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 - 당대비평 특별호
슬라보예 지젝.도정일 외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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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선일씨의 안타까운 죽음도 어느새 4년이자 지났지만 그때와 상황은 별로 나아진게 없는듯 하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한나라당 과반수 의석도 차지했겠다 슬슬 재파병문제가 거론되는걸 보면 말이다. 사건 당시에 쓰여진 칼럼들이라 시의성이 떨어질거라 예상했지만 지금 읽어도 여전히 슬프고 화가난다. 아마 이번엔 '국익' - 파병으로 얻은게 없다는건 이제 초등학생들도 다 알겠다 - 이란 허구적 논리에 '실용'이란 옷을 덧붙이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뿐.

아부그라이브교도소 - 잔인한 고문 사진이 유포된 후 인간의 잔인함에 대해 논할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다. 잠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수십, 혹은 수백명에게 가해진 잔인한 고문에는 몸서리치며 한탄하면서, 수십만명을 굶겨죽이는 경제적 제재에는 왜 침묵하는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것 같은 슬럼으로 어쩔수 없이 기어들어가는 사람들은 왜 외면하는가. 혹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람을 죽일수밖에 없는 전쟁은 왜 '어쩔수 없는 악'으로 간주하는가. 가끔식 수면위로 떠오르는 잔학행위에 새삼스레 놀라는 것은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인간 문명의 폭력성 - 끊임없이 파괴해야만 지속될 수 있는 현 문명/경제체제 -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 아닐까?

김선일씨 사건을 두고 여러가지 화두들이 튀어나온다. 즉각적으로 파병을 철회했던 필리핀과 달리 피랍과 거의 동시에 "파병강행"을 선언했던 대한민국의 무책임함부터, 무사히 살아돌아온 인질들에게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 비난을 퍼부었던 일본에 대한 비판, 더욱 잔인한 영상을 앞다투어 보도함으로서 '공포'를 생산하고 '고통'을 소비하도록 만드는 미디어, 그리고 김선일씨에 대한 '민족적 정서'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보편적 존중과 연대로 이어질 수 있느냐의 문제까지. 김선일씨 사건은 한 사람의 안타까운 죽음이었지만 동시에 너절한 현 문명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물리적으로 그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그를 상기시키고 그를 대신해 싸워야 한다. 생명까지 도구로 사용하는 위태로운 이 시스템에 대해.

테러는 정당화될수 있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피해자를 다시 가해자로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순환구조속에서 새로운 피해자로 선택되는건 늘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이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죽음은 늘 안타깝다. 핵심과 관계없는 개인들을 죽이는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지만 타인의 목숨을 걸고, 혹은 자기 목숨을 담보로 거래할수 밖에 없도록 몰고간 당사자는 과연 누구인가? 테러집단을 응징하겠다며 새 목숨들을 사지로 내모는 자 ㅡ 아직 흘릴 피가 모자랐던 탓일까? 저쪽에서 한바가지 피를 흘리면 이쪽에서 흘린 피가 그만큼 상쇄되는가? '복수'라는 감정을 만들어 내어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명석함이 가증스럽다. "약자의 폭력을 규탄하기에 앞서 이 세계를 끝이 안 보이는 폭력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린 제국주의의 폭력영구화 기제부터 제대로 파악하고 비판하는 것이 순리"라는 박노자 교수의 마지막 글은 시원하기까지 하다. 

태어난 사람들이 언젠가 죽는다는건 자명한 사실이고, 죽은 사람들은 말이 없다. 죽은 사람을 기리는 일은 산 사람들의 마음을 다잡기 위한 행위다. 김선일씨를 비롯해 이라크에서 죽어나간 수 많은 사람들ㅡ 그들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살아남은 우리가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슬픔보다 분노가, 싸울 용기가 필요하다. 이 책에 실린 칼럼들은 이라크와 현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위해 우리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건 슬픈 일이다. 모든것이 바뀌는 세상이지만 거의 모든것이 바뀌지 않는 세상이기도 하다. 4년이 지난 지금. 떠나간 그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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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3 16: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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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3 16: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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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진실 - 계급.인종.젠더를 관통하는 증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 아고라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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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것이 병이다 ㅡ 사회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끊임없이 상처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차라리 모르고 살았음 마음 편했을 것을,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의 무게는 종종 개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기도 한다. 단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진다면. 물론 평생 보고싶은것만 보며 눈과 귀를 닫고 살수도 있겠지만 엄연히 실재하는 고통을 회피하는것은 아무것도 변하게 하지 못할 뿐더러 또 다른 ’숨겨진 고통’을 낳을 뿐이다. 부조리함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ㅡ 온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뚝뚝 흘리며 태어난 자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듯 ㅡ이야말로 상황을 바꿀수 있는 힘이다. 모두가 인간이 저지른 일이니까. 그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하든.

