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 -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그 공존의 역사를 다시 쓴다, 비움과 나눔의 철학 3
이명권 지음 / 코나투스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슬람'이란 단어에는 무언가 낯선 이질감이 풍겨나온다. 가끔 영화나 책에 등장하는 터번 쓰고 수염 덥수룩한 남자나 부르카를 뒤집어 쓴 여자들을 보면 정말 나와 딴 세상 사람 같기도 하고.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세계사'는 언제나 '유럽'중심이고 서아시아쪽은 굵직굵직한 나라 몇개로 요약해서 배우는것이 전부인데다 암기 위주인 시험인지나 지나고나면 그마저도 가물가물. 한국은 조만간 하나님께 봉헌될지도 모르는 나라이다보니 이쪽 관련 소식은 대개 한쪽으로 편향되어있다. '탈레반'의 잔학성이나 여성학대 등. 얼마전 개봉 한 '연을 쫓는 아이'에선 탈레반도 나오고 소련도 나오는데 정작 미국은 빠져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 책은 (객관적이기보단, 우호적 입장에서)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와 그리스도교의 예언자 예수를 비교하고 (차이점보단 공통점을 보려고 노력한다) 이슬람 탄생 배경과 경전 꾸란, 다섯가지 기본 요소, 수피즘, 간략한 역사등을 설명한다. 거의 '이슬람 입문서'라고 붙여도 무방할 듯.

<구약성서>를 기반으로하는, 아브라함 종교에서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가 갈라져 나왔고, 지구의 아주 작은 부분에서 시작된 이들 종교는 서로 관용했던 초심을 잃어버리고 거의 전 대륙에 걸쳐 '종교'의 이름으로 싸워왔다. (사실 '종교'는 표면적인 눈가리개고 사실은 권력쟁취나 돈 등 '실용적'인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현대로 올수록.) 자신들이 진정한 후계자라는 신앙적 기준을 세우기 위해 타 종교에 적대적으로 변해가는 사회/정치적 배경들이 흥미롭다. 나같은 무신론자에게 각 종교간의 정통성 싸움은, 배다른 자식 여럿이서 왕위를 놓고 다투는 것처럼 느껴진다. 성서나 꾸란에는 서로 사랑하라는 좋은말도 많은데 하필이면 '다른 신을 섬기면 알라/주께서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문구에 집착하는 걸까.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가능한 구절들의 존재 자체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낸 것임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지.

이 책은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창조적 만남을 위하여'라는 취지에 걸맞게, 서로 대립되는듯한 요소들에서 공통점을 찾아내곤 한다. '알라'가 '유일한 신'이란 의미에서 '하느님'과 상응하는 말이고, 이슬람은 알라 외의 전능함은 부정하기 때문에 무함마드와 예수는 '한계를 지닌 인간'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와 다르지만 '절대존재 - 진리'를 추구하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고 본다. 차이를 보는 사람에겐 건널수 없는 강이, 공통점을 보려는 사람에겐 '조그만 차이'일 뿐이다. 이슬람적 요소가 가미된 무슬림 복음서와, 이슬람화된 예수를 예로 들어 "무슬림이 자신의 종교 안에 경건성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영적 스승을 초대해 왔던 이런 독특한 방식은 과거의 역사가 어떠했든지 종교간의 공존을 도모할 수 있는 모범적 사례(p.119)"가 된다고 이끌어내기 까지 한다. 저자의 말을 좀 더 길게 인용해보면

   
  우리는 신앙을 이해하는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가지는 교리적 정통성을 주장하는 보수적 입장과, 교리보다는 '상징성'을 강조하는 진보적 해석의 입장, 그리고 이들 모두를 하나의 보편적, 종교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종교학적 관점이 있을 수 있다. 보수적인 교리적 입장만을 서로 강조하다 보면 공존과 상생의 길보다는 분쟁과 파국의 길만을 걸어 갈 뿐이다. 삼위일체나 그리스도론의 교리만을 내세우기보다는 신 중심적 사고로 대화의 폭을 넓혀 갈 수 있는 것도 상존의 윤리를 도모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 상이한 문화권에서 자라난 종교인만큼, 그들 고유의 입장을 이해하고 열린 자세로 겸허하게 상대의 주장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다면, 다툼보다는 생태학적 문제와 같은 더 큰 주제를 가지고 지구 공존의 윤리를 더욱 발전적으로 함께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앙은 실존의 자리다. 실존이 투여된 신앙의 자리에 교리적 싸움으로 치닫기보다는 오히려 더 중요할지도 모르는 공존하는 지구의 평화를 위해 함께 사랑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p.160~161)  
   

 비종교인도 수긍할 법한 말이다. 좋은말이 늘 그렇듯 실현은 요원해 보이지만. 현대의 종교가 과연 "종교적 정통성/신성함"을 위해 서로 칼을 들이대는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지만 어쨌든 '이해'와 '공존'이라는 취지 자체는 좋다.

