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유기농에 관심가지게 된 계기는 가공식품에 들어가는 온갖 첨가물들에 대한 정보를 접하면서ㅡ 그저 조금더 '안전한 것'을 먹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구였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기농'이란 단어에서 well-being 혹은 돈 많고 여유로운 사람들의 유난법석을 떠올릴 것이다. (얼마전 백분토론에서 다수의 미국교포들도 20개월 이하의, 상등급 쇠고기만 먹는다는 이선영주부의 말에 "한국 사람들이 요즘 "유기농" 야채 많이들 찾는것도 아시죠?"라고 논점을 흐렸던 분도 있지 않았나.) 사람들이 굳이 비싼 유기농을 찾는 이유는 크케 두가지 이다.ㅡ 집에 아이가 있거나, 건강에 관심이 많아 기꺼이 비용을 치를 의향이 있거나. 그렇다면 유기농 선호는 개인의 취향 내지 식습관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일반적 인식을 뒤집는 한마디다. "무엇을 먹느냐는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의 특성상 초반부엔 자극적인 묘사가 많다. 싸움 방지를 위해 부리가 잘린채로 좁은 닭장에 갇혀있다가 때가 되면 목이 제대로 잘리지 않은 상태로 끓는물에 던져지는 닭. 태어난지 열흘만에 마취없이 거세당하고 역시 서로 물어뜯을까 꼬리가 잘린 채 좁은 공간에 갇혀있다가 성장촉진제와 항생제로 키워서 도살당하는 돼지. 더 많은 우유생산을 위해 성장호르몬을 맞으며 끊임없이 임신하고 ('젖 분비'라는 본 목적을 위해 어쩔수 없이 생기는 '부산물'인 새끼소는 생후 40분이 지나면 어미에게서 분리되 쓸쓸히 죽는다) 본 수명인 20년을 4~5년만에 압축적으로 살아내는 젖소. 그리고 MB덕에 많은 한국인들이 사육과정을 속속들이 알게된 육류용 소. 마트에서 보던 "신선하고 깔끔한" 온갖 육류들과 이 책이 그려내는 사육장 광경의, 그 아찔한 간격이란. 최상의 마블링은 미식가들의 혀를 자극하지만 ㅡ 그 '아름다운 맛'을 위해 팔자에 없는 곡물사료를 먹어야 하는 소라니. 아니 무슨 몸과 마음을 쥐어짜서 걸작을 탄생시키는 예술가도 아니고. 그나마도 예술작품처럼 온 몸을 다해 맛을 음미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별 감흥없이 매일 먹는 평범한 식재료가 되는 것일 뿐인데. (이부분을 읽다 보면 마치 축산업자들이 인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파렴치한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그들이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라 경쟁 - MB가 특히 좋아하는! - 에서 살아남으려면 원가절감을 위해 어쩔수 없다는 설명이다. 저자도 특정 농장주를 비난하기 보다는 전체 사회 시스템을 비판하는 쪽이다.)

솔직히, 이부분까지 읽고는 (평소에 육지동물 고기보다는 바다동물을 선호하기에) "그래, 역시 해산물이 대안이다"라고, 섣부른 결론을 내렸었다. 아니나다를까. 다음은 해산물이다. 더러 "(육지)동물들의 눈을 보면 차마 먹을수가 없다"고 말하는 감수성 예민한 분들이 있는데ㅡ 아직 "물고기나 새우, 게의 고통이 느껴져서" 먹을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유유상종이라고 인간과 가까운 동물에게서만 '동질감'을 느끼는건지. 하여 이 부분은 감성적 자극보다 논리적 설득의 측면이 강하다. 생산물보다 (굶주리는 사람을 살리는 데 쓸 수도 있는)더 많은 양의 작은 고기들을 사료로 써야 하는 양식업의 비합리성, 품종 개량한 연어가 양식장을 탈출했을때의 생물학적 교란 가능성, 밀집 사육의 위험성, 무분별한 노획 결과 파괴되는 바다 밑 환경과 멸종위기에 처란 많은 희귀종들 등. 앞장이 어떤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자극한다면 이 장 부터는 슬슬 일상의 '먹는 행위'에 대해 돌아보게 만든다. 별 목적의식없이 형성된 나의 식습관 때문에 오늘도 파괴적인 사육/양식/남획이 자행된다면? 내가 꼭 이걸 먹어야 할까?

** 책의 저자는 먹는것을 계속 '윤리적 문제'와 결부시킨다. 다른 생물에게 (겪지 않을수도 있는)고통을 겪게 하는 것이 비 윤리적이라는 전제하에 따로 지면을 내어 수상생물들이 느끼는 '고통'의 정도에 관한 여러 연구결과를 소개하고 있는것이 재미있다.

이 책의 장점은 '양심적 식생활'에 대해 다양한 분야에서 입체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동물 학대를 (나름대로) 최소화 한 '지속 가능한 사육'농장들 소개도 나오고 육류의 거대 소비자인 맥도날드와 월마트를 상대로 한 투쟁 및 성과도 있다. '유기농 상품'이 새로운 수익의 원천이 되면서 대기업들의 로비로 점점 부실해지는 '유기농 상표'의 허구성에 대해서도 다룬다. 기업형 농업이 되면서 농장 유지 - 온도 조절 등 - 나 상품의 운송에 들어가는 화학연료의 비중도 만만치 않은데 대개는 근교에서 재배한 '제철 토산품'이 훨씬 환경친화적-지속 가능하지만 제철 과일의 빠른 숙성을 위해 들이는 석유의 양이 멀리 떨어진 곳(품목에 따라 농산품 수출을 주요산업으로 삼는 다른 빈국이 될수도 있다)에서 실어오는데 드는 석유보다 많은 경우도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혹은 양심적인 소비자가 되고싶다면 이것저것 생각할 것이 많다. 결국 소비자가 스스로 똑똑해져야 하는데 밥벌이에 치여사는 많은 가정들에겐 만만치 않은 부담이다.     

