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가야 한다
정명섭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은 힘이 없다. 임금과 사대부는 후금과 명나라의 싸움에 우리 군사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야기는 흥미롭게 술술 읽힌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머릿속으로 영상이 그려진다. 시간이 흘렀지만 국민의 안위보다 명분과 사대의 예를 더 중시하는 정치권, 약삭빠르게 돈의 냄새를 맡고 움직이는 장사꾼들의 모습은 바뀌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하다. 그러나 소현세자나 인조의 삼전도 굴욕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강은태와 황천도 같은 작은 개인의 고통스러운 삶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가 짐승과 같은 생활을 하며 힘겹게 하루를 버티며 집으로 돌아갈 날을 꿈꾼다. 모두에게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게 무엇이든 말이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살아야 한다. 조선에서 노비로 살던 사람들은 낯선 땅에서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양반으로 살던 사람들은 더 이상 양반이 아니다. 그로 인해 이중적 아픔이 가해진다. 어쩔 수 없이 체념하며 고통과 모욕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그저 패배한 포로로서 주인을 위해 일해야만 한다. 양반에서 포로로, 포로에서 노비로 신분이 바뀌고 삶의 방식도 바뀌었다. 생각과 가치관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긴 했지. 출정할 때 아버님이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이니 그들의 뜻에 따라야 한다면서 날 이곳으로 보냈네.”

정말입니까? 양반 중에서도 자기 자식을 출정시킨 사람이 있었군요.”

아버지는 나보다도 가문을 더 사랑하시는 분이니까. 날 이용해서 가문의 살길을 찾으신 거 지.”

어쨌든 죽지 않고 살아났으니 돌아갈 날이 올 겁니다.”

……

아무리 그래도 양반이신데 어찌 형제도 아니고 친구가 됩니까?”

여긴 조선이 아니잖아. 양반이니 백성이니 하는 건 부질없는 구분이야.”

감옥 너머의 황량한 벌판을 바라보며 말하던 강은태가 덧붙였다. (84~85.p)

 

 

  노비였던 황천도와 양반이었던 강은태는 서로를 의지하며 타국에서의 삶을 견딘다. 언젠가 꼭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말이다. 두 사람이 친구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조선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포로라는 신분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가 살고 싶은 조선에서는 같을 수가 없다. 임금이 바뀌고 속환사가 오고가면서 양반인 강은태는 큰돈을 내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노비인 황천도를 데리고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기에서부터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친구의 아픔을 헤아리지 않은, 이미 친구 이전의 양반으로 돌아간 강은태나 그를 죽이고 가짜 강은태가 되어 돌아가는 황천도 모두 전쟁의 피해자이자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만들어낸 비극의 주인공이다. 황천도는 순식간에 친구와 그를 데리러 온 사람을 죽이고, 후르사와 거래한다. 큰돈을 얻을 수만 있다면 돌아갈 사람이 누구이든 그는 상관이 없다.

 

 

  강은태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온 황천도는 그의 가족들을 속이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순간순간이 의심과 염려로 위태롭고 불안하지만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안락함과 부를 누리며, 황천도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살인과 방화를 통해 사들인 새 인생은 또 다른 계략과 거짓을 통해 죽음들을 부른다. 이기적이고 차가운 그의 마음은 흔들리는 고뇌 속에서도 끝내 가짜 인생을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

 

 

  아무리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지만 아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동안 나누었던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서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한다는 설정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또한 역병으로 죽었다는 오월이가 뒷부분에서 상이와 함께 나오는 부분(286.p)은 치밀하게 퇴고를 하지 않은 것 같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자신이 살았던 곳을 떠나 일순간 삶과 신분이 바뀌고,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져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아야만 한다면 우리는 현재의 상식적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전쟁은 누구를 위해서든 어떠한 명분을 내세우든 정당할 수 없다. 비극은 더 큰 비극을 초래할 뿐이다. 그 속에서 희생당하는 것은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강은태로 살아야 하는 황천도의 고민에 마음이 갔다.

