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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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

나는 럿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책들은 좋아한다. 사상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저서를 좋아하는 유일한 이유는 저서들이 모두 쉽다는 거. 나는 그의 <서양철학사>와 고 박종홍 선생의 <철학개설>로 철학에 입문했다. 그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는 어떤 것을 나누기를 좋아하고 싫고 좋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일반사람이면 취향이거니 하겠지만 사상가쯤 되면 자기가 싫어하는 것에 맹렬한 비판을 논리적이고도 철학적으로 가하기 때문이다. 그가 <서양철학사>로 책의 이름을 명명한 것도 동양 사상과 구분되는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동양철학사를 인정해주는 것같은 인상이지만 뒤집어 보면 논의할 가치가 없어서 빼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행복의 정복 읽기]

 여기 <행복의 정복>이라는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할 정도로 오만한 책이 있다. 행복의 정복이라니...하지만 럿셀은 책의 제목을 정할 때 항상 책에서 그 이름을 정한 이유를 밝힌다. 이 책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방자한(?) 제목을 달 때에야 충분히 납득을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이름을 붙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남자나 여자는 피할 수 있는 불행과 피할 수 없는 불행, 병과 심리적 갈등, 투쟁과 가난의 악의로 가득찬 세계 안에서, 각 개인에게 맹공을 퍼붓는 불행의 무수한 원인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보면 행복은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우연적으로 주어지는 행운도 아니다. 운이 대통하여 행복의 자기 수중에 그냥 굴러들어오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을 럿셀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무수한 불행의 원인을 극복한다’라는 말 속에는 행복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요, 행복은 정복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게 이 책의 핵심사상이다.

 <행복이 정복>은 럿셀이 노년기로 들어설 무렵에 출간한 책이다. 58세 때인 1930년에 출간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삶의 원숙미와 지성이 곳곳에 묻어 있다. 영국 경험론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상가 답게 풍부한 생활의 경험을 통해 행복의 본질을 끌어내고 있다. 럿셀은 현대인은 왜 행복할 수 없는지.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묻는 동시에 현대인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럿셀은 너무도 쉽고 명쾌하게 규명한다. 문제의 핵심을 잡아 결코 형이상학적이거나 현학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생활 속에서 불행의 원인을 치유할 방법을 찾고 회복해야 할 행복의 원리를 일깨워 준다.

그렇기 때문에 책의 처음에 불행해 질 수밖에 없는 원인을 고찰한다. 럿셀이 진단한 현대인의 불행의 요인은 경쟁, 권태와 자극, 피로, 질투, 죄악감, 피해망상증, 여론의 두려움 등이다. 이와 같은 불행의 요인을 검토한 다음 럿셀은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인생에 적극적이고 외부사물에 흥미와 열정을 갖고 대하고, 서로 진정한 사랑을 공유하며 자신의 사업을 갖고 있는 한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실존주의적인 비좁은 태도를 버리고 다양한 세계, 흥미가 가득한 세상사에 관심을 가지라고 한다. 그래야 번민과 우울함과 같은 조그만 불행을 능히 초극할 수 있다. 결국 인생은 살만하다는 신념, 외부의 광할한 세계야말로 우리 행복의 원천이라는 외부지향적 생활태도 그리고 어떤 불행이 닥쳐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용기와 낙천적인 인생관만 있다면 누구나 행복에 이를 수 있고 이러한 것들은 각자의 노력에 의해 가능하다고 한다.

 책장을 술술 넘기면 너무도 쉽고 평범한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생활 속에서 한 번쯤 생각했던 것을 자명하게 제시함으로써 뛰어난 설득력을 제시하는 책이다. 그도 그럴것이 60평생 행복을 정복하기 위해 럿셀 자신이 스스로 경험하고 사색한 철학적 흔적이 고스란히 글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험적 사상이 삶 속에 반영되어 체험적인 진술의 지혜가 담겨 있기에.