저자의 궁극적 목표는 '베건'이 되는 것이다.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길러낸 작물들만 먹는. 베건 숫자가 늘어나면서 (주로 콩을 활용한) '대체 음식 - 콩 베이컨, 콩 소세지 등'상품도 많이 개발되었고,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꼭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해야만 건강을 유지하는것은 아니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부연설명이 필요한데, 충분한 영양 섭취가 어려운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에게는, 즉 부족한 영양소를 체크해가며 따로 챙겨 먹을만한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는 동물성 단백질섭취가 더 효율적/필수적인 영양공급원이 될 수 있다. 어차피 이 책의 타켓은 '영양 과잉'인 보통 사람들이니까.) 동물의 고통 문제가 아니더라도 사료용 작물을 길러내는데 드는 엄청난 양의 물과 토지, 동물들이 배출하는 배설물(거대규모의 농장이 배출하는 오염물질의 피해는 상상초월이다.)때문에 고통받는 공장주변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육류를 먹는것 자체로 이미 타인에게 일정한 부담을 지는 셈이다. 흔히 기업형 대량생산 상품이 싼 이유 중 하나로 '타인을 착취함으로써 그 비용을 전가하는 것'을 드는데 (대규모의)동물 사육이나 (농약/화학비료를 쓰는) 재래식 농업의 경우 사람뿐 아니라 후대에 물려줄 토지(포괄적으로 자연자원)를 착취하고 있는 셈이다. 혹자는 '지속 가능할 농업'의 생산성이 낮아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다 말하지만 이건 멜서스 '인구론'을 연상시키는 사실 왜곡이다. 재래식 농업은 지력을 빨리 소모해서 갈수록 생산성이 떨어지지만 지속가능한 농업의 생산성은 유지되는 경향이 있어서 장기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 유기농은 가격이 비싸 일부 사람만 접근할 수 있다는 반론은 상당히 현실적이지만ㅡ 이 책은 한잔에 4.5달러쯤 하는 카페라테나, 아니면 블루마운틴 커피를 마시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으면서 일상적 식재료에 돈이 많이 드는 것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맞받아친다. '먹는것'에 어느정도 중요성을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   

옮긴이가 후기에 이런 반론을 적었다. 

"극단적인 논리로, 지금 모든 사람이 베건이 된다고 하자. 그러면 수천억 마리에 달하는 가축은 어떻게 될까? 애완동물로 키워질까? 대부분은 야생으로 돌아갔다가 생소한 환경과 먹이의 부족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갈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이제껏 저지른 중 최대 규모의 동물 학살이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그들은 전부 도살될 운명이었고, 축산업을 폐지하지 않는다면 더욱 많은 동물이 고통받고 죽어가게 된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다면 수백조의 희생을 방지하기 위한 수천억의 희생은 정당하다는 것인가? 그렇다고 하면, 인간과 동물의 생명의 가치에 근본적 차이를 둘 수 없다고 할 때, 인간이 멸종하는 편이 더 윤리적인 것이 아닐까?

이 슬픈 문구를 읽는데 뜬금없이 레닌의 연설이 떠올랐다.

"만약 사회주의가, 모든 사람의 지적 수준이 그것을 용인할 정도로 발전한 후에야 실현될 수 있다면, 우리는 최소한 5백년 동안은 사회주의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일단, 모든 사람들이 베건이 된다는 논리는 그야말로 '극단적 예'일 뿐이고. 여러가지 현실적 문제 때문에 모든 농업이나 축산업이 지속가능한 것으로 바뀌기도 힘들다. 그리고 '유기농'이 옳다고 해서 현재의 '유기농 산업/상품'이 모두 옳다고 할 수 있는것은 아니기에 소비자 개개인이 유기농 식품을 사먹는다고 해서 당장 모든 상황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상적인 행위에 담긴 정치적인 의미를 깨닫고ㅡ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작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기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크고 작은 시행착오야 있겠지만 결국 올바른 쪽으로 선회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맥도날드가 1밀리미터 만큼 움직이자 나머지 업계가 일제히 뒤를 따랐던" 경우처럼.  

'食'은 세상과 소통하는, 다른 생명을 받아 내 생명을 이어가는 거룩한 행위다. 나는 그리 냉철한 합리주의자는 안되기에 적어도 음식에 관해선 재료가 된 생명들의 -탄수화물/지방/단백질로 환원되지 않는, 생명만이 갖는 -에너지가 전해진다고 믿는, 소박한 신비주의자에 가깝다. 나는 행동가도, 이론가도 아닌, 그저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하지만 내가 세상의 일부라면, 나의 변화는 세상이 변하는 일부라고 생각하는, 소박한 낙관주의자이기도 하다. 단지 내 몸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행위라고 생각하니 식재료를 사는 일에 더욱 신중해지고 '비용'에 조금 덜 민감해진것은 사실이다. 혹자는 "그러면 먹을게 없다"느니 "왜 그렇게 세상을 피곤하게 사냐"고 말할 수 도 있겠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회피의 다른 말이다. 촛불 들고 거리에 나가는 것이 정치적 입장 표명이듯 무엇을 먹느냐 역시 지극히 정치적인 입장 표명이다.  

** 책을 읽고 난 후 ㅡ 데릭 젠슨이 쓴 '거짓된 진실'과 비슷한 여운이 남는다. 물론 두 작가의 문체는 상이하고 (데릭 젠슨 쪽이 훨씬 시니컬하다) 내용도 다르지만 글의 구성을 보면 수많은 실존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과의 대화가 상당부분 차지하기에 빨리 읽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산만하기도 하다. 실존 인물들의 '증언'은 때로 강렬하고 명쾌한 인상을 남긴다. 두 책 다 두껍지만 읽는데 어려운 책은 아니다. 단, 내용이 머리에 와 닿는 충격을 흡수하는 건 매우 힘든 과정일수도.