 이 책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모르고 싶었던 “증오의 문화”에 대해 거침없이 까발린다. 흑인, 여성, 유대인, 노동조합원, 환경운동가 등 특정 소수집단에 대한 이유 없는 - 가해자들의 논리로는 지극히 정당한 사유로 - 박해/린치들이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빼곡히 채운다. 처음 몇 장을 보고 있자면 날것 그대로 표출되는 듯한 증오에 와락 현기증이 날 정도다. 우리의 고매한 이성은 타인에 대한 ‘증오’에 반대하는 듯 보이지만 현 사회는 ‘증오의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너무도 자주 경제적 이익을 위해 ‘증오의 힘’이 이용당하는 것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은 소박한 희망이 현실의 부조리를 덮어주는 것은 아니다.

 원주민 학살, 흑인 린치, 강간, 아동노예, 농약살포......이 책의 예들은 도무지 끝이 없다. 현실을 낙관적으로 보고싶은 인간의 순진한 욕망은 끔찍한 잔학행위들은 그저 ’예외’라고 믿고싶겠지만 모두가 현재에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평범한’ 일이다. 노예제는 폐지된지 오래라고? ’특정 형태’의 노예제는 분명 폐지된 것이 맞다. 엄청나게 값이 싸진 ’현대 노예’들의 처지가 고전적 노예보다 못하다는것이 유감이지만. 당장의 이익이 급한 우리 똑똑한 인간은 관상용 백합재배를 위해 인간 스스로에게도 치명적인 독약 살포를 주저하지 않는 용맹함까지 지녔더랬다. 흑인/원주민에게 가해지는 차별은 가히 상상초월이다. 특히 교도소같이 명목상의 권리조차 무시되는 곳이라면.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제일 압권은 전쟁이다. 우리가 신봉하는 ’전쟁의 신’께서는 모건 패밀리를 비롯한 전쟁 지원 기업들을 한번도 실망시키신적이 없다. 자비롭기도 하셔라!  역시 현대의 증오는 자본주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무엇이 인간을 이렇게 파괴적이고 모든 것에 적대적이도록 - 심지어 자기가 살아가는 지구까지 더 빨리 못 망가뜨려 안달일 정도로! - 만들었는가? 저자는 타인을 물건처럼 대상화하는 문명의 속성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다. ’나와 너’의 저자 마르틴 부버를 자주 인용하면서ㅡ (그런데, 팔레스타인 사람인 에드워드 사이드가 쫓겨갈 때, 그의 집을 차지한 사람이 마르틴 부버였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적어도 한국 독자라면 마르틴 부버의 자리에 김상봉교수의 ’서로주체성’을 놓고 보아도 좋겠다.) ’생산’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현 문명은 "바깥의 정복과 안의 억압"에 뿌리를 두고 "대다수의 피땀위에 소수만이 안락을 누리는" 절대 지속 불가능한 체제다. 자국 혹은 소수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어차피 ’부속품’이니까. 악의적 경제압박으로 수십만 명이 굶어죽어도 그저 어쩔 수 없는 ’부수적 효과’일 뿐이다. 적어도 그렇게 ’믿어진다’.

모두를 미워하는 듯 보이는 이 문화를 극복하기 위해 이 책이 제시하는 무기는 -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문화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철저한 절망’이다. 문화/기업이 변할 것이라는 헛된 희망에 목매달며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기득권자들이 바라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 문명의 ’혜택’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타성’이 지금도 이 시스템을 견고히 세우고 있다. 강요된 욕망을 소비하며. 때로는 강요된 ’증오’를 표출하며. 노예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이 책의 무궁무진한사례들은 인간성의 극단을 보여주지만 저자는 결코 소박한 희망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 독설, 조롱이 가득할 뿐. 주르륵 쏟아놓듯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구어체 서술이 특징적이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도 많고. 생생한 사례들이 주는 구체성은 좋지만 정제되지 않은 터프함은 단점이다. 20여개나 되는 꼭지도 장황함에 한몫 한다. 마치 ‘증오에 관한 다큐멘터리’ 폭격을 맞은 듯한 느낌.