[책에 대한 비판]

 방대한 행복의 논증으로부터 결론적으로 럿셀이 느끼는 참된 행복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행복한 인간이란 무엇일까? 마지막 장에 보면 럿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행복의 일부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자기 자신에 달려 있는 부분을 고찰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행복은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외부적 여건이 마련될 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행복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사회의 조합이라는 견해가 도출된다. 이게 진정한 행복의 길이라고 럿셀은 생각하는 거 같다. 하지만 이것은 럿셀이 한 단면만을 보고 있다는 게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 일반적으로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부환경이 좋아도 어떤 이유로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너무도 많다. 또한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 또한 많다. 어떤 기관이 조사한 결과만 보더라도 가장 못사는 나라의 행복지수가 선진국의 행복지수보다 높다는 사실은 외부적 환경보다는 개인적으로 느끼는 행복에 대한 기대감이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인 거 같다. 아무래도 럿셀의 이 부분에는 동의할 수 없다. 

 계속해서 마지막 장에 럿셀이 말한 바를 따라가 보면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음을 본다.

“참된 행복은 현실도피의 수단인 유흥이나 일시적 오락이 아닌 무엇보다 인간과 사물에 대하여 호의적인 관심을 느끼는 것이다. 외부의 환경이 그다지 불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정렬과 흥미가 내부로 향하지 않고 외부로 향하게 될 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살아가고 자유로운 애정과 광범위한 흥미를 갖고 이를 통해 자기의 행복을 소유하는 자요 남에게 흥미와 애정의 대상이 되어 행복을 느끼는 자이다. 행복한 인간은 자기가 사회의 통일이 이루어 지지 않아 괴로워하는 일이 없다. 그의 인격인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분열되지 않으며 세계에 대하여도 대립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우주의 시민’ 이라고 생각하고 우주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마음껏 향락하며 자기들 뒤에 오는 생명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함으로써 죽음에 대하여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 이처럼 생명의 큰 물줄기와 본능적으로 깊이 결합될 경우에 우리는 가장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p368) 

 외부적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가? 그런 사람만이 우주적인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마음껏 향락할 수 있는가? 럿셀은 자기 자신으로 침잠하는 실존주의를 극렬하게 비난했다. 옹졸하고 생산성이 없는 무용한 것이라고까지 폄하했다. 럿셀의 주장대로 자기를 분석해 보아 나올 것이 없다면 문학에서 실존주의가 꽃피울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실존주의로 인해 문학은 더욱 풍부해 졌으며,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을 깨달아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은 외향적 인간만 있는 게 아니다. 자기 자신을 모를 때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것을 염두 해 두지 않고 내부지향적인 사람을 매도하는 것은 논리적이지도 철학적이지도 않아 보인다.

 럿셀은 이 책에서 참된 행복의 전제를 정렬과 흥미가 외부로 향해지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정치를 인간이 참된 행복에 이르기 위한 최고의 것으로 보았다.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정치라고 서슴없이 결론 내렸다. 거기까지의 럿셀의 추론을 반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럿셀은 행복하지 못했다. 말년에 궁극의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 참여한 정치는 불행으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럿셀은 자기 자신의 주장을 그 자신이 멋지게 반증했다. 행복의 정복이라는 제목이 무색할 정도.

 어떻게 럿셀은 행복의 정복이라는 오만한 타이틀을 붙였을까? 그렇게 까지 확신이 들었을까?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빛나는 혜안을 보여줬지만, 다양한 인간의 한 단면만을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착각한 그 대전제가 잘못된 것을 그는 몰랐을 것이다. 왜 그렇게도 실존주의를 싫어했는지..왜 그렇게도 외향적인 면에 집착을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럿셀의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생활 속에서 행복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는 그 탁월한 비교와 혜안이 럿셀의 명성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형이상학적인 행복이라는 관념을 너무도 쉽고 평이하게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게끔 해 준 이 책은 고전으로 남아 여전히 꼽십어 볼 수 있는 그런 책이라 할 수 있다.

[책을 덮으며]

사람들은 항상 말한다. '그때가 좋았다'라고. 그때는 곧 과거이고 항상 현재와 대비해서 과거를 평가한다. 그래서 좋았다면 '행복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 아닐런지.