댓글(6)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08-06-27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해서 사기는 했는데 차분히 읽지는 않아서... 사들이고 방치되는 책이 많다는 사실에 반성하고, 님의 친절한 리뷰로 짐작만 할 뿐...
책 잘 받았어요. 제 서재에 사진도 올렸어요. 감사~~ ^^

Jade 2008-06-27 11:05   좋아요 0 | URL
아 서재에 올리신 글 봤어요! ㅎㅎ 책꽂이 멋지던데요! >.<

Arm 2008-06-29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겹살을 너무도 너무도 좋아하는 제 입맛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고 싶어서 구입했어요! 미뤄두고 있었는데, 리뷰를 보니 한층 책맛이 땡기네요~ 그런데요 생협을 통해서 구매하는 유기농 농산물은 오히려 더 저렴하다고 들었는데요. 순오기님은 어떻게 실천하고 계신가요? 제게도 노하우를;;♪

Jade 2008-07-01 01:52   좋아요 0 | URL
헉 저는 순오기님이 아닌데요 ㅋㅋ

Arm 2008-07-04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이제야 발견!!죄송해요ㅠㅠ;;;;;;;;;;;;;;;;;;

순오기 2008-07-18 08:08   좋아요 0 | URL
ㅎㅎㅎ 순오기도 이제야 발견~~~~ ^^
저는 생협거래 안해봐서 잘 몰라요. 유기농은 제 가정 경제상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알고 산답니다.ㅜㅜ
우린 싸고도 양 많이 주는 푸성귀들만 먹고 살거든요.ㅎㅎㅎ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미술'과 '역사'카테고리는 나같은 문외한에게 쉽게 접근할만한 분야가 아니다. 헌데 '미술사'라면? 솔직히 진중권의 책이 아니었더라면 '서양미술사'라는 책을 쉽게 집었을것 같지 않다. 진중권의 글은 어느 분야에 관한 것이든 재미있고 명쾌하다. '미학 오디세이'와 거의 유사한 주제라 '업그레이드'판이라 할 법도 한데 구성도 다르고 내용이 중복된다는 느낌도 없다.

미술작품에 관한 이야기들은 작품 사진이 필수다. (특히 나처럼 기본소양도 별로 없고 기억력도 좋지 않은 독자라면) 이 책은 거의 모든 면에 사진이 실려있고 본문과 사진에 번호를 붙여놓아 눈에 쉽게 들어온다. (앞이나 뒤에 참고자료 형식으로 사진들을 몰아놓은 책들은 들춰보아야 하는 번거로움때문에 잘 읽히지 않는다) 보통 역사책들이 갖는 단점 - 장황한 사실들의 나열 - 을 극복하기 위해 구체적 소주제 중심으로 엮어가는것도 좋다. 쉽고 구체적인 설명으로 독자를 주눅들게 하지 않으면서 가볍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진중권식 글쓰기의 장점이다.

'미학 오디세이'는 특정 작가를 각 권의 테마로 잡아  "에셔(1권)/마그리트(2권)/피라네시(3권)와 함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라는 부제를 달았었는데 이번 책의 부제는 '미학의 눈으로 읽는 고전 예술의 세계'다. (얼마전 다녀온 강연회에서 말하길 2권은 1.2차 모더니즘(추상)을, 3권은 1962년 이후 포스트 모더니즘(구상)을, 4권은 미디어 아트-기술과 예술의 결합을 다룰 것이라고) 1권에서는 '러시아 미술'이 인상적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원근법을 뒤집어놓은 그들의 원근법ㅡ 먼것을 크게, 직선을 곡선으로, 이미 굽은 것은 절단(!)내고 공간의 균열은 다른 물체로 살짝 숨기거나 지진(!)으로 표현했다나. 우리 눈엔 '기상천외'한 것들이 그들에겐 '원칙'이었다니. 아무 생각 없이 봤던 그림속에 녹아있는 그들만의 '규칙'을 발견하는것도 재미있지만ㅡ 사고의 '상대성'. 즉 우리에게 '당연한'것이 사실은 '합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을때의 당혹스러움이란. 규정된 사고가 만들어내는 또 다른 편견/폭력들. (MB논리속에서는 촛불집회의 배후세력이 친북단체일수밖에 없는것이 떠오르는구나. 시절이 하수상하니 연상도 거기서 거기다. ㅋㅋ)

비평가의 역할에 주목한것도 눈에 띈다. 예술의 방향을 결정짓는 데는 화가나 조각가 뿐 아니라 뛰어난 비평가도 한몫 한다는 사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로제 드 필과 요한 요아힘 빙켈만은 당시 예술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닭이나 달걀이냐'를 연상시키는 소묘냐 색채냐의 논쟁에서 로제 드 필은 색채의 손을 들어 그 전까지 고전으로 숭앙받던 푸생을 버리고 루벤스를 찬양한다. (이 부분에서 대립되는 작품들을 비교하는것도 재미있다. '선'과 '색채'에 대한 구별을 짓고 나면 익숙한 그림들이 새롭게 보인다.) 빙켈만은 고대 그리스인을 거의 '우상'처럼 여겨 그 '고귀한 윤곽'을 미의 기준으로 삼았댄다. 선이 살아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이 바로 이 시대의 산물이다. 그런데 그리스 예술을 향한 빙켈만의 사랑 - 그의 남다른 시각은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괴테의 바이마르 고전주의, 헤겔의 고전주의 미학을 낳았다. - 이 동성애자였던 그의 취향의 반영이라면? 큰 흐름을 이야기하면서도 소소한 뒷이야기(?)를 꺼내보이는 진중권의 배려다.

** 요즘 프랑스혁명 관련 책을 읽어서인지 그 시기에 관한(11장 혁명의 예술, 예술의 혁명) 그림들이 인상적이다. 역사책에 등장하는 그림들은 대개 크기가 작고 흑백인지라 별 감흥이 없었는데 올컬러 삽화에 작품별 설명/뒷이야기가 덧붙여지니 더욱 생생하다. 해당 시기의 역사책과 같이 보면 더욱 재미있겠다.

