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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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나의 부모님은 작은 공장을 운영하셨다. 소설 속에서 공상수와 조선생이 찾아다녔던 봉제공장의 모습과 비슷했다. 아버지가 검고 푸른 원단위에 쓱쓱 제단을 한 뒤, 로봇 같은 제단기로 잘라내면 엄마와 3~4명의 직원들이 미싱으로 그것을 드르륵 박아냈다. 그러면 짧은 시간 안에 야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입고 겨울을 날 수 있는 따뜻한 작업복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옷들은 남대문과 동대문 시장의 가게로 팔려나갔다.


 그는 미싱을 환기할 수 있게 실을 가지고 다녔다. 미싱을 팔자고 미싱에 대해서만 설명한다면 하나 마나 한 영업이었다. 상상할 ‘여지’를 주지 않으니까. 여지는 삶에 있어 숨구멍 같은 것이었다. 상수는 그런 것이 없는 삶을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9.p)


 그래서 공상수가 팔아야 하는 미싱과 차에 가득 실고 다니는 실들이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반갑고 그리웠다. 어렸을 때 동생과 실을 감아 두었던 심으로 망원경이나 무전기를 만들어 놀던 추억도 떠올랐다. 소설의 첫 장을 펼쳤을 뿐인데 이제는 돌아가시고 안 계신 아버지가 빠르고 정확하게 제단을 하시던 모습과 라면이나 핫도그, 튀김과 같은 야식을 만들던 지금보다 훨씬 젊은 엄마가 떠오른다. 공장을 스쳐갔던 아주 먼 친척들, 사돈의 팔촌들도 모두 잘 살고 있겠지. 내용이나 등장인물과는 상관없이 미싱과 실만으로도 이 작품은 내 마음속에 그렇게 들어와 버렸다. 


 소설은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 말해 주는 장르이다. 한 편의 소설 속에는 소우주와 같은 사람들의 삶이 담겨있다. 끝까지 읽지 않는다면 절대로 그 인물들의 세계를 알 수 없다. 상수와 경애의 겉모습만 아는 사람들은 그들이 낙오자 같고, 사회성 없는 꽉 막힌 사람들처럼 보일 것이다. 보이는 모습으로 평가하고 손가락질 하면서 싸구려 동정심을 보내고, 필요한 순간 적당히 이용하다가 때를 봐서 밟아버릴 수 있는 존재감 적은 혹은 없는 사람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자기 안에 수많은 ‘나’가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성장하며 겪어내야 했던 아프고 외로운 순간들로 꽉꽉 채우고 있다. 그 순간들이 바로 오늘날의 모습을 만든 것이다. 그렇기에 타인의 눈에 보잘 것 없는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그 사람만의 세계는 살아가는 한 확장되고 깊어지고 있다. 어떤 사람이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회사에서 강제퇴직 당하고 육체노동을 하는 일영이 경애에게 “힘이 나서 사는 게 아니다. 살아서 힘이 나는 거지.” 라고 말했던 것처럼. 


 성인이 되어 사귀게 된 사람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과거의 어느 한 시절 같은 장소와시간에 함께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되고 신기해할 때가 있다. 그때는 분명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던 상관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어떻게 깊은 인연을 맺고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었을까. 살면서 한 번도 만날 일 없을 것 같았던 상수와 경애도 만남과 만남을 거듭한다. 그 중간에는 친구 은총이 있고, 반도미싱이라는 회사가 있으며, SNS라는 가상공간이 있다. 