 현재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에서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현재를 느낄 수 있고 즐길 수 있으며 그냥 보낼 수는 있지만 현재 행복을 누릴 수는 없을‘거라 생각한다. 행복은 매우 미래지향적이라서 에른스트 블로흐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선취하는 의식'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기에 일종의 유토피아니즘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현재 행복하다고 한 순간 곧 과거가 되 버리기에, 아~나 행복해~라고 말하는 순간 행복은 다시 저 멀리 있게 된다.(시간을 붙잡아 멜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리고 시간과 함께 과거로 빠져나가 버린다.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순간에 충실하고 순간을 의미 있게 살며 깊이 느낄 수는 있지만 그런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어느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수많은 철학자들이 행복을 찾아 헤멨지만 '아파테이아'(정념이 없는 마음의상태)와 '아타락시아'(궁극적 쾌락), 물아일체..라는 개념만을 말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행복을 정의하고 그에 삶을 맞추는 것은 럿셀처럼 불행을 초래하는 거 같다.(말년에 정치에 참여하여 불행했다) 정의할 수 없는 걸 애써 정의해서 그렇게 행복한 삶을 만드게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그것도 모자라 행복의 정복이라니...정말 터무니 없다고 생각한다. 굳이 행복을 말하지 않더라도 자기가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건 아닌지...생각해 본다. 행 불행을 나누는 거 자체가 ‘행복’에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노자는 도덕경 첫 장 첫 구절에 '도가도비상도'이라 했다.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도가 아니라는...절대적 진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행복도 그와같은 게 아닐런지....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말들하는 비트겐슈타인(아이러니 하게도 비트겐슈타인은 럿셀의 제자였다)이 암으로 죽어가면서 한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을 거 같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사람이 이땅에 와서 잘~ 살다 간다고' 죽을때 이런 정도의 말을 할 수 있는 거....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가 있다면 바로 이와 같은 태도가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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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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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반성적 사고로서의 본다는 것 

책의 내용을 간단히 하면 다음과 같이 도식화 시켜 볼 수 있다.

도시에 사는 정상적인 사람들 ----> 차츰 눈이 멀어서 수용되는 공간 ----> 백색의 질병의 전 도시로의 확산 ----> 회복; 의사의 집

책은 반성적 사고로서의 본다는 것을 가르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이 있다. 성철스님이 해탈하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도 생각하는 나의 존재의 확실성을 빼고는 전부 회의를 해보고 나서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양을 시작하면 모든 것에 회의감이 든다고 한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기존에 있던 것들이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다. 산은 산이 아닌거 같고 물도 물이 아닌 거 같다. 그러다가 깨달음을 얻게 될 때 사물의 본질을 보게 된다. 깨달음을 통해 보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은 깨닫기 전에 보통 사람이 보는 산과 물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승화된다. 매일 보던 산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자체만으로 고맙고 즐거운 것, 자연속에서 모든 이를 이롭게 하는 그 자체로서의 산. 물은 거기 있어야 모든 것을 이롭게 하고 자연스러운 그 자체로서의 물. 결국 성철 스님이 한 말은 반성적 사고로서의 사물의 본질을 봐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눈이 있어도 이런 것을 볼 수 없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지만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없는 우리들은 눈먼 사람들과 하등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여기 한 편의 멋진 허구가 이 반성적 사고를 가르쳐 주고 있다. 책을 덮고서 무수한 논의들과 상념들이 교차한다. 책 한 권에 이리도 심오한 생각들을 담을 수 있다니...사라마구라는 작가의 역량에 놀라고 말았다.

2. 인식의 근본으로서의 본다는 것

책을 본다. 그리고 이해한다. 지식을 축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문명을 건설한다. 인간은 보는 것으로부터 일차적으로 배운다. 전통적인 인식론의 관점으로부터도 우리는 보는 것으로부터 대상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인식하는 것이 진실은 아니다. 백미러로 뒤에 있는 차를 보면 현실보다 가깝게 보인다. 물 속에 담겨져 있는 젓가락은 휘어져 보인다. 직사각형의 책상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평행사변형으로 보였다가 사다리꼴로도 보인다. 눈에 의한 착시 현상은 얼마나 많은지 셀 수조차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여지는 것이 진리인양 믿으며 살고 있다. 오히려 눈 먼 장님이 나을 수 있다. 적어도 왜곡된 현실의 모습은 보지 않으니..

사라마구는 눈을 멀게 함으로써 인식의 근본에 도달하는 바른 눈을 가질 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바로 보고 올바로 생각하라고..

3.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눈

눈이 먼다. 모든 인간의 기능 중에서 눈만이 제기능을 하지 못할 때 인간은 어찌되는가?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것이 엄청난 착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오직 눈만이 제 기능을 잃어버렸을 때 모든 인간은 동물보다 못한 존재로 떨어지고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순식간에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린다. 생각해보라. 단지 눈만이 제 기능을 못할 뿐이다! 눈에 뵈는 게 없으면 막 살아가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해보라! 그리고 그것이 현실처럼 구현된다고 생각해보라! 인간의 존엄성 운운하기가 우스워진다. 눈이먼 그들은 이전에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던 인간이 아니었다. 생리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을 때, 이 땅에서 지옥은 구현된다.