한달이 넘는 촛불집회 열기는 좀체 식을줄 모르고. '덕분'인지 '때문'인지 진중권은 요즘 가장 주목받는 스타가 되어버렸다.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거침없는 독설때문에 팬과 안티가 극명하게 갈리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것이 일치하는 흔치 않은 지식인이라는건 분명하다. 명색이 학술서적인지라 칼럼/인터뷰에서 느껴지는 통쾌한 맛은 없지만 '교조적 주류'를 벗어나는 신선함이 있다. 서양미술을 전공하는 '전문가'의 눈엔 어떻지 모르나 나같은 대중에겐 딱딱한 전문서적보다 훨씬 재미있고 호감가는 입문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하 2008-06-15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재미있고 명쾌한 리뷰(어)네요.^^;

순오기 2008-06-21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00공원에서 우수리뷰로 뽑혔던데요~ 축하해요.
아무리 그래도 '알라딘의 Jade'라고 아이디를 쓰면 어떡해요? 내가 그거 보고 웃었잖아요.^^

웽스북스 2008-06-22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 알라딘의 제이드, 제이드님 최고 ㅋㅋ

2008-06-25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울대학교 학생선발지침 - 자유화 파탄, 대학 평준화로 뒤집기
하재근 지음 / 포럼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 및 표지가 꽤 인상적인 책이다. 언뜻 보면 정말 무슨 입시지침서 같기도 하고. 교육문제를 들고 있지만 사실 한국사회 전반을 '까는'책이다. 저자가 소위 '논객'인지라 소제목들과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충분이 도발적이다. 하지만 '도발'에도 급이 있는법. 자극적 제목들과 슬로건들은 심하게 말하면 '조중동'의 그것처럼 한 극단에 쏠려있다. 맞는말을 하는거 같긴 한데 뭔가 깊이가 없고 부족한. 이런 말이 허락된다면 "경박하다"

학벌, 특히 서울대 학벌에 대한 비판은 예전부터 있어왔고, 그것이 비단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계급구조의 공고화수단이라는건 학생들도 다 아는 얘기다. 지극히 비생산적이고 급기야 '퇴폐적'인 대학서열체제 타파를 논하기 전에 '경쟁'및 '자유화'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신자유주의 비판부터 시작한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는건 좋은데 이미 다른데서 실컷 들었던 말들이라 다소 식상하다.) 이 책의 특징 중 하나가 읽는 사람을 슬슬 열받게 만드는 '감정적 도발'이 뛰어나다는 것. 딱딱 끊어지는 구어체 문장으로 -마치 토론에서 사람을 홀리듯- 독자들을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그럴듯한 말로 포장된 기득권 세력들의 사탕발림 속 음모를 직설적으로 또는 유머러스하게 정리해 놓은 문장들이 압권이다. 특정 문장을 한글자 한글자 방점을 찍어 써놓은 표현방식도 인터넷 논객다운 발상이다.

"소비자(일류대)의 합리적 선택에 의해 버림받은 지방, 강북 학생은 삼류 인생을 사시오"

"소비자의 합리적 선택에 의해 버림받은 특목고 아닌 일반고는 망하시오"

"소비자 중심주의->시장화->뻔뻔한 재벌, 부자 양산 / 대학서열체제->입시경쟁시장->뻔뻔한 엘리트 양산"

"일류고 선택을 통한 소비자 욕망 충족 - 이익내부화 / 입시경쟁 심화, 저소득층 기회 배제, 파탄 - 피해외부화"

"한마디로 말해 내.가.잘.려.도.내.자.식.이.사.람.대.접.받.으.며.사.는.데.아.무.지.장.이.없.다는 소리입니다 (유럽 강소국들의 사회 안전망을 언급하며)"

현 상황을 비판하는 것은 좋지만 대안이 빈약한 비판은 그 신랄함으로 어떤 '배설 욕구'는 충족시킬지 몰라도 지나고 나면 남는게 없다. 이 책은 세 장에 걸쳐 자유화-자유화 교육-대학서열체제 비판에 주력하지만 막상 "대학서열 타파"라는 구호만 가득할 뿐 구체적 청사진을 그리려는 치열함은 없다. 이 책의 역할은 한국사회 모순에 대한 분노지수 up이라는 trigger정도면 족하다. 좀 더 깊이있는 비판을 원한다면 김상봉 교수의 "학벌사회"를, 대안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면 정진상 교수의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을 같이 읽는 것이 좋다. 후자가 제시하는 '대안'역시 수많은 선택지들중 하나일 뿐이고 따져들어가면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겠지만ㅡ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따지기엔 아직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은 듯 하다. '대안'은 모두가 찾아가야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사회적인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니ㅡ 뭔가 부족해도 이런류의 책들이 많이 출간되어 이슈화 되는것이 전제되어야겠다. "인간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는 맑스의 명제는, 뒤집어 얘기하면 학벌에 대한 문제제기가 널리 공론화 되지 못하는 것은 이미 해결할 수 없다는 다수의 패배의식의 반증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혹은 현 사회 구조를 '어쩔수 없는 것','자명한 것'으로 인식시키는 이데올로기 주입의 승리이기도 하고.

교과서적 의미의 '교육'은 바람직한 인성 함양 수단이자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는 과정, 또는 진정한 자아를 찾는 방법이지만 약간 삐딱한 눈으로 바라보는 '자본주의 하의 (공)교육'은 체제 재생산을 위한 자본가계급의 노동자 계급 착취를 정당화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예전에는 대학교에 와서 세상을 보는 눈을 깨쳤다고 하지만 모든것에 자본의 논리가 점철된 지금은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 시야가 확 좁아지는듯 하다. 교육수단 및 교습방법은 나날이 진화하지만 생각하는 능력은 갈수록 퇴화하니. 모든것이 전문화된다는 것은 한편으론 모든것을 국소적/부분적으로 본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회구조적으로 '일류'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인데 왜 모든 국민이 헛된 희망에 매달려야 할까. 선택받지 못한 절대다수의 패배자들을 양산해 내는 이 말도 안되는 구조가 균열되기는 커녕 왜 나날히 견고해지는 것일까. 너도나도 사교육에 매달리는 것이 좁디 좁은 신분상승통로라는, 그나마 남아있는 '역동성'에 대한 희망이라면. 차라리 빨리 계급이 고착화되서 일말의 희망도 없게 만드는것이 ㅡ 사회를 뒤집을 수 있는 빠른길이 아닐까 하는 '막장 생각'까지 든다. 아니지, 그래도 체념보단 분노가 훨씬 '건강'한건데.