 시인은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말했지만 좀 더 나아가 그 섬과 섬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개의 다리들이 연결되어 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자주 지나다니면서도 그 위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누군가의 발자국과 숨소리, 체온이나 음성과 같은 흔적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 뒤를 추적해본다. 우리는 어떻게 서로에게 오게 되었을까. 분명 처음은 우연으로 시작했겠지만 수많은 갈림길에서 선택하고 또 선택하면서 자신과 마음이 닮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우연 속에 숨어있는 필연일 수밖에 없다. 처한 환경과 모습은 달라 보이지만 마음과 생각을 나누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상수는 ‘언니는 죄가 없다’를 떠나야 할 때 경애이자 수많은 언니들인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말한다.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강변북로를 혼자 달려 돌아올 수 있잖습니까. 건강하세요. 잘 먹고요, 고기도 좋지만 가끔은 채소를, 아니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176) 


 살면서 조금씩 부스러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까. 단단한 바위들도 파도와 바람에 부딪쳐 처음 모습에서 여러 번 변해가는 데 직장과 일, 질병과 가족, 새로운 환경, 주변 사람들의 모함과 외면으로 우리들의 모습은 수십 번 깎이고 변해간다. 그렇다 해도 ‘나’는 여전히 ‘나’인 것이다. 결국 은총의 친구이고 팀장이자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해준 언니였던 상수가, 은총이 좋아했던 여자아이며 상수의 한 명 밖에 없던 팀원이자 애인의 배신에 아파했던 마음을 상수(언니)에게 털어 놓은 피조였던 경애가 베트남이란 낯선 땅에서 서로의 진짜 모습들을 확인한 것처럼 말이다. 돌고 돌아 각자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 두 사람은 서로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상수가 경애를 기다린다. 어느 한번의 일요일에는 경애가 올 거라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349.p) 


 경애도 상수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지금 당장 만나지 못 한다고 해서 조급해 하지 않아도 된다. 수선떨지 않고 어느 순간 슬며시 추운 겨울을 지나 봄이 오듯이 경애가 올 수도 있다. 그때까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다듬고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면서 말이다. 


 나는 오늘 무엇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내가 찾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기위해 애를 쓰고 있는 중인가. 두 달 전에 돌아가신 아빠에게 묻고 싶지만 들을 수 없는 목소리에 슬퍼진다. 한동안 나의 마음은 기다리고 찾아가는 그 어디쯤 서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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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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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는 다르지만 누구나 지나온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어요. 무엇보다 재미있고 빨려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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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 제8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39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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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에서 온 은유의 편지를 읽으며 시간 너머 그리운 것들이 꿈틀거리며 살아났다. 동생 책갈피 속에 끼어있던 파란색 바탕에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이 그려져 있던 500원짜리 지폐를 급하게 쓰고, 1000원짜리 지폐로 돌려주었다가 심하게 싸웠던 일,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나와 연합고사와 학력고사를 보았고, 틈틈이 농구대잔치와 프로야구에 열광했던 세대로서 과거 은유의 편지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예전으로 돌아간 간 듯 했다.

 

 

  김용택 선생님의 글처럼 그리운 것들은 모두 산 뒤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리웠던 것은 두 은유가 주고받은 편지이다. 중학교 때는 요즘 우리가 카톡을 주고받는 것만큼 편지를 주고받았고, 그렇게 모아둔 편지가 운동화 상자로 몇 개나 되었는데 지금은 그것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가 없다. 내가 편지를 자주 쓰지 않게 되었던 것은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쓸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720분까지 등교, 10시에 자율학습이 끝나는 시대에 살았다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다. 그러다가 대학교에 입학하여 친구들과 사촌들끼리 학보를 주고받으며 띠지에 썼던 문장들이 나름대로 멋있고, 운치 있었다. 1989년생 작가가 70년대 생들의 청소년기와 청년대를 재미있게 풀어낸 것이 신기했다. 그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 몰입이 잘 되고, 술술 읽힌다. 감동과 가독성 모두 청소년 도서로서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의 요소 중 한 가지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마지막 반전을 노리는 아빠의 편지와 그로 인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흔한 방식의 단점을 보완해 줄 만큼 현재 은유의 외침에 집중하게 만든다. 작가가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편지가 오고가는 중간지점부터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린 은유가 큰 은유에게 그 동안 하지 못한 어리광을 마음껏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를 잃고 15년 동안 외롭게 지내오느라 힘겨웠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울부짖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두 은유와 현철이이며 아빠가 각자의 골방에서 나와 서로를 만나기 위해 걸어오는 것 같다. 세 사람의 세계 속에서 교집합을 찾으려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아지는 것 같이 세 사람 모두 용기를 내어 상처받을까 외면했던 현실을 뚫고 천천히 마주할 시간을 향해 말이다.