 타인의 고통에 쉬이 공감하는 섬세한 감수성으론 이 책의 사건들을 감당하기 힘든것이 사실이다. 나중엔 어쩔 수 없이 ‘거리두기’란 자기검열이 생길 테니까. 피가 뚝뚝 흐르는 상처지만 두 눈 크게 뜨고 헤집어 들여다 봐야한다. 철저하게 절망하고 얄팍한 희망 따위에 속지 않도록ㅡ 인간에 의해 행해진 잔학행위 앞에 “나는 그렇지 않아”라는 자기위로는 머리를 짚 속에 박은 닭 같은 자기기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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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 김유정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4
김유정 지음, 유인순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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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언어영역에 나올만큼 '고전'스러운 소설을 읽은지 참 오래도 되었다. 이미 언어영역 공부할 때 볼만큼 봤다고 생각했던건지. 투박한 사투리와 피폐한 농촌이 그다지 고상하지 못하다 생각해서 인지. 선거 전날 공연히 마음이 설레 잠 못 이루다 새벽 내내 이 책을 붙잡고 있었다. 원체 강원도 사투리가 많아 틈틈이 뒤의 용어해설을 들춰보다 나중엔 거의 지레짐작하며 읽었다. 발음을 흉내내다보면 왠지 정겹고 입에 감긴다. 마치 그들 사이에 천연덕스럽게 앉아있는 양.

총 23편의 단편들이 실렸다. '만부방'이나 '봄봄', '동백꽃'처럼 이미 언어영역 문제집에서 뻔질나게 봐왔던 단편들도 있고 영 생소한 단편들도 있다. 문제집에서 조각조각 보는 소설이랑 이렇게 한편의 이야기로 보는 소설은 확실히 다르다. 무엇보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으니까 (하긴, 제버릇 뭐못준다고 '매팔자' 란 단어에서 반어적 표현임을 묻는 문제를 떠올리기도 했다. ㅋㅋ) 지금도 어렵다 어렵다 말은 많지만 정말 이들만큼 힘들게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러고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아등바등 애쓰는 모습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작품해설에서 유인순교수는 김유정 소설의 특징으로 "삶의 양가성"을 든다. 살기 위해 제 논의 벼를 훔치는 '만무방'의 응오나 '금'의 덕순, 남편과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남의 남자에게 몸을 파는 숱한 아내들. 유난히 몸을 파는 아낙네들 - '들병이'든, 거짓결혼이든 - 이 많이 등장하는 건 제 몸뚱아리 밖엔 팔 것이 없는 그네들이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 '전형'이었기 때문이리라. 결혼식을 올리고 옷을 훔쳐 걸인이 된 전남편과 도망치는 '산골아낙네'나  뭇 남자들에게 술값으로 세간을 받아 원래 남편과 유유히 떠나는 '솥'의 들병이 계숙이나. 요즘도 사기 결혼이 많지만 소설속 그네들이 원하는 건 호화로운 금은보화가 아니라 단지 '남편과 그럭저럭 먹고 지내는 것'이다. 그네들이 방탕하거나 윤리를 몰라서가 아니라ㅡ 절박한 생존의 수단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방탕함' - 노름, 술, 들병이, 매춘 - 이 눈에 거슬리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선악/빈부/열불녀와 효불효 등의 이항대립은 어느새 모호해져 삶의 일부분이 된다. 날것 그대로인 삶을 들여다보면 온갖 모순들이 공존하지만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게다. 양가성의 수용은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중학생때였나. 멋모르고 현대단편소설집을 뒤적이다 너무도 피폐한 그들의 삶에 충격을 받아 한장 한장 마음졸이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감자'에서 큰 동요없이 왕서방에게 몸을 내어주고 결국엔 돈 몇원의 가치로 죽어버리고 마는 복녀는 여느 '비운의 여주인공' 애절하지도 않고 안타깝지도 않은, 말그대로 '날것 그대로'였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나 어릴적만해도 순결/정절 운운하는 목소리들이 꽤 있었는데. 그럼 그 시대 아낙들은 뭐지? 한동안 먹먹했었다. 소설은 어쩔수 없이 개인 중심의 사건전개지만 우리는 개인을 몰고가는 사회를 들여다봐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착취당하는건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다. 밖에선 힘 한번 못쓰는 남자들이 집에오면 자기 아내를 개패듯 패고, 아내 몸뚱아리로 먹고사는 일이 비일비재한것이 그 시대 남자들이 몰상식해서인가? 양상은 다르지만 우리사회에서도 약자에 대한 착취는 여전하다. 비정규직/청년실업 문제도 그렇고ㅡ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노예를 생산하지 않으면 지탱되지 않는다는 명제가 다시 되풀이 된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노예의 처우 개선'이 아니라 '노예 없이 살아가는 법'이다.