이런 생각이 든다. 자신이 의식하고 있지 않아도 무언가 잘못된 체제에 대해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 체제를 고착화시키는 공범이 아닐까. 직업은 아니지만 '과외'가 생계수단인 나로서는 더욱 불편한 생각이다. 학생들 한명 한명을 두고서는 그 아이들의 사고력 발달에 도움이 된다 혹은 도움이 되려 노력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ㅡ 전체적인 구조에서 놓고 보면 결국 이 체제에 순응해서 살아가고 있는 거니까. 사교육에 종사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은ㅡ 개개인으로서는 생각이 있고 '참 교육'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집단으로 보면 결국 이 체제를 공고화시키는 공범들이다. 80년대 학생운동에 헌신한 사람들 중 다수가 그 똑똑한 머리를 쓸 곳이 없어 입시학원 강사로 변신한 것은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 아닐까. 이걸 두고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린다면 지나친 비약인가?

무언가 대안이라고 내놓은 의/치/한/약대 전문 대학원제도는 ㅡ 한학기 천만원에 육박하는 높은 등록금과, 일반대학 4년 수료 후 전문대학원 진학이라는 '시간'문제때문에 속된 말로 '돈 많고 할일없는'사람들이 많이 지원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지금은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2년전만해도 경희대는 학부생/대학원생이 한 강의실에서 같은 수업을 각각 400만원/800원 내고 듣는 이상한 구조였는데. 머리 좋은 학생들이 의학계열에 몰리는 황당한 현상(기초연구라면 모를까, 임상에 있어서는 머리가 '천재'일 필요는 없다. 한 개원의의 말에 의하면 병원운영은 10%가 임상능력, 90%가 경영 능력이랜다. -_-)을 없애려는 취지였지만 자본의 논리와 결합하면서 결국 '배울 (경제적)능력 있는 사람'을 한번 더 걸러내는 체제가 되어 버렸다. 물론 시행착오일 수 있고 시간을 두고 조금씩 개선할 수 있는 문제겠지만ㅡ 지금 교육제도 개혁을 위해선 '자본주의논리'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는 반증이다. 하긴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그것과 결부되지 않은것이 어디 있겠냐만.

15년전으로 돌아간듯한 공권력남용에도 불구하고, 아니 "굴하지 않고" 오늘도 촛불집회가 이어졌다. 별다른 정치적 의식이 없던 사람마저도 현 정권에 대해 비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지금의 사태를 두고 좋아해야 하는건지 씁쓸하지만, 이 사태를 계기로 국민의 힘을 보여줄 수 있다면ㅡ 교육제도까지 확 바꿀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프랑스 대학체제를 바꾼 68혁명의 고등학생들에 견주는 건 좀 오버일지 몰라도, 정말 요즘은 생각없다고 치부했던 어린학생들에게 새삼 배운다. 지난 대선의 스타 허경영씨가 또 한마디 하셨다. "이명박 대통령은 역대 최단임기로 끝날것이니 곧 다음 대선에 출마하겠다" 이번에도 실없이 웃어야 할까?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8-05-29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Jade 2008-05-29 09:57   좋아요 0 | URL
오 아프님의 추천이라니 황송하옵니다 ㅎㅎ

시비돌이 2008-05-29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경영씨의 예언이 맞았으면 좋겠네요. ^^ 글구 이 책을 쓴 하재근씨는 좀 잘 아는 사인데, 10% 부족하다는 서평을 보니 좀 마음이 아프네요. ㅋㅋ 학벌 없는 사회 사무처장을 지내고 있는 친구인데, 아무래도 대표인 김상봉 선생님 보다는 내공이 떨어지겠죠. 그치만 젊은 친구니까 앞으로 무궁한 발전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

Jade 2008-05-29 14:13   좋아요 0 | URL
앗 ㅋㅋ 그거야 뭐 무거운 글 좋아라하는 제 취향이니까...^^;; 원래 뭐 잘 모르는 사람들이 어려운글 더 좋아라 하잖아요 ㅋㅋ 하긴 젊은 분이 이런 책 내는것도 쉽지 않은데 제가 너무 혹평을 했나요? ^^;

시비돌이 2008-05-29 14:25   좋아요 0 | URL
앗, 그럼 제 인터뷰도 안 좋아하시겠네요. 좀 무거운 주제를 좀 가볍게, 가 제 모토라,,, ^^ 뭐 평이야 자유죠. 안그래도 제 서평에 대해서 항의(?)를 하던 시절에 욕 좀 먹었었는데, 이제 후배 책에 대한 서평까지 시비건다고 욕먹겠어요. ㅋㅋ 이따 강연 가야 되는데, 글구 광화문에도 가봐야 되는데, 잠들지도 모르겠어요. 밤을 샜거든요. ㅠ.ㅠ

Jade 2008-05-29 16:46   좋아요 0 | URL
헉 인터뷰집이 어려우면 읽을맛 안나죠 ㅋㅋ 사실 시비돌이님 인터뷰집 많이는 안읽었고 최근 나온것 위주 몇권만 봤는데 워낙 쟁쟁한 인물들과의 대화여서 그런지 가볍다는 느낌은 안들었는데요~ ㅎㅎ 그리고 위의 말씀은 항의라기 보단 후배에 대한 애정(?) 같이 느껴져서 ^^

아프님도 강연회 가신다고 들었는데. 저도 신청은 했는데 못가게 되었어요. 제 알바는 주로 밤에 하는지라 조정이 마음대로 안되서...ㅡㅜ 잘 다녀오시구 오늘 밤은 푹 좀 주무셔요~~~~~

누에 2008-06-03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Jade 2008-06-04 04:28   좋아요 0 | URL
^^
 
공정한 무역, 가능한 일인가? - 공정 무역 Fair Trade 아주 특별한 상식 NN 5
데이비드 랜섬 지음, 장윤정 옮김 / 이후 / 200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정무역이라고 하면 왠지 '자선사업'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착취당하는 제3세계 빈민들을 위해 자발적 성금내는양. 그러고보면 나도 아직 기득권층의 논리에 물컹히 젖어있는듯 싶다. 당연한 의무에 생색내는 걸 넘어서 돈 없는 사람들을 위해 "싸고 질 좋은" 고기를 수입하시겠다는 바로 그 논리. 기업이 어떻게 돈을 벌든 세금만 잘 내면 된다는 그 절묘한 논리.