 

 

  세상에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특별한 일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일 거야. 46.p

 

 

  서로에 대한 오해와 두려운 감정으로 인해 진실을 밝히지 않은 채 살아온 부녀는 엄마의 편지로 인해 점점 서로를 알아가게 된다. 어린 은유의 상처가 깊었던 만큼 아내를 잃고 갓난아기인 딸을 키워야했던 아빠의 고통과 외로움도 컸을 것이다. 가족이라고 해서 서로의 노력과 책임감 있는 행동 없이 무조건 이해할 수 없는 거니까.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가족이라고 해서 네가 원하는 모습대로 네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란 뜻이야.

  어쩌면 가족이라는 존재는 더 많이, 더 자주 이해해야 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르지. 137.p

 

 

 “넌 가족이 뭐 엄청 특별한 건 줄 알지? 가족이니까 사랑해야 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믿지? 웃기지 마. 가족이니까 더 어려운 거야. 머리로 이해가 안 돼도 이해해야 하고, 네가 지금처럼 멍청한 짓을 해도 찾으러 다녀야 하는 거야. 불만 좀 생겼다고 집부터 뛰쳐나가지 말고. 너도 엄마가 왜 그랬을까 생각하는 척이라도 해봐. 최소한 너도 노력이라는 걸 하라고.” 137.p

 

 

 아빠의 결혼과 엄마의 존재를 알게 된 은유에게 앞으로 더 많은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물론 힘들고 어려운 일들도 계속 되겠지만 예전보다 좀 더 지혜롭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만큼 은유의 세계가 확장되고 넓어졌을 테니까. 큰 은유의 편지를 계속 받을 수 없겠지만 다른 엄마가 옆에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줄 테니까.

 

 

 어쩌면 우린 너무 많은 기적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사는지도 모르겠어. 217.p

 

 그 먼 시간을 건너 네 편지가 나한테 도착한 이유를.

  너와 내가 사는 세계의 시간들이,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 있는 힘껏 너와 나를 이어 주고 있었다는 걸.                 

  참 신기하게도. 참 고맙게도. 218.p

 

 

 돌아보면 우리들도 누군가 세계를 건너 와주었기에 지금 여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현재 우리가 살아 움직이며 함께 하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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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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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자기만의 구덩이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3년 전 연말에 '세실리아'를 읽고 소설이 끝나는 여백에 '작은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들이 요트동아리와  세실리아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썼다. 3년만에 책장에 꽂아두었던 소설책을 다시 꺼내 가방에 계속 넣고 다녔다. 책 속에는 많은 문장에 밑줄이 쳐져 있었는데 그때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처음에 책의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이 책을 읽었을 당시의 내 모습은 기억났다. 


 소설의 시작도 '송년'이다. 대학교 동창들과 송년회를 하는 자리에서 정은은 '엉겅퀸'이라 불렸던 동아리 친구 세실리아에 대해 듣는다. 남자 동창들은 끈질기게 엉겨붙는 세실리아에게 '엉겅퀸'이란 별명을 붙여 주었지만 그 별명이 진짜 뜻이 엉덩이가 아주 건강하고 풍만해서 지어진 것이란 말을 듣게 된다. 함께 요트동아리를 하며 20대 초반을 지낸 친구들이지만, 남자들의 성희롱에 가까운 말이 거슬렸다. 3년 전에도 그랬을까. 작가도 그것을 의식하였을까 정은이 누구하고나 잘 수 있는 송년이지만 그렇지 않겠다고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다.


