에서 올라오지만 어둡거나 음흉하지 않아 좋다. 결국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하나의 인생을 살다가 떠나갈 사람들이니 점으로 남은 사람들도 언젠가 지워지고 말 것이다.

 

현대무용입니다. 작품의 제목은 나는 세상의 아주 작은 점이다.’

……

우리는 세상의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세상의 아주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점은커녕 그 어떤 것도 되지 못했다. 인생을 걸고 했던 일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되어버렸다. 칸영화제를 가기는커녕 제대로 된 퀴어 영화를 찍지도 못했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어영부영 나이만 처먹었다. 동성애자이면서 제대로 동성애를 하지도 못 했고 그것도 모자라 이성애자들로부터 마이크 하나조차 제대로 훔치지 못했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215.p

 

세상이 놀랄만한 영화를 찍고 싶었으나 이제는 성인영화를 복사한 불법 사이트 관리자에게 항의 메시지를 보내는 일을 하고 있는 와 세상에 한 점이 되고 싶었다는 무용가 왕샤는 우습게도 자이툰 부대에서 만나 서로의 몸을 탐하고 좋아하게 된다. 세상에는 자신들을 거부하는 것뿐이며 이루고 싶었던 일들은 시간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하루하루 고요하고 지루한 일상이 지나가는 것 같지만 세상에서 소외된 것 같은 두 사람은 끊임없이 몸부림치다가 쓰러진다. 여전히 하나의 점이 되지 못한 채.

왕샤처럼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인물들은 가난과 편견, 무너진 꿈을 부여잡고 있는 나약한 자신과 벽 같은 현실에 가로막히고 있다. 그러면서도 피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에 자신의 욕망을 심어놓지만, 결국 삶도 관계도 뒤죽박죽 알 수 없는 허공 속에서 부유한다.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 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대한 짧은 농담>와 제제의 이야기이다. ‘는 제제가 게이전용 마사지 숍에서 일하는 것이 불안하지만 그를 막지 못한다. ‘는 제제가 잠들기 전에 들려주는 우스운 이야기에 기대어 외로움을 이겨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부산국제영화제>는 하나의 연작소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잃어버린 개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마치 블랙코미디 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그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부산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또다시 위선으로 가득한 친구들을 만나고 서로의 관계를 생각한다.

 

…… 우리는 그 많은 추잡한 일들을 공유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하긴 상대방에게 진실을 숨긴 채 다른 것들을 욕망하며 사는 우리의 관계야말로 지극히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커플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부산국제영화제> 123.p

 

철저히 연출된 모습만 보여주고 행복을 연기해 보지만 결국 그들에게 남는 것은 손에 쥐어보지 못한 꿈과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분하기 힘겨워진 텅 빈 자신들이다. 한편 <조의 방>. ‘는 조와 함께 머물렀던 그의 방에서 젊음과 사랑과 신뢰를 빼앗겼다. ‘는 손님에 따라 유나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가 되며 과거의 자신을 잊으려고 한다. <햄릿을 아십니까?>10대와 20대 초반까지 연습생 시절을 보내며 결국 데뷔도 하지 못한다. 인심 쓰듯 찾아온 방송국 관계자의 서바이벌 오디션 나이 많은 연습생 캐릭터를 제안을 받고 출연하지만 결국 다시 내려오고 만다.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흘린 땀과 빚을 지면서 바꾼 얼굴은 현재의 삶에 절망과 포기만을 안겨주었다.

사람들은 참 많은 노력을 하면서도 많은 것을 잃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아프고 무덤덤해지고 외로우면서도 혼자이기를 바라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안보윤의 <소년7의 고백>은 읽는 내내 불편했고, 박상영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이해하기 다소 난해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황현산, 허수경 선생님이 걸어간 길에 동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앞 세대와 다음 세대가 또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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