4. 눈에 의존하는 인간의 문명-가치의 역설

사실 인간의 문화와 문명은 거의 눈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멋진 디자인, 공간을 활용하기 위한 건축양식, 보기 좋은 모양을 낸 음식, 책, 여행, 도시, 영화, 그림, 절경 등 모든 게 눈에 의존하는 것들이다. 보는 것이 즐거운 모든 것들이 문화와 문명과 관련된다. ‘아름답다’라고 평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눈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사실에 흠칫 놀라게 된다. 바로 눈이 멀면 이 모든 것들이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가치를 평가하는 일도 거기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무가치하게 된다. 솔직히 이런 것들은 없어도 되는 것들이다.

 가치의 역설이라는 것이 있다. 경제학의 빌어먹을 개념이다. 생활에 전혀 필요하지 않은 다이아몬드나 명화의 가격이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물이나 공기보다 훨씬 비싼 이유는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압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희귀한게 비싼거라는 거. 눈이 멀면 가치있는 것은 가치없어지고 평소 무가치 한 것이 가치있는 것으로 탈바꿈한다. 가치의 역설이 바로 잡힌다고나 할까. 생존에 필요한 것일수록 귀중한 것이 된다. 먹고, 입고, 배설할 공간. 가장 기초적인 생리현상을 충족시키는 것이 가치의 최 일선에 선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최고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생존만을 위한 상황에서 걸리적 거리는 불편함으로 전락한다. 필요없다는 것이다.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켜야할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없게 된다. 당장 굶어 죽을 판국인데, 무슨 얼어죽을 인간의 존엄성 운운 한다는 말인가. 가치의 전복! 그러고보면 눈은 가장 일차적인 가치를 재는 척도인지도 모른다.

 특히나 인류 문명을 지탱해 주고 지속시켜 주었던 날짜와 시간이란 관념이 공허한 개념으로 날아가 버린다.  눈먼 자들에게 낮과 밤의 변화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지금이 몇 시이고 몇 일인지 모른다. 살아가는 기준이 순식간에 없어져 버린 삶. 표준시를 알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했던 인간 역사의 모든 노력들이 한 순간에 하찮은 것으로 전락한다. 그들은 몇 시에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른다. 그리고 셀 수도 없으니 수의 과념도 없어진다. 눈먼 자들은 그런 불쌍한 존재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도 없고 가치를 알 수 없는 존재에게 인간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무색할 정도이다.

5.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

우리는 너무도 불필요한 것에 집착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불필요한지 조차 모르며 살고 있다. 우리의 육체적인 기능이 하나씩 사라질 때 그것과 관계된 가치는 하나 씩 사라진다. 생존에 필요없는 것들을 우리는 너무도 가치있게 생각하고 거기에 매달려 살고 있다. 이 소설은 그런 것들이 무의미 함을 알려준다.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의 삶의 변화를 가르친다고 할까. 눈이 멀면 우리가 그렇게도 가치있게 생각하던 상당수가 무용지물이 된다. 그런 것들은 생존에 아무 쓸모도 없고 삶을 연명하기 위한 어떤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사회적 지위, 기능, 어떤 것도 필요 없게 된다.

6. 이 소설의 등장인물에 이름이 없는 이유

 이 소설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름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의사, 의사의 아내, 처음 눈이 먼 자, 그 사람의 아내, 검은 색안경을 낀 여자, 눈에 안대를 한 노인, 사팔뜨기 소년 등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왜그럴까? 그도그럴것이 눈이 멀면 이름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름은 사물에 붙여진 기호나 다름없다. 아무개를 확인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얼굴과 이름이 매치되어야 기억된다. 진달래를 진달래라고 하기위해서는 진달래라는 대상이 눈에 보여야 하고 그 대상에 진달래라는 기호가 일치해야만 우리는 안보고도 그것을 떠올릴 수 있다. 중요한 건 처음에 그 기호에 맞는 대상을 봐야한다는 거. 그렇지 않으면 매칭할 수 없고 진달래를 떠올릴 수가 없다. 눈이 멀어버린 상태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매칭시키기란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장님에게 최신의 가전제품을 설명해주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들에게 각각의 명칭은 아무 의미가 없다. 들을 수 없으면 사물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볼 수 없어도 그 대상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름은 숫자와 같은 기호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 행위를 가장 잘 나타내는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더군다나 모두가 눈이 먼 경우라면 더 말해서 뭘할까.