여기서 말하는 공정무역은 단지 소수의 생산자에게 프리미엄을 얹어주는 것만이 아니다. 생산 원가 보장이 기본이지만 거대기업의 초과이윤을 위해 자행되는 범죄들 ㅡ 살인적인 농약살포, 노예제를 방불케 하는 근로조건, 지력을 거덜내는 경작방법 등 - 을 차단하고 '제대로 생산된' 제품을 '정상적 방법'으로 파는것이다. 하여 '유기농'과 긴밀히 연결된다. 저자는 유기농과 결합된 공정무역만이 현재의 (허울뿐인)'자유무역'이 가져올 대 재앙을 막아줄 유일한 대안이라 주장한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저자는 그런 비관론은 대안을 회피하기 위한 정치적 시도의 산물이라며 공정무역을 시도하고 있는 소수들의 힘겨운 이야기들을 풀어나간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유기농 바나나'는 '바나나 전쟁'속에서 찾아낸 희망적인 성공사례다.

공정무역의 대명사 커피가 표지를 장식한다. 커피가 워낙 착취율이 심해서 '주요 상품'이 되었나 했는데 그게 아니라 채취-가공이 비교적 단순해서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공정무역의 예로 들고있는것이 커피, 바나나, 코코아, 청바지인데 코코아는 워낙 가공방법이 다양하고 함께 사용되는 다른 재료가 많아 소규모로 시작하기 어렵단다. 청바지도 그렇고.) 커피생산 과정은 3년이라는 긴 시간과 (처음 재배를 시작하면 3년동안은 수확 없이 기다려야 한다) 자연재해의 위험, 힘든 노동이 필요하지만 생산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리 많아도 판매가격 10% 이하다. 복잡한 유통과정상 어쩔수 없다 치더라도ㅡ 커피 가격이 생산자들과 전혀 상관없이 거대 기업/투기꾼들의 입김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에 원가 이하로 가격이 폭락해도 손쓸 방법이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죽어라 일해도 삶은 나아지지 않고 그나마도 매년 불확실한 커피가격앞에 덜덜 떨어야 하고. 커피가 지력을 엄청나게 소모시킨다는걸 알면서도 생존을 위해 커피농사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자연환경파괴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바나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은 살포되는 농약 - 냄새도 심하고 독성도 강해서 노동자들은 자신이 생산한 과일을 절대 먹지 않는다. - 속에서 겨우 먹고살만한 돈을 받으며 일한다. 리카도의 비교우위론 덕에 선진국들은 '후진국'들에게 1차생산에 전념하라 훈계하고는 (이렇게 확보된 공급덕에 가격은 떨어지도록 판을 짜 놓은뒤에) 자기들은 고부가가치 산업에 전념하며 느긋하게 착취결과를 즐긴다. 거대기업들의 '바나나 전쟁'탓에 과테말라 노동자들은 끔찍한 착취와 노조탄압을 겪었다. 반면 도미니카 공화국은 병균들이 퍼지기 힘든 덥지만 건조한 기후와 공정무역을 돕는 네덜란드 기관덕에 유기농 바나나생산에 성공했고 유럽쪽에서 '유기농 바나나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물론 이곳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바나나를 즐겨 먹는다. (한번 유기농 바나나에 맛을 들이면 일반 바나나는 먹을수 없을 정도로 맛이 좋다고 한다.)

코코아는 모든 농산물중에서 가장 농약을 많이 치는 작물 중 하나라고 한다. 코코아는 워낙 가공방법이 다양해서 최고급 코코아를 생산해 내도 그것을 적절히 가공할 수 있는 공장이 거의 없어서ㅡ 엄청난 프리미엄을 지불할 수 있는 몇몇 (공정무역)기업들만 유기농초콜릿을 생산할 수 있다. 보통 초콜릿들은 코코아 함유량이 지극히 낮고ㅡ 우리가 초콜릿 맛이라고 알고 있는것은 거의 설탕/물엿/버터 등의 조합이다. 다행히 더 좋은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크 초콜릿', '유기농 초콜릿'시장이 커지고는 있지만ㅡ 대기업 상표와 광고에 의해 지배되는 초콜릿 산업에서 공정무역 초콜릿은 '판매'역시 쉽지 않다. 초콜릿은 생산-가공-포장-판매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대기업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상품이다.

청바지 제작과정은 또 어떤가. 면 생산에는 다른 어떤 작물보다 독한 살충제가 쓰이고(때문에 해마다 수백만명의 중독환자가 생긴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면의 절반이상이 유전자 조작이며(왜 미국이 빠지나 했다 -_-) 염색에는 독성이 강한 물질이 쓰인다. 멕시코의 여러 '민감한 생태계'는 청바지 워싱을 위한 '경석(輕石)채취로 파괴되었고, 청바지의 정교한 바느질은 제3세계 여직원들의 노동착취 결과다. 면의 대용물로 '삼 청바지'가 있으나 마약 전쟁 옹호자들에 의해 종종 삼을 이용하는것은 지원된 비난을 받는다. 이 대목에서 절묘한 분석이 나온다. "독성 약품과 착취된 노동자의 땀이 없는 청바지가 300달러라면, 도대체 50달러짜리 청바지의 나머지 250달러는 누가 내고 있는 것인가?" 물론 대규모 생산이 주는 비용 절감도 상당하겠지만ㅡ 결국 노동자 착취 공장의 젊은 여성들과 파괴당하는 환경이 기업에게 보조금을 제공하는 것이다. 일부는 소비자에게 전가되기도 하고.