저자의 이런 "柔"한 자세는 이슬람 소개에도 드러난다. 히친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슬람이 정말로 독자적인 종교인지에 관해서도 의문이있다. 이슬람교는 처음에 다른 종교와 뚜렷이 구분되는 특별한 신앙을 원하던 아랍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으며, 아랍인들이 나중에 벌인 정복전쟁 및 아랍어와 항상 동일시된다......이슬람은 필요할 때마다 예전의 경전과 전통을 제멋대로 베낀 표절 집합일 뿐이다. 이런 표절 사실이 눈에 뻔히 보일뿐만 아니라, 그나마 표절해온 것을 제대로 배치하지도 못했(신은 위대하지 않다. p.194)"다며 악평을 쏟아내지만 이 책은 당시 시대적 상황 - 메디나에서 유대인들이 무함마드를 조롱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했기에 무함마드에게는 유대인들이 적이었다. - 을 들어 유대교인을 배척하면서도, 이슬람교의 효과적인 전파를 위해 널리 알려진 유대교 경전이나 그리스도교 성서 내용을 소개했다고 설명한다. 꾸란은 원칙적으로 번역될 수 없고 오직 아랍어로만 쓰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아랍어의 특징 - 셈족이 사용한 원시적 형태 언어인 아랍어는 본래 형성문자로서 다른 언어적 현상에서 볼 수 없는 수학적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언어로, 이를테면 논리적이고 심리적이며 종교적인 색채의 언어다(p.243) - 을 덧붙인다. '지하드'나 '여성차별'문제를 두고도 당위적 비판보다는 관습이 형성될 당시의 상황 - 예컨데, 전쟁으로 과부/고아가 많아 그들을 거두는 사회적 책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등 - 을 설명한다. 루미의 시를 중심으로 수피즘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책 끝머리에 붙은 '현대 이슬람의 과제와 전망'에는 더이상 원시적 유목생활을 고집할 수 없는 현대에 꾸란이나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탄력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꾸란에 대한 문헌 비평적 작업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서구의 편향된 시각-특히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등을 언급하며 서구의 편향된 시각에 관한 비평서로 "무함마드를 따라서(칼 언스트. 심산. 2003)"를 추천한다. 이슬람을 더욱 고립시키는 것은 정치적 목적으로 종교를 악용하는 사람들이고, 우리의 무관심도 그에 일조하고 있다. 다분히 종교적 색채를 띤 서술이지만 차이보다는 인류 전체의 평화와 공존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크게 불편하지 않은 책이다.  

 

** 예전에는 '코란' '마호메트' '옴미아드 왕조' 등으로 쓰였던 말들이 이 책에는 '꾸란' '무함마드' '우마이야 왕조' 등으로 쓰여있는것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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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목소리들 - 그 많던 언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지음, 김정화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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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재 지구상엔 약 6000~7000개의 언어가 존재한다고 한다. 세상에 이렇게 많을 줄이야. 그러나 몇몇 힘있고 덩치 큰 나라의 언어를 빼면 대부분의 언어는 만 명 이하가 사용하는 '주변어'이고 상당수는 후대로 계승되지 않고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나마 언어학자들에 의해 기록된 언어는 지층 속 화석처럼 존재의 흔적이라도 남길테지만 흔적도 남기지 못한 많은 언어들이 있다. 모든것은 변하는 것 - 새로 태어나는것이 있으면 죽는것도 있기 마련이라는 진리 앞에, 쓰이지 않는 언어가 사라지는건 일종의 '순리'라고  보일수도 있지만 그 '지극히 당연한 죽음'이 사실은 의도된 '살해'라는 게다.

사라져가는 동/식물에 대한 중요성- 생태계 붕괴-은 조금씩 퍼져서 사람들 대개는 동/식물의 멸종을 안타까워한다. 그럼 사라져가는 언어들은? 이 책의 주요개념중 하나가 '언어생태적 관점'이다. 책에 등장하는 많은 지도/도표들은 생물학적 다양성과 언어적 다양성과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언어적 다양성의 감소는 무엇을 의미하는걸까? (흔히 언어는 민족의 '얼'을 담고 있다 말하는데 요즘같은 사회에서 민족의 특성 운운하는것은 특정 민족의 이익을 위한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좀 더 범위를 넓혀 언어가 사용자들의 세계관을 반영한다는 것은 - 교과서에서 배운 예로는, 이누이트 족에게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여러가지라는 것, 한글엔 'yellow-노랑'을 나타내는 수십가지 표현이 있는 것 등이 있다. - 사용자들의 생활상-문화를 반영한다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이 책에서는 서구 문명이 기록하지 못한 수백,수천종의 생물을 구별하는 언어를 예로들어 언어에 담긴 지식의 소멸을 안타까워 하는 동시에, 그 곳 생태계에 적합한 농경/채집방법(당연히, 그곳 언어에 반영되어 있다)을 무시하고 일률적으로 서구식 농경방법을 도입한 결과 걷잡을 수 없는 생태계 파괴만을 가져온 사례를 비판한다. 그 외에, 언어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체계화하고 분류한다는 점에서 언어적 다양성은 인간의 의식구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시각을 제공해준다는 것 - 인간의 언어가 목적어ㅡ주어ㅡ동사의 어순을 가질수도 있음을 보여준 한 소규모집단의 언어가 있다. - 등으로 언어적 다양성을 옹호한다.