7. 눈이 멀어도 여전히 건재하는 것들

하지만 눈이 멀어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있으니 언어와 권력이다. 권력은 인간이 인간이 아닌 존재로 전락해서도 여전히 그 파괴적인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권력이 있는 자가 여전히 생존할 확률이 높았다. 적자 생존에서 남을 딛고 살아갈 수 있는 힘. 권력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언어는 더욱 중요해 진다. 보이지 않는 불편함을 언어에 의해 그나마 해소할 수 있기에. 그나마 언어로 말할 수 있고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최소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의 마지노선을 지탱해 주고 있다.

8. 결론

이 소설의 백미는 모두가 눈이 먼 상태에서 단 한 사람만 볼 수 있다는 설정이다. 소설은 눈먼자들의 모든 행위를 의사의 아내 눈을 통해 고발한다. 때로는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때로는 의사의 아내 눈으로. 인간 본성의 모든 추함과 악랄함과 더러움의 극치를 본 단 하나의 눈은 부끄러운 눈이다.

 부끄러운 눈은 반성적인 눈이다. 눈이 멀었다 다시 뜬 사람들은 결코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없다. 눈 먼 사람들은 결코 인간 본성의 사악함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눈은 부끄러운 눈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라마구는 이 소설을 통해서 눈을 떠도 보지 못하는 인간들의 무리에 속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다. 눈을 뜨고 있으면 사물의 본질을 바로 보라고, 마음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라고, 그러면 참 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한다.

 비트겐 슈타인은 '내 언어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우리에게 있어 내 눈은 내 세계의 한계이다. 우리들은 아는 만큼 보고, 본 만큼 안다. 하지만 사마라구는 그것을 뛰어 넘으라고 이 눈먼자들의 실험을 통해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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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을 위한 변론 - 세계 최고의 석학이 펼치는 공직에 대한 변론
찰스 T. 굿셀 지음, 황동원.박수영.김동원 옮김 / 올리브(M&B)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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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제는 사회학과 경영학 그리고 행정학의 주요 연구테마이다.

대학에서 관료제라는 수업을 들으면 관료제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병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무사안일, 복지부동, 훈련된 무능 등 관료제를 비판하는 어휘는 수십가지다. 현대사회에서 관료제는 병리적 진단을 받은지 오래다.

거기다가 정부가 더해진 정부관료제는 곧 부패와 동일시 되는 것까지 전락했다. 파킨슨의 법칙, 밀레의 법칙 등 정부관료제를 묘사하는 부정적인 법칙들이다.

한마디로 관료제는 사람을 무능하게 한다는 것. 생산적인 일을 하는 대신에 대부분의 시간을 관료제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 불필요한 일을 한다는 것. 정작 해야할 일을 안하니 특권의식과 권위주의 의식이 생겨 시민과 유리된다는 게 현대 정부관료제를 보는 통설적인 시각이다.

헌데, 여기 겁대가리를 상실한 학자가 있다. 바로 찰스 굿셀이라는 버지니아 주립대 폴리테크닉  행정학과 교수가 그 장본인. 오래 전 그가 쓴 <공무원을 위한 변론>(올리브. 2006)이 2006년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 되먹지 않은 글을 쓰는 나도, 학부때 관료제 수업을 들으면서 도대체 관료제를 옹호하는 학자들의 정신구조가 무척 궁금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행정학과 사회학 교과서에서 이 책이 언급됐을 때 상당히 흥미가 갔다. 굿셀 교수의 책을 거들떠 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책을 구할 수 없었다.(비싼 돈 주고 원서를 구입할 수 없지 않은가? --;;) 그런데, 작년에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온 것이다~

굿셀교수가 주장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모든 사람들이 관료제를 비판하고 있는데, 진짜 소수의 사람들만이 관료제를 옹호하고 있다. 위르스톤 카우프만, 밀워드와 레이니 그리고 찰스 굿셀이 바로 그런 학자들이다. 굿셀이 조명받는 이유는 논문에서 끝나지 않고 책으로 공무원을 변호했기 때문이다.