 세실리아는 같은 동아리 친구인 치운이와 연얘를 했다. 다른 동아리 부원들은 그런 세실리아를 미워하고 따돌렸다. 그리고 세실리아는 사라졌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투명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정은은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지만 무관심이나 방관도 동료를 그림자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사라진 세실리아가 친구들 사이에서 십 여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 입에 오르내린다. 사람들은 연못의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고 가라 앉게 만든 다음 가라앉은 연못 속에서 떠오를 때까지 기다린다.


동결이라는 상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내 안의 모든 것이 아주 차가워져서 살이 붙고 피가 붙고 똥도 붙고 눈물도 곁붙어서 차가운 것들이 견딜 수 없게 차가워서 붙고 붙다가 더는 붙을 수 없어 멈춰버린 상태. 가장 저점에서 엉기고 마는 상태. 그런 건 나쁠까. 좋을까. 아니면 나쁘지도 좋지도 않을까. (86.p)


 정은은 세실리아를 다시 만났다. 하나도 변하지 않는 풍만한 엉덩이와 몸매를 가진 까무잡잡한 세실리아. 송년에 친구들과 그녀에 대해 떠들었던 나는 신년에 그녀를 만나 작업중이라는 구덩이도 보고, 팔짱을 낀 채 함께 닭요리를 먹으러 갔다. 그리고 유럽에서 박지성보다 더 유명해졌다는 세실리아와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고, 어딘가 둥둥 떠서 흘러가는 것 같은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그리고 다시 송년이다. 인원은 작년보다 조금 줄어있다.


 세실리아는 그렇게 파고 또 파고 들어가서 어디까지 파들어가고 싶었을까. 그곳은 어떤 고통의 바닥, 말로도 이미지로도 전할 수 없고 오직 행위로만 드러낼 수 있는 상처들이 엉겨 있는 바닥이겠지. 여기가 바닥인가 싶다가도 또다시 바닥이 열리는, 그렇게 만화경처럼 계속 열리는 바닥이겠지. (100.p)


 어쩌면 세실리아는 삶을 알았다고 말할 만큼 무덤덤해지고 무기력해진 자신들에게 그래도 한때 젊고 싱싱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줄이 아니었을까. 자신한테 끌어 당길 수는 없으나 놓고 싶지 않은 줄말이다. 세실리아는 그런 친구들을 알고 있는 듯 구덩이를 파고  또 판 다음 그안으로 들어가 버릴 것만 같다. 우리들의 세실리아가. 그리고 나와 트 동아리 친구들도. 어쩌면 우리 삶이란 어딘가로 점점 빨려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각자의 구덩이만 다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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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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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풍경을 뒤에 두고 살고 있는가

김애란의 <<풍경의 쓸모>>

 

  사진을 찍을 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무척 평범한 사람,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날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그런 순간과 만났을 땐 잘 알아보고, 한곳에 붙박아둬야 한다는 걸 알 정도로…… 나이든 사람 말이다. 150.p

 

 

 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바라본 하늘이나 산은 평화롭기만 하다. 한 번 만나고 헤어질 타인들은 아무 이해관계 없이 만나 웃으며 인사를 나눈다. 자연스럽게 스치는 풍경들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기에 아름다워 보인다. 때로는 마음도 편안하게 해준다. 나와 상관없지만 늘 그 자리에 있어주며, 언제든지 내가 원할 때 바라볼 수 있어서 풍경으로써 쓸모가 있다. 그러나 그 풍경 속으로 가까이 들어가는 순간 더 이상 풍경이 될 수 없게 된다. 그 속에 들어가면 주체와 객체가 서로 감추고 싶은 어떤 것들을 들키거나 공유해야 하는 상황이 오고야 만다. 그것은 누구하고나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풍경이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고, 어떤 관계를 맺을지 선택해야 된다. 평생을 함께 하며 관계를 맺고 관리를 해야 하는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그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도록 손을 쓸 수밖에 없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불행한 곳이다. 삶은 불행의 연속이며 행복은 불행의 휴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다시 말하면 불행, 불행, 불행 사이 잠시 행복이 끼어 있다가 다시 불행해지는 것이 인생이라고. 그 잠깐의 행복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사람들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는다. 순간의 행복을 박제처럼 만들고 그것을 바라보며 위안이라도 얻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듯 전투적으로 사진을 찍고 남긴다.