** 언어를 '의사소통의 도구'이상으로 보려는 흐름에 대한 반론도 많다. 고종석은 '감염된 언어'에서 "영어의 to be에 해당하는 동사가 스페인어에서는 ser와 ester로 구분되는 것을 근거로 '존재'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더 섬세한 성찰을 가정한다거나, 영어의 to have가 지닌 의미를 흔히 '있다(有)'라는 동사로 표현하는 동아시어어를 근거로 동아시아 사람들의 특이한 소유관념을 가정하는것은 너무 빈약한것"이라며, "근본적인 지각의 범주와 인식작용은 언어들의 표면구조와는 독립적인 보편성을 띠고 있고, 그 지각과 인식의 보편성을 반영하는 언어들도, 촘스키 이후의 언어학자들이 가정하듯, 심층구조에서는서로 동일한 문법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것이 옳다"라고 말한다.(감염된언어. p.205) 각 언어마다 상이한 인식체계가 '다른 세계관'까지 이어지진 않더라도 그 '차이의 존재'를 통해 주된 사고방식을 반성하는 계기는 될 수 있지 않나 싶다. 의학을 예로 들면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관점을 토대로 질병을 '제거해야 되는 특정 실체'라고 인식했던 근대 의학은 점점 인체를 통일된 유기체로, 질병을 '전체 시스템 하의 기능이상'으로 보는 지극히 동양의학적 관점을 수용하고 있다. (사실 이런 동양적/서양적이라는 이분법도 위험하기는 하다)

사람들이 그저 편리에 의해 더 편한 언어를 선택한다면, 사라지는 언어들이 애석하기는 해도 나쁘다고 말할 순 없을게다. 쓰이지 않는 기관들이 쇠퇴한 진화의 역사를 본다면. 하지만 중심부 언어가 퍼지는 경로는 대개 폭력적인 방식으로 주변부 언어를 말살하는 것이다. 왜 식민지 종주국들이 피식민지인의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려 했을까? 그렇게 '열등한'민족이라면 처음부터 상대하지 않았으면 될것을 ㅡ 자본주의 사회는 착취당하는 노예 없이는 지탱할 수 없는 구조다. 처음부터 새로운 시장개척이 목적이었음에도 마치 그들의 문화가 열등해서 지배당하는 것처럼. 특정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열등감/자기모멸감을 심어주기 위해 선택한 효과적인 방법이 (스스로 선택한것이 아닌)문화/언어를 억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 사람이 아무리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한 들 백인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런날이 오지 않았으면 싶다만 만일 영어가 전 세계 공용어가 되면 모든 사람이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살 수 있을까? 기득권층은 어떻게든 다수와 구별되는 자기만의 특권을 찾아낼게다. 형식적으론 식민지 지배가 종료된 지금도 소수 언어를 억압하는 이유에 대해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이나 영국의 언론에서 종종 다중 언어 사용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실제로 무슨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지배 계급이 통제하지 못하는 지식이나 조직을 어떤 형태로든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p.290)"  
   

파푸아 뉴기니의 소수민족들은 이상적인 "평등한" 이중언어국가다.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부족의 언어 뿐 아니라 이웃 부족의 언어 한두가지나 주변지역에서 통용되는 언어 하나쯤은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통념과 다르게 부족들간의 접촉이 잦아질수록 '중심부 언어'로 통합되는것이 아니라 - 많은 언어들이 서로 어휘과 구조를 차용하기는 했지만 언어의 차이점은 계속 존속되었고 부족간 차이에 대한 의식은 종종 자부심을 높이기 때문에 강조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단, 유럽인들이 도래하면서부터는 그들 문화의 소멸과 함께 언어도 소멸해가고 있지만. 사회적 차별을 받지 않는 이중언어 사용은 누군가의 말처럼 "하나의 다른 영혼을 갖는것"과 같은지 모르지만 특정 언어를 모르는 것/사용하는 것이 사회적 불이익으로 이어진다면 그나마 가진 하나의 영혼을 좀먹는 열등감만 키우는 것이다. 