좀 무모해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는 책의 1장 처음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관료제를 변호하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이 책의 저자는 분명 인간의 탈을 쓴 악마 대왕 루시퍼든지 아니면 정신 나간 사람이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오직 악마만이 악마를 변호하려고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하려고 하는 나의 성품과 정신상태에 관해 독자들이 가질지 모르는 이와 같은 의심이 사라지려면 이 책의 몇 페이지 정도는 넘겨야 할 것이다."

라고 우려섞인 푸념를 하고 있다. 그도그럴것이 우리나라에서 누가 이런 주장을 한다면 비판의 십자포화를 맞기 때문이다.

 

공직자는 시민의 삶을 조율하는 진정한 예술가다!
행정은 종합과학이며 예술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두 명제이다. 과연 그런가? 예술인지 쓰레기인지 어디 확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행정과 공직자가 모두 예술인지 노교수의 이 말도 안돼는 주장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미국 최고 석학 중 한사람이 펼치는 독보적인 공직에 대한 변론을 거들떠 보는 것도 교양을 위해 좋을 것이다~

 

이 책을 쓴 찰스 T. 굿셀에 대해서...

칼라마주대학을 거쳐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마치고 버지니아 폴리테크닉 주립대학교와 푸에르토리코대학교, 남일리노이대학교에서 교수로 제직했다. 그는 행정학과 더불어 라틴아메리카 문제와 공공건축 등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잇으며 이 책 이외에 <미국의 주의회 의사당>, <예술에 조명받고 영감받는 행정>, <시민공간의 사회적 의미>, <공적인 만남>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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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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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자살 시도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 천재 작가”

“청춘의 한 시기에 통과 의례처럼 거친 뒤 잊히는 작가”

“일본 데카당스 문학의 대표작”

“오시모토 바나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존경하는 일본 작가”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데 가장 뛰어난 작가”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얼마나 대단하기에 “우리를 위해 부(負)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라고까지 극찬할 수 있을까? 한없는 의구심에 휩싸여 그의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여러 저작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에곤 실레의 그림이 그려있는 민음사판 <인간 실격>을 골랐다.

한 번 읽었다. 불편했고, 주인공 요조가 보여주는 자기파멸적 삶에 나는 주저 없이 인간 실격 판정을 내렸다. 볼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불편한 뭔가가 켕긴다. 재독을 하고 삼독을 했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어떤 실체를 갖고 다가오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위선이라는 가면을 쓴 다른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요조는 그 위선의 세계와 타협하기 위해 ‘익살’을 연기하지만 번번이 좌절하고 불안에 떤다. 어떻게든 부조리한 사회와 인간을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반당하고, 결국 알코올에 중독되어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른다. 거듭된 동반 자살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요조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마음의 고향까지 잃어버린다. 정신병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외딴 시골집에서 쓸쓸히 죽음만을 기다리는 “인간 실격자”가 되고 만다.

<인간실격>은 작가 자신이 겪었던 충격적인 체험을 소설화한 작품이란다. 한 편으로는 자기 해명의 책으로도 불린다는데, 거듭 책을 읽은 지금 ‘나를 해명하는’ 책으로 다가왔다. 소리치지도 못하고 아파하는 내 순수가 요조라는 거울을 통해 여과 없이 비쳐지고 있었다. 불편했던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내가 내린 요조에 대한 가혹한 판단은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요조를 실격에 이르게 했을까. 바로 우리들로 대변되는 넙치와 호리키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요조를 보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와 다른 바보 같은 순수함의 원형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치라”는 예수의 말씀처럼 누가 요조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우리가 적어도 우리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나약함을 극복하면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요조에게 돌을 던질 수 있고 그의 삶이 인간 실격이라고 단호히 심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불안에 떠는 그 나약한 순수함 마저도 마주하길 꺼린다. 그래서 요조와 같은 사람을 보면 나약한 존재라고 서슴없이 비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가는 호리키와 넙치와 같은 인간들이기에.

가면으로 나약함을 가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내 순수함이 얼마만큼 상처를 받게 되는지는 모른다. 내 순수의 자아가 상처받아 너덜너덜 해질수록 내 가면은 더 두꺼워진다. 서로 두꺼워진 가면을 쓰고 아무 문제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세계가 바로 우리들의 세계일 것이다. 이 작품이 아직도 귀중한 보편적 가치를 갖고 계속 읽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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