 

 고속도로 주변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좀 심란했다. 여행 중 몇 번 오간 길인데도 그랬다. 풍경이 더 이상 풍경일 수 없을 때, 나도 그 풍경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 순간 생긴 불안이었다. 서울 토박이로서 내가 중심에 얼마나 익숙한지, 혜택에 얼마나 길들여졌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내가 어떻게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 잘 보였다. 158.p

 

 

 정우의 아버지는 엄마와 아들을 버리고 다른 여인을 향해 떠나갔다. 아버지는 그렇게 스스로 떨어져 나갔고, 두 사람에게 풍경처럼 자리만 남았다. 아버지는 풍경답게 정우가 자라는 동안 기념할 일이 생길 때나 선물을 보내왔고, 아들의 결혼식 때도 딱 풍경에 맞는 역할만 했다. 가족이었으나 더 이상 가족일 수 없는 사람들. 끊어진 관계라고 생각하지만 마지막까지 아주 가느다란 관계의 끈으로 엮어진 사람들은 더 집요하게 끊어지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미약한 것 같으면서도 울림이 크고, 어떠한 방향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아픔과 분노에 무방비로 서있게 만든다. 정우에게 아버지와 곽교수가 그러했다. 아버지는 사라졌다고 생각한 존재였으나 엄마의 아들의 아름다운 풍경을 빼앗아 혼자만 누리고 있는 사람이었고, 곽교수는 정우 자신이 기대고 만들어 나간 풍경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또한 허상과 착각으로 만들어낸 거짓 풍경이 되고 말았다.

 

 

 누군가를 향해, 그 누군가가 원한 미래를 향해 해상도 낮은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진 속에 붙박인 무지, 영원한 무지는 내 가슴 어디께를 찌르르 건드리고는 한다. 우리가 뭘 모른다 할 때 대체로 그건 뭘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뜻과 같으니까. 무언가 주자마자 앗아가는 건 사진이 늘 해온 일 중 하나이니까. 151.p

 

 

 곽교수는 어느 날 우연히 정우에게 다가와 아름다운 풍경이 되어 주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 정우는 자신도 멋있는 풍경이 되었다는 착각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능 력과 영향력 있는 사람과 친분을 유지하고,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저절로 우월감을 갖게 되기 마련이니까.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 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럽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정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중이었다. 173.p

                                                                             

 

 

 작가는 인간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 분노, 가장 극에 달할 때 오히려 담담하게 뻔뻔해질 수 있는 냉정한 마음을 표현해 주고 있다. 다른 여인과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찍은 아버지의 사진을 보게 되었을 때, 정우는 자신과 어머니에게 없는 사랑과 환희의 순간을 가진 아버지에게 배신감과 시기, 질투를 느꼈다. 그것은 분노와 부러움의 또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가을 풍경 속에 안긴 두 사람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쩐지 두 사람이,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들 같아서였다. 182.p

 

 

 나는 어떤 풍경을 뒤로 한 채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나도 모르게 내가 만들어내는 허상과 이기심의 풍경을 배경으로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두려워지곤 한다. 내가 스쳐간 많은 풍경들,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 몸과 마음으로 부딪치며 경험한 상황들이 나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이승환이 부르던 노래처럼 부조리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에 내 안에 숨지 않게 나에게 속지 않게 나에게 물어 보며 살고 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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