책 7장 "왜 언어를 보존해야만 할까?"를 보면 재미있는 구절이 나온다

   
  서구 문화는 전통 사회에 대해 상당히 정신분열적인 사고를 보여 왔다. 그들은 전통 사회를 후진적이고 도덕적 결함이 있다고 여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을 초월하며 조화롭고 자족적인 그 무엇인가를 대표하는 존재로 이상화하며, 훼손되지 않게 보존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첫번째 관점은 분명히 전통사회들의 해체를 정당화하는 노선이다. 그러나 두번째 관점 역시 전통 사회들이 정치/경제적으로 진보할 권리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그들을 무력화 시키는 것이다....선진국들이 개발을 추진하느라고 환경을 황폐화시켜 놓고, 이제 와서 보존 운운하며 설교하는 것은 그다지 공평한 처사가 아니다. 선진국들이 지키지도 않앗던 요구 사항을 떠넘기지 않아도 후진국들은 충분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런 요구는 후진국들이 열망하는 즉각적인 경제적 이익을 얻지 못하게 막을것이다.(p.257)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나왔던 강대국들의 위선적 행태가 여기서도 드러난다. 자기들 이익을 위해 신나게 열대 숲을 파괴하고 그곳에 살던 소수민족들을 쫓아낼 땐 언제고 '언어의 소멸'은 자발적 선택 운운하는 것이나, 후진국에서 뒤쫓아가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을 보고 '지구의 허파'운운하며 근엄하게 설교하는 것이나. 언제나 자기 상황에 맞게 이데올로기를 양산하는 그들의 논리에 신물이 난다.


첫머리는 사라지는 언어의 마지막 생존자들의 죽음이라는. 안타까움에서 시작하지만 끝부분엔 자각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언어들이 나온다. 정부 차원의 지원도 필요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환경조성이 중요하다는 말과 함께.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중시하는 저들의 논리에 맞춰 '언어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재미있다. (물론, 저들의 자유란 궁극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자유'겠지만 어쨌든 온갖 논리에 '자유'를 갖다붙이며 옹호하는게 뻔한 레퍼토리니까) 이 책은 언어의 보존을 감상적 민족주의나 당위에 호소하지 않고 '생태계 보존"이라는 보편적 화두와 결합시켜 설득력있게 펼쳐나간다. '영어 몰입교육'을 두고 국가 경쟁력이니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니 하는 뻔한 논쟁들 보다 이런류의 책이 '언어의 중요성'을 훨씬 더 각인시키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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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03-20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ade 님 리뷰 엄청 잘 쓰네요. 추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Jade 2008-03-21 00:27   좋아요 0 | URL
어머 다락방님 부끄러워요! =3=3=3

2008-03-23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 (양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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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목회자 출신 선생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 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딱 두종류다. 생각할 줄 모르거나 중간에 생각하길 멈추거나" 처음엔 특정 집단에 대한 가혹한 편견처럼 들렸지만 요즘엔 점점 수긍이 된다. 한 나라 장관이 '신앙심이 부족해서 복지정책에 실패했다'는데 더 할말이 있나.

작년 여름 '만들어진 신'에 이어 가히 신성모독적인 책을 다시 손에 들었다. 이 책은 전자보다 분량은 조금 적지만 (하드커버에 두께가 상당하지만 실 내용은 400페이지 정도니 읽을만하다. 만들어진 신은 600페이지 정도) 비판의 수위는 한층 더 높다. 도킨스의 책이 러셀의 '찻주전자 우화'나 진화이론등을 길게 설명하며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는듯한 인상을 주는 반면 이 책은 '대화할 상대가 되지 않는 사람들, 혹은 그럴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독설'같은 느낌을 준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논리'에 의해 믿는것이 아니니 논리적으로 반박한다는게 어불성설일수도 있겠다만, 적어도 '신실한' 종교인들에게 히친스의 조롱과 야유는 불편한 것을 넘어 맹신과 맞먹는 분노 -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 - 를 일으키기 충분하겠다. 가끔 그에게 걸려온다는 협박전화가 이해될만하다.

** 개인적인 성향 차이겠지만 난 이 책보다 도킨스의 책이 더 좋다. 사실 내용상으론 겹쳐지는 부분이 많지만 책의 구성방식에 있어 도킨스의 것이 더 논리적이다 - 신 가설에서 시작해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신이 없는것이 확실한 이유를 대비시키고 종교와 도덕의 근원을 (그가 주장하는 문화적 유전단위 - 밈 가설에 맞춰) 살펴본다음 종교에게 얻고자하는 것들 혹은 대안을 살펴본다. -  이 책은 돼지, 건강, 지적설계론, 코란 등 특정 화두를 중심으로 엮어가기 때문에 조금 난잡하다. 주로 종교란 이름으로 저질러진 끔찍한 사건들을 끌어오는것도 불편하고. 굳이 그런 사례들을 다시 확인하려고 이런 책을 보는것은 아니니까. 