 

 

하지만 벌레처럼 살고 있는 아버지 황음치를 떠올린 황천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강은태로 살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런 일도 안 하면서도 끼니 걱정을 하지 않고, 솜털처럼 부드러운 비단옷을 입고 따뜻한 솜이불을 덮고 자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하고도 완벽하게 강은태로 살아야 했다. (189.p)

 

 

  이 고민은 평생 그를 따라 다니며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완벽하게 강은태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황천도의 그림자에서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그것은 아마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아픈 상처와 슬픔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꿋꿋하게 잘 살아간다.
가끔 울고 아파하긴 하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민규의 소설을 다시 읽으며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생각해 본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갖고 있는 책이 2011년에 인쇄된 것이니까 아마 7~8년 전에 읽었을 것이다. 그 당시 형광펜으로 그었던 문장이 아닌 다른 문장에도 새로운 하이라이트가 그려진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여전히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도 못 하고 뱅뱅 돌고만 있는 느낌이다. 푸시맨 승일을 비롯한 소설 속 주인공들은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박민규의 <<카스테라>>속 단편들은 모두 마른 눈물 같은 이야기다. 흐르다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눈물 혹은 눈물조차 흘릴 시간이 없는 눈물.

 

 

  모두 웃기고 재미있으면서도 슬프고 안쓰럽다. 또 처절하면서도 엉뚱하고 환상적이라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글들이 내일 아침이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저절로 의심이 가기도 한다. 슬퍼도 슬프지 않고 쓸데없이 나아질 것이란 희망에 기대지 않는데 따뜻하고 잔잔하다. 소설이 점점 작아져 사라져버릴 것 같은 존재들에게 말을 걸어준다. 그래서 더욱 눈길이 가고 마음이 아프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가버린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승일은 아버지의 작고 초라한 민모습을 보게 된 날, 더 이상 집안에 손을 내밀지 않는다.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만의 산수를 해 나가지만 마이너스 된 인생은 좀처럼 플러스 되는 삶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이문열의 <<하늘길>>에 보면 지지리 가난한 청년이 그의 아버지에게 묻는다. “착하고 부지런하게 살면 복을 받을까요?”, “글쎄다. 내가 살아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은 것 같고.” 그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고 죽자 청년은 답을 찾기 위해 옥황상제를 만나러 길을 떠난다. 대한민국에는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매우 많다. 승일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푸시맨과 공포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동물 같은 전철을 타고 매일 일터로 가야하는 사람들. 그들은 너무나 열심히 부지런히 산다.

 

 

저 사람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 화물이나, 뭐 그런 걸로 생각하라 말이야. 알겠니? 알겠니? 알겠지.에서 다시 열차가 들어왔으므로, 나는 새로이 전열을 가다듬었다. 파아, 하아, 의정부 행이었던 두 번째 열차는, 아마도 두 배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이건 마치, 전 인류가 아닌가. (25.p)

 

 

  그 화물 속에 미처 오르지 못한 또 다른 짐짝 같은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다음 차를 기다린다. 다시 튕겨져 나오면 안 되니까. 담담하지면서 물기 없는 마른 문장들이 독자의 마음을 더 사로잡는다. 날마다 목을 죄는 현실의 괴물에게 잡혀 먹히지 않기 위해 우린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매일 묻지만 매일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것 같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도 몇 줄의 문장을 SNS에 올릴 때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예전에 몇 번 좋은 의도를 갖고 올린 글이 나의 생각과 다르게 왜곡되고, 다양한 의견을 나눈다는 것이 기분 나쁘게 마무리된 경험 때문이다. 누군가 함부로 평가를 하면서 나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해석들이 등장하고, 거기에 또 다른 지적과 비난이 꼬리를 물면서 글을 남기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기가 세게 맞설 수 있거나 끝까지 당당하게 붙들고 갈 힘이 없다면 차라리 표현하지 않는 것이 속편하다고 생각하면서 좋은 이미지나 모티브들을 흘려버리곤 했다. 그때 몇 문장으로 던져진 공격과 무시는 내 마음에 상처와 분노, 자신감 상실과 같은 부정적인 마음을 심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만큼 나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공격받을 수도 있지, 그냥 말도 안 되는 공격성 글이라면 무시하면 되지, 지적을 하면 화를 내기 전에 고칠 것은 고칠 수도 있었는데 능력이 부족했던 나는 피하고 외면하는 제일 쉬운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SNS 안에서 단 한 개의 문장이 불씨를 키우고 그것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면서 도를 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면 더 이상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된다. 그 안에서 극단을 향해 가는 갈등이 벌어지지만 문제를 해결하거나 책임질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시무시한 힘이 공격을 가하는데 상대는 허상 같고 존재마저 분명치 않다. 결국 상처입고 죽어가는 사람은 먼저 공격당하는 당사자와 그 가족들이다. 눈에 보이는 뚜렷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사회에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한 그 대상이 돌고 돌아 불특정다수인 누군가에게 돌아가게 되며, 나는 그런 일 없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사람이 산속이나 무인도에 들어가서 사는 자연인이 아닌 이상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끊임없이 2, 3차 피해자가 되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  