표지의 나란히 선 세 시골소녀들이 정겹다. 고개 돌리면 까무잡잡한 얼굴에 얼굴 가득 웃음을 흘릴것 같은 그네들. 이 단편들이 보여주는 삶들은 결코 유쾌하지도 깔끔하지도 않은 비루함 그 자체지만 그 속에서도 웃음을 찾고 사는 방법을 터득해가는 질긴 생명력만큼은 여실히 드러난다. 아마 삶의 비린내가 확 풍길것 같은 이 현실성이 지금도 꾸준히 읽히는 이유일게다.  

* 장장 50페이지에 걸쳐 용어해설이 덧붙여있다. (순전히 편리함 때문에) 후주/미주보단 각주를 선호하는 터라 뒤를 들춰보며 읽는것이 영 불편했다. 마치 '작가의 의도를 남김없이 파악하려'용쓰는 듯이 느껴지기도 해서 나중엔 몇개만 찾아보곤 순전히 감으로 알아넘겼다. 중고등학생들도 읽을 수 있으니 자세히 설명하려 애쓴건 좋으나 '톨스토이, 버스걸, 줄창, 시래기'이런 말들까지 풀어놓은것은 지나친듯 싶다. 단어 수를 줄이고 각주로 처리했으면 좀 더 편하게 읽을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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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9 23: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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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0 12: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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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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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거짓말 안보태고 쉬지않고 죽 읽었다. 사실 두시간이면 다 읽을 분량인데 남은 쪽수가 아쉬워 지는책은 참 간만이다. 빠른 스토리 전개와 육두문자의 남발, 과잉되지 않은 감정선들이 좋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득이의 독백과 짧은 대화들의 연속이다. 마치 몇권의 만화책을 연달아 읽은 느낌.

'완득이'라는 촌스러운 이름. 그리고 구질구질한 동네와 꾀죄죄한 사람들 이야기. 장애인/이주노동자 등 다소 동정/감정과잉으로 이어질수도 있는 소재지만 그들의 아픔을 '까발리지'않는다. 가식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 파헤치지도 않고 딱 적당한 수준까지 그저 보여준다. 없이 사는 사람들의 싸우면서 엉기는 끈끈한 정을 실감나게 그려낸다. 이래야 된다는 당위나 저러면 안된다는 비난도 없다.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있을뿐이다.

김려령이란 작가 ㅡ 여성 작가인데 표지 그림은 지극히 남성적이라 처음엔 갸우뚱했었다. 천상 무뚝뚝한 남자일것 같은 '완득이'캐릭터 때문에 '남성적 성장소설'이 아닐까 해서. 육두문자가 남발하고 섬세한 감정묘사의 생략은 분명 '사춘기 소녀취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화 '친구'나 '사랑'스타일은 절대 아니다. 등장인물도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만 - 특정 캐릭터를 가진 여자는 딱 세명 등장한다. 완득이 엄마/정윤하/정윤하 엄마 - 여성 독자들에게도 분명 술술 읽힐것같다. 암튼 능력있는 작가다.

완득이와 윤하의 관계가 흔한 러브스토리로 이어지지 않는것도 좋고, 킥복싱에서 눈물겨운 역전승이 없는 것도 담백하다. 딱 거기까지다. 만약 주변에 이런 아이/친구가 있다면 말없이 응원해주고 싶다. 공선옥 작가의 후기가 실감나게 와닿는다.

* 선물해주신 웬디양님 고마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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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4-07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제이드님 짱이다!!

Jade 2008-04-07 01:25   좋아요 0 | URL
ㅋㅋ 올리자마자 발견하신 웬디양님도요 ㅎㅎ

다락방 2008-04-07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Jade 님. 이거 너무 좋지요? 저도 짱 좋았어요!! >.<