무신론자인 내가 - 사실 '무신론자'라기 보단, 신을 믿을만한 영적인 기회/체험이 없었다는 게 정확할거다. - 왜 이런책을 읽고있는 것일까. 사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에 대해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때마다, 한편으론 "인간이니까 저런일을 한다"는 모순된 생각이 같이 떠오른다. 지극히 논리적일것 같은 '만물의 영장'인간은 사실 전혀 근거없는 믿음에 사로잡힐만큼 어리석고 무지할 뿐이다. 특정 소수의 이익을 위해 무지한 대중을 세뇌시키는 기득권 집단은 어디에든 있지 않나.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의심 한번 해보지 못하고 '그런가보다' 믿어버리는게다. '마치 자기의 명예라도 되는양 '국가 이익'을 위해서라면 착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람들. 경제가 살아날거란 '세뇌된 믿음'으로 당연하게 2번을 찍으신 한 친구 어머니는, "의료보험 민영화 되면 어쩌려고 그랬냐"라는 친구의 질문에, 그런게 있는지도 몰르셨댄다.

내 주변에는 착하고 성실한 기독교인들도 많고 대개는 어릴때부터 학교가듯 '당연하게' 교회를 다녀왔다고 한다. 성경이 이해되냐는 질문에, 그냥 믿는다고 한다. 아무 조건없이 믿을 수 있는 신실한 신앙심은 - 타인에 대한 조건없는 사랑으로 이어질때는 분명 아름답겠지만, 어쩔수 없이 위험하다. 성경에 적힌 그 좋은 말들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악용되는걸 보면. 개개인으로는 참 좋은 사람들이, 뭉치면 '위험한 집단'이 되는 사례는 허다하게 많다. 모든 종교는 지극히 정치적이어서  늘 투쟁과 폭력이 따라붙는다. 하긴 인간 활동에 '정치적'이지 않은게 어디 있으랴. 이런 위험한 집단에 가입하는것이, 대개는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부모님의 성향 혹은 문화에 따라 결정된다는건, 정말 감탄할만한 '자기번식능력'이다. 마치 어릴때부터 경쟁과 학벌/영어실력만이 살길이라 교육받는 지금의 시스템처럼.

원래 옛 성경에는 이브를 만들어 낸 건 아담의 '갈비뼈'가 아닌, '옆구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세상을 창조한 야훼/여호와를 가리키는 단어에 여성명사용 관사가 붙어있었다는 말도 있지만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그 쯤은 얼마든지 변형되어도 좋았나보다. 신화적 내용과 역사적 내용의 구별이란게 없던 시대의 뒤섞인 이야기들을 분리하는건 '신성'을 모독하는 건가. 사실 이 책을 읽으며 한의학계도 옛 텍스트 - 가히, 한의학계의 '바이블'로 취급되는 내경이 대표적이다 - 에 대한 맹목적 태도는 이와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들의 대표적인 빈정거림은 "해리슨 내과학은 수년마다 개정판이 나오는데, 몇백년전에 쓰인 '동의보감'은 왜 개정판이 나오지 않는거냐?"다. 한의학계의 '현대과학으론 설명할 수 없는 인체의 신비가 있다'는 논리가, 문득 "신의 섭리를 모르는 가련한 자들...쯧쯧"처럼 들리는 이유는 뭘까. (물론, 더 생산적인 논쟁이 되는 경우도 있다. 드물긴 하지만) 겉으로는 텍스트를 숭배/존중하는 척 하며 실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그 권위를 이용하는 이런 행동이야말로 신성모독이 아닐까?

종교얘기를 하다 말이 자꾸 엇나간다. 사실 '종교'가 문제가 아니라 그 맹목적 믿음을 자기 좋을대로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집단으로서) 이용당하는 선한 종교인들도 자신의 종교가 - 정확하게는 그 이름을 빌려 - 저지른 악행에 대해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독일인 모두가 죄를 진 것은 아니지만 '독일인'이라는 정치적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져야 할 정치적 의미에서의 '집단적 책임'이 있다"는 아렌트의 말 처럼. 종교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좋은일들이 분명, 있지만 그 믿음이 '같이 살아가는 타인'에 대한 신뢰로 이어진다면, 우리 삶이 좀 더 밋밋해질 지는 몰라도 - 기적이나 예언같은 이벤트가 없어질테니! - 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신이 늘 우리와 함께 한다는 - 우리 마음속에 신이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이, 모든 사람에게 신성을 발견할 수 있는 혜안으로 이어진다면 참 좋을텐데 말이다. 쓸데없이 길어진 글에, 뻔한 결론이라니. 이것이 무신론자인 내 한계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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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8-03-17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책을 받아간 게 언제인데.. 이렇게 후딱 올리시다니요 ㅋㅋ
나는 일요일날에 모임책 죽게 읽었는데 아직 100쪽도 못 읽었어용 ㅠㅠ