 

  소설가 P씨는 일 년에 평균 한 권꼴로 6년 째 소설만 발표했다. 뛰어난 문체나 섬세한 문장, 개성 있는 구조를 갖춘 작품은 아니지만 첫 작품이 케이블TV의 드라마, 두 번째 작품은 영화, 또 다른 작품이 웹드라마로 제작되면서 소위 수익이 유지되는 작가로 굳어졌고, 작가의 책이 꾸준히 제작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소설가 P씨의 작품들은 악평과 비난에 휩싸이게 된다. 사람들의 평가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작가를 대중은 더욱 혹독하게 몰아붙이고 자신들의 지식과 편협한 사고를 비평으로 둔갑시켜 소설가의 작품들을 죽여 나간다.

 

 

……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날카로운 면도날들을 저마다 혀 밑에 숨기거나 손 끝에 꽂고 있어서, 종합 순위 근처에도 가지 못한 이 농구 이야기 역시 서사의 포가 떠지는 걸 피해갈 수 없었다. (36.P)

 

 

  말은(혹은 글) 무섭고 날카롭다. 심장을 찌르는 강도가 매우 높다. 그 말과 문장에 누군가는 목숨을 잃을 수 있고, 사회의 힘의 추가 달라질 수 있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논술주간 이강희는 끝에 단어 3개만 바꿉시다. ‘볼 수 있다가 아니라 매우 보여진다.”라고 말했다. 같은 의미라도 서술어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말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대중의 외면과 지지는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그 힘에 눌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나를 포함하여 우리 주변에서는 매일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개개인이 마음을 단단하게 하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요구되지만,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존재와 싸우면서 평정심을 갖는 다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소설가 P씨도 자신이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을 것을 예감한다.

 

 

서점 매대에서 책이 내려가고 얼마 뒤 그의 계정은 삭제되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보여준 이야기의 임팩트가 그리 크지 않았으므로 그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거나 그걸 두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들 중 누구도 출판사 계정에 문의를 넣지 않았고, 출판사가 P씨의 근황을 꿸 만큼 그에게 공을 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으나, 어쩐지 P씨는 소설가로서 소설가의 삶을 종료하고 자신의 일상이나 취미에 조용히 스며들었으리라는 확신이, 드는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봐도 부족한 말들의 숲을 어설피 배회하는 자가 될 것이며, 어디서도 그의 발자국을 다시 발견하지는 못하리라는, 확신이. (38.p)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이 두려운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부터 부주의하게 누군가의 가슴에 말과 문장으로 비수를 꽂았을지 모른다. 어설픈 지식과 생각을 멋지게 뽐내면서 다른 이들의 말의 세계를 황폐하게 했을 수도 있다. 쉽게 놀린 손가락과 입술이 돌아 돌아서 내게 온다고 생각하니 등에 땀이 난다. 그러나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 없다. 앞으로도 내 자신의 마음을 경계하며 계속 읽고 쓸 뿐이다. 다만 다른 이의 작품을 읽고 평해야 하는 글이라면 그 글을 쓴 사람이 고민했을 시간과 노력을 생각할 것이다. 창작에 임하게 될 때는 온전한 와 글쓴이로서의 에 대한 평가에 최대한 흔들리지 않도록 나 스스로를 다독이고 사랑할 것이다. 수고했다고. 또 쓰면 된다고 말이다. 글은 글이고, 나는 나일뿐이라고 말하면서. 세상에 모든 이들은 작가이고, 독자이자 비평가라는 것을 잊지 말자고.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리새우 : 비밀글입니다 - 제9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42
황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펼치고 한 번에 읽어버린 4시간 동안, 나는 잊고 있었던 청소년 시절의 내 모습과 마주했다. 그냥 과거의 학창 시절이 떠오른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것처럼 눈앞에서 나와 내 친구들이 생생하게 움직이고 말을 했다. 나도 다현이처럼 무리 속에 있기도 하고, 혼자이기도 했으며, 내 마음을 감추고 친구들과의 공통 화제에 맞춰 이야기 나누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느라 피곤해 했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빠지지 않고 참여했던 생일모임이나 감정의 극심한 변화를 겪고 있는 친구와 이유 없이 멀어지기도 했고, 서로 모함을 주고받으며, 한 순간 이상한 아이가 되기도 했던 우리들. 시간이 지나 지금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빛났던 시절이라고 이야기 하며 되돌아보지만, 그 안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입시와 친구관계 때문에 속을 앓으며 나름 처절하게 버티고 서 있는 우리들이 있었다.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인간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또래 집단에 끼지 못한 사람은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린다. 무리에 끼지 못했다는 것은 낙오자와 같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도 자신의 아픔을 숨기기 위해 다른 친구를 아프게 해야 했던 미성숙한 청소년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어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노은유는 왜 미운털이 박혔을까? 하긴 그게 뭐 중요한가. 그냥 싫은 사람도 있는 거지. 어쨌든 내 친구들이 너무너무 싫어하는 아이랑 내가 짝이 되었다. 환장하시겠다          14.p