우리가 매일 사용하고 먹는 거의 모든 물건들은 세계 무역의 산물이다. 옛날에는 꿈도 못꿔봤을 풍요로운 선택ㅡ 필리핀산 바나나, 과테말라산 커피, 브라질산 코코아, 미국산 청바지, 그리고 이런일은 없었으면 좋겠지만 미국산 쇠고기 ㅡ 이 일상이 된 지금 우리 모두는 현재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공범이다. 누구를 위한 '자유무역'인가? 생산자도 아니고 소비자는 더더욱 아니고ㅡ 중간 과정을 담당하는 기업들을 위한?  '현대판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상품들이 태반이라 이들을 보이콧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지경이다. (맘에 안들면 미국산 소고기 안먹으면 된다는 MB의 논리가 떠오른다.) 지금으로선 '공정무역'상품들을 더 많이 소비하는것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유일한 희망이지만 그나마도 여유있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당장 거대기업의 횡포에 시달리는 노동자들과 싼 물건을 찾을 수 밖에 없는 빈민들은 속수무책이다.

오늘날 세계는 초국적기업과 뗄레야 뗄 수가 없다. '국가'란 틀로 '국민'이란 이데올로기로 묶어놓지만 국가의 결정은 거의 다국적기업의 입김에 휘말린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은 대체 누굴 위한 조치일까? 한우를 고급화해서 1억원짜리 한우를 만들라고? 물론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가야하겠지만 당장 빚에 허덕이는 농민들에게 국가 지원없이 가당키나 한 소리일까. 그런데 한우 고급화에 꼭 미국산 소고기가 배경음악으로 깔려야 하는걸까? 모든것이 얽혀있고, 복잡해보이지만 본질은 딱 하나다. 더 많은 이윤. 사람이/자연이/동물이 얼마나 죽어가느냐는 값싼 동정을 위한 곁다리일 뿐. 사실 어찌보면 이 악랄한 체제를 유지해가고 있는 우리들 모두가 광우병을 만든 장본인이다. 심화되는 양극화와 환경파괴를 기반으로 한 현 시스템으로는 도저히 생존할 수 없다.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주류경제학의 핑계대신 당장 실행 가능한 작은 대안이라도 찾아가려는 노력이 훨씬 절실하다.

천릿길도 한걸음부터ㅡ 이 말이 유효하다면 작은 변화는 큰 변화를 위한 첫걸음이지만 "이래갖고 세상이 바뀌겠어?"란 푸념이 먼저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미 "학습된 무기력"에 빠진 독자들에게 저자가 던지는 충고 한마디. "사람들이 자신이 뭘 사는지 안다는 것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할 수도 잇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것을 무시한다면 세상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광우병은 자연/타인에 대한 악랄한 착취에 대한 경고다. 우리도 모르는 새에 합류하고 있는 "폭력의 체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 책이 얇고 한정된 품목에 관한 주인공의 경험 위주라서 쉽게 읽히는 장점과 내용이 풍부하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웽스북스 2008-05-04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아는분과 이것에 대해 잠깐 얘기했었는데...
그시간에 우리 제이드님은 이 리뷰를 쓰고 있었군요

Jade 2008-05-04 12:09   좋아요 0 | URL
ㅎㅎ '공정무역'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협한 사고를 넓혀주는 책이었어요 ㅎㅎ

시비돌이 2008-05-12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정무역이라는 것이 생협, 품앗이, 직거래 이런 개념들이 포함된 거 아닐까요? 어렵지만 지향해나가야 하는.... 화이부동하신 두 분이 친하게 댓글 달고 계시니까 보기가 좋네요. ^^ 근데 맞는 표현이긴 한건가? ㅋㅋ

Jade 2008-05-12 16:57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도 어렴풋이 협소하게만 알고있다가 이 책 덕분에 이것저것 생각하게 되었어요 ㅎㅎ

저 웬디양님이랑 친해요! 흐흐

웽스북스 2008-05-12 18:52   좋아요 0 | URL
저 제이드님이랑 친해요! 흐흐

누에 2008-06-03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ade님 덕분에 몇몇 생각 얻어갑니다.

Jade 2008-06-04 04:29   좋아요 0 | URL
오 감사합니다 ㅎㅎ
 
대한민국 선거이야기 - 1948 제헌선거에서 2007 대선까지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2년 대선때 나는 예비 고3이었다. 정치에 대해 아는것도 없고 누가 대통령이 되는지보다 주변의 선거권을 가진 어른들의 지지연설을 듣는것이 재미있었다. 선거 전날 정몽중후보의 갑작스런 이탈에 노무현 지지자들은 이를 갈았었지. 노무현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자 만세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그저 이회창후보가 안되었다는 사실에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더랬지. 어찌어찌 탄핵열풍이 불고 (그즈음 택시를 탔는데 나이 지긋하신 기사님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탄핵반대 촛불집회뉴스에 "그 노무현 빨갱이 새끼"운운하던 기억이 난다. 풋) 그 덕에 17대 총선에서 참패한 한나라당 의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번 대선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보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진 기이한 선거였고ㅡ 총선역시 "한나라당이 개헌선을 넘어설것인가"에 맞춰졌었지. 하긴 생각해보면 이번 총선은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평화통일가정당은 전 지역구 출마로 어마어마한 돈을 나라에 헌납한 셈이고ㅡ '뉴타운'의 승리이기도 하고, '친박연대'라는 정당도 생길수 있음을 확인하고ㅡ 비례대표 1번 양정례씨를 매일 신문에서 만나기도 하고. 아직 한국사회가 '역동적'이라는 반증일까?

만나는 사람들마다 "막장으로 가는 중"이라며 우울한 전망을 내 놓는다. "존재에 반하는 의식"은 이제 너무 많이 들어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40여년만에 선거권 취득 연령을 낮춰놓았지만 정작 많은 젊은층들이 선거/정치에 관심이 없거나 어떤 신념처럼 "경제발전"에 휘말리고. 사상 최저의 투표율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일까 혹은 침묵시위일까? 총선 개표때 화제가 된 "도저히 뽑아드릴 사람이 없다"고 적힌 투표용지는 무엇을 반영하는 것일까?