Jade 2008-03-17 12:04   좋아요 0 | URL
토욜에 집에 오늘길이랑 어제 시간 많아서 내리 이것만 읽었어요 ㅎㅎ
서기관님, 아직도 안읽으셨다니 요즘 완전 빠지셨어요! ㅋㅋㅋ

2008-03-17 1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19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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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고통을 전해듣는 걸 '즐기는'인간이 있을까? 끔찍한 사건을 겪은 피해자들의 증언이, 자연재해나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이 저지른 결과라면, 하여 듣는이에게 인간 본성안에 놓인 추잡함을 마주보게 한다면. 듣는 것 자체가 생명을 갉아먹는 듯한 끔찍함이 아닐까? 하지만 불쾌한 사실을 직면하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욕망이 - 피해자들을 외면하고, 잊으라 강요하고, 때로는 "피해자가 자초한 것이다" 혹은 "이제 과거를 털로 미래로 나아가자"는 말로 바뀌는 것이 언제나 소수일수밖에 없는 피해자에겐 더욱 절망적이다. 여태껏 일어났던 잔학행위들에 대해 늘 그런식으로 수습되어오지 않았나. 감당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선 믿고싶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 레비와 그의 동료들은 수용소에서 가족들이 자신의 증언에 시큰둥하게 답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나치 수용소 생존자들을 연구한 한 정신의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과 피해자는 공동체가 잊고자 하는 무엇이다. 망각의 베일은 고통이 담긴 불쾌한 모든 것들에 드리워져 있다. 우리는 얼굴을 맞댄 두 측면을 발견한다. 한편은 잊고자 소망하지만 잊지 못하는 피해자이고, 다른 편은 잊기를 원하고 또한 그러는데 성공하는 강하고 무의식적인 동기를 지닌 다른 모두이다. 그 대립은....늘 양편 모두에게 너무 고통스럽다. 가장 약한 편이......이렇게 불평등한 침묵의 대화 속에서 패배자의 자리에 남겨 진다. (레오 아이팅거)  
   

나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그나마 살려놓은 사람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학대했는지는 이미 '상식'처럼 알려져 있다. 끔찍한 일이 '상식'이 된다는 것은 - 얼마간은 그에 대해 무덤덤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긴 나치 뿐이랴. 한 인간 집단이 다른 집단에 저지를 끔찍한 일들이 너무도 많아서 - 마치 물을 타 희석하듯 고통에 대한 기억도, 생존자들의 증언도 묽어지는것 같다. '자연스럽다'기보단 의도적으로 잊혀지는 생채기들. 몇 년간 사과만 해오던 서독에서 - "사실 이런 잔학행위는 나치 이전에도 있었다.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다"는 논지의 연구들이 발표되었다고 한다. 역사 속 다른 상처들을 되짚으며 인간이 나약하고 불완전한, 쉽게 잔인하게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잊지 않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으련만. "원래 이렇게 악하니까 우리가 더이상 사과하면서 괴로워하지 말자"라는 건, 얼마나 편리하고 손쉬운 해결방법인지!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자명한 진리는, 보기 싫은 것들을 "못 봤다, 몰랐다"고 할 수 있는 손쉬운 면죄부가 된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 늘 불안해하는 레비에게 "왜 그렇게 불안해 하느냐" "나는 유대인들을 학대하는 흔적을 보지 못했다"고 천연덕 스럽게 말하는 뉠러 박사처럼. 

가해자는 아무렇지 않은데 왜, 피해자가 더욱 죄책감 느끼고 고통받아야 하는가?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은 살아남아서도 그 기억때문에 고통스럽다. 레비는 살아남을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잔인한 실상을 증언하기 위해 버텼다고 하지만 앞서 죽어나간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사실 자기는 '진정한 증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그래도 레비는 - 결국 자살하지만 아우슈비츠 이후 수십년을 - 자신의 '이성적 사고'를 믿었기에 잘 살아낸건지도 모른다. 다른 외상 피해자들은 그 기억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하기도 하고 남은 인생을 피폐하게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리학자들은 잊고 싶은 기억일수록 다시 들여다 보고 '있는 그대로'바라볼 수 있어야 비로소 그 문제로부터 풀려난다고 말하지만 고통의 기억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 버겁지 않을까. 아니, 진정 감당하기 힘든건 기억을 떠올리는 것보다 그 기억을 잊고싶어하는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 혹은 왜곡일거다. "조선 위안부는 사실 매춘부였다, 군인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번 경우도 있었다"고 떠들어대는 일본 우익들을 보면. '"화려한 휴가"는 정치적 음해일 뿐 사실이 아니다'는 일부 꼴통들을 보면. 베트남 참전이 얼마나 지났다고  버젓이 길가에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란 현수막을 걸어놓는것을 보면. 이쯤되면 인간 역사에 대해 '신뢰'라는 것이 가능한지 ㅡ 물론 긴, 역사를 보면 조금씩 바뀌어 왔지만 ㅡ 회의가 들곤 한다.  