 

원래 그렇다. 누구 한 명이 그 애 좀 이상하지 않아?’ 이렇게 씨앗을 뿌리면, 다른 친구들은 이상하지. 완전 이상해.’라며 싹을 틔운다. 그다음부터 나무는 알아서 자란다. ‘좀 이상한 그 애로 찍혔던 아이는 나중에 어마어마한 이미지의 괴물이 되어 있는 것이다. 52.p

 

 

  그러고 보니 나 또한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싫어하니 분명히 무슨 문제가 있거나 나쁜 사람일거라는 선입견을 갖고 타인에게 감정의 폭력을 휘둘렀던 때가 있다. 등장인물들과 함께 나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각자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감싸 안고 성장하는 친구들을 보며 공감할 수 있어서 기뻤다.

 

 

  한때 왕따의 경험을 겪었던 다현이는 예전의 외로웠던 시절로 절대 돌아가기 싫어한다. 그래서 아람이가 싫어하고, 뒤를 이어 다섯 손가락 친구들이 싫어하게 된 은유를 무작정 미워하며 가까워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카톡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 순간이 너무너무 좋기 때문이다. 이제는 외톨이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도 친한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청소년들에게는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 친구들의 무리가 그들의 세계이고, 그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소속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기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무서울 것이 없는 때이기도 하다.

 

 

매일이 축제 같았다. 우리 다섯이 뭉쳐 다니니 함부로 나를 대하는 아이가 없었다. …… 등교할 때 영혼을 집에 두고 나온 거라고. 이렇게 소중한 친구들을 다시 잃을 순 없다고.

그런데 순둥이로 살기로 작정하니 다른 문제가 생겼다. 아무래도 어떤 사람들한텐 내가 만만해 보이는 것 같다.

…… 어른들은 학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는 성적이 바닥이거나 지독하게 가난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른들의 그 단단한 오해를 깨뜨릴 자신이 없고, 무시당하기도 싫다. …… 33.p

 

  다현이는 친구들 안에서 안정을 찾고 행복해 하지만 한편으로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사람은 자신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서서 버틸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 그것은 누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란 존재를 내 자신이 다독이고 홀로 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시간 앞에 홀로 서서 견뎌본 사람은 그만큼 성장하고 강해진다. 그 힘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상대방을 존중하게 되고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게 만든다. 다현이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고 체리새우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것이나 은유가 영화를 좋아하여 다른 사람들이 침범할 수 없는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것처럼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많이 아프고 힘들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다섯 손가락 안에서 포지션을 잃고 설아와 친구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다현이가 대견스러웠다. 이제 서서히 혼자 서는 연습을 하며 조금씩 강해지는 다현이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나무들처럼 혼자야. 좋은 친구라면 서로에게 햇살이 되어 주고 바람이 되어 주면 돼. 독립된 나무로 잘 자라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 그러다 보면 과제할 때 너희처럼 좋은 친구도 만나고, 봉사활동이나 마을 밥집 가면 거기서도 멋진 친구들을 만나. 그럼 됐지 뭐.” 156.p

 

 

  은유의 말처럼 아픔을 딛고 조금씩 강해진 다현이가 다른 친구들에게 햇살과 바람이 되어 주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나도 우리도 함께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