Jade 2008-04-07 10:51   좋아요 0 | URL
ㅎㅎ 이렇게 빨리 읽고 리뷰쓴책은 처음이예요 ㅎㅎㅎ

2008-04-07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07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 삼성은 무엇으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가
프레시안 엮음, 손문상 그림 / 프레시안북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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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왕국'의 '게릴라'들이라니. 제목이 참 도발적이다. 삼성이 대한민국을 이끄는 기업이란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이 '게릴라'들은 삼성을 무너뜨리려 하는가? 이 책이 주목하는 일곱 게릴라들 역시 '삼성'을 사랑한다. 그들이 허물고 싶은건 '이건희왕국'이다. 김상조교수는 삼성의 비자금이나 분식회계 등 온갖 편법 행위는 경영권승계를 위한 것이라며 문제의 핵심은 '이재용'이라 지적한다. 간간이 등장하는 만화는 거의가 이건희회장 풍자다. 기자들 앞에서 '삼성을 범죄집단으로 몰고가는 여론'을 질타했던 이회장의 당당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얼마전 '김앤장 저자간담회'에서 장화식씨가 말하길, 삼성이 아무리 권력이 세다고 해도 '삼성이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있'는 김앤장 앞에선 함부로 하지 못한단다. 그나마 삼성이 '드러난 권력'이라면 김앤장의 권력은 비가시성이라 더 문제된다나. 암튼 동맹군답게 김앤장의 '회전문인사'는 삼성이라고 예외일리 없다. 삼성 - 김앤장 - 고위관료의 삼각동맹이 한국 경제의 숨겨진 트로이카였나보다. 이명박 캠프에 영입됬던 친삼성인재들의 입김 때문인지 '금산분리완화'가 주요 공약이었는데 이쯤되면 '이명박 신화'는 삼성과 김앤장 그리고 주요언론이 빚어낸 그야말로 "만들어진 신"이라는게 훤히 보인다. 뭐눈엔 뭐만 보인다고 온 국민들이 건설회사 비정규직으로 보이시는건지 꼭 몇건씩 사건을 터뜨려 무지 몽매한 국민들에게 '신성한 훈계'을 내려주시는 행위자시여!

삼성 - 정확하게는 이건희 회장 일가 - 이라는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일곱 게릴라들의 외로운 투쟁을 차례로 다룬다. 워낙 많은 사건들에 연루되어 있지만 몇 개의 핵심사건 위주라 중복되는 내용이 많다. 각 장마다 관련된 사건들을 요약하고 뒤에 인터뷰가 실려있다. 첫 부분은 김용철 변호사가 사제단을 찾아가기까지의 말 못한 사연들이 많다. 오죽했으면 사제단 신부들이 "그간 쌓아온 신뢰/명성이 무너질까 고심했을까. X-파일 보도로 고초를 겪은 이상호 기자나 감옥 신세를 졌던 김성환 노조위원장의 사례와 같이 놓고 보면 힘없는 개인에게 가하는 삼성의 압박이 얼마나 치졸하고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지 잘 드러난다. 거기다 주류 언론은 얼마나 잘 영합해 주시는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꼴이지만, 계속하다보면 바위에 계란썩은내라도 나지 않겠냐며 희망을 잃지않는 김성환 위원장의 말이 인상적이다. '불패신화'라는 무노조 경영에 대한 패배의식, 삼성이 대한민국 위에 있다는 허위의식에 찌든 삼성 노동자들이 이 사태로 인해 즉각적인 행동을 취하진 않을것이라 지적하면서도 "한순간 터지면 걷잡을 수 없을것"이라며 결의를 다진다. '저 놈 또 싸운다'가 아니라 '후손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구나'라고 인정해달라는 그의 말이 왠지 서글프기도 하고. 삼성 특검이 진행되면서 '삼성'에 대해 고민하는 '삼성맨'들이 조금씩 늘어난다던데. 당장 만족할만큼의 변화는 없을지언정 조금씩 바뀌고는 있나보다. 이런 책이 나온 걸 봐도.

책을 가로지르는 논지 중 하나는 '삼성은 좋은데 이씨 일가의 지배구조는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물론 불법적인 경영권 승계도 문제지만 ㅡ 그럼 '삼성'이라는 대기업은 마냥 좋은것일까? 국가 경쟁력을 높여주니까? 혹은 '대한민국'의 자부심을 높여주니까? 이왕 불거진 김에 시장/기업위주의 경제/사회 전반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면 좋겠다. '한국 기업을 키워주지 않으면 외국계 자본에게 넘겨주란 소리냐'는 감정적 동조에 휩쓸리지 않도록. '국익'의 허구성에 대해 ㅡ "세상은 원래 그렇다"라는 패배주의 말고 무언가 바꿔나가는 계기가 되도록 ㅡ

'법률사무소 김앤장'과 더불어 지금의 한국 경제를 보여주는 지침서 같은 책이다. 이런 책은 출판되었다는 것 자체로 - 성역을 깨뜨리는, 좀 더 구설수에 오르도록 만들어 주는 계기로서 - 긍정적인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 눈에 띄는 오타 : 심상정 의원 편 p.187에 "김영모 김앤장 합동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라고 나온다. 심상정 의원 인터뷰에서는 "김영무"라고 정확히 나오지만. 단순오타려니 했는데 뒤에 인물색인에도 김영모/김영무가 따로 나온다. 단순 실수일까,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김앤장의 비가시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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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6 18: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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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6 22: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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