김상봉 교수는 서경식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절망하는 사람의 특징 중의 하나가 도덕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철저하게 절망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도덕을 말하는 거예요. 진정으로 절망한다는 것은 도덕을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도덕 같은 것은 없어요. 그런 점에서 도덕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것입니다. 세상에 도덕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도덕 때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만남 p.224)  
   

"세상에 도덕 같은 것은 없다" ㅡ 어찌보면 당연한 것을, 처음부터 없다고 생각하면 맘 편할것을. 물론 '도덕이 없다'는 것과, '인간 본성에 대한 신뢰'가 양립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어?"라는 비난 대신에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란 자기 성찰로 되돌아 오는 것이 성숙한 인간일 테다. 하지만 그건 피해자가 스스로 생각할 문제이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강요할 것은 단연코 아니다. 자기 반성은 모르면서 약한 피해자에게 뒤집어 씌우는건 비겁한 책임회피다.

김상봉 교수는 서경식 교수 책 중이 이것이 가장 맘에 든다고 한다. 도덕적 잣대의 위화감 없이 읽는이에게 공감과 책임을 이끌어 내기 때문에. 이 책의 문장들은 짤막짤막 하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풍경과 역사의 흔적을 읆조린다. 자신의 회상과 레비의 일화를 적절히 섞어놓지만 고양된 감정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것이 과잉없이 딱. 끊어져 있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주검이 이 언덕을 메우고 있는 걸까. 언덕은 녹음의 바다처럼 넘실거리며 저 멀리까지 이어졌다. 머리 위로 한여름의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매미 울음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만주에는 매미가 없는 것일까.....온갖 무덤 앞에서 나는 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는 않을까 하고 귀를 기울여본다. 그러나 사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무덤은 아무 말이 없다.(p.20~21)  
   

 사실, '재일조선인'이라는 그의 신분 때문에 - 누군가는 "잃어버린 망령이 되살아온것 같다"라고 표현했댄다. - 글에서 느낄 그 껄끄러움 때문에 서경식의 글을 의도적으로 읽지 않았었다. 나 역시 보고싶은것만 보려 했던 '평범한 악' 또는 '책임없음'의 하나였던 게다. 즉자적인 고통의 대면이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것은 아니지만 - 오히려, 더 무뎌지게 만들기도 한다! - '잔혹함의 과잉'이란 핑계로 정작 어느 하나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아 부끄럽다.

 

* 덧붙이는 말 : 이딸리아, 씨칠리아, 또리노 등 된소리가 잔뜩 들어간 창비의 외래어 표기법은 생소하기만 하다. 마치 맞춤법 갓 배우는 초등학생의 글 처럼 ㅡ 고종석은 '감염된 언어' 에서 이런 표기법의 비일관성을 비판하고 있다. 원칙적으로는 소리나는대로 표기하는것이 맞다고 해도 이미 익숙해진 단어들이 새롭게 쓰여진 걸 읽고 있자니 - 개인적 취향이지만 난 된소리가 많이 들어간 단어들이 왠지 불편하다. 욕에 많이 섞인다는 편견 때문일까 - 약간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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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sw2333 2008-03-06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경식 선생- 소년의 눈물이랑 나의 서양미술 순례 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나저나 jade님도 독서폭이 엄청 넓군요. 한의대에 이런 사람들 참 드문데....ㅎ

Jade 2008-03-06 19:41   좋아요 0 | URL
^^ 한의대 역시 사람 바보만드는 구조잖아요. 학생들이 질문하면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런다" ㅎㅎ 저는 가끔 요즘 한의대 입학점수 낮아지는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해요
 
카불의 책장수
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 지음, 권민정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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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심결에 보관함에 담긴 책을 주문하며 '카불'과 '책장수'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의 조합에서 암담한 현실에서도 희망을 읽지 않는 마음 따뜻한 '책장수'를 떠올렸다. 책 읽어주는 남편, 아버지, 동네 할아버지...책도 읽기 전에 나는 내가 상상해 낼 수 있는 온갖 따스한 이미지를 버무려 만들어낸 '책장수'이미지에 푹 빠져, 어느 잠이 오지 않는 밤 나를 쓰다듬어 줄 살가운 온기를 만나기 위해 책을 집어들었다. 책 표지의 흙빛 담과 고개를 내민 사람들이 얼마나 평화롭고 단란한 가정처럼 보이던지. 어쩌면 나는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서글픈 이미지에서 나만의 희망을 찾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 책은 결코 온화하지도 자상하지도 않지만 나름 책에 대한 애정과 야심을 가진 '책장수' 가족의 이야기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 끼니 걱정 없고 영어사용자가 세명이나 되는 이 집단은 아프가니스탄의 평범한 가족들보단 (경제적으로) 훨씬 살기 편한 중산층이지만 '이슬람'이라는 문화가 던지는 낯선 풍경들은 '남녀평등'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독자에게 적잖은 당혹스러움을 준다. 저자 역시 머무는 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누군가를 한대 쳐주고 싶을만큼 화가 났었다고 회상한다. 그들에겐 의문조차 들지 않을만큼 '당연한'것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남아시아의 교차점이라는 지정학적 이유로 또는 종교적인 이유로, 정치적인 이유로 숱한 침략을 겪어온 나라. 책 중간에 수록된 카불의 흙빛 정경은 보기만 해도 먼지가 풀풀 날릴 것 같이 우울하다. 잦은 전쟁으로 반쯤 허물어진 건물들 역시. 그나마 생기를 발산하는 건 무성히 피어올린 붉은 양귀비 꽃. 아프가니스탄은 전 세계 아편의 87%를 공급하는 '거대한 마약 공장'이랜다. 하지만 이렇게 '우울한 땅'에도 사람들은 또 하루를 살아내고, 숨 막히는 부르카 속에서도 매니큐어나 밑단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찾는다. 손수레 가득 실린 선명한 색의 향신료들에서 기묘한 열정이 배어난다.