이 책은 1948년이후 치러진 대선/총선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자분자분 풀어놓는다. 서중식씨는 "선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것이 결코 상식이 될 수 없다. 선거를 통해 민의가 어떻게 표출되며, 선거가 한국 사회를 얼마나 역동적으로 변화시켰느냐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긍정적으로 이끌어가지만 교과서에서 배웠던 부끄러운 부정선거들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서술한다. 비밀선거원칙을 무색케하는 3/9인조선거, 상대후보에 대한 색깔공격, 개표부정, 정치깡패동원 등등. 지금 막장, 막장 하지만 이보다 더 막장일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런 암울한 시기 뒤에 약속이라도 한 듯'신선한 선거바람'이 불고 사회가 바뀐다. 긴 역사 속에서 보면 부정한권력은 늘 꼬리를 내리고 만다.

"이성의 간지(奸智)"라는 말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자신을 반대하는 국회분위기를 뒤엎고자 헌법을 뒤엎고 정치파동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한 이승만이 바로 그 직선제 때문에 덜미를 잡히고ㅡ 박정희의 권력욕을 충족시켜준 유신 체제로 인해 몰락하고. 우리나라 민주주의제도는 희한하게도 독재권력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경우가 많다. 지방자치 선거나 공천제도 처음엔 이승만 독재를 위한 도구로서 도입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역설적인지. 2004년 민노당에게 10석을 안겨준 비례대표제도 처음엔 박정희 정권 여당 의석수를 늘려주기위해 도입된 것이라니. (어제 서중석 선생은 강연을 다녀왔는데 "우리 민주주의 역사는 참 역설적이고 풍자적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암울하다고 비관만 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번 선거의 50%이하 투표율은 훗날 어떤 역설을 보여줄지 궁금하다"고 너스레를 떠신다.)

우리나라 국민의 역동성/잠재력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많다. 단적인 예로 1910년까지 군주 아닌 사람을 모신적 없던 철저한 "왕 중심 국가"였던 우리가 1910년대부터 공화제를 주장하고, 광복 이후엔 이승만/한민당 세력마저도 '보통선거'를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쉽게 '왕'을 버릴 수 있었는지. 최악의 선거라는 67년 '망국선거' 4년 후 신선한 야당바람으로 '균형국회'를 이루어 낸 71년 선거는 또 어떤가. (이때는 박정희 본거지인 대구에서도 거의 야당이 득세했다며 이 때만해도 '균형감각'이 존재했다고 말한다.) 2004년 총선도 탄핵바람에 맞선 잠재력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겠지. 저자는 73년 이후 북한 경제력이 남쪽에 뒤지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로 '선거'를 생각한다며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선거의 역동성을 높이 평가한다. (단, 우리 역사에서는 역설적으로 드러난 경우가 많아 우리의 시민의식과 궤를 같이했던것은 아니라는 우려를 덧붙인다. 단적인 예로 87년 대투쟁에서 16년전의 "직선제 쟁취"를 외칠 수 밖에 없던 사례를 든다.)

"못살겠다 갈아보자","갈아봤자 별수 없다"등 당시 유권자들을 휘어잡았던 구호들이 눈에 띈다. 20,30만 유권자를 동원했던 신익희 선생 유세, 김대중 후보 유세 사진을 보고 있으면 당시의 분위기가 전해지는 듯 가슴이 벅찬다.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이런 감동적인 장면을 만들어냈겠지. 모든것이 정치적인 지금 우리세대의 정치감각은 오히려 한없이 무뎌진듯 하다. 변화를 향한 뜨거운 가슴마저 허용되지 않는 것일까? 

책을 읽다 이런 의문이 들었다. 87년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된것은 양 김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ㅡ 어떻게 노태우가 30%가 넘는 지지율을 얻을 수 있었을까? 누가 집권하든 기득권층을 대변하는것은 마찬가지 였기 때문일까. 이번 대선의 풍경이 겹쳐진다. 가진거라곤 초라한 사람들이 '경제성장'의 믿음으로 이명박후보를 찍는 풍경들. 말도 안되는 '잃어버린 10년'논리들. "정당은.....'정권탈취'를 꿈꿔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했던 이승만이나 "내 자리 뺏길뻔 했네"라며 안도했던 박정희의 "대통령은 내 것"이라는 논리와 어쩜 그렇게 닮아있는지.

선거가 역동적이려면 유권자들이 단합해야 한다. 찍을 사람 없다고 방관/포기한다고 세상이 바뀌는것은 아니니까. 막장선거였던 67년 선거 후 4년만에 정치판도를 바꿨던 유권자 의식은 지금도 살아있다고 믿고싶다. 아니, 다시 살려내야겠지. 이 책의 장점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현대사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단어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선정한 느낌. (어제 강연회에서도 이런 신중함이 엿보였다.) 중립적이지만 위트와 풍자가 스며있어 재미와 고민거리를 한아름 안겨준다. 암울하다고, 혹은 어렵다고 현대사를 외면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08-04-30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앗. Jade님의 추천을 받아들여 이 책을 읽어야 겠다고 생각하는 다락방이랍니다. 그나저나 Jade님은 주변 어른들의 지지연설도 재미있어하는 고등학생 이었군요. 제 눈에는 마냥 신기해요. 저는 그런것들이 전혀 재미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Jade님의 리뷰는 언제나 제 관심분야에 대한 책이 대상이 된 것이 아닌데도 참 잘 읽혀요. 잘 쓰여진 감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오늘도 어김없이 추천이예요.

Jade 2008-05-01 00:20   좋아요 0 | URL
"이회창이 안되면 지구를 떠난다" 혹은 "노무현이 안되면 성을 간다" 뭐 이런 말들이 오가서...누가되든 과연 그 말을 어떻게 수습할지가 흥미로웠죠..ㅋㅋ 저도 정치는 아는것도 없고 흥미도 없었어요~ 최근에서야 조금 관심이 생겼고 이번 선거는 워낙 이런저런 일이 많았잖아요 ㅋㅋ

다락방님 칭찬은 언제들어도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