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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현대 화가들 - 대표작으로 본 12인의 예술가
다카시나 슈지 지음, 권영주 옮김 / 아트북스 / 2005년 6월
평점 :
근래에 현대미술과 관련된 책들을 잡다하게 읽고 있다. 그냥 손에 걸리는 대로 읽는 편인데 개중에는 좋은 책도 있고 아쉬운 책도 있다. 물론 설치미술이나 행위예술 또는 비디오아트와 관련된 분야가 포함되어 있고, 이 분야가 현대미술에서 그 위세를 불려 가서 그런지 몰라도 최근에 외국에서 출간된 책 중 이쪽 분량이 상당히 늘고 있다.
나는 여전히 회화나 조각 이외에는 불편한 시각이 많아 실험성이 짙은 설치미술, 행위미술, 비디오아트 등이 포함된 책은(그것도 많이!) 아직은 별로라는 느낌이 강하다. 뭐 어째겠는가, 내 취향이 그런데. 이렇게 읽어 가는 와중에 만난 책이 <최초의 현대화가들>(아트북스, 2005)이다. 일본 작가가 쓴 ‘현대미술가론’ 쯤 된다.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다.
저자는 다키시나 슈지. 1932년 생.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관장을 역임한 현대미술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동경대 졸업 후 프랑스 파리1대학과 루브르 미술관에서 서양 근대미술사를 전공했다니, 믿고 볼 수 있는 서양미술 전문가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쓴 책을 신뢰하는 편인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전문가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평이하지만 수준 높은 작가론 책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화가를 선별하고 정리한 저자의 시각이다. 누구나 알 만한 작가와 생소한(?) 작가의 비율이 5:5 정도라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모르는 작가는 건너뛰고 아는 작가만 읽어도 좋다. 나중에 생소한 작가 순으로 읽어도 된다. 우리나라에서 잘 다루지 않는 움베르토 보초니, 에밀 놀데, 쿠르트 슈비터스, 프랑시스 피카비아 등의 대표작을 잘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반갑고 귀한 책이다.
“예술을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도 작품이 출발점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작품은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동시에 예술가는 작품으로 비로소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 송이의 들꽃에 우주의 신비가 숨어 있듯이, 한 점의 작품에 예술가의 내면세계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단 한 점의 작품으로 예술가의 전모를 논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머리말’ 중에서
이 책의 집필 의도를 가장 잘 나타낸 부분이다. 화가의 대표작 한 점을 매우 심도 있게 분석하여, 왜 최초의 현대 화가로 자리매김 되었는지 논평하는 책이다. 그런데 쉽다. 우리나라 평론가 그 누구도 본 책의 저자처럼 쉽고도 간결하게 작가의 대표작으로부터 작가의 전모를 잘 드러내는 글을 본 적이 없다. 그랬다면 책을 읽고 그 누가 연상됐겠지.
그도 그런 것이 이런 방식의 작가론은 쓰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 한 점의 작품을 통해 작가의 내면세계와 작가가 지향했던 바를 간결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내공이 깊어야 하기에 그렇다. 폴 세잔의 대표작 하면, 누구나 사과를 떠올린다. ‘세잔의 사과’라고 회자될 만큼 미술사에서 세잔의 사과 그림은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세잔의 대표작은 <대수욕도>이다. 208×249cm의 대작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진짜 나 자신의 그림이 될 테지.”라고 말할 정도로 고심해서 그리려고 하던 ‘나 자신(세잔)의 그림’. 지금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1899년부터 1906까지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을, 이 대작을 완성하기 위해 바쳤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화가의 대표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그 대표작이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림을 보는 방식을 배울 수 있어 좋다. 그림을 좋아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가장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이 다름 아닌 그림을 보는 방식인데, 이걸 가르쳐 주는 책이 별로 없다.
그림을 보는 방식과 그림이 왜 좋은지 그리고 왜 작가가 이 그림을 그렸는지 알려면 미술관에 가서 도슨트 설명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혼자 미술책을 보며 그림 보는 방식을 스스로 깨치려면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린다. 매우 답답하고 지쳐간다. 헌데 이 책은 그런 고민을 한 방에 날려주는 아주 고마운 책이다. (다음과 같은 서술을 보면 왜 고마운지 단박에 알게 된다.)

“그에게(브란쿠시에게) <공간속의 새>는 단순히 ‘조형적’인 아름다움만을 노린 작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새의 비상’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브란쿠시는 이 작품에서 다름 아니라 새의 존재와 본질을 하나로 종합하는 일을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p113)
책의 부제는 ‘대표작으로 본 12인의 예술가’. 12명의 예술가를 선별해서 대표작 12점만을 소개했으면 우리나라 저자들의 책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12명의 대표작 12점과 그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전 작품들, 그리고 연관된 다른 작가의 작품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아 본작이 탄생했는지 그림의 이력을 볼 수 있다는 거.
본 책에 수록된 12점의 대표작들은 화가들이 없던 걸 그린 게 아니었다. 이전 선배 대가들의 작품에서 어떤 구성과 부분을 차용하여 자신만의 색깔로 변형해 표현한 결과물이었다. 세잔에게 있어서는 푸생의 <플로라의 승리>가, 피카소에게 있어서는 오귀스트 프레오가 그리고 조르조 데 키리고에게는 뵈클린이 있었다. (물론 클레나 슈비터스는 이와는 좀 달랐다.)
그래서 미술에 관심이 있지만 그림은 잘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지침을 주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걸려있는 그림들을 볼 때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봐야 할지 알 수 있다는 말씀. 그만큼 유익하고 쉽고 알찬 책이다. 아주 좋은 책인데 한 부분에서 오류*가 발견되어 아쉽게 별 하나를 뺐다. 그래도 누구에게나 강추할 수 있는 책이다. (끝)
* 104p 피카소 <게르니카>를 논한 부분 ; “피카소에게 이와 같은 화면 구성의 힌트를 준 것은 역시 죄 없는 여자들과 아이들의 학살을 테마로 한 로마파의 거장 오귀스트 프레오의 부조 <학살>이었다.”
여기서 저자는 프레오를 로마파라고 했는데, 찾아보니 프레오는 낭만주의 조각가로 나온다. 도대체 로마파는 어디 유파인지 모르겠다.
<<덧>>
사실 이런 책을 오래전부터 기다려왔다! 12인의 현대화가가 누구인지 직접 책을 읽고 확인하시길!
1. 이 책에 수록된 쿠르트 슈비터스를 보고 그의 독일어 작품집을 구매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영향을 깊게 받아 나의 조형 언어를 형상화하게 됐다.
2. 에밀 놀데는 내가 그리 좋아하는 화가는 아니지만 지크프리드 렌츠의 <독일어 시간>의 모티브 화가라 해서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