집안의 남자를 공부시키기 위해 학교는 고사하고 공장에 취직하거나 다른 집에 '팔려'가야했던 우리네 '언니'들의 눈물겨운 사연들이 지금 이곳에서 재연된다. 남녀 구별이 더욱 엄격한지라 차마 일을 하러 가진 못하고 '결혼'이란 거래에 맞바뀌어지는 여자들.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제품들이 그렇듯 "끼워 팔려가는"경우도 있댄다. 시집 간 후엔 남편의 '소유물'처럼 살아야 하고. 지금 우리 눈으로는 모든것이 황당하고 말도 안되는 '코미디'지만 그들에겐 모든것이 당연한 일상이다. 책을 읽으며 때론 화가 나기도 하고 때론 슬퍼지기도 하지만 쉽게 그들을 동정하거나 비난할 수 없는 건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살아내는 그들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 때문이리라.

책장수 술탄 가족과 주변인에 관한 많은 에피소드들이 등장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놓는 저자의 감정이나 생각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결혼후 행실이 바르지 않아 가족들 손에 교살당한 자밀라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조카들에게도 무시당하며 사는 "하녀 고모" 레일라의 기구한 운명과 병든 노모와 굶주린 자식들 때문에 엽서를 훔친 목수를 끝내 감옥에 보내는 술탄의 냉정함을 그리면서도 마치 한장의 사진을 보여주듯 덤덤히 서술할 뿐이다. 판단하지 않는 건조한서술은 읽는 사람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과 내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의 괴리에 대하여. 이런 면에선 아이들에게 읽혀도 좋을 것 같다. (책 전반으로 보자면 결코 '중립적'인것은 아니다. 옮긴이 후기를 보면 "가부장적 사회 윤리와 탈레반 정권의 잔학성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가지고 온 폐해에 대해서는 거의 입을 다물어버린듯"하다는 한계가 명시되어 있다.)

나는 모든 '인격화된 신'을 믿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끔은 종교 역시 일종의 '강요된 학습 효과'라는 불경한(!) 생각을 하곤 한다. 어쩌면 나 스스로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지 못했기에 믿지 못하는 '가련한 중생'일수도 있겠다. 어쨌든 종교가 그들의 일부라면 존중해주는 것이 맞을테지만 '학대'에 가까운 여성차별을 보고 있자니 꽤나 불편하다. 역사에 어떤 경향성이라는게 있다면 ㅡ 기독교에서 여성 차별이 줄어들었듯 이슬람 여인들도 좀 더 편해질 수 있을까? 혹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가장 인간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 - 어찌할 수 없는 '절대자의 뜻'이 아니라 다른 인간이라는 자명한 사실이 더욱 서글퍼진다.

뜬금없이, '오래된 정원'의 한 대화가 떠오른다.

"형..우리 이제 이짓 그만하자....지들끼리 천년만년 해 처먹으라고..."   

 "니가 안그래도 그 자식들 천년만년 해처먹을꺼야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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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3-04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하다는 말, 참 슬퍼요 그러고보면.... 왜? 라고 끊임없이 묻다가 지쳐서 묻지 못하는 것보다는 왜? 라고 물을 줄 모르는 삶이 더 비통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Jade 2008-03-04 12:53   좋아요 0 | URL
^^ 그런 면에선 "왜 대한민국 20대의 태반은 비정규직 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못하는 우리랑 다를게 없죠

웽스북스 2008-03-05 00:4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우리는 여기서,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당연하다' 여기며 살고 있는지, 제이드님 덕분에 더 생각해보게 되네요. 으흠, 근데 당연한 건 당연하게 생각되서 또 잘 생각이 안나기두 하구 그래요 ;;; (이것도 일종